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vie en rose
암굴왕 드림 | 쩌리 님 커미션 :D
“멋지당!”
J는 탄성을 질렀다. 암굴왕은 유난히 부드러운 눈빛으로 J를 돌아보더니 웃었다.
“마음에 드나?”
“엄청! 암굴쿤, 데려와 줘서 고마워!”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을 이곳, 이 시간에 떨군 것은 성배의 힘이었지만, J를 샹젤리제 거리의 저택으로 데려온 것은 암굴왕이었다. 발코니 난간을 짚으며 정원을 향해 쭉 손을 내밀던 J는 다시 빙글 돌아 암굴왕을 마주했다. 오후의 햇살이 암굴왕의 머리카락 위로 은빛 겹을 덧씌우고 있었다.
1838년, 파리의 여름. 오래전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복수를 위해 사들인 저택은 궁전처럼 화려했다. 웅장한 정문을 통과해 안뜰을 지날 때부터 신이 나 있던 J는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땋아 올리고, 예쁜 드레스를 빌려 입고 나자 꼭 영화에 들어온 기분이 되었다. 암굴왕과 함께 저택을 지하부터 다락방까지 샅샅이 구경하다 보니 몸은 힘들어도 마음만은 한껏 뿌듯했다.
“그럼 이제 뭐 하지? 구경은 다 했잖아.”
사용인들이 의아하게 던지는 ‘우리 백작님이 웬 여자?’ 식의 시선 속에서 J를 데리고 저택을 누볐던 암굴왕은 이젠 그저 팔짱을 낀 채 J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얼핏 흐뭇한 기색이 스쳤다.
“주어진 기한은 한참 남았으니,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도 좋다.”
“으응, 그래도 생각나는 게 있을 것 아냐.”
“없다.”
암굴왕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 시대의 복수는 내 몫이 아니니.”
뭐, 본인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암굴왕이 오랜 계획을 실행해야겠다며 쌩하니 가버리는 건 J가 바라는 바가 아니기도 했다. 아니다, 응원하는 건 재미있으려나? 이건 또 충분히 고민해 볼 만한 문제였다.
그나저나 하고 싶은 것이라면…….
도시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저택까지 오는 길에 이미 관광이라면 충분히 했다. 발이 아파서라도 더 돌아다니지는 못할 지경이었는걸. 게다가 사실, 어떤 시대의 어느 장소건 암굴왕과 관련이 없다면 J의 흥미를 끌 수는 없었다. 암굴왕이 곁에 있는 게 아니라면 몰라. 이 사람이 한달음에 끌어안을 거리에 서 있는데 아쉬울 게 뭐가 있겠어?
열광적으로 변한 눈빛을 눈치챘는지, 암굴왕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더니 물었다.
“혹은 이만 들어가실까요, 마담 라 콤테스?”
J는 헤헤 웃으며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암굴왕이 몇 마디 하기가 무섭게 하인들은 두 사람을 살롱으로 안내했다. 암굴왕이 내민 팔에 한 손을 얹고 문턱을 넘어선 J는 환한 볕이 비쳐드는 방 안 모습에 새삼스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얼핏 봐도 값비싼 게 분명한 장식품이 곳곳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섬세한 가구들은 박물관에나 전시되어야 할 자태를 뽐내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암굴쿤, 대단한 부자였잖아…….”
“아까 지났으면서, 원. 아쉬운가?”
고개를 숙이고 속삭이자 암굴왕의 숨결이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J의 볼이 그만 화끈 달아올랐다.
“영영 못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약간?”
“크하하하! 성배의 변덕에 감사할 때가 다 오는군!”
그러면서도 암굴왕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J가 눈치채지 않으려 해야 그럴 수 없는, 그답잖게 귀여운 모습이었다. J는 비식비식 새어 나가려는 웃음기를 감추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세팅된 테이블 앞에서 J의 의자를 빼준 암굴왕은 J가 편안히 앉도록 도와준 다음에야 자신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J는 비로소 생글생글 웃으며 턱을 괴었다.
“이런 거 많이 해 봤나 봐?”
“손님맞이야 종종 했지.”
“여자 손님도?”
“함정을 파 달리는 마차를 넘어뜨린 다음, 그 안의 부인을 꼬여내 독약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포함인가?”
암굴왕은 태평하게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J는 동그랗게 입술을 모으며 말했다.
“우와, 대단한뎅?”
예상 밖의 반응이었나? 암굴왕은 순간 멈칫했다. 독약을 언급할 때보다 오히려 이 말을 듣고 더 주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머잖아 그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고, 기분 좋게 따라 웃은 J는 때마침 도착한 찻주전자로 손을 뻗었다.
시간은 나긋이 흘러갔다. 장미 꽃잎을 양각한 찻주전자가 기울어지고, 찻잔에는 감미로운 향이 차오른다. 이 사이로 다과가 파삭 부서지는 소리며 암굴왕의 허스키한 중저음도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어쨌든 금화를 녹여 인테리어를 한 것만 같은 이 살롱도 암굴왕에 비하면 멋진 배경에 불과했다…….
재잘거리다 만 J가 하암 하품하자 암굴왕은 설탕 부스러기가 묻어난 손끝을 감싸 쥐고 물었다.
“피곤한가? 시간을 넘나드는 게 일상사는 아니니, 그럴 만도…….”
“아아냐! 멀쩡해!”
힘껏 항변하니 암굴왕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도 수긍해 주었다. 왠지 모르게 고집스러운 마음이 든 J는 일부러 찻잔을 가득 채웠다. 옛날 차는 카페인도 없나, 왜 이렇게 졸리담?
기껏 예전 모습을 한 암굴왕이 눈앞에 있는데, 잠기운 때문에 시간을 날리고 싶지는 않았다. 옛집에 앉아 당대의 풍경에 둘러싸인 암굴왕은 유난히도 젊고, 준수해 보였다. 정말이지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백작님이 따로 없었다. 관만 씌워 놓으면 왕자님이래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위장에 따뜻한 차가 들어가서인지, 달콤한 디저트 때문이었는지, J는 자꾸만 하품이 나왔다. 눈꺼풀마저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J의 고개가 꾸벅꾸벅 흔들리는 것을 본 암굴왕은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가, J가 찻잔에 코를 박을 지경이 되고서야 웃으며 손을 뻗었다. 이마에 손가락이 닿자 J는 흠칫 정신을 차렸다.
“뭐양, 암굴쿤, 짓궂게…….”
“잠시 쉬지.”
암굴왕은 느긋이 말했다. 졸음에 겨운 J는 연신 눈을 깜박거리다가, 테이블을 빙 돌아 다가온 암굴왕이 손바닥을 내민 다음에야 비몽사몽 일어났다.
그가 J의 한 손을 잡고 안내한 곳에는 붉은 덮개를 씌운 소파, 셰이즈 롱게가 기다리고 있었다. 누울 자리에는 두툼한 담요가, 머리를 벨 수 있도록 솟은 한쪽 끝에는 방석 여럿이 놓여 있었다. 또 한 번 작게 하품하며 셰이즈에 걸터앉은 J는 암굴왕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몸을 눕혔다.
“흐응, 정말 백작 부인이 된 기분인걸…….”
그것도 꽤 병약한? 흐물흐물 중얼거리니 암굴왕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나서야 J는 자신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단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다시 뜨고 싶지는 않았다. 담요를 펼쳐 덮어주고, 그 위를 토닥거리는 손길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어서…….
그리고 J는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이백 년 전의 살롱에서, 한때 몽테크리스토 백작이었던 남자가 그의 연인을 내려다보았다.
J가 이 저택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듯, 이런 J의 모습 역시 그가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얕은 숨소리를 내며 새근새근 잠든 연인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친숙했다. 마치 꿈속에서 수천 번은 더 상상해온 모습처럼.
몇 가닥 흐트러진 잔머리와 감긴 눈꺼풀 아래 드리운 속눈썹, 살짝 벌어진 장밋빛 입술. 머리카락을 땋아 올린 탓에 고스란히 드러난 목덜미는 이날따라 유달리 탐스러웠다. 몇 시간 전 그가 직접 골라 주었던 진주 목걸이는 여전히 J의 쇄골 위로 드리워져 있었고, 목과 어깨의 선을 부드럽게 이어받은 드레스가 그 너머로 풍성한 곡선을 그렸다. 넓은 소매가 반달 모양으로 좁아지는 끝에서는 고운 손 하나가 담요를 헐겁게 쥐고 있었다.
아아, 그렇지.
암굴왕은 싱겁게 웃었다. 셰이즈 옆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는 조심스럽게 J의 손끝을 잡아 올리고는, 다섯 손톱에 차근히 입을 맞춰 나갔다. 그의 입술에 닿는 네일 파츠의 굴곡만이 유일하게 현대를 떠올리게 하는 한 가지였다.
복수에만 매달리던 시절, 감히 소망할 수조차 없었던 사랑.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발소리마저 죽인 채 창가로 향했고, 빈틈없이 커튼을 쳤다. 파리의 오후마저 연인의 낮잠을 방해할 수는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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