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랑] Memento mori
데빌로 폭주할 때 화랑을 죽여버린 후 화랑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진과 그런 진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리고 데빌과 화랑.
진은 제 양손에 묻은 붉은 피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쓰러져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제 손에 묻은 피처럼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이내 남자가 쓰러져 있던 곳에 고여있던 피가 스멀스멀 넘쳐 진의 신발을 적시며 흘러갔다. 뭐지…? 이건… 누구지…? 미간을 찌푸린 진의 뒤에서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외면하고 지워버리고 눈을 가린다고 해서 너의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 끝났다고?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의 죄를 떠올려라, 카자마 진. 진은 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속삭임에 뒤를 돌아본 진은 순식간에 제 앞에 나타난 데빌에 이를 악물었다. 데빌이 저에게 이 장면을 보여준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거의 일주일에 한번 꼴로 데빌이 너의 죄를 떠올리라며 마치 현실처럼 생생한 이 꿈을 보여주곤 했었으니까. 그때마다 진은 되물어보곤 했다. 내가 뭘 잊고 있다는거지?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카즈야를 쓰러트리고 그를 붙잡아 UN이 특수하게 지은 건물에 집어넣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인 준도 돌아왔다. 여전히 카즈야를 사랑한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감정을 자신이 뭐라 할 수 없었기에 진은 그저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카즈야보다 더 전에 전쟁을 일으킨 전범이었던 자신은 제 죄를 인정하고 지금도 세계를 돌아다니며 위그드라실과 함께 세계 복구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잊고 있다는거지? 나의 손에 묻은 이 피, 그리고 내 눈 앞에 쓰러진 남자. 이 두 개가 내가 잊어버린 죄를 말하는건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진을 보던 데빌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눈 앞의 제 숙주를 비웃었다.
“ 그래, 그렇게 계속 외면하고 지워버리고 눈을 가려라. 나는 네가 죽을 때 까지 계속해서 네 죄를 상기시켜 줄테니까 ”
“ 내가 뭘 잊고 있다는거지? 내가 잊어버린 죄가… 있다는 건가…? ”
“ 그걸 내가 알려줄 이유는 없지. 네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
그럼 어디 한번 계속해서 도망쳐봐라, 너의 죄에서. 데빌이 손을 뻗어 툭, 진의 가슴을 밀었다. 그리 강한 힘도 아니었는데 이 힘에 저항할 수 없던 진은 딱딱한 바닥이 아닌 순식간에 물 속으로 빠져버렸다. 바닥이 없는 물 속으로 점점 가라앉으며 수면 위의 데빌의 모습이 희미해지려는 찰나, 데빌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야, 데빌. 적당히 좀 해. 하여간에 널 보면 네가 진의 보호 인격이라는게 믿기지가 않…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목소리를 들으며 진은 계속해서 가라앉았다. 자신의 손에 묻은 피와 제 앞에 쓰러져 있던 남자의 머리칼처럼 선명한 수면 위의 붉은 빛을 계속해서 바라보면서.
“ 진… 진! ”
“ …라스…? ”
“ 무슨 꿈을 그렇게 꾸고 있던거야. 이제 그만 일어나 ”
진은 저의 어깨를 잡아 흔드는 손길에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 멍하니 벽을 보고 있던 진이 상체를 일으키자 저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던 건 라스였다. 저에게는 숙부의 위치에 해당되는 사람 중 한 명으로 제가 아자젤과 동귀어진 했던 그 순간 저의 의도를 알게되어 인연을 맺게된 사람이었다. 아자젤과 동귀어진 후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지역에서 헤매고 있던 자신을 구해준 라스는 지금 진의 입장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아군이었다. 잠시 손으로 머리를 짚고 있던 진이 머리가 아프냐며 약을 권유하는 라스에게 괜찮다고 대답하며 일어서다 다시 침대에 걸터앉아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런 진에 인상을 찌푸린 라스가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방에 비치되어 있던 약상자에서 약을 꺼내 물병과 함께 진에게 내밀었다. 잠시 라스의 손에 올려진 작은 알약을 보던 진이 손을 뻗어 약과 물병을 받고는 그대로 약을 입에 넣고 물로 넘겼다. 꿀꺽, 목울대가 움직이며 약을 삼킨 걸 확인한 라스가 진에게서 물병을 받아 자신도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또 그 꿈인가? ”
“ …그래 ”
“ 분명 듣기로는 데빌은 너의 보호 체계라고 들었는데… 어째서 자꾸 너한테 그런 꿈을 보여주지? 이번에도 꿈의 내용은 같았나? ”
“ …그래. 내 손에는 피가 묻어있고 그런 내 앞에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쓰러져 있어… 데빌은 내가 잊어버린 죄라고 하는데… ”
“ …… ”
“ 근데 오늘은 다른 때와는 조금 달랐어. 목소리를… 들었어.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목소리가… 근데 여전히 모습은 기억이 안나… 분명 나를 알던 사람일텐데. 데빌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았을텐데 그런데… 어째서 기억이… ”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두서없이 말을 중얼거리는 진의 말을 막은 건 그의 어깨를 붙잡은 라스였다. 저만큼이나 커다란 손이 제 어깨를 덥썩 붙잡자 번쩍 고개를 든 진을 향해 라스가 평소처럼 웃어보였다. 그렇게 다급하게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 없어, 진.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겠지. 또 데빌의 심술인 거 아냐? 가벼운 라스의 말을 듣고 잠시 뭔가 생각하던 진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 겠지. 미안, 걱정시켜서. 일단 나도 정신 좀 차릴게.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는 진을 보던 라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또… 인가. 데빌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라스가 팔짱을 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분명… 충격이었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를, 아무리 데빌 상태로 폭주 중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제 손으로 죽여버리다니. 그래, 스스로 기억을 지워버릴 정도로 분명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정말이지… 운명은 얼마나 더 진을 괴롭힐 생각이지…? 빌어먹을… 운명. 저도 그렇지만 진은 이 운명에 가장 많은 피해를 받은 사람일 것이다. 원치 않게 미시마로 태어나 싸우는 숙명을 타고났고 그 숙명으로 인해 제 소중한 사람을 죽여버린 진이 라스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 오랜만이군 ”
“ 오랜만입니다, 백두산님. 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 ”
정신을 차리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위그드라실의 본부를 가로질러 가던 진의 눈에 보인 사람은 레지스탕스의 백두산이었다. 아무래도 그가 맡았던 지역의 복구 보고서를 전달하러 온 것 같았다.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고 사람 좋은 미소를 띄고 있던 백두산이 내민 손을 잡고 가볍게 인사를 건넨 진은 순간 백두산의 곁에 누군가의 환영을 보고는 멈칫, 말을 멈췄다. 백두산보다 한발짝 뒤에 서서 팔짱을 끼고 뚱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이내 진을 바라보더니 가볍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래, 분명 꿈에서 보았던 그 남자다. 그런데 얼굴이 입가 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보며 비웃듯이 웃는 저 미소. 실상은 저를 정말 비웃는 것이 아니라 호승심과 라이벌로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저에게 지기 싫어하는 점에서 비롯된 심술이라는 걸 진은 잘 알고 있었다. 잠깐… 잘 알고 있다고? 그런데… 왜 얼굴이 기억나지 않지? 왜…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거지? 대체 너는… 누구야…?
" …굳이 억지로 떠올릴 필요 없네 “
“ …네? ”
순간 남자의 환영이 사라졌다. 퍼득 정신을 차린 진이 백두산을 바라보았다. 진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는 안타까움과 뭔지 모를 담담함이 한가득 묻어나와 있었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백두산의 손이 툭 진의 어깨를 한번 툭 두드려주고는 뒷짐을 지곤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 녀석이라면… 자네를 원망하지 않겠지. 그때도, 그리고 분명… 그 순간에도. 그러니 너무 괴로워하지 말게나, 진. 그 말에 잠시 말이 없던 진이 입술을 지긋이 물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제가… 뭘 잊고 있는거죠? ”
“ 그걸 억지로 기억할 필요 없네. 아까도 말했듯이 그 녀석은 분명 자네를 원망하지 않을테니까. 오히려 그 녀석이 자네를 만나게 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
“ …저는… ”
“ 지금 자네는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 그러니 지금은 그 일에만 전념하게. 자네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 많이 있으니 말일세 ”
“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
진의 말에 천만에 라며 웃은 백두산이 다시 진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이내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은 또 다시 백두산과 함께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더니 저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환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를 보며 웃고 있던 환영은 이내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담담하게 진에게 말을 건네고 떠나던 백두산이 낮은 숨을 토해냈다. 저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네다 말을 멈춘 진의 시선이 제가 아니라 제 뒤쪽으로 미묘하게 시선이 어긋난 걸 알아차리자마자 그는 바로 진의 정신을 일깨우며 다시 시선을 자신에게 향하게 만들었다. 제 제자가 죽었음에도 백두산은 오히려 진을 위로하는 말을 건넸다. 그것은 가식이나 증오를 눌러 참는게 아닌 정말 백두산의 진심이었다. 그 바보같은 제자라면 분명히 자신의 숨이 끊기는 순간에도 진을 원망하지 않았을테니까. 오히려 그는 진이 안타까웠다. 제 의지도 없이 행한 살인으로 인한 죄책감에 스스로 기억을 지워버린 진이 안타까웠다. 하아, 다시 한숨을 쉰 백두산이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 만약 이 자리에 네가 있었다면… 너는 뭐라고 했을까, 화랑아…
원망하지 않는다고…? 그럼 내가 그에게 원망을 받을 짓을 했다는 건가…? 대체… 내가 뭘 잊고 있는거지…? 고개를 살짝 숙인 체 백두산이 자신에게 건넨 말을 곱씹어 보며 걸어가던 진은 이내 켁, 혀를 차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진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대충 걸쳐 입은 자켓 주머니에 한쪽 손을 넣은 체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스티브였다. 진에게 있어서는 21살의 동갑내기 친구와 비슷한 사이었다. 그래, 그랬었다. 그 사이는 어느 순간 스티브의 적대심으로 틀어졌지만. 진은 저를 보며 혀를 차더니 이내 몸을 돌려 가버리려는 스티브에게 빠르게 다가가 그의 팔꿈치를 움켜잡았다. 윽, 제 팔꿈치를 부셔져라 움켜쥐는 아귀의 힘에 스티브가 짧게 신음을 내뱉더니 이내 자켓 주머니에 넣었던 왼손으로 빠르게 진의 손을 떨쳐냈다.
“ 무슨 짓이야, 복서의 팔을 아작이라도 낼 생각이야? ”
“ …미안 ”
“ 하아, 그래서 무슨 볼일이야? ”
“ …… ”
“ 할 말 없으면서 괜시리 사람 붙잡지마. 그럼 이만 간… ”
“ 왜 날 그렇게 적대하는거지? 너와 나 사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
잔뜩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진을 스쳐 지나가려던 스티브는 그 말에 멈칫, 걸음을 멈추고는 가만히 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적대감과 반감, 그리고 분노가 가득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스티브가 이내 하, 숨을 토해내며 웃었다. 그 웃음도 기분 좋은 감정이 담긴 게 아닌 지금 이 자리에서 진을 때려 눕히고 싶어하는 분노의 감정이 섞인 웃음이었다. 하아아… 한숨과도 비슷한 숨을 내뱉은 스티브가 순간 진을 향해 왼 주먹을 휘둘렀다. 미들급 세계 챔피언의 실력은 가짜가 아니라는 듯 엄청난 스피드로 제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가까스로 피한 진은 곧장 날아오는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손으로 막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스티브는 계속해서 진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잠깐, 스티브! 잠깐… 자신을 말리려는 진의 목소리에 시끄러워! 라고 크게 소리친 그의 주먹이 순간 진의 얼굴 코 앞에서 멈췄다. 그와 동시에 마치 소닉붐처럼 훅 불어오는 바람에 윽, 눈을 가늘게 뜬 진은 또 다시 이번에는 스티브의 뒤에서 쯧쯧 혀를 차며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환영을 보았다. 하아, 그런 진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한숨을 쉰 스티브가 주먹을 내렸다.
“ 그래, 너와 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지. 하지만 그건 그 녀석이 있었을 때 이야기다 ”
“ 그 녀석…? ”
“ 그 일에 대해 내가 화를 내는 것도 웃겨서 지금까지 참고 있었는데… 지금 네 질문에 생각을 바꿨어. 네가 그 녀석을 계속해서 기억하지 못하는 이상, 너와 나의 관계는 계속 이런 식일거다 ”
“ …… ”
“ 네놈은 진짜 비겁하기 짝이 없는 자식이야. 난 네놈을 동정할 생각은 1도 없으니까 그 녀석에 대한 기억을 찾기 전까지 아는 척하지 말라고 ”
네놈을 볼 때마다 그 얼굴에 주먹을 꽃아넣고 싶어서 미칠 것 같으니까. 끝까지 적대심이 가득 담긴 말을 남기고 툭, 일부로 진의 어깨를 치고 그를 스쳐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스티브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진짜… 비겁한 자식이야, 네 놈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과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진을 떠올린 스티브는 아직도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고는 그대로 손을 들어 제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스티브에게 있어서 화랑은 처음으로 만난 호적수와 마찬가지였다. 저와 동등하게 싸워줄 수 있는 호적수. 다만 라이벌은 아니었다. 화랑의 라이벌은 분명하게 진이었으니까. 스티브는 그게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보다 진이 화랑과 만난지 오래되었고 화랑은 한번 꽂힌 것은 죽어도 손에서 놓지 않았으니까. 승패라도 빨리 났더라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결국 IF, 만약에 불과했다. 그래, 네가 지금 살아있었다면 하는 것도 만약에 불과하지. 하아… 지금 저 얼빠진 놈을 본다면… 너는 뭐라고 했을려나, 응? 화랑.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진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비겁… 하다라… 내가 대체 뭘 놓치고 있는거지? 내가… 뭘 잊고 있는거지? 너는… 누구지…? 하아아…그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환영을 진이 응시했다. 여전히 입 부분 밖에 보이지않는 환영이 이내 진에게 손을 뻗었다. 자신을 향해 뻗어진 손을 보던 진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 손을 잡으려던 순간. 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 작게 중얼거린 진이 다시 환영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사라진 후였다. 환영이 서 있던 곳을 바라보던 진은 다시 자신을 부르는 준에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그녀와 함께 카즈야를 수용한 건물에 가는 날이었다. 둘의 목적은 서로 달랐다. 진은 한 달에 한번 그 건물이 정말 카즈야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하고 튼튼한지 확인하러 가는 것이었고 준은 카즈야를 만나기 위해 가는 것이었다. 서로의 목적은 다르지만 결국 목적지가 같다는 점에서 정말 동상이몽이었다.
그리고 진과 준을 안내하는 건 바로 리 차오랑이었다. 카즈야가 갇혀 있는 건물을 만드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건 바로 그였으니까. 카즈야를 증오하면서도 그에게 꽤나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리는 죽은 줄 알았던 카즈야와 함께 나타난 준을 꽤나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었다. 오랜만입니다, 준씨. 네, 오랜만입니다. 진도 오랜만이군. 자신을 보며 가볍게 손을 흔드는 리를 향해 진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카즈야가 현재 수용된 곳은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은 작은 섬이었기에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비도프니르와 같은 비행선이 필수였다. 카즈야에게 가는 비도프니르 안에서 진도 준도 서로 말이 없었다. 어색하면서도 조용한 침묵을 풀어줄 리는 비도프니르의 지휘를 위해 함교의 브릿지에 가 있는 상태였다.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체 창문 너머의 푸른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이 눈을 깜박이는 순간 그 푸른 하늘에 붉은 색이 덧씌워졌다. 아. 진의 입에서 의미 모를 탄성이 튀어나왔다. 뭐야, 왜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뭐? 푸른 하늘에 붉은 색이라서 너무 튄다고? 하, 너 이렇게 이성적인 녀석이었나? 이과야? 진짜 의외네~ 뭐, 너무 튀면 다행인거 아닌가. 적어도 푸른 하늘에 녹아들어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거잖아? 응? 문과냐고? 알게 뭐야. 네가 너무 감정이 매마른거라고, 얼간아. 또 다시 눈 앞에 남자의 환영을 진이 가만히 바라보던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그 목소리에 퍼득 정신을 차린 진이 눈을 깜박이자 남자의 환영이 사라졌다. 손을 들어 눈을 비빈 진이 뒤를 돌아보자 자신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준이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도착했다네. 내릴 준비 해야지. 그 말에 잠시 말이 없던 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 흥, 아무리 한달에 한번이라도 네놈 얼굴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말이지 ”
“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하고 마주치고 싶지 않아 ”
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카즈야와 마주친 진은 자신을 향한 카즈야의 살벌한 말에 역시나 살벌하게 맞받아치며 눈을 찌푸렸다. 진은 카즈야의 진심을 믿지 않았다. 헤이하치나 카즈야가 했던 것 처럼 확인 사살 같은 건 하지 않았으니 죽지 않았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준과 함께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의 품에 안겨서 날아왔던 준을 처음 봤던 그 충격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만약 네 어머니가 살아돌아오면 어쩔 것 같아? 그때 저는 충격이 크겠지. 라고 대답했었다. 누구였지? 누가… 물어봤었지? 그리고 순간 카즈야의 조소가 터져나왔다.
“ 하하, 들은대로군 ”
“ …… ”
“ 난 적어도 네가 한 짓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힘이 전부였고 그 힘을 증명하고 싶었지. 그래서 전쟁을 일으켰다. 거기에는 네놈처럼 세상을 구하겠다는 대의도 없다. 지금 내가 이곳에 순순히 갇힌 것 또한 결국 승자의 룰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지 ”
“…… ”
“ 하지만 네놈은 다르다. 네놈은 자신의 죄를 잊어버렸고 그리고 그 대가로 그 애송이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지. 그래, 따지고보면 그게 지금 네가 치루고 있는 대가일지도 모르겠군 ”
“ …당신은 뭘 알고 있는거지? ”
“ 흥, 나도 단편적인 것 밖에 알지 못한다. 잊은 모양이군, 난 이곳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 자세한 건 그 여자… 준이 떠들어대서 알게 된 것 뿐이지 ”
“ …… ”
“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군. 네놈은 어리석다, 나보다 더 ”
“ 당신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
결국 참지 못한 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카즈야에겐 그것조차 조소의 대상일 뿐이었다. 여전히 입가에 조소를 머금고 있는 카즈야를 보던 진이 이를 악물더니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가버렸다. 흥, 얼빠진 녀석. 자신과 목숨을 걸고 싸우던, 살고 싶다고 간절하게 외치던 그때 그 카자마 진은 없었다. 지금 있는 건 그저 제 죄를 덮어놓고 잊어버리고 도망치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만 있을 뿐. 그때 자신과 싸우던 사람이 지금의 카자마 진이었다면 이미 세상은 자신의 손에 멸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이건 그저 만약에 불가할 뿐이었다. 흠, 카즈야가 소리를 흘리며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 너무 심술 맞네요, 카즈야씨 ”
“ 흥, 네가 그 놈에게 친절하게 굴 이유가 없을텐데 ”
“ 그렇죠. 하지만 저에게는 카즈야씨도 진도 모두 소중한 가족이니까요. 조금만 다정하게 해주면 좋을텐데요, 저에게 하는 것 처럼 ”
“ 쓸데 없는 소리를 ”
카즈야는 진과 교대라도 하듯 들어온 준에 흥,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카즈야를 보며 웃던 준이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내려놓고 찻잔에 무언가를 따르더니 그대로 카즈야에게 건넸다. 고소한 커피향이 금새 방을 가득 채웠다. 마치 마시라는 듯 찻잔을 내민 체 가만히 망부석이 된 준을 보던 카즈야가 답지 않게 한숨을 쉬고는 그녀의 손에서 찻잔을 받았다. 정말이지, 귀찮은 여자다. 귀찮은 여자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내민 것을 결국 거부하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닫지 못한 카즈야가 작게 중얼거렸다.
한편, 화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진은 제 안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벽을 짚고 서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고를 반복했다. 대체 내가 잊은 죄가 무엇이길래, 카즈야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하지? 넌… 대체 누구야? 저도 모르게 들어간 힘에 손으로 짚고 있던 벽의 일부가 마치 두부처럼 뭉개진 순간. 진은 갑자기 들린 소리에 퍼득 고개를 들었다. 이 건물에 항상 배치되어있는 로봇, 컴봇이 어느새 진의 근처로 다가와 진이 부셔버린 벽을 보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 미안. 사과를 하며 손을 내리자 곧바로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 또 카즈야인 줄 알았더니 자네였군. 수리하는 것도 리소스가 들어가니 자제해달라고 “
“ …숙부님 “
“ 카즈야한테 한방 먹은 모양이군. 헤이, 하치. 벽 수리를 부탁하지 “
리의 말에 어디서 꺼낸건지 모를 벽을 수리하는데 필요한 재료를 꺼낸 컴봇이 벽을 수리하는 사이 리가 진을 이끌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리의 뒤를 따라가던 진은 제가 지금 걸어가는 길이 비도프니르를 세워놓은 장소로 향하는 길이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만, 엄마가… 그 말에 리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으쓱 어깨를 들어보였다. 준씨의 부탁이야. 오늘 하루는 그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하더군. 그 말에 진이 눈을 내리깔았다. 여러가지로 진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너라면… 이런 나를 보고 답답하다고 화를 내겠지… 잠깐, 나 지금 누구를 생각한거지? 건물 밖으로 나와서도 생각에 잠겨 있던 진은 순간 제 눈을 찌르는 빛에 고개를 들었다. 태양이 붉은 꼬리를 남기며 지고 있었다. 그래, 노을. 황혼의 시간이었다. 붉게 타오르며 지고 있는 태양을 보던 진의 걸음이 멈췄다. 뒤에서 들려야 할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자 몇발짝 앞서 걷던 리가 진? 그의 이름을 부르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진의 시선은 여전히 조금씩 지고 있는 태양에 꽂혀있었다.
노을을 배경으로 남자의 환영이 스르륵 나타났다. 그 붉은 머리칼과 잘 어울리는 붉은 황혼 속에 남자가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 황혼과 동화되어 사라질 것 같은 남자가 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 사라져? 무슨 헛소리야, 너. 아까는 푸른 하늘에 붉은 색이라 너무 튄다고 하더니 지금은 동화되서 사라질 것 같다고 하냐? 걱정마, 어차피 태양은 지고 뜨는 걸 반복하잖아? 내가 만약 동화되서 사라진다고 해도 다음 날 되면 멀쩡하게 나타날거라고.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소리하지마, 진. 그래, 나는 분명 이 남자와 황혼 속에서 그런 대화를 나눴었다. 붉은 빛이 어울리는 이 남자는. 분명. 아. 멍하니 태양을 바라보던 진이 입술을 달싹이더니.
“ …화랑…? ”
“ 진! 너 기억이… ”
진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놀란 리가 진에게 다가왔지만 진의 눈은 이미 저에게 다가온 리가 아닌 그때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카즈야와 준이 돌아왔을 때 진은 카즈야의 처우를 두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감정에 동화되어 분명 진의 아군이 되었던 데빌이 그대로 폭주해 다시 진을 지배했다. 그 힘에 삼켜서 의식을 잃은 것도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때 진은 저를 끌어안는 따뜻한 온기를 느꼈고 그와 동시에 그의 심장을 쥐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화… 랑…? 제 부름에 대답이 없던 화랑의 몸에서 힘이 빠지고 그대로 쓰러진 그의 몸에는 더 이상 생기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이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았다. 붉은 피, 화랑에게서 흘러나왔을 피를 양 손에 잔뜩 묻힌 제 손을 바라보았을 때 진은 깨달았다. 자신이 화랑을 죽였다는 것을.
“ 화… 랑… 화랑… ”
“ 자, 잠깐! 진, 생각하지마! 떠올리지마! ”
리가 황급히 다가와 진을 부축했지만 이미 모든 기억을 떠올리고 패닉 상태에 돌입한 진의 귀에는 그의 목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순간 진의 몸을 데빌이 지배했다. 머리에 뿔이 생기고 날개가 생겨난 진이 눈을 붉게 물들이다 이내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크게 포효했다. 그 충격에 리가 뒤로 날아가 버리고 준 또한 갑자기 들린 커다란 소리에 놀라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진은 이미 날개를 움직여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후였다. 그리고 그렇게 날아가던 진은 스스로 날개를 접은 체 엄청난 속도로 수면에 추락했고 몸이 서서히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제서야 자신의 죄를 깨달았나? 점점 멀어져가는 수면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진은 어느 순간 데빌의 심상 세계에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체 움직이지 않는 진을 내려다보던 데빌이 말을 건넸다. 그래, 이제서야… 기억했다. 내가… 내가 화랑을… 내 손으로 직접 죽였다. 그 충격에 나는 기억을 지우고 도망다니고 있던 것 뿐이야. 나는… 화랑을… 화랑을… 진이 양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데빌에 잠식되어 버린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달려든 사람 중에는 당연하게 화랑도 있었다. 데빌을 가장 많이 상대했던 사람답게 진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한 화랑이 제 어깨를 붙잡으며 제 이름을 크게 불렀을 때 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대로 팔을 휘둘렀고 그 휘두른 팔은 날카로운 손톱을 앞세워 그대로… 화랑의 가슴을 뚫어버렸다. 그 충격에 피를 토한 화랑이 이를 악물더니 그대로 진의 이마에 제 이마를 쾅! 박으며 이름을 불렀고 그때서야 진이 정신을 차리며 데빌에게서 주도권을 찾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화랑… 화랑… 화랑…! 이를 악문 진은 저를 일으키려는 데빌의 손을 뿌리쳤다. 이대로 사라지게 해줘…! 원한다면 네 몸을 줄테니까… 이제 한계야, 내 죄는 이제 더 이상 용서 받을 수 없어…! 그러니까 이대로 화랑을 따라서 가게…
“ 헛소리하지마, 이 자식아 ”
순간 진은 제 머리 맡에서 들린 목소리에 움찔 어깨를 몸을 떨었다. 이 목소리는, 아니. 이미 그는 죽었다. 제가… 제가 죽여버렸다. 죽은 사람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그것은 데빌 인자를 가진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이 세계의 이치였다. 근데 어째서… 아무리 데빌의 심상 세계라지만 어째서… 네가 이곳에 있는 건지… 화랑.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고개를 올려 화랑을 보려는 진의 눈을 누군가의 손이 가렸다. 지금까지 제 눈을 가리고 잊어버렸던 녀석이 무슨 자격을 보려고 하냐, 임마. 뭐… 이해는 하지만. 솔직히 내 심정으론 네가 평생 기억하지 않기를 바랬는데… 어쩔 수 없다. 이것도 다 네 녀석의 업보겠지. 진이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린 손을 움켜잡았다. 촉감은 있었지만 온기는 없었다. 그래, 명백하게 죽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잠시 그 손을 움켜잡고 있던 진이 중얼거렸다.
“ 넌… 내가 만든 환상이야, 아니면 정말로… ”
“ 음,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네가 죄책감으로 만든 환상일지, 아니면 정말 기적적으로 저 까마귀 자식이 나를 이곳으로 끌어들인 건지는 아무도 모르는거야 ”
“ 하, 까마귀라 ”
“ 시끄러워, 임마. 내가 진한테 그런 거 자꾸 보여주지 말라고 했지. 나 같은 거 그냥 잊어버리는 게 나았을텐데 ”
“ 너야말로 헛소리는 그만해라. 자신의 죄에서 눈을 돌리는 놈에게 내가 힘을 빌려줄 이유가 없어 ”
퉁명스럽고 차가운 목소리에 헛웃음을 흘린 화랑이 가만히 진을 보다 작게 중얼거렸다. 네 쪽으로 올 생각은 추호도 하지마. 어떻게든 살아. 무엇보다 넌 아직 날 제외하고도 아직 죄값을 다 치루지 않았잖아. 저 까마귀 자식의 힘과 너의 힘, 그 모든 걸 총동원해서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라고. 물론 그거 끝나도 올 생각하지마. 나한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면 내 몫까지 살아. 내가 보고 싶은 거, 듣고 싶은 거, 말하고 싶은 거 전부 다 네가 내 몫까지 하는거야. 뭐, 상투적이면 상투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이긴 한데… 네가 있는 곳으로 오지 말라는거, 그건 진짜 내 진심이니까. 네가 그때 말했지? 살고 싶다고. 그럼 살아. 단지 네가 살 세계 속에 이젠 내가 없는 것 뿐이니까. 그 말에 화랑의 손을 움켜잡은 손에 힘을 준 진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 차가운 무언가가 진의 입술에 닿았다. 정 자세가 아닌 역 자세에서 하는 키스. 모 영화에서 유명해진 키스. 진의 아랫 입술과 화랑의 윗 입술이 조심스럽게 닿고 이내 진의 윗 입술과 화랑의 아랫 입술이 완전히 맞닿았다. 격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마치 숨이라도 불어넣어주듯 잔잔한 키스를 끝으로 입술을 뗀 화랑이 작게 중얼거렸다.
“ 잘 있어, 진 “
“ …잘가, 화랑. 널… 잊지 않을게 “
그리고 진의 몸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누운 자세로 부상하기 시작하는 제 몸에 진이 재빠르게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러자 저를 보며 평소처럼 웃어보이는 화랑이 보였다. 그래, 너는 그렇게 호전적으로 항상 자신만만하게 웃어보이는 녀석이었다. 잊지 않을게, 그리고. 순식간에 진이 데빌의 심상 세계에서 사라졌다. 후, 귀찮은 자식. 그렇게 중얼거리며 혀를 차던 화랑은 점점 희미해지는 제 몸을 바라보다 아직 공중에 떠 있는 데빌을 바라보았다. 데빌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왜, 뭐. 네가 원하는대로 진이 날 죽인 죄를 떠올렸잖아? 근데 왜 그런 표정이야? 그 말에 데빌이 화랑의 근처로 날아왔다.
“ 너와 한번 더 싸워보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근데… 사라지는건가? “
“ 내가 진의 죄책감이고 미련이었다면 그걸 떨쳐버린 지금 내가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
“ …마음에 들지 않아 “
“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뭐 어쩌겠어 “
세상은 원래 다 그런거라고. 자기 마음에 들게만어떻게 살 수 있겠어. 그렇게 웃던 화랑이 데빌에게삿대질을 했다. 그러니까 진한테 그만 심술부리고 적당히 타협 좀 해라. 하여간에 누가 데빌 아니랄까봐… 여하튼 잘 있어라. 질긴 악연이었지만 너와의 싸움도 나름 재미있었어. 그 말에 데빌이 손을 뻗어 화랑의 손을 움켜잡으려 했지만 그러기 전에 화랑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닿지 못하고 붙잡기 전에 사라진 그의 잔상을 바라보던 데빌이 눈을 가늘게 뜨다 이내 다시 날아올랐다. 마지막에 직접 그와 닿을 수 있었던 진과 달리 자신은 마지막의 마지막에도 그에게 닿을 수 없었다. 숙주와 달리 이게 나의 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잠시 데빌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 스티브 “
“ 뭐야, 내가 분명 기억을 찾기 전까지… “
“ 화랑 “
“ …… “
“ 다… 기억났다 “
저를 불러 세운 진에 퉁명스럽게 대꾸하려던 스티브는 진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입을 다물었다. 그 날 데빌의 심상 세계에서 화랑과 마주한 진은 자신이 점점 가라앉고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데빌의 힘을 사용해 단숨에 수면 위로 부상했다. 수면을 뚫고 높게 하늘로 날아오른 제 눈에 거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해가 들어오자 잠시 말없이 보던 진의 눈꼬리에 맺혀있던 눈물이 또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리다 떨어졌다. 그러다 해가 완전히 지자 진이 날개를 움직여 비도프니르로 돌아갔고 진을 찾기 위해 모든 병력을 총동원 하려던 리는 돌아온 진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다가가려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멈칫, 걸음을 멈췄다. 리의 옆에 있던 준 또한 말없이 그를 보다 천천히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진은 말없이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잡을 뿐이었다. 겨우 진정이 된 진은 그대로 비도프니르로 끌려들어가 각종 검사를 받았다. 무엇보다 스스로 자살에 가까운 추락 후 무려 1시간이나 바닷속에 있었다면서 살아있는게 기적에 가깝다고 리의 말에 진은 숨을 불어넣어주듯 잔잔한 키스를 전한 화랑을 떠올렸다. 이번에도… 날 구해주는건 너구나, 화랑. 자신을 걱정하는 둘에게 진은 화랑을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물론 환각일 수도, 죄책감으로 인한 자기 방어의 일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은 편안해보이는 진의 얼굴에 리도, 준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라스에게도 백두산에게도 화랑을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라스는 리와 준처럼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백두산은 제 못난 제자를 기억해 줄 사람이 늘어 다행이라며 자네가 해야할 일을 하라며 도리어 진을 격려했다. 저를 격려하고 가는 백두산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진은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이 스티브였다. 다 기억이 났다는 말과 그 후 이어진 진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스티브가 벽에 기대며 팔짱을 꼈다.
“ 환각인지 아니면 꿈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네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황 좋게 만들어 낸 거짓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정말 화랑, 그 자식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 좋으려고 거짓말 따위 하지 않겠지 “
“ …… “
“ 그나저나 그 자식이 그런 말을 남겼다라… 정말 미련 따위 남기지 않으려는 놈 답다. 안 그래? “
“ …… “
“ 여전히 난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네가 모든 걸 떠올리든 말든 화랑을 죽였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
“ …… “
“ 그래도 당사자가 살라고 말하고 미련없이 가버렸는데 그걸로 제 3자가 뭐라고 하는 것도 웃기니까. 가끔 말 정도 거는건 허락할까나 “
“ …그래 “
“ …솔직히 말하자면 난 처음부터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난 그 녀석에게 호적수 정도 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 녀석은 항상 너만 바라봤지. 그게 진짜 열받더라고 “
“ …… “
“ 그래서 결심했어 “
순간 그때처럼 진에게 순식간에 접근한 스티브가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회전을 주며 날아온 주먹을 그때와는 달리 가볍게 막아낸 진을 본 스티브가 이것도 마음에 안드네, 라고 중얼거리곤 자세를 바로잡고 으쓱 어깨를 들어보였다. 내가 화랑 그 자식을 대신해서 네 호적수가 되주지.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네 그 얼굴에 주먹을 꽃아넣어주고 싶거든. 그 말에 작게 웃은 진이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 왜 라이벌이 아닌 호적수지? “
“ 네 라이벌은 영원히 화랑일테니까. 뭐, 단순 라이벌은 아니라는 건 알지만 대외적으론 다들 그렇게 알고있을테니 그런 걸로 하자고 “
그 말을 남기곤 이만 간다, 나도 오늘은 술 한잔 해야겠네. 라며 스티브가 진을 스쳐 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진이 후, 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에 녹아들어도 붉은색이니 금방 눈에 띈다고 말했던 화랑을 떠올린 진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렇네… 널 누구보다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푸른 하늘이 나는 이젠 정말 좋아질 것 같아, 화랑. 그렇게 중얼거린 진이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바라보던 창문 너머로 붉은 빛이 잠시 아른거렸다 사라진 걸 알지 못한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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