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진화랑] 이카로스의 날개

재벌 총수인 진이 태권도 선수인 화랑에게 반해 사랑에 골인하는 이야기. 믿기지 않겠지만 화랑 생축썰이며 상황은 모조리 날조입니다.

태양을 보았다. 진은 텔레비전 속 그를 처음 본 순간 그야말로 강렬한 빛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이 되어버렸다.

진은 21살의 젊은 나이에 미시마 재벌이라는 대기업의 총수가 되었다. 다만 이것은 진이 원한 결과는 아니었다. 미시마 재벌은 세습제로 이어지고 있는데 군사 기업이지만 건실한 운영과 아무 전쟁이나 참여하여 이익을 탐하지 않고 세계 평화에 재벌의힘을 사용하는 개념적인 운영으로 미시마 재벌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진 미시마 진파치의 뒤를 이어 총수가 된 헤이하치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카즈야와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미시마 재벌은 평화에 기여하는 군사 기업에서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종합 기업으로 방향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카즈야는 미시마 재벌 안에 G사라는 자신이 중심이 되는 파벌을 만들어 군사 부분 뿐만 아니라 생명 공학과 로봇 공학에도 손을 뻗어 독자 세력을 만들어 헤이하치와 대립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는지는 오직 내부의 사람들만 아는 조용한 전쟁이 미시마 재벌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사회를 장악한 카즈야가 기습적으로 연 이사회에서 헤이하치는 총수 자리를 박탈 당하고 미시마 재벌에서 자리를 잃게 되자 카즈야는 자연스럽게 3대 총수로 올라서게 되었다.

카즈야는 지금까지의 미시마 재벌의 운영이 너무 무르다고 판단하고 강경파로 키를 잡게 되었고 그 여파는 왠만한 나라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사람들의 평화를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재벌의 행보에 적도 많이 생겼지만 그때마다 재벌은 힘과 무력으로 적대 기업과 적을 모두 분쇄하고 흡수해갔다. 이렇게 재벌을 성장시켜 나가는 카즈야를 미시마 재벌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이득으로 돌아오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런 그에게 반기를 든 이들이 있었다. 바로 카즈야의 이복 형제인 리 차오랑과 헤이하치의 혼외 자식인 라스 알렉산데르손이었다. 리는 헤이하치가 카즈야의 성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버림말로 쓰기 위해 입양한 아이로 자신이 미시마 가의 버림말이 될거라는 걸 깨달은 후에는 의도적으로 카즈야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이올렛 시스템즈사라는 자회사를 만들어 독립했다. 그리고 라스는 제 아버지에 대해 조사하던 중 미시마 재벌의 헤이하치라는 걸 알아내고 미시마 재벌의 철권중으로 재벌의 일원이 되어 계속해서 승진을 하던 중 재벌의 실태를 알고 나서 혈육이라는 것의 집착을 버리고 리의 바이올렛 시스템즈사로 들어가 그와 손을 잡고 위그드라실이라는 군사 조직을 창설, 그 조직의 대표가 되었다.

라스는 리를 처음 대면했을 때 별다른 감정과 생각이 없었으나 리는 달랐다. 리는 라스가 자기 자신을 헤이하치의 사생아라고 소개했을 때 부터 그를 이용해 미시마 재벌을 삼켜볼까, 라고도 생각했다. 아직 리의 안에 남아있던 재벌에 대한 미련과 헤이하치와 카즈야에 대한 증오가 그를 부추겼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미시마 재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라스에 사라졌다. 자신처럼 이 미시마 가에 증오가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라스는 너무나도 올곳은 모습으로 미시마 가에 대한 증오가 아닌 미시마 재벌의 이념에 대해 이야기 했다. 초대 총수인 미시마 진파치가 내세운 이념을. 두 사람 모두 초대 회장인 미시마 진파치가 강조했던 힘에는 대가가 따르고 그 힘을 휘두를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지 항상 고민하고 신중하게 휘둘러야 한다던 미시마 재벌의 이념을 잊지 않고 있었다. 평화를 위해 힘을 사용하던 그때의 미시마 재벌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라스의 진심은 리의 마음마저 돌렸고 결국 두 사람은 카즈야에게서 미시마 재벌을 해방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포섭한 사람이 바로 카즈야의 아들인 진이었다.

19살의 어린 나이었지만 영재 교육과 제왕학 교육을 받은 진은 자신을 옥죄는 일상과 미시마 가의 무게에 짓눌러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보내고 있었다. 특히나 카즈야의 강경파로서의 회사 운영으로 여러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간접적으로 지켜봐야하는 진은 미시마 가에서 도망칠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런 진에게 접근, 그를 설득하는데 성공한 리와 라스는 카즈야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한 증거와 그로 인해 고통받은 피해자들의 동의를 얻어 카즈야가 헤이하치에게 했던 것 처럼 이사회를 열어 카즈야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진을 앉히는데 성공했다. 소위 말하는 쿠데타에는 성공했으나 그 후도 절대로 순탄하지 못했다. 카즈야는 사라졌어도 여전히 재벌의 꽤 많은 이권을 지니고 있던 이사들과 사람들은 어린 진의 경영 능력을 의심했다. 갑자기 나타난 어린 총수에 대한 불신과 강경파로 방향을 틀면서 손에 쥐게 되었던 거대한 이득을 포기하게 되는 경영 방향의 변경 등으로 재벌은 여전히 내부에서 엄청난 혼란을 겪어야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리도 라스도 모두 진을 서포트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한 사람이었으며 알리사와 에디, 리로이 등과 같이 진의 뜻을 이해하고 함께 손을 잡기로 한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재벌은 초대 총수가 세운 이념으로 다시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진도 마냥 순수하던 마음과 신념이 조금은 변질 되고 더럽혀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선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 그 날도 진은 늦은 시간까지 재벌 본사의 총수실에 박혀 정신없이 서류와 씨름하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바쁜 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후, 한숨과 비슷한 숨을 흘리며 서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든 진이 뻐근해져오는 뒷목과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다 책상의 서랍을 열어 텔레비전의 리모콘을 꺼내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아직 처리해야 할 서류가 남아있었지만 늦은 밤의 적막함을 더 이상 견디기 가 싫었다. 무감각하게 채널을 돌리다 진의 손이 멈춘건 스포츠 채널이었다. 올림픽… 그래, 벌써 그런 시기인가. 소리를 작게 조절한 진이 마치 백색 소음처럼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손을 움직여 서류를 처리해나갔다. 중계 종목이 바뀐 것도 모르고 열심히 일을 하던 중 갑자기 커진 해설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게 된 진의 운명은 거기서 갈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거다. 진의 눈에 새하얀 도복을 곱게 갖추어 입고 자세를 잡은 체 쓰러진 상대를 보다 헤드기어를 벗는 남자가 보였다. 헤드기어를 벗음과 동시에 붉은 노을빛을 닮은 머리카락이 마치 실크처럼 흘러내렸다.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손으로 떼어내고 머리를 쓸어올리던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온 중년의 남자에게 머리 쓰다듬을 받는 모습을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던 진의 청각에 해설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역시 이변은 없습니다! 4년 전 갑자기 나타난 태권도계의 신성! 블러드 탈론, 화랑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

“ 화랑…? ”

남자, 화랑의 이름을 읊조리던 진의 눈이 텔레비전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시상식을 준비하는 지루한 과정을 비춰주는 와중에도 보호장비를 모두 풀고 물을 마시는 그를 끈질기게 눈으로 좇던 진은 마침내 시상식이 시작되고 단상에 올라가 금메달을 목에 건 순간 환하게 웃으며 번쩍 주먹을 들어올리는 화랑의 모습을 보고 눈이 멀게 되었다. 태양이었다. 진은 저 환하게 빛나는 태양에 반해 버린 것이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화면이 광고로 전환되자마자 텔레비전을 끈 진이 제 앞의 서류를 한쪽으로 치우곤 노트북을 열어 인터넷 브라우저를 실행시켜 검색창에 화랑의 이름을 입력하곤 검색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곧장 수십, 수백 개의 검색 결과가 쏟아져나왔다. 그 중 일단 프로필을 누른 진의 눈이 빠르게 프로필을 눈으로 훑었다.

“ 이름이 일본인 같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인이구나… 나이 21살… 나랑 동갑이네. 생일이… 3월 20일. 184cm에 80kg. 키랑 몸무게도 나랑 크게 차이가 안나… “

첫 눈에 반한 사람답게 모든 걸 자기와 비교하던 진이 뒤로가기를 눌러 프로필 페이지에서 빠져나오고는 가장 최근 글을 눌렀다. 화랑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정리한 페이지였고 방금 올림픽에서 보여준 우승 내용이 경력에 벌써 추가되어 있었다. 취미는 요트 세일링과 바이크 레이싱… 다만 바이크 레이싱은 사범님께 혼난 후 자제하고 있다… 사범님? 아까 머리 쓰다듬던 그 사람인가? 가족은… 가족에 대한 내용은 없네. 블러드 탈론이라는 별명의 뜻은 피발톱 맹금류로 그가 평상시 착용하는 보호장비의 색상이 붉은색인 것과 경기를 본 모 해설자의 마치 상대의 숨통을 노리는 맹금류 같다는 말 이후 생긴 별명이다라… 사족으로 그는 고양이 파로 도장에서 토토라는 고등어 코리안 숏헤어를 키우고 있다… 고등어? 그게 뭐지? 이름? 어, 고양이의 털색에 따라 부르는 호칭? 음… 어, 팬카페가 있어…? 눈으로 천천히 정보를 읽어내려가던 진이 팬카페를 클릭한 순간부터 그의 시간은 말그대로 순삭되었다. 팬카페에 올라온 온갖 사진과 영상, 글들을 정신없이 읽어내려가던 진은 제 눈을 찌르는 강한 햇빛에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고 창문 너머로 서서히 올라오는 해를 보며 자신이 밤을 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숨 좀 돌릴 겸 잠시만 보려고 했던 것 뿐인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팬카페를 탐방했다는 걸 깨달은 진이 허둥지둥 노트북을 닫고 다시 서류를 제 앞으로 끌어왔다.

“ 피곤해 보이는데 수면은? ”

“ …피곤하긴 하지만 졸리지는 않습니다. 다음 안건은요? ”

리의 지적에도 괜찮다는 말과 함께 손에 든 서류를 한 장 넘긴 진을 이사진이 잠시 바라보다 다들 일제히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보니 요새 진은 좀 이상했다. 아무리 바빠도 수면을 취하는게 중요하다며 하루에 4시간의 취침 시간을 무조건 고수하는 진이었는데 최근에 그 수면 시간이 좀 줄어든 것 같았다. 잠을 줄이면서까지 일을 했나…? 싶다가도 진에게 가해지는 부담감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리의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일을 주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회사 시스템에 깊게 관여하고 있는 알리사가 최근 진이 노트북으로 평생 들어갈 일 없을거라 생각했던 너튜브와 한국 IP의 사이트를 들어간다고 했다. 아니, 뭐 너튜브는 전 세계적으로 이용하는 동영상 사이트니 그렇다고 쳐도… 한국 IP로 무슨 사이트를 들어가는거야…? 매우매우 궁금했지만 진에게 너무 하나하나 참견하는 것이 될까 싶어 리는 라스에게만 현재 진의 행동에 대해 귀뜸을 해주고는 예의주시 하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꽤나 빠르게… 진이 뭘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 리 숙부, 라스. 부탁이 있어요 ”

“ 부탁? ”

“ 진, 네가 우리한테 뭔가 부탁하는 건 거의 처음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이야? ”

잠시 짬이 난 틈을 타 총수실에서 커피를 한잔 하고 있던 리와 라스는 갑자기 진지하게 부탁이 있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을… 한 명 조사해 주면 좋겠는데요… 사람 조사? 우리한테 부탁을 해야 될 정도로 거물급인가? 라스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진과 눈을 마주쳤다. 네가 우리한테 부탁해야 될 정도로 그 사람이 우리 회사에 위험한 존재인가? 라스의 말에 진이 그건 아니고… 라며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뭔가 우물쭈물 말을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진에 라스가 설마 협박범인가?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 그… 화랑… 에 대해서 조사해주세요 ”

“ 화랑? 처음 듣는 이름인데 ”

“ 애시당초 일본인의 이름도 아닌 것 같은데. 진, 누구야? ”

“ …한국의 태권도 선수에요 ”

진의 입에서 정체가 밝혀지고 나서 리도 라스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리는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알리사가 최근에 진, 네가 노트북으로 한국 IP의 사이트를 자주 들어간다고 하더니… 그 화랑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고 있던 거였나? 그 말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회사의 위험인물에 대한 조사를 부탁하는 줄 알았던 라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에 힘을 빼고는 다시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 마신 순간이었다.

“ 첫 눈에 반했어요 ”

“ 읏… 큽… ”

“ 이런이런 ”

순간 예상도 하지 못한 진의 말에 놀란 라스가 사례에 걸려 콜록콜록, 기침을 하자 리가 제 상의 안쪽에서 손수건을 꺼내 라스에게 내밀었다. 마블러스라는 글자가 적힌 최고급 브랜드의 수제 손수건을 황급히 낚아챈 라스가 입에 손수건을 대고 크게 기침을 했다. 기도로 뜨거운 커피가 들어가 대미지는 2배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라스와 반대로 리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저 카자마 진이 제 입으로 반했다는 소리를 하다니,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 이었다. 겨우 진정이 된 라스가 이 손수건은 세탁해서 돌려주겠다고 말하며 제 상의 안쪽의 주머니에 손수건을 넣고는 진을 바라보았다.

“ 진, 지금 농담하는건가? ”

“ 농담이 아니겠지. 진이 이런 농담을 할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알게 된거야? ”

“ 저번에 야근하다 텔레비전을 켰는데 거기서 올림픽을 해서 소리만 듣고 있었는데… ”

“ 그 올림픽에 나온 게 화랑, 그 사람이다? ”

“ …네 ”

“ 그래도… 직접 만나 본 것도 아니고 텔레비전으로만 봤는데 첫 눈에 반한다는 게 말이 되는건가…? ”

“ …태양… 같다고 생각했어요 ”

머리칼도 붉은색인데… 금메달을 목에 걸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냥 태양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음… 우, 웃는 얼굴을 한번만 더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듬더듬, 자신도 부끄러운지 더듬거리며 내뱉은 말을 들은 리는 한번 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손등으로 눌러 참았다. 진짜 저 목석같은, 머리 속에 재벌의 일로만 가득찬 줄 알았던 제 조카가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을 하다니…! 진을 이렇게 만든 그 화랑이라는 사람을 좀 보고 싶다는 생각에 손에 든 커피를 단숨에 마시고 탁, 소리나게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은 리가 아직 반 이상 남은 라스의 커피잔을 낚아채 종이컵에 담더니 그대로 라스의 손에 쥐어주고는 그를 일으켜 문 쪽으로 밀어붙였다.

“ 자, 잠깐. 리씨! ”

“ 자자, 라스. 쌓인 일도 많으니까 휴식 시간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그럼 조카님. 원하는대로 화랑을 조사해서 알려줄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주게 ”

“ …네 ”

“ 아, 맞다. 그래도 말이지. 이카로스 처럼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

“ 이카로스…? ”

“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건축가이자 조각가이자 발명가인 다이달로스의 아들 이카로스. 혹시 들어본 적 없나? 이카로스의 날개라고 ”

“ 이카로스의 날개… ”

“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탈출 하던 중 너무 높게 날아올라 태양빛에 밀랍이 녹아버려 결국 바다에 빠져 익사했다는 이야기로 알려져있지. 그러니 조카님. 자네도 그 태양에 날개가 녹아버려 추락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게 ”

정말 진을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놀리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알수 없지만 라스를 먼저 문 밖으로 밀어내고 진에게 이카로스의 날개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리마저 나가자 조용해진 총수실에서 진이 의자에 몸을 묻더니 이카로스의 날개… 라며 작게 중얼거렸다. 제 숙부들에게 화랑에 대한 마음을 이야기 한 후에도 진의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열심히 재벌의 일을 하다가 시간이 생기면 바로 화랑의 팬카페와 간간히 올라오는 대회 영상, 사진, 심지어 개인 브이로그까지 모두 섭렵하며 지냈다. 개인 브이로그라고 해도 정말 개인적인 사생활이 담긴 브이로그는 거의 없었고 훈련 영상에 가까운 브이로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진은 그것마저도 행복해하며 보곤 했다. 다리… 정말 길다… 유연성도 엄청나네. 사람이, 그것도 남자의 다리가 저런 각도로 벌어지는 게 가능한 건가…? 브이로그의 댓글들도 모두 그 유연성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아주 가끔 그 유연성으로 인한 성희롱에 가까운 댓글을 발견할 때 마다 열심히 신고를 하며 음산하게 한번만 더 내 눈에 띄면 개인정보 알아내서 죽인다… 라고 중얼거리곤 하지만.

“ 어…? 화랑 우승 기념 팬 조공…? ”

어느 날 진은 팬카페에 올라온 공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올림픽에서 화랑 선수가 금메달을 땄기에 그것을 기념하는 조공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조공 금액은 모두 믿을 만한 어린이 기부 단체에 화랑 선수의 이름으로 기부를 할 예정입니다. 팬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화랑을 알게 되면서 몰래몰래 한국어도 공부하기 시작한 진은 정말 폭발적인 집중력과 개인적인 욕망의 해갈을 위해 미친듯이 공부한 결과 적당히 한국어를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온 덕분에 팬카페에 올라온 공지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흐음… 팬들이 화랑에게 선물을 하는게 아니라 화랑의 이름으로 기부를 한다라… 좋은 취지네. 우리 회사도 이미지 관리의 목적으로 가끔씩 기부를 하긴 하지만 팬들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하는 건 처음 봤어. 진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공지의 내용을 다시 한번 더 훑더니 이내 제 폰을 손에 들었다.

“ 근데 보통… 조공은 얼마를 해야 하는거지…? 맨날 회사 차원에서의 기부 정도 밖에 안해봐서 금액이 가늠이 안되네… 음… 뭐, 삼천 정도면 나쁘지 않으려나 ”

폰으로 은행 앱을 들어가 제 개인 예금의 잔액을 확인한 진이 무심하게 공지에 올라온 계좌번호로 삼천만원을 계좌이체 시켰다. 해외 송금 이체이기에 수수료도 꽤나 나왔지만 그 정도는 진의 입장에서는 정말 푼돈이었다. 송금 완료가 찍힌 액정을 보다 은행 앱을 종료시킨 진이 폰을 내려놓고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 한편, 진이 아무 생각없이 일반인 기준의 조공 금액을 가늠도 하지 않고 자기 기준에서 보낸 조공 으로 카페 스탭들은 난리가 났다. 조공 기부를 위해 만든 통장에 다짜고짜 삼천만원이 꽂혔으니 당연히 난리날만 했다. 하지만 계획대로 기간이 종료된 후 모인 금액은 그대로 한푼도 빠짐 없이 어린이 기부 단체에 기부가 진행되었고 모인 금액에 팬들 모두가 입을 떡하니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잠깐만, 오천만원이요? 우리 여지껏 기부 금액으로 오천만원 모인 적 있어요? 뭐? 한 사람이 삼천만원을 기부했다고? 대체 누구야? 진이 유유자적하게 조공 결과 공지사항을 보며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나중에 화랑도 모인 금액을 보고는 아니 대체 누가 팬 기부에 삼천을 때려박아? 대체 어디 사는 누구야? 라며 기겁을 했지만 진은 알지 못했다.

며칠 후, 쉬는 시간에 역시나 화랑의 팬카페에 들어간 진은 공지를 보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본에서 세계 격투기 종합 대회가 개최되는데 이 대회의 태권도 부분에 화랑이 참가하기로 했다는 공지였다. 드디어 일본에서… 화랑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이 돌아간 진이 앞뒤 안가리고 책상에 놓인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어 3번 버튼을 꾹 눌렀다. 잠시 신호가 가고 이내 전화를 받은 사람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무슨 일인가. 조카님? 숙부님, 잠시 총수실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 곧 가지. 수화기를 내려놓고 10분 후 리가 벌컥, 총수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래, 무슨 일인가 조카님… 은 뭐 뻔하지. 리가 털썩 소파에 앉으며 웃었다.

“ 일본에서 열리는 세계 격투기 종합 대회… 때문이지? 이번에 태권도 부분에 화랑도 참여하기로 했다던데 ”

“ …잘 아시네요, 숙부님 ”

“ 우리 재벌의 총수가 눈에 불을 켜고 주시 중이라는데 어찌 관심을 안가질 수 있을까. 그래서 뭘 하고 싶은거지? ”

“ 그 대회에… 재벌이 스폰서로 합류해주세요 ”

“ 그렇게 해서 우리 재벌에 올 이득은? ”

“ 전쟁같은 폭력적인 방향으로만 재벌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건전하고 건강한 스포츠에 투자함으로서 재벌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효과가 있겠죠 ”

“ …거기에 스폰서로서 대회에 참가해서 화랑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

“ …부정은 안하겠습니다 ”

“ 솔직해서 좋네, 조카님 ”

흐음,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던 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쁜 쪽으로 재벌의 힘을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진의 말대로 건전하고 건장한 스포츠의 스폰서로 합류하면 분명 그 동안의, 카즈야가 총수로 있었을 때 당시에 쌓인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희석하는 효과도 있을 것 같다는 계산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뭐, 좋아. 그 동안 열심히 노력하고 고생한 것도 있으니… 한번 정도는 상을 줘도 괜찮겠지. 그리고 이 목석같은 조카님이 첫눈에 반한 사람을 실제로 보면 어떤 반응일지도… 궁금하고. 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게 변했다. 큽, 그런 진의 반응에 또 다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은 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렇게 진행시킬테니까… 아, 스폰서로 지원까지 하면서 그를 보고 싶은건 알겠지만 그 동안 쌓인 일들 모두 처리해야하는 게 조건이야. 알았나, 조카님? 리가 그 말을 남기고 총수실을 나갔다. 저벅저벅 복도를 걸어가며 리가 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두어번의 통화음 끝에 전화를 받은 건.

“ 아아, 라스? 지금 회사에 총수의 직인이 필요한 서류가 몇개나 있지? 143건? 그거 지금 이 시간부로 몽땅 진에게 가져다주게. 진한테 불이 붙었으니 그 동안 쌓인 서류들 한번에 처리하자고 ”

그래, 제대로 불이 붙었다. 오로지 화랑을 직접 실제로 보기 위해 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그 집중력에 더 큰 불을 붙인 건 화랑이 직접 찍어 팬카페에 올린 일본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는 소감에 대한 영상이었다. 평소와 달리 붉은 머리칼을 포니테일로 높게 올려묶은 화랑이 밝게 웃으며 올림픽 다음으로 열리는 세계대회에 참가할 수 있게 되서 영광이고 뭐, 언론은 내가 우승이니 뭐니 떠들어대지만 당일 시합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스포츠의 세계니까. 방심하지 않고 사범님한테 배운 거 하나하나 모두 이용해서 대회에서도 열심히 할테니까. 팬분들 모두 응원해주면 고맙겠고 혹시라도 직접 보러 오는 분들은 경기장에서 보자고! 라며 영상 속에서 환하게 웃는 화랑을 본 진은 화랑이 나한테 경기장에서 보자고 했어! - 한 적 없다 - 라며 집중력에 집중력을 더해 미친 듯이 일을 처리해 나갔다. 그 동안 혼잡했던 재벌 상황으로 진행하지 못하고 홀드 되었던 모든 안건들에 관련된 서류가 조금의 사정도 없이 한꺼번에 진에게 쏟아지자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총수님에 대한 역량을 시험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저렇게까지 해서 진짜 만나고 싶은건가 라며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뭐, 덕분에 대책없이 쌓여만 있던 안건들이 모두 처리되어 이제 진행하는 일만 남았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지만. 그리고.

“ …조카님. 긴장되는 건 알겠는데… 진정 좀 하게 ”

리의 말에도 진의 긴장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스폰서 전용 좌석에 앉아 긴장되는 듯 깍지를 낀 체 엄지 손가락을 꼬물거리던 진은 리의 말에 후우, 숨을 내뱉으며 진정하려 애를 썼지만 그래도 쿵쿵 뛰는 심장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그 모습을 보는 리의 기대감이 한껏… 커졌다. 아직 보지도 않았는데 이런 모습… 실제로 보게 된다면… 갑자기 일반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 환호성에 진이 번쩍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마치 짙어지는 황혼과도 같은 붉은 색의 머리칼과 영롱하게 빛나는 흑요석을 닮은 눈동자와 날카로운 눈매. 여유롭고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 걸음거리에서 보이는 유연하고 가벼운 몸. 그래, 화랑의 등장이었다. 호오, 봤을 때도 꽤나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더욱 더… 흑표범 같은 느낌이군. 그의 옆에 있는 건… 사범이라던 백두산인가? 그도 꽤나 하는 사람이군. 자, 그럼 직접 눈 앞에서 화랑을 본 우리 조카님의 반응은… 리가 화랑과 그의 옆에서 뭔가 말을 걸고 있는 백두산을 보다 힐끔 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호오라,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눈을 깜박일 틈도 없다는 듯 맑은 눈으로 화랑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 눈에는 어린아이의 소유욕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할아버지인 헤이하치와 아버지인 카즈야의 그늘에서 오로지 미시미 재벌의 후계자로서의 교육만 받아오며 자신의 욕심을 억제당하고 자란 진이 처음으로 보이는… 소유욕이었다. 차라리 물건, 하다못해 동물이었다면 손쉽게 손에 넣었을테지만… 진이 반한 건 사람이었다. 사람은 결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조카님도 참 어려운 길을 걸어버렸네. 리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번 더 손등으로 입을 꾹 눌러… 웃음을 참았다.

“ …음… 응? ”

한편, 시합을 위해 경기장에 들어온 후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 나오는 가요를 흥얼거리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던 화랑은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잠시 스트레칭을 중단하고 고개를 들어 경기장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그리고 누가봐도 VIP들이 앉을만한, 테이블이 딸려 있는 좌석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에 움찔, 순간 몸을 굳혔다. 우와… 깜짝이야. 뭐야, 저 겐도 포즈. 대체 누구야? 검은색 일색으로 빼입고 와서는 모 애니메이션에서 유행한 일명 겐도 포즈를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 놀란 화랑이 잠시 남자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집중하자, 집중. 하고 중얼거리고는 양 손으로 제 뺨을 아프지 않게 두드렸다. 짝, 작은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퍼졌다.

“ …귀여워 ”

사진으로, 영상으로 봤을 때는 마치 고양이과 동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육질의 유연한 몸, 상대를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매. 승기를 잡으면 절대로 놓치지 않고 결국 상대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날카로운 공격. 언론에서는 그를 맹금류, 특히 하늘의 제왕 독수리에 비유하곤 했지만 진의 눈에 화랑은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을 야생 흑표범으로 보였다. 물론 그런 야생 흑표범도 제 사범인 백두산 앞에선 얌전한 고양이처럼 굴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놓칠까 눈도 최대한 적게 깜박이며 화랑을 보던 진은 순간 그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어보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흡, 소리를 내며 급히 숨을 멈췄다. 표정을 감추기 위해 두 손을 깍지를 끼고 얼굴 앞으로 모으고 앉은 진이 잠시 자신을 보다 이내 고개를 흔들더니 양 손으로 짝, 제 뺨을 치는 화랑을 보곤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그냥 한마리의 고양이 같다. 냥냥 펀치. 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마치 배부른 고양이마냥 유유자적하게 스트레칭을 하던 화랑이 귀에서 이어폰을 빼 케이스에 넣고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시합을 위해 올라온 순간. 배부른 고양이는 한순간 상대의 목을 노리는 흑표범으로 진화했다. 헤드 기어 너머로 자신만만하게 웃는 표정이 시력이 좋은 진의 눈에 잡혔다. 상대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마치 그렇게 보일만도 하다. 하지만 그것도… 그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다 진이 폰을 들어 자신에게 온 문자를 확인했다. 눈으로 빠르게 문자를 확인한 진이 손을 움직여 문자를 삭제했다.

화랑은 32강부터 조금의 위기도 없이 상대를 모두 이기며 승승장구 했다. 그러나 문제는 8강이었다. 8강의 상대가 마치 실수인 척 체중을 실어 발꿈치로 화랑의 발등을 제대로 밟았다. 순간 지금까지 지워진 적 없는 화랑의 미소가 처음으로 입가에서 지워졌다. 밟힌 순간 움찔, 입을 꾹 다문 화랑이 밟히지 않은 발로 바닥을 디뎌 자세를 바꾸더니 그 밟혔던 발로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후려찼다. 헤드 기어가 벗겨지며 동시에 털썩 바닥으로 쓰러진 상대는 기절한 건지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후우, 한숨을 쉰 화랑은 상대를 잠시 내려다보다 이내 어느새 다가와 자신을 부축하는 백두산의 부축을 받으며 경기장에서 내려왔다. 상대에게 밟힌 발등이 순식간에 부어 올랐다. 이거 최악으론… 화랑이 한 손으로 거칠게 헤드 기어를 내던지듯 벗고는 그대로 대기실로 나가는 걸 본 리가 흠, 소리를 흘리고는 제 옆의 진을 힐끔 바라보았다.

“ …심정은 알겠는데… 표정 감춰 ”

금방이라도 사람 한명 담글 것 같은 표정이니까, 지금. 리의 말처럼 지금 진의 표정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진이 지금 분노하는 건 화랑이 다쳐서인 것도 있지만 정정당당한 스포츠에서 비겁하게 상대를 다치게 했다는 점이었다. 하아아… 신상 정보 다 알고 있으니까… 반드시 수장시켜주마. 라며 속으로 생각한 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오늘의 태권도 대회 일정은 8강 까지로 더 이상 진이 이 경기장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화랑이 신경쓰였다. 숙부님, 먼저 돌아가세요. 진의 말에 뭐라 말하려던 리가 결국 포기한 듯 한숨을 쉬고는 상대 다치게 하지마라. 라며 넌지시 언질을 건넸다. 그 언질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진이 저벅저벅 걸음을 욺겼다.

“ 괜찮으십니까? ”

화랑을 앉힌 후 친히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부운 발을 살피던 백두산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간게 아니니 의무실에서 붕대와 파스를 받아오겠다며 잠시 백두산이 자리를 비웠다. 하아… 한숨을 쉬며 바로 옆의 커다란 자판기에 몸을 기댄 화랑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순간 자판기의 사각지대에서 들린 목소리에 화랑이 퍼득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곳엔 아까 경기장에서 자신을 겐도 포즈로 바라보던 그 남자가 있었다. 어, 어…? 지금 나한테 말을 건거야…? 그나저나 누구야, 이 양반? 눈을 깜박이던 화랑이 퍼득 정신을 차리곤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 이 정도는 별거 아닌데... 사범님도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간게 아니라고 하셨고… 근데 그 쪽은 누구… ”

“ 실례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

남자가 품에서 꺼내 내민 명함을 받은 화랑이 명함에 적혀있는 글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시마 재벌의 총수, 카자마 진… 이라. 미시마 재벌의 이름은 화랑도 들어봤다. 일본을 떠나 전 세계를 주름잡는 거대 기업. 군수 기업으로 악명을 떨치다 총수가 바뀌고 최근에는 초대 미시마 재벌 총수의 신념처럼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기업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근데 설마 그 바뀐 총수가… 이렇게나 젊은 남자일 줄이야. 그리고 일본인인데… 한국말은 왜 이렇게 잘해? 잠시 진을 빤히 바라보던 화랑은 조심스럽게 저에게 다시 말을 거는 진에 퍼득 정신을 차리고는 명함을 손에 쥐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 미시마 재벌의 총수, 카자마 진… 근데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무슨 일로… ”

“ 아, 경기 잘봤습니다. 근데 경기 중간에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 것 같아 걱정되서… ”

“ 아, 진짜 별거 아닌데… 지금 사범님이 붕대와 파스를 가지러 가셨으니까… ”

“ 괜찮다면 미시마 재벌 소속의 병원으로 모셔다드리죠 ”

“ …왜? ”

순식간에 자신을 보는 화랑의 눈에 의구심과 의심이 가득 찼다는 걸 알아차린 진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거짓말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서 자신을 의심하는 이 흑표범의 의심을 푸는 거다. 저는 당신의 팬이거든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그 경기를 보고나서 당신의 팬이 됐습니다. 사실 화랑씨 때문에 제가 이 대회의 스폰서를 하게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진의 말을 들은 화랑의 표정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바뀌더니 이내 쑥쓰럽다는 듯 손을 들어 제 볼을 긁적이는 모습에 진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걸 눈치가 빠른 화랑이 알아차린 것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 그렇게 말해주니 조금 기쁘네… 아, 근데 진짜 병원까지 갈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은데… 사범님의 진단은 정확하니까 ”

“ 당신의 팬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해소시켜주지 않겠습니까? 부탁입니다 ”

이렇게까지 말하며 자신에게 내민 손을 보던 화랑이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낮게 한숨을 쉬고는 중얼거렸다. 사범님… 이 다녀오라고 하면. 그 말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의 대답을 받고 싶었지만 그에게 사범인 백두산의 존재는 너무나도 크다. 그래도 이 정도의 답을 받은 것만 해도 기적이지. 속으로 중얼거린 진이 손에 붕대와 뿌리는 파스를 들고 오는 백두산이 눈에 들어왔다. 파스를 뿌리고 사범님이 감아주신 붕대가 감긴 제 발을 보던 화랑이 다시 자판기에 머리를 기댄 체 사범님과 미시마 재벌의 총수라던 카자마 진이 대화를 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팬이라고 지칭하던 진이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 하다 지나가던 스태프에게 펜을 받아 명함 뒤에 무언가를 적어 백두산에게 내미는 모습을 말없이 보던 화랑이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벌떡 일어나려다 멀쩡한 한쪽 발로 땅을 딛고 조심스레 일어섰다.

“ 여기 카자마씨의 차를 타고 병원에 다녀오거라. 혹시 모르니 확실하게 진찰을 받는게 좋겠지 ”

“ …괜찮으시겠어요, 사범님? ”

“ 뭐, 그때는 그때다 ”

번뜩, 순간 진을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이내 다시 평소의 눈으로 돌아간 백두산의 말에 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확실하게 진찰 받고 괜찮다는 진단이 나오면 내 마음도 편해질거고… 그리고 사범님 말대로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는 그때고. 화랑이 조심스럽게 붕대가 감긴 발로 바닥을 딛는 순간 제 어깨를 잡아 부축하는 손길에 놀라 휙 저를 부축한 진을 바라보았다.

“ 다행히 뼈와 근육에는 큰 이상이 없으니 내일 시합엔 문제 없습니다 ”

“ 하아, 역시 사범님의 판단은 정확하다니까. 이제 됐지? 걱정할 필요 없어, 진 ”

“ 진단은 확실한거겠지? ”

“ 물론입니다, 총수님 ”

“ 그렇다네, 화랑 ”

“ 뭐, 여하튼 고마워. 진료 시간도 끝났을 텐데 나 때문에… ”

“ 신경쓰지마 ”

자타공인 대문자 E 성향의 화랑은 총수가 직접 운전하는 차 안의 적막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먼저 이것저것 사소한 이야기를 꺼냈고 그 과정에서 진이 자신과 같은 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젊은 나이에 총수라는 자리에 오른 진에 대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료비는? 진료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진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우겨서 병원으로 데려온거니까 진료비는 됐어. 그 말에 화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 빚지는거 별로 안좋아하는데. 그 말에 진은 말없이 웃었다. 그러면 화랑, 진료비 대신에…

“ 진, 화 좀 풀지 그래? ”

“ …… ”

“ 아니, 결승전을 못보게 된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잖아. 갑자기 긴급 사태가 터져버렸으니까 ”

그 말에도 진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 원래대로라면 진은 오늘도 경기장으로 가 화랑이 우승하는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봤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회사에 통조림이 된 이유는… 갑자기 급하게 총수인 진이 처리해야 될 긴급 안건이 생겨버린 탓이었다. 사실 긴급 안건이라고 할 일은 아니었다. 분명 다음 날 와서도 처리를 해도 될 사안이었으나… 문제는 항상 이사진들이었다. 하아, 아직도 날 길들이려고 시도하는게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이사진 놈들. 거칠게 페이지를 넘기는 진에 리와 라스가 작게 한숨을 쉰 순간 진의 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폰의 진동을 무시하던 진은 진동이 끊기고 5분 후 다시 진동이 울리자 뿌득, 이를 갈다 빠르게 폰을 낚아체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 뭐야, 지금 바쁘니까… ”

[ 엉, 뭐야. 통화도 불가능할 정도로 바빠? ]

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리와 라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진이 폰을 든 체 잠시 쉬자는 손짓을 보내고는 빠르게 총수실을 나가는 모습을 본 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리를 바라보았다. 리는 말없이 으쓱 어깨를 들어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총수실로 돌아온 진의 얼굴은 그 어느때보다… 밝았다. 그것도 진짜 이게 자기들이 알던 카자마 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다시 자리에 앉은 진이 양 손으로 제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저녁 전까지는 끝내죠. 리는 진의 행동이 어제 화랑이 했던 행동이라는 걸 깨닫고는 작게 웃었다. 아무래도 조카님이 제 태양에게 한발짝 접근 한 모양이었다. 역시… 뱀의 아들은 결국 뱀이라는 건가. 리가 잠시 카즈야를 떠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신도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오늘도 일을 처리하고 휴식 시간에 화랑의 팬카페에 들어간 진이 올라온 글들을 훑어보다 흥미를 끄는 제목을 발견하고는 그 글을 클릭했다. 글의 내용은 오늘 화랑 선수의 생일인데 명색이 팬카페가 생일 조공도 안하냐는 글이었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3월 20일, 그의 생일이었지. 공식적으로 올라와 있는 화랑의 생일이 오늘이라는 것을 떠올린 진이 스크롤을 내려 댓글을 확인했다. 그리고 진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댓글엔 드물게도 팬카페 운영진의 댓글이 달려있었다. 아쉽게도 팬카페에서는 화랑 선수의 생일 조공은 진행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화랑 선수가 생일 조공은 받지 않겠다고 하셔서 입니다. 개별적으로 선물을 하시는 건 막지 않습니다. 흐음… 그러고보니까. 진이 손을 움직여 화랑의 개인 SNS와 너튜브로 접속해 화랑의 3월 20일 업로드를 모두 확인했다. 특이한 것은 자신의 생일임에도 그것에 대한 언급이 1도 없었다. 보통은… 자신의 생일이면 한번이라도 언급을 할텐데… 흐음… 잠시 고민하던 진이 이내 폰을 들었다. 몇 번의 통화음이 들리고 이내 약간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 여, 진! 총수님이 바쁘지도 않나봐? 이런 대낮부터 전화라니 ]

“ 총수라고 맨날 바쁜 건 아니야. 통화 괜찮아? ”

[ 괜찮아. 그래, 무슨 일이야? ]

“ 시간 괜찮아? ”

[ 어, 시간은 괜찮은데 무슨 일 있어? ]

“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여하튼 시간 괜찮아? ”

[ 어, 괜찮아. 통화… 정도 할 시간은 있어. 그래서 무슨 일이야? 그냥 안부 전화? ]

“ 그것도 있지만… 오늘 생일이잖아 ”

[ 어? 어… 뭐, 그렇지 ]

“ 그래서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주려고. 원래라면 직접 얼굴 보고 밥이라도 사주려고 했는데 회사 일이 도통 끝나지를 않네 ”

[ 음… 그래? ]

“ …반응이 떨떠름 하네, 화랑. 무슨 문제라도 있어? ”

[ …뭐… 음… 오해하지마, 진. 네가 싫다거나 그래서 이런 반응인 게 아니니까 ]

“ 그럼? ”

[ …사실 오늘은 내 진짜 생일이 아니야 ]

“ 뭐? ”

[ 만난지 얼마 안된 너한테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건 좀… 네가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 ]

“ 아니, 괜찮아. 오히려 그렇기에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 …… ]

“ 말해줘, 화랑 ”

제 말에 말이 없는 화랑을 진은 조용히 기다렸다. 제촉하는 말도 하지 않았고 한숨도 쉬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태연하게 화랑의 말을 기다렸고 그 기다림이 화랑의 마음을 움직인건지 하아, 작게 한숨을 쉰 화랑이 제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은 내 진짜 생일이 아니야. 난… 고아원 출신이라 내 생일을 모르거든. 근데 왜 3월 20일이냐, 그건 내가 고아원에 버려진 날이 3월 20일이라 고아원에서 임의로 3월 20일로 생일을 정해준 것 뿐이야. 그러다보니… 나한테 오늘은 생일이 아니라 고아원에 버려진 날이니까… 별로 축하받거나 축복받을 날이 아닌거지. 뭐, 그래도 전화까지 하면서 축하 해준 건 고마워. 제 말이 끝났음에도 핸드폰 너머의 진은 말이 없었다. 역시… 좀 부담스러운 이야기였나. 어쩌지, 싶어서 잠시 눈을 굴리던 화랑은 조용히 들려온 목소리에 귀를 기울었다.

“ …나도 비슷해 ”

그리고 화랑은 덤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길을 강제로 걸어가야만 했던 힘든 일들, 도망도 쳐볼까 했지만 결국 생각을 바꿔 재벌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 힘든 길을 택했다는 이야기까지. 조용히 진의 이야기를 듣던 화랑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근데, 진.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까지 해줘? ]

“ …그럼, 화랑. 너는 왜 나한테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해준거야? ”

[ …… ]

“ 그런거야. 친구 사이에 힘든 이야기 꺼내고 서로 괜찮다고 위로해주고. 이런 거 나쁘지 않잖아? ”

[ 와… 오글거려 ]

“ 하하, 하지만 털어놓고 나니 속은 편하지 않아? ”

[ 응… 그러네. 이런 이야기 누군가한테 막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

“ 그래서 고아원 이름은 기억하고 있어? ”

[ 응, 기억하지. 아마 이름이… ]

진이 화랑과 몇마디 더 나누고는 통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턱을 괸 진의 손가락이 다시 천천히 책상을 두드렸다. 느리게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점점 빨라진다 싶더니 이내 딱. 큰 소리를 마지막으로 소리가 멈췄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진이 책상 위의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다, 부탁한 건? …불법적인 방향으로도 상관없어. 최대한 빨리 조사해줘. 필요하다면 금액은 더 줄테니까. 그래… 알았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작게 한숨을 쉰 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너머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떠 있는 건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로 강렬한 빛을 내뿜는 태양이 있었다.

결과가 너무 늦어, 시간을 얼마나 줬다고 생각하는거야. 회사 내의 모든 인원이 퇴근하고도 남은 늦은 새벽에 총수실에 남아있던 진은 벽에 기대 서 있는 누군가를 보내 날을 세웠다. 그런 진의 반응에도 태연하게 코웃음을 친 누군가가 천천히 진에게 다가왔다. 곧 달빛에 짧은 단발의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여성이 비추어졌다. 초기 정보가 너무 적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건가? 그만큼 금액도, 방법도 충분히 제시해줬을텐데? 결과도 내가 책임진다고 했고. 그런 변명은 신뢰를 떨어트린다는 거, 그쪽도 잘 알텐데? 진의 말에 여성이 어깨를 으쓱 들어보이더니 이내 서류와 USB를 진에게 건넸다.

“ 원하던 정보는 모두 거기 있어. 그나저나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지… 천하의 미시마 재벌의 총수가 고작 한국의 스포츠 선수의 생일 정보를 원한다니 ”

“ 그 이상 더 말하는 건 추천하지 않아, 니나씨. 그리고 단순한 생일 정보가 아니야 ”

“ 당신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조금 서두르는게 좋을거야? 카자마 진 ”

“ …… ”

진이 니나가 건넨 서류를 훑다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그녀의 말대로였다. 시간이 조금 촉박했다. 하아, 가볍게 한숨을 쉰 진이 니나를 바라보았다. 수고했어, 약속한대로 더 얹어서 지급해줄테니까. 진의 말에 니나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고는 조용히 총수실을 빠져나갔다. 진이 제 책상에서 공용으로 지급받는 노트북이 아닌 개인용의 노트북을 꺼내 USB를 꽂아 안의 데이터를 확인했다. 눈을 움직여 안의 데이터를 확인한 진이 제 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한숨도 못자긴 했지만… 쉴 시간이 없었다. 후, 작게 숨을 내뱉은 진이 USB의 데이터를 어딘가로 보내고는 노트북에서 USB를 빼내더니 그대로 손에 힘을 줘 그대로 부셔버렸다. 후두둑, 잔해를 깔끔하게 쓰레기통에 모두 버린 진이 노트북의 전원을 꺼 다시 집어넣고는 총수실을 나서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나다, 지금 당장 한국행 비행기를 수배해줘.

7월 15일. 이 날도 화랑에게는 그저 평범한 날이었다. 다음 대회를 위해 훈련을 하고 시간이 남은 김에 사범님이 운영하는 태권도장의 꼬맹이들과 어울려주는, 평범하게 보내고 평범하게 끝 낼… 그런 날. 하지만 오늘부로 7월 15일은 화랑에게 뜻깊은 날이 될 게 분명했다. 바로… 제 집의 문을 두드린 진으로 인해서. 19살이 되자마자 태권도장이 아닌 독립해 살기 시작한 화랑은 - 그래봤자 도장에서 10분 거리긴 하지만 - 평소의 규칙적인 생활 패턴으로 인해 이미 자기 위해 침대에 누운 상태였다. 무감각하게 폰을 보다 이제 잘까 싶어 방의 불을 끄려는 찰나. 화랑은 제 집의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벌떡 침대에 몸을 일으켰다. 뭐야, 누구야? 누군데 이 늦은 시간에… 또 취객인가? 투덜투덜 거리며 문 앞에 선 화랑이 거칠게 소리쳤다.

“ 뭐야, 누구야? 누군데 이런 늦은 시간에… ”

“ 화랑? 나야, 진! ”

“ …뭐? 자, 잠깐만! ”

현관문 밖에서 들린 목소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진이었다. 당황한 화랑이 황급히 잠금을 풀고 벌컥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밖에는 급하게 온게 역력한 모습의 진이 있었다. 손에 왠 서류 같은 걸 든 체 급하게 숨을 몰아쉬는 진에 당황한 화랑이 다급하게 외쳤다. 너, 우리 집은 대체 어떻게 알고…! 뭐라 더 말하려던 화랑을 막은 건 진이었다. 15일이 가기 전에… 알려주고 싶었거든. 그 말에 힐끔 화랑이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의 시간은 1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단… 들어와. 나에게 알려주고 싶은게 무엇인지, 그리고 제 집의 주소를 어떻게 알아낸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화랑은 진을 제 집으로 들였다. 실례할게. 조심스럽게 집으로 발을 들인 진이 집안을 살피는 사이 현관문을 닫은 화랑이 팔짱을 끼고 뭐라 말하려던 찰나, 진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화랑에게 내밀었다.

“ 이거… 뭐야? ”

“ 열어봐 ”

제게 내밀어진 서류를 바라보던 화랑이 서류를 받아 조심스럽게 개봉했다. 안에 들어있는 서류는 단 한장이었다. 뭐지… 출생… 신고서…? 자신이 본 단어의 뜻을 순간 이해하지 못한 화랑이 입으로 계속 중얼거리다 번쩍 고개를 들어 진을 바라보았다. 진은 그저 말없이 계속 확인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화랑의 눈이 빠르게 서류를 훑는 동안 서류를 쥐고 있는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서류 끝까지 눈으로 다 읽은 화랑이 말을 잃은 듯 침묵하다 한마디 툭 내뱉었다.

“ 이… 게 진짜라는 증거는? ”

“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사실 좀… 불법적인 행위까지 했어 ”

“ 불법? ”

“ 해킹. 화랑 넌 나랑 같은 동갑이니까 계산해서 네가 태어난 년도의 서울에서 태어난 아이의 출생 기록을 모조리 확인했어 ”

“ …그래서? ”

“ 그 중 화랑 너라고 생각되는 기록을 모은 다음 직접 친모, 혹은 가족을 찾아서 그때 네가 기억하던 그 고아원에 아이를 버렸는지 대조까지 했어. 그리고… 찾았지 ”

“ …… ”

“ 7월 15일. 그게 네가 진짜 태어난 날이고 너의 생일이야. 날짜가 바뀌기 전에…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생일 축하해, 화랑 ”

진이 고개를 들어 집 안의 시계를 확인했다. 진이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한 순간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모두 12시로 향했다. 날짜가 바뀌었다. 후,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7월 15일이 지나기 전 전할수 있어서 다행… 진이 다시 화랑을 바라봤다. 그리고 당황했다. 화랑이… 울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류를 손에 든 체 소리도 없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화랑을 보던 진이 당황하다 이내 조심스레 손을 들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널 울릴려고 알려준 건 아닌데… 당황한 진의 말에도 소리없이 울던 화랑이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제서야 화랑의 입술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이 조심스럽게 화랑을 품에 안아 그 등을 토닥였다. 화랑은… 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체 계속해서 오래동안 흐느끼며 울었다.

“ …미안, 못볼 꼴 보였네… ”

“ 아냐, 네 심정 이해해. 이제 속은 좀 풀렸어? ”

“ …응… ”

한참을 울어서 그런지 조금은 후련한 표정을 지은 화랑이 건네준 컵을 받은 진이 단숨에 컵에 담긴 차가운 물을 마셨다. 미안, 하필이면 쥬스가 다 떨어져서… 그 말에 신경쓰지 말라며 작게 웃은 진이 여전히 손에 든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화랑을 바라보았다. 근데 진… 저기… 내… 부… 모님은… 우물쭈물 답지 않게 말을 고르는 모습에 진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 네 부모님은 사정이 있어서 이름도 전하지 못하고 널 고아원에 버렸다고 하더라. 지금은 굉장히 후회하고 있고 어떤 사정이든 널 버린 건 사실이라 만나기 보다는 그냥 네가 잘되기를 항상 기도하겠다고 하셨어 ”

“ …내가 누군지는 말했어? ”

“ 안했어. 혹시 만나고 싶다면… ”

“ …아니, 괜찮아. 딱히… 만나고 싶은 건 아냐. 내 가족은 오직 사범님 한 분 이니까 ”

“ …응 ”

“ 그냥, 내가 운 건… 내가 싫어서, 미워서,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태어나서… 출생 신고도 없이 그냥 버렸을거라… 생각했거든. 근데 출생 신고는 했다는 건 적어도…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는 아니었다는거잖아. 그냥… 뭔가 내 존재를 인정받은 느낌이 들었어 ”

“ …응 ”

“ 근데… ”

화랑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서류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거 진짜 불법이야? 화랑의 질문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불법이야. 네가 지금 이 사실을 경찰에 알리면 아마 난 벌금형 아니면 징역형 나올걸? 근데… 진. 왜 불법까지 저지르면서 나한테 이걸 알려준거야? 우리 친구라지만 보통 친구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나? 설마… 나 좋아해? 자기 딴에는 장난이라고 한 말이겠지만… 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화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이 화랑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 눈을 마주쳤다. 어어… 어…? 당황한 화랑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소리가 흘러나왔다.

“ 네 이야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이런 불법적인 일까지 저질렀다고 하면 믿어 줄거야? ”

“ 어… 어? ”

“ 네가 스스로 태어날 날을, 생일을 불행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널… 기쁘게 하고 싶었어 ”

“ 자, 잠깐… ”

“ 그리고 네 진짜 생일을 제일 먼저 축하해주는 게 나였으면 했거든 ”

“ …진심이야, 너? ”

“ 난 말이야, 화랑.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에게 반했어. 네가 너무 환하게 빛나는… 태양 같았거든. 그러니까 ”

진이 화랑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어… 어…? 나한테 기회를 주지 않을래, 화랑.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잠시 넋이 나간 화랑이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아, 으… 아…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 거리는 화랑의 모습에 작게 웃은 진이 다시 한번 더 이마에 입을 맞추곤 조심스럽게 화랑을 끌어 안았다. 으아아…! 당혹과 혼란스러움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이내 눈을 꾹 감고 제 어깨에 얼굴을 묻은 화랑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진이 눈을 번뜩이고는 작게 웃었다. 진은 알고 있었다, 화랑에게서 나올 대답은 이제 단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을.

“ 처리는? ”

[ 깔끔하게 바다에 수장 시켰으니 걱정마. 그나저나 이런 일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기업의 총수가 직접 요청을 하다니. 리 차오랑, 그 사람은 알고 있나? ]

“ 받은 만큼 조용히 입 다무는게 좋을거야, 니나씨 ”

[ 하하, 정말 진심인가 보군… 그렇게 그 화랑이라는 녀석이 소중한가? ]

“ 니나 윌리엄스 ”

[ 농담이야. 그럼 다음 번에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또 찾아주길 바래 ]

통화를 끊은 진이 후우, 숨을 크게 내쉬며 의자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진의 눈에 번개가 튀었다 사라졌다. 화랑에게는 사정이 있어서 고아원에 버렸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분명 처음엔 서로 사랑해서 화랑을 낳은 것은 맞았다. 그러나 화랑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돈 문제로 싸우기 시작했고 화랑의 존재는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화랑을 보살피기를 거부했고 그렇게 화랑은 아무도 없는 어두운 새벽 고아원에 버려진 것이었다. 이미 오래 전 이혼해서 따로 살고 있던 화랑의 친부와 친모는 여전히 돈에 환장한 악령들이었고 진이 직접 찾아가 아이의 생존을 말했을 때 그들은 아이의 이름을 물었다. 이유는 뻔했다. 만약 자신들이 버린 아이가 유명해졌다거나 혹 돈이 많다면 친부, 친모라며 찾아가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겠지. 자신들이 필요 없다고, 걸림돌이라며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돈 때문에 찾는 그 모습은 정말 속물이었다. 그들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면 화랑을 태어나게 해 준 보답으로 약간의 돈을 줄 생각이었던 진은 두 속물의 모습에 생각을 싹 바꿔 그들을 바다에 수장시켰다. 혹여나 화랑이 친부모를 찾다가 상처 받는 일이 없도록.

" 아, 화랑 “

[ 어, 진. 일단 사범님한테는 말씀 드렸어. 사범님도 기가 막혀 하셨다고! 대기업의 총수가 그렇게 쉽게 불법적인 일을 저질러도 되나… 이러시면서! 맞다, 우리 집 찾은 것도 불법으로 찾은거지! ]

“ 하하, 하지만 용서 해주셨지? ”

[ 으으… 어쩔 수 없잖아. 사, 사귀는 상대를 감옥으로 보낼 수도 없고… 그리고 날 위해서라고 했잖아, 너… ]

“ 아, 지금 얼굴 못보는게 아쉽네 ”

[ 시끄러워! 여하튼… 오늘 하루도 힘내라, 진 ]

“ 응, 화랑도 ”

통화를 끊은 진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다 잘 풀렸다. 화랑과 만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화랑의 상대 선수를 매수해 일부로 화랑의 발을 밟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상대는 아주 훌륭하게 일을 처리해줬고 그 대가로 진은 제 개인 계좌에서 아주 약간의 돈을 지불했다. 그래봤자 푼돈이었지만. 그러고보니 리 숙부가 이카로스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던가…? 충고도 잊어버리고 높게 날아오르다 태양빛에 밀랍의 날개가 녹아버리고 결국 익사했다는 이카로스. 하지만… 난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 준비도 없이 태양을 향해 날아갈 생각이 없어. 나의 날개는 밀랍이 아니라… 태양빛에도 절대로 녹지 않고 그 태양을 품에 안고 가둘… 뱀의 날개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웃는 진의 뒤로 아주 새까만 날개가 보였다. 태양을 가둬도 절대로 한줄기 태양빛 조차 통과시키지 않을 아주 까만 날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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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부하는 날다람쥐

    해피엔딩에 전체적으로 밝은 내용이지만 어두침침한 반전도 적절하게 잘 어우러지는 멋진 생축글 잘 읽었습니다! 화랑아 생일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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