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빅터백] 진심이란 말 한마디가

여성 편력 쪄는 남자가 단정하고 곧고 올바른 남자를 만나 자기도 모르게 감기는 짧은 이야기. 언젠가 후속작이 나올겁니다, 아마도.

그 인간은 절대로 안됩니다, 사범님! 백두산은 제 앞에서 절대로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지 않던 애제자가 마치 하극상처럼 책상을 양손으로 콰앙 내리치며 저에게 소리치자 흐음, 소리를 흘리며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잠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국제협력연합국, UN의 독립부대 창설자인 빅터 슈발리에를 말하는건가 싶어 백두산은 화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으득, 저를 보며 이를 갈고 분노하고 있지만 제가 아닌 빅터에게 향해있는 분노라는 걸 알아차린 백두산이 으쓱 어깨를 들어보였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나, 화랑아. 모르쇠하며 내뱉은 말에 화랑의 눈에서 불꽃이 튀자 백두산이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맨날 사고만 치던 화랑이 저를 걱정해서 화를 낸다고 생각하니 기분은 좋았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백두산이 다시 입을 열었다.

“ 무슨 말인지 다시 이야기 해보거라, 화랑아 “

“ 빅터 슈발리에. 그 사람은 안된다고 했습니다! “

“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더냐 “

“ 사범님, 모르는 척 하지 마세요. 저와 진의 관계를 아는 사범님이 지금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실리가 없습니다 “

당당한 선언과도 같은 말에 백두산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린 체 화랑을 바라보았다. 진과 화랑의 관계. 그래, 두 사람은 라이벌 관계에서 연인이 되었다. 처음 이 소식을 화랑의 입으로 들었을 때 백두산은 진심으로 극대노를 했었다. 카자마 진, 그가 누구인가. 세상을 혼란스러운 혼돈의 시대로 끌고 간 장본인이자 제 아버지인 카즈야를 쓰러트려 그 혼돈의 시대를 끝낸 자. 그리고 데빌의 힘을 보유한 자. 진은 그 데빌의 힘으로 자신을 쓰러트린 화랑을 의식불명의 상태로 만들어 병원으로 보내버린 전적이 있었다. 그 뿐 만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자신의 뒤를 끝까지 쫓아온 화랑에게 폭언을 퍼부었을 뿐만 아니라 수류탄에 피격 당할 뻔한 자신을 구해주고 대신 다쳤을 때도 별다른 말도 없던 자였다. 근데 그런 녀석과 연인이 되었다? 그 동안 진이 화랑에게 했던 모든 잘못들로 인해 그에 대해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백두산은 결사반대를 외쳤고 당연히 화랑은… 당황했다. 단순한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진이 자신에게 했던 그 동안의 행동들을 문제 삼는 백두산에 화랑은 할 말을 잃어버렸고 결국 진이 나서서 정말 눈물 겨운 사죄와 용서를 비는 행동 끝에 백두산은 겨우 진을 화랑의 연인으로 인정했다. 이런 자신과 진의 관계를 아는 사범님이 지금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리가 없다고 반박하는 화랑의 말은 분명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도 화랑의 말을 백두산은 모르쇠하고 있었으니까.

“ 네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는 안다만…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나와 그 자는 별다른 관계도 없는데 말이다 “

“ 그럼 왜 그 작자가 친분도 없는 사범님을 보러 이 촌구석까지 온겁니까! “

“ 화랑아, 말이 거칠다. 그는 네 사범인 내가 궁금해서 호기심에 보러왔다고 하더구나. 실제로도 그와 나눈 대화도 훈련 방법이나 힘에 대한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였고… 마지막엔 농담인지 UN으로 스카웃 이야기까지가 전부였단다 “

“ …그 능글맞은 노친네가…! “

화랑아! 제 험한 말을 지적하는 백두산의 목소리에도 화랑은 이를 으득 갈며 빅터 슈발리에를 떠올렸다. 모든 일이 다 종결된 후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기 전 갑자기 그가 화랑을 찾은 적이 있었다. 진, 그 자식 때문인가 싶어 순순히 만나주었더니 대뜸 한다는 이야기가 화랑이 예상했던 진이 아닌 제 사범인 백두산에 대해 알려달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 양반이 갑자기 우리 사범님은 왜? 싶어 이유를 묻자 돌아온 대답에 화랑은 극대노 스위치를 주저없이 눌러버렸다. 순식간에 사납게 변한 화랑이 주저없이 곧바로 몸을 움직여 빅터에게 초스카이를 날렸으나 그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 횡을 쳐 화랑이 날린 초스카이를 가볍게 피하고는 쯧쯧 혀를 찼다.

“ 그 백두산의 제자가 이렇게 예의가 없어도 되는건가? “

“ 댁이 우리 사범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해! 아니, 지금은 이유를 들으면 사범님은 내 편 들어주실걸? 여하튼 이 작자가 돌았나! “

“ 돌았냐니 말이 험하군 “

“ 내가 험하게 안하게 생겼나! 후우, 당신 다시 한번 더 말해봐 “

“ 자네 사범인 백두산에게 관심이 있으니 그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는데. 아니아니, 내가 그에게 어떤 의미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줄 알고 그렇게 화를 내는거지? “

“ …어떤 의미의 관심이야 “

“ 얼핏 보긴 했지만… 참으로 단정하고 곧은 남자더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단 말이지… 그래서 관심이 좀 가더군 “

“ …그래서 어떤 의미냐고 “

“ 연애에 들어가기 전 호기심에 좀 가까울 것 같… “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온 초스카이를 다시 횡으로 가볍게 피한 빅터가 입을 열기도 전에 화랑의 분노에 찬 서슬퍼런 외침이 먼저 들어왔다. 이 작자가 지금 장난하나! 남의 존경하는 사범님을 그런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건드려고 해? 절대로 안돼! 댁 같은 카사노바한테 우리 사범님은 절대로 안돼, 죽어도 안돼! 하아아아, 분노에 찬 깊은 숨을 내뱉은 화랑이 댁, 오늘부터 내 사범님한테 접근하면 그땐 진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 가만 안 둘 줄 알아. 알겠어? 라며 으름장을 놓고는 휙 그 자리를 떠난게 벌써 한달 전의 일이었다. 그 후로 자신에게 빅터가 여러번 연락을 취해왔으나 화랑은 그 연락을 모조리 무시하고 차단을 걸고 심지어 번호도 바꾸어봤으나 빅터는 어떻게 알고 계속해서 연락을 취해왔다. 그럼에도 화랑이 제 연락을 무시하자 마침내 오늘 화랑이 도장의 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빅터가 직접 나타나 백두산과 대면을 하고 가버린 것이었다. 이 능글맞은 노친네가 진짜…!

한편, 화랑 몰래 한국까지 와 백두산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인 빅터는 흐음, 턱을 매만지며 작게 소리를 흘렀다. 그가 백두산을 알게된 건 완전 데빌 카즈야를 상대로 여러 격투가들이 합심하여 상대를 한 후였다. 앞으로도 해야할 일이 많겠군. 카자마 진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일도 있지만 그를 방해할 G사를 처리해야…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빅터의 눈에 붉은 머리칼의 젊은 격투가인 화랑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아시아 예선 결승전에서 진의 상대였던 젊은 격투가이자 그 레지스탕스의 리더. 카자마 진, 그 자와는 그저 사이가 좋지 않은 라이벌이라 생각했는데 속을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더 복잡한 감정을 지닌 사이인 것 같았다. 뭐, 이것도 그 동안 자신의 수많은 연애 경험으로 인해 깨달은거긴 하지만. 팔짱을 끼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화랑이 누군가를 보고는 일순간 팔짱을 풀자 빅터가 힐끔 시선을 오른쪽으로 조금 더 옮기니 보인 건. 자신과 비슷한 은발을 질끈 묶고 멋들어진 정장을 입은 남자가 화랑에게 접근하더니 그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그의 자세에서 그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라는 것이 보였다. 무엇보다 그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호랑이 같은 화랑이 그 앞에서는 마치 잘 길들여진 집고양이처럼 구는게 인상 깊었다.

“ 레이븐, 저 사람이 보이나? “

“ 저 사람이라면… 레지스탕스 리더의 옆에 있는 자 말입니까? “

“ 그래, 리더 화랑… 이라고 했던가. 그가 저렇게 예의를 차리는 상대라면 역시… “

“ 레지스탕스의 정신적 지주, 백두산입니다. 리더인 화랑의 사범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

“ 흐음… 역시… “

빅터가 귀에 꽃힌 이어폰을 누르며 부른 레이븐은 그의 물음에 충실하게 대답했다. 레이븐의 대답을 들으며 여전히 백두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빅터는 그가 손을 들어 제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뭐라 말을 건네는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왠지 모르게… 자꾸 시선이 간단 말이지…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미인들한테도 이런 느낌은 받지 못했는데 말이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제 제자에게 뭐라뭐라 말을 하는 백두산을 가만히 바라보던 빅터는 생각했다. 한번… 만나볼까, 라고. 물론 대전쟁을 앞두고 제 사심부터 채울 위치가 아닌 빅터이기에 진이 카즈야를 쓰러트려 이 지긋지긋한 혼돈의 시대를 끝내고 국가가 국가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 사이 중간중간 빅터는 국가 지원 및 위그드라실의 회의 등으로 계속해서 사람들과 마주칠 수 밖에 없었고 그럴 때 마다 백두산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잘 알고 있었다. 백두산이 화랑과 그 카자마 진이 연인이 되었다는 소식에 얼마나 극대노를 했고 그를 적대시 했는지.

왜냐하면 백두산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위그드라실의 건물 전체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으니까. 물론 백두산의 말은 잘못된 게 하나도 없었다. 뭐, 물론 빅터도 많은 여성을 울… 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위해를 가한 적은 한번도 없었으니까. 응응, 아무리 그래도 그건 그가 잘못한게 맞지. 고개를 숙인 진에게 남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그 동안 그가 화랑에게 했던 모든 행동에 대해 지적을 한 백두산이 화랑의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그를 끌고 갔고 제 사범에게 반항할 생각은 1도 없는 화랑은 그대로 백두산에게 끌려갔다. 으아아, 잠시만요. 사범님, 잠깐…! 당황한 화랑이 그대로 끌려가고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그 모습을 빅터는 끝까지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모습만 있을 줄 알았더니 제 귀한 제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 사납고 무서운 한 마리의… 호랑이가 된다. 정말… 눈을 뗄 수가 없군. 단정하고 곧고 그 누구보다 올바르다. 자신과는… 음… 완전 반대의 사람. 나와 반대라서 이렇게… 시선이 가는 건가. 음…

“ 자네 화랑이었던가? ”

“ 뭐야, UN의 독립부대 창설자인 빅터 슈발리에였나? 뭔데? ”

“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

“ 부탁? 나한테? 뭔데? ”

그리고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빅터가 그저 호기심에 제 사범을 건드리려 한다는 걸 깨달은 화랑이 엄청나게 적대적으로 대했고 그가 으름장을 놓고 가버린 후 빅터는 직감했다. 되게… 귀찮겠군. 이 사제 정말… 귀찮은 조합이다, 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상황이 어떻든 가차없이 상대를 경계하고 응징한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도 끈끈한 사제 지간이다. 자신과 레이븐을 생각하면 정말… 너무나도 다르다. 이러니 더… 궁금해지는군. 빅터가 눈을 번뜩였다. 화랑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그건 빅터가 예상 외로… 끈질기다는 점이었다. 그래, 제 전화를 피한 화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서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몰래 도장까지 찾아와 백두산을 만날 정도로… 빅터는 끈질겼다.

“ UN의 독립부대 창설자께서 왜 나를 만나고 싶어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 하하, 그런 존칭까지는 필요 없으니 편하게 대화하면 좋을 것 같은데… ”

“ …괜찮다면 그리 하지. 빅터 슈발리에였나, 갑자기 온 이유는 뭐지? ”

도장의 문을 연 백두산의 놀란 표정과 이내 다시 평정심을 되찾은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정중하게 자신을 응접실로 안내한 백두산이 내준 따뜻한 차를 마신 마시고 몇 마디 나누기 무섭게 자신을 보는 백두산의 눈이 자신을 경계하는 것을 본 빅터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렇게나… 눈으로 자신의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봤다. 좋은 말로 하면 남을 속일 생각이 없는 곧은 사람, 나쁜 말로 하면 너무나도 쉽게 제 감정을 내보이는 쉬운 사람.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

“ 별거 없네. 그저 그 레지스탕스의 리더인 화랑의 사범이자 정신적 지주라는 이야기에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것 뿐이지 ”

“ …정말 그것 뿐인가? ”

세계의 파워 밸런스를 컨트롤하는 것은 우리여야만 한다… 고 나는 항상 이야기 하고 다녔지 ”

“ …그래서? ”

“ 레지스탕스의 리더는 화랑이지만 실질적인 리더는 그보다는 자네일거라 생각하네. 일반적인 군대와 달리 레지스탕스에는 분명 서열이나 계급이 없을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조직을 어떻게 운영했는지가 궁금하네. 이왕이면 훈련 방법도 말이야 ”

빅터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백두산은 이내 빅터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납득이 간건지 차근차근 그 당시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일단 레지스탕스를 결성한 건 자신이 아니라 화랑이라는 점, 그리고 자신은 그런 화랑이 모아온 인원들을 적어도 죽지 않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준 것 뿐이라는 것. 서열과 계급은 없지만 분위기를 흐트리는 자는 엄벌에 처했다는 이야기까지 모두 해준 백두산은 이내 그때를 떠올린 건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제 앞에 놓인 다 식어버린 차를 한모금 마셨다. 군인인 자신과 달리 그는 강하긴 하지만 일반인이다. 그런 일반인인 그가 전쟁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일반인들을 구하고 G사에 대항하는 단체에 속해 있었으니 분명… 못볼 것도 많이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고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앞장 섰다. 그는 곧고… 올바른 사람이니까.

“ …기억하기 싫었을텐데 괜한 걸 물은 것 같군 ”

“ 아니아니, 괜찮네. 기억하기 싫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니 ”

“ …만약 같은 일이 발생해도 자네는… ”

“ 똑같을거네 ”

나는 모두를 구한다거나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생각은 없네. 단지… 내 앞에 위기에 처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힘을 사용할걸세. 그건 화랑도 마찬가지일거고. 그게 내가 가진… 힘에 대한 가치관일세. 뭐, 군인이자 독립부대의 창설자인 자네에게 말할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지만. 잔잔하게 웃으며 말한 백두산의 대답은 빅터도 예상했던 대답 중 하나였다. 그는 예상하기 쉬울 정도로 곧고 올바르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빅터에게는 뇌리 속에 박히는 대답이었다. 그건… 그가 그 말에 조금의 거짓도 싣지 않았기 때문일거다. 정말로… 곧고 올바르고 단정하다. 음, 이 나라 말로 하자면… 청렴결백…?

“ 아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말이지.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리사욕에 쓰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 자네도 알텐데 ”

“ …그래, 그렇지 ”

“ 그나저나 난 자네가 마음에 드는데 말이야… ”

“ 음? ”

“ 혹시 우리 UN으로 오지 않겠냐? ”

“ 지금 스카웃이라도 하는건가? ”

“ 그렇지 ”

“ 하하하, 날 고평가 해주는 건 고맙지만 아무래도 힘들겠군. 나한테는 이 도장이 있으니까 말이야 ”

자신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크게 웃으며 거절의 의사를 밝히는 백두산을 보며 빅터도 어깨를 으쓱 들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돌아오고 있다는 레이븐의 연락이 들어온 것이었다. 괜히 마주치기라도 했다가는 제 사범을 끔찍하게 여기는 그 제자와 괜히 싸우게 될 수도 있다. 그러기 전에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는게 좋겠지. 아, 물론 당분간 개인폰은 꺼놔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빅터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백두산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배웅했다.

“ 아, 맞다 ”

“ 할 말이 남았나? ”

“ 내가 자네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건 사실이니까 말이야 ”

“ …흐음 ”

여러가지 함축적인 뜻이 담긴 말은 빅터가 흔히 여성들에게 날리는 플러팅과 비슷했다. 자, 과연 그는 내 플러팅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역시 고지식하게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며 정색하며 잘라 버릴까, 아니면 의외로 가볍게 받아줄 것인가. 하지만 백두산은 정색하며 잘라 버리는 것도, 그렇다고 가볍게 받아주는 것도 아닌 그저 말없이 빅터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작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거 아나, 빅터?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은 그저 소음에 불과하네. 오늘 한 말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할테니 그런 말은 내가 아닌 자네가 진심으로 마음을 줄 사람에게 하는 것이 좋겠군. 그 말에 선글라스 너머의 빅터의 눈이 커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두산은 빅터를 배웅하고 주저없이 문을 닫았다. 잠시 닫힌 문 앞에 서 있던 빅터는 이어폰 너머로 자신을 부르는 레이븐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도장을 벗어났다. 꽤나 아슬아슬하게 빅터가 자리를 벗어난 후 10초 후 화랑이 나타나 도장의 문을 열고 들어섰고 그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제 사범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게 된 것이었다.

흐음, 잠수함의 자신의 자리에 앉아 무언가 생각하는 중인 빅터를 레이븐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자신의 상관이 좀 이상하다. G사로 인해 발발했던 세계 전쟁이 끝나고 여유가 생기자 또 다시 그 여성 편력을 발휘해 잠수함이든 비행선이든 뭐든 이용하면서 레이디들을 만나러 갈거라 생각했건만… 제 상관은 의외로 조용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의외로군, 하루가 멀다하고 레이디들을 만나러 가실거라 생각했는데… 드디어 조금… 철이 드신건가. 제 상관에게 하지 말아야 할, 어떻게 보면 하극상에 가까운 생각을 하던 레이븐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그의 앞에 모습을 들어냈다.

“ 무슨 일이십니까? ”

“ …잠수함을 돌린다 ”

“ …어디로 가시는겁니까? ”

아, 역시 그럼 그렇지. 라고 속으로 생각한 레이븐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빅터가 던진 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한국으로 간다. 한국? 한국에서 누굴 만나시려는거지? 설마 그때 그 도장에서 마음에 드는 레이디라도 찾으신건가? 역시… 어디 안가시는군. 그렇게 생각한 레이븐이 잠수함을 운항 중인 군인들에게 행선지의 변경을 알리는 사이 빅터가 의자에 깊게 몸을 묻고는 백두산을 떠올렸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은 그저 소음에 불과하다네. 그럼… 그는 제 말이 그저 단순한 소음으로 들렸다는 뜻일까. 진심… 진심… 이라… 이상하게도 그가 말한 진심이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신경이 쓰였다. 진심은 빅터가 만났던 많은 여성들도 입에 담았던 단어였다. 하지만 그때는 그 단어를 들었어도 별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았는데 어째서… 왜 백두산이 말한 진심이라는 단어는 왜 이렇게 제 마음 속에 오래동안 남아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일까. 빅터는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그를 만나면 이 혼란스러운 감정의 의미를 알 수 있지 않을까.

“ …진심이란 말 한마디가 날 이렇게나 혼란스럽게 할 줄이야 ”

“ 음? 지금 무슨 말 하셨습니까? ”

“ 아니야. 최대한 빠르게 한국으로 가주게. 시급하게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든 ”

지금 그의 도장에 제 사범님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제자가 있더라도 상관없다. 빅터는 지금 당장 그를 만나야 했으니까. 그를 만나서… 음, 잠깐. 그를 만나서 뭘… 어쩔 생각이지, 빅터 슈발리에? 고개를 갸웃거린 것도 잠시 빅터는 이내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3시간 후, 도장 앞에서 빅터와 분노한 화랑이 한바탕 도장 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면서 싸우게 되고 그 난장판을 발견한 백두산이 대노를 하며 두 사람을 무릎 꿇리는 일이 발생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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