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는 둘이서
철권 무협 AU
시야가 어둡다. 눈을 여러 번 깜박여도 여전히 캄캄하다.
‘여긴 어디지….’
손바닥으로 땅을 더듬어보니 방바닥 같았다. 마지막으로 있던 곳이 바깥이었을 텐데…. 기절한 사이 옮겨진 것 같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으니, 머리에 좀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그래도 눈앞은 여전히 안 보였다.
‘어디에 막힌 것처럼 숨 쉬는 것도 갑갑한데…. 잠깐만.’
이상함을 느낀 진이 얼굴에 손을 댔다. 익숙한 촉감이 아니라… 옷을 만지는 것 같은데….
“…….”
머리 전체에 붕대가 둘둘 감겨있었다. 이러니 눈앞이 안 보이지. 짧게 한숨을 내쉰 진이 머리를 더듬거려 천 끝을 잡았다. 우악스레 감았는지 잘 풀리지도 않았다. 몇 분간의 사투 끝에 다 풀어낸 진이 천을 돌돌 말아 옆에 두었다.
‘아마 화랑…이 한 짓이겠지. 이거.’
방 주변에는 화랑이 없었다. 있으면 한 대 때려보고 싶었는데. 왜 이랬는지는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진이 몸을 벽에 기댔다.
창밖에 달이 뜬 하늘이 보였다.
‘이 정도로 오래 기절한 건… 두 번째인가.’
그날, 괴물이 들이닥칠 때는 꿈이라고 믿었다. 악몽에서 제발 깨고 싶다고 간절히 손을 모아 기도만 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어머니가 쓰러지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
‘힘… 나에게 힘만 있었다면…. 없애버릴 수 있을 텐데.’
그리 생각하자마자 의식이 끊어졌다. 그렇게 기절했다가 눈을 떴을 때 괴물은 없었다. 다만 폐허가 된 주변 풍경과 깨어나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며 어젯밤의 참사가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번에도 똑같았다. 쓰러지기 직전에 의식이 끊어졌어.’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에 간절히 무언가를 바라면 이상하게도 이루어져 있었다.
쓰러지기 전에 내가 원했던 건 분명….
‘어… 화랑은 괜찮은 건가?’
화랑을 찾으러 가야 하나 고민하던 진이 무릎에 손을 대고 일어나려 하자 방문이 열렸다.
“오 뭐야? 딱 좋게 일어났네.”
“화랑?”
“몸 움직일 수 있냐? 그럼 밖으로 나와. 밥 차려놨으니까.”
“어… 밥?”
“싸워댔는데 뭐라도 먹어야 회복이 되지. 빨리 나와. 밥상 들고 거기 못 들어가.”
“어어어….”
기운을 담은 공격은 몸에만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 기운을 상대 몸에 넣어 흐름을 방해하기도 하고, 강한 기운은 흐름을 끊어버릴 수도 있다. 화랑의 가슴에 붕대가 둘둘 둘러있는 걸 본 진이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
“그… 미안하다.”
“응? 뭐가.”
“지금 붕대 두른 곳, 내가 심하게 한 것 같아서….”
“기운은 운용할 때 너한테 맞은 부위를 지나면 좀 따끔거리는 정도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준은 아니니까 넘어가.”
“그러면 다행인데….”
“나는 머리 맞고 쓰러지는 와중에 그런 위력 나온 게 더 신기하다.”
“…….”
“그만 미안해해. 나도 분위기 휩쓸려서 좀 세게 때리긴 했으니까. 너나 나나 이긴 사람은 없으니까 무승부야. 그러니까 이제 내가 너 따라가도 군말 없는 거다? ”
진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랑이 반찬 하나를 진 근처에 갖다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거 잡으려 이제 뭐 해야 하냐?”
“하나 생각해 둔 계획이 있긴 한데…. 화랑 네가 동의해줘야 할 것 같아.”
“뭐길래?”
“덫을 놓을 거야.”
늦은 밤, 인간이 자고 있을 무렵이다. 들키지 않으려고 기운을 꾹꾹 눌러 감춘 구슬이 도장 문턱을 넘었다. 가장 위협이 되는 기운이 이곳을 떠났을 때 처리해야 한다.
처음에는 몸을 만들 생각으로 마을로 들어왔다. 욕심 좀 부려서 인간 아이보다 기운 있는 놈을 노려봤는데 뒤따라온 누구한테 막혀 실패했다. 시간이 많으면 둘 다 잡을 만했는데 위험한 놈이 근처까지 와서 후일을 도모해 도망치기로 했다. 반쯤 때린 놈이 기어코 쫓아와서 죽을 뻔했지만. 그나마 저주로 기운을 얻어 간신히 살아남았지, 조금이라도 부족했으면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몸을 만드는 방법보다 인간의 몸을 빼앗는 방법으로 바꿨다. 저주에 걸린 인간이 아무리 강자라 해도 지금은 쓰러진 상태니 분명 가능하다. 게다가 도장에 남아있는 기운이 저주 걸린 인간 한 명밖에 없다. 몸을 빼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작은 다리로 백두산이 있는 방 앞에 도착한 구슬이 모든 힘을 쏟아부어 몸을 부풀렸다. 검은 그림자가 문에 아른거리고 문을 뜯어버리려 문틀에 손을 대려고 했다.
“잡았다 요놈!”
쾅 소리와 함께 문이 튕겨 나갔다. 문 앞에 있던 구슬이 문짝을 정통으로 맞으며 공중으로 날아갔다. 금 간 부위에서 은은하게 달빛이 새어 나오더니 산산조각 났다. 문만 공중을 돌다가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문을 발로 찬 화랑이 가루조차 안 남게 주변 땅을 밟아 문질렀다.
“이게 진짜 되네.”
진이 도장을 떠나면 사부님을 노린 괴물이 올 테고, 계속 기운을 내는 사부님 주변에 내가 숨어 나타났을 때 허를 찌른다. 진이 떠올린 계획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마을 바깥을 순찰하러 나간 진이 도장으로 돌아왔다.
“표정을 보니 잘된 것 같아 보이네.”
“어, 네 생각대로 다 됐어. 근데 뒤쫓는 거 말고 이 방법 쓸 생각이었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냐.”
“…그래서 나 쫓아오지 말라고 했던 건데.”
“발목 잡지 말라는 게 쫓아오지 말라는 소리냐? 사람 열받게 하는 거지.”
“…….”
“에휴, 그래도 일단 이걸로 사부님 괜찮은 거 맞지?”
“그래, 네 스승님이 발산하시던 기운도 이젠 많이 안정됐어. 아마 내일 바로 깨어나실 거야.”
“다행이다. …진, 고맙고 수고했어.”
화랑이 주먹을 내밀었다. 가볍게 미소 지은 진이 똑같이 주먹을 쥐어 서로 맞댔다.
“너도 수고했어 화랑.”
다음날, 화랑이 사부님과 감동의 재회… 까지는 아니고 안도하며 깨어난 백두산을 진하게 끌어안았다. 이런 여운도 잠시 화랑의 상처가 괴물한테 당한 게 아니라 사람이랑 싸워서 생겼다는 것을 백두산이 귀신같이 알아차리며 깨졌다. 같이 싸운 당사자인 진이 화랑을 변호한 덕분에 팔굽혀펴기 100회까지 가진 않았다.
“너희 스승님 아직 정정하시네.”
“기 좀 죽으실 줄 알았는데…. 꿀밤 맞은 거 아직도 아프네.”
함께 걷던 두 사람의 발걸음이 마을 입구에서 멈췄다.
“여기서 작별인가.”
“…….”
마을 입구에 가까워질 때 화랑은 말이 줄었다. 작별 인사를 먼저 하려고 들어올린 손을 화랑이 잡았다. 잠깐 기다려달라는 말을 언급하고 떠난 화랑은 작은 봇짐을 매고 돌아왔다.
“사부님한테 허락받았다! 진! 같이 가자!”
“?”
“너랑 만나고 나서 밖에 있는 강자도 만나보고 싶다고, 사부님한테 말씀드렸더니 계획 없이 간다고 한 소리 들을 뻔했는데 너랑 같이 간다고 하니까 허락해 주시더라. 짐은 미리 싸둔 적 있어서, 금방 정리하고 왔어.”
“…내가 목적지로 정한 곳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도 않은 장소인데 괜찮겠어?”
“상관없어. 더 큰 세상에서 돌아다닐 수 있다면야.”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이 멋쩍게 웃으며 마을을 떠났다. 앞으로의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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