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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a sigh

마글로르 드림 | 라임 님 커미션 :)

rhindon by 댜

저녁의 티리온은 황홀하도록 아름답다.

민돈 엘달리에바 꼭대기를 태양의 배가 스치고 지날 때쯤 피나르핀은 마지막 접견자를 물렸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알현실에는 까마득히 높은 천장 아래, 늘어선 열주의 기다란 그림자뿐이었다. 금빛으로 물든 대리석을 한 발짝씩 디디며 피나르핀은 조용히 알현실을 가로질렀다.

세상에 빛이 돌아온 이래 닫힌 적 없는 문을 지나, 왕궁의 광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면 사시사철 돌아가며 열매를 맺는 나무들과 유리처럼 투명하게 흐르는 분수가 나타났다. 그마저 거쳐 별궁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면 궁정의 관료들도, 종종걸음으로 바삐 오가는 시종들도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다. 투나 언덕 위 도시의 소음이 아득하니 멀어지는 가운데 가슴께까지 자란 관목 사이로는 수 놓은 옷자락이 늘어져 사락거렸다.

이곳에서는 좀처럼 오가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티리온의 왕궁은 놀도르 왕의 권위에 걸맞도록 넓고 웅장했으나, 그만큼 오래되었기에 잊히고 버려진 장소들도 곳곳에 숨어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피나르핀도 성실한 주인이라 하기 어려웠다. 어릴 적 왕궁을 탐험하며 쏘다니던 때를 제한다면 피나르핀은 왕궁 곳곳에 난 샛길들을 거닐 이유가 없었었다. 혼인한 뒤에는 그는 아내의 친정에 오래 머물렀었고…… 다시 돌아온 뒤에도 왕궁을 집으로 여기기란 영 쉽지 않았다.

아직도 그는 왕궁의 수많은 별궁을 다 알지는 못했고, 그가 수년 내 직접 걸음 했던 곳은 그중에서도 손에 꼽았다. 지금 향하는 곳만은 예외였다. 그는 꾸준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나름 근면한 방문자였으므로.

낯익은 길을 따라 나아가니 어느덧 키를 넘는 담장이 앞을 가로막았다. 문을 찾으려거든 거친 돌로나마 표시된 길을 벗어나, 풀잎이 꺾인 자국을 따라가야 했다. 익숙하게 방향을 튼 피나르핀은 담장 문을 열고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가,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무래도 선객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요. 소식은 들었어요, 핀다라토 님.”

그 애는 차분히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인데도 또렷한 발음은 핏줄의 내력일 테고, 고풍스러운 억양은 오랜 고립 때문일 테지. 핀로드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퀘냐는 이제 발리노르에서도, 바다 저편에서도 들어볼 수 없었다. 오직 젊은 날의 기억과 이 별궁에만 존재하는 언어.

그리고 이곳에 방문할 때면 그는 의식하지도 않는 새 늘 그 옛날의 언어로 회귀하고는 했다.

“백모께서—그러니까, 네르다넬 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양이더라고.”

“다행이네요.”

무심하지만 다정한 대꾸가 돌아왔다. 핀로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상대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들은 별궁 정원에 앉아 있었다. 돌보지 않은 풀이 웃자라 우거진 사이로, 몇천 년 전의 석공이 다듬어 놓은 장의자가 드문드문 놓였다. 마른 분수 위로는 덩굴이 뒤덮였다. 언젠가 정원을 당당하게 관장했을 아름드리나무는 고목이 된 지 오래였다. 시간이 이곳을 비켜 가지는 않았다. 더께로 쌓여 가며 짓눌렀다면 모를까.

하지만 이 별궁의 주인에게는 여전히 소녀 같은 공기가 감돌았다.

입 밖으로 내어 말한다면 실례겠지, 장성한 여인에게. 혼인하지 않은 사람을 미숙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고는 하나, 핀로드의 조카님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세월을 살아왔다. 상고로드림의 몰락 이후 태어나 옛 대륙에는 발 한번 디뎌보지 않았던 아이들은 물론, 벨레리안드에서 나고 자라 세상의 적에 맞섰던 이들과도 비교해서는 안 되었다.

흘러간 햇수의 문제가 아니니 은둔 생활의 결과일 것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깨끗한, 맑다고까지 할 수 있을 영혼은. 폐허 한가운데 홀로 닳지 않은 유물처럼 앉은 요정을 보며 핀로드는 가만히 불렀다.

“조카님.”

F는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핀다라토 님.”

“한 번 만나보지도 않을 셈이야? 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아라핀웨 님이 아니셨을까요.”

반박할 수 없는 지적이었다. 톨 시리온의 지하에서 목숨을 잃은 이래 핀로드는 가운데땅으로 돌아가지 않았었으나, 전보에만은 늘 귀를 기울였었다. 그때 이미 만도스의 심판은 한참 느슨해진 뒤였다. 핀로드 자신도 다시 육체를 얻어 엘다마르의 나무 그늘을 거닐고 있었고, 바다 저편으로부터는 애도의 메아리뿐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며 손으로 쓴 서신까지 전해져 왔으니까.

그러니 핀로드는 단 둘 남았던 페아노르의 아들들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단정한 글씨로 적힌 참혹한 사연을 읽었던 덕분이었다.

발리노르 군대의 군영에 침입한 마에드로스와 마글로르는 에온웨의 자비에 의해 놓여났다. 한 사람은 땅의 균열로 몸을 던졌더랬고 남은 한 사람은 사라졌다. 산 자로서 마글로르를 다시 보았다는 이가 없었으니 최후의 목격자 중에는 피나르핀이 들어 있었을 테지. 그리고 F는 이미 피나르핀을 만난 적 있었다.

“제가 듣고 싶던 이야기 그 이상을 들었죠.”

핀로드가 한참 침묵하고만 있자 F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전 제 아버지가 그 땅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고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궁금하지 않았어요. 귀를 닫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카나핀웨 마칼라우레를 저주하는 사람들이 놀도란테는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것을 아세요? 저는…….”

고개가 기울어지는 것과 함께 긴 은발이 흘러내렸다. 순은을 뽑아낸 듯 선명한 머리카락 아래로 들리는 말소리는 점점 빨라지기만 했다. 이런 것만은 옛 소문 속의 미리엘을 닮았을지도 모르겠다고, 핀로드는 망연히 생각했다.

“그런 일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포르메노스에서 한 시대를, 이곳에서는 그 열두 배는 될 세월을 보냈어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얼마나 하염없는 시간이 지나야 제 아버지와의 연이 잊힐 수 있는 건가요?”

“잊힐 수 없을 거다.”

핀로드는 의도치 않게 솔직히 대답했다. 반은 당황 때문이었다. 반은,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가 자신이 F에게 진실을 빚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F는 비로소 눈을 들어 핀로드를 쏘아보았다.

“그런가요?”

“사람들은 아직 마칼라우레를 기억해. 당장…… 엘론드조차 마칼라우레를 찾으려 애쓰다 왔다지 않니.”

그러자 F의 작은 얼굴은 가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세 번째 시대가 막을 내렸다. 마지막 배는 외로운 섬을 지나 알쿠알론데의 항구로 들어왔고, 그 배에는 반지의 사자들과 핀로드의 막내동생뿐만 아니라 엘론드 페레딜 역시 타고 있었다. 먼 옛날 벨레리안드가 가라앉기 전, 모르고스의 성채가 무너지기 전 마글로르가 거두었고 친자식처럼 아끼며 돌보았다는 그 아이가.

아니, F를 소녀라고 할 수는 없듯이 엘론드를 아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세상을 논하는 현자로 성장한 요정은 먼저 자신의 아내와 부모를 찾은 다음, 당연한 수순대로인 듯 네르다넬의 문을 두드렸더랬다. 그와 네르다넬은 친족이기는 했으나 혈연은 없었다. 법대로 따진다면 먼 인척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엘론드는 투오르나 이드릴을 대하듯 네르다넬을 대했고, 네르다넬의 하나 남은—살아 있는—아들을 데려오지 못한 데 심심한 유감을 표했다.

그 모든 게 무엇을 뜻하는지 티리온의 놀도르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요정들이 조심성 없이 쑥덕거리는 말들은 한마디도 빠짐없이 F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조카님.”

불러 놓고서도 핀로드는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F는 무릎 위로 모아쥔 양손을 비틀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아버진 내가 수태되었던 줄도 몰랐다지요.”

“네가 상심했다고 해서 누구도 비난하진 못할 거야.”

“상심이라고요? 아니에요. 제 아버지가 그 사람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갔으니, 그 뒤에 육친의 정을 좀 보여줬다 한들 대수겠어요. 그런 건 알량하죠.”

하지만 F는 그런 알량한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핀로드의 생각을 읽은 듯 F는 다시 말했다.

“핀다라토 님. 당신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아요. 분명히 말해 두자면 나는 엘론드 페레딜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에 비하면 전 온실 속에서 자란 것이나 다름없죠. 제게 끼니를 챙겨주던 사람은 고귀한 마흐탄의 따님이셨고, 제가 머문 곳은 유배지라 할지언정 발라르의 권역이었으니. 제가 알지 못한 아버지를 엘론드 페레딜이 알았다 해서 그를 시기한다면, 저는 페아노르 가문의 모든 추종자를 시기해야 할 거예요.”

“그렇다면 왜 그를 만나지 않으려는 거지?”

“왜 그를 만나야 하나요?”

F가 되물었다.

“적어도 엘론드는 네게 네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거야. 아버지로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씀드렸잖아요.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게 만드는 단호한 어조였다.

두 사람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칼라키랴 계곡 위를 지난 태양의 배는 이제 발리노르 대륙 저편, 세상 바깥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곳의 빛은 가운데땅처럼 묽지 않으니 동녘에서 새로 날이 밝아오기까지도 마르지 않고 남아 있겠지만, 그런데도 발밑에 스미는 어스름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F는 이제 핀로드를 보고 있지 않았다. 두 나무의 빛 속에서도, 태양의 빛 아래에서도 태어나지 못한 소녀는 어둠에 묻힌 덤불들을 응시했다. 그 속에 원하는 해답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그 속으로 파고든다면 정말로 세상을 다 버릴 수 있을 것처럼.

 

 

황망하게 정원을 나서던 핀로드는 열 걸음 거리에서 피나르핀을 지나쳤다. 관리되지 않은 정원의 어수선함이 아니었더라면 제 아버지가 거기 서 있다는 것을 놓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죽은 나무둥치는 피나르핀의 몸을 반쯤 가려주었고, 핀로드의 시선은 어차피 줄곧 땅을 향해 있었다.

피나르핀이 안도해 가슴을 쓸어내리려던 그때, 명징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폐하.”

주저한 끝에 피나르핀은 나무둥치를 돌아 걸어 나갔다. F는 그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앉아 있었다. 흐린 빛 탓일지, 반쯤은 석상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유난히 섬세하고 연약하여 당장에라도 손을 뻗어 대리석 가루를 털어주어야 할 듯한 아이.

고개를 돌려 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단지 그 가냘픈 체구와 은빛 머리카락만은 아니도록. 인디스의 아들인 그에게는 미리엘 세린데를, 또 세린데의 그림자를 향한 모종의 죄책감이 심겨 있는지도 몰랐다. 앳된 얼굴에서 핀웨의 눈빛을 발견한다면 그는 조금 더 쉽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 무리한 요구일 터였다. 대신 피나르핀은 F가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한 손을 들어 가슴에 얹으며 인사했다.

“내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내 아들이 이미 해버린 듯하니, F, 나는 이만 물러가마. 하지만 저 아이의 말을 한번쯤은 더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네 조모도 너를…….”

“자주 뵙는 것은 제게도, 할머니께도 좋지 않아요.”

시간이 멎을 듯한 고요 속에서 F는 긴 숨을 내쉬었다. 차마 더 말을 붙이지 못한 피나르핀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의 발치로 한숨이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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