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랑] 썰 모음 29
진화랑 1개, 진화랑뎁진 1개, 진화랑스팁 1개. 현생으로 연성이 느려집니다.
1. 끝내주는 밤을 보낸 후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는 화랑 케어해주는 진으로 짧은 진화랑
시트를 문 체 파르르 떨던 화랑의 허리가 침대로 떨어졌다. 잘게 떨고 있는 그의 어깨를 피가 날 정도로 물고 있던 진이 떨어지자 화랑의 입에서 한숨과도 같은 신음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하아, 이 미친 새끼 진짜… 물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목과 어깨, 심지어 등도 아픈 거 보니 아주 신나게 물어뜯은 것 같았다. 이러니까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겉옷도 못벗지… 어휴… 엎드린 체 숨을 고르던 화랑이 하아, 다시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제 머리를 쓸어올리자 그의 위에 올라타 쪽쪽 목 부근에 입을 맞추던 진이 작게 웃으며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뭘 잘했다고 웃어. 타박 섞인 화랑의 말은 기분 좋고 만족 했음에도 괜시리 부끄러움에 틱틱거리는 뜻이라는 걸 아는 진이 자신을 향한 타박에 별 다른 대꾸없이 쪽, 땀에 젖은 머리칼에 입을 맞추다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이제 그만할 생각이네… 그래,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하지… 나도 슬슬 한계고. 매번 진을 받아주다 허리가 나갈 뻔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화랑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이 왠일로 진이 자신을 내버려둔 체 휙, 침실을 나가자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후아, 땀에 젖은 베개를 끌어안았다. 아, 씻어야 하는데… 정리해야 하는데… 다 귀찮아… 아… 모르겠다. 그냥 자자. 그렇게 생각한 화랑이 푹신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자기 편한 자세를 취하곤 눈을 감으려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강한 힘이 시트로 자신을 무슨 김밥 마냥 둘둘둘 말기 시작한 탓에 번쩍 눈을 뜬 화랑의 시야에 저를 꽁꽁 싸매며 김밥말이를 하고 있는 진이 들어왔다.
“ 너… 뭐하는데 ”
“ 귀찮아도 씻어야지, 화랑.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
“ …… ”
방금까지 내 허리 반 접은 놈을 믿어도 되나, 욕실에서 또 이상한 짓 하는 건 아닐려나. 같은 표정을 하던 화랑이 한숨과 비슷한 숨을 내뱉더니 이내 힘을 풀며 진의 손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화랑이 힘을 풀며 제 손에 몸을 완전히 맡기는 걸 본 진이 살짝 웃고는 시트로 그의 몸을 빈틈없이 완전히 감싸고는 그대로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단단한 두 팔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은 진이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추울까봐 시트로 감싼 건가 싶어 차갑고 서늘할거라는 화랑의 예상과 달리 욕실은 훈훈하고 따뜻한 온기가 돌았다. 더불어 욕조에는 이미 따뜻한 물이 3분의 2 정도 받아져있었다. 자신을 냅두고 침실을 나간 이유를 알게 된 화랑이 흐응, 기특한 짓을 했다며 속으로 칭찬하는 사이 진이 화랑을 시트 째로 조심스럽게 욕조 안에 넣었다. 따뜻한 물의 온기에 화랑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후아, 탄성이 흘러나왔다. 잠깐만 있어. 욕조에 화랑을 담가놓고 다시 욕실을 나가는 진을 힐끔 바라본 화랑이 후아아…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탄성을 내뱉으며 그 따뜻한 물에 목까지 푹 담근 체 눈을 감았다. 따뜻한 물은 진짜 기분 좋다니까… 잠시 후 침실 정리를 마친 진이 욕실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달깍, 문이 닫히는 소리에도 여전히 눈을 뜨지 않던 화랑이 이내 제 얼굴을 매만지는 손에 스르륵 눈을 떴다. 허리에 수건을 두른 진이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안들어오고 이러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는 화랑의 표정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웃던 진이 이내 자세, 다시 잡을게. 라고 말을 하더니 화랑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잡아 욕조 밖으로 살짝 나오게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또 뭘 하려고, 싶던 화랑은 진이 수건으로 제 눈을 가리자 이게 또 수작을 부려! 라고 생각하며 그 수건을 집어 던지려고 했다. 제 머리칼을 적시는 미지근한 물만 아니었다면. 움찔, 갑자기 머리칼을 적시는 미지근한 몸에 어깨를 떤 화랑이 진이 뭘 하려는지 깨닫고는 이내 어깨에 힘을 풀며 그 손에 제 머리를 맡겼다. 목욕물보다 낮은 온도의 미지근한 물로 머리칼을 충분히 적시고 샴푸를 펌핑한 진이 그 커다른 손으로 최대한 섬세하게 화랑의 머리를 감기기 시작했다. 혹여라도 손톱에 긁혀 상처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제 머리를 마사지하며 감기는 손길에 화랑이 저도 모르게 만족의 신음을 내뱉다 작은 소리로 허밍을 하기 시작했다. 물로 거품을 씻어내던 진이 그런 화랑이 귀엽다는 듯 쪽, 거품이 씻겨나간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뭐하냐… ”
“ 음, 아니. 그냥 좋아서 ”
“ 애인 허리 반 접은 놈 좋으라고 기른 거 아니거든? ”
말은 거칠고 퉁명스럽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진이 다시 작게 웃고는 마지막으로 머리칼을 헹궈 거품을 완전히 씻어냈다. 그러곤 익숙하게 자신도 욕조 안으로 들어와 화랑을 뒤에서 껴안으며 앉았다. 진이 들어오면서 물이 욕조 밖으로 넘치다 이내 멈췄다. 시트 너머로 자신을 껴안는 단단한 팔에 잠시 눈을 깜박이던 화랑이 휙 고개를 돌려 진을 바라보았다. 근데 왜 날 이렇게 김밥말이 상태로 만든거야. 같이 씻고 싶었던거면 시트 없어도 되잖아. 그 질문에 진이 잠시 눈을 굴리다 어깨를 으쓱 들어보였다. 뭐… 너를 위해서… 라고 하면 안될까…? 그 말에 화랑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생각하기도 귀찮은 듯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제 뒤의 진에게 온전히 기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런 화랑의 행동에 진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화랑을 위해서가 맞았다.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의 그의 나신을 본다면 자신의 이성이 얼마나 버틸지 진 자신도 몰랐으니까. 가득이나 요새 침대에서 죽겠다고 볼멘 소리를 해대는데 욕실에서마저 해대면… 거기까지만 생각한 진이 고개를 흔들며 머리 속의 최악의 상황을 지우고는 화랑을 껴안은 팔에 힘을 줘 자신을 향해 좀 더 잡아 당기고는 그 어깨에 턱을 기댔다.
“ 윽… 힘 좀 빼, 무슨 생각을 하길래 갑자기 그렇게 힘을 주는거야 ”
“ 아, 미안… ”
“ 너… 혹시… ”
“ 아니야, 아니니까 ”
“ …… ”
자신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화랑이 씨익,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몸을 돌려 덥썩 진의 위를 덥치듯 점령했다. 스르륵, 어깨에서 시트가 흘러내려 상반신이 훤히 들어난 체 진을 보던 화랑이 저를 보고 꿀꺽 침을 삼키는 그를 보며 귀엽다는 듯 웃었다. 화랑이 상체를 숙여 진의 관자놀이에 가볍게 입술을 대는가 싶더니 이내 서서히 미끄러지듯 내려와 입술 옆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것만으로도 굳은 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목줄기를 따라 가볍게 내려온 화랑이 이를 세워 목덜미 쪽에 작은 키스마크를 남기는가 싶더니 혀를 내밀어 그 키스마크를 마치 고양이처럼 핥았다. 읏, 화랑… 그걸로도 자극적인지 수건으로 가린 하복부 쪽에 서서히 단단해지는 무언가를 본 화랑이 다시 위로 올라와 진의 코를 살짝 앙, 물고는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촤악, 다시 욕조 밖으로 물이 쏟아지고 제 몸에 감긴 시트를 벗으며 욕조에서 나온 화랑이 저를 멍하니 바라보는 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 난 피곤하니까 먼저 잘거야. 알아서 정리하고 나와. 자는 사이에 이상한 짓 하면 진짜 가만 안둔다 ”
“ 자, 잠깐만… ”
쾅! 수건 걸이의 수건을 잡아채며 욕실 문을 연 화랑이 진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이내 쾅, 문을 닫았다. 잠시 닫힌 문을 바라보던 진이 이내 하아아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러다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려 화랑이 키스마크를 남긴 목덜미 쪽을 매만지던 진이 다시 얼굴을 가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한발 빼야할 것 같았다. 화랑… 나지막하게 화랑의 이름을 읊조린 진이 손가락 사이로 단단해진 제 것을 보며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진짜… 방심할 수 없다니까. 그리고 그렇게 혼자서 빼고 샤워까지 깔끔하게 마친 진이 욕실에서 나와 침실에 들어왔을 때 이미 화랑은 잠에 빠진 상태였다. 화랑을 욕조에 넣어놓고 다시 침실로 돌아와 재빠르게 새 시트로 갈아놓은 보람을 느낀 진이 아직 덜 마른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다 수건을 제 배게에 깔고 그대로 누워 잠든 화랑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을 들어 흘러내린 머리칼을 정리해준 사이. 그 손길에 으응, 작은 신음을 흘리며 깨는가 싶었던 화랑이 잠결인지 한손을 들어 허우적대다 진의 손을 덥썩 붙잡더니 그대로 제 얼굴에 가져가 그 손에 얼굴을 비볐다.
마치 제 집사의 손에 얼굴을 비비는 고양이마냥 잠시 그 손에 제 얼굴을 가져가 비비던 화랑이 이내 그 손에 기대 다시 잠들자 진이 잡히지 않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오늘 몇번째 인지 모를 숨을 내뱉었다. 내뱉은 그 숨은 분명 뜨거웠다. 정말이지… 날 얼마나 더 자극할 생각이야… 머리 속에 다시 슬금슬금 떠오르는 음심을 고개를 힘껏 흔드는 것으로 떨쳐버린 진이 그대로 몸을 움직여 제 품으로 화랑을 끌어안으며 자세를 잡았다. 으응, 끄응… 소리를 흘리며 뒤척거리던 화랑이 다시 얌전해지고 그런 화랑의 머리칼에 다시 입을 맞춘 진이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래, 달콤한 수면의 시작이었다.
2. 22-2에서 이어지는 의대생 화랑이 철권 세계로 떨어진 후의 이야기. 전체적으로 진보다 뎁진이 더 이성적입니다.
…요새 사후 세계는 이렇게 현대적인가…? 눈을 뜬 화랑이 멍하니 고개를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새하얀 방에는 간단한 가구들이 놓여져 있었다. 책상과 의자, 침대, 작은 냉장고, 그리고 샤워실을 겸하는 화장실까지 확인한 화랑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 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윽, 소리를 내며 옷 너머로 배를 만졌다. 그리곤 옷자락을 들추자 보인 건. 아주 시퍼렇네… 하아, 배를 맞고 기절한 것 치고는 이 정도로 끝난게 다행인가. 그나저나… 그 괴물은 대체 뭐야? 그리고… 날 어떻게 알고 있는거지?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 괴물의 눈은 사람의 피를 잔뜩 묻힌 겉모습과 달리 그리움과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어지러이한 눈빛을 띄고 있었다. 잠시 그 괴물을 떠올린 화랑이 고개를 몇번 흔들곤 침대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피다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도 열리지 않는 문에 주변을 살피던 화랑이 문 옆의 스위치를 발견하고는 손을 들어 스위치를 꾹 눌렀다. 그러자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보이는 복도를 잠시 응시하던 화랑이 천천히 방을 나와 주변을 살폈다. 창문 하나 없는 복도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화랑이 자동으로 스르륵 닫힌 문에 박힌 320 숫자를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너무 조용해, 기분 나쁠 정도로. 제 발자국 소리만 들리는 복도를 미간을 찌푸린 체 걷던 화랑은 시야에 창문이 보이자 빠르게 걸어 창문 너머를 확인했다. 그리고 하, 입에서 탄식을 내뱉은 화랑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창문을 내리쳤다. 흔들림조차 없이 굳건하게 형태를 유지하는 창문 너머에 보이는 광경은 푸른 하늘 뿐이었다. 그러다 가끔 흰구름과 새가 지나가는 풍경. 그래, 지금 그가 있는 곳은 하늘 위였다. 화랑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개인실이 있고 이렇게나 긴 복도가 있으며 하늘을 이동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은 화랑의 기억 속에는 없었다. 그런 이동 수단은 영화 속에서나 있겠지. 내심 자신이 기절 후 원래 자신의 세계에서 깨어나기를 바랬던 화랑은 여전히 자신이 낯선 세계에 있다는 걸 깨닫고는 목 끝까지 올라온 욕을 애써 삼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 지나가는 사람도 없네. 하긴 지금은 아무하고도 마주치고 싶지 않지만… 복도를 지나 계단을 발견한 화랑이 잠시 고민하다 위아래 중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택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 화랑이 문 하나를 발견하고는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인 건 수많은 기계들이었다. 뭐야, 이거. 엔진실 같은건가? 작은 소음을 내는 기계들을 잠시 바라보던 화랑이 이내 흥미를 잃어버리고 문을 닫고는 다시 계단으로 내려갔다. 내가 있던 방의 번호를 생각하면 내가 있던 곳이 3층이고 방금 전 기계실 같은 곳이 2층이라고 생각하면 다음이 1층… 이려나. 최대한 발소리도 죽이고 계단을 내려온 화랑이 문 2개를 발견하고는 잠시 고민하는 사이, 멀리서 저벅저벅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에라이, 모르겠다 를 중얼거리곤 오른쪽 문을 벌컥 열었다. 뭐야, 연결 통로… 인가? 잠시 머뭇거리던 화랑이 이내 연결 통로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조심스럽게 연결 통로를 걷다보니 2층과 1층 중간을 연결하는 위치에 도착한 화랑이 가만히 아래를 내려보았다. 넓어, 심할 정도로 넓어. 애시당초 여기 높이가 장난 아니잖아. 잘못 떨어지면 죽겠네, 그냥. 화랑이 가만히 아래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여기… 격납고 같은 곳인가? 저 커다란 물건이 몇개나 있는거야? 저 많은 수의 물건이 들어가고도 공간이 이 정도나 남는다면… 대체 이 이동 수단… 얼마나 큰거야?
밑을 내려다보며 도달한 결론에 허, 허탈한 탄성을 내뱉은 화랑의 시야에 순간 다른 사람들과 복장부터가 다른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온통 비슷한 복장을 한 인간들이 우글거리는데 그 틈에서 복장이 다르다면… 뭔가 거물급의 인간이라는 소리겠지.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키며 연결 통로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두 사람을 살폈다. 아, 젠장. 시야가 안맞아… 안경이라도 있었다면… 제 수중에 없는 가방 안에 얌전히 들어있을 안경을 떠올린 화랑이 오른쪽 눈을 감았다. 뭔가 하얀색 투성이의 남자와… 겉옷의 모자를 뒤집어 쓴 남자가 보였다. 무언가를 손에 든 체 겉옷의 모자를 뒤집어쓴 남자에게 뭐라뭐라 말하던 하얀색 투성이의 남자가 이내 손을 내리며 한숨을 쉬는 것이 보였다. 누군지 궁금하긴한데… 뭔가 느낌이 안좋아. 일단… 이만 갈까. 감았던 오른쪽 눈을 뜨며 몇번 깜박이던 순간. 겉옷의 모자를 뒤집어쓴 남자가 화랑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순간 화랑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달렸고 자신을 부르는 외침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화랑은 정신없이 달렸다. 어차피 자신은 이곳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 어디로 도망가야 되는지도 모른다. 아니, 일단 도망갈 수 있을까…? 하지만 화랑은 그 남자와 눈을 마주친 순간 온몸을 타고 흐른 공포심에 그저 달릴 수 밖에 없었다. 자신과 마주친 그 눈에는 지독한 심연 밖에 없으니까.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했다던 그 문장이 머리 속에 떠오른 화랑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나서야 멈춰서 복도를 짚고 헉헉, 숨을 골랐다. 허리를 숙이고 잠시 숨을 고르던 화랑이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대충 훔치고 작게 한숨을 쉰 후 허리를 편 순간이었다.
“ 화랑 “
“ !!! “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흠칫, 어깨를 떤 화랑이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제 목을 낚아채는 힘에 거친 숨을 토해내며 그대로 벽에 등을 부딪쳤다. 젠장, 데자뷰도 아니고…! 자신이 괴물에게 붙잡혔을 때도 이런 상황이었다는 걸 떠올린 화랑이 제 목을 붙잡은 손의 손목을 붙잡고는 저를 이렇게 다루는 장본인을 노려보았다. 괴물과 닮은 외모, 그 괴물인걸까. 하지만 그러기엔 뿔도 날개 같은 것도 없어… 그럼 대체 이 자식은 누구고 날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힘껏 남자를 노려보던 화랑이 이를 악 물더니 크게 소리쳤다. 너, 대체 누구야…? 날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그리고 그 괴물과 무슨 관계야! 그리고 순간 남자의 눈에 실망감과 슬픔이 감돌았다. 뭐야, 그 눈빛은… 마치 내가 잘못한 것 같잖아. 이내 남자의 눈빛이 변했다. 그 눈에 깃들어있는 건.
“ 끄윽…! “
“ 하하… 그렇지… 네가 진짜 화랑일리가 없지… 난 대체 뭘 기대한걸까… 그럼 넌 누구일까… 설마 날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존재일까…? 알리사처럼…? ”
” 무슨 헛… 소리…! 커흑…! ”
” 네가 만들어진 존재라면… 내 손으로 직접 죽여주는게 맞겠지. 그래야 널 만든 녀석들도 이런 식의 도발은 소용 없다는 걸 알테니까… 그래,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여줄까…? ”
화랑은 제 목을 천천히 조르기 시작한 남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양손으로 제 목을 움켜쥐고 분노와 증오가 섞인 차가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남자는 정말 죽일 것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졸랐다. 어떻게든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쳐들고 남자의 손을 떼어내려했지만 그건 그저 미약한 발버둥일 뿐이었다. 아, 하아… 이… 렇게 죽는다고…? 갑자기 낯선 세계에 떨어져서 군인들에게 쫓기다가 괴물과 마주치고 납치당하더니 이렇게… 죽는다고…? 싫… 어… 난 아직 해야할… 일이…! 점점 희미해지는 정신에 손목을 움켜잡은 손마저 스르륵 풀려버리고 화랑의 눈가가 경련하더니 완전히 감기려는 순간. 커다란 소리와 함께 화랑이 제 목을 조르던 손에서 풀려났다. 갑자기 산소가 마구잡이로 폐로 들어오자 화랑이 벽을 타고 주저 앉아 거칠게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런 화랑의 앞에 누군가가 가로 막듯이 섰다. 겨우 기침이 멈춘 화랑이 그 누군가를 올려다보자 보인 건 뒷모습만 보이는 은빛 머리칼의 남자였다. 이건 또 누구야… 괜찮습니까, 화랑씨? 흠칫, 자신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몸을 떤 화랑이 옆을 바라보자 분홍빛 머리칼의 여성이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화랑씨. 다시 재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겨우 고개만 끄덕인 화랑이 고개를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방금 전 제 목을 조르던 남자를 누군가가 막고 있었다. 하얀색 투성이의 남자, 아까 화랑이 본 나머지 한명이었다.
“ 비켜, 라스. 죽여야겠어 “
“ 아직 상황 파악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 급해. 진정하고 일단 이야기를 들어봐야… “
“ 저건 화랑이 아니야! 화랑의 모습을 하고 있는 무언가지! 그래, 날 자극하고 싶은 놈들이 만든 가짜겠지. 그러니 보여줘야지. 저런 가짜 수십체, 수백체 만들어도 난 아무렇지 않다는걸! “
“ 진정해, 진! 지금 너무 흥분했어, 일단 이성부터 찾아! “
“ 빌어먹을… 누가 가짜라는거야! “
둘의 말싸움에 상황을 겨우 파악한 화랑이 순간 차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쳤다. 갑자기 이딴 세계로 떨어진 것도 기가 막힌데 가짜 취급이나 당하고 죽을 뻔하고… 날 대체 누구랑 착각하고 있는거야! 그리고 당신들 누구야! 근본적인 것을 묻는 그 외침에 모두의 행동이 멈췄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화랑에게 향했다. 목을 매만지며 이를 으득 가는 화랑의 시선은 방금 전까지 제 목을 조르던 남자에게 향해 있었다. 잔뜩 날이 서린 그 눈에는 분노와 공포, 그리고 혼란의 감정이 섞여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에서 모두가 깨달았다. 그는 화랑이자 화랑이 아니라고. 이딴 세계에 떨어졌다고…? 제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남자가 중얼거리다 이내 몸을 돌려 화랑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라고 내민 손, 잠시 그 손을 보던 화랑이 손을 잡고 일어나는 대신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민 손이 무안해졌지만 남자는 으쓱 어깨를 들어보이고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우린 대화가 좀 필요할 것 같군.
" 그러니까... 길을 걷다 갑자기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느낌이 들었고 정신을 차리니 이 세계였다...? "
" 그래. 처음엔 그냥 납치라도 당해서 전쟁터 한가운데에 끌려온 줄 알았는데... UN 마크도 내가 알던 마크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세계를 상대로 전쟁이 가능한 기업? 그딴 게 있을리가 없지. 거기서부터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
" ...저런 말을 계속 들을건가? 누가 봐도 거짓말이잖아 "
" 알리사 "
" 모두 진실입니다. 맥박과 말하는 모습에서 조금의 동요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그 말에 화랑이 알리사라 불린 여성을 바라보았다. 대화가 필요할 것 같다며 화랑을 아까 그가 있던 320호로 안내한 은발의 남자는 리 차오랑, 자신을 부축하던 분홍빛 머리칼의 여성은 알리사 보스코노비치,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남자를 막은 남자는 라스 알렉산데르손,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남자는 카자마 진이라고 했다. 이름이 다들 제각각이네. 다국적 그룹이야, 뭐야. 그렇게 생각한 화랑이 작게 한숨을 쉬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뭐, 말하기 전부터 다들 날 아는 눈치였으니 소개도 새삼스럽다고 생각했지만. 다만 자신을 의대생이라고 밝혔을 때 그 반응에... 대체 이 세계의 나는 뭐하고 다녔던거야? 라고 생각해버렸다. 이 세계로 떨어진 후 그 동안의 일에 대해 설명하던 사이 잠시 밖으로 나갔던 알리사가 무언가를 들고 다시 들어와 화랑에게 내밀었다. 이 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화랑을 위해 알리사가 간단한 상황이 적힌 설명서 같은 것을 들고 온 것이었다. 고... 마워. 주춤주춤, 손을 내밀어 종이를 받아든 화랑이 눈으로만 몇줄 읽는 것 같더니 이내 인상을 찌푸리다 오른쪽 눈만 감고 다시 글씨를 읽어내려갔다.
" ...어디 아픈가? 왜 오른쪽 눈만 감고 있는거지? "
" ...사고를 당했거든 "
" 사고? "
" 분쟁 지역에 봉사를 나갔다가 수류탄 폭발에 휘말려서 "
그 말에 모두가 움찔, 몸을 떤 것을 눈치채지 못한 화랑이 계속 오른쪽 눈만 감은 체 글을 읽어내려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뭐, 불행 중 다행인지 얼굴에 상처 같은 건 남지 않았지만 눈에 미세 파편이 박혀 버려서...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왼쪽과 오른쪽의 시야가 서로 맞지 않거든. 평상 시 일상 생활에는 그다지 문제가 없어서 상관없지만 이런 작은 글씨나 의료 활동을 할때는 불편하고 위험하니까 안경을 착용하는데... 알다시피 어떤 괴물 자식이 날 억지로 끌고와서 말이야. 그 과정에서 안경이 든 내 가방도 놓고 왔으니까. 힐끔, 잠시 종이에서 시선을 뗀 화랑의 왼쪽 눈이 문 옆의 벽에 기대 팔짱을 끼고 있던 진에게로 향했다. 제 눈빛에 눈을 가늘게 뜬 진이 칫, 혀를 차다 이내 아예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화랑이 하아, 한숨을 쉬고는 다 읽은 종이를 제 옆에 내려놓았다.
" ...하나 묻고 싶군 "
" 뭐야? "
" 자네는... 이제 어쩌고 싶지? "
" 질문의 의미는? "
" 말 그대로네. 자네가 우리가 알던 그 화랑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계속 이곳에 있어도 좋아 "
" ...그래, 좋아. 여하튼 이곳에서 나는 이방인이니까. 받을 수 있는 호의라면 당연히 다 받을거야. 다만 "
" 다만? "
" 날 죽이려고 했던 그 자식은 절대로 내 옆에 오지 않게 해줘.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으니까 "
" ...알았네 "
씁쓸한 표정으로 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리를 바라본 화랑이 작게 한숨을 쉬며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화랑의 비도프니르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화랑이 하는 일은 딱히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그 넓디 넓은 격납고에서 뛰며 몸을 움직였다. 선생님한테 가르침을 받은 후 매일 하는 아침 루틴 중 하나였다. 그러고나면 방으로 돌아가 알리사가 가져다주는 식사를 먹으며 알리사와 간단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 후에는 시간이 남을 때 마다 그 넓디 넓은 비도프니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가끔 마주치는 병사들의 상처를 봐주거나 하는 식으로 생활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는데도 여념이 없었지만.
" 음, 알리사? 일은? "
" 다 끝났습니다. 화랑씨는 어디 가시는 건가요? "
" 이거. 의료 관련 책인데 다 읽어서 돌려주러 가는 길이었어 "
알리사가 복도를 걸어가는 화랑을 발견하고는 부스터를 작동시켜 빠르게 화랑의 곁으로 날아왔다. 처음에 그런 알리사를 봤을 땐 소리를 지를 정도로 놀랐던 화랑은 이제 익숙해진 것인지 놀라지 않고 구동 소리를 알아듣고 먼저 고개를 돌려 반길 정도가 되었다. 화랑의 손에 든 서적을 확인한 일리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랑과 나란히 서 그와 발을 맞추며 걷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의료 서적은 의료 기계와 현대 의학에 대한 내용으로 아무래도 자신의 세계에는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인 마이크로 의료 로봇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를 끈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던 중 문득 알리사를 바라본 화랑이 걸음을 멈추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어왔다.
" 저기 부탁이 있는데, 알리사 "
" 네, 뭔가요. 화랑씨 "
" 음... 미안한데 손 좀 잡아도 될까? "
" 손 말입니까? "
" 응, 알리사는... 안드로이드라고 했으니까 조금... 궁금해서. 혹시 실례가 된다면... "
" 아뇨, 괜찮습니다 "
알리사가 먼저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잠시 바라본 화랑이 조심스럽게 손을 붙잡고는 천천히 이곳저곳을 만지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부터 손바닥, 손등을 꾹꾹 눌러보던 화랑이 질문도 툭툭 던지기 시작했다. 감각은 있어? 있습니다. 그럼... 통증은? 있습니다. 그럼... 감정은? 감정... 말입니까? 시원하게 대답을 하던 알리사가 처음으로 되묻자 화랑이 손에서 시선을 떼며 알리사를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알리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 어떤... 감정을 말하는 겁니까? "
" 어떤 특정한 감정을 말하는게 아니야. 그냥 말 그대로 감정 "
" 감정... 음... 저는... 모두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씨도, 리씨도, 라스도. 그 외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다치지 않고 평화로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화랑씨도요 "
" ...그래, 그럼 넌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네 "
" 인간... 인가요? "
" 그래, 여기서 지내다보니 몇몇 소수를 제외하고는 다들 너를 로봇 취급을 하는 것 같더라고 "
" 네, 저는 보스코노비치 박사님께서 만드신 안드로이드니까요 "
" 그렇다고 해도... 이미 인간처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점에서 넌 더 이상 로봇 같은게 아니야. 누군가를 걱정하고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지 "
" ...인간 "
" 응, 인간이면서 다른 사람의 감정 같은 걸 무시하는 인간들도 많잖아.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보다 누군가를 걱정하고 생각할 줄 아는 네가 더... 인간 같네 "
그 말을 끝으로 알리사의 손을 놓은 화랑이 가자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잠시 그 뒷모습을 보던 알리사도 다시 그 등을 쫓아 걸었다. 제가 알던 그 화랑씨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화랑씨는 화랑씨네요. 알리사는 떠올렸다. 오퍼레이션 라이트닝 작전 때 화랑을 처음 만났던 그녀는 자신을 본 그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대화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진을 뉴욕에서 구해줬다며? 고마워. 뭐? 그렇게 명령코드가 입력되었으니 당연한 거라고?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그건 이미 과거의 이야기잖아. 명령 코드는 진즉에 제거되었을테니 진을 구한 건 네 의지도 어느 정도 포함된 거 아냐? 누군가를 생각하고 스스로 그렇게 하기로 생각하고 행동한 거부터 넌 이미 로봇이 아니라 인간인거야. 그러니까 누가 널 보고 로봇 취급하거나 그러면 한대 때리거나 라스한테라도 일러버려. 그 인간 널 꽤나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응? 전기톱? 아니아니, 그거 일반인한테 막 휘두르면 큰일나니까 그건 자제하자고. 저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다 전기톱 이야기에 당황하는 그를 떠올린 알리사가 살며시 미소를 지은 순간. 화랑의 발이 멈췄다. 화랑씨?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앞을 바라본 그녀의 눈에 익숙한 누군가가 보였다. 진이었다.
" 진씨 "
" 알리사, 미안하지만 자리 좀 비켜줘 "
" 하지만 진씨 "
" 난 너랑 하고 싶은 이야기 같은 거 없는데 "
" ...난 있어 "
" 난 없어. 무엇보다 날 해치려고 했던 인간과 마주할 정도로 난 담이 크지 않거든 "
열심히 피해다녔는데 진짜. 화랑이 작게 투덜거렸다. 그런 화랑의 반응에 입술을 깨문 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알리사의 시야 내라면 괜찮을까. 조금은 누그러진 말투로 묻는 진에 힐끔 그를 바라본 화랑이 다시 작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한번 죽이려고 했던 인간과 마주하는 건 분명 두려운 일이었지만 그때와 달리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으니 괜찮을거다, 그리고 피해봤자 이런 불편한 상황이 계속 이어질테니 이럴 바에는 이야기를 한번 들어주고 확 끊어버리는게 낫겠다는 게 화랑의 생각이었다. 화랑이 진의 제안을 받아들자 잠시 머뭇거리던 알리사가 천천히 뒤로 몇발짝 물러섰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녀의 시야 내에서 대화를 하겠다는 게 화랑의 조건이었으니까. 진이 힐끔, 둘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알리사를 바라보다 다시 화랑을 바라보았다. 화랑의 얼굴에는 약간의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호기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 자, 그럼 말해봐. 뭘 말하고 싶어? "
" ...너는 돌아가고 싶냐? "
" ...당연한 거 아냐? 이곳은 내 세계가 아니야. 그러니 당연히 돌아가야지 "
" 돌아가면... 널 반겨 줄 사람이 있나? "
" ...없어. 선생님도 안계시고 난 고아니까 가족 같은 것도 없어 "
" 근데 왜 돌아가려고 하지? 적어도 여긴 널 보호해 줄 사람들이 많은데... "
" 그건 내가 아니잖아? "
" 뭐? "
" 너희들이 보호해 주려는 사람. 그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의 기억 속에 있는 죽었다던 나겠지 "
화랑이 살짝 눈을 내리깔며 생각했다. 이 세계의 나는 죽었다. 사람들을 구하는 과정에서 G사의 병사들에게 공격을 받고 사람들을 지키다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모두가 나를 처음 봤을 때 그렇게 놀랐던 걸까. 하긴 그럴 수 밖에, 죽은 사람이 다시 나타났으니 당연히 놀랄 수 밖에 없을거다. 하지만... 내가 이 세계의 내가 아니라는 걸 알았음에도 그 눈에 비춰지는 건... 오늘 몇번째 인지 모를 한숨을 쉰 화랑이 다시 진과 시선을 맞췄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에 비춰지는 건 여전히 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화랑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확실하게 말해줄까. 나는 네가 알던 화랑이 아니야. 나는 널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반드시 돌아갈거야 "
" ...... "
" 그러니 너도 날 죽은 나로 투영해서 보지마. 그거 굉장한 실례니까. 그러니까... "
" ...안돼 "
" 응? "
" 넌... 절대로 못돌아가 "
" 뭐...? "
넌... 내 곁에 있어야 해, 화랑. 윽, 진이 손을 뻗어 화랑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깨를 부셔져라 쥐는 그 아귀 힘에 화랑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화랑과 얼굴을 마주하며 무서울 정도로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내가 알던 화랑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화랑이 아닌 것도 아니지. 넌 무서울 정도로 그 녀석과 닮아 있어. 겉모습 뿐만 아니라 속까지. 그러니... 절대로 놔주지 않을거야. 화랑, 너는... 내 옆에 있어야 해. 그래, 내가 지킬거다. 네 옆에서 반드시. 그 속삭임을 들으며 인상을 찌푸린 화랑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친 새끼. 날 죽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는 옆에 있으라고? 진짜 미친 거 아냐...? 입술을 깨문 화랑이 온 힘을 끌어내 제 어깨를 붙잡은 진의 손을 뿌리쳤다. 화랑! 제 손을 뿌리치는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한 진이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붙잡으려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숙주. 진은 제 마음 속에서 직접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움찔, 손을 멈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멀리서 둘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알리사가 순식간에 부스터를 켜고 날아와 화랑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를 보호하듯 앞을 가로막고 전투 자세를 취하는 알리사를 보던 진의 눈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뒤에서 놀란 화랑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붉은 눈이 화랑에게 향했다.
" ...당장 그를 데리고 가라 "
" 당신은... "
" 난 이 어리석은 숙주랑 대화를 해야겠으니까 "
숙주. 지금 진의 몸을 차지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알리사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랑을 일단 지금 그가 머무는 곳으로 안내하기로 했다. 화랑씨, 이 쪽으로. 그 말에 알리사를 따라가려던 화랑이 멈칫, 하더니 고개를 돌려 진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완전히 몸을 돌려 알리사의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 그런 화랑의 뒷모습을 보던 진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어리석군, 숙주 "
[ 데빌... 방해하지마! ]
" 인정해라, 그는 우리가 알던 그가 아니야 "
[ 그건 상관없어! 화랑이... 화랑이 살아 움직이고 있어. 그거면 충분해! ]
" 충분하지 않아. 우리가 알던 화랑은 이미 죽었어. 그런 와중에 가짜를 끼고 있으면 좀 만족스러울 것 같나? "
[ 네가 뭘 안다고...! ]
" 시끄럽다, 당분간 머리 좀 식히는게 좋겠군 "
[ 데빌! ]
저를 부르는 소리를 무시한 체 데빌이 진을 제 내면 안에 가두었다. 본래 주도권은 육체의 주인인 진에게 있지만 현재 진의 심신이 모두 불안정하기 때문일까, 주도권은 진이 아닌 데빌에게 온 상태였다. 제 내면 안에서 저를 부르다 끝내 화랑의 이름을 읊조리는 진을 느끼던 데빌이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작게 누군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이름은 진이 아닌 방금 전 자신과 눈이 마주친 화랑의 이름이었다.
3. 더 이상 진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는 화랑과 반대로 화랑에게 불이 붙어버린 진, 그리고 이제와서 관심 갈구하지 마라, 추하다. 라며 시비거는 스티브로 진화랑스팁. 평화로운 철권 세계관.
나, 더 이상 너한테 집착 안할거니까. 그 동안 내가 계속 싸워달라고 해서 너도 귀찮았겠지. 미안했다. 철권 대회 시즌 7까지 진의 뒤를 쫓던 화랑은 시즌 8이 되어서야 자신이 진에게 너무 집착을 하고 있고 그로 인해 시야가 좁았음을 인정했다. 특히나 시즌 7이 종료된 후 시즌 8이 되기 전 진행했던 세계 대회 아시아 예선전에서 진을 만난 화랑은 여전히 제 아버지인 카즈야의 뒤를 쫓으며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진에 이제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며 혼신을 다해 진을 상대하는 대신 여전히 제 안의 데빌의 힘을 인정하지 않는 진에게 충고를 남기며 시원하게 예선전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진은 그 충고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데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마침내 카즈야를 쓰러트리고 세계 대회 우승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세계 대회 우승 후 화랑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충고를 곱씹던 진은 화랑과 만나 이번에는 그와 진심으로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아예 먼저 화랑을 찾아가기로 했다. 확실히... 의외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진과의 싸움을 갈구한 건 항상 화랑이었으니까. 하지만 화랑을 찾아간 진은 거기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 더 이상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을거고 계속 싸워달라고, 귀찮게 해서 미안했다는 화랑의 사과였다.
화랑은 몰랐지만 진은 거기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어째서? 화, 화랑... 왜...?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리고 저를 바라보는 진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화랑이 이만 가보라며 싸우자는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진에게 안녕을 말하며 그를 도장 밖으로 안내할 때 까지도 진은 쉽사리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화랑이 더 이상 저를 반드시 이겨야하는 특별한 상대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대하듯 평범한 상대로 보기 시작했다는 걸. 어째서일까, 제가... 화랑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탓일까...? 아니면... 뭘까. 진은 오래동안 고민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진은 다짐했다. 화랑이 자신을 향한 불을 꺼트렸다면 이번엔 자신이... 화랑에게 불을 붙이겠다고.
" 화랑, 이번엔 나와 싸우자 "
" 하아, 귀찮네. 그게 뭐 내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잖아? 우리 둘의 대진이 붙어야 되는거잖아? "
" ...굳이 대회가 아니여도 좋아. 대련도 좋으니까... "
" 너 말이야, 갑자기 왜 이래? 옛날엔 내가 싸우자고 해도 그렇게 피해다더니 "
" ...화랑 "
" 여하튼 나중에 대회에서 운 좋으면 보자고. 지금은 스티브랑 만나기로 해서 말이야 "
" ...스티브? "
" 그래, 그럼 먼저 간다 "
시즌 8 시작 전 개최식에서 만난 진은 화랑의 입에서 나온 낯선 이름에 인상을 찌푸렸다. 화랑이 입에 담은 이름은 스티브 폭스. 영국 출신으로 복싱 미들급 세계 챔피언인 천재 복서였다. 화랑의 입에서 제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게 이렇게 불쾌한 일이라는 걸 그제서야 깨달은 진이 인사를 남기고 제 시야에서 사라지는 화랑의 뒤를 쫓았다. 미련 없이 시원하게 저에게서 떨어진 화랑이 금발의 스티브와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몇마디 나누다 이내 함께 자리를 옮기는 걸 끝까지 지켜본 진은 순간 힐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던 스티브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고는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누가봐도 저를 도발하는 모습. 화랑, 진이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 날 이후 진은 화랑이 보이기만 하면 그에게 다가가 싸우자며 대련을 요구했다. 물론 화랑도 처음엔 자신이 아닌 진이 먼저 자신과의 대련을 요구하니 몇번 정도 싸워줬다.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겠다,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진과의 싸움은 자신의 피를 끓게 만드는 희열을 느끼게 해줬으니까. 하지만 마주칠 때 마다 저와의 싸움을 요구하는 진에 화랑도 서서히... 질리기 시작했다. 이 자식... 내가 미안하다고 분명 사과까지 했는데 자기를 귀찮게 했다고 보복으로 날 귀찮게 하는 건가...? 뭐지...?
" 화랑, 나랑... "
" 야, 잠깐. 너 지금 이거 보복하는거야? "
" 보복? "
" 내가 널 그 동안 귀찮게 했다고 너도 날 귀찮게 하는거야?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했잖아? "
" ...그런게 아니야, 화랑 "
" 그럼 뭔데? 너... 날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거야? "
결국 참다참다 못한 화랑이 아무도 없는 경기장 후문 출구로 향하는 계단에까지 진을 끌고 와서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체 자신을 바라보는 화랑의 질문에 잠시 말이 없던 진이 가만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너를... 어떻게 하고 싶냐고....? 나는... 나는 네가... 나만을 바라봤으면 좋겠어. 그때처럼... 너의 눈에 오직 나만이 있고... 너의 투쟁심이 나에게만 향했으면... 좋겠어. 이걸... 어떻게 표현하면 네가 나를... 그때처럼 봐줄까? 잠시 고민하던 진의 입이 열렸다.
" 나는... 너를 부수고 싶은 것 같아 "
" 뭐? "
" 내 밑에서... 바닥을 기는 꼴을 봐야... "
" ...이게 미쳤나, 지금! "
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들은 화랑이 잠시 벙찐 표정을 짓더니 이내 버럭 성질을 내며 진의 멱살을 붙잡았다. 저를 보는 분노에 찬 눈빛에서 온전히 저를 향한 시선을 느낀 진은 속으로 환희했다. 그래, 그 눈이야. 화랑, 나는 네가 온전히 나만을 바라보면 좋겠어...! 다른 사람도 아닌 오직 나를...! 그리고 그런 화랑을 더 자극하려 진이 입을 열려는 순간.
" 뭐야, 어디갔나 했더니만... 여기서 뭐하는거야? "
" 스티브! 진, 이 자식이 나한테 말하는게 아주...! "
" ...스티브 폭스 "
언제 온건지, 어떻게 알고 온건지 계단 난간에 기댄 체 둘을 바라보고 있는 스티브에 진은 인상을 찌푸렸고 화랑은 스티브를 보자마자 진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아까 발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마치 스티브에게 이르기라도 하듯이. 잠시 둘을 바라보고 있던 스티브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화랑의 옆에 섰다. 그리곤 화랑에게 어깨 동무를 하고는 태연하고 대수롭지 않게 툭, 말을 내뱉었다.
" 난 또 뭐라고. 그거 네가 평상시 나한테 하는 말이잖아 "
" 내가 언제 이랬는데? "
" 와, 이제와서 기억 안나는 척? 뻔뻔하네 "
" 야! "
" 아무 의미도 뜻도 없으니까 신경쓰지 말라는 말이야. 자, 그럼 나랑 몸이나 풀러 가자. 오늘 상대가 상대라고 나한테 몸풀기로 가볍게 대련하자고 했잖아? "
" 쳇... "
저에게 어깨 동무를 한 스티브에게 이끌려 화랑이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또 다시 멀어지기 시작하자 진이 다급히 그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힐끔, 그때처럼 고개를 돌려 진을 바라본 스티브가 이번엔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다. 명백하게 자신을 적대하는 스티브에 진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래, 스티브는 화랑을 사이에 두고 자신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있었다. 더 이상 화랑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그 뜻을 알아차린 진은 둘이 계단을 올라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계단의 난간을 붙잡았고 이내 계단의 난간이 진의 손아귀에서 으스러졌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는거지. 그 선전포고 받아주지, 스티브 폭스. 진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둘의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16강 전이 시작되는 날. 먼저 시합을 진행하고 멋지게 승리를 장식한 스티브가 화랑의 대기실을 지나가다 의자에 잠든 그를 발견하고는 조용히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화랑의 시합은 가장 마지막 차례였다. 그리고 마지막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화랑이 선택한 것은 아주 잠깐의 휴식이었다. 이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눈을 뜨는 순간 그의 집중력은 최고조로 올라갈거다. 잠시 그런 화랑을 보던 스티브가 제가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화랑에게 덮어주고는 이내 대기실을 나섰다. 마음 같아서는 깨어날 때 까지 옆에 붙어있고 싶었지만 승자 인터뷰가 남아 있는 탓에 그건 불가능했으니까. 이왕이면 내 승자 인터뷰 끝날 때까지 계속 자고 있으면 좋을텐데, 화랑. 스티브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불청객도 없으면 좋겠고.
하지만 스티브의 바램과 달리 그런 화랑의 잠든 모습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그래, 진이었다. 다음 시합을 위해 경기장으로 향하던 진의 눈에 스티브의 가운을 입고 잠든 화랑이 들어오자 멈칫, 걸음을 멈춘 진이 조용히 대기실로 들어왔다. 무감각한 눈으로 스티브의 가운을 덮고 잠이 든 화랑을 보던 진의 손이 덥썩 가운을 붙잡더니 그대로 벗겨내 바닥으로 내팽겨쳤다. 그리곤 제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화랑에게 덮어준 진이 저번보다 길어진 화랑의 머리카락의 끝을 매만지더니 가만히 그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추고는 그대로 대기실을 나섰다. 내가 이겨서 돌아올 때 까지 깨어나지 않기를, 라고 바라면서.
" ...얼씨구 "
승자 인터뷰를 마치고 온 스티브는 곧바로 화랑의 대기실로 향했고 눈 앞에 보인 광경에 저도 모르게 기가 막히다는 듯 탄성을 내지르며 가만히 진의 겉옷을 덮고 자고 있는 화랑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오늘 시합 일정에는 그 카자마 진도 있었다. 하아... 나지막히 분노가 서린 한숨을 내뱉은 스티브가 진의 겉옷을 덥썩 잡더니 그대로 들어 쓰레기통에 쳐박았다. 탁탁, 더러운 것을 만진 것 처럼 손을 턴 스티브가 바닥에 떨어진 제 가운을 가볍게 흔들어 먼지를 털어내고는 화랑에게 다시 덮어주고는 그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마치 그를 지키겠다는 듯이. 옆에 앉아 잠든 화랑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스티브가 손을 뻗어 화랑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스티브 폭스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철권 대회 시즌 4부터 참여한 스티브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건 다름 아닌 화랑이었다. 자신과 같은 나이의 발을 주로 사용하는 태권도를 쓰는 격투가. 대회에서 처음 만나 싸우게 된 후 스티브의 감상은 즐겁다 였다. 그건 화랑도 마찬가지였는지 무승부로 끝난 와중에 화랑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조금 더, 조금 더 싸워보자고. 직접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그리고 아우라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간만에 승패 따위 생각하지 않고 진심으로 격투를 즐긴 스티브는 계속해서 화랑과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화랑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화랑의 뒤를 쫓은 스티브의 눈에 오직 진만을 바라보며 그의 등을 쫓는 화랑이 보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화랑의 목표는 진이었고 그와 싸우기 위해서 계속해서 그를 쫓는 화랑을 지켜보며 스티브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왜 하필이면 저 녀석이야, 화랑...? 네가 아무리 저 녀석을 갈구해도 저 녀석은 널 바라보지도 않는데. 왜 그렇게... 쫓는거야? 그래, 마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화랑을 뒤쫓는 스티브, 진을 뒤쫓는 화랑. 화랑은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제가 진의 뒤를 쫓는 동안 자신의 뒤를 스티브가 쫓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 스티브의 감정은 철권 시즌 8 대회가 열리기 전 진행한 세계 대회 아시아 예선전에서 화랑이 혼신을 다해 진을 상대하는 대신 여전히 제 안의 데빌의 힘을 인정하지 않는 진에게 충고를 남기며 시원하게 예선전에서 탈락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 너, 진심 아니었지? "
" 세계 대회 본선 앞두고 몸도 안풀고 왜 다짜고짜 불렀나 했더니만... 이런 이야기나 하려고 불렀어? "
" 조금 실망인데. 난 너랑 싸우는 걸 기대했거든 "
" ...뭐... 그랬다면 미안 "
" 야, 화랑 "
제 말에 순순히 사과하는 화랑에게 조금 화가 난 스티브가 뭐라 한마디 더 하려 입을 연 순간, 그보다 더 먼저 화랑이 말을 내뱉었다. 나 이제 진한테 그만 집착하려고. 뭐? 귀 먹었냐~ 이제 진한테 그만 집착할거야. 더 이상 싸우자고 귀찮게도 안할거고. 갑자기... 왜? 그냥... 깨달은 것도 있고... 이제 언제까지고 그 자식만 바라볼 수는 없잖냐. 싸울 상대가 그 자식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싸움을 즐기기로 했어. 그러니까 이번 예선전은 내가 진에게 건네는 마지막 전별이야. 그 말을 들은 스티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환희했다. 드디어 화랑의 입에서 진을 포기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화랑이 그럴싸하게 말을 하긴 했지만 스티브는 깨달았다. 진을 기다리다 지친 화랑이 결국 그를 포기했고 오래동안 진의 뒤를 쫓았던 화랑이 저를 더 이상 봐주지 않는 진에 결국 지쳐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멈춰버린 화랑을 향해 자신은 계속해서 달려왔고 결국 그의 등에게 닿았다는 것을. 그래, 스티브는 겨우 닿은 화랑을 다시 그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
" ...... "
" ...... "
얼마나 잠든 화랑의 옆을 지켰을까, 스티브는 저벅저벅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이내 대기실 입구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진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진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쓰레기통에 쳐박힌 제 겉옷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쓰레기통에서 겉옷을 꺼내고 천천히 잠든 화랑의 앞에 섰다. 잠시 화랑을 바라보던 진의 시선이 다시 스티브에게 향했다. 서로 말이 없었지만 화랑을 사이에 두고 엄청난 기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에게서 화랑을 강탈하려는 인간.
지금까지 외면하더니 이제와서 그를 신경쓰는 척 하는 가식적인 인간.
서로가 서로를 향해 절대로 곱지 않은 시선과 감정이 섞인 눈빛을 교환하던 두 사람이 결국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동시에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똑똑, 누군가가 화랑의 대기실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잔뜩 예민해진 둘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멈칫, 굳어버렸다. 그래, 화랑의 대기실의 문을 두드린 건 다름 아닌... 그의 사범인 백두산이었다. 백두산의 시선이 진과 스티브에게 향하다 이내 화랑에게 향했다. 단번에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차린 백두산이 소리없는 한숨을 쉬고는 이내 엄지 손가락으로 대기실 밖을 가르켰다. 당장 대기실을 나가라는 축객령에 윽, 소리를 낸 두 사람 중 먼저 빠져 나간 건 진이었다. 백두산에게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진이 나가고 스티브도 화랑에게 덮어준 제 가운을 걷어 두르고는 백두산에게 말없이 인사를 건네며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 물론 두 사람이 있을 때도 조용하긴 했지만 - 대기실에 백두산이 하아, 이번엔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고는 가만히 제 제자를 바라보았다.
" 정말이지... 귀찮은 녀석들에게 걸렸구나 "
그 두 사람이 제 제자를 향한 감정에 승부욕과 호승심 외에 다른 감정도 있다는 걸 눈치 챈 백두산이 가만히 무언가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흔들고는 제 겉옷을 벗어 화랑에게 덮어주고 그의 옆에 앉았다. 조금 철이 들어 더 이상 화랑으로 인해 속 썪을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골머리를 썪게 되었다고 속으로 중얼거린 백두산이 손을 뻗어 제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다 생각했다. 오늘의 승부와 관계없이 돌아가면 팔굽혀 펴기 1000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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