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진화랑] 썰 모음 24

뎁진화랑 1개, 진화랑드라 1개. 전체적으로 진이 여러가지로... 네. 이제 슬슬 화랑른으로 표기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1. 17-2에서 이어지는 모든 건 데빌의 손아귀였고 데빌은 화랑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로 뎁진화랑.

데빌은 제 숙주가 검은 머리칼을 양갈래로 딴 여성과 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내면 안에서 무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을 오래동안 포기하지 않고 제 등을 바라보며 쫓아온 그녀에게 숙주가 마음을 주는건 이상하지 않았다. 거기엔 자신보다 작고 가녀린 여성을 지켜줘야 한다는 보호 본능도 분명 있을거다. 숙주는 저를 지키다 사망했다고 알고 있던 제 어머니를 오래동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본능적으로 더 그녀를 지키고 있을거다. 뭐, 보기 좋은 한쌍이라는 이야기에는 데빌도 찬성이었지만 그것 뿐이었다. 데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기 좋은 그림을 그저 바라만 보는 건 데빌답지 않았다. 지루한 평화, 따분한 일상, 녹슬어가는 본능. 데빌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았다. 데빌은 숙주인 진의 분노와 절망 속에서 눈을 떴고 그때 느꼈던 감정을 계속 맛보고 싶었다. 비록 숙주를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한발짝 뒤로 물러서서 협력했지만 이젠 한계였다. 이 평화로운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계속해서 누군가의 분노와 절망을 맛보고 싶었다. 그래, 데빌은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 화랑... "

데빌이 작게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자신에게 죽을 정도로 몰리고도 계속해서 투지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싸움을 걸던 남자. 그 남자와의 싸움은 분명 지금까지 데빌이 맛본 싸움 중 가장 유쾌하고 자신이 원하던 이기겠다는 본능이 가득했던, 그가 가장 만족했던 싸움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패배하여 강제로 숙주의 내면 안에 갇혔을 때 그는 제가 아닌 숙주를 바라보는 말까지 했었다. 자신을 보고 있으면서, 자신과 싸우고 있으면서 자신을 보지 않는 남자에 데빌은 처음으로 분노와 절망을 느꼈고 그 다음엔 환희를 느꼈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느낀 나의 분노와 절망. 하하, 달콤하고 맛있는 감정. 그 이후엔 호기심이 생겼다. 그럼 자신을 이렇게 만든 그의 분노와 절망은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화랑이 궁금했고 그의 감정의 맛이 궁금했다. 그렇기에 데빌은 숙주가 화랑과 다시 싸우게 됐을 때 친히 힘을 빌려줬다. 그가 패배 후 숙주에게 어떤 감정을 보일지 궁금했으니까. 그리고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것도 포함해서 너야. 데빌이 원하던 분노, 절망의 감정은 없었지만 대신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줬다. 지금껏 모두가, 심지어 숙주마저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왔는데 그는, 화랑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인정해 준 것이었다. 데빌은 내면 속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웃었다. 유쾌했다. 자신과 제일 많이 싸우고 부딪치고 저에게 죽을 뻔했으면서도 저를 보지 않던 그가 제일 먼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다니. 그 날 이후 데빌은 화랑을 손에 넣기로 마음 먹었다. 그의 모든 감정들도 함께.

" 네가 내 숙주의 소중한 인간이군 "

샤오유가 데빌의 힘을 빌린 진이 아닌 온전히 데빌 그 자체를 본 건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데이트 후 시간이 늦어 진의 집에서 하루 신세를 지게 된 샤오유는 신사적인 진의 배려로 그의 방에서, 진은 거실 소파에서 각자 수면을 취하기로 하면서 그의 방 침대에서 설레임에 잠들지 못해 뒤척뒤척 거리던 중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일으킨 샤오유는 진의 몸이지만 뿔과 날개, 날카로운 손톱과 이질적인 붉은 눈과 마주하고는 재빠르게 침대에서 내려와 자세를 잡았다. 그래, 그건 생존본능이나 다름 없었다. 샤오유의 반응에 하하, 작게 웃은 데빌이 느릿느릿 그녀를 압박하며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마치 품평이라도 하듯 그녀를 요리조리 살피던 데빌은 저를 보며 두려움에 떠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턱을 놔주며 한발짝 물러섰다.

" 역시 생각대로 시시하군 "

" 진을 어떻게 한거야? "

" 걱정마라, 이 몸의 권한은 숙주한테 있으니까. 난 그저 숙주가 잠들어 권한을 잃어버린 순간 잠시 몸을 빌린 것 뿐이다. 궁금했거든, 네가 어떤 인간인지. 그런데 역시... 시시해 "

" 시시하다고...? "

" 그래, 시시하다. 넌 고통도 절망도 공포도 모른다. 그런 시시한 인간을 내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나? 넌... 나를 감당할 수 없어 "

"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거야? 너는... "

" 날 한번도 마주치지 않았으니까, 너는. 너는 그저 숙주... 아니, 카자마 진의 겉만을 쫓았다. 내면에 자리 잡은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 나에게 너는 시시한 인간일 뿐이야 "

" 그럼... 어떻게 하면 날 인정할거야? "

간단하다. 데빌이 샤오유의 팔을 움켜잡더니 그대로 그녀를 집 밖으로 끌고 가 집어던졌다. 꺄아! 작은 비명을 지른 샤오유가 낙법을 하며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데빌의 살기가 급격히 상승했다. 너의 모든 걸 내보여라, 여자. 그리고 1시간 후 샤오유는 날카로운 손톱에 몸 여기저기 생체기가 난 체 데빌의 발 아래에 주저 앉아있었다. 진의 얼굴을 하고 죽일 듯이 덤벼드는 데빌은 조금의 손속도 없었다. 무표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던 데빌이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시시해. 날 만족시키는 건 역시 그 인간 밖에 없는건가. 그래... 나한테 필요한건 너다. 용케도 데빌이 중얼거리는 걸 들은 샤오유가 그...? 라며 작게 반문했지만 데빌은 그녀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체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 진이 잠들었던 소파에 떨썩 쓰러지듯 누웠다. 서서히 날개와 뿔이 사라지며 주도권이 진에게 돌아오는 모습을 지친 모습으로 집으로 들어와 내려다보고 있던 샤오유가 입술을 지긋이 물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진은 제 방에서 자고 있어야 할 샤오유가 없자 당황하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간다는 쪽지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이 폰을 들어 샤오유에게 연락을 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 후 데빌은 두어번 정도 샤오유의 앞에 나타나 그녀를 시험한다는 명목으로 상처를 내며 위협했고 그 상처를 진에게 내보이지 않으려했던 그녀의 노력은 샤오유의 앞에서 억지로 진의 의식을 되돌리며 깨워버린 데빌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 설명해! 샤오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

분노에 찬 목소리에 데빌은 웃었다. 샤오유를 안심시키고 치료까지 한 후 안전하게 돌려보낸 진은 제 심상세계에서 저를 비웃는 데빌의 멱살을 잡으며 분노했다. 데빌은 제 숙주의 부정적인 감정을 맛보며 웃고는 툭 제 멱살을 잡은 손을 뿌리쳤다. 내가 너의 안에 계속 존재하는 동안 나는 너의 모든 걸 지켜봤지. 나는 그 여자가 나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시험해 본 것 뿐이다. 나는 너니까 말이야. 데빌의 날카로운 손톱이 쿡, 진의 심장이 있을 왼쪽 가슴을 가볍게 짚었다. 그게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한 너의 시련이다. 그 말에 진이 입술을 깨물고는 데빌을 노려보았다.

"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던거냐 "

" 하하... 난 네가 잠들었을 때 딱 2명을 만났다. 하나는 너의 소중한 인간. 그리고 다른 한 명이... "

오늘도 시원하네. 오늘도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에 깨어난 화랑이 발코니에 주저 앉아 담배를 문 체 가만히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최근 데빌이 찾아오지 않는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건가... 아니다, 내가 그 자식 걱정을 뭐하러... 마주치면 오히려 심란할 뿐이니 차라리 마주치지 않는게 상책이다. 그래도... 아주 조금은 제 가슴을 스져지나가는 쓸쓸한 감정에 화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갈망과 이 헛된 소망이 빨리 사라져야할텐데, 이 감정들이 자신에겐 필요 없는 감정이라는걸 아는 화랑이 어느새 필터 끝까지 다 타버린 담배를 비벼끄고 다시 새 담배를 꺼내려는 찰나였다. 문득 고개를 든 화랑은 달을 가로지르는 무언가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대한 날개를 단 무언가, 또 데빌인가 싶었던 화랑은 이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저를 부르며 날아온 진에게 멱살이 잡혀 강제로 공중으로 날아올라 건물 밖으로 그대로 내동댕이 쳐졌다. 윽! 갑작스런 습격에 제대로 낙법도 하지 못한 체 그대로 맨바닥을 구르게 된 화랑이 자세를 잡기도 전에 거친 손길이 그의 멱살을 잡아 다시 일으켰다. 갑자기 이게 무슨... 놀람과 당황한 화랑이 바라본 그곳엔 자신을 분노한 눈으로 바라보는 진이 있었다.

" 갑자기 무슨 짓이야, 너! "

" 화랑, 너 데빌에게 무슨 소리를 한거야! "

" 영문을 모르겠거든?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집어 던지기나 하고...! "

" 데빌이 샤오를 습격했어! 시험이라면서 샤오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그리고 그걸 부추긴 게 너라고...! "

" 자,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데빌이 샤오유를? 아니 그 전에 내가 뭘 부추겼다고? "

" 데빌이 가끔 너를 찾아왔다는 거 알고 있어. 데빌이랑 뭐했어, 너 "

" 하긴 뭘해! 난 그냥 담배 피고 있고 그 자식은 날 쳐다보다 갈뿐이라고! "

" 거짓말 하지마! "

" 거짓말 아니거든! "

화랑은 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데빌이 샤오유를 습격해? 상처를 입혀? 시험? 근데 그걸 부추긴게 나라고?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데빌 이 자식,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무슨 소리를 한거야. 진의 무엇을 했냐는 질문에 차마 감정을 내보이고 키스를 받아줬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화랑은 필사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며 항변 했지만 소중한 사람이 자신의 데빌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는 분노에 눈이 멀어버린 진은 그 외침은 그저 변명으로만 들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분노에는 자신과 데빌이 동일 시 하다는 전제에서 자신이 샤오유를 다치게 했을리 없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나는 너니까. 그래, 진은 원인을 다른 자에게 돌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또 다른 내면이 그녀를 다치게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으니까. 진이 거칠게 멱살을 놓으며 뒤돌았다.

" 너한테 정말 실망이다, 화랑. 난 널 정말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

" 잠깐만! 너 나보다 그 자식의 말을 믿는거야? 데빌을? "

" ...그래 "

" 하! 자, 잠깐만. 그거 진심이야? 야, 진...! "

제 어깨를 붙잡는 손에 결국 참지 못한 진이 뒤로 돌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주먹에 정통으로 맞아버린 화랑이 비틀거리다 털썩 주저앉았다. 읏...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주먹에 맞아버린 화랑이 정신을 가다듬는 사이 진이 입술을 깨물다 제 날개를 펼쳐 휙 날아가버렸다.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계속 그를 보고 있다가는 제 안의 자신도 모를 감정에 휩싸일것 같으니까. 진이 제 앞에서 사라지고 잠시 주저앉은 체 있던 화랑이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소리를, 고함을 지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일어난 화랑이 손톱에 피가 흐를 정도로 꾹 쥔 주먹으로 제 뺨을 훔치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이젠 보이지 않았다.

데빌이 큰 소리로 웃었다. 이렇게나 잘 풀릴 줄은 몰랐으니까. 아무래도 자신이 말한 나도 너라는 그 말이 숙주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 모양이었다. 숙주가 화랑을 찾아간 이후 데빌은 의도적으로 샤오유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제 행동은 숙주가 제 말을 더 믿게 만들었다. 그리고 데빌은 화랑도 찾아가지 않았다. 아직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이 원하는 그를 만들기 위해서는 조금 더 조금 더 그 감정이 필요했다.

데빌이 제 앞에서 서서히 형체를 무너트리며 사라지고 있는 아자젤을 보다 제 손에 든 아자젤의 심장을 혀로 핥았다. 절대로 죽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인 아자젤을 깨운 데빌은 아자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런 데빌에 설마 자신의 권속이 자신의 뒤통수를 칠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아자젤이 방심한 틈을 타 데빌은 아자젤의 심장을 탈취했다. 하하, 나는 그 누구에게도 지배당하지 않는다. 종속되지 않는다. 그게 카자마 진 너라고 해도 말이지. 그래... 준비는 모두 끝났다. 데빌이 날아올랐다, 이제 자신의 손에서 새롭게 탄생할 그를 맞이하러 갈 때였다.

" 젠장... "

오늘 밤도 제대로 잠들지 못한 화랑이 한숨과 담배연기를 함께 내뱉으며 멍하니 어두운 새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날 이후 화랑은 제 안의 어두운 감정을 쉽사리 제어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사범인 백두산마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올 정도였다. 차마 그날 있었던 일들과 제 감정을 털어놓지 못한 화랑에 백두산은 화랑에게 일주일의 휴식을 주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오라면서. 하지만 화랑은 그러지 못했다. 이 감정을, 이 분노와 절망을 누구에게 털어야할지 화랑은 도저히 알지 못했다. 아니, 정정. 다시끔 올라오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인 화랑의 귀에 그 날 이후 거진 한달 만에 듣는 날개짓 소리가 들어왔다. 번쩍 고개를 든 화랑의 눈에 저를 보며 미소짓는 데빌이 들어온 순간 그는 이 분노와 절망을 누구에게 털어야하는지 깨달았고 그대로 벌떡 일어나 데빌의 멱살을 잡았다.

" 너 이 자식...! 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샤오유는 왜 습격하고 그걸 내가 부추겼다고 거짓말을 해? 무슨 생각으로 그딴 말을 한거야! "

" 하하, 내 말을 진실로 믿은 건 숙주다. 그러니 원망하려면 숙주를 원망하는게 맞지 않나? "

" 시끄러워, 시끄러워...! 뚫린 입이라고 그딴 말하지마! "

" 하지만 덕분에 충분한 감정이 모였다 "

" 뭐? "

순간 데빌이 무언가를 꺼내 그대로 화랑의 가슴에 박아넣었다. 이곳에 오기 전 탈취한 아자젤의 심장. 그 어둡고 무거운 힘이 화랑을 휘감기 시작했다. 윽... 너... 무슨 짓... 반쯤 박힌 아자젤의 심장을 빼내려는 화랑을 염동력으로 속박한 데빌이 눈을 빛내며 바라보았다. 너의 증오와 분노, 절망. 아주 훌륭했다.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어. 정말이지, 이 정도로 너의 감정을 이끌어 낸 숙주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군. 그 말에 화랑이 이를 악 문체 어떻게든 벗어나기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아자젤의 심장이 화랑의 몸으로 완전히 박혀 들어가고 이내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런 화랑을 품에 안은 데빌이 낮게 웃었다. 이제 그 감정을 폭발 시키는거다, 그리고 나와 함께 날뛰어보자. 이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을 부셔버리는거다, 화랑. 그리고 화랑이 실종되었다.

그걸 제일 먼저 알아차린 건 당연하게도 그의 사범인 백두산이었다. 연락이 되지 않는 제자가 걱정된 그가 화랑의 집을 찾았으나 어떠한 소지품도 없어지지 않은 체 화랑만 사라진 걸 알아차린 그가 황급히 리에게 연락을 취했고 이내 위그드라실의 모든 인원이 동원되었다. 그 중엔 당연하게도 연락을 받은 진도 있었다. 진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화랑의 모습을 떠올렸다. 필사적으로 아니라고 외치는 모습과 자신이 휘두른 주먹에 맞아 주저 앉은 모습. 자신이 조금 심했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 제 안의 데빌이 샤오유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에 진은 제 판단이 맞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화랑 역시 자신을 도와주었던 인연 중 한명이었기에 진도 수색에 도움을 주었지만 그래도 화랑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은 체 시간만 흘렀다.

" 간다, 샤오 "

" 응! 언제든지 와, 진! "

이런 상황과 관계없이 철권 리그가 개최되었다. 의미와 목적이 변질되었던 기존의 철권 리그가 아닌 정말 순수하게 무술의 강함을 겨루어보는 리그. 백두산은 화랑이 무슨 고민 등으로 잠시 떠난거라면 리그 개최로 제 제자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한 모양이었지만 화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진과 샤오유의 시합이 있는 날이었다. 그들과 인연이 있던 자들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시합이 시작된 직후 진에게 이변이 발생했다. 시합 시작과 동시에 진은 제 안에서 웃는 데빌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제 때가 됐군. 목소리와 함께 진은 제 몸을 둘로 가르는 것 같은 고통에 작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 앉아 몸을 웅크렸고 그런 진에 당황한 샤오유가 황급히 진에게 다가가 그의 몸에 손을 대기 무섭게 진의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 형체를 이루었다. 고통에 허덕이면서 진은 제 내면 안에서 데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고통이 가시기가 무섭게 번쩍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형체가 모습을 갖추었다. 진을 베이스로 붉은 눈동자와 머리에는 뿔, 등에는 칠흑처럼 검은 날개를 달고 있는... 데빌이었다. 데빌을 발견한 위그드라실의 사람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고 몇년 전 뉴욕에서 데빌 상태의 카즈야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 당한 장면을 아직 기억하고 있던 관중들은 비명을 지르며 경기장을 빠져나가기 바빴다. 진이 이를 악물며 공중에서 제자리 비행을 하고 있는 데빌을 바라보았다.

" 데빌, 어째서. 왜 내 안에서 빠져나간거지? 더군다나 너한테 헌신할 수 있는 육체가 없을텐데! "

" 하하... 그때 아자젤의 심장을 탈취할 때 힘도 조금 흡수했으니까 말이야. 하아, 오래만에 맛보는 자유로운 몸이군. 정말 좋아 "

" 아자젤이라고...? 그게 무슨! "

" 그건 알 필요 없다. 다만 하나만 알려주지. 나는 내 목적을 위해 널 이용했다 "

" 뭐? "

" 지루한 평화, 따분한 일상, 녹슬어가는 본능. 이젠 참을 수 없어. 내가 원하는건 누군가의 분노와 절망이다 "

" 그래서 나의 분노와 절망을 보겠다는 거냐, 데빌! "

" 그것도 좋겠지만 네놈의 감정은 이미 미적지근하다. 말했을텐데, 나는 널 이용했다고 "

" 뭐? "

" 드디어 깨어났군 "

순간, 쾅! 큰소리와 함께 데빌의 앞의 공간이 마치 유리창이 갈라지는 것처럼 쩌저적 갈라졌다. 쾅! 쾅! 두어번 더 큰소리와 함께 아까보다 더 갈라진 공간에 틈이 생긴 순간 날카로운 붉은 손톱을 가진 양손이 불쑥 그 틈을 비집고 나와 공간을 붙잡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힘차게 공간을 가르고 모습을 들어낸 건. 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 눈에 비춰진 그는 데빌과 같은 붉은 눈동자와 뿔, 그리고 피처럼 붉은 날개를 달고 있었다. 그래, 그는 아자젤의 심장으로 인해 이미 데빌화 한 상태였다. 으득, 이를 간 그의 외침과 진의 외침이 서로 교차했다.

" 화랑! "

" 데빌! "

진의 외침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화랑이 날개를 펄럭이며 일직선으로 날아가 데빌에게 달려들었다. 공중을 날면서 공격하는 것이 어색할텐데 천재라는 말에 어울리게 화랑은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 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데빌을 공격했다. 그런 화랑의 공격을 유연하게 받아치고 흘리며 데빌이 만족의 광소를 터트렸다. 그 광소가 거슬린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화랑이 내려찍기로 땅으로 떨궈버리고는 그대로 달려드려는 걸 데빌이 레이저로 어깨를 뚫어버리며 다시 날아올라 화랑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으드득, 이를 갈며 저를 바라보는 자신과 같은 붉은 눈을 응시하던 데빌이 멱살을 잡은 팔에 힘을 주고 그를 힘껏 집어던졌다. 이내 콰앙, 큰소리를 내며 화랑이 경기장 바닥에 쳐박혔다. 파편과 뿌연 모래 먼지가 잠시 경기장을 가린 사이 진과 샤오유가 화랑이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윽, 제길... 상체를 일으키며 머리를 흔들고 있는 화랑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샤오유가 붙잡기 무섭게 화랑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 손을 뿌리쳤다. 화랑! 진은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화랑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그는 그 손도 뿌리쳤다.

" 젠장, 무슨 수작이야. 데빌 이 자식... "

" 화랑...! "

" 왜... "

아무도 없는데 누가 날 붙잡는거야. 그 중얼거림에 샤오유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한번 더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이 닿기 전 화랑이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날아올라 데빌에게 달려들었다. 어느새 레이저에 뚫린 어깨는 깨끗하게 아문 상태였다. 힘을 완벽하게 다루고 있는 화랑을 보며 미소를 지은 데빌이 화랑을 다시 한번 더 쳐내기 위해 자세를 잡았지만 순간 화랑의 몸이 무너졌다. 윽... 추락하는 화랑에 데빌이 빠르게 움직여 그를 품에 안고 땅으로 내려왔다. 데빌이 화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힘은 완벽하게 다루지만 몸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적응이 필요한가. 자신의 심상 세계에는 아자젤의 기운이 가득하기에 몸에 무리가 가지 않지만 심상 세계를 벗어나 이 세계로 강림한 순간부터 몸이 아자젤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었다.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하군. 데... 빌, 너...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가 적의와 분노를 가득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서 못해, 너만은... 용서 못해...!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하, 데빌이 자신의 심상 세계로 돌아가는 문을 열고는 그대로 화랑을 집어 던졌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치고는 그를 조잡하게 다루던 데빌이 자신도 돌아가기 위해 한발짝 뗀 순간.

" 데빌! 너, 화랑을 어떻게 한거야! "

" 아, 그래. 너한테만은 전말을 알려줘야겠지. 그래야 네 절망도 깊어질테니까 "

" 전말이라고...? "

" 말했을텐데. 나는 너를 이용했다고. 나는 그를 나와 같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 그의 부정적인 감정을 한껏 증폭시켰다. 그리고 그 기폭제가 바로 너다, 숙주. 아니, 카자마 진 "

" 기폭제... 설마... 그때 나에게 했던 이야기가... "

" 그래, 모두 거짓말이다. 너는 나다, 라는 말에 사로잡혀 자신의 다른 내면인 내가 네 소중한 여자를 다치게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나의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드렸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지 "

" ...그런... "

" 지금 화랑의 눈에는 오직 나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냐고? 그거야 분노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지. 그 상황에서도 그는 너를 미워하지 않고 증오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얼마나... 너를 생각하고 있는건지 모르겠군 "

" 뭐...? "

" 이제 나는 그의 분노와 증오를 세상에 풀어놓을거다. 분노에 눈이 멀어 오직 나밖에 보이지 않는 화랑을 세상에 풀어놓는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죽일까, 얼마나 많은 것들을 파괴할까. 그리고 마침내 분노에서 벗어나 세상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올태… 그는 얼마나 절망할까. 오직 나 하나만을 죽이겠다는 일념하에... 그의 분노와 증오로 세상엔 다시 공포가 가득할거다. 그래, 이 모든 건... 네 덕분이겠군. 카자마 진 "

하하, 작게 웃으며 데빌이 그대로 문을 통과해 제 심상 세계로 돌아갔다. 데빌이 통과하기 무섭게 사라지는 문을 보던 진이 젠장... 작게 중얼거리며 그대로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화랑의 얼굴이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미... 안해, 화랑... 미안해... 이젠 들어줄 사람이 없는 뒤늦은 사과를 중얼거리며 진이 질끈 눈을 감았다. 멀리서 샤오유와 위그드라실의 리, 라스, 알리사가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2. 썰 모음 19-2에서 이어지는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진에 질려버려 함묵증이 생긴 화랑이 자신을 향한 불편한 침묵에 질려 쉴 곳을 찾던 중 자연스러운 침묵을 찾아서 휴식을 청하는 걸로 진화랑드라.

그러니까... 목소리가 안나온다? 리의 말에 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랑에게서 지금 그 쪽으로 가겠다는 문자를 받은 후 진 없이 혼자서 위그드라실의 본부로 온다고? 싶었던 리는 자신을 보자마자 대뜸 폰을 들이미는 화랑에 뭔가 싶었지만 이내 액정에 적힌 문장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목소리가 안 나와. 평소 그의 소악마스러운 면을 알기에 이번에도 진이 없다고 심심해서 놀리는건가 싶었던 리는 제 말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몸을 돌려 가버리려는 화랑을 황급히 붙잡았다.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게된 리가 그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G사를 흡수하면서 생명 공학 부분에도 엄청난 발전을 이룬 위그드라실의 진료실은 여타 평범한 병원들하고는 차원이 틀렸다.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리에게 미리 연락이라도 받은건지 대기하고 있던 의사들이 순식간에 들이닥쳐 화랑을 끌고 갔다. 어지간히 놀란건지 입을 벌리며 뭐라뭐라 말하는 화랑의 입에선 여전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돌발 상황을 만들면 본인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정말 안나오는건가. 살짝은 아직도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던 리는 완전히 생각을 고쳐먹고는 진료가 끝날 때 까지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고 결과는.

" 이상이 없다? "

그 말에 화랑이 가만히 검사 결과지를 바라보았다. 뭐라뭐라 복잡하게 써져있는 글들과 그래프의 향연 끝에 가장 마지막에 써져있는 글은 정상 단 두 글자였다. 아프거나 병으로 목소리가 안나오는게 아니라면... 잠시 정상이란 두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화랑의 옆의 리가 그를 바라보며 말을 내뱉었다. 일단 진에게 알리는게... 그리고 진의 이름을 듣자마자 눈꼬리가 확 올라간 화랑이 잽싸게 제 폰을 꺼내 액정을 두들기더니 그대로 리에게 들이밀었다. 그 자식한테 말하지마. 그 문장에 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걱정할텐데? "

[ 그 자식도 말 안해주는 건 똑같잖아. 이젠 질렸어, 나도 더 이상 말 안해줄거니까 ]

길고 긴 문장을 손수 쳐서 리에게 보여주곤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손을 흔들며 진료실을 나가는 화랑의 모습을 보던 리에게 의사가 와서 한마디 거들었다. 만약 육체에 이상이 없다면 정신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 말에 가만히 뭔가 생각하던 리가 실어증이 아니라 함묵증일 가능성이 크다는건가, 라며 중얼거리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화랑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빠르게 퍼졌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그렇게나 떠드는 걸 좋아하던 장본인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소문이 안날 수가 없었다. 조용하니 내가 다 속이 시원하네, 장난스럽게 말하는 스티브와 주먹 다짐 좀 하고 아수세나에게 기분 좋아지게 하는 커피는 어때? 라며 커피를 받기도 하고 맨날 훈련만하니 기분 전환이 안되서 그런거라며 리리의 권유로 - 라 쓰고 납치라고 읽는다 - 잠시 모나코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을 겪는 동안 진은 화랑의 곁에 없었다. 진은 지금 이 시간에도 자신의 죄를 갚기 위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복구 중이었고 화랑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랑의 불만은.

아, 짜증나네. 화랑이 입을 꾹 다문 체 빠르게 복도를 지나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과 별개로 화랑도 진의 편에 섰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아직 해체하지 않은 레지스탕스의 리더로서 세계 복구에 힘을 쓰고 있었고 오늘은 그 보고서를 제출을 위해 미리 연락해 둔 소형기를 타고 비도프니르에 발을 딛는 날이었다. 라스와 알리사가 진과 함께 세계 곳곳을 누비는 쪽이라면 리는 비도프니르에서 각종 서류와 장비 등을 제공하는 쪽이기에 이번에도 비도프니르에 남아있는 건 리 뿐이었다. 화랑이 건내는 보고서를 받고 두어장 넘겨본 리가 몇달 째 같은 질문을 던졌다. 아직도 목소리가 안나오나? 그 말에 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 …진은? “

[ 몰라. 바쁘겠지, 그 자식 ]

“ …먼저 연락할 생각은? “

[ 가끔 문자 정도는 하고 있어. 그거 알아? 항상 먼저 연락하는 건 내 쪽이야. 그러니 그 질문은 내가 아니라 그 자식한테 해. 그럼 간다 ]

투다다닥, 문자를 갈긴 후 자신에게 액정을 보여준 화랑이 그대로 뒤돌아 가버리자 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신념이 이렇게 정반대인 두 사람이니 이런 갈등은 어쩔 수 없지만… 자네는 화랑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단 말이지, 진. 한편 리의 방을 나온 후 돌아가기 위해 비도프니르의 선착장으로 이동하던 화랑의 미간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모두가 침묵한다. 자신을 아는 사람들은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대화를 중지하고 침묵했다. 그래, 방금 전 자신을 만난 자피나와 리리처럼. 한참 자피나와 대화 중이던 리리는 화랑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대화를 끊더니 화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곤 손으로 톡톡 자신의 목을 두드리는 수신호에 화랑이 칫, 소리가 나오지 않는 혀를 차고는 이내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 곧바로 다리를 움직여 자리를 떴다. 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대화가 어려워 자신을 배려해 대화를 중지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화가 나는건 어쩔 수 없었다. 어색한 침묵, 원치 않은 침묵.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항상 진심을 이야기하는 화랑으로서는 이 침묵이 달갑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 끝에 있는 건 분명...

어라? 선착장으로 향하던 화랑이 휴게실을 지나치다 걸음을 멈추고는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비도프니르의 크기가 크기인만큼 여기저기 휴게실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선착장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이 휴게실은 인기가 없어 - 여기서 쉴 바에는 그냥 바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 항상 비어있기 마련이었는데 오늘은 이 휴게실에 방문자가 있었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세르게이 드라구노프. 테이블에 놓인 커피잔을 봐서는 아수세나가 들렸다 간 것 같았다. 책을 읽는데 집중해서 그런지 자신이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잠시 생각을 하던 화랑이 폰을 꺼내 문자를 쓰고는 그대로 휴게실로 들어섰다. 한편, 조용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던 드라구노프는 갑자기 책 위로 불쑥 들어온 폰의 액정에 적힌 글을 눈으로 읽었다. 잠깐 옆에 앉아도 괜찮아? 글을 모두 읽은 후 고개를 들자 보인 화랑에 드라구노프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물어볼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여긴 휴게실이고.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생각을 하며 드라구노프는 제가 앉은 자리에서 적당히 떨어져 자리를 잡는 화랑을 잠시 응시하다 이내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그러고보니 화랑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그는 떠들기 좋아하는 아수세나를 통해 들었다. 그래서일까, 드라구노프는 말이 아닌 문자로 소통하는 화랑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어색하다고 느끼고는 있었다. 자신이 아는 그는 분명… 꽤나 시끄럽고 대화를 좋아하는 자였으니까. 그래, 한달 만에 다시 만났을 때도 그랬다.

국가의 명령을 받아 세계 복구를 위해 위그드라실의 협력 하기로 약속하고 그 건에 대한 형식적인 서류 작성 등을 위해 비도프니르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 드라구노프는 한달 만에 다시 화랑을 만났다. 높이가 있는 난간에서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빛내며 크게 제 이름을 - 본인이 공언한대로 드라로 줄여서 - 부른 화랑이 난간에서 바로 뛰어내려 착지하더니 순식간에 드라구노프의 앞에 도달하고는 정신없이 떠들어댔다.

“ 여, 드라! 한달 만이네! 댁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여긴 무슨 일이야? “

“ 드라? 화랑, 드라구노프와 만난 적이 있나? “

“ 어, 있지. 한달 전에 내가 찾아가서 한판 붙었거든. 물론 어떤 자식이 방해하는 바람에 승패를 못정했지만. 근데 왜 댁이 같이 있어, 라스? “

“ 손님 맞이라는거다. 뭐, 이젠 협력자가 되겠지만 “

“ 흐응, 그렇군… 아, 그건 그거고. 드라, 이후에 시간 있어? 있다고? 좋네. 그럼 이따가 그때 승패 못낸거 확실하게 내는건 어때? “

“ 으음 “

“ 칼 같은 반응 좋잖아! 그럼 재미없는 볼일 끝나면 바로 튀어오라고. 격납고에서 기다릴테니까 “

휙,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가버리는 화랑을 보던 드라구노프가 흐음, 다시 소리를 흘렸다. 넖고 빠른 보폭으로 걸어가던 화랑에게 아수세나와 빅터가 빠르게 붙어 뭐라뭐라 말하는게 보였지만 이미 화랑은 드라구노프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그는… 여전히 시끄럽다. 하지만… 나쁘지 않을지도.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작게 흘러나온 말을 들은 라스가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짓다 이내 다시 그를 안내했다. 한편, 격납고에 도착해 한가로이 기다리는 화랑의 옆에 붙은 건 아수세나와 빅터였다. 두 사람 전부 왠지 모르게 잔뜩 흥분해서는. 아, 정정. 흥분한 건 아수세나 뿐이었고 빅터는 뭔가 신기한 거라도 본 것 같은 모습이었다.

“ 화랑! 그와 대화 할 정도로 그렇게 친했어? 그럼 그때 내가 대접했던 아수세나 커피 중 어떤게 제일 마음에 들었는지 물어봐줘! “

“ 그 하얀 사신과 친분이 있다니 놀랍군. 대체 무슨 수단을 써서 그에게 접근한거지? “

“ 그런 건 본인이 직접 물어봐, 커피퀸. 그리고 수단 같은 거 없거든? 그냥 대놓고 싸우자고 한 것 뿐인데 “

“ 하지만 내가 물어봐도 대답이 없단 말이야. 흔한 반응도 안보여주고! 하지만 화랑은 다른 것 같으니까, 답을 듣고오면 보상으로 원하는 아수세나 커피 1상자 선물해줄게! “

“ 대놓고 싸우자고 말한 걸로 그 하얀 사신이 싸워줬다고? 그가 그렇게 전투광이었다면 우리가 그 고생은 하지 않겠지. 정말 그것 뿐인가? “

“ 커피 필요없고 정말 그것 뿐이거든! 아, 둘 다 귀찮으니까 떨어져! “

형식적인 계약 체결 후 라스의 안내를 받아 격납고에 도착하자마자 들리는 짜증섞인 화랑의 목소리에도 드라구노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버럭 승질을 내던 화랑은 드라구노프를 보자마자 안색이 밝아졌다. 바로 드라구노프를 향해 제 장갑을 조이며 다가온 화랑이 자세를 잡았다. 말이 필요없다는 그에게서 빨리 싸우고 싶다는 열기를 느낀 드라구노프도 가볍게 어깨를 풀더니 이내 자세를 잡았고 둘은 이내 격돌했다. 둘의 대결에 아수세나도 빅터도, 그리고 드라구노프를 이곳까지 안내해 준 라스도 조용히 숨을 죽이고 둘의 대결을 보았고 이들의 눈이 닿지 않을 높은 곳에 위치한 난간에서 그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승자는.

“ 후아, 힘들어. 그래도 간만에 재미있었네! 진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나, 내 실력이 부족했던거니 더 훈련해야지. 잡기 풀기에 좀 더 신경 좀 쓸까… 드라, 당신도 즐거웠는지 모르겠네. 싸움이라는건 나만 즐기면 안되는거니까 “

“ 음 “

“ 오, 재미있었나? 그럼 다음 번에도 또 상대해 달라고? 당신 같은 상대 흔하지 않으니까. 물론 싫다고해도 당신에겐 거부권 같은 건 없지만 “

지긴 했지만 나쁘지 않다며 또 싸우자고 말하는 화랑을 보던 드라구노프는 싸우는 내내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는 그를 보며 진정한 싸움광이라 생각했다. 패배는 쓰라리고 아프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걸 깨달은 화랑에게 있어 이제 패배는 자신이 더 강해지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으로 삼은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드라구노프는 가끔이라면… 몸이 무뎌지지 않기 위한 싸움이라면 나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화랑의 표정이 확 피더니 크게 웃으며 드라구노프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렸다. 약속한거야, 당신. 저와 마주치는 그의 눈 속에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투쟁심을 바라보며 드라구노프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확답에 화랑이 만족의 미소를 짓더니 머리 뒤로 깍지를 꼈다.

“ 자, 그럼 이제 돌아갈까. 드라, 당신은 어쩔거야. 돌아갈거야? “

“ 음 “

“ 그럼 같이 선착장까지 갈… “

“ 잠깐만, 화랑! 나랑 약속했잖아! 드라구노프가 어떤 커피를 좋아하는지 물어봐 달라고! “

“ 잠깐,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어! 그리고 떨어져, 방금 전까지 싸워서 땀범벅이라고! “

“ 대신 물어봐주기 전까지는 안떨어질거야~ “

“ 아악, 진짜! “

화랑은 갑자기 제 등에 달라붙는 아수세나를 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그 광경에 라스와 빅터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고 드라구노프는 여전히 표정 변화없이 그 촌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드라구노프는 높은 난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악마처럼 붉은 눈과 날개를 가진 체 적대심을 가득 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던 드라구노프는 문득 화랑이 휴게실에 온 후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의 페이지가 단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조금 당황했다. 이 정도로 자신이 누군가에 대해 오래, 또 깊이 생각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아니, 이건… 자신이 알고 있던 그와 조금 달라진 것에 대한 동요일 뿐이다. 드라구노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가 조금 신경 쓰인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있어서 시끄러울 정도로 들리던 기분 좋은 소음이 그가 있음에도 들리지 않는다는게 어색해서 일지도 모르지만. 탁, 소리나게 책을 덮은 드라구노프가 화랑을 바라보았다.

“ …몸은 좀 괜찮은가 “

“ …… “

여전히 폰을 보고 있던 화랑은 드라구노프의 말을 듣지 못한건지 대답없이 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드라구노프 또한 말을 다시 걸거나 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리고 10초 후. 화랑이 팍 고개를 들더니 드라구노프를 바라보았다. 스르륵 그 커다란 손에서 폰이 미끄러져 소파로 떨어지는 걸 힐끔 바라본 드라구노프는 눈을 크게 뜬 체 자신을 바라보던 화랑이 폰을 주어들어 빠르게 뭔가 타자를 치는 걸 가만히 보다가 벌떡 일어나 제게 내민 그 액정을 바라보았다.

[ 지금 댁이 말한거야? 당신 말할 수 있던 거였어? ]

“ 과묵하단 소리를 듣긴 하지만 말은 할 수 있다. 여하튼 몸은 괜찮은가 “

[ 우와… 당신이 이렇게 말하는거 처음봐서 좀 놀랬네. 어, 몸은 괜찮아. 아마도… 정신적 문제일테니까 ]

“ …정신적 문제? “

[ 뭐,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남은 건 정신적 문제 밖에 없지. 여하튼 큰 문제는 아니야. 단지 말을 할 수 없다는 거 뿐이니까… ]

“ 그건 작은 문제가 아니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건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거고 그건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어렵다는 뜻이니까. 너는…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걸 좋아하지 않나? ”

그 말에 화랑이 가만히 드라구노프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쉬고는 잠시 폰을 만지작 거리다 이내 천찬히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말을 고르기라도 하듯 타자를 치는 속도가 아까와는 많이 느렸다. 하지만 드라구노프는 진득하게 기다렸다. 어차피 과묵하고 말이 없는 그로서는 누군가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 익숙했으니까. 잠시 후, 액정을 두드리는 손이 멈췄다. 그리고 화랑은 폰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아예 드라구노프에게 넘겨버렸다. 자신에게 내민 폰을 받은 그가 액정에 적혀있는 문장을 눈으로 읽어내려갔다.

소통하는 걸 좋아하는건 아냐. 난 내가 생각하고 본걸 그대로 말하는 걸 선호하는 것 뿐이야. 그리고 말하지 않으면 모르잖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기분이 어떤지 같은거… 그래, 말하지 않으면 몰라. 걱정할까봐 말하지 않았다는거? 그거 진짜 이기적이지 않아? 다쳐서 오면 걱정하는건 당연한건데 그걸 숨기고 말하지 않다가 뒤늦게 물어보면 알 필요 없다고 툭 내뱉고는 가버리면… 걱정되고 짜증이 팍 난다고. 그렇게 걱정끼치고 싶지 않으면 꼬박꼬박 생존 신고라도 해주던가 툭하면 연락이 끊어지기 일수니… 매번 진심을 말하는건 나뿐이지, 정말.

중간부터 누군가에 대한 푸념으로 바뀌는 걸 봤음에도 드라구노프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계속해서 글을 읽어내려갔다. 몸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 문제라면 함묵증인가. 드라구노프가 다시 폰을 건내주자 폰을 받은 화랑이 다시 아까와는 다르게 빠르게 문자를 쳐내려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분위기도 빠르게 전환되었다.

[ 그래도 덕분에 댁이 말하는 것도 들어보고 나쁘지 않은데? 아마 당신의 말을 가장 오래동안 길게 들어 본건 내가 처음일걸? ]

” …이상한 곳에서 긍정적이군 ”

[ 그게 내 장점이니까 ]

“ …그런가… ”

나쁘지 않군.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드라구노프에게 웃어준 화랑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무래도 그는 아직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드라구노프는 휴게실을 나와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선착장에 거의 도착할 쯤 멀리서 반대로 비도프니르에 복귀한 누군가를 확인했다. 오랜만에 비도프니르로 복귀한 카자마 진이었다. 드라구노프는 떠올렸다. 격납고에서 화랑과 싸운 후 붉은 눈과 날개를 펼친 체 자신을 적대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 그래, 그로군. 그의 함묵증의 원인은. 진과 드라구노프가 서로 스쳐 지나갔다. 아니, 지나치려 했다.

“ 잠깐 기다려라. 카자마 진 “

“ 당신…! “

갑자기 말을 건 드라구노프에 놀란 것인지 진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리고 진의 뒤를 따라가던 라스와 알리사 또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의 이름을 불렀다는 점에서 그가 자신에게 볼일이 있다는 걸 깨달은 진이 라스와 알리사를 먼저 보내고는 복도의 벽에 기대며 드라구노프를 바라보았다. 볼일이 있다면 얼른 말하라는 눈빛에 흠, 드라구노프가 숨을 내뱉었다.

“ 화랑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있나? “

“ 뭐? “

“ 역시 들은 것이 없군 “

“ 그게 무슨 말이지? 화랑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니… “

“ 자세한 이야기는 본인에게 직접 듣도록. 그리고 충고 하나 해주지 “

“ 충고라고? “

“ 화랑이 너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봐라. 그가 너에게 보이는 행동, 너에게 해주는 말, 그 모든 것을. 너는 그에게 너무 숨기고 있어. 숨기는 것 만이 답은 아니다 “

“ …… “

그 말을 끝으로 드라구노프는 미련없이 몸을 돌려 선착장으로 향했다. 답지 않게 말을 많이 했다고 중얼거린 것도 잠시 그의 영향인가, 라는 생각이 들자 어쩐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진심만을 말한다… 라. 그래,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나쁘지 않을 것 같군. 드라구노프가 러시아행 소형기에 올라타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진이 화랑이 있는 휴게실에 들어서며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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