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진화랑] 썰 모음 25

진화랑 1개, 뎁진화랑TS 1개, 진화랑레이나 1개. 마지막 학원물은 진화랑 베이스로 3자가 계속 바뀌는 연작입니다.

1. 꽃은 장식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 후의 이야기로 대자연이 터져서 심기 불편한 화랑TS와 데빌로 짧은 뎁진화랑TS.

아, 젠장. 샤워기 앞에 서 있던 화랑이 제 배를 꾹 눌렀다. 그러자 주루룩,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에 화랑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쌍욕을 애써 삼키고 대신 한숨을 쉬었다. 진짜 타이밍 최악이다. 아직 터질 날짜가 아닌데 왜 터지고 난리야…! 어쩐지 묘하게 컨디션이 이상하고 배랑 가슴이 살살 아파온다 했더니… 아, 돌겠네. 내일 시합 진짜 중요한 시합인데… 잠시 샤워기를 붙잡고 시름을 하던 화랑이 다시 한번 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샤워기의 물로 피를 깨끗하게 씻어내고는 물을 껐다.

여성 격투가로서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아, 정정. 여성이라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그 대자연의 날을 협회도 이해하기에 일정을 잡을 때 최대한 그녀들의 편의를 봐줘 주기에 맞춰 일정을 짜는 편이었다. 뭐, 일주일에 내내 시합 일정이 잡히는게 아니라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지만… 화랑의 불운은 하필이면 양이 제일 많다는… 이틀 째에 일정이 잡혔다는 게 문제였다. 아… 아니 왜 갑자기 이렇게 일찍 터진거야!!! 요새 피곤했나? 아니, 루틴은 항상 동일했는데. 훈련을 너무 많이 했나? 아니, 훈련양도 항상 동일한데. 신경써야 되는 일이 있었나? 아니, 신경써야 되는 일은 없… 아, 이거네. 속옷 안쪽에 생리대를 붙이고 입으며 화랑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데비가 자신을 끌어안아 키스를 하고 그게 기사 1면으로 나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화랑 본인의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기사를 본 사범님의 분노도 대단했기에 화랑은 일단 사범님을 진정시키는데 온 힘을 다 했었다. 그래서 겨우 좀 사범님이 진정되셨나 했더니… 타이밍도 지랄 맞게 하필이면 그때 데빌이 도장 앞에 나타났고 사범님은 데빌을 보자마자 눈이 돌아가 - 정말 사범님에게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았으나 써야될 정도로 누가봐도 극대노한 상태였다 - 도장을 뛰쳐나가 바로 데빌과 한판 붙었고 그걸 말리려던 화랑은 결국 포기하고 얌전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제 사범님과 데빌이 격렬하게 싸우는 걸 관전했다. 그래서 어떻게 끝났냐고? 뭐… 그건 아직 결론이 안났다… 라고 하자. 여하튼 화랑은 그 날 이후 자신만 보면 데빌과의 관계를 묻는 사람들에게서 시달렸다. 심지어 그 날 만찬회 때 꾸미고 온 건 모두 데빌을 위해서 라는 소문까지 돌았으니… 결국 다시 한 번 더 제 앞에서 만찬회 때의 이야기를 꺼내면 앞뒤 사정 안봐주고 발차기를 날려주겠다는 화랑의 협박 아닌 협박에 어찌어찌 사태는 종료되었으나 그 사이에 시달린 화랑의 몸은 결국… 조기 대자연 웰컴이라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었다. 하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 동안 리그에 참여하면서 이런 상황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기에 화랑은 이번에도 어떻게든 될거라고 생각했다. 탐폰과 패드의 2중 보호막이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 어떻게든 되긴 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 화랑? 이겨놓고는 왜 그렇게 축쳐져… ”

“ 너랑 농담 따먹기 할 기분 아니니까 절로 가라 ”

“ 뭐야, 왜 그렇게 쳐져 있… ”

“ 절로 가라고 했다! ”

화랑의 대기실을 지나가던 스티브가 소파에 앉은 것도 아니고 누운 것도 아닌 이상한 자세로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지만 돌아온 건 캬아아악!!! 붉은 노을빛 털을 가진 고양이의 하악질이었다. 8강으로 가느냐 마느냐의 중요한 시합을 승리로 장식해서 기분이 좋아야할 그녀의 기분이 너무나도 별로라는 걸 깨달은 스티브가 조용히 한발짝 뒤로 물러서기 무섭게 그의 어깨를 붙잡는 손이 있었으니 그보다 먼저 아는 척 했다가 죄없게 욕을 먹은 진이었다. 제 어깨를 붙잡은 손에 고개만 돌려 뒤를 바라본 스티브는 제 어깨를 붙잡은 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진에 일단 그녀의 시야에 보이지 않게 문에서 떨어졌다.

“ 뭐야, 저 녀석 시합에 이겨놓고는 왜 이렇게 날카로워? ”

“ …이틀 째라는데 ”

“ 뭐가 이틀… 아하… ”

되물어 보려던 스티브는 바로 진의 말을 알아듣고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힐끔, 슬쩍 문 안쪽을 들여다 본 진의 눈에 쿠션을 끌어안고 사정없이 쥐어 뜯고 있는 화랑이 보였다. 준이나 샤오유에게 들었던 이야기로는 여성은 이틀 째와 삼일 째가 제일 힘들다고 했는데 하필이면 화랑은 이틀 째였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시합이라면 기권이라도 했을텐데 오늘 화랑은 8강을 가느냐 못가느냐의 중요한 기로에 있는 시합이었기에 기권도 못했을거다. 처음에 그 사실을 모르고 화랑에게 접근했다 욕을 먹은 진이 오늘 시합이 있어 경기장에 있었던 샤오유에게 화랑의 현재 상태를 이야기 했고 그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잠시만 기다리라며 어디론가 잠시 사라진 상태였다. 자신은 그 사이 또 피해자가 나올까봐 화랑의 대기실 근처를 서성거렸던 건데 하필이면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스티브가 들어가버렸다.

“ 그래서 샤오유는 어디 간거야? ”

“ 글쎄… 뭔가 도움이 될 걸 가지러 간다고 했는데… ”

“ 진! 스티브도 있었네! ”

팔을 크게 흔들며 달려온 샤오유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뒤를 우아한 걸음거리로 따라오고 있는 리리도 함께였다. 진의 눈이 샤오유가 들고 있는 작은 종이 가방으로 향했다. 뭐야, 이건? 진의 물음에 샤오유가 종이 가방을 벌려 안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예쁘게 포장된 달달한 캔디와 초콜릿, 그리고 따뜻한 캔커피가 있었다. 리리가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 기분 회복에 도움이 되는 간식에 배를 따뜻하게 하기 위한 임시 방편으로 뽑아 온 따뜻한 자판기 캔커피이에요. 오늘 제 간식이 장인이 만든 수제 캔디와 초콜릿이어서 다행인 줄 아세요 ”

“ 응, 리리라면 달콤한 간식이 있을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럼… ”

종이 가방을 고쳐쥐며 화랑의 대기실로 들어간 샤오유는 화랑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포장을 까 그 입에 초콜릿부터 밀어넣었다. 리리는 손수 제가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따뜻한 캔커피를 싸더니 화랑의 손에 쥐어주고 그대로 배에 가져가 대도록 위치를 잡아주었다. 하악질을 하려던 화랑은 입에 들어온 초콜릿을 열심히 녹여 먹으며 욱씬욱씬 밀려오는 배를 그나마 따뜻하게 감싸주는 온기에 금새 고륵고륵 목을 울리며 소파에 가볍게 늘어졌다. 역시 대자연일 때는 이게 최고지. 샤오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 괜찮아, 화랑? ”

“ …죽을 것 같아… ”

“ 그래요, 이틀 째는 확실히 힘들죠. 더군다나 이 몸으로 경기까지 했으니… 어라, 상대가 분명… ”

“ 커피퀸… ”

“ 아, 그건 좀 애도해 드리죠 ”

스피디하고 가벼운 공격을 연속으로 퍼붓는 스타일인 아수세나와의 일전을 대자연 이틀 째에 상대해야 했다니. 그녀들은 화랑을 애도했다. 물론 경기 후 그녀들이 오기 전 아수세나가 화랑의 대기실을 방문해 나름 위로라며 열심히 말을 퍼붓고 갔지만 그건 화랑의 입장에서는 위로가 아닌 고막 테러였다. 평상 시라면 적당히 대꾸해줬을 화랑은 최악의 몸 상태로 인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반응했고 그런 화랑의 반응에 아수세나는 결국 하려던 말을 반도 하지 못한 체 몸 조심하라며 인사를 끝으로 나가버렸다. 나중에 커피 한 상자 보내줄게~ 라는 위로의 말을 남기고서. 샤오유가 입에 넣어 준 초콜릿을 다 녹여 먹고는 그래도 부족했는지 종이 가방에서 사탕을 꺼내 입으로 밀어넣은 화랑이 느릿느릿 사탕을 녹여먹으며 작게 고맙다는 말을 건냈다. 화랑에게 위문 선물을 건내준 샤오유와 리리가 대기실을 나가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진과 스티브까지 합세해 네 사람이 가만히 문 밖에서 화랑을 바라보았다. 달달한 사탕과 초콜릿으로 인해 기분이 조금 나아졌는지 화랑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는 걸 알아챈 넷이 안도의 한숨을 쉰 순간. 드륵, 대기실의 창문이 열렸다.

“ 여자 ”

“ …데비 ”

윽, 진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제 안에 깃들어있던 데빌 인자를 진이 거부, 그 끝에 준이 데빌 인자를 분리하여 탄생한 개체, 데빌. 화랑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는 가끔 이렇게 그녀가 머물고 있는 도장이 아닌 경기장까지 찾아오곤 했다. 사람 한 명은 충분히 지나갈 커다란 창문을 염동력으로 열고 들어온 데빌이 문 밖에서 저를 경악에 찬 시선으로 보는 네 명의 시선을 무시한 체 곧장 화랑에게로 향했다. 언제나 그랬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마치 비웃는 것 처럼 보이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던 데빌이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곤 오른손으로 그녀의 턱을 붙잡아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 왜 그러지, 여자? 안색이 안좋군 ”

“ …… ”

데빌의 질문에도 말이 없던 화랑이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를 테이블에 얌전히 내려놓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데빌의 허리를 껴안았다. 응? 응?? 응??? 응???? 갑작스런 화랑의 행동에 문 밖에서 상황을 살피던 무리들이 일제히 머리 위에 물음표를 여러개 띄웠다. 저 화랑이 데빌을 끌어안았다고? 싸우자고 시비거는 거 대신에? 그리고 그런 화랑의 행동에 당황한 건 데빌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라는 낯선 감정이 떠올랐다. 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체 가만히 있는 화랑을 보던 데빌이 재차 되물어보았다. 왜 그러지? 그 질문에 번쩍 고개를 든 화랑은… 울먹이고 있었다.

“ 배 아파, 허리 아파, 경기력 나빠… 마음에 안들어… ”

대자연으로 인해 감정이 마구마구 요동치는 중인 화랑은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샤오유와 리리가 준 달콤한 사탕과 초콜릿으로 인해 기분이 조금 나아졌으나 그 뿐이었다. 오늘 화랑은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자연으로 인해 배, 허리, 가슴, 뼈마디가 모두 아픈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로 인해 오늘 경기력이 그녀의 마음에 너무나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걸 하소연 할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아버지와도 같은 사범님에게 말하자니 그건 또 그거대로 마음에 걸렸다. 같은 여성인 샤오유나 리리는 결국엔 언젠가는 싸워야 할 경쟁자라는 점에서 그녀가 모든 것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진이나 스티브는 당연하게도 제외. 결국 모든 게 다 마음에 안드는 와중에 그런 그녀를 찾아온 게 바로… 데빌이었다. 자신과 항상 대등하게 싸워주는 사… 사람… 이라고 해야할까, 여하튼. 제 허리를 껴안은 체 울먹이며 중얼거리는 화랑을 말없이 바라보던 데빌이 손을 들어 퍽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더니 이내 그녀를 품에 안았다.

“ 그럼 오늘은 이만 들어가 쉬자… 화랑 ”

다정하게 여자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불러준 데빌이 순식간에 다시 창문을 통해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을 대기실 밖에서 지켜보던 네 사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이내 그녀의 대기실을 뒤로했다. 놓고 간 개인 물품은 어쩌지? 진의 물음에 스티브는 내일이라도 와서 가져가겠지, 신경쓰지 말자고. 라며 태연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 …… ”

한편, 백두산은 제 방의 창문을 열고는 말없이 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 아닌 참상을 바라보았다. 화랑이 오늘의 시합 일정이 모두 끝나기도 전에 돌아온 것도 돌아온거지만 하필이면 데빌에게 다정하게 안겨서 돌아왔다는 게 문제였다. 근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데빌은 도장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의 가지에 앉고 그녀를 제 무릎에 옆으로 앉히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배를 문질러주며 뭐라뭐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누가보면 참… 다정한 연인으로 보일 만한 모습.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두산이 하아, 깊은 한숨을 쉬더니 이내 창문을 닫았다. 아무래도 제 제자에게 조만간 날개 달린 연인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2. 간헐적 폭발 장애 진과 그 어떤 때라도 진을 진으로 보는 화랑으로 진화랑.

간헐적 폭발 장애란 공격적인 충동을 통제하지 못해 보이는 반복적인 폭력 및 파괴적인 행동을 보이는 장애로, 청소년기부터 시작되어 만성화되기 쉬운 정신 질환을 말한다. 보통 유년기 학대 경험 및 폭력적인 가족 환경이 그 원인으로 대두된다. 그래, 문제는 이 원인이 현재 진의 모든 상황과 맞아 떨어진다는 게 문제였다. 모든 일이 마무리 된 후 G사를 흡수하면서 다시 미시마 재벌의 총수로 재취임한 진은 자신이 원인되어 발생한 모든 전쟁의 피해를 미시마 재벌의 재력과 힘을 통해 복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문제가 없었다. 정정, 문제가 없었다기 보다는 당장 세계 복구가 먼저였기에 진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세력들이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며 진에게 협조적으로 굴었기에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급한 복구, 그러니까 각 국가가 국가로서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진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일제히 비협조적으로 굴기 시작했다. 제일 문제로 삼은 건 당연하게도 진이 전범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진 자신도 제 죄를 알기에 입을 꾹 다물었으나 곁에서 그를 지탱하며 세계 복구에 앞장 서던 위그드라실의 리, 라스는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카즈야와의 전쟁에서 제일 먼저 앞장섰으며 지금 세계 복구도 그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방패로 삼으며 불만을 가라앉히는데 집중했다. 그로 인해 진을 향해 직접적인 반발은 없었으나 간적접인 반발은 계속해서 발생했다. 그 반발을 진은 어떻게든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진은 제 수면 시간과 휴식 시간을 줄여가며 일에 집중했다. 계속되는 피로에 코피를 흘리면서도 대충 코피만 멎게 하고 계속해서 일을 하기도 다반사였다. 자신을 향해 집중되는 압박과 그걸 풀지 못하는 스트레스 끝에 진은 결국…

“ 진정해, 진! 라스! ”

“ 읏! ”

리의 외침에 라스가 이를 악문 체 저를 향해 날아오는 진의 주먹을 피하며 그 팔을 붙잡았다. 진이 간헐적 폭발 장애를 일으킨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최근엔 일주일에 두세번 꼴로 이렇게 갑자기 간헐적 폭발 장애로 폭주하기 일수였다. 그나마 보는 눈을 의식하는건지, 아니면 제가 그나마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한 것인지 미시마 재벌의 본부에 있을 때만 폭발했다. 오늘도 제 곁을 스쳐지나가던 반대파 인간의 저를 비꼬는 말에 이성이 끊겨버린 진이 날뛰기 시작하자 리와 라스는 익숙하게 주변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키고 위그드라실의 군인들을 호출했다. 그들이 오기 전까지 진을 상대하는 건 라스의 몫이었다. 진, 정신 차려. 진! 연신 진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공격을 막아내던 라스는 제 가슴을 정통으로 가격하는 주먹에 윽, 신음을 삼키며 그 팔을 붙잡아 뒤로 당기며 진을 구속하려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오늘따라 진의 폭주가 더욱 격했던 탓이었다. 정말 제 앞의 라스를 죽일 것 처럼 데빌의 힘까지 써대며 공격하던 진에 변변한 반격조차 하지 못한 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라스의 어깨를 누군가가 붙잡더니 힘껏 잡아 당겼다.

“ 답답하게 뭐하고 있냐, 정말! ”

“ 화랑? ”

마치 선수 교체라도 하듯 라스를 대신에 진의 앞에 선 건 화랑이었다. 진을 만나기 위해 본부를 찾았다가 폭주하는 진을 발견한 화랑은 주저없이 달려들어 맞고만 있는 라스를 뒤로 물리게 한 후 곧장 주먹을 들어 진의 머리를 세게 후려쳤다. 윽, 진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나온 것도 잠시 그 정도로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저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진에 화랑이 후우, 숨을 내쉬며 맞받아쳤다.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싸우던 것도 잠시 화랑이 진의 머리채를 붙잡더니 그대로 힘차게 벽을 향해 꽂았다. 콰앙! 벽이 흔들리고 그대로 주르륵 주저앉은 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드디어 정신이 온전히 돌아온 것이었다. 읏… 제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를 대충 손으로 훔친 진이 고개를 들자.

“ 여, 정신이 드냐? ”

“ 화… 랑…? ”

“ 그래, 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네 안의 데빌이 아직도 날뛰고 있는거야? ”

“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야… 여하튼 고맙다 ”

“ …흐음, 알았어. 널 만나러 온건데 편하게 대화할 상황도 아닌 것 같고… 오늘은 그냥 돌아갈테니까 나중에 안정되면 보자고 ”

아, 꼭 치료하고. 얼간아. 그 말만 남기고 가버리는 화랑의 뒷모습을 보던 진이 후우, 낮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제 콧잔등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이 날은 기적적으로 라스 외에 피해자 없이 진의 폭주를 진압한 날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3일 후 진은 다시 간헐적 폭발 장애로 폭주했다. 읏… 벽을 딛고 잠시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손이 벽을 무너질 정도로 강하게 움켜쥔 순간 폭주한 진에 리가 주변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라스가 앞을 막아섰지만 진은 그대로 라스를 지나쳤다. 뭐…? 라스는 저를 무시하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진의 뒤를 황급히 쫓았다. 그건 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를 가는거지…? 진의 뒤를 쫓으며 중얼거리던 리가 설마,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오늘 방문 예정인 자들 중에 분명… 그리고 리의 시야에 들어온 건.

“ 화랑! ”

“ …뭐야, 또야? ”

저를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가볍게 피한 화랑이 저와 대화 중이던 리리를 물러서게 하고는 또 다시 진과 싸우기 시작했다. 마치 데빌처럼 사정을 봐주지 않는 진에 화랑이 웃으며 소리쳤다. 마치 데빌 같네, 너! 희열이 가득찬 목소리와 함께 진의 배에 정통으로 발차기를 꽂아버린 것도 잠시 곧바로 반격해 제 옆구리에 주먹을 꽂아넣는 공격에 이를 악문 화랑과 진의 공방은 이내 틈을 노린 화랑의 발차기가 진의 머리를 세차게 걷어 차면서 끝이 났다. 그때처럼 폭주를 멈추고 정신을 차린 진을 보던 화랑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몽땅 다 설명해줘야 할거다, 이 얼간아! 그리고 그때 댁들도 왜 순순히 맞고만 있었는지도 같이 설명해야 할거야 ”

쯧, 화랑이 혀를 차며 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 손을 바라보던 진이 순순히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자 리가 뒤늦게 온 군인들을 다시 돌려보내며 넷은 사이좋게 의무실로 향했다. 머리를 얻어맞아 정신을 차렸기에 혹시나 뇌에 이상은 없는지 검진을 받는 진과 그 옆에서 진에게 말을 거는 라스를 보던 화랑의 옷자락을 잡아 당긴 리가 그를 의무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의무실 입구 바로 옆 벽에 기대 선 화랑이 팔짱을 끼며 턱짓을 했다. 말 대신 설명하라는 제스처에 리가 조용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최근 진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스트레스로 인해 간헐적 폭발 장애가 생겼고 이번 폭주도 그로 인한 것이며 자신과 라스는 진이 정신을 차릴 때 까지 그를 구속하는 방식을 택했다, 라는 말에 화랑이 혀를 찼다.

“ 그걸 무식하게 정신을 차릴 때 까지 구속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 입게 될 피해는 생각 안하고? ”

“ 진도 자기가 원해서 폭주하는게 아니니까. 이미 심신이 지친 진을 과격하게 진압하고 싶지 않네 ”

“ 그러니까 동정이라는거네. 왜, 저 자식이 불쌍해? 근데 어쩌지? 난 하나도 불쌍하지 않은데 ”

“ 화랑 ”

“ 결국 자기가 자초한 사태야. 그럼 본인이 감당해야지. 언제까지 다른 사람의 그늘 아래에서 보호 받을 생각이야? 애냐? ”

“ 화랑! ”

리의 외침에도 화랑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드물게 인상을 찌푸린 체 자신을 바라보는 리를 표정 변화 없이 바라보던 화랑이 몇번째인지 모를 혀를 차며 작게 중얼거렸다. 같잖은 동정 따위 필요 없어, 지금 저 녀석한테 필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리고 그런 화랑의 말을 받아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화랑의 말이 맞아. 그 목소리에 리가 작게 이름을 중얼거렸다. 진. 치료를 마친 진이 라스와 함께 의무실 밖으로 나오며 화랑을 바라보았다. 화랑이 여전히 팔짱을 낀 체 표정 변화 없이 진을 바라보았다.

“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그런게 아니야… 내가 다치더라도 빠르게 상황을 끝내는 게 더 중요해 ”

“ 하지만… ”

“ 두 사람의 마음은 알지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오히려 손해 보는 건 내 쪽이야, 그러니까… ”

“ 더 나은 방법이 있을거다. 그러니… ”

“ 아, 답답하네. 둘 다 이 자식한테 너무 물러. 집안 사정 따위 내 알바 아니니까 당신들이 못하면 내가 대신 해주지 ”

그 말에 진이 화랑을 바라보았다. 벽에서 등을 떼며 팔짱을 푼 화랑이 진과 눈을 마주쳤다. 말이 없던 것도 잠시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면… 믿을 수 있지. 부탁한다, 화랑. 그 말에 화랑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원하는대로 신나게 두들겨 패서 정신 차리게 해줄테니까 나중에 치료비 같은 거나 요구하지 마라. 그 말에 진이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화랑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지만. 그 날 이후 화랑은 5분 대기조로 미시마 재벌 본부 근처에 머무르다 연락이 오면 바로 칼 같이 본부로 뛰어 들어갔다. 영문을 모르던 다른 사람들은 갑자기 화랑이 어디론가 뛰어가는 걸 보며 의문을 표시했지만 이내 진 때문에 화랑이 너무 고생을 하는 것 아니냐며 동정 아닌 동정까지 할 정도였다. 본의 아니게 개인적인 스케쥴로 자리를 떠야할 때는 미리 리나 라스에게 연락을 취해 진이 스트레스 안받도록 알아서 잘 처신하라고 연락까지 남겼다. 하지만 화랑이 폭주를 막는 역활을 맡게 된 후에도 진의 간헐적 폭발 장애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드물게 혼자 미시마 재벌의 본부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리와 라스는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위그드라실과 UN의 정기 교류 회의에 참석 중이었고 진도 최대한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총수실에서 서류 작업에 집중하는 날이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일을 하다 휴식을 위해 잠시 총수실을 나온 진을 반긴 것은 만약의 사태를 위해 남아있던 알리사였다. 진씨, 휴식 시간인가요? 응, 리와 라스는? 두 분은 아직 복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디로 가실건가요? 글쎄, 어디로 갈까… 잠시 어디에서 쉴지 고민을 하던 진이 일단 걸음을 옮기다 지금 시간대면 옥상에 사람이 없을 것 같아 비상구 쪽으로 향했다. 천천히 알리사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걷던 진이 의무실을 지나다 멈칫, 걸음을 멈추고 문 옆의 벽에 서서 가만히 안을 살폈다. 의무실에서 의무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화랑이었다.

뭐라뭐라 잠시 대화를 하던 화랑이 상의를 벗었다. 그리고 진은 그 상의 안에 감춰져 있던 상처를 보고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저기 멍투성이에 붕대와 거즈로 몸을 장식한 것 처럼 보이는 모습. 심지어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 매번 화랑의 도움을 받아 저도 제어하지 못하는 폭주를 잠재우고 있었지만 진은 잊고 있었다. 화랑이 자신만큼 강하긴 하지만 그는… 일반인이라는 것을. 데빌 인자를 가지고 있어 초인으로 분류되는 자신은 회복 속도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빨랐다. 누가 보면 괴물이라고 할 정도로. 물론 화랑의 회복 속도가 평범한 사람보다 빠르긴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류탄에 휘말려 치유가 어렵다는 눈을 다치고도 빠른 시간 안에 완치가 되었을까. 하지만… 자신과 화랑은 명백하게 달랐다. 그래, 그때 진은 깨달았다. 자신과 화랑은 다르다는 것을. 안을 훔쳐 보는 것을 그만두고 그때, 화랑이 그랬던 것 처럼 잠시 벽에 기대 서 있던 진의 이름을 알리사가 조용히 읊조렸다. 알리사의 부름에 진이 씁쓸하게 미소 짓고는 그래, 쉬러 가자. 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 화랑은 의무실을 스쳐지나가는 진을 발견하고는 눈을 찌푸렸다.

“ 그나저나 할 일 없냐. 나야 뭐 이유가 있어서 5분 대기조 신세라지만 아가씨는 뭐 툭하면 일본에 온다? ”

“ 저도 당신 같은 양아치보러 오는 거 아니거든요? 아스카씨가 미시마 재벌에 볼일이 있다고 해서 따라온 것 뿐이랍니다? ”

“ 아하, 그래? 그런 것 치고는 홍차까지 준비해 준 건 뭔데? ”

“ 혼자 마시면 심심하니까요. 인정하기 싫지만 당신이랑 있으면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거든요 ”

“ 내가 무슨 아가씨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냐? ”

화랑이 투덜투덜 거리며 제 앞의 홍차를 들어 한 모금 목으로 넘겼다. 진이 의무실을 스쳐지나가고 그걸 화랑이 목격한지 3일이 지나서도 화랑은 여전히 5분 대기조로 미시마 재벌 본부의 휴게실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화랑의 말동무 상대는 아스카와 함께 미시마 재벌의 본부에 들린 리리였다. 아스카씨가 돌아올 때 까지 혼자서는 심심하니 자신의 말동무나 해달라는 말과 함께 제 몫의 홍차까지 준비한 리리의 말을 거부할 명분이 없는 화랑이 작게 한숨을 쉬며 홍차나 마시면서 시간을 때우던 순간이었다. 화랑은 제 폰에서 들린 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보던 리리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지… 잘도 귀찮은 일을 떠맡는군요. 사람이 착한건지 아니면 무엇인지. 홀짝, 리리가 홍차를 목으로 넘겼다. 역시나 제 집사가 준비한 홍차는 일급품이었다.

한편, 달리면서 화랑이 제 폰을 확인했다. 오늘은 또 어디서 난리야? 총수실? 그나마 위치를 아는 곳이어서 다행이네. 쓰게 웃은 화랑이 폰을 제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빠르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곤 쾅, 비상구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화랑은 제 앞을 스쳐지나가는 진을 발견하고는 빠르게 진의 앞을 막아섰다. 이번에는 또 뭐 때문에 난리야, 너! 소리치며 파이팅 자세를 취한 것도 잠시 화랑은 저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스쳐지나가는 진에 하? 저도 모르게 어이없다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건 화랑을 호출했던 리와 라스도 마찬가지었다. 그 진이, 오직 화랑에게만 덤벼들던 진이 화랑을 무시해?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던건가? 그리고 잠시 멍청하게 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화랑이 이내 으득 이를 갈았다. 갑작스런 진의 변화는 아마도… 다리에 힘을 준 화랑이 순식간에 진의 뒤를 따라붙더니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그대로 바닥을 향해 내리 꽂아버렸다. 콰앙! 얼마나 힘을 주고 내리 꽂은 건지 쩌저적 바닥에 금이 가버렸다. 그러고도 분이 안풀린 건지 다시 한번 더 바닥에 내리 꽂아버린 화랑이 소리쳤다.

“ 이 새끼가 진짜 오냐오냐 다 받아줬더만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왜 너 때문에 다치는거 보니까 무섭기라도 했냐? 그럼 이 짓을 그만하던가 다 포기하고 어디 숲에라도 들어가서 숨어살던가 둘 중 하나라도 해! 아, 짜증나. 싸울 마음도 안드니까… 일단 자라 ”

진의 머리를 놔주며 일어난 화랑이 거침없이 진의 머리를 발로 강하게 차버렸다. 주르륵, 그대로 밀려 쿵 벽에 부딪친 진은 기절한 것인지 움직임이 없었다. 잠시 씩씩거리던 화랑이 후우, 작게 숨을 쉬고는 으챠. 진의 뒷덜미를 붙잡더니 그대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리곤 리나 라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쳐서는 잠깐 이 자식이랑 대화 좀 할테니까 아무도 들어오지마. 라고 하더니 그대로 총수실로 들어가 콰앙, 문을 닫았다. 총수실에는 수면실로 사용이 가능한 작은 방이 딸려있었다. 아마도 그곳에 던져놓고는 깨어날 때 까지 기다리겠지. 라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리가 어깨를 으쓱 들어보였다. 진이 화랑을 무시하고 화랑이 그것에 대해 굉장히 화가 난 걸 보면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거다. 결국 여기서부터는 저 두 사람의 영역이니 자신들이 참견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한 리가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머리가 아파. 여긴… 신경을 뒤흔드는 통증에 신음하며 진이 눈을 떴다. 천장이 꽤나 익숙하다. 여긴… 총수실 안의 수면실인가…? 나 왜… 여기에 있지…? 읏, 지끈지끈 밀려오는 통증에 다시 한번 더 신음을 내뱉은 진은 몸을 반쯤 일으키고 나서야 침대 옆에 의자를 끌고 와 거꾸로 앉은 체 자신을 노려보는 화랑을 발견하고는 움찔, 몸을 떨었다. 등받이 부분에 팔을 얹은 체 거꾸로 앉아 진을 노려보던 화랑이 하아, 작게 한숨을 쉬고는 일어나 이번엔 똑바로 의자에 앉으며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 정신이 드냐, 얼간아? ”

“ 화랑… ”

“ 네가 뭘 했는지는 기억하냐? ”

“ 내가 뭘… 했냐고…? ”

“ 기억에 없구만… 귀찮은 자식 ”

잠시 투덜거리던 화랑의 이내 얼굴을 굳히더니 곧바로 진의 멱살을 잡았다. 무서운 얼굴로 제 멱살을 잡는 화랑에 뭐라 말하려던 진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대충 예상이 갔으니까. 아마도 이성을 잃고 폭주한 자신은 화랑을… 넌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거야? 그 물음에도 진은 입을 꾹 다문 체 입을 열지 않았다. 니 눈에 난 너보다 약한 인간으로 보이냐? 아, 뭐 그럴지도 모르지. 너는 데빌인지 뭔지 하는 기묘한 힘을 가지고 있고 결국엔 초인에 속하는 미시마 가의 인간이니까. 그래, 너보다는 약해 보일지도 모르지.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딱 하나 밖에 없어. 나를 대등하게 봐주는 것. 근데 네 놈은…

“ …무서웠으니까 ”

“ 뭐가 ”

“ 네가… 나 때문에 다칠까봐. 혹시라도 죽을까봐 ”

“ 하… 대체 날 얼마나 약하게 본거야, 너 ”

화랑이 제 멱살을 놓음과 동시에 진이 손을 뻗어 화랑의 상의를 들췄다. 그러자 보인 건 멀리서 봤을 때 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상처들이었다. 옷에 가려져 보지 못한 두꺼운 붕대와 그 붕대에 스며든 붉은 피를 보던 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런 진을 보던 화랑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난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그럴 생각도 없고! 화랑의 말에도 진의 안색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걱정되면 간헐적 폭발 장애인지 뭔지 고칠 생각을 하던가. 너, 대체 어쩌고 싶은거야…? 그 질문에 진이 말없이 화랑의 손을 잡았다. 너는 왜 날 무서워하지 않아? 그 질문에 화랑이 무슨 그딴 질문이 있냐는 표정을 짓더니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

“ 너는 너잖아? 잊어버렸어? 네 데빌에 제일 고생하고 많이 다친게 누구인지? 아, 진짜 다 해결되고 나서 치료비 요구할 걸 ”

“ …… ”

“ 네가 데빌의 힘에 삼켜질 때도… 간헐적 폭발 장애인가 뭔가 때문에 폭주할 때도 난 단 한번도 너를 너로 보지 않은 적이 없어. 넌 내가 반드시 이겨야 할 카자마 진이야 ”

“ …… ”

“ 그러니까 그만 땅 좀 파고 너도 인정 할 건 인정 좀 해라. 시간을 돌릴 수 없잖아. 네가 저지른 죄는 결국 네가 안고 가야되니까 ”

그러니까 가끔씩 네 울분을 풀 수 있게 대련 정도 해줄테니까 이제 좀… 네 자신 좀 용서해라. 언제까지 그렇게 죄책감을 안고 살거야. 아니다, 안고 살아도 되긴 한데 제발 그만 폭주 좀 해라. 나도 난데 리씨랑 라스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나 없을 때는 그 두 사람은 널 때리지도 못하고 잡고만 있더라. 진짜 너 한명 때문에 몇 명이 고생을… 그런 잔소리를 들으며 진이 속으로 생각했다. 내 죄책감으로 폭주하고 결국 너를 통해 정신을 차리는 과정을 죄를 값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라고. 그 과정에서 차라리 크게 다쳤다면… 나는 대가를 치뤘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아니, 그걸… 바라고 있었기에 이성이 없이 폭주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너를… 속으로 말을 삼킨 진을 보던 화랑이 다시 한숨을 쉬더니 이내 손을 뻗어 진의 이마를 밀어 다시 눕히더니 펄럭, 이불을 덮어 주었다.

“ 일단 한숨 자라. 한숨 자고… 같이 생각해보자고 ”

“ …같이 생각해 줄거야? ”

“ 하, 내 라이벌이라는 놈이 맨날 이렇게 삽으로 땅 파고 있으면 내가 다 맥이 빠지니까. 말하지만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야, 알았어? ”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 속에서 저를 생각하는 화랑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것 같아 진이 희미하게 웃고는 결국 눈을 감았다. 진이 눈을 감자마자 바로 나갈 거라 예상했던 화랑은 한참을 나가지 않고 계속해서 진을 지켜보았다. 그건 결국 기다리다 못해 조심스럽게 리가 총수실로 들어올 때 까지 계속되었다.


3. 썰 모음 23-2 학원물에서 이어지는 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대신 화랑을 건드려보는 레이나로 진화랑레이나. (개인적으로 화랑과 레이나가 만나면 성격적으론 잘 맞지만 가치관에서 서로 충돌 할 것 같은 느낌으로 연성했습니다)

화랑 선배~♪ 자신만 보면 홍해처럼 갈라지는 복도를 지나던 화랑은 저를 부르는 애교 섞인 목소리에 멈칫 서서 미간을 찌푸리다 이내 뒤를 돌아보았다. 이 학교에서 저를 직접적으로 불러세우는 사람은 몇없었다. 교장 카즈야, 교감 리, 체육 교사이자 화랑의 아버지와도 같은 백두산. 이 세 사람 말고도 교직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화랑을 부르는 일이 가끔 있었지만 학생들은 열 명이 체 되지 않았다. 화랑의 친구인 진과 스티브, 학생 회장인 라스, 진의 소꿉친구인 샤오유와 진과 먼 친척 관계의 아스카, 그녀와 라이벌 관계인 리리. 스티브와 아는 사이인 레오. 그리고. 화랑이 저를 보며 싹싹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여학생을 보곤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목까지 오는 깔끔한 단발은 검은색으로 시작하여 보라색으로 마무리되었고 외모는 마치 고양이를 연상 시키는 미인의 상이었다. 교복을 입은 그녀의 가슴팍에 1학년을 뜻하는 파란색의 명찰과 그 명찰에 박혀있는 이름에 화랑이 하, 숨을 토해내더니 제 머리칼을 목 뒤로 깔끔하게 넘기며 입을 열었다.

“ 무슨 볼일이야, 레이나? 네가 나한테 말을 걸 이유가 없을텐데 “

“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시나요, 선배? 선배는 진 선배의 친구잖아요? “

“ 그래서 네가 2학년 교실까지 와서 날 찾은 이유가 뭐야? “

“ 아, 급하시긴 선배. 서로의 안부를 묻는게 먼저 아닌… “

“ 용건만 간단하게 말해 “

차가울 정도로 제 말을 자르고 들어온 말에 레이나가 눈을 가늘게 뜨다 이내 평소의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작게 웃었다. 명백히 주변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신경쓰는 모습. 레이나의 본 모습을 알고 있는 화랑의 눈에는 그 모습이 참으로 가식적으로 보였지만 그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진 선배에 관련해서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실까요? 레이나의 입에서 진의 이름이 나오자 화랑의 눈가가 꿈틀거린 것도 잠시 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안그래도 나도 너하고 대화를 좀 해봐야겠다고 생각했거든. 이렇게 쉽게 화랑이 수락할 줄은 몰랐는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레이나가 그럼 지금 당장 괜찮을까요?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응접실을 좀 빌렸어요. 라며 먼저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거절한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거라는 걸 안다는 듯 등을 보이며 걷는 레이나의 뒤를 화랑이 조용히 따라갔다.

“ 음, 시원하다. 선배, 뭐라도 드실… “

“ 자, 이제 우리 둘 밖에 없겠다… 그 가식적인 모습은 좀 치울까? 레이나 “

“ …하, 성격이 너무 급한 거 아냐? 조금은 배려해줘도잖아? “

“ 사람 좋은 척하는 가면 쓰고 있으면 피곤하잖아? 그걸 일찍 벗겨 준 것만 해도 충분히 배려해 준 것 같은데 “

응접실에 들어와 소파에 앉은 화랑의 말에 계속해서 사람 좋은 싹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이나의 표정이 사람을 깔보는 비릿한 미소를 한순간에 바뀌었다. 오히려 이 쪽이 본모습이라는 듯 레이나를 둘러싸고 있던 분위기마저도 바뀌었다. 화랑의 맞은 편에 앉은 레이나가 다리를 꼬고 한쪽 팔로 턱을 괴며 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에게 부탁해 응접실을 빌렸다는 말도 분명 거짓말이겠지. 아마도 교직원들의 동선을 모두 파악해서 응접실 근처에 사람이 없는 지금 시간대에 나를 찾아온 거겠지. 화랑이 귀찮다는 듯 숨을 내뱉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 미시마는 미시마다, 이건가. 머리는 잘 돌아가네, 너 “

“ 칭찬 고맙네. 그럼 이제 대화를 해볼까? “

“ 그 전에 왜 나야? “

“ 당신이 그 카자마 진과 친밀한 사이니까 “

“ 단지 그 이유라고? 할 일 없어, 너? “

“ 당신을 건드리면 그 카자마 진이 날뛰겠지. 난 그게 보고 싶은 것 뿐이야 “

그 말에 귀찮은 태도를 보이던 화랑의 얼굴이 진지하게 바뀌자 레이나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건드리는 이유가 자신이 아닌 진을 흠집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말에 화랑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래, 레이나는 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보다 1살 더 많은 라스도 있었지만 라스보다 진이 그녀는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화랑을 건드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 먹은 계기는.

학생회의 정기 회의가 끝나고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라스와 차를 마시며 잠시 쉬고 있던 자리에 화랑이 난입하는 건 꽤나 익숙한 일이었기에 진은 익숙하게 미리 잔을 하나 더 준비했지만 그 자리에 화랑을 제외한 다른 3자가 개입할 줄은 진도 라스도 예상하지 못했다. 쾅, 거칠게 열린 문으로 들어온 건 진과 라스를 제외한 또 한 명의 미시마 가 사람인.

“ …레이나 “

“ 실례 좀 하지. 혹시 들어오면 안된다거나 하진 않겠지? “

“ …들어와 “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진의 목소리가 무거웠고 들어오라고 수락한 라스의 목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온 레이나가 라스의 옆, 진의 맞은 편에 앉으며 더욱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힐끔. 그녀가 처음보는, 진의 옆에 앉아 말없이 폰을 보며 차를 마시는 화랑에게 시선을 준 것도 잠시 차는 됐다며 거절한 레이나가 다리를 꼬고 앉아 슬슬 대화의 물꼬를 틀기 시작했다. 진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미시마의 후계자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진의 능력을 높게 쳐주는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히 진이 가지고 있는 미시마의 대한 부정과 그의 태도를 까내리기 시작하는 레이나에 라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진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건 라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가끔씩 이렇게 나타나 진을 잔뜩 자극하고 가버리곤 했다. 그리고 이럴 때 마다 진은. 읏… 진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진을 보며 만족의 미소를 지은 레이나가 마치 결정타라는 듯 툭 내뱉은 말은.

“ 아버님이 참으로 좋아하겠어? 미시마 가의 후계자가 당신이니까. 그러니까 재주껏 힘내라고? “

진의 눈이 커짐과 동시에 제 교복을 움켜잡은 진이 입을 크게 벌린 체 컥컥거리기 시작했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심리적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레이나의 말에 결국 만성적으로 가지고 있던 과호흡이 온 것이었다. 진! 놀란 라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고 레이나는 그런 진을 보며 더욱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진의 옆에서 별 행동 없이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폰만 보던 화랑이 작게 한숨을 쉬며 폰을 주머니에 넣더니.

“ 귀찮은 자식, 진짜… “

제 옆의 진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더니 그대로 입을 맞췄다. 갑작스런 돌발 행동에 라스는 물론이고 레이나조차 미소를 지운 체 놀란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후우… 후우… 주변은 신경도 쓰지 않고 마치 인공 호흡을 하듯 입을 맞춘 체 계속해서 숨을 불어넣던 화랑이 잠시 입술을 떼고 진의 안색을 살피더니 다시 입을 맞춰 숨을 불어넣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조금씩 호흡이 돌아오고 있다는걸 확인한 화랑이 입술을 떼고는 진의 손을 잡더니 약하지만 힘을 줘 맞잡아 오는 걸 확인한 후 진을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먼저 간다. 그러면서 힐끔 레이나를 한번 바라본 화랑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체 진을 부축해 학생회실을 나가버렸다. 이 바보야, 거기서 그걸 다 듣고 있냐. 하여간에… 문이 닫히기 전 들리던 화랑의 목소리가 문이 닫힘과 동시에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라스가 다시 자리에 털썩 앉고는 반쯤 식은 차가 든 잔을 들어올렸다.

“ 정말이지, 진이 왜 그에게 집착하는지 알겠군 “

“ …저건 누구지? “

“ 화랑이다. 진의 친구지 “

“ 하, 저놈한테 저런 친구가 있다고? “

“ 정말 친구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너도 알았겠지. 더 이상 진을 자극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아마 다음부턴 네가 개입하면 그도 개입할거다 “

그러니 이런 식으로 그 망할 인간에게 인정 받을 생각은 그만둬. 그 말에 레이나가 칫, 혀를 차곤 벌떡 일어나 학생회실을 나가는 걸 라스가 바라보다 조용히 다시 차를 마셨다. 빠르게 걸어가면서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엄지 손톱을 물어 뜯었다. 마음에 안드는 그 카자마 진의 옆에 저런 사람이 있다고?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도와주는 저런 사람이 왜 카자마 진 같은 놈한테 있는거야. 저를 힐끔 보며 슬슬슬 피하는 다른 학생들의 시선 따위는 무시한 체 열심히 걸어가던 레이나가 순간 멈칫 걸음을 멈추더니 이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잠깐 그렇다는 건… 그가 없다면 카자마 진의 옆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잖아…?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잠시 그때 화랑을 처음 봤을 때의 상황을 생각하던 레이나가 이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레이나보다 화랑이 먼저 선수를 쳐 입을 열었다. 너, 진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선수를 빼앗겼다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레이나가 태연하게 웃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하고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나에 화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그 놈은 모든 것을 다 가졌어. 미시마의 정통 후계자라는 타이틀, 든든한 가족 - 이 말을 들은 화랑의 표정이 구겨졌으나 레이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 그리고 보장된 미래. 나는 하나도 가지지 못한 걸 그 놈은 전부 가지고 있지. 근데 왜 그놈은 그렇게 크나큰 축복을 받고 태어났음에도 자신이 불행하다는 표정을 하는거야? 나는 그게 너무 화가 나! ”

“ …그래서? ”

“ 그래서 내가 증명하려는거야. 그런 나약한 놈보다 미시마의 모든 것을 원하는 내가 후계자의 자리에 올라야 된다는걸! 봐, 내가 조금 자극하고 몰아부쳤다고 바로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걸! 그런 나약해 빠진 놈은 미시마 재벌에 어울리지 않아! 애시당초 그 놈은 미시마가 아니라 카자마의 성을 쓰잖아! 그건 미시마를 부정한다는 뜻이야, 안 그래? ”

“ …… ”

“ 그리고 당신도 말이야… 애시당초 그 놈의 옆에 있는 건 모두 그의 권력과 힘 때문에 있는거 아냐? 아무리 그 놈이 미시마를 부정한다고 해도 결국엔 미시마의 핏줄. 그 옆에 있는 너에게도 분명 뭔가 얻어가는 것이 있겠지. 그러니까 어때? 그 놈 대신에 내 옆에 있는 건? 그 놈은 분명 미시마를 떠날거야. 제 핏줄을 부정하고 떠날거야. 그러면 더 이상 너에게도 뭔가 떨어지는 건 없겠지. 그러니 내 옆에 있어라. 내가 그 놈이 여지껏 너한테 준 것보다 더 큰 권력과 힘을 약속할테니까. 그러니까… ”

“ 아, 시끄럽네 ”

“ 뭐? ”

“ 너 말이야, 솔직히 가소롭고 유치해. 뭐? 힘과 권력? 어린애냐? 어린애야? 그게 그렇게 마냥 좋아보이지? 웃기는 소리하지마. 누구는 본인이 원하지 않는 힘과 권력 때문에 고생하고 죽어가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마냥 그딴 게 좋다고 떠들어대기는 ”

“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

“ 그래, 난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그딴 거. 근데 말이야, 제 3자인 내가 보기에도 지금 네가 말하는 게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 아주 잘~ 알겠어 ”

화랑이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힘과 권력을 원하는 건 알겠어. 근데 그걸 누구한테 인정받을거야? 누가 널 인정해줄까? 진이나 라스, 그 녀석들은 원하지 않는 그린 마일을 억지로 걸으면서도 불평불만 따위는 단 한마디도 안해. 그럴 수 밖에 없지, 라스는 잘 모르겠지만 진이 지금 죽어라 노력하는 이유는 자신은 미시마 가가 깔아놓은 레드카펫을 걷지 않고서도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거니까. 네가 말한 나약해 빠진 녀석도 이렇게나 노력하고 자신을 증명하려 드는데 지금 넌… 뭘 하고 있는데? 지금 넌 그냥 자신에게 없는 것에 대한 불평불만만 늘어놓고 있잖아? 그리고 하나 더. 힘이나 권력이라는 거… 그냥 거저 주는 줄 알아? 내가 하나 말하는데 만약 진이 미시마 재벌의 후계자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다음 후계자는 네가 아니라 라스일거다. 왜냐고? 넌 보여준 게 하나도 없잖아? 네가 라스보다 나은 게 뭐가 있는데, 응? 어디 말해봐, 후배님? 명백하게 저를 비웃는 화랑에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온 레이나가 주먹으로 제 앞의 테이블을 콰앙 내리쳤다. 쩌저적, 테이블의 유리가 금이 갔지만 그럼에도 화랑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 나는 그런 걸 얻을 기회조차 받지 못했어! 나는 아버님의…! “

“ 그래, 너는 진의 망할 아버지인 카즈야의 자식이 아니라 그 망할 노친네의 자식이니까. 라스와 똑같은 혼외 자식. 진짜 그 인간, 얼마나 생각이 없는거냐고 “

“ 그 혼외 자식이라는 타이틀과 여자라는 것 때문에 나는 힘과 권력을 얻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어. 그래서 빼앗으려는 것 뿐이야! 아무도 기회를 주지 않으니 내 손으로 빼앗으려는게 뭐가 나쁘다는거야! “

“ 뭔가 착각하는가 본데 난 그걸 나쁘다고 말한 적은 한 마디도 한 적 없어 “

“ 뭐? “

“ 난 너의 빼앗으려는 자세는 인정해. 하지만 그 방식이 마음에 안드는 것 뿐이야 “

오히려 너의 그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는 마음에 든 단 말이야. 카자마 진, 그 자식은 좀 답답한 면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웃는 화랑에 레이나의 눈이 커졌다. 으챠, 화랑이 몸을 조금 숙여 레이나와 눈을 마주쳐왔다. 힘과 권력이 마냥 좋은 건 아니란 말이지. 그런 걸 가지고 있으면 분명 그에 상등하는 책임이 따르게 된다고. 근데 너한테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무언가가 보이지 않아. 그리고 상대의 약점을 잡아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널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네가 진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으면 네가 힘과 권력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달라고. 라스나 진 처럼 공부 쪽도 괜찮고 네 나름대로의 다른 방식으로도 괜찮겠지. 이해하기 어려워? 그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 내가 이 학교에서 규칙을 마구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해도 멀쩡한 이유가 뭘까? “

“ …카자마 진의 뒷배 “

“ 그건 부가적인거고. 그리고 이 학교 교장이 누군인지 잊어버린거 아냐? 그 자식의 뒷배 때문에 멀쩡한거면 오히려 더 쫒아내려 안달일걸? “

“ …… “

“ 썪어도 준치라고 난 학생이야. 일단적으로 성적이 좋기 때문인게 하나.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적어도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기 때문이야. 규칙은 어기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

“ …… “

“ 넌 일단 이 수준까지 들어오는 걸 목표로 삼는게 좋을거다 “

하아, 본의 아니게 말을 너무 많이 했네. 피곤하고 이 이상은 귀찮으니까 이제 할 말 없으면 이 선배는 간다. 수고해라.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까지 걸어간 화랑이 문을 반쯤 열고는 아, 뭔가 생각난 듯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테이블의 유리 깬 거, 내가 했다고 대충 둘러댈테니까 누군가한테 들키기 전에 너도 빨리 가는게 좋을거다. 다음부턴 얄짤 없으니까. 그리곤 쾅, 문을 닫고 응접실을 나와 몸을 돌리자마자 벽에 기대있는 누군가에 화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

“ …라스가 레이나와 들어가는 걸 봤다고 해서 “

“ 흐응, 그래? “

“ …응 “

진이 화랑과 발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화랑은 의외로 별다른 말이 없는 진에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나지막히 물었다. 안 물어봐? 레이나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 질문에 답이 없던 진이 고개를 저었다. 응, 물어볼 필요 없어. 난 너를… 그 뒤를 이어 내뱉은 말에 잠시 눈을 내리깐 화랑이 깍지를 풀고는 진의 어깨에 어깨동무를 하며 웃었다. 그런 김에 진, 나 응접실의 테이블 유리 깨부셨는데. 와장창 까지는 아니고 금이 쫘악 갔단 말이야. 그거 어떻게 몰래 처리 안돼? 그 말에 잠시 말이 없던 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랑이 아닌 레이나가 부셨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화랑이 원했기 때문이었다.

응접실에 혼자 남은 레이나는 가만히 거미줄처럼 금이 간 유리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너의 그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는 마음에 든 단 말이야. 화랑이 자신에게 던진 말이 계속 머리 속을 떠돌았다. 헤이하치의 혼외 자식인 레이나는 집에서도 겉도는 위치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따갑게 바라보는 시선이 싫어 레이나는 평상 시에도 집에 잘 들어가지 않거나 집에 들어가도 제 방에서 나오는 일이 드물었다. 레이나가 가만히 떠올렸다. 밖으로 나가던 자신과 마주친 카즈야가 했던 말을.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너는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을거다. 라스와 너는 분명히 다르니까. 그 말을 듣고도 레이나는 라스가 아닌 진을 증오했다. 그건 아마도 무의식 중에 라스는 자신과 같은 처지라고 인정했기 때문일거다, 같은 헤이하치의 혼외 자식으로서. 카즈야의 그 말은 기폭제가 되어 레이나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진을 자극하며 비웃었다. 당신들이 선택한 후계자가 얼마나 약하고 한심한지, 스스로 미시마를 버리려는 후계자를 자신이 단죄하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 라면서. 하지만 그런 레이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주제도 모르고 나댄다는 폭언으로 돌아왔다. 근데 저 인간은… 하하… 레이나가 어이없다는 작게 웃었다.

“ 무엇보다 예시가 잘못 됐잖아, 선배. 이해하기가 더 힘들다고 “

규칙을 어기고도 멀쩡한 건 힘이나 권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걸 감안하더라도 정상참작이 가능한 능력과 힘이 있어도 그걸 함부로 휘두르지 않은 덕분이다. 그러니 힘이나 권력을 얻기 위해 아등바등 거리지말고 능력부터 키우라는 뜻… 인지도 모르겠네, 젠장. 하, 모르겠다. 어차피 두서없는 말이었으니까 그걸 어떻게 해석할지도 결국 내 마음이겠지. 하지만 뭐, 좋아… 그리고 말이야. 레이나가 손은 들어 거미줄처럼 갈라진 테이블의 유리를 내리쳤다. 와장창,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끝내 유리가 여러 개의 파편이 되어 바닥으로 흩어졌다. 전등빛이 유리에 반사되어 화려하고도 밝은 빛줄기 여러 개가 레이나를 비췄다.

“ 이런 건 나도 수습할 수 있다고, 쓸데없는 참견이야! 두고봐. 내 방식도 언젠가 인정하게 해줄게… 화랑 선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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