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리프 이주 0P 사건

Míriel

섭정가 | 221023 포스타입

rhindon by 댜

파라미르 ts 설정

꿈 속에서 그는 늘 멈춰선 쪽이었다. 산맥을 넘어 범람하고 쇄도하는 것은 언제나 새하얀 물결이었고 그는 무력해서. 마침내 대양이 쏟아져들 때마저도 그가 선 대지는 요동칠지언정 굳건하게만 느껴져서, 그는 단 한 번도 몰락을 실감한 적은 없었다. 단지 그는 다가오는 파도를 보았고, 알았다.

끝은 심장이 멎을 만큼 가까웠다.


그는 깊은 물 속에서 끌려나온 사람처럼 거친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내뻗은 오른손은 이젠 본능이 되어 버린 습관에 따라 베개 아래를—둘둘 만 망토가 아닌 것을 보니 그는 야영지에 있지는 않았고—더듬어 단검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동시에 왼손은 불청객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반항은 없었다—그게 많은 것을 말해 주지 않을지언정 적어도 그는 자신이 포로로 잡힌 것은 아니리라 짐작했다.

그리고 그는 잠에서 깨어났고, 일렁이는 횃불을 등진 얼굴을 보았다.

“마블룽.”

그는 머쓱함을 감추며 불렀다. 항복의 표시로 양손바닥을 펴 보였던 마블룽은 느릿한 움직임으로 목젖에 들이대어진 칼날을 밀어냈다. 그는 순순히 칼을 거두어들였다. 하지만 멱살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이 밤중에 웬일이지?”

“비명을 지르셨습니다, 대장님. 다른 이들이 불안해하고 있어서요.”

“그게 날 깨울…….”

날 깨울 합당한 이유인가, 그는 물으려 했었고, 그와 마블룽 둘 다 그가 진정 추궁하는 바는 따로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짧게 숨을 내쉬며 긴장을 흘려 보내려 했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마블룽은 체중을 뒤로 실으며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자 침상에 반쯤 누운 대장과는 그럭저럭 눈높이가 맞게 되었다.

이실리엔의 유격대원들에게는 으레 그렇듯 몇 가지 미신 같은 불문율이 있었다. 실수로 화살을 밟아 부러뜨린 사람은 임무를 중단하고 복귀할 것, 농담으로라도 만웨의 축복은 기원하지 말 것, 가능하다면 여럿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는 먹기 전 서녘에 경의를 표할 것. 그리고 헨네스 안눈의 은신처에 한정된 것으로는, 대장의 처소에 함부로 들어서지 말 것. 대장님이 누구 하나 죽어나가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신대도 말이야, 라고, 연차가 쌓인 대원들은 경고하고는 했다. 어쨌든 그는 작전 도중에 악몽을 꿔 근방의 적군을 죄다 불러오지는 않았다. 조금 더 대범한 이들이, 그가 쥐 죽은 듯이 잠드는 것이야말로 그의 잠이 편치 않다는 증거라고 말할 정도로.

그러나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있었고, 그런데도……. 내가 정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면, 왜 넬라스나 이브리니엘을 들여보내지 않았나, 눈치를 주려 했던 그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이브리니엘은 며칠 휴가를 얻어 도시로 돌아갔다. 넬라스는—넬라스는. 그는 단검을 갈무리했다.

“됐네.”

“거북하시다면 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시키죠.”

마블룽은 평소답지 않게 직설적인 투로 말했다. 아직 입 안 가득 들어찬 소금기를 곱씹는 처지에서는 그 투박함이 뜻밖으로 반가웠다. 비슷한 결로나마 보답하고 싶을 정도로.

“목에 칼 들어오는 게 괜찮다면야 누가 오든 상관없어.”

마블룽은 눈살을 찌푸려 가며 웃었다.

“당번이라도 정해야겠는걸요.”

“맙소사, 내가 나쁜 꿈을 꾸라고 저주하는 것처럼 들리는군. 용건은 그게 다였나?”

어차피 그는 다시 잠들 수 없을 터였다. 그의 대원들은 지난 몇 년간 어느새 그를 닮아버려,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하는 동료에게 모르는 척 손을 내미는 데 능숙해졌다. 마블룽은 품 안에서 노끈으로 묶인 편지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그는 마블룽이 입 밖에 내지 않는 말을 들었다. 남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실 핑계가 필요하시지요?

“제 용건이야 있겠습니까? 자정의 전령이 미나스 티리스로부터 가져온 용건은 몰라도요.”

그는 몸을 마저 일으켰다. 동굴 바닥은 차가웠겠으나 최근 그와 부하들은 장화끈이나 겨우 느슨히 한 채 잠자리에 드는 습관을 얻었고, 덕분에 그는 곧바로 두 걸음을 휘청거려 걸상에 털썩 주저앉을 수 있었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마블룽에게 손을 내밀었다. 위치가 바뀌니 비로소 횃불은 마블룽의 얼굴을 제대로 비추었다.

그는 이 얼굴이 파도에 휩쓸리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리 주게, 그럼. 내 주군이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또 무엇을 요하시나 살펴봐야지.”


여덟 살 때, 그는 고귀한 신분의 어린아이들을 위한 역사책에서 처음으로 옛 왕국의 수도를 보았다. 흰 아치가 지탱하는 다리는 물길을 가로지르고 솟아오른 성벽은 푸르고 붉은 무늬로 장식되었는데, 그 가운데 왕성의 지붕만은 진짜 금을 섞은 물감으로 칠한 것이라 장서관의 희끄무레한 빛 아래서도 눈에 띄게 반짝였다.

“손 대지는 마세요.”

그날 강습을 맡았던 궁정 학자는 매가리 없는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하기야 보로미르는 역사 수업에 워낙 관심이 없어 다섯 살 어린 누이동생에게 진도를 따라잡힌 참이었고, 그 누이동생이야 학문은 영영 취미로나 가질 여자아이였으니 학자가 따분해할 만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보로미르는 처음 탄성을 내뱉고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도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오라버니를 잠깐 흘겨보았다가 삽화로 눈을 돌렸다.

처음 보는 도시가 이상하게도 낯이 익다면, 내게도 서녘나라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런 합리적인 설명으로는 기시감이 떨쳐지지 않았다. 학자의 주의를 염두에 둔 그는 손끝이 종이에 닿지 않게끔 하려 애쓰며 허공을 쓸었다. 역시 달랐다. 미나스 티리스에 나무라고는 치유의 집 정원에 돋은 것들뿐이었는데, 금빛 아르메넬로스 곳곳에는 상록수 같은 푸른 덩어리들이 있었고, 또 미나스 티리스의 일곱 원 같은 (그는 올바른 단어를 기억해 내려 골몰해야 했다) 수비 체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림처럼 물가에 놓인 외삼촌의 도시도 최소한 해적들은 경계해야 했는데.

동시에 아르메넬로스 또한 배의 용골 같은 거대한 각루가 가로지르는 도시였다. 미나스 티리스의 각루는 본래 산맥의 일부였던 바위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그림 속 아르메넬로스의 각루는 산과는 어긋나 솟아 있었으며…….

“일부러 지은 거였겠죠?”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학자가 되묻자 그는 급격히 자신감을 잃었다.

“각루 말이에요. 흰 나무의 정원에서부터 뻗어나온……. 그리고, 거기서부터 물이 흘러서 각루 끝으로 떨어지지 않았나요? 거대한 폭포처럼……!”

“어린 숙녀께서는 상상력이 풍부하시군요.”

더 말을 이어나갈 틈은 없었다. 보로미르와 그가 충분히 그림을 감상했다고 판단한 학자는 책장을 넘겨 버렸고, 보로미르더러 빼곡하게 이어지는 글자를 소리 내어 읽도록 시킨 다음 아이들로부터는 완전히 관심을 거두었다. 그가 위안 삼을 것이라고는 옆구리를 쿡 찌르는 보로미르의 팔꿈치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정말 봤는걸, 그는 생각했다. 미나스 티리스는 아니었어, 확실해. 이곳의 흰 나무는 만개해 꽃잎을 흩날리지 않으니까.


“아버지?”

때는 늦은 저녁이었고 그는 이실리엔으로 복귀하기 전 잠시나마 기력을 추스르려던 참이었다. 전시를 대비해 길이 잘 닦여 있다고는 해도, 해가 뜨기 전 가야 할 길은 멀지 않다고는 해도, 어둠 속에서 말을 달리는 것은 안전하다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시간이 허락할 때면 이따금 궁정 앞 분수대에 멈춰 백색성수를 바라보고는 했다. 달이 밝은 밤이라면 성수는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불안을 가라앉히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운이 좋지 않아 그는 분수의 물소리에나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믐이었고, 며칠 전의 전투 도중 접질린 발목은 아직 쿡쿡 쑤셨고, 섭정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회의 후 그가 아버지를 붙잡으려 하자 아버지가 먼저 일이 있다며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아버지의 행동은 언제나 난해했지만 최근에는 더더욱 그랬다. 데네소르가 딸을 외면하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곤도르의 섭정이 자신의 대장 중 하나를 쳐내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그 섭정이 이런 시각에 궁정의 정원을 배회하는 일 또한.

“아버지—데네소르 공!”

진짜 신하라면 잠자코 자리를 비켜드리는 것이 예의였겠지, 그래도 저 사람은 내 아버지야. 정원을 훑어보아도 시종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궁정의 경비대원들은 ‘섭정의 허락 없이 정해진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을 유난히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들이었고. 그는 별수 없이 걸음을 재촉해 데네소르 곁으로 다가갔다.

“어쩐 일이세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

“나무가 말랐구나.”

그는 아버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보일지는 뻔히 알고 있었다. 곤도르의 백색성수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한 번도 생기를 보인 적 없었으니까.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예, 아버지.”

그러자 데네소르는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그는 순간적으로 뒷걸음질칠 뻔했다. 자신은 웬만한 병사들 못지 않게 키가 컸지만, 그 키를 물려준 것은 데네소르였다. 게다가 아버지의 손아귀에 실린 힘은 자식을 붙드는 것보다는 검 손잡이를 그러쥐는 데 가까웠다.

“꽃잎이 비처럼 내리는 것을 보았지.”

그 말을 듣자마자 연상되는 바가 있어, 저도 모르게 그는 데네소르와 눈을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도 데네소르의 두 눈은 그 너머에 또다른 광원이 깃든 것처럼 번뜩였다.

“도시의 모든 거리와 골목에 흰 꽃잎이 날리는 것을 보았어.”

“무슨 소리신지 모르겠습니다. 시종을 부를까요?”

애써 침착하려니 도리어 말끝이 떨렸다. 데네소르는 짧게 혀를 차더니 갑작스레 언성을 높였다.

“너도 보았잖느냐!”

이상하게 굴지 마세요, 그는 맞받아 외치고 싶었다. 이러지 마세요, 무섭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런 불평을 할 권리는 활을 잡을 자격과 맞바꾼 지 오래였다. 대신 그는 팔을 틀어 아버지의 위팔에 양손을 올렸다. 안기는 것도, 밀어내는 것도 아닌 어색한 자세였다. 이젠 정말로 백색성수를 둘러싼 경비대원들이 입이 무거운 자들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 뭐. 그의 유격대원들이 그에게 신실하듯이 아버지의 사람들 역시 아버지에게 충성하겠지.

“무얼 봤단 겁니까, 저는……!”

“네가 그걸 들여다보도록 허락해서는 안 되었다. 내가 미쳤다 할 작정이냐, 미리엘!”

저는 대양이 선조들의 땅을 덮치는 것밖에 보지 못했습니다—잠깐만,미리엘?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지는 한편 오히려 선명하게 굳어가는 것들도 있었다. 밀어닥치는 직감과 통찰을 분별해 내기에 그는 아직 미숙했고, 앞으로 몇 년은 이 밤을 곱씹게 되리라 알면서도 그는 이미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았다. 그는 아버지를 다그쳐 몰아세울 수도 있었고 모르는 척 위안을 내밀 수도 있었다. 어쨌든 연민이 앞섰다. 데네소르가 그 점을 얼마나 못마땅해하든, 그는 연민을 앞세우는 사람이었다.

“저는, 전 백색성수가 왕의 안뜰에서 꽃 피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락에 의한 거짓말이 입에 썼다. 그는 꿋꿋이 되풀이했다. 통하지 않을 것이 뻔한데도, 자신이 가진 모든 설득의 힘을 쏟아부어서.

“흰 나무에 꽃이 만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본 건 그뿐입니다, 아버지.”

그리고 기적적으로 데네소르는 잦아들었다. 문득 품에 실리는 갑옷과 인간의 무게에 그는 잠시 비틀거렸다가, 아버지를 꽉 끌어안았다.


그는 이실리엔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의 일은 다시 입에 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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