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SR/세이버부부] 밤벚꽃
* Fate/Samurai Remnant(페사렘)의 세이버 부부 생전 날조글입니다… 시나가와항에 가면 세이버 흥분 포인트에서 이오리에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벚꽃은 아름답다'고 하는 것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부부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요…
* 쓰면서 들은 곡: https://youtu.be/0nROjv1QCn4
뜨겁게 덥힌 물에 몸을 담근다. 아슬아슬한 수위를 유지하던 물이 흘러넘치고, 머리칼 끝에 엉겨 붙어 굳어가던, 손과 몸 곳곳에 상흔처럼 남았던 피가 천천히 녹아내리는 걸 보던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몸을 더 웅크렸으나 그도 부족하다는 것처럼, 발끝부터 머리까지 물속으로 들어간다. 숨을 내쉰다. 물방울이 올라간다. 뺨에 달라붙어 있던 핏자국도 조금은 씻겨 내려갔다.
큰 숨을 들이쉬며 그는 수면 위로 올라왔다. 호흡하고 있어도 단지 그뿐, 이쯤 하니 겨우 숨을 쉬고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매서웠던 눈초리가 조금은 풀어진 채였다.
수없이 피를 묻히며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리 살아갈 것이다. 막상 검을 휘두를 때면 무감각해지면서도, 핏물을 밟으며 시체들의 산을 지나올 때면, 누군가의 마지막 숨을 거둘 때면 종종 숨이 막혔다. 웃기는 일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임당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거늘, 죽임당하지 않았다 하여 숨이 막힌다는 게. 그 감각에서 눈을 돌리고자 황자는 정벌지에서 밤을 지새우지 않고 임시 거처로 돌아와 몸을 푸는 중이었다. 설령 거처의 모든 이가 이미 잠들었더라도, 이곳에는 그를 오롯이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밤이 깊었으니 깨울 수는 없어 잠든 얼굴조차 볼 수 없을지라도, 그런 존재가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마음이… 놓였다. ‘놓였다.’라는 단순한 단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네가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무통에 머리를 기대려는 찰나였다.
“―거기 누구냐.”
그의 눈동자에 선명한 적의가 어렸다. 장지문 바깥에 인기척이 있었다. 아무리 임시 거처라 하나, 이리 방비가 쉽게 뚫릴 리가 없을 텐데. 그리고, 방비가 뚫렸다면, 그의 부인 또한. 그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불러내 몸을 일으켰다. 방금 피를 씻어낸 몸에 또다시 피가 묻는 건 사소한 일이다.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한 번에 도약해 문까지 도달한다. 가볍게 문을 밀면,
“아이참. 또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네.”
“……부인?”
놀랠 생각이라도 했는지, 문 바깥에 쪼그리고 앉아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그가 황망한 목소리를 내었다. 왜 자고 있지 않고 이곳에, 아니 그보다 지금 제 꼴이…. 자신의 상황을 떠올리자마자 그는 다시 잽싸게 장지문을 닫았다. 맨몸으로 적을 죽이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부인은 아니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아무리 부부 사이라 해도 낯부끄러운 일은 낯부끄러운 일이었으므로, 그는 당장 식은 물에 머리를 박고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뭐야? 갑자기 문을 닫아버리면 어떡해.”
“가, 갑자기 들이닥쳤으니 놀라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기에 그는 우물쭈물하며 답을 뱉었다. 어쨌든 부인이 찾아왔으니 부랴부랴 정리를 한다.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옷가지도 그럭저럭 챙겨입은 뒤에야 살짝 부루퉁한 얼굴로 장지문을 민다. 뺨과 귀가 조금은 울긋불긋한 것이 더운물에 잠겨서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부루퉁한 표정에 그녀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에 맥없이 마음이 풀려서, 결국 그의 표정도 부드럽게 풀렸다. 그녀가 자연스레 그의 손을 잡고는 걸음을 옮겼다. 부인이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이기에 얌전히 따른다.
“자고 있지 않았나? 깨우고 싶지 않았는데, 소란스러웠다면 미안하다.”
“응, 자고 있었어. 그런데 어쩐지, 오늘 밤에는 당신이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나도, 오늘은 네가 보고 싶었다. 마음이 통했구나.”
“뭐? 하나도 안 통했어. ‘오늘은’?”
“아니아니, 내내 그랬으니까?”
손을 맞잡은 채 복도를 거닐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눈다. 스스로 규정한 의무도, 영웅의 길도 모두 잠깐은 잊은 채, 평범한 연인 같은 대화가 오간다.
“헌데, 어디까지 가는 거냐?”
“요 앞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출입문을 앞에 두고 그가 머뭇거리고 있자니, 그녀가 다시금 방긋 웃었다. 정말, 못 말리겠군.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그도 웃고 있었다.
출입문을 지키던 병사들에게는 잠시 거닐다 오겠노라 말해두고, 거처와 조금 멀어지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달만이 유독 하얗게 빛을 흩뿌리며 길을 밝혔다. 싸늘한 밤의 공기에 미미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봄의 징조였다.
그 모든 사소한 풍광을, 그는 지금 처음 보았다. 어찌 거처로 돌아올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의 곁에서 반 발자국 정도 앞서 나가던 그녀는 무엇이 즐거운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가 소리 없이 미소 지을 무렵, 그녀가 멈춰 섰다.
“여기야!”
그의 시야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가득 담겼다. 아, 이 근처에 벚나무가 이리 많았던가. 벚꽃은 또 언제 이리도 활짝 피었던가. 이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잡았던 손을 풀고 그의 앞에 가 섰다. 눈썹에, 눈에 가득 힘을 주면서도 활짝 웃는다. 숨겨왔던 보물을 자신만만하게 내미는 아이처럼, 당신이 이 풍경을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자의 미소였다.
“역시, 꽃이 핀 것도 몰랐지?”
“……으, 으음. 나조차도 몰랐다는 걸 몰랐는데 말이다.”
“나는 ■■■■■■■■. 당신의 아내니까.”
그것이 이유가 되나? 그럼, 이유가 되지. 그런가. 그런 거야. 의미 따위는 없고, 미소만으로 끝나는 대화인데도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편하다.
“있지, 당신.”
“응?”
“씻고 그대로 잘 생각이었지?”
“그, 렇지……. 잠들지 않고 달리 해야 할 것이 있지도 않으니.”
“난 그게 싫었어.”
음? 멀뚱히 고개를 기울이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다시금 미소 짓는다.
“고독도, 죽음도 모두 짊어진 채로…. 그렇게 잠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 조금 더 행복한 마음으로 잠들었으면 하니까.”
“…….”
“그래서,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바람이 불었다.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에 가슴께도 덩달아 간질거리는 기분이 든다. 자다가 나왔다는 게 헛된 말은 아니었는지, 평소와 달리 장신구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긴 머리도, 얇은 옷도 함께 살랑인다.
“어때, 아름답지?”
저러다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지― 걱정하면서도, 무척이나.
“……응, 아름답다.”
그저 깨끗해 온화한 공기와 달빛이 넘실거리는 길,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 때맞춰 부는 바람과 솨아 소리 내며 팔랑이는 벚꽃잎도, 모두. 다 제 하나뿐인 반려를 위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고야 말아서….
나는 아마, 지금 이 찰나를 영원토록 간직하고 말 거다. 그런 예감이 들어. 언제 어디서고, 벚꽃을 본다면 널 떠올리겠지.
마음이 울렁거려 고백은 차마 꺼낼 수 없을지라도, 그는 환히 웃어 보였다. 소중한 이의 기억에도 이 순간이 오랫동안 남길 바라면서.
⁕
세이버?
저를 부르는 소리에 세이버는 고개를 돌린다. 꽃구경하러 모인 사람들, 왁자하게 떠드는 상인들, 실랑이를 벌이는 이들의 소란스러움은 너무나도 일상의 풍경이기에 제게는 낯설다. 낯선 풍경 사이, 강 너머로 보이는 벚꽃의 길은 여전히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만큼, 이 평화로운 거리를 너와 함께 걷고 싶을 만큼.
그렇기에 세이버는 미소 지으며 입을 연다.
이오리, 벚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름답구나….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