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4

일단 "멸망" 하시오 글 커미션

빵글빵글 by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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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장 전 커미션과 같은 테마로 작업한 리퀘스트입니다. 오탈자, 비문 등의 수정만 거쳤습니다.

  • 2인, 자율 작업, 공백 포함 5,439자.

  • 〈단간론파〉 1편 기반 자캐 커뮤니티의 캐릭터로, 세계관 내의 고유명사와 설정이 일부 활용되었습니다. 원작 및 커뮤니티와 무관한 일종의 2차(3차) 창작입니다.

  • 죽음에 관해 다소 언급합니다.

  • 신청자의 동의를 받고 전문 공개합니다. 이하 이미지와 텍스트의 내용은 같습니다.

  • 커미션 바로가기: https://kre.pe/TogX

누구든 이곳에 들러 주신 분께.

 

안녕하세요. 구 키보가미네 학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딱히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겠지만요). 받는 사람을 특정하지 않고 편지를 남기는 건 처음이라, 조금 횡설수설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폐쇄되었던 정문이 개방된 뒤로 이곳도 안전하지만은 않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이 도움을 주기 위해 오셨던 걸로 알지만, 그만큼 나쁜 의도로 여기에 오는 사람도 많았거든요. 일부러 찾아오셨든, 폐허를 헤매다가 우연히 들어오셨든 오래 머물 만한 곳은 못 됩니다. 지치셨다면 며칠 정도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정문에 설치했던 기관총은 이미 제거했으니 안심하고 출입하세요.

바깥 상황은 여전히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주기적으로 바깥소식을 들고 찾아오던 지인들의 발길이 점점 뜸해지더군요. 우연히 이곳을 찾던 외부인도 거의 없어졌고요. 그래도 혹시나 누군가 찾아올지도 몰라서, 이렇게 메모라도 남겨 둬요.

 

누군가 일부러 옮기지 않았다면, 기숙사로 가는 통로 앞에서 이 편지를 발견하셨을 거예요. 그 앞으로 쭉 가시면 기숙사입니다. 식당, 침실, 창고 등 생활에 필요한 공간은 모두 모여 있어요.

이곳에 며칠 머무실 거라면 기숙사를 되도록 벗어나지 않는 것을 권할게요. 학교 건물에는 쓸 만한 물자도 별로 없고, 사람 손이 닿은 지 오래돼서 위험하거든요. 기숙사도 2층부터는 건물이 무너져서 오갈 수 없으니까 1층에만 머무세요.

기숙사 창고에는 웬만한 생필품이 남아 있습니다. 필요한 도구가 있다면 가져가셔도 괜찮아요. 통조림 같은 보존식도 있을 거예요. 앞서서 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 정확히 얼마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네요. 어쨌든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먼저 창고를 둘러보시는 게 좋습니다.

식당에도 식량이 비축돼 있었는데, 대부분 신선식품이라 이미 상했을 거예요. 상하기 전에 누가 가져갔거나. 대신 따지 않은 생수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면, 아마도요). 수도가 끊긴 지 오래됐으니 물은 아껴서 사용하세요. 자주 씻지 않고 생활하는 데는 익숙해지셨을 거라고 믿어요.

상한 식재가 있다면, 그리고 체력과 시간이 충분하다면 위생을 위해 바깥 어디에든 파묻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삽, 목장갑, 마스크 같은 건 창고에서 찾으실 수 있어요. 학교 5층 온실에도 있겠지만… 혹시 가신다면 커다란 식물에는 가까이 가지 마세요. 이미 죽었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대욕탕과 세탁실은 이미 기능을 잃었을 거예요. 전기도 얼마 전에 끊겼거든요. 태양광 패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이제는 고장 났습니다. 저는 기계를 고치는 재능은 없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비누나 세제 같은 건 있을 테니까, 가져가서 쓸 곳이 있다면 가져가세요.

 

학교 건물 1층에는 보건실이 있습니다. 웬만한 의약품은 있었어요. 필요하다면 가져가시되, 낭비하거나 독점하지는 말아 주세요. 위급한 분을 우선으로 해 주세요. 누가 또 이곳을 찾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사용 기한이 너무 오래 지났거나 오염된 게 있다면 폐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기숙사에 쓰레기 소각로가 있으니 그쪽을 활용하세요.

그밖에는 미술실, 음악실, 시청각실, 도서실, 체육관, 수영장, 화학실, 물리실, 생물실, 온실, 궁도장 등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평범한 교실이고요. 기계 장치는 대부분 작동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학교 건물의 기계는 건드리지 마세요. 특히 교장실과 체육관은 위험합니다. 설치된 트랩을 다 해체하진 못했거든요.

화학실험실의 화학약품은 필요하다면 가져가세요. 수납장을 여닫는 기능이 망가져서 문을 부숴야 할 거예요. 위험한 약품을 위험한 용도로 사용하지 않으실 거라고 믿겠습니다.

학교 건물 1층의 빨간색 문 너머로는 들어가지 마세요. 애초에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겠지만, 혹시 들어갈 수 있더라도요. 가능하다면 영원히 폐쇄해 주세요. 제 몸으로는 어려웠습니다.

 

기숙사 개인실 중, 복도 끝에서 세 번째 방 문고리에 열쇠가 걸려 있을 겁니다. 제 방이에요. 머무는 동안 자유롭게 사용하세요.

책상에 놓인 열쇠는 그 옆방 열쇠입니다. 혹시, 혹시나 학원을 돌아다니다가 로봇 청소기처럼 보이는 기계가 작동을 멈춘 것이 보인다면, 옆방에 있는 비슷한 기계들 옆에 나란히 놓아주세요. 그 방에 있는 것들만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시길 부탁드릴게요. 문은 처음처럼 잠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밖으로 나갔을 때 키보가미네 학원에서 탈출한 학생들의 소식이 들린다면 마음으로라도 그 친구들을 응원해 주세요. 밖에서도 잘해 나가기를요.

 

행운을 빌어요.

 

사자나미 미츠키.

 

 

 

임시로 꾸려진 탐사대가 키보가미네 학원이었던 폐허에 진입했을 때, 그들을 마중한 것은 폐허의 주민도, 절망의 잔당도 아닌 편지 몇 장이었다. 단정하지만 조금 비뚜름한 손글씨가, 아마 줄공책을 조심조심 뜯어 만들었을 편지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대체 언제 적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누렇게 바랜 종이에서 낡은 티가 났다.

약간 구겨지거나 찢어진 데가 있는 편지는 거기에 적힌 그대로 기숙사 통로 앞에 붙어서 홀로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편지 옆에는 종이 한 뭉치가 더 붙어 있었는데, 사람 손을 많이 탔는지 편지보다도 이쪽이 더 너덜거렸다. 가장 위에는 같은 글씨로 적힌 짧은 메모가 있었다.

 

제가 없을 때 이곳을 들렀다 떠나는 분이 계신다면, 혹시 나중에 누군가 올지도 모르니까 편지의 내용을 업데이트해 주시겠어요? 소모품을 가져간다든가, 어디가 위험하다든가, 그런 것들을 추가해서 적어 주시면 누구에게든 도움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절망의 시대에 순진하다면 순진한 부탁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 부탁을 들어줄 정도의 인간애는 남아 있는 사람이 있었던지, 그 아래로 짤막한 메모 몇 개가 중구난방으로 이어졌다. 대욕탕 마지막 비누는 제가 가져갑니다. 당근 실온에 내버려 두고 간 거 누구냐? 밖에 갖다 묻음. 개힘들어. 소독약 남겨 두고 가신 분 감사합니다. 덕분에 치료하고 쉬었다가 가요… 뭐 그런 것들.

편지와 메모를 정독한 탐사대장은 수고를 덜었다며 덤덤하게 기뻐했다. 그러더니 대원들에게 수색할 구역을 지정해 주기 시작했다. 희망의 첨탑이자 절망의 온상이었던 키보가미네 학원 건물은 이제 영구히 폐쇄될 예정이다. 그 터에는 추모와 기억의 공간이 들어설 것이다. 활용할 수 있는 물자와 자원을 굳이 무너질 폐허에 남겨 둘 필요는 없었다.

탐사대장은 모리토키 세리나에게 장부 기록을 맡겼다. 다른 수색조가 시설을 점검하고 물자를 회수해서 돌아오면 그 현황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대장은 다른 조들을 직접 따라다녀도 되고 한자리에서 기다려도 된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아무리 소식이 느린 사람도 세리나가 키보가미네의 생존자라는 사실을 모를 수는 없었다. 나름의 배려를 세리나는 특별히 기뻐하지도 않고, 부담스러워하지도 않고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대답하고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 그건 누가 쓴 거예요? 평범하게 대답이 돌아왔다. 아, 사자나미 미츠키라고.

 

“아는 사람이겠군.”

 

그렇게 말한 대장은 안전을 위해 혼자 있지 말라는 지시만 남기고 자신의 담당 구역을 향해 떠났다. 세리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들은 그 이름을 인식하느라 몇 분 정도 시간을 써야 했다. 아니, 고작 몇 초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리나의 체감으로는 분명히 분 단위였다.

 

키보가미네 학원에서 살아 나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았다고 하기는 애매한 상태로 나온 사람도 있었고, 그 애매한 상태로 아예 나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사자나미 미츠키는 마지막 경우에 해당했다. 누구든 키보가미네에 찾아오면 빈 학원을 관리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자나미 미츠키의 홀로그램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살인 게임의 생중계 이후 한두 해까지만이었다. 절망의 시대를 상징한 아이콘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 잔재는 남았다. 오히려 그 찬란할 정도의 절망이 저문 뒤에 본색을 드러낸 자들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 위기는 오히려 자신을 위한, 자신만을 위한 스포트라이트라고 믿는 사람들. 진짜 재앙은 절망하는 사람보다 욕망하는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법이었다.

바깥세상이 지옥도가 되어 가는 와중에 폐허에 남은 작은 로봇 몇 개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정확히는 그쪽에 쓸 신경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과 운을 다 써야 했다. 마침내 다시 한 번 희망이 승리하고 과거가 남긴 것들을 돌볼 여유가 생겼을 때는 이미 십 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아무리 폐쇄되거나 무너진 부분이 있다고 해도 이 커다란 학원을 남김없이 수색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수색조가 돌아오기를 멍하니 기다리는 대신, 세리나는 편지를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었다. 이런 글씨를 쓰는 사람이었구나, 생각해 보니 함께한 시간이 너무 짧았다. 같은 반 친구라면 보지 않기가 더 어려운, 글씨 쓰는 모습 한 번을 못 볼 정도로.

그다지 길지 않은 편지를 다 읽고, 세리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숙사 안쪽으로 향했다. 복도 끝에서 세 번째 방으로. 사자나미 미츠키의 방은 거의 비어 있다시피 했다. 침대를 누가 사용한 흔적만 역력할 뿐. 세리나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책상에 덩그러니 놓인 열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옆방 문을 열었다.

작고 납작한 로봇들이 방 한구석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로봇을 제외하면 옆방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로봇의 주인들은 대부분 새 로봇 몸체를 얻어 학원을 떠났다. 사자나미 미츠키는 주인이 떠나고 남은 몸체를 이곳에 모아 둔 것 같았다. 그들이 잊은 물건, 혹은 남겨 두고 떠난 물건을 그 위에 얹어 두어 주인을 구별할 수 있었다. 자판기에서 넘칠 정도로 많이 뽑히던 선물이라든가, 피에 젖거나 부서져서 더는 사용할 수 없었던 것들이라든가. 로봇이 없는, 그러니까 살아남은 사람들의 물건은 책상 위에 정리되어 있었다. 세리나는 수건으로 만든 곰인형을 알아보았다.

아무것도 얹어 두지 않은 로봇이 하나 있었다. 세리나는 충전기를 꽂아 보았다. 당연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충격을 받을 일이 있었는지 아예 단자가 망가진 것 같았다. 세리나는 로봇을 원래 자리에 내려두었다.

혹시나 비뚜름하고 단정한 글씨가 적힌 것이 어디 없을지 조심스럽게 찾아보았다. 소득은 없었다. 밖에서 다른 대원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리나는 방을 나서며, 이 방은 수색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묘소다. 사자나미 미츠키의.

 

살아남은 자들은 가장 먼저 죽은 아이들의 몸을 장사 지냈다. 육체가 재가 되어도 혼, 정신, 혹은 그것의 그림자나 초상화쯤 되는 것은 남았다. 육신을 미처 쫓아가지 못한 혼의 파편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두 번째 삶이 자신에게 허락되는가. 마지막으로 본 사자나미 미츠키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그가 마침내 나름의 답을 내렸다는 것을, 모리토키 세리나는 이해했다.

 

긴 수색 끝에 탐사대가 떠날 때, 어느 탐사대원이 물었다. 이거 어떡합니까? 대원은 손에 편지와 메모 뭉치를 쥐고 높이 흔들었다. 버립니까? 제가 가져갈게요. 탐사대장이 세리나를 흘끗 보았다. 세리나는 한 번 더 대답했다. 제가 가져갈게요.

 

사자나미 미츠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두 번째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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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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