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님
철권 무협 AU
손님과 싸웠다고 꿀밤 맞은 화랑이 아침을 준비하러 나갔을 무렵, 진과 백두산만 남은 방에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어제 만났다지만 긴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두 사람 다 대화를 즐기는 성격도 아니었다. 서로 말을 걸 눈치를 보는 정적 속에서 백두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자를 도와주어 고맙네. 자네 덕분에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어.”
“과찬입니다.”
“더 좋은 보답을 해야 할 텐데… 집이 작아 밥밖에 못 준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군.”
“괜찮습니다. 그걸 쫓을 때부터 보답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백두산이 손사래까지 치며 말하는 진을 보고 작게 웃었다. 누굴 스승으로 두었는지 이리도 예의가 바른지. 백두산이 진을 유심히 보았다. 잘 단련된 몸, 아직 멍이 남았지만 정갈한 외모. 백두산이 처음 만났을 때는 거적을 두르고 있어 그 밑에 멀끔한 청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도 못했다.
“머리로 가는 혈맥은 잘 통하나? 몸은 괜찮고?”
“네, 운용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혹시 모르니 내가 맥을 짚어봐도 괜찮겠나?”
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목을 내밀었다. 백두산이 진의 손목을 잡고 기맥을 천천히 읽었다. 진의 맥에는 정순하고 맑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데에 막히는 곳은 없고… 잠깐, 이건….’
안심하던 백두산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흐르는 기운 밑에 이질적인 것이 흐르고 있었다. 붉고 오만한 빛을 내는 전기가 맑은 기운에 둘러싸여 있었다. 전기야 그렇다 쳐도 오만한 빛을 내는 기운을 타고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하늘의 별이 정한 운명에서 나타나는 기운이다. 특히 오만한 빛은….
‘…역천!’
화경을 넘은 이가 아니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 강렬한 별빛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누군가가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힘을 썼다.’
역천은 천하의 질서를 무너뜨릴 운명. 이미 그 운명은 천마가 걷고 있다고 한다. 천하를 무너뜨릴 운명이 하나 더 있다면, 세상이 공포로 휩싸일 것이다. 얼마나 더 많은 혈사가 일어날 것인가. 차라리 아직 길을 깨닫지 못했을 때 끊어버리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기운을 감추려 한 인물은 진이 살아남기를 바랐다. 백두산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강호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지금 죽이는 것이 옳았다. 하나 선하게 살고 있는, 은인을 없애는 것이 옳은가?
“자네….”
“사부님! 진! 밥 다 차려놨습니다!”
“드시러 가시죠.”
진에게 할 질문은 끊겼지만, 밥을 먹는 중에도 백두산의 고뇌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백두산은 떠날 준비를 하는 진에게 다가갔다.
“떠나는 중에 미안하네만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다네.”
“예, 말씀해 주십쇼.”
“자네는 무얼 위해 강호에 나왔는가?”
“…….”
많은 후기지수들이 현실의 벽과 마주치며 한 번쯤은 생각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질문한 이가 아무리 고수이더라도 초면에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긴 했다. 백두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진이 당황했다. 백두산도 말을 꺼내고는 급히 사과했다.
“오래 만나지도 않았는데 성급하게 물었군. 미안하네.”
“다른 사람들을 지키고 싶습니다. 저 같은 피해자가 없길 원해서요.”
“가까운 이를 잃었나.”
“…예.”
“나 역시 자네와 똑같은 경험이 있다네. 그 경험은 평생 나를 옥죄어왔지만 새롭게 나아갈 의지가 되기도 했지. 선배로서 조언하자면….”
자신을 잃지 말고 강해지게나.
그리 말하며 진의 어깨를 토닥인 백두산이 도장 안으로 몸을 돌렸다. 화랑은 진을 배웅하겠다고 같이 나간 걸 보면 짧은 새에 정이 든 모양이었다.
화경에 도달한 이는 별이 내려준 운명을 힘으로 휘두를 수 있다. 다만, 완전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조금 더 위의 경지에 도달해야 했다. 백두산은 화경에 이른 고수였기에 충동을 억누르고 다스릴 정도는 되었다. 마당에 선 백두산은 어제 있었던 사고를 떠올렸다.
환술이 살의를 되찾게 만들기는 했지만 행동에 나서지 못했다. 날뛰려는 기운을 억누르며 환술을 해제하면 될 상황이었다.
‘사부님!’
애제자의 모습을 보고 생각이 멈췄다. 참혹한 모습에 마음이 화끈거렸다. 저런 모습이 될 바에야 편히,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내 손으로 끝내고 싶다. 안식을, 제자에게 안식을….
“후우….”
평정이 깨지며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지금 환술에서 벗어나기보다 주변인이 휘말리는 것이 더 빠르다는 걸 알자 백두산은 오래전의 과격한 해결책을 선택했다. 아예 혈맥을 다 막아버려 강제로 기운을 단전에 가둬 버린 것이다. 몸을 혹사시키고 여파로 기절까지 하는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확실한 대책이기도 했다.
백두산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이라 보이지 않지만 하늘에 별은 존재한다. 그리고 백두산의 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피처럼 붉고 강렬하게 타오르는 별이 하늘에 있었다.
“화경에 다다르었어도 별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구나.”
천살성, 살귀의 별이 백두산을 바라보았다.
저 별의 시선에서 멀어지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을까. 모든 행동을 절제하며 욕심도 부리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무림맹에 들어간 이유도 천살을 다룰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잘못되더라도 고수들이 모인 맹이라면 자신을 죽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누군가가 천살을 알아차리면 어떡하나 고민하던 때도 있었지만, 백두산 본인이 그걸 절제하는 데에 도가 튼 것과 천살이라는 위험한 별이 맹에 들어올 리 없다는 상식이 맞물려 대부분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긴 시간이 지나 화경에 다다랐을 때, 백두산은 은퇴를 결심했다. 목표를 달성했으니 살얼음 같은 맹 생활도 정리하고, 아예 시골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때, 화랑을 만났지.’
어디서 맞고 도망쳤는지 상처투성이로 집 문 앞에 기절해 있었다. 갈 곳 없다고 말하던 모습에 제자로 들어오는 게 어떻냐 제안했던 것이 이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지금 봇짐 매고 서 있는… 잠깐?
“사부님! 저 집 나가겠습니다!”
화랑이 백두산에게 큰 절을 올렸다. 두 사람의 시간이 잠깐 멈췄다. 잘못했나 싶어 고개를 올린 화랑을 보며 백두산이 멋쩍게 웃었다.
“…하하.”
“어… 사부님?”
“사실 그 이야기가 언제 나올 지 궁금했다. 네 성미라면 성인이 되자마자 강호로 향할 거라 생각했건만.”
“윽.”
“이렇게 갑자기 정하게 된 건… 그 아이에게 감명이라도 받은 게냐?”
“진하고 싸우면서… 더 싸워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강호에 나가면 진만 아니라 다른 강자들도 있겠죠. 그 녀석과 함께 돌아다니며 더 강해지고 싶어요.”
“그래, 그 아이와 같이 갈 의향이구나…. 어려움이 많을 텐데 괜찮겠느냐?”
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초출할 때의 첫 동료가 역천임을 아는 백두산의 속만 답답해졌다.
“객기 부리지 말고 늘 경계하는 태도를 가지며, 명예보다는 네 목숨을 중요하게 여기거라. 그리고 강호에서 여자, 노인, 아이를 늘 조심하거라. 스승으로 할 충고가 이것밖에 없구나.”
“받들어 새겨들었습니다.”
화랑이 정중하게 포권까지 마치고 문으로 걸어 나갔다.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백두산의 눈에는 제자의 갸륵함과 걱정이 섞여 있었다. 그런 걱정도 문 앞에서 슬쩍 뒤를 돈 화랑의 미소를 보고 사라졌다.
“스승이 참견할 나이는 지났고, 역천임이 꺼려지긴 하지만 진이 있다면 괜찮겠지. 그리고 화랑의 성격 상 진과는 맞지 않아 금방 헤어질 테니.”
백두산은 두 가지를 간과했다. 하나는 맹에 있었을 때 자신이 천살인 걸 알렸음에도 괜찮다며 친구라고 부르던 놈이 있었으며, 또 하나는 화랑도 그 놈과 비슷한 답을 선택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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