가비지타임 2차 창작

[승재] 기다림의 과실 - 上

오메가버스 기반 알파x베타 승대재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형질인과 비형질인으로 나뉘는 세상에서 형질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같은 형질인을 찾게 된다. 알파는 오메가를, 오메가는 알파를. 물론 페로몬에 의한 본능적인 선택이긴 하나 오랜 시간 유전자에 새겨진 경험이기도 했다. 형질인과 비형질인의 만남은 끝이 좋지 못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러나 어떤 감정이나 욕망은 유전 법칙을 거스르고도 올라오는 법이다.

임승대는 제 처지가 조금은 비참했다. 저가 알파로 발현할 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승대네 일가친척 중엔 유독 알파였던 사람이 많았다. 중학교 즈음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호르몬 검사에서도 알파일 확률이 80%가 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직전에 알파로 발현한 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주변에선 부럽다는 시선과 말이 끊이질 않았고 임승대는 제법 우쭐해졌다. 그러나 본래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더 빠른 법.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이 붕 떠 있던 임승대의 기분이 순식간에 저 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건 머지않아 일어났다. 따지고 보면 임승대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형질인이라면 응당 하고도 남을 기대를 했을 뿐이다.

알파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이 오메가였으면 하고 바라는 게 잘못인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도 열에 아홉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형질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형질인들의 세계는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어찌 됐든 임승대는 진재유를 좋아하고 있었고, 자신이 알파로 발현한 이상 진재유가 오메가로 발현하기를 손꼽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다리던 소식이 좀처럼 들려오질 않자 임승대는 점점 애가 탔다. 그래서 저질렀다. 상대방이 먼저 밝히지 않는 이상, 형질에 관해 묻는 건 대단히 실례되는 행동 중의 하나였음에도 묻고야 말았다. 그러나 돌아온 건, 무심하다 못해 건조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응? 내 오메가 아니냐고? 아닐 거다. 아니, 아니다."

"...진짜?"

"진짜다. 우리 식구 중엔 그런 사람 한 명도 없었다."

진재유의 입에서 부정적인 단어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심장이 쿵 떨어지길 반복했다. 실망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시선이 자꾸만 갈피를 잡지 못 하고 흔들렸다. 그 탓에 임승대는 자길 보는 진재유의 낯빛이 변한 사실도 알지 못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타이밍 좋게 들어온 제안을 받고 임승대는 서울로 전학을 가버렸다. 그렇게 고백도 한 번 못 해보고 짝사랑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첫사랑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그 말이 영 허튼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인지 매일 밤 진재유 생각에 잠 못.... 이루지는 않았으나 종종 떠오르기는 했다. 주로 진재유가 만약 오메가였다면 우리 관계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허튼 상상이었다. 그러다가 잠이 들면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오메가 진재유가 꿈속에 나타나기 일쑤였고,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아침에 속옷을 적시며 깨는 나날이 이어졌다. 진짜 현타도 그런 현타가 없었다. 대체 진재유가 뭐길래. 그딴 개꿈을 꾸면서까지 목을 매고 있는 건지. 분한 마음에 저 좋다는 다른 오메가들과 연애도 해봤지만 그런데도 '임승대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오메가 진재유'는 방심하면 꿈에 나타나 겨우 다잡은 마음을 다시 들쑤셔 놓곤 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걸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말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그러는 사이에도 진재유가 오메가로 나오는 빌어먹게 야한 꿈은 불시에 그를 덮쳐오고 있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그 꿈'을 꾸었고, 찝찝한 채로 일어나 남몰래 기숙사 화장실에서 젖은 속옷을 빨던 중이었다. 그러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돌아보니 같은 학년 농구부 주전 노수민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턱을 괴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건 역시 호르몬 작용이 활발하다는 증거로군.' 이딴 소리나 지껄이면서 말이다. 임승대는 질색을 하며 다시 하던 손빨래에 열중했다. 옆에선 지치지도 않고 노수민이 묻지도 않은 온갖 잡지식을 떠벌리고 있었다. 어차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내용들이었으나, 문득 저 녀석이라면 그나마 뭔가 도움 되는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수민이 있는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서, 최대한 별거 아니라는 투로 임승대가 물었다.

"야, 내가 요즘 계속 같은 꿈을 꾸는데.... 이거에 대해 뭐 아는 거 있어?"

힐끔 돌아보니 노수민이 무척 흥미롭다는 듯 안경을 치켜올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예의 그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승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대해 알고 있나?"

"...됐다, 그냥 가라."

저새끼 또 시작이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두뇌파인 노수민은 승대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자기 지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무시해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마음속엔 일말의 기대가 남아있었는지 귀는 착실히 들려오는 정보들을 머릿속으로 보내고 있었다. 노수민이 말했다. 어느 저명한 정신분석학자가 말하길, 꿈이란 ‘현실에서 좌절된 욕망의 성취’라고 한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 그 꿈을 토대로 평소 무의식에 잠겨있던 욕망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임승대는 젖은 속옷을 비틀어 물기를 짜내며 미간도 같이 찌푸렸다. 꿈이 내 무의식이 반영된 거라고? 그렇다면 내가 진재유를....

"재밌는 점은, 인간은 꿈에서조차 욕망을 검열하려 든다는 거야. 그렇게 검열 된 욕망이 꿈속에서 사실과 달리 왜곡되어 나타나는 거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내가 진재유와 자고 싶은 욕망을 검열을 했다고? 그래서 진재유가 사실과 달리 오메가로 나온다는 소리? 애초에 검열을 했으면 안 나와야 맞는 게 아닌가? 답을 구하려 했던 건데 도리어 머릿속만 더 복잡해졌다. 결국 뚜렷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고, 임승대는 이후로도 잊을 만 하면 오메가 진재유가 나오는 꿈을 꿨다. 어느새 아침에 일어나 젖은 속옷을 처리하는 데에도 익숙해질 무렵, 문제의 쌍용기 결승전에서 진재유와 그리 편하지만은 않은 재회를 했다. 편하지 않다는 게 비단 그 꿈 때문은 아니다. 따지자면 일언반구 없이 도망치듯 서울로 전학을 가버린 임승대의 탓이 컸다. 그러나 진재유는 임승대에게 지난 과오를 묻지 않았고, 그들은 코트 위에서 극적인 화해를 했다. 그렇다고 떨어져 지낸 시간만큼 벌어진 거리가 단숨에 좁혀진 건 아니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약간의 서먹함을 간직한 채로 간간이 마주치던 그들의 거리가 예고도 없이 확 좁혀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그 해에 열린 유스캠프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적어도 임승대는 그렇게 생각했다), 둘은 연습게임에서 한 팀이 된다.

지난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던져진 공은 정확하게 손으로 들어왔다. 그걸 그대로 골대가 부서져라 내리꽂는다. 그래, 이 맛이었지. 임승대는 방금 전 골대가 부서져라 덩크를 꽂았던 제 손을 잠시 펴보았다. 진재유가 보내준 공이 손에 쏙 들어왔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짜릿했다. 진재유의 랍패스를 받아 골대를 울리던 그 순간 만큼은 최종수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역시 진재유여야만 했다. 임승대에게 있어서 진재유라는 존재는 대체가 불가능하다. 내내 뿌옇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 확신이 주는 설렘에 취한 탓에, 그는 악수를 두고야 만다. 임승대는 연습게임이 끝난 후 홀로 구석에 서 있던 진재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바보 같은 말을 내뱉었다. 너 혹시 아직도 발현하지 않았냐는 말을. 맹세컨대, 절대로 빈정대거나 놀릴 의도는 아니었다. 단지 너무 들떠있던 탓에 그의 무의식에 존재하던 한 욕망이 숨김 없이 튀어나왔던 것 뿐이다. 진재유가 이 욕망을 읽었는지 혹은 그렇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았다. 일순 진재유의 눈빛이 싸늘하게 내려앉았으니까. 그리고 임승대가 어떠한 변명의 말도 꺼내기 전에 진재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니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방금 전의 싸늘하던 눈은 어디로 갔는지 그새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원래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러나 지금 임승대의 눈에 보이는 진재유의 입 모양의 움직임과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순간 토기가 올라올 정도로 어지러웠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위험 신호를 알리는 사이렌처럼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를 뚫고 진재유의 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꿈 깨라. 그럴 일 없으니까.

그건 정말로, 꿈에서 깨기에 더할 나위 없는 말이었다.


0 고백, 2차임. 임승대의 첫사랑 성적표는 이러하다. 고백도 못 해보고 차이는 멍청이가 어딨냐고 생각했었는데, 그 멍청이가 나였다니! 임승대는 두 번째로 차였던 그날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애꿎은 이불만 쥐어 뜯었다. 저 혼자 창피하고 끝나면 다행이기나 하지, 그 사건 이후로 진재유와의 사이도 다시 멀어졌다. 어쩌면 전보다도 훨씬 더. 물론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별 문제가 없었다. 오며가며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건네며 서로의 건투를 비는 동창이자 선의의 경쟁자 정도? 그러나 그 사이엔 무언가 불편한 기류가 분명히 존재했고, 그건 임승대를 조금 불행하게 했다.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인 건, 그날의 충격이 꽤나 컸던 탓인지 더 이상 오메가 진재유가 나오는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막상 꿈에서 깰 때는 다시는 꾸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못 꾸게 되니 오히려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게 아쉬움이 쌓이고 쌓여서 잠들기 전 그 꿈을 다시 꾸기를 바라는 지경에 이르자 이제는 임승대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진재유를 미치도록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에 존재하던 욕망을 인정하고 마침내 의식 밖으로 끌어낸 순간이었다. 내내 부정했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건 정신학에선 한 단계 성장을 이뤄낸 것이라 볼 수 있겠지만, 정작 현실에서 그 욕망을 실체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은 임승대를 또 한 번 비참하게 만들었다.

한 인간의 고뇌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는 듯이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흘렀다. 임승대는 당연하게 농구로 좋은 대학에 갔고, 그건 진재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진재유가 임승대와 같은 대학에 지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임승대는 아쉬우면서도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공존하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비록 학교는 달랐으나 그들은 같은 학년이었고, 리그가 시작될 때는 물론 하다못해 연습경기만 잡혀도 마주치곤 했다. 진재유는 여전했다. 여전히 농구도 잘 했고, 주변 인간관계도 담백했다. 그 담백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남다르게 얽히려는 노력이라도 한 건 아니었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이제 진재유라는 존재는 임승대에겐 오르지 못할 나무와 같았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아야지.

그러나 불과 몇 년 뒤, 이 정의가 완전히 뒤바뀌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시작은 임승대의 학교에 기상호가 입학하면서부터였다. 보기와 달리 임승대는 후배들한테 어렵게 구는 선배는 아니었다. 본인 인상이 남들이 보기에 편하지 않은 걸 잘 알아서 후배나 동생들에겐 먼저 친근하게 다가가는 편이었는데, 기상호는 특히나 같은 아랫지방 출신이라 약간의 동질감도 느꼈다. 먼저 장난치며 말을 걸면 기상호는 쩔쩔매면서도 할 말은 다 하며 부딪혀와서 놀아주는 재미도 있었다. 임승대의 입장에서 봤을 때 기상호는 제법 괜찮은 후배였다. 문제는 이 녀석이 진재유와도 너무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다.

지상고 출신들은 그 좁고 열악한 숙소에서 일 년 넘게 부둥켜 지냈던 탓인지 유독 끈끈했다. 단적인 예로 그 당시 만들어진 단체 채팅방이 아직도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기상호가 가끔 휴대전화를 보며 키득거리면 열에 아홉은 그 채팅방이 켜져 있었는데, 채팅방 이름이 '지상고 기적의 세대' 였다. 우연히 옆에서 그 이름을 보게 된 승대가 이건 무슨 의미냐고 묻자 기상호는 갑자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승대햄 설마 '기.적.의.세.대.'를 모르시는 겁니까? 쿠농 모르십니까, 쿠농?"

"...그게 뭔데 이 씹덕아."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었으나 그의 발언이 기상호의 오타쿠 자아를 자극해버린 탓에 임승대는 꼼짝없이 슬램덩크인지 쿠로 뭐시기의 농구인지 하는 만화의 줄거리를 들어야만 했다. 신이 나서 관심도 없는 만화의 내용을 줄줄 읊는 기상호가 무심코 내려놓은 휴대전화의 화면이 번쩍이자 임승대는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원래 남의 대화를 훔쳐보는 취미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대화를 보낸 대상이 진재유라면 얘기는 달랐다. 그리고 임승대의 머릿속으로 진재유가 보낸 내용이 한 글자씩 뇌리에 박혔다.

'내는 못 간다. 그날 OO랑 만나기로 했다.'

그 짧은 두 문장이 거슬렸던 건, 뒤에 나온 이름이 자신이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임승대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진재유는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건 항상 임승대의 바운더리 안이었다. 그러니까 임승대가 모르는 진재유의 지인, 그것도 이름만 말하면 주변에서 다 알 정도로 친근한 관계의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된다.

"야, OO가 누구냐?"

"어? 햄, 모르셨어요? OO형님이라고, 재유햄 애인이잖.... 저기, 승대햄? 왜 눈을 그렇게 무섭게 뜨세요...?"

시발. 왜 생각을 못 했지? 진재유도 당연히 연애할 수 있는 건데! 나도 하는데 진재유라고 못 할 리가.... 아니, 근데 잠깐만.... 저거 남자 이름 아니야?

"진재유 설마 남자랑 사귀냐?"

"네. 재유햄, 알파랑 사귀잖아요? 으악! 갑자기 왜 의자를 걷어차시는데요?!"

아, 씨발, 씨발, 씨발-!!!!!!!!!!!!

지금 임승대의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시합에서 자유투를 한 번도 성공시키지 못 했을 때보다 백배는 더 열이 받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왜 그러냐고? 못 하는 거랑 안 하는 거는 다르니까! 그니까 시발 진재유 알파랑도 사귈 수 있는 거였냐고?! 이건 정말로 머리꼭지가 돌아버릴 일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앉아 있던 의자를 힘껏 걷어찼는데도 분이 풀리질 않아서 씩씩 거리며 서 있는데 건너편에 앉은 기상호가 잔뜩 얼어 있는 게 보였다. 잠깐 숨을 가다듬은 임승대가 비어 있는 다른 의자에 앉았다. 바로 옆으로 바짝 의자를 당겨서 앉자 기상호가 애처롭게 벌벌 떨었지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네가 지레짐작해서 고백도 못 하고 도망쳐서 그런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임승대도 억울했다. 아니, 진재유 점마가 먼저 안 된다는 식으로 나왔다니까?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니까? 어찌나 억울했으면 스스로 기억 조작까지 하면서 항변 중이었다. 근데도 이 울분이 가시질 않아서 임승대는 애꿎은 기상호만 붙잡고 달달 볶았다. 니 당장 알고 있는 거 다 불어 보라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지도 건너건너 들은 거라 잘 모른단다. 그러면서 툭 던진 한마디가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재유햄이 계속 거절했는데도, 그 알파가 끝까지 쫓아다녀서 결국 사귀었다는데요?"

...시발, 오르지 못할 나무여도 열 번 찍어는 봤어야 했는데.


이제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아무리 진재유가 잊지 못할 첫사랑이라지만 그렇다고 임자 있는 놈한테 들이댈 만큼 임승대가 간이 크진 않았다. 그냥 쓰린 속 부여잡고 술이나 들이부었을 뿐이다. 하지만 잊어보겠다고 잔에 술을 따르면 그 술잔에 진재유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것도 자긴 아니라고 꿈 깨라며 칼같이 잘라내던 그 건조한 얼굴이. 울컥하는 마음에 곧장 한입에 털어 넣으면 사라지기는 커녕 그대로 목을 타고 내려가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래도 임승대가 가슴에 묻어둔 짝사랑 때문에 수절하고 살 만한 양반은 못 되었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고 다녔다. 이러다 보면 까짓거 진재유 정도는 까맣게 잊고 새 출발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겁나 좁다는 것이고, 농구판은 또 존나게 좁았다. 괜찮아졌다 싶으면 여기서 나타나고, 이제 좀 잊을 만 하면 저기서 나타났다. 시발, 지가 무슨 홍길동이냐고! 진재유가 자꾸 눈앞에서 얼쩡거리는데 저거 어떻게 좀 치울 방법 없냐고 같은 팀인 이규한테 칭얼거리면, 네가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눈앞의 유혹에 자꾸 눈이 돌아가는 거란 별 시답잖은 소리나 들었다. 그 말에 궁시렁거리면서도 눈은 또 착실하게 진재유 뒤만 쫓았다.

생각. 그래,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그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고백했으면 나랑도 사귀었을까? 지금 만나는 알파는 뭘 어쨌길래 그 목석같던 진재유가 넘어간 걸까? 그러다 보면 그 알파놈 면상이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일상에서도 이런 상념에 빠지는데, 하물며 눈앞에 진재유의 동그란 뒤통수가 보이면 더 했다. 그래서 임승대가 택한 방법은, 진재유를 의식적으로 피해 다니는 것이었다. 몸이 멀어져야 마음도 멀어진다고. 어찌 됐든 눈앞에서 사라지면 생각도 없어질 수 있겠지.

그때부터였다. 진재유가 꿈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게.

몇 년 만이더라? 이 꿈을 다시 꾸게 된 지. 임승대는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 한 채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오랜만에 꿨는데도 그 망할 꿈은 빌어먹게 생생했다. 그리고 지금 속옷 아래로 느껴지는 축축한 느낌도. 침대가 꺼질 것처럼 한숨이 나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아침에 몰래 속옷을 빠는 것도 같이 졸업한 줄만 알았는데. 이 모든 게 다 진재유 때문이란 생각이 드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진재유를 찾아가 너 때문에 내가 이 지경이 됐으니 책임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임승대는 울분과 함께 해소되지 못한 욕망을 조용히 삭히는 수 밖에 없었다. 찝찝한 채로 침대에서 나와 어정쩡한 걸음을 하며 화장실로 향하는 게 마치 지금의 제 처지와 비슷하게만 느껴졌다.

꿈에 다시 진재유가 나타나기 시작한 게 아침에 일어났을 때 현타 오는 정도로만 끝났으면 사실 임승대도 이 정도로 억울하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 꿈이 현실 속 연애 사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임승대가 인기 없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서 만났다지만 뭘 해도 상대방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 있던 정도 다 떨어지기 마련. 자연히 그 많던 인기는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렸고 졸지에 임승대는 빈 깡통만 차는 신세로 전락했다. 첫사랑에도 실패했는데 연애 사업도 줄줄이 다 말아 먹다니. 처음 알파로 발현했을 때만 해도 자신이 이런 꼬락서니일 줄은 상상조차 못 해본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임승대는 요즘 심기가 불편했다. 어느 정도냐면 지나가다 마주치는 사람에게 이유 없이 시비를 걸고 싶어질 정도로. 그런 그의 레이더망에 걸려든 불쌍한 영혼이 하필이면 기상호였다. 생각해보니 저기 저 새끼가 원흉 아냐? 쟤 때문에 몰라도 될 사실을 알아가지고 지금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거기까지 떠올리자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실실 거리던 기상호는 점차 자기 앞에 드리우는 커다란 그림자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코앞까지 다가온 거인의 턱 끝을 마주하곤 귀신이라도 본 듯이 펄쩍 뛰었다.

"너 좋아 보인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냐?"

"아니, 그게.... 별 건 아닌데요...."

"뭔데? 별거 아니면 나한테도 좀 알려주지 그래?"

어깨 위로 걸쳐지는 묵직한 팔의 무게를 느끼며 기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 저 햄 또 시작이네. 와 또 성가시게 구는데. 하지만 고새를 못 참고 답을 재촉하며 어깨를 흔들어대는 탓에 기상호는 감았던 눈을 억지로 뜰 수 밖에 없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피해 저 너머 허공을 바라보며 영 내키지 않는 입을 열었다.

"오늘 지상고 모임이 있는데요.... 진짜 오랜만에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모이기로 해서...."

"허? 금요일인데 다들 데이트도 안 하고?"

"네. 태성햄은 누님한테 허락 받았고, 희차이도...."

어차피 남들 소식엔 관심도 없었다. 임승대가 궁금한 건 진재유의 현재 연애사가 어떤가다. 그러니까 별 탈 없이 잘 굴러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좀 순탄치 않은지.... 사실 희망 사항에 불과한 거지만. 이런 생각들로 꽉 찬 머릿속을 기상호의 마지막 발언이 물 흐르듯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재유햄은 뭐 어차피 이제 쏠로라서....

"...뭐?"

"아니, 햄.... 이것 좀 놓고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이 햄은 와 또 내 멱살을 잡는 긴데! 기상호는 지금 정말로 울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저보다 20센치가량 더 크고 2년이나 더 선배인 사람이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있어서 그러지도 못 했다. 지금은 일단 빨리, 저 거인이 원하는 정보를 들려주고 이 손아귀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진짜 모르셨어요? 재유햄, 그 알파랑 헤어졌다던데요...?"


현재 시각 오후 10시 5분경, 임승대는 지금 어느 고깃집 근처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원래 저쪽 카페에서 누군가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필 카페의 영업시간이 종료되면서 5분 전에 쫓겨나고야 말았다. 에이씨, 이제 배터리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새끼는 왜 아직도 연락이 없어. 애꿎은 휴대전화 화면 속 시계와 알림창만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역시나 미동도 없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저린 다리를 쭉 펴고 일어섰다. 그리고 골목 끝에서 머리만 쑥 내밀고 건너편 고깃집 요리문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런다고 안이 보이는 건 아니었으나 이거라도 안 하면 답답해 미칠 것 같았으니까. 아무튼 지금 임승대는 목이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몇시간 전, 기상호에게서 진재유가 최근 그 알파놈과 헤어졌다는 정보를 입수하고선 그를 회유(라고 쓰고 협박이라 읽는다)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세운 계획이 무엇이냐면, 모임 도중에 진재유가 혼자 남거나 밖으로 나가거나 하면 기상호가 연락을 줘서 밖에서 기다리던 임승대와 만날 기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몇 시간 만에 급조한 계획이라 허접하기 그지없으나 지금 상황에서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문제는 지금 임승대는 3시간이 넘게 기상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이새끼 이거 까먹고 술만 처먹고 있는 거 아니냐고! 이대로 가다간 당장에 고깃집에 쳐들어가서 진재유를 끌고 나올 것만 같아서, 임승대는 꾹 눌러 참는 대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맹렬하게 타이핑을 눌렀다. '술이 잘 들어가냐? 선배는 밖에서 뺑이쳐놓고?', 그리고 전송. 얼마 후 대화창에 숫자 1이 사라지는 걸 확인한 임승대는 곧 답장이 오겠거니 싶어서 화면을 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들려온 건,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신호음이 아니라 고깃집의 유리문이 열리면서 들리는 종소리였다. 이윽고, 문 앞에서 두리번거리는 기상호를 발견하고 골목 밖으로 상체를 쑥 내밀었다. 마침 그쪽을 본 기상호가 임승대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아니, 쟤는 왜 내가 볼 때마다 놀라는데. 혀를 끌끌차며 이리 오라 손짓했더니 주변 눈치를 잔뜩 보면서 쪼르르 달려왔다.

"아니, 햄.... 그게 아니구요...."

"아니긴 무슨. 사람이 3시간 동안 자리를 한 번도 안 비우는 게 말이 되냐?"

"진짠데.... 재유햄은 진짜 꼼짝을 안 해요. 저 햄은 진짜 화장실도 한 번을 안 갔다니깐요. 아무튼 이제 곧 1차는 파할 거 같으니까, 2차로 옮기기 전에 어떻게든...."

"뭐? 무슨 2차를 또 가?! 너넨 자주 보면서 그렇게까지 놀고 싶어??"

"저희 원래 기본 2차, 3차는.... 아,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든 재유햄 혼자 내보낼 테니깐 믿어 보시죠."

영 못미덥긴 했으나 지금 달리 믿을 구석이 없었다. 그렇게 기상호를 다시 안으로 돌려보낸 뒤 또다시 지난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얼마나 더 서 있어야 할까. 한숨이 길게 나왔다. 그러나 앞으로 고작 몇 분, 길어야 한 시간이면 진재유와 다시 사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 기다림은 아무 것도 아니다. 지난 몇 번의 과실로 인해 이미 십년 가까운 세월을 기다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이 정도 기다림은 임승대에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때였다. 손에 들린 휴대전화에서 메시지 수신음이 들려왔다. 임승대는 다급하게 휴대전화를 들어 화면 속 글자들을 응시했다.

[재유햄 지금 나감 혼자 편의점으로]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유리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임승대는 반사적으로 골목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시발, 죄지은 것도 없는데 내가 왜.... 그러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고, 임승대는 벽에 등을 바짝 붙이고 숨을 죽였다. 누군가 어두운 골목 그림자에 몸을 숨긴 것도 모르고 진재유가 골목 입구를 지나치고 있었다. 발소리가 조금 멀어지자 임승대는 잽싸게 밖으로 나와서 그의 뒷모습을 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속으론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때까진 제발 이 쿵쾅거리는 가슴이 좀 진정되어야 할 텐데, 라면서.


금요일 저녁 10시 30분. 술집들이 즐비한 먹자골목은 이 시간, 특히 오늘 같은 요일엔 왁자지껄 붐볐다. 좁은 골목을 벗어나서 대로변으로 나오자 진재유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근처에 아직 문을 연 약국이나 편의점이 있는지 찾으려 했는데 바로 눈에 띄지는 않았다. 지도 앱에서 검색이라도 해볼까 싶어서 휴대전화를 켜니 일행들이 이미 2차 장소로 이동 중이니 이쪽으로 바로 오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간단하게 답장을 한 후 지도를 보니 100m 근방에 편의점이 하나 보였다. 그쪽으로 방향을 틀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에게 어깨를 붙잡혔다.

"어, 재유! 여기서 다 보네?"

"응. 승대 니도 여기서 약속 있나?"

"어어.... 약속 있었는데 방금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맞나."

임승대와는 이런 갑작스런 만남이 놀랍긴 해도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다. 사이가 좋든 나쁘든 주기적으로 얼굴을 볼 수 밖에 없고, 관심이 있든 없든 알아서 소식이 들려오니까. 그렇다고 이런 길바닥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갈 만큼 살가운 사이도 아니어서 진재유는 먼저 가보겠다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근데 점마는 왜.... 졸졸 따라오는데?

"잠깐만, 재유.... 니 지금 어디 가는데? 니 이제 약속 없는 거 아이가?"

"아니다. 내 잠깐 약 사러 나왔다. 상호가 배탈이 난 거 같다고 해가, 약만 사서 다시 가야 한다."

"아, 그래서~ 이쪽 편의점 가는 구나?"

진재유의 옆에 바짝 붙어선 임승대가 이제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어쩐지 좀 꼬롬한 구석이 있었으나 일단 지금은 용건이 더 급했다.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계속 따라붙는다.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옆에서 계속 안절부절못해서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편의점 앞에 다다라서야 진재유가 걸음을 멈췄다. 당연히 임승대도 멈췄다.

"니 내한테 무슨 볼일 있나? 있으면 퍼뜩 말해라. 옆에서 뭐 마려운 개처럼 쫓아오지 말고."

"아니, 내가 언제 그랬다고...!"

찔리긴 했는지 승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잠시 멈춰서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진재유가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볼일 없으면 말고. 내 간다."

"잠깐만! 진재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임승대가 다시 진재유의 팔을 잡아챘다. 예나 지금이나 이상하게 승대는 진재유만 보면 절절매긴 했다. 근데 오늘은 유독 심하다. 입을 열었다가 다물기를 몇 번 반복하는 걸 가만히 보다가 진재유는 작게 한숨을 쉬며 붙잡힌 팔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빠져나가려는 팔을 다급히 붙잡더니 임승대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재유! 니 헤어졌다며!"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임승대가 감았던 눈을 슬쩍 떠보니 앞에 선 진재유가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니 그거 물어보려고 그렇게 뜸을...?"

"아니, 이거 내한텐 중요한 문제다...."

"그랬나.... 이게 니한테 중요할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헤어진 거 맞다. 내 이제 가도 되나?"

"잠깐만! 진재유, 너.... 알파랑 사귀었던 거.... 맞아?"

임승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재유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 순간 임승대는, 그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꿈 깨라는 진재유의 냉정한 목소리를 들었던 그날로.

"맞다. 내가 알파랑 사귄 것도 맞고, 헤어진 것도 맞는데. 그게 니랑 무슨 상관인데?"

"...."

"와? 이제 와서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려고?"

"말이 심하다. 그게 아니라 미리 알았으면 내도...."

"니가 뭐? 니 내 오메가 아니라고 했더니 알아서 내뺀 거 아이가?"

"내가 언제?! 그리고 니도 그때 내가 말 꺼내자마자 꿈 깨라 했으면서!!"

"그건 니가 자꾸 허튼 소릴 하니까 그런 거고."

"그게 허튼소린지 아닌지 니가 우째 아는데?!"

"허, 니 그럼 그때 내 오메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적 있었나? 솔직히 말해 봐라. 내가 알파랑 사귀다가 헤어졌다고 하니까 니 갑자기 이러는 거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데?"

정곡을 찌르는 말들이었다. 임승대의 찌질한 속내 정도야 빤히 보인다는 듯이 진재유는 거침없이 말로 쏘아댔다. 그러나 쉬지 않고 뱉어지는 날을 세운 말들보다도 더 두려운 건, 진재유의 얼굴에 드리운 실망한 기색이었다.

"니 애초에 베타랑 잘 수는 있나?"

"...."

"...됐다. 니랑 길바닥에서 더 실랑이하고 싶지 않다. 가라."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나도 몰라."

"...?"

"나도 안 해봐서 될지 안 될지 모른다고.... 시발 애초에 너 아니었으면 베타랑 잘 생각도 안 해봤어!"

임승대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진재유가 보기에 얼마나 초라하고 한심해 보일지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억울했다. 나는 지금 이렇게 밑천 다 까고 어떻게든 너 한 번 잡아보려고 이러고 있는데! 어느새 그는 주위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으로 진재유의 어깨를 꽉 붙들고 악을 쓰고 있었다.

"근데 씨, 니가...! 니가 자꾸 내 꿈에 나오잖아! 니가 먼저 내 꿈에 나오니까 내가, 내가 꿈에서 깰 때마다 얼마나 창피했는지 알기나 해?! 그게 한 두 번인 줄 알아! 수십 번도 더 나왔다고 니가!!!"

"승대야, 알았으니까 목소리 좀 낮추...."

"몰라, 시발! 이젠 니가 오메가든 베타든 상관없고 그냥.... 꿈에서처럼 그냥, 너랑 자고 싶다고!!"

"니 진짜 미쳤나?! 길바닥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고...!"

급기야 진재유가 양 손바닥으로 임승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임승대도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주위를 살폈는데 두 사람은 지금 주변 행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어머, 사랑싸움 하나 봐. 꿈에도 나왔다는데 좀 받아주지. 근데 무슨 고백을 저렇게 요란하게....

"하, 진짜.... 내 진짜 니 때문에 창피해가 얼굴도 못 들겠다...."

"그, 재유.... 미안타...."

"됐고, 니 여기 잠깐 있어봐라. 니 어디 가지 말고 꼼짝 말고 기다려야 된다!"

임승대는 어깨가 축 늘어진 채로 진재유가 이끄는 대로 편의점 앞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풀썩 앉았다. 의자가 위태롭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진재유가 신신당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임승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진재유는 잠시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더니 곧장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문이 열리고 닫히면서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임승대는 혼자 남겨졌다. 그는 그제서야 주변을 빙 둘러싼 구경꾼들의 시선이 온통 자신을 향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본인이 방금까지 무슨 소릴 지껄였는지도.

밖에서 임승대가 홀로 쪽팔림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진재유도 그닥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마주친 점원의 눈빛이 너무 의미심장해서 진재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서둘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시키려는데 유리창 너머로 플라스틱 테이블에 팔을 괴고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있는 임승대가 보였다. 그리고 반듯하게 깎은 옆머리 아래로 새빨갛게 물든 귀까지. 진짜 제정신이 아니었다. 점마도, 내도.

잠깐 시간이야 벌긴 했으나 뭐가 됐든 답은 해줘야 했다. 그게 비록 엉망진창인, 고백 아닌 고백 같은 것이어도. 게다가 진재유는 그 말도 안 되는 고백마저도 임승대가 얼마나 큰 용기를 내서 말했는지 모르지 않았다. 모르겠는 건 제 마음이다. 진재유 자신에게 너 임승대랑 뭐 어쩌고 싶은 거냐고 물어보면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질 않았다. 단순하게 임승대가 싫은 거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좋아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너 걔랑 사귈래? 아니면 잘래?' 라는 식으로 물으면 또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다. 진재유가 원래 신중하고 조심성 많은 성격인 건 맞지만 연애할 때도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당장 첫 연애 대상만 해도 팔자에도 없던 알파랑 얼떨결에 하게 됐으니까. 사실 진재유는 불같은 사랑? 뭐 이런 거에 로망이 있다거나 진지한 만남에 집착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형질인들처럼 평생 갈 단 하나의 각인 상대를 찾아다닐 필요도 없는데. 굳이 연애 한 번, 잠자리 한 번에 의미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게 진재유의 연애관이라 말할 수 있었다. 남들은 샌님인 줄만 알았던 진재유가 이럴 거라곤 상상도 못 하겠지만.

상념이 깨진 건 손에 쥔 휴대전화의 진동 덕분이었다. 메시지 알림이 떴길래 확인해보니 상호가 이제 속이 괜찮아졌다며 약을 사 오지 않아도 된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우습게도 그 순간 진재유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임승대였다. 그래서 너 나랑 잘 거냐고, 말 거냐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된다, 안 된다로 답하라고! 돼? 안돼?

오케이. 답이 나왔다. 진재유는 진열 된 매대에서 무언갈 집어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그리고 점원이 계산을 마치는 동안 휴대전화로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그 시각, 임승대는 테이블 의자에 앉아 편의점 유리문만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다리를 어찌나 떠는지 플라스틱 의자가 시끄럽게 달그락거리는 데도 하나도 거슬리지 않는 듯했다.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단 소리다. 솔직한 심정으론 도망가고 싶었다. 근데 또 그랬다간 정말 진재유한테 손절 당해도 할 말이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지금 기다리고 있는 거다. 유리문을 뚫어져라 보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진재유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는데, 또 안 나왔으면 하기도 했다. 다시 얼굴 보고 얘길 하고 싶은데, 막상 보면 아무 말도 안 나올 것 같.... 윽, 시발, 벌써 나왔잖아!

문이 열림과 동시에 임승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반동으로 의자가 뒤로 우당탕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승대가 나동그라진 의자를 고쳐 세우며 진재유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어, 어. 미안. 내는 그만 가봐야 겠다. 응, 말 좀 잘 해주고, 다음에 또 보재이."

정리를 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그쪽에 쏠려있었다. 통화 내용을 얼핏 들어보니 진재유가 지상고 모임에 복귀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그때, 임승대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진재유의 왼쪽 주머니 끄트머리에 살짝 삐져나온 네모나게 각진 납작한 종이 상자. 용도를 모를 수가 없는 물건.

그걸로 분명해졌다.


모텔에 한 두 번 와본 것도 아닌데 문고리를 돌리려다가 손이 미끄러질 만큼 긴장한 적은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그 꼴을 보고 뒤에서 진재유가 웃음을 흘렸다. 평소 같았으면 아마 이게 웃기냐며 시비를 털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임승대는 그런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완전히 긴장하고 있다는 소리다. 심지어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가서 카드키를 꽂아 넣고 신발을 벗는 일련의 행위들에서 어색하게 뚝딱거렸다. 그럴 만도 한 게, 편의점에서 통화 중인 진재유의 뒤를 임승대가 졸졸 따라간 것을 시작으로 지금 모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까지 그들은 마치 짠 듯이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젠장, 사실 임승대는 진재유가 이렇게 돌직구로 바로 모텔로 갈 줄은 맹세코 몰랐다!

고장나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니까 임승대는 지금 고장이 나서, 기껏 모텔 안으로 들어와서는 현관 앞 1m 남짓 밖에 걷지 못 했다. 그러고 우두커니 멈춰버렸다. 좁은 현관 입구를 커다란 몸이 막고 있으니 진재유는 당연히 따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어찌나 조용한지 바로 뒤의 진재유 숨소리가 등에 바로 닿을 듯이 가깝게 들려왔다. 그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탓에, 임승대는 자기 팔에 닿는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니 와 이렇게 긴장을.... 긴장 풀어라. 내가 니를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놀라서 굳어버린 몸을 달래듯이 천천히 팔이 감겨온다. 허리를 감싸고 등에 얼굴을 묻자 뒤에서 훅 체향이 풍겨왔다. 이건....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그런 종류의 향이었다. 맡기만 하면 아래부터 바로 동하는 오메가들의 페로몬하고는 달랐다. 페로몬이라고 칭할 수도 없는, 그냥 진재유의 본래 체향에 상쾌한 비누 냄새가 섞인 그런 향기일 뿐인데도 임승대의 심장을 뛰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게 아니라...."

"그럼 뭐?"

...내가 니를 잡아먹을까 봐 그런다.

그 생각이 마지막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진재유의 턱을 붙들고 정신없이 입술을 부딪히고 있었다. 더는 버티지 못 하고 기울어진 진재유의 몸이 쿵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지만 임승대는 멈출 줄을 몰랐다. 이젠 정말 멈출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래 기다렸다. 너무.

어느새 진재유도 승대의 목에 팔을 두르고 밑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에 부딪혀 찢어진 건지 피 맛이 나는데도 누구 입술이 찢어진 줄도 모를 정도로 서로 열중했다. 거의 먹어 치우고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중간중간 벌어진 틈으로 숨이 바쁘게 새어나갔다. 그렇게 멈출 줄 모르던 입술이 떨어진 건, 임승대의 목에 걸린 진재유의 팔이 떨리고 있음을 알게 된 후였다. 슬쩍 아래를 보니 진재유의 발끝이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딛고 버티며 서 있었다. 거의 승대에게 매달려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제야 임승대는 입술을 뗌과 동시에 턱을 붙들던 손도 떼었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고 서 있던 진재유의 발뒤꿈치가 땅에 닿기도 전에 임승대의 팔이 그의 허리를 채갔다. 턱 바로 아래에 저를 올려다보는 진재유의 상기 된 얼굴이 있었다.

"하아, 승대 니.... 러트 왔나?"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더니 진재유가 숨찬 얼굴로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는다.

"근데 와이리 흥분하는데.... 니 진짜 러트 온 거 아이가? 내 러트 온 알파랑 하는 취미는 없는데."

"아니라니까.... 니 그럼 그 알파놈이랑은 러트 올 땐 안 했나?"

"안 해봤을 거 같나?"

시발. 괜히 물어봤어. 그 짧은 순간에 다른 알파 밑에 깔려 지금 같은 얼굴을 한 진재유의 모습이 떠올라서, 임승대는 속으로 진저리쳤다. 그러나 상념에 젖을 새가 없었다. 발기해서 딱딱하게 올라붙기 시작한 중심부에 뭔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진재유가 무릎을 세워 임승대의 고간 아래쪽을 문지르고 있어서란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진재유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살짝 치켜뜨고 입꼬리는 슬쩍 올려서 웃고 있었는데, 보고만 있어도 없던 러트가 오는 것만 같았다. 그때, 승대의 눈에 진재유의 바지 주머니에 꽂혀 있는 콘돔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임승대가 보란 듯이 웃으며 그걸 꺼내 진재유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그러는 니는, 이건 내 꼬실라고 산 거가?"

"응. 일부러 니 보라고 그래 둔 건데 몰랐나?"

...이거 진재유 맞아? 진재유 껍데기 쓴 여우, 뭐 그런 거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진재유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근데 어쩌지? 니가 몰랐나 본데...."

임승대는 제 목에 걸쳐진 진재유의 한쪽 팔을 아래로 잡아 당겼다. 그리고 진재유의 손이 제 중심부에 닿도록 가져다 대었다. 붙잡은 진재유의 팔이 일순 움찔거렸다. 임승대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띄며 말했다.

"고작 이 정도 사이즈가 내한테 맞을 것 같나?"

그렇게 뜯지도 않은 콘돔은 쓸모를 잃은 채 허망하게 승대의 등 뒤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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