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진화랑] 썰 모음 26

진화랑스팁 1개,진화랑카즈 1개, 진화랑 1개. 썰 모음은 오랜만입니다.

1. 사격 선수 화랑과 수영 선수 진, 귄투 선수 스티브로 올림픽 AU. 차갑고 오직 자신의 승리에만 관심이 있는 2P 화랑과 그런 화랑의 유일한 친구인 스티브, 그리고 화랑에게 흥미를 가지고 접근하는 진으로 진화랑스팁. (포타에서 연성 할 때 어떤 분이 2P 화랑을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겨우 쓸 수 있게 되었다)

무감각한 얼굴로 휴게실의 테이블에 엎드린 체 고개만 옆으로 돌려 멍 때리고 있던 화랑은 제 얼굴 앞에 놓여진 차가운 음료수 캔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슬쩍 올려 음료수 캔을 놓은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요새 매일같이 보고 있는, 자신을 귀찮게 하는 인간.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확인한 화랑이 눈을 가늘게 뜨다 이내 고개를 휙 반대편으로 돌렸다. 노골적으로 관심도 없고 귀찮게 굴지 말라는 그 태도에도 남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음료수 캔을 들어 다시 화랑의 시야가 닿는 얼굴 앞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몇번의 실랑이 끝에 후, 한숨을 쉰 화랑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서야 자신에게 시선을 주는 화랑에 기쁘다는 듯 웃은 남자가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겨 안고는 다시끔 내려놓은 음료수 캔을 화랑을 향해 밀었다. 잠시 그 음료수 캔을 바라보던 화랑은 그 캔을 집어 든다거나 던진다거나 하는 행동 대신 드르륵 의자를 밀고 일어나더니 이내 휴게실을 나가버렸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던 남자가 오늘도 실패네, 라고 중얼거리며 화랑이 앉아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한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와 뭐라뭐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화랑의 태도에 대해 비난하는 말들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던 남자, 진은 이내 화랑에게 주려 내려놓았던 음료수 캔을 따 대신 마시며 입맛을 다셨다.

카자마 진. 일본 수영 선수로 장거리 종목에 특화되어 이번 올림픽에서 자유형 800m와 1500m의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한 명이었다. 그에 걸맞은 체격에 비해 맞지 않을 정도로 선한 외모를 지닌 덕분에 많은 여성팬을 거느리고 있기도 한 진은 올림픽 참가를 위해 참가지에 도착하고 난 후 단 한 명에게 시선이 꽂히고 말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화랑이었다. 참가지에 도착해 주최측에서 마련한 숙소에 짐을 풀고 휴게실에 도착한 진은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를 뽑아 소파에 앉고 휴게실 곳곳에 설치된 TV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 시작될 올림픽 홍보 영상을 보던 진은 올림픽을 빛낼 21살의 우승 후보 선수 3인방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나온 자신의 모습에 슬쩍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살폈다. 휴게실에 있던 이름도, 얼굴도, 국적도 모를 선수들이 화면에 나온 진을 알아보고는 먼저 손을 내밀면 악수를 청하며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는 걸 받아 준 진의 눈에 자신의 뒤를 이어 영국 권투 선수 스티브 폭스의 소개 영상이 흘러나왔다. 미들급 부분에 참여하는 우승 후보로 음속의 천재 복서라는 별명을 가진 복서. 진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약속한 것도 아닌데 휴게실에 그가 있었다. 밝은 금발의 파란 눈을 하고 역시나 자신을 알아본 선수들의 인사를 반갑게 맞아주는 그의 오른쪽에는 왠 낯선 남자가 있었다. 마치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어깨동무를 한 스티브의 품에 반쯤 갇힌 남자의 무감각한 눈을 확인한 진은 이내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바로 스티브의 뒤를 이어 나온 홍보 영상 때문이었다.

한국 사격 선수, 화랑. 10m 공기권총과 25m 권총속사 부분에 출전하는 우승 후보로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게 오직 과녁을 맞추는 것에만 집중해 Cool Gun 이라는 별명을 가진 선수. Cool Gun이라, 진이 힐끔 화랑을 바라보았다. 별명에 맞지 않는 마치 화염을 연상시키는 붉은 빛의 머리칼을 한 그의 주위로 이상하게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다. 자신과 스티브 때 와는 다른 태도에 진이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누군가가 화랑에게 다가와 뭐라뭐라 말을 걸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화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조금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여전히 무감각한 눈으로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는 화랑에 발끈한 그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끼어든 건 화랑을 제 품에 넣고 있던 스티브였다.

“ 아아, 미안. 이 녀석 낯가림이 심해서 말이야. 이해 좀 해달라고 “

그렇게 말하며 남자를 달래며 돌려보내는 스티브조차 쳐다보지 않던 화랑이 이내 툭 제 어깨에 걸쳐져있던 손을 쳐내며 몸을 돌려 휴게실을 나가는 걸 스티브가 여유롭게 따라나섰다. 휴게실에서 두 사람이 사라지자 이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웅성웅성 소리가 터져나왔다. 간간히 화랑의 이름이 나오는 거 봐서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분위기가 절대로 온화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뭘까… 싶었던 진이 슬그머니 선수들 사이에 끼어 귀를 기울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화랑에 대한 뒷담화라는 걸 알게 된 진이 속으로 혀를 찼다. 뭐, 사교성이 떨어지고 사람을 무시하는 그 태도가 마음에 안들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뒷담화라니. 여기 있어봤자 나만 손해겠네. 그렇게 중얼거린 진도 이내 발을 움직여 휴게실을 나갔다. 어차피 안면 트고 친하게 지낼 사이도 아니니까, 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올림픽이 개막하고 화랑의 경기를 보기 전까지는.

칠흑 같은 검은색 모자를 꾹 눌러쓰고 조준용 안경을 착용한 체 권총을 들어 과녁을 조준하던 화랑이 조용히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이내 찍힌 점수는 그야말로 여지껏 보지 못했던 가장 완벽에 가까운 점수였다. 10점을 넘어서 중앙에 거의 정확하게 맞췄다는 소리, 그것도 59발을 전부 다! 경악과 감탄을 금치 못하는 주변의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차가운 표정 그대로 다시 권총을 든 화랑이 마지막으로 쏜 탄환도 10점을 맞추자 주변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쏟아져나왔다. 그래, 금메달이었다. 10m 공기권총 부분에서 신기록을 달성하며 금메달을 확정 지은 화랑의 표정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했다. 표정 변화없이 총기에 안전장치를 걸고 천천히 주변을 정리하던 화랑이 이내 쓰고 있던 조준용 안경을 벗으며 자신을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를 응시하는 것도 잠시. 이내 흥미를 잃어버린 듯 짐을 챙겨 터벅터벅 자신을 기다리는 코치님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휴게실의 TV 중계를 통해 확인한 진이 하, 탄성과도 비슷한 소리를 내뱉었다.

젠장, 섹시해. 다른 선수의 경기를 보고 이런 소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진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등을 꼿꼿하게 펴고 모자 아래에서 날카롭게 과녁을 응시하던 눈동자. 그리고 한발한발 맞출 때마다 숨길 수 없다는 듯 터져나오는 한숨 소리. 그래, 섹슈얼리티 그 자체였다. 진의 눈이 시상대의 제일 높은 곳에 오르는 화랑을 바라보았다. 금메달을 목에 거는 그 순간에도 입가에 미소 하나, 기뻐하는 감정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래, 당연한거다. 그에게 있어 승리, 우승은 당연한 것이기에 더 이상 기뻐할 이유가 없는거다. 그 무감각한 눈에 품은 감정을 파악한 진이 이내 제 뒤에서 들려온 이야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를 향한 음담패설을 일삼는 외국 선수들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던 진이 쯧, 혀를 차며 자리에 일어서려는 순간. 뒤에서 쾅, 하는 큰소리에 놀란 진이 휙 뒤를 돌아보자.

“ 이봐, 당사자 없다고 그런 이야기 막하지 말라고. 천박해보이니까 “

며칠 전 화랑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제 품에 가두고 있었던 장본인, 스티브가 그에게 음담패설을 하던 무리들이 앉아있던 테이블을 주먹으로 세차게 내린친 것이었다. 과연 진심은 아니라지만 미들급 우승 후보의 주먹은 장난이 아니었고 어딘가 모르게 삐걱 소리를 내며 조금 부셔진 것 처럼 보이는 테이블에 음담패설을 내뱉은 무리들이 스티브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하여간에… 저런 녀석들은 매번 나온다니까. 쯧, 혀를 찬 스티브가 삐걱대는 테이블을 보다 작게 휘파람을 불며 휴게실을 나가는 걸 진이 가만히 보다 슬쩍 그쪽으로 이동해 툭 테이블을 건드렸다. 이내 테이블이 큰소리를 내며 부셔졌다.

숙소 입구에 발을 들이밀기 무섭게 달려온 자신의 요란한 축하를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화랑의 태도가 익숙한 듯 스티브는 어깨동무를 하며 제 품으로 화랑을 가두고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듣기 귀찮다는 듯한 태도를 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는 듣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스티브가 화랑을 놔준건 그의 방에 도착해서였다. 화랑에게 어느 정도 거리를 허락 받았지만 아직 그의 퍼스널 스페이스에 해당되는 방까지는 허락 받지 못한 스티브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쉬라며 휙 가버리는 걸 바라보던 화랑이 제 방으로 들어갔다. 짐을 정리하고 메달이 든 상자를 보다 상자에서 메달을 꺼낸 화랑이 제 손에 들린 메달을 무감각한 눈으로 보다 이내 대충 침대에 내팽겨치고는 휴게실로 향했다. 시시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휴게실에 도착한 화랑이 자판기 앞에 서서 동전을 집어 넣고는 평상시 마시던 이온 음료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 안녕? “

제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잠시 멈칫했던 화랑이 이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움직여 이온 음료의 버튼을 눌렀다. 캔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온 이온 음료를 꺼내 대충 상의로 입이 닿는 부분을 닦은 화랑이 캔을 따고 기울여 한모금 마셨다. 익숙한 맛에 작은 숨을 내쉰 화랑이 자신에게 말을 건넨 남자를 무시하고 그를 스쳐 나가려는 순간. 두꺼운 팔이 길을 막았다. 눈을 가늘게 뜬 화랑이 몸을 돌려 반대방향으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그 길마저 또 다른 팔에 막혔다. 졸지에 자판기와 남자 사이에 끼게 된 화랑이 정면에 서 이온 음료를 마시며 힐끔 자신을 가로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위로 솟은 머리가 꽤나 인상적인 처음보는 남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시감에 이걸 어디서 느꼈더라,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래, 과거 스티브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과 동일했다.

“ 비켜 “

“ 안녕이라고 인사했는데 돌아온 대답이 비켜라니, 조금 슬픈데 “

“ 인사 받아줄 생각없어. 귀찮게 하지말고 비켜 “

“ 내 이름은 카자마 진이야. 네 경기 잘 봤어, 금메달 축하해 “

“ 비켜달라고 했어 “

화랑의 싸늘한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소개 및 금메달 획득의 인사를 건넨 진에 화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누군지 관심 없으니까 비키라고. 그 말에 진이 어깨를 으쓱 들더니 동전을 꺼내 자판기에 넣고는 꾹 버튼을 눌러 음료를 뽑았다. 여전히 화랑을 가둔 체 음료를 꺼낸 진의 손에 들려있는 건 화랑이 마시고 있는 것과 같은 음료였다. 손을 움직여 캔을 따고 한모금 마신 진이 입맛을 다셨다.

“ 생각보다 맛있네. 앞으로 자주 마셔야겠다 “

“ 그러던가. 그럼 이제 비켜 “

“ 내 이름 기억해준다고 하면 비켜줄게 “

“ 관심 없어 “

“ 난 관심 있거든 “

말이 안통한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관심이 없다, 비키라고 말을 하는데도 마치 제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자기 할 말만 하는 진에 화랑의 미간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한숨처럼 숨을 크게 내쉬는 화랑을 보는 진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 녀석, 그냥 행동 하나하나가 사람의 무언가를 자극하는 타입이다. 그런데다 사람에게 관심없고 차가우니 주변에서 분명 가만두지 않았을텐데… 아, 그래서 그가 마치 화랑을 자기 것인 것 마냥 행동했던걸까? 화랑을 제 품으로 끌어당기며 가볍게 웃던 스티브를 떠올린 진이 여전히 자신을 무감각한 얼굴로 바라보는 화랑과 눈을 마주쳤다. 이렇게까지 사람에게 감정 없다는 눈이라니. 이 정도까지 했으면 짜증이라던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다는 감정을 가질텐데. 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이 없는 화랑으로서는 자신을 보는 이 눈도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 호기심을 가지는 주변 상황도 그저 배경일 뿐이었다. 이제 그만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화랑이 눈을 한번 깜박이더니.

“ 그래, 기억할테니까 이제 그만... “

“ 기억할 필요 없어, 화랑 “

말 뿐이라도 기억할테니 비키라는 말을 막듯 순식간에 진의 팔을 뿌리치며 화랑의 어깨를 붙잡아 끌어 당긴 건 스티브였다. 스팁. 화랑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아닌 스티브의 이름이, 그것도 마치 애칭처럼 줄여서 부르자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왜 이리 기분이 나쁘지…? 한편 거친 숨을 내쉬며 화랑을 제 품으로 끌어당긴 스티브가 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녀석 분명 그때 그 홍보 영상에서 같이 묶어서 나왔던… 이름이 카자마 진이었나…? 그나저나 어디서 함부로 수작질이야…? 서로를 노려보던 둘 중 먼저 말을 꺼낸 건 진이었다.

“ 미안한데 지금 화랑이랑 대화하는 중이니까 빠져 ”

“ 대화? 미안한데 내가 보기에는 대화가 아니라 귀찮게 하는 것 같은데 ”

“ 뒤늦게 와 상황도 모르면서 멋대로 판단하는군. 화랑을 내놔 ”

“ 미안하지만 너 같은 녀석은 이미 수도없이 봐왔거든. 화랑한테 수작 부리지 말고 꺼져 ”

“ 네가 뭔데 수작 부리지 말고 꺼지라고 하지? 애인이라도 되나? ”

“ …… ”

그 말에 스티브가 말없이 인상을 찌푸리자 진은 속으로 조소했다. 그래, 생각해보면 화랑의 스티브를 대하는 태도는 묘했다.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하기에는 저에게 가깝게 다가오는 스티브를 거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친구나 애인을 대하듯 살갑게 대하지도 않았다. 그래, 화랑에게 있어서 스티브의 존재감은 자신에게 닿아도 되는, 딱 그 정도의 관계일 뿐이었다. 물론 이 정도의 관계를 가진 건 스티브 뿐이고 그 이상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의 소중한 코치님 뿐이었으니 화랑에게 있어 스티브는 나름 중요한 존재이긴 했다. 그걸 본인이 티를 안내서 그렇지. 잠시 말이 없던 스티브가 이내 하, 한숨 비슷한 숨을 내뱉고는 뭐라 반박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스티브의 품 안에서 꿀꺽, 음료를 마시던 화랑이 후, 텅텅 비어버린 캔을 가볍게 우그러트리더니.

“ 그만 가자, 스팁 ”

“ 어? ”

“ 뭐야, 여기 있을거야? ”

“ 아니, 나도 돌아가려 했어. 가자 ”

휙 먼저 몸을 돌린 화랑이 익숙하게 우그러트린 캔을 스팁에게 건넸고 역시나 익숙하게 그 캔을 받은 스티브가 캔을 버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런 화랑을 붙잡으려던 진을 향해 스티브의 주먹이 빠른 속도로 코 앞까지 왔다가 사라졌다. 훅, 주먹으로 인한 작은 풍압에 멈칫 손을 멈춘 진이 결국 휴게실을 나가버린 화랑에 후, 작은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인은 아니지만 화랑이 스티브에게 무심하지 않다는 걸 보게 된 진이 머리를 쓸어 올리다 눈을 번뜩이며 오히려 더 화랑이 궁금해졌다고 작게 중얼거렸다.

“ 어디까지 쫓아와. 나 이제 쉴거니까… ”

“ 화랑 ”

“ 왜 ”

“ 너한테 있어서 나는… 어떤 존재야? ”

기어코 제 방 앞까지 따라 온 스티브에 제 방의 문고리를 붙잡은 화랑은 난데없이 날아온 질문에 문고리를 붙잡은 체 고개를 돌려 스티브를 바라봤다. 자신을 보는 스티브의 얼굴에 왠지 모를 긴장감이 서려있는 것을 보았지만 화랑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생기지 않았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화랑이 고개를 돌리고 문을 열며 한발짝 발을 들이자 스티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 내일 ”

“ 응? ”

“ 내일 경기 있지? ”

“ 아, 응. 4강 전 ”

“ …보러 갈게 ”

“ 진짜지? ”

“ 응, 진짜야. 보러 갈테니까 자리 만들어놔 ”

“ 약속했다 ”

“ 약속은 지켜 ”

그 말을 끝으로 화랑이 제 방으로 들어가고 굳게 닫힌 문을 보던 스티브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카자마 진, 그 자식이 아니라 나한테 관심을 가지고 나만 신경써주면 된다. 이 관계를 조금씩조금씩 허물어 가면서 너에게 닿으면 된다. 하아, 정말이지… 자기 밖에 모르고 제 감정만 중요한 사람에게 닿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그래도… 그걸 감수할 정도로 나는 네가 좋다. 그러니까 하루에 1초라도 좋으니까 어제보다 조금 더 나를 봐주고 나를 생각해 주기를. 손을 뻗어 문을 짚은 체 잠시 서 있던 스티브가 휙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애시당초 질 생각이 없었지만 더욱 더 지고 싶지 않아졌다. 경기도, 그리고 화랑과 관계된 모든 일에서도.


2. 희귀 종족 및 영물 등을 납치, 경매하는 G사에 붙잡힌 청상아리 인어 화랑과 그런 G사를 쫓는 진. 그리고 그 G사의 리더 카즈야로 진화랑카즈. 진과 화랑의 첫만남이 묘사됩니다. 카즈야는 일단 언급 정도.

위그드라실의 대형 항공모함인 비도프니르의 브리짓에 모인 사람들을 훑어본 리가 가볍게 손뼉을 치며 자신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희귀 종족과 영물 등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로 출발한 위그드라실은 초창기 극히 두 자리의 적은 수로 시작해서 지금은 네 자리가 넘을 정도로 인원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현장에서 직접 뛰어야하는 인원은 30명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막강한 무력으로 위그드라실의 구출 작전은 성공률이 90%에 다다를 정도였다. 준비는? 언제든지 돌입해도 될 정도야.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리의 말에 진과 라스, 알리사, 그리고 샤오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위그드라실은 G사의 아시안 지부를 습격한다. 그 동안 G사의 꼬리를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결과가 오늘에서야 빛을 발하게 된 것이었다. G사는 희귀 종족과 영물들을 납치, 불법 경매하는 여러 조직 중 가장 크고 범접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진 조직이며 조직원이 몇명인지, 보스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베일에 가려진 조직이었다. 또한 위그드라실에 몸을 담고 있는 여러 사람들 중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이 G사에게 붙잡혀 있다가 구조 된 뒤 스스로 위그드라실의 일원이 되기를 자처한 사람들이었다.

“ 준비 됐으면… 가자 ”

진이 호버링을 유지하며 열린 비도프니르의 해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다 힘을 개방했다. 그러자 분명 인간이었던 진의 머리 위로 뿔이 생기고 뒤이어 등 뒤에서 커다란 검은 날개가 돋아났다. 진은 평범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특이 종족이냐, 그것도 아니었다. 그래, 카자마 진은 인간이지만 인간을 뛰어넘는 일명 초인이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비도프니르에서 뛰어내린 진을 따라 리와 라스, 알리사, 그리고 샤오유도 뛰어내렸다. 각자 자신들의 힘으로 혹은 과학의 힘을 빌려 바다 한가운데 마치 시추선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G사의 아시안 지부로 접근하자마자 내부에서 큰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미리 리가 내보낸 컴봇들이 내부를 헤집어 놓는 소리였다. 라스의 손을 잡고 하강하던 알리사가 오른손을 들어 제 관자놀이에 대며 소리쳤다.

“ 지하에 감금되어있는 자들을 찾았습니다. 총 78명입니다 “

“ 그래, 일단 컴봇으로 신속하게 비도프니르로 옮긴다 “

“ 그런데… 수상한 장소가 발견됐습니다. 지하 감옥보다 더 깊은 곳에 누군가 있는 것 같고… 진입한 컴봇의 신호가 잡히지 않습니다 “

“ …직접 가야겠군 “

리는 제가 개발한 컴봇의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는 건 부셔졌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에 컴봇 하나하나를 자기 자식처럼 생각하는 리로서는 한숨이 절로 나올 일이었다. 건물에 내려와 모습을 감춘 진과 일행들이 알리사가 안내하는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동 중간중간 자신들을 기습하는 불한당들을 막강한 무력으로 제압시킨 일행들이 내려내려 도착한 곳은 어두침침한 거대한 크기의 방이었다. 어둡군, 스위치는 없나? 라스의 말에 알리사가 내부를 스캔하는 사이 리는 문 근처 벽에 널부러져있는 컴봇을 발견하고는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컴봇을 살폈다. 무언가 일순간 강한 충격을 받고 그대로 셧다운 됐다. 그리고 동체가 젖어있다라… 왜 젖어있는거지? 그리고 리의 궁금증은 곧바로 해결되었다. 이번에도 알리사였다.

“ 방 한가운데 거대한… 수족관 같은 것이 있습니다. 꽤나… 깊어보입니다 “

“ 수족관? 그럼… 여기는 해양 종족과 영물들을 감금하는 장소인건가? “

“ …그럴지도 모르겠군 “

“ 그럼 컴봇을 보고 적이라고 판단해 공격한 걸지도 모르겠군 “

“ 다만 의문점은 지하에 감금되어 있는 자들 중에는 해양 종족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곳에 감금되어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요? “

그 말에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보다 일제히 수족관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열린 문을 통해 비춰지는 희미한 빛이 일렁거리는 표면에 부셔져 흩어졌다. 후, 진이 숨을 내뱉고는 천천히 수족관으로 다가갔다. 조심해, 진. 샤오유의 말에 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천천히 수족관의 외벽에 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넓이도 꽤나 넓직했지만 깊이는 알리사의 말대로 상당히 깊어보였다. 내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다라… 이 정도의 수족관을 준비하는 것도, 설치하는 것도 힘들텐데… 대체 누구를 위해서…? 진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표면에 손가락 끝이 닿은 순간. 갑자기 수면 밑에서 순식간에 표면으로 올라온 누군가가 진의 멱살을 잡아 물 속으로 끌어당겼다. 진! 비명과도 같은 샤오유의 목소리를 들으며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간 진은 이를 악문 체 최대한 숨을 참았다. 순식간에 표면과 멀어져간다. 진이 제 안의 힘을 이끌어냈다. 뿔과 날개가 돋아나고 눈이 붉게 변한 진이 자신의 몸을 휘어감은 무언가를 확인했다. 물고기의 비늘과도 같은 하체와 인간의 상체, 그래. 인어다…!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는 깊은 바다에 살고 있어 해양 종족들 중에서도 극히 보기 어렵다는 인어가… 이 수족관에 감금되어 있던 것이었다. 물속인 탓에 소통이 불가능한 진은 어떻게든 자신이 너를 구하러 온 사람이라는 걸 밝히고 싶었지만 이 인어는 말은 필요없다는 듯 진을 물에 휘감게 해 마구 흔들어놓았다. 수족관 벽에 부딪치고 위아래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물에 휩쓸리던 진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인어가 다시 한번 더 멱살을 잡고 얼굴을 마주했다.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물 속에서 인어와 힘을 이끌어 낸 진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이 눈을 깜박였다. 태양빛을 닮은 붉은 머리카락, 자신을 보는 눈에 서려있는 강한 증오심, 금방이라도 물어 뜯을 듯 날카롭게 선 송곳니. 그리고 목 언저리에 붙은 저건… 그리고 순간 제 얼굴을 확인한 인어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뭐지? 이유를 알기도 전에 인어가 입을 열어 무언가 말을 건넸다. 너는… 누구야? 그 자식이… 아니야…? 그 자식…?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진이 미안, 입으로 사과의 말을 꺼냈고 이내. 진의 몸을 중심으로 뿜어져나온 전기가 인어를 강타했다. 아아아악! 소리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마구 비트는 인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진이 재빠르게 날개를 움직여 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수족관 밖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샤오유가 흠뻑 젖은 체 물 밖으로 뛰쳐나와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진을 끌어안고 제 힘을 이끌어냈다. 그녀는 봉황 영물, 그녀가 내뿜은 따스한 온기가 진을 휘감았고 이내 물기가 모두 마르고 체온까지 정상으로 돌아온 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어떻게 된거야, 진! “

“ 인어… 인어가 있어 “

“ 인어라고? 그 희귀한 종족이… “

“ 그래, 그러니까 지금… “

“ 젠장… 큭… “

체온과 몸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숨은 돌아오지 않은 진이 헐떡이며 내뱉은 말을 누군가의 거친 목소리가 자르며 들어왔다. 그 목소리에 모두가 일제히 수족관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위치를 찾은 알리사가 스위치를 눌러 방안이 환하게 밝아진 순간 그들은 수족관 가장자리에 몸을 기댄 인어가 상체로 몸을 지탱하며 수족관에 걸터 앉는 것을 보았다. 잠시 거친 숨을 내쉬던 인어가 후 숨을 내뱉는가 싶더니 이내 서서히 다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인어는 30살이 되면 다리가 갈라져 사람처럼 물 밖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건 소수의 인어들 뿐. 그리고 그것이 더욱더 인어를 만나기 힘든 이유이기도 했다. 인어가 바닥에 떨어져있던 시트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몸에 둘렀다. 바닥에 한발짝 딛자마자 윽, 소리를 내며 잠시 휘청거리며 쓰러지나 싶더니 이내 비틀거리면서 천천히 진에게 다가왔다. 제 코 앞까지 다가와 뭐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거리던 인어가 그대로 눈을 감고 쓰러지는 걸 받아낸 진이 제 품 안의 인어를 바라보았다. 기절한 인어의 몸에 큰 부상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목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는 무언가가 붙어있었다. 그걸 본 샤오유가 불같이 화를 냈다. 아마 자신이 나쁜 인간들에게 붙잡혀 깃털을 강제로 뽑혔을 때가 생각이 났을거다.

“ 이건 너무해… 완전 피를 제공하는 물건 취급이잖아…! “

“ …인어를 먹은 자는 불로불사가 된다는 속설이있지. 실상은 그런 효과 따위는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들은 어떻게든 인어의 살점, 피라도 얻으려고 했겠지.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다 “

“ 알리사, 스캔을 해줄 수 있을까? “

“ 스캔을 시작합니다 “

샤오유와 리의 목소리에 닿는 그곳엔 인어의 목에 달려있는 밸브가 있었다. 밸브의 손잡이를 열어 손쉽게 피를 얻을 수 있게 강제로 달았을거다. 그게… 돈이 될테니까. 그리고 인어는 경매에 팔리지 않은 체 이곳에 갇혀 계속해서 피를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피 뿐만이 아니라 비늘이나 신체 일부도 손상 되었을 수도 있다. 그저 단순히 돈을 위해서 인어는 살아있는 물건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스캔을 마친 알리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밸브는 위험합니다. 긴급 수술을 권유합니다. 어째서지, 알리사? 물 속에 오래동안 머문 탓에 밸브가 녹슬어 녹이 몸속으로 침투했습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생명활동에 분명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빠른 제거가 필요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어를 안아들려는 진을 막은 리가 일단 인어를 시트를 두른 상태 그대로 물에 한번 담그게 했다. 인어는 사람보다 체온이 낮아서 아무리 시트 너머라지만 그대로 안아들었다간 화상을 입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겨우 말랐지만 한번만 수고해주게, 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진이 바닷물을 뚝뚝 흘리는 인어를 고쳐안으며 빠르게 돌아갈 체비를 서둘렀다.

목의 벨브를 제거하는 긴급 수술이 끝난 후 인어는 위그드라실이 마련한 시설이 아닌 진의 집으로 옮겨졌다. 위그드라실에서도 인어를 구출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인어가 지낼 시설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진의 집에 있는 5m 깊이의 수영장에 바닷물을 채우고 그 곳에서 몸이 건강해질 때 까지 보살피기로 했다. 물론 이 모든 건 인어의 의견이 1도 들어가지 않은, 인어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기적인 의견이 들어간 결정이었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은 인어의 목에 감긴 붕대를 보다 수영장의 계단 부분에 걸터 앉게 자세를 잡아 준 진이 가만히 인어를 바라보았다. 너는 나를 누구로 착각한걸까. 하아, 짧게 숨을 내쉬며 바라보던 진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왔을 때.

“ …깨어났나? “

“ …… “

마취에서 깨어난 인어가 제 목에 감긴 붕대를 매만지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의 질문에도 대답이 없던 인어는 다리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더니 이내 부드럽게 물 속으로 들어갔다. 아, 목은… 괜찮겠지…? 리씨가 그 정도는 알아서 잘 하셨겠지만… 머리를 긁적이다 진이 조심스럽게 수영장 가장자리에 앉아 물 속을 바라보았다. 인어가 감금되어있던 곳과는 달리 많이 깊지 않아서인지 인어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잠시 굳어있던 몸을 풀 듯 수영을 하던 인어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건 10분 후였다. 자신을 보는 눈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경계심이 가득했지만 진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에게 붙잡혀 마치 물건처럼 이용당했으니 경계하는게 당연하겠지. 역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은 수 있는건 시간이 좀 필요할…

“ 너 누구야 “

“ 어…? “

“ 귀 먹었어? 누구냐고 묻잖아 “

자신보다는 약간 높고 까칠한 목소리에 잠시 눈을 깜박이던 진이 황급히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난 진이야. 희귀 종족과 영물들을 보호하는 단체인 위그드라실 소속이야. 이름과 간단한 설명을 한 진을 잠시 빤히 바라보던 인어가 이내 흥미를 잃었다는 듯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잠시 파문이 생긴 수면 위를 바라보던 진이 이내 몸을 움직여 수영장을 떠났다. 그렇게 근 일주일 간 인어는 진에게 간단한 질문만을 던졌고 대답을 들은 후에는 주저없이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 진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 난 화랑이야 “

“ …어…? “

“ 귀 먹었어? 화랑이라고, 내 이름 “

구출된 지 열흘 만에 인어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수면 위로 올라와 수영장 가장자리에 기댄 인어, 화랑의 눈에 자신이 비춰진 걸 확인한 진이 그의 옆에 앉았다. 이제서야 겨우 화랑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물 속에서는 무적에 가까운 인어가 어쩌다가 인간에게 잡혀 마치 물건처럼 다루어지게 된 건지 궁금했다. 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괜찮다면… 어떻게 된건지 알려줄 수 있겠어? “

“ 그 전에. 너 그 자식이랑 무슨 관계야? “

“ …날 공격했을 때도 너는 비슷한 말을 했었지.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구야? “

“ 미시마 카즈야 “

“ …뭐? ”

“ 뭐야, 귀 먹었어? 미시마 카즈야라고. 그때 네 헤어스타일 때문에 깜박 속아서 널 물속으로 끌어들었는데 눈을 보니까… 그 자식이 아니었어. 그래서 어찌해야 하나 싶던 순간… 그 빌어먹을 전격… 그 자식이 썼던 그 기분 나쁜 걸 또 당할 줄은 생각도 못했어…! 그러니까 말해, 너 그 자식이랑… ”

“ 너야말로 그 인간을 어떻게 아는거야! ”

갑작스런 진의 큰소리에 놀란 화랑이 움찔 어깨를 떨다 이내 조금 신경질적으로 꼬리로 수면을 강하게 내리쳤다. 순간 강한 꼬리 힘에 수영장 밖으로 거세게 물이 튀었고 화랑과 가까이에 있던 탓에 머리 끝까지 물을 뒤집어 쓴 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화랑은 물 속으로 깊게 잠수해 사라진 후였다. 화랑! 이름을 불러도 더 이상 올라오지 않는 화랑에 진이 입술을 깨물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쓸어 올리며 수영장을 벗어났다. 미시마 카즈야, 그 이름을 설마 여기서 듣게 될 줄이야…! 그럼… 정말… 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

한편, 진의 큰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물을 뒤집어 쓰게 하고 수면 밑으로 피한 화랑이 바닥에 가라앉은 체로 가만히 수면 위를 바라보았다. 아, 짜증나. 왜 이리 짜증이 나지… 역시… 그 인간… 때문인가. 가만히 눈을 내리깐 화랑이 제 머리 속에 악몽처럼 남은 그 순간을 떠올렸다. 목에 벨브를 쑤셔 넣으려는 인간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구잡이로 날뛰던 중 전격에 감전되어 마치 도마 위의 생선처럼 팔딱팔딱 경련할 수 밖에 없었던 그때를. 얌전히 있으면 적어도 애완 동물로 귀여워 해주지. 제 목에 억지로 구멍을 내고 벨브를 손수 쑤셔넣으며 속삭이던 그 말을 떠올린 화랑이 이를 악물고는 이내 다시 신경질적으로 꼬리를 마구잡이로 움직였다. 그러다 수영장 물이 마치 파도처럼 마구잡이로 일렁거리며 수영장 밖으로 넘쳐 흘렀지만 화랑은 1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 파도처럼 일렁거리는 물이 자신의 마음을 대면해 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3. 아침에 약한 화랑이 보고 싶어져서 쓰는… 짧은 진화랑.

음… 밖에서 들리는 새의 울음 소리,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들으며 진이 눈을 떴다. 으음… 잠이 덜 깬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던 진이 눈을 깜박이며 어젯밤을 떠올렸다. 재벌의 일 때문에 바빠져서 도통 편하게 집에서 쉴 날이 없던 지금 시기에 간만에 생긴 휴가였다. 그래서 간만에 늦잠을 자고 오후 느지막히 일어나 화랑과 점심을 먹고 거실에서 편하게 그를 끌어안고 멍하니 TV를 보다가 저녁을 먹고 그리고… 아. 제 밑에서 허리가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어깨를 깨물고 소리를 죽이던 화랑을 떠올린 진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하여간에 그 높디 높은 자존심 때문에 좋으면서도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다 가끔 자기 입술을 사정없이 물어 입술에 피까지 내는 화랑의 모습이 진은 소위 말하는, 꼴린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말 고집이 쎄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럴 때 마다 뒤통수를 감싸 당겨 제 어깨에 기대게 하면서 대신 물라고 속삭였고 화랑은 그럴 때 마다 주저없이 입을 크게 벌려 진의 어깨를 물며 소리를 참곤 했다. 흐윽… 윽… 신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가끔 못참겠다는 듯 문 제 어깨를 혀로 핥는 화랑은 정말이지… 너무 야했다. 하아, 가볍게 한숨을 쉰 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어제 밤 마주했던 야한 얼굴과 달리 너무나도 선한 얼굴로 잠에 빠진 화랑의 얼굴이 들어왔다.

항상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리고 사람을 노려보는 눈초리 때문에 다들 화랑의 인상을 날카롭게 보지만 자신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개인 공간에서의 화랑은 한없이 퍼져있는 모습이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다 진이 손으로 뺨을 문질러주면 그 손에 얼굴을 비비는 게 정말… 집고양이 그 자체였다. 이런 화랑을 볼 수 있는 게 오직… 자신 뿐이라는 게 진으로서는 너무나도 행복한 일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 안에 녹아든 데빌 때문인지 제 앞에서 이리도 무방비한 화랑을 손수 망가트려보고 싶다는 가학심이 가끔 들 때도 있지만 진은 생각보다 그 감정을 꾹꾹 눌러 다스리며 화랑과 잘 지내고 있었다. 자신과의 섹스에서 너무 느껴 울먹이며 그만 하라고 소리치는 화랑도, 순진하게 제 손길에 가만히 몸을 맡기는 화랑도 좋았기에 최대한 그 가학심을 눌러 꺼내지 않으려 진은 필사적이었다. 정말이지… 날 이렇게 만드는 건 화랑, 너 하나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진이 손을 뻗어 잠든 화랑의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렸다.

앞머리에 가려져 있던 얼굴을 가만히 보다 진이 손을 뻗어 화랑의 머리를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으음… 그 움직임에 작은 소리를 흘리며 깨어나나 싶었던 화랑이 깊은 숨소리를 내며 잠드는 걸 본 진이 두 팔로 화랑을 단단히 껴안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아직 알림은 울리지 않았으니 화랑을 껴안고 그 온기를 느끼며 조금 더 잘 생각이었다.

“ 후아암… ”

알림이 울리기가 무섭게 화랑이 깰까 귀신 같은 속도로 알림을 끈 진이 화랑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오늘 화랑은 일정이 없다. 그 전에는 한국의 백두산의 도장에서 사범으로서 일을 하던 탓에 한국과 일본을 왔다갔다 하던 화랑은 진과의 동거를 위해 사범님을 설득해 한국이 아닌 일본의 제 사범님의 친우가 운영하는 태권도장에 취직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진은 당연히… 기뻤다. 무엇보다 화랑이 스스로 저와 함께 지내기 위해 백두산을 설득했다는 것이 정말로 기뻤다. 화랑도 날 좋아하는구나… 싶었기에. 화랑이 들었다면 그게 무슨 헛소리야, 이 자식아! 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섹스하냐? 아오, 이걸 진짜! 라며 초스카이 콤보를 당할 것이 뻔했기에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여하튼 오늘 휴가인 화랑의 잠든 얼굴을 보다 이마에 쪽 입을 맞춘 진이 조용히 침실을 나갔다.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하며 잠을 깬 진이 타올로 물기를 닦아내며 그대로 옷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향했다.

엄마인 준의 그… 절망적인 요리치… 덕분에 유년 시절 대부분 생식을 선호했던 진의 입맛을 가장 크게 바꾼 건 역시나 화랑이었다. 제대로 동거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해주겠다며 내놓은 진의 생콩 더미에 이건 요리가 아니라 그냥 식재료 내놓은 거잖아! 라며 기겁을 한 화랑은 진에게 주방 입성 금지를 내렸다. 정 도와주고 싶으면 재료 준비나 도와줘. 라며 가끔 재료 손질을 맡길 뿐 화랑은 여전히 진에게 주방 입성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의 아침은 항상 전 날 저녁에 먹고 남은 반찬과 미리 만들어 놓은 반찬. 그리고 냉동실에 얼려놓은 국과 밥이었다. 냄비에 꽁꽁 언 국을 그대로 넣고 불을 켠 진이 전자렌지에 역시나 꽁꽁 언 밥을 돌리고는 냉장고에서 반찬 그릇을 꺼내 식탁에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냄비 앞에서 서서히 녹아가는 국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골고루 녹이는 사이 전자렌지에 데워진 밥을 꺼내 식탁에 내려놓은 진이 이내 모두 녹아 부글부글 끓는 국에 불을 끄고 그릇에 국을 담아 밥 옆에 내려놓고는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비록 갓 만든 음식들은 아니지만 따듯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진은 행복했다.

“ …잘 먹겠습니다 ”

식사를 끝내고 반찬통은 뚜껑을 닫아 냉장고에 넣고 몇개 안되는 그릇은 재빠르게 설거지를 해 건조대에 늘어놓은 진이 힐끔 침실을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지금쯤 비척비척 화랑이 일어나고 자신은 그를 위해 밥과 국을 준비해줘야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마 자신이 출근하는 시간까지 화랑은 일어나지 못할거다. 원래 화랑은 아침 잠이 많아 아침에 일어나는 걸 굉장히 힘들어했다. 그럼 한국에선 어떻게 일어났는데? 라는 제 물음에 알람을 10분 단위로 5개를 맞춰놓고 잔다고 대답할 정도로 화랑은 아침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을 때면 침실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알람 소리에 진은 속으로 과연 오늘은 화랑이 몇번째 알람을 듣고 일어날까, 라고 혼자만의 예측 게임을 하곤 했으니까. 이를 닦고 겉옷을 손에 든 체 시계를 보니 이제 슬슬 집에서 나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갈까 싶어 신발을 신고 문고리를 붙잡은 순간.

“ 으음… 가는거야…? ”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휙 몸을 돌리자 보인 건. 자신의 잠옷 상의만 입은 체 비척비척 하품을 하며 나오는… 화랑이 있었다. 어째서 내 잠옷 상의를? 아마도 잠결에 손에 대충 잡히는 걸 입었을 거라 생각되지만… 속옷으로 딱 달라 붙는 사각 드로즈를 입은 탓에 마치… 하의 실종 혹은 남친 셔츠처럼 입고 나온 화랑에 진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바라봤다. 그런 진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잠에 취해있던 화랑이 비틀비틀 오더니. 그대로 진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다녀와… 이거… 남편 배웅하는 아내… 인거지? 진이 자신을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체 아침 인사를 마친 화랑이 비틀거리며 다시 침실로 향햐는 걸 멍하니 보던 진이 슬그머니 폰을 꺼내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신호음이 가고 전화를 받은 사람은.

“ 아침부터 뭔가, 진? 이제 슬슬 출근할 시간 아닌가? ”

“ 리 숙부, 죄송한데 오늘 하루 휴가 좀 쓰겠습니다 ”

“ 음, 자네 어디 아픈가? 아니면 화랑이? ”

“ 어… 비슷… 합니다 ”

“ 흐음… 대답이 시원찮은데… ”

“ …… ”

“ 뭐, 좋네. 이번 한번 뿐이야 ”

“ 감사합니다, 숙부님 ”

진의 뜻을 안다는 듯 수화기 너머로 웃던 리와의 통화를 끊은 진이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서 겉옷을 대충 던져 놓고는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가니 2차 수면을 하려고 했던 듯 여전히 진의 잠옷 상의를 입은 체 침대에 그대로 엎어져 베개를 꼭 끌어안고 있는 화랑이 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건지 반쯤 눈을 뜨고 고개를 든 화랑이 진을 바라보았다.

“ 음, 뭐야… 뭐 놓고 간거라도 있… 으앗! ”

순간 화랑은 침대로 뛰어들며 자신을 끌어안는 진에 눈을 번쩍 뜨며 작게 소리를 질렀다. 잠이 순식간에 깼다. 진이 그 가슴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며 놀라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야, 진…? 뭐야, 너…? 출근 안해? 조금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화랑답다고 속으로 생각한 진이 그대로 화랑을 올려다보았다.

“ 나 방금 휴가 냈다 ”

“ …거짓말 ”

“ 거짓말 아닌데 ”

“ 그 리씨가 허락했어? 아니, 뭐라고 말했길래… ”

“ 그냥 아프다고 했는데 ”

“ 와… 이젠 입에 침도 안바르고 거짓말을 하네… 재벌 총수가 이래도 되는거야? ”

“ 총수 마음대로야 ”

지금 이 말 리씨나 라스가 들어야 하는데. 재벌의 미래가 어둡다, 어두워.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린 화랑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진이 기습 키스를 퍼부었다. 약간은 무기력하게 진의 키스를 받아주던 화랑이 제가 껴입은 상의로 슬금슬금 밀고 들어오는 손에 움찔 어깨를 떨며 손을 들어 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제 밤 그렇게나 뜨거웠던 섹스가 생각나서일까, 화랑의 몸도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뜨겁게 달아오르는 음심을 억지로 꾹꾹 내리 눌러 진정시키고 호흡 곤란으로 기절하기 전 진의 등을 퍽퍽 쳐 겨우 떨어진 화랑이 헐떡이며 바라보았다. 자신을 보는 진의 얼굴은 수컷의 얼굴 그 자체였다. 하아, 화랑이 한숨을 쉬며 제 가슴을 만지는 진의 손을 붙잡아 떼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 이틀 연속으로 하고 싶지 않거든? 무엇보다 난 더 자고 싶다고. 아니 대체 어느 부분에서 갑자기 핀트가 나간거야, 너! ”

“ 내 잠옷 입고 배웅하러 온 네가 나빠, 화랑 ”

“ 와… 이젠 이걸 내 탓을 한다고? 너 왜 이렇게 뻔뻔해졌어? ”

“ 상대가 너니까 내가 뻔뻔하게 구는거야 ”

“ 허… ”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린 화랑을 보던 진이 일어나 출근을 위해 입었던 옷을 벗어 화랑과 마찬가지로 드로즈만 입은 체 다시 화랑의 옆에 누워 그대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럼 안할테니까 같이 자자. 그 말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화랑이 마치 인심 썼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는 저도 손을 뻗어 진을 끌어안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잘자, 화랑. 그 말에 대답은 없었지만 제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는 화랑에 진이 살며시 미소를 짓고는 자신도 눈을 감았다. 화랑과의 달콤한 2차 수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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