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리프 이주 0P 사건

l’éternité / 이어지는 2차대전 AU

곤돌린 | 210601 / 210620 포스타입

rhindon by 댜

그는 언젠가 충고 아닌 충고를 들은 적 있었다. 굽이치는 단발이 보기 좋았던 런던의 어느 소녀에게서,

“군인에게 마음 주어선 안 돼요, 알죠?”

라고.

침침한 조명 속에서 중위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무대 위에 뛰어올랐다.

반쯤 그림자에 묻힌 입매가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던 것도 잠시였다. 잿빛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내리깔리는 것을 지켜보며 글로르핀델은 테이블에 엎드리듯 몸을 기댔다. 뺨을 스칠 듯 긴 속눈썹이 눈 밑으로 그늘을 드리우더니, 깊은 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풍경처럼 잘게 떨렸다. 곧이어 그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옷깃을 만지작거리고, 두어 번 목을 가다듬은 끝에 양손을 벌리며 이윽고 입을 열어—

Le ciel bleu sur nous peut s’effondrer
Et la terre peut bien s’écrouler,
Peu m’importe si tu m’aimes,
Je me fous du monde entier.

푸른 하늘이 우리 위로 무너지고
대지가 가라앉는다고 해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아무 상관 없어요
온 세상 어떤 것에도 신경 쓰이지 않아요

첫 소절이 끝나기도 전에 작은 바 안은 한 차례 술렁거렸다. 잔을 내려놓는 소음마저 잦아들었을 무렵 들리는 것이라고는 밴드의 연주와 티 없이 청아한 노랫소리뿐이었다. 글로르핀델은 아예 팔을 포갠 채 그 위로 턱을 얹었다. 가슴이 벅차면서도 어쩐지 마음만은 한없이 나른히 늘어지는 듯한 감흥이 나쁘지 않았다.

프랑스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른대도, 엑셀리온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데 질릴 리 없었다. 말을 할 때는 조금 허스키한 음색이 어느덧 안개가 걷히듯이 깊고 맑게 변해 갔다. 아직 남아있던 거리낌을 찬찬히 떨쳐내는 것처럼, 점점 더 힘이 실리는 노래가 못내 사랑스러울밖에…….

이마와 콧대에만 내려앉은 미광이 하얗게 번지며 어딘가 경건한 인상을 덧씌웠다. 성당의 제단 앞에 데려다 두어도 나무랄 데 없을 듯 침착하면서도 조심스레 부드러워지는 표정, 단정한 군복, 꼿꼿한 자세. 어두컴컴한 무대에서 홀로 선 남자는 조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렴풋이 빛나는 것만 같았다. 감겼던 눈이 반쯤 뜨이자 글로르핀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는데도, 어쩐지 자신의 관찰을 들키고 만 기분이었다.

Tant que l’amour inondera mes matins,
Tant que mon corps frémira sous tes mains,
Peu m’importent les problèmes,
Mon amour puisque tu m’aimes.

내 모든 아침이 사랑으로 가득차기만 한다면
내 몸이 당신 손 아래서 떨리고 있기만 한다면
어떤 문제도 내겐 중요하지 않아요
내 사랑, 당신이 나를 사랑하니까요

한동안 그대로 서서 노래하던 엑셀리온이 비로소 손을 움직이는 찰나 글로르핀델은 그의 맨손을, 곧은 손가락과 마른 손등을 연상했다. 왼손을 올려드는 동작은 군인답지 않게 유연한 것이었고 가슴에 얹은 오른손 아래로는 군복 재킷이 얕게 눌렸다. 허공을 쥔 듯 벌어진 왼손도, 명치보다 조금 위쪽, 제 목소리를 손끝으로 들으려는 듯 손바닥을 편 오른손도 짙은 그림자를 입어 유달리 선명했다.

오르골 속 자그마한 발레리나처럼, 호소하듯, 갈구하듯, 그러면서도 여전히 눈은 들지 않으며. 이유를 짐작하지 못한대도 아릿한 아쉬움으로 가슴이 저리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유려하게 이어지는 노래는 아무 말 없이 귀 기울여야만 할 정도로 매혹적이었으므로.

한 번 눈길을 두자 글로르핀델은 좀처럼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은 머리카락, 반듯한 이마와 투명하다시피 흰 눈꺼풀에서, 상기된 뺨과 부드럽게 풀린 입가에서, 힘들이는 기색도 없이 자유자재로 음을 높일 때마다 은밀한 농담이라도 건네는 듯 휘어지는 입꼬리에서. 고음을 부를 때면 숨이 막힐 만큼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엑셀리온은 어느 순간 왼손을 돌려 손등을 내보였다. 연인을 어루만지듯 섬세한 손짓이었다.

그리고 눈가가 접히도록 활짝 웃었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J’irais jusqu’au bout du monde, je me ferais teindre en blonde, si tu me le demandais—글로르핀델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너는 그렇게 웃는단 말이지, 전쟁과 죽음의 그늘을 걷어낸다면—J’irais décrocher la lune, j’irais voler la fortune, si tu me le demandais—당당하게, 햇살이 비쳐드는 유리창처럼—Je renierais ma patrie, je renierais mes amis, si tu me le demandais—온 세상이 발 아래 놓인 듯 찬란히. 그가 몸을 어떻게 다루는지 잊은 것마냥 뻣뻣이 허리를 펴 올려다보았을 때 엑셀리온은 심지어 결연하기까지 한 어조로 단언했다…….

On peut bien rire de moi,
Je ferais n’importe quoi
Si tu me le demandais.

저들이 날 비웃게 두세요
난 무엇이든 할 테니까요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글로르핀델은 근처의 동료들도, 바 안 가득한 낯선 이방인들도 잊고서 홀린 듯 엑셀리온만을 바라보았다. 누구라도 엑셀리온이 아니라 그에게로 눈을 돌린다면 그의 얼굴에서 속절없는 사랑을 읽어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누구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천운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불행한 일이 또 있을까.

Si un jour la vie t’arrache à moi,
Si tu meurs que tu sois loin de moi,
Peu m'importe si tu m’aimes
Car moi je mourrai aussi.

어느날 삶이 내게서 당신을 앗아간다면
당신이 죽는다면, 내게선 멀어지겠지만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아무 상관 없어요
나 역시 죽을 테니 말이에요

군인에게 마음 주어선 안 된다며 까르륵대던 소녀의 웃음소리가 노래 위로 겹쳐졌다. 글로르핀델은 저도 모르게 꾹 주먹을 눌러쥐었다. 군인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도 쉽게 죽어 버리고, 가을날 낙엽처럼 짓밟히고, 그러지 않더래도 마음이 상해 더는 원래의 그 사람으로 남아 있지 않으니까, 아니 애초에 너무도 쉽게 죽어 버리니까. 사랑하지 말라고, 그건 실수라고.

그런데도 엑셀리온은 아무렇지 않게 노래하고 있어서.

모두가 군인에게 마음을 주어선 안 된다 한들 그래 그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은회색 눈동자가 연철같이 반짝이는 순간을, 음률이 솟아오르고 맑은 곡조가 어둠을 가르고 어느 흑발의 중위가 마침내 찾아드는 봄처럼 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을. 강인하고 아름다운 얼굴에서 사랑, 사랑이 모든 근심과 걱정을 씻어내는 순간을. 누군가의 흔들림없는 애정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 것인지 이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었다. 누구도 엑셀리온이 그를 바라보듯 그를 보지 않았었기에.

이젠 기도하듯이 양손을 들어올린 엑셀리온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약간은 민망한 듯, 하지만 그렇대도 마음을 바꾸지는 않을 작정인 양 태연히 웃으며, 일말의 후회도 찾아볼 수 없는 눈부신 확신을 담아 노래했다. 그리고 그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은 글로르핀델 역시…… 어떤 불멸을, 믿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Nous aurons pour nous l’éternité,
Dans le bleu de toute l’immensité.
Dans le ciel, plus de problèmes.
Mon amour crois-tu qu’on s’aime?

드넖은 푸르름 속에서
우린 우리만의 영원을 가질 거예요
천상에서는 더는 어떤 문제도 없겠죠
내 사랑,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믿으시나요?

어느새 노래가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글로르핀델은 엑셀리온의 표정으로부터, 몸짓으로부터 알아챘다. 차근차근 열정을 접어 넣듯, 가슴 앞으로 손을 모으며 젊은 군인은 그제야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든 것처럼 어깨를 늘어뜨렸던 것이었다. 그마저도 평상시였다면 보이지 않았을 모습이었다.

스스로 부르는 노래에 취한 양 작게 휘청거린 엑셀리온은 아직 미소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글로르핀델은 어쩐지 이번 달에 배당된 아름다움을 이 하룻밤에 전부 보아 버린 것만 같은 느낌에 눈을 깜박거렸다. 삶에 허락된 아름다움을…….

다시, 사륵 내리덮인 눈꺼풀이 눈동자를 감추고, 속눈썹이 흰 뺨 위로 검은 선을 긋고, 부드럽게 말렸던 입꼬리가 원래대로 돌아갔을 때에도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존재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엿본 듯한 그 감상이, 노래나 음악이나 웃음이나 기쁨과는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임을 그가 이해한 것은 엑셀리온이 길게 끈 음을 마치고 가볍게 입을 다문 후였다. 그는 막연한 상실감에 시선을 떨구었다.

그러나 아직 엑셀리온은 나지막한 가락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채, 심장 위로 두 손을 포개고, 사라지지 않을 낙원을 그려내듯이. 두 번 다시 없을 흩어지는 노래로.

손등 위로 찬 눈물이 떨어졌을 때에야 글로르핀델은 자신이 울고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Dieu réunit ceux qui s’aiment.

신께선 연인들을 이어주실 거랍니다…….


1.

에갈모스 A.의 회고 중 발췌

중위가 사망한 이후 글로르핀델이 처음으로 꺼낸 말은 담배 한 대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먼저 내 어깨에 솜을 덧대고 붕대를 감던 갈도르와 눈을 마주쳤고, 그 다음으로는 당시 현장 지휘권을 갖고 있던 투오르 하도르슨을 바라보았다. 투오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야 나는 내 청력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담배를 달라고 했다. 권총이 아니라.

글로르핀델은 우리 중 누군가를 특정해 말한 것은 아니었다. 트럭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흙길을 덜컹거리며 달려가는 트럭에 실린 것은 나와 갈도르, 글로르핀델, 투오르, 그리고 다른 생존자 대여섯 명에 미처 불태우지 못한 군사 기밀 몇 상자뿐이었다. 잔해라기엔 초라했다. 내 어깨에선 금 간 계란이 흰자를 흘리는 것처럼 여전히 피가 새고 있었다. 나는 내 재킷 주머니에 턱짓했다.

“꺼내 가.”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고, 뱉자마자 후회한 말이었다. 그러나 글로르핀델은 익숙한 움직임으로 트럭을 가로질러 온 후 내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찾았다. 한 개비만 탁 털어 뽑아들고서 입가로 가져간 그는 문득 멈칫했다.

“성냥 있어?”

엘렘마킬은 가만히 성냥을 꺼내 담배 끝에 불을 붙여 주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 녀석이 중위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미 너무 늦은 뒤였지만.) 그 옆에서는 보론웨 아란위온이 하얗게 질린 낯으로 무릎을 떨고 있었다.

트럭을 운전하는 것은 레골라스 그린리프였고, 원래 조수석에 있던 갈도르는 내 부상을 처치해 주기 위해 잠깐 뒷칸으로 건너왔던 참이었다. 뒷칸에는 가운데 빈 공간을 두고 양옆으로 긴 벤치가 두 줄 붙어 있었다. 왼쪽 가장 안에 갈도르, 갈도르 옆에 내가 앉아 있었고 글로르핀델의 자리는 오른쪽 맨 바깥이었다. 오른쪽 안에는 엘렘마킬과 보론웨. 다른 병사들도 몇 섞여 있기는 했으나 내가 이름을 아는 이들은 아니었다.

그때 우리 중 가장 상급자는 소령인 갈도르였지만 투르곤 놀도란은 지휘권을 투오르에게 넘겼었다. 그리고 어쨌든 나도, 다른 장교들도 사람들을 통솔할 상태는 아니었다. 나는 총 하나 제대로 쏘지 못할 지경이었던 데다 갈도르는 거의 탈진해 있었다. 글로르핀델은……. 평상시였다면 대위는 무장 해제당한 채 감시가 붙여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평상시였다면 엑셀리온이 죽지도 않았겠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는 트럭에서 한 손으로는 머리 위 뼈대를 잡은 채 용케도 똑바로 선 글로르핀델은 입술 새로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흘려냈다. 군모 아래로 길게 자란 곱슬머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 금발이 흙투성이에 재를 뒤집어쓴 우리 사이에서 얼마나 이질적이었을지는 설명할 필요 없으리라 믿는다.

“너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는데.”

후, 희뿌연 숨과 함께 덤덤한 목소리가 트럭 안을 메웠다. 나는 다시 한번 갈도르와 시선을 교환했다. 글로르핀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던 탓이었다. 트럭 때문이 아니었다.

그 전투에서 우리는 먼저 엑셀리온의 왼팔이 뼈가 드러나도록 찢어진 것을 보았고 그 다음으로는 총탄이 오른쪽 팔꿈치를 꿰뚫어 부숴 놓는 것을 보았다. 유달리 피비린내 나는 장면은 아니었으나 글로르핀델에게라면 충격이 남달랐을 것이다. 시체의 이름을 알 때 사람은 미치는 법이다. 더군다나 엑셀리온은, 왼팔이 그 지경이 난 후로 그가 살아남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짓이었을 테지만, 한동안은 숨이 붙어 있기까지 했다.

글로르핀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그 애랑 잔 적 없어.”

여전히 아무도 글로르핀델에게 대답하지는 않았다. 글로르핀델은 넋을 놓은 것처럼 허탈하게 웃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에서 딱 두 모금 피운 담배가 구겨졌다. 살이 타는 냄새가, 났던가? 아니다, 글로르핀델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잘 알아듣지 못할 뭉개진 발음으로,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되었을 고백이 이어졌다. 차라리 잘 된 일이지. 그게 무슨 기분인지 알았더라면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 앨 안는 기분을 알았더라면—.

그러더니 글로르핀델은 무릎이 풀린 듯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했다. 침과 위액이 섞여 트럭 바닥으로 떨어지고 글로르핀델의 창백한 뺨 위로 눈물이 흐르는 동안, 역시, 우리는 벙어리처럼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몇 시간 뒤 적군 한 부대가 우리 뒤로 따라붙었다. 글로르핀델은 우리를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그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린 트럭 안에서 뼛조각과 뇌를 긁어내야 하지는 않았다, 그가 권총 총구를 삼켰더라면 일어났을 결과대로.

그 애가 왜 자꾸 엑셀리온에게서 담배를 훔치려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담배와 양심과 직접 표현하지 못할 애정의 발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논하던 화제와는 천 마일쯤 동떨어진 것들이었으니까. 대신 나는 글로르핀델이 어떻게 담배를 훔쳤는지는 안다. 어디로부턴가 슬그머니 나타나 엑셀리온의 바지 주머니를 뒤지던 손을 안다. 그 녀석은 담배를 빼 간 자리에 종종 초콜릿을 남겨두었다. 엑셀리온이 곧 다른 병사들에게 대부분을 나눠 줘 버릴 것이 뻔했는데도.

그리고 나는 엑셀리온이 왜 그 짓을 모르는 척해 주었는지 안다.

훔친 담배에 불을 붙인 글로르핀델은 늘 실이 끊긴 꼭두각시 인형처럼 엑셀리온에게 기대고는 했다. 이마가 어깨의 견장에 눌리도록, 힘없이 푹. 그럴 때면 그들은 서로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겠지만 나는 엑셀리온을 볼 수 있었다. 맹세컨대 나는 평소의 엑셀리온은 물론이고 다른 누구의 얼굴에서도 그처럼 너그럽고도 애달픈 감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 모습을 설명하라면 나는 성모상을, 죽은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은 마리아를 들 것이다.

그건 그의 것이 아니나 그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를 보는 표정이었다. 그는 가브리엘을 만나 두려워하였으리라. 그러니 그가 먼저 죽었다는 점은 질 나쁜 아이러니였다.

2.

공책을 덮고서 이드릴은 한참 말이 없었다. 투오르는 조용히 빈 찻잔을 치우고 부엌 의자에 걸쳐져 있던 담요를 가져와 이드릴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저녁이었다. 에갈모스는 독신이었고 거실에도 가구는 적었지만, 어쨌든 그는 부유한 독신이었고 그날의 마지막 햇살은 넓은 유리창으로 넉넉하게 비쳐들었다. 이드릴은 푸른기가 거의 가신 잿빛 눈을 들어 투오르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랬어?”

투오르는 이드릴의 옆에 걸터앉았다. 가죽 소파가 낮게 신음했다.

“과장, 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맞아요…….”

“그래……. 그렇구나.”

“그리고, 음.”

이타릴레에게 미안하다고 전해 줘.

이미 십 년 전 이행했던 부탁이었다. 투오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드릴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얼음물에 담근 듯 차가웠다. 이드릴은 조용한 한숨을 내쉬고는 투오르의 가슴에 기대듯 몸을 말았다. 허벅지 위로 다리가 걸쳐지며 치맛자락이 말려 맨발과 흰 종아리가 드러났다. 공책은 여전히 이드릴의 손 아래 꾹 덮여 있었다. 담요 위로 이드릴을 끌어안고서 투오르는 금발 위로 조심스레 턱을 얹었다.

흐릿했던 기억이 갑작스런 색채를 덧입고 찾아들었다. 어느 자살한—경찰은 아직 사인을 밝히지 않았으나 결국 그날을 살아남았던 이들의 사인은 대부분 자살이었다—정치가의 집에서, 손발이 찬 아내를 품에 안고, 그는 차올라 역류하는 강물처럼 소용돌이치는 생각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언젠가 한 번은요.”

으응, 대답하며 이드릴은 그에게 조금 더 파고들었다. 그는 팔에 힘을 주었다.

“중위님…… 엑셀리온 씨께 전달할 사항이 있어서 막사로 찾아갔는데, 막사 문앞에 엘렘마킬이 앉아 있는 거예요. 들어가도 되냐고 하니까 고개를 젓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니 수상하네. 하지만 그때는 정말 별 생각이 없었단 말이죠. 주무시고 계시다면 보고서만 어디 올려두고 가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엘렘마킬은 그를 노려보더니 결국에는 비켜 서 주었었다. 투오르는 그때 어두침침했던 막사 안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방에 담배 냄새가 맴도는 것만 같았다.

한쪽에 야전 침상이 있었다. 나무틀에 모포만 겨우 씌운, 한 사람 눕기에도 비좁은 곳에 그 둘이 어린 강아지처럼 몸을 겹친 채 잠들어 있었다고, 말하며, 투오르는 이드릴의 숨이 짧게 걸리는 것을 느꼈다. 엑셀리온을 완전히 덮어 감싸려는 듯 팔다리를 길게 뻗은 채 늘어져 있던 글로르핀델을 이야기하다 말고 그 역시 잠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래 봤자 글로르핀델은 엑셀리온의 명치께를 베고 있었다.

어렴풋한 노란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에 한 손을 엮고서, 문득 눈을 떴던 엑셀리온을 기억했다. 아직 잠기운이 묻어나던 눈매가 평소와는 정반대로 누그러져 부드러웠다.

쉿. 다른 손 검지를 세워 입가에 댄 중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갸름한 손마디가 움직이며 허공을 저었다.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는 우아함으로. 투오르는 얼떨떨하게 보고서를 탁자에 올려놓고는 도망치듯 막사를 빠져나갔다. 자신과는 그리 친하지도 않은 이들의 내밀한 일면을 보고 만—허용받고 만—기분이었다.

그게, 그래서였을까, 불특정한 의문만이 찻잎 찌꺼기처럼 오랫동안 남아 버렸다. 그를 내보냈던 손에 알량한 권총 하나만을 쥔 중위가 고스모그 앞을 막아선 이후로.

이드릴에게 전쟁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한동안 이드릴은 그를 아버지와 사촌이 남긴 유품처럼 취급했었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젊은 무용수의 싸늘한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대접받았던 케이크를, 떠나려는 그의 소매를 붙들고서 갈 곳은 있냐고 묻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는 것처럼. Miss, 그분들은 당신께 사과하고 싶어하셨어요.

그때만 해도 더 이상의 슬픔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어떡하지.”

이드릴은 공책 겉표지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투오르는 이드릴의 금발에 입술을 눌렀다. 에아렌딜은 지금쯤 자고 있겠지. 급하게 동부로 달려오느라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멜레스는 믿을 만한 친구였다.

그러니 그는 담담히 대답할 수 있었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이드릴은 공책 몇 권을 상자에 넣어 노끈으로 단단히 묶었고, 이어진 며칠 동안 에갈모스의 집에 머물며 나머지 유품도 적당히 정리했다. 에갈모스는 자신의 상속자로 투르곤의 딸도, 함께 싸웠던 군인들도 아닌 에아렌딜을 지목했었다. 이드릴은 그 뜻을 알 것 같다고 말했다. 투오르는 이드릴을 믿었다.

그를 묻던 날 아침에는 비가 왔다.

투오르와 이드릴을 태우러 왔던 엘렘마킬은 운전석 창문을 연 채, 영화도 아니고 비 한 번 끝내주게 오네요! 라고 어설픈 농담을 건넸다. 한순간 투오르는 엘렘마킬에게 뭐라도 이야기를 해야 할까 갈등했다. 하지만, 그가 겨우 훔쳐보았을 뿐인 일들을, 엘렘마킬은 정말 몰랐으려나.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드릴 역시 침묵했다.

관 위로 흰 백합을 던져넣고 흙을 뿌리는 동안 비는 그쳤다 다시 내리기를 반복했고, 투오르는 줄곧 검은 장우산을 받쳐든 채 이드릴의 뒤를 지켰다. 묘지에 모인 누구도 누구에게 유감을 표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에갈모스는 모두에게 엇비슷하게 중요했던 사람이었다. 혼란스러운 정계를 무릅쓰고서라도 이 자리까지 찾아올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투오르는 에갈모스가 남긴 말을 되새겼다.

공증받은 유언장이 아니라 공책 마지막 장에, 이전과는 달리 날려쓴 글씨로 적힌 유언은 간결했었다. 이타릴레, 미안. 이들 사이에서 유감은 언제나 떠나는 쪽의 몫이었다.

3.

저녁이 되자 빗줄기는 점차 거세졌다. 모텔 방 문을 누군가 쿵쿵 두드렸다. 순간 경찰을 떠올리고 만 것은, 장례식장에서 얼핏 미심쩍은 그림자를 본 것만 같았었기에. 하지만 문을 열자 정작 나타난 것은 빗물에 흠뻑 젖은 채 발치에 물웅덩이를 그리는 보론웨 아란위온이었다. 엘렘마킬은 마른침을 삼켰다.

“안녕.”

보론웨는 코웃음을 쳤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언제였더라, 칠 년 전? 전쟁이 끝나고 나서, 가끔씩 살아남은 자들 서넛끼리 모여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갈도르가 영국으로 떠나버린 다음부터는 에갈모스가 발길을 줄였고, 그러고는 그들을 불러모을 사람이 없어 차츰 드물어진 모임이었지만……. 칠 년 전, 보론웨는 왼손 약지에 약혼 반지를 낀 채 나타났었다.

엘렘마킬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보론웨는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다.

“수건이라도 가져다 줘?”

“됐어.”

그리고 보론웨는 거리낄 것 하나 없다는 양 멋대로 문턱을 넘었다. 몽유병자처럼 멍하니 보론웨를 뒤따르면서 엘렘마킬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속 쓰린 생각을 품었다.

칠 년 전보다 보론웨는 골격이 단단해졌고 검은 머리카락은 짧게 쳤다. 젖살이 빠진 얼굴 윤곽은 조각상처럼 수려했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엘렘마킬이 기억하는 모습 역시 남아 있었다. 잿빛 눈, 찡그리는 것보다는 활짝 웃는 것이 어울리는 눈매, 씹은 자국이 보이는 아랫입술. 엘렘마킬은 문을 닫고 잠갔다. 보론웨는 방 한구석 안락의자에 주저앉았다.

“자고 갈게.”

샤워라도 하겠냐는 제안은 거절했지만 수건은 받아들였다. 안락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머리카락에서 물기를 털어내는 보론웨를 바라보고 있자니 시간은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어느샌가 앳된 소년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엘렘마킬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보론웨는 수건을 쥔 채로 잠들었고, 엘렘마킬은 그를 침대에 옮겨 놓으려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대신 그는 창문을 연 채 빗소리를 들으며 밤을 새웠다.

시대의 뒤늦은 종언이었을까, 그 사람의 죽음은. 에갈모스가 그날 곤돌린과 함께 죽었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후의 십 년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모욕일 것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에갈모스는 죽었고 그와 함께 시대 하나는 끝나 버렸다.

런던의 어느 바에 혼자 앉아 담배를 태우던 상관이, 왜 그리 청승맞게 구냐는 에갈모스의 질문에 뭐라고 답했더라? 지금은 뺏길 리 없잖아 – 어느 사랑스런 아가씨와 춤을 추는 금발의 장교를 보면서, 아무래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덤덤히. 그러나 등화관제로 캄캄한 거리를 지날 때 글로르핀델은 엑셀리온을 껴안듯 끌어당겨 느릿느릿 스텝을 밟았었다. 주변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같은 군복을 입은 이들밖에 없었을 때.

이따금 지독히도 우울한 밤이면 엘렘마킬은 답 없는 물음을 떠올리고는 했다. 당신들이라고 우리보다 나았을 것 같나요. 살아남았다면, 당신들이라고 그때처럼 영원했을 것 같나요. 아니면 당신들도 결혼을 하고 반지를 빼 버리고 누군가를 찾아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잠들었을까요.

그 어떤 죄책감도 당장의 외로움을 누를 만큼 무겁지는 않은 밤들이 있었다. 좁은 방이 보론웨 한 사람의 체온만으로 견딜 수 없이 후덥지근해지는 것만 같은 지금처럼. 시대의 종언이었을까, 그렇다면 누구도 모르는 새 그 시대는 수면제 한 통 바닥으로 가라앉고 만 셈이었다.

굳은 베이글과 록스로 아침을 때우면서 보론웨는 묻지도 않은 신변 잡담을 늘어놓았다. 변호사 시험을 통과했다고 했다. (칠 년 전에. 아마도 마지막으로 보았던 직후에.) 결혼도 했고. (역시나 칠 년 전.) 아들이 있었다. (몇 살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작년에 이혼했다. (이혼의 이유도 말해 주지는 않았고, 엘렘마킬은 그리 오만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궁금해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론웨는 밤새 안락의자에 구겨 자느라 굳었을 게 뻔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지냈어?

“별일 없었어.”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우스운 말인지 자각했다. 얼마나 우스운 말인지, 또 얼마나 우스운 삶인지. 술집 바깥에서 그래 약혼 축하한다며 보론웨의 등을 두드렸던 그날 이후 칠 년간 그에게는 정말로 별일이 없었다. 일은 많았지만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다. 쯧 혀를 찬 보론웨가 중얼거렸다.

“그거 알아, 내가 아버지와 연 끊을 각오 하고 여기 온 것?”

“중위님이 공산주의자라?”

둘은 동시에 실소했다. 그리고 잠시 묵념하듯 침묵했다. 엘렘마킬은 좀 더 가라앉은 투로 말을 이었다.

“네 아버님은…….”

“아니, 그것 때문은 아냐. 뭐 안다면 기겁하시겠지만.”

“그러면?”

“엘렘마킬, 그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네가 한 말이야 전부 기억하지만……. 언제?”

“난 다시는 아무것도 사랑하고 싶지 않아.”

아.

가까스로 안전지대에 다다랐을 때, 연료가 떨어진 트럭에서 내리며 했던 말. 왜냐면 곤돌린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들이 우러러보던 사람들은 대개가 참혹한 죽음을 맞았으며 옆을 돌아본다고 해도 조언을 구할 이들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엘렘마킬은 할 말이 없어 커피를 들이켰다. 어떻게 된 게 사제 커피는 해가 갈수록 맛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기억하지?”

쓴맛을 삼키며 엘렘마킬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렘마킬, 날 봐.”

“그래서 이혼한 거야?”

“아니. 그건, 좀 다른 이유로.”

뭐였는데, 재차 묻자 보론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엘렘마킬은 나이프로 애꿎은 베이글을 쿡쿡 쑤셨다. 비가 그친 창밖은 화창했다. 어쩐지 억울한 일이었다. 조금은 더 그들을 애도해야 하지 않느냐고, 무심한 세상에게 따져묻고만 싶을 정도로.

“엘렘마킬.”

“듣고 있어. 그런데?”

의자가 지익 끌렸다. 좁은 탁자를 돌아온 보론웨가 엘렘마킬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렸다. 나지막하고 조금은 쉰 듯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제 생각이 바뀌었거든.

그리고 보론웨는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