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kyo Calling

주술회전 / 이타도리 HL 드림 커미션 / 오마카세

포말 by 포말
4
0
0

*카페인중독님 커미션입니다. (10,000자)


“사쿠라자와 말인데.”

휴대폰 액정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운을 띄운 이타도리의 음성에 후시구로는 별 대꾸가 없었다. 오늘도 무척 고된 임무였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이지치가 모는 자동차에 오른 후시구로는 시트에 몸을 푹 묻은 채였다. 빌어먹을 블랙 기업과 다를 바 없는 주술계는 낮이고 밤이고 미성년자를 부려 먹는 것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저와 다르게 여전히 쌩쌩한 이타도리의 모습에 후시구로가 작게 혀를 찼다. 저도 일반인보다야 훨씬 튼튼한 몸이라고 자부하지만, 이타도리는 격이 달랐다.

방금 주령의 배를 주먹으로 뚫어버린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게임을 켠 이타도리는 굳이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는지 제멋대로 말을 이었다.

“항상 좋은 향기 나지 않아?”

“무슨 소리야, 그게.”

이 말엔 천하의 후시구로도 질린 듯한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이지치의 불안한 눈길이 룸미러로 두 청소년을 흘끗흘끗 살폈다.

“응? 아니, 이상한 의미는 아니고. 왜, 항상 꽃향기라든지 나지 않아?”

“…아아. 그건가.”

“그치?”

“사쿠라자와 가家 자체가 꽃하고 밀접하다고 들은 적 있어. 아마 그것 때문이겠지.”

흐음, 그렇구나아.

게임에 집중하면서도 이타도리의 머릿속은 꽃을 한 아름 안은 채 웃고 있는 사쿠라자와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제비꽃을 닮은 보라색의 머릿결이 흩날릴 때마다 풍겨오는 꽃향기를 떠올린 이타도리의 손이 점차 느려졌다. 게임 속 캐릭터는 빨리 저를 움직여 상대방을 쓰러뜨리라 성화였지만, 이타도리는 게임의 존재를 지운 머리로 ‘그렇구나. 사쿠라자와, 꽃을 다루는 술식이라더니 어쩐지.’하고 쉰 생각에 빠질 뿐이었다.

띠로리링.

우스꽝스러운 효과음에 문득 액정을 바라보자 처참하게 사망해 두 눈 가득 X자로 가득 찬 캐릭터가 화면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뜨악한 표정으로 “으악! 후시구로, 나 죽었어!” 난리를 치자 이 매정한 친구는 팔짱을 낀 채 “잠이나 자, 제발.”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Tokyo Calling


“어이, 거기 남자 둘.”

“그 부르는 방식 좀 어떻게 안 될까?”

쿠기사키의 고압적인 음성에 이타도리가 끙 앓는 소리로 슬그머니 의견을 내자, 매서운 눈초리가 날아들었다.

“아앙? 불만이라도 있어?”

그건 불만이 있냐고 물어보는 게 아니라 협박이잖아.

목 끝까지 찼던 말이 쿠기사키의 험악한 눈매에 목구멍 아래로 쑥 내려갔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무래도 좋다며 제게 주어진 운명을 쉽게도 수긍하는 이타도리의 태도는 퍽 쿠기사키의 마음에 들었다.

드물게도 다 함께 쉬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어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후시구로를 찾다가 홀로 대기실 소파에 드러누워 게임 삼매경이던 이타도리는 잔뜩 빼입은 쿠기사키의 모습에 “어디 가?”하고 가볍게 물어왔다.

“쇼핑 간다, 쇼핑. 내가 부르면 재깍재깍 나와서 짐 들어줘야 하는 거 알지?”

“하아? 그러니까 나는 네 짐꾼이 아니라니까. …뭐, 부르면 나가겠지만.”

“안녕, 이타도리.”

의미 없는 항변을 하던 이타도리의 입이 이제 막 코너를 돌아 나온 사쿠라자와의 등장에 딱 다물어졌다. 드물게 교복이 아닌 사복 차림의 사쿠라자와는 제 모습이 어색해 자꾸만 저보다 작은 쿠기사키의 뒤로 숨으려 안간힘이었다.

“하나코 귀엽지?”

히죽히죽 웃는 쿠기사키의 말에 사쿠라자와가 “하지마, 노바라….”하고 얼굴을 붉혔다. 이타도리와 사쿠라자와가 은연중에 서로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쯤, 고전의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 놀려줄 셈으로 던진 말에 이타도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이나.

“응, 귀여워.”

잊고 있었다. 이타도리가 얼마나 좋은 녀석인지.

이타도리는 괜히 제 마음 들키는 게 쪽팔려 되레 화를 내거나 장난질이나 거는 여타 또래의 남자애들과 달리,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그런 감정을 드러냄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솔직한 대답에 쿠기사키는 천 년 만에 빛을 본 흡혈귀처럼 눈을 가린 채 “크윽.” 앓는 소리를 냈다.

입을 가리고 웃는 사쿠라자와의 모습에 씩 웃은 이타도리는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는 쿠기사키의 제안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누군가는 고전에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딱히 대꾸할 수 없었다.

“하여간 성실하긴.”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가던 쿠기사키가 제 옆에서 걷는 사쿠라자와를 휙 돌아봤다. 깜짝 놀란 사쿠라자와가 움찔 떨자 구불구불한 보랏빛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에 파도처럼 넘실댔다.

“넌 이타도리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야?”

“노, 노바라! 목소리가 너무 커!”

“참나. 이런 구석진 동네에서 누가 엿듣는다고.”

얼굴을 붉힌 사쿠라자와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붉은 토리이 아래서 우물쭈물 손가락을 얽던 그녀가 미간을 구기며 난감한 듯 웃었다.

“난 이타도리의 그런 점이 좋아.”

“네, 네. 다정하고 솔직하고 또 뭐랬지? 강인한 점 이랬던가.”

“노바라아! 그만 놀려!”

언젠가 쿠기사키의 계략에 휘말려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 관해 몽땅 들키고만 사쿠라자와는 그날 이후로 종종 이렇게 놀림당하곤 했다. 물론 본인의 반응이 귀엽고 재밌으니 그런 거지만, 사쿠라자와는 그런 쿠기사키의 마음은 꿈에도 모른 채였다.

*

“더는 못 돌아!”

“나도…. 발에 물집 잡힌 것 같아.”

의자 양쪽 가득 쇼핑백을 던진 채 카페 테이블 위로 엎어진 쿠기사키와 사쿠라자와가 우는소리를 하는 사이, 최근 시부야에서 가장 핫한 파르페가 그들 앞에 서빙됐다. 피곤한 건 피곤한 거고 인증사진은 인증사진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다양한 각도로 사진을 찍어댄 쿠기사키가 파르페를 푹 떠 사쿠라자와의 입 앞에 갖다 대자 작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달콤하고 시원한 파르페를 입안 가득 머금었다.

“으응!”

“맛있어? 끝내줘?”

사쿠라자와가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쿠기사키는 본격적으로 파르페를 흡입해나갔다. 장장 다섯 시간에 걸친 쇼핑으로 뚝 떨어진 당을 단숨에 채워주는 맛이었다. 눈물 날 것 같아. 울먹거리는 쿠기사키의 모습에 사쿠라자와가 쿡쿡 소리를 삼켜가며 웃었다.

파르페를 단숨에 반 컵이나 비워낸 쿠기사키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버릇처럼 인스타를 뒤적였다. 사쿠라자와가 찍힌 사진에 칼같이 하트를 누르는 이타도리의 흔적에 쿠기사키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얘네는 이렇게 티를 내면서 왜 사귀질 않아? 보는 내가 다 부끄럽다!

끌끌 혀를 찬 그녀의 눈에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정보가 들어왔다.

“하나코, 엄청난 소식이야!”

고개를 갸우뚱 꺾는 사쿠라자와의 눈앞에 휴대폰을 들이민 쿠기사키가 흥분한 채 테이블을 탕탕 두드렸다. 그 탓에 파르페가 담긴 유리컵과 금속의 티스푼이 부딪쳐 들뜬 그녀의 마음처럼 달그락달그락 요란하게 흔들렸다.

“내일 스크램블 스퀘어 중심으로 불꽃놀이래!”

그 말에 사쿠라자와도 드물게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쿠기사키의 휴대폰을 뚫어져라 살폈다. 언제나 수많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에서 펼쳐지는 도쿄의 불꽃놀이라니. 지역의 축제와는 또 다른 기대에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일 갈까? 가야겠지?”

“응, 응! 가고 싶어!”

“크으. 내일 제발 일이 안 생기면 좋겠는데. 후시구로하고 이타도리도 부르자! 뭐, 바쁜 일 생기면 이번만 고죠 선생님한테 맡기면 안 되려나.”

“아하하. 그게 뭐야.”

“학생들 부려 먹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 선생이지. 아, 여보세요? 이타도리, 우리 지금 돌아갈 건데 짐 들어줘. 하나코 발 물집 잡혔다니까 이지치씨랑 같이 와. …아앙? 이타도리 주제에 토 달지 마.”

사쿠라자와는 갑자기 들려오는 제 이름에 화들짝 놀라 황급히 쿠기사키를 말려봤지만 역부족이었다. 만족스럽게 통화를 종료한 그녀가 “30분이면 온대.”하는 모습에 사쿠라자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괜찮아, 노바라. 아직 물집 잡힌 것도 아니고.”

“그 상태로 더 걸었다가는 물집이 잡히겠지?”

“으음.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이지치씨도 바쁘실 거고 이타도리도 오랜만에 쉬는데….”

사쿠라자와의 이마에 쿠기사키의 검지가 닿았다. 아프지 않게 톡 미는 힘에 사쿠라자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넌 가끔 뭐든지 다 떠안으려는 버릇이 있더라.”

“…그랬나?”

“이런 점은 그 녀석이랑 너무 똑같아서 열 받는단 말이지.”

티스푼을 입에 물고 불량하게 흔들던 쿠기사키가 “그래서 좋아하는 건가?”하고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딱히 누군가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어본 적 없는 그녀로서는 제 동기끼리 이토록 눈에 뻔히 보이는 삽질을 해대는 꼴이 영 못마땅했다. 그냥 확 고백하고 화끈하게 사귀면 되는 거 아닌가. 고전이 연애를 금지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이타도리도 날 조, 좋아하는지 잘 모르고. 부담 주고 싶은 마음도 없어.”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로 손을 붕붕 흔들던 사쿠라자와가 이내 무릎 위로 두 손을 올린 채 꼭 말아 쥐었다. 힘없이 툭 떨구는 미소는 보는 사람의 마음이 저밀 정도로 아려서, 쿠기사키는 그만 창밖으로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노바라도 알잖아. 이타도리가 혼자 얼마나 많은 책임을 지고 있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만.

한숨을 푹 내쉬는 쿠기사키의 앞에서 사쿠라자와는 다 녹은 파르페를 티스푼으로 살살 휘저었다. 제각각 다채롭던 색감의 파르페는 눅진하게 녹아 구정물 같은 색으로 달짝지근한 향을 풍겼다. 빠져들면 꼭 죽기 좋은 정도로.

“좋아하는 마음만으론 어려운 것도 있으니까.”

이타도리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홀로 마음을 품는 게 허락된다면 사쿠라자와는 구태여 제 마음을 입 밖에 낼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의 짐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었다.

쿠기사키는 달아빠지다 못해 쓴 사랑에 푹 빠진 제 친구를 가여운 눈길로 흘겼다. 사쿠라자와의 등 뒤로 다가서는 인기척에 슬쩍 시선을 올리자 숨을 고르고 있는 이타도리가 보였다. 계단을 뛰어오른 탓에 헝클어진 앞머리를 눈치 주자, 이타도리는 입 모양으로 땡큐 하고는 짧은 앞머리를 매만졌다.

“욥.”

곧 들려오는 가벼운 인사에 화들짝 놀란 사쿠라자와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이타도리를 바라봤다. 설마하니 제 얘기를 들었을까 두근거리는 심장께를 꽉 쥐고 “빠, 빨리 왔네!” 말하니, 이타도리는 창밖에서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는 이지치를 가리켰다.

“이지치씨, 베스트 드라이버니까.”

“오, 그거 들으면 좋아하겠다.”

“그치?”

쿠기사키의 동조에 씩 웃은 이타도리가 사쿠라자와의 곁에 그득한 짐을 챙겨 들었다.

“걸을 수 있겠어?”

“응?”

“물집.”

힐끗 바라보는 시선의 끝이 향한 게 제 발이란 걸 안 사쿠라자와가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못내 신경이 쓰였는지 “업힐래?” 묻는 말에 쿠기사키가 됐으니까 얼른 나가자며 성화였다. 젠장. 후시구로라도 끌고 올걸. 혼자 있으니까 못 봐주겠네.

먼저 앞서 걷는 쿠기사키의 혼잣말을 못 들은 이타도리는 내내 제 앞에서 걷는 사쿠라자와의 발 뒷꿈치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업을걸. 그렇게 생각한 제 뺨을 찰싹 때리자 놀란 토끼 같은 두 눈이 휙 돌아봤다.

“아무것도 아니야.”

활짝 웃는 얼굴에, 사쿠라자와는 여름이면 본가 정원에 흐드러지게 피는 해바라기를 떠올렸다. 태양 빛을 쬐면 받은 것 이상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해바라기.

생긋 웃은 사쿠라자와가 다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는 걸 바라보면서 이타도리가 뺨을 긁적였다. 사쿠라자와가 다시 돌아보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분명 제 얼굴이 달아오른 걸 들킬 게 뻔했다.

퇴근길의 도쿄 거리도 문제없이 달리는 이지치의 아늑한 드라이브에 사쿠라자와는 창밖의 흔들리는 불빛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지친 심신에서 발생하는 부정적인 에너지로 도쿄의 공기는 매일 탁했다. 이런 날은 문득 시즈오카의 본가가 떠올랐다. 사쿠라자와는 흔들리는 차창에 이마를 대고 그리운 풍경을 그렸다. 습기를 머금은 흙으로 푹신한 정원과 흐드러지게 핀 꽃 같은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종종 찾아오는 향수병이 조금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사쿠라자와.”

다정한 음성에 돌아보자, 이타도리가 손을 내밀어 왔다.

조심스레 그의 손에 제 손을 포개자 커다란 손이 가녀린 손가락 사이에 얽혀들어 부드럽게 감쌌다. 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어깨가 한결 부드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신호가 길어진 탓에 귀가가 더뎌지자 이지치는 어느샌가 조용해진 차 안을 가만히 둘러봤다. 조수석에서 세상모르고 잠든 쿠기사키와 뒷좌석에 앉아 서로 기대어 잠든 분홍색과 보라색의 머리카락을 보고는 소심한 어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불꽃놀이?”

어딜 다녀왔는지 피곤한 기색의 후시구로가 제게 들이밀어 지는 액정을 살피고는 표정을 구겼다.

“그것도 시부야 한복판에서?”

“그래! 멋있겠지?”

“아니, 완전 붐빌 게 뻔하잖아. 굳이 갈 이유가….”

정신 사나운 건 딱 질색인 후시구로는 굳이 이런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거절할 셈으로 손바닥을 들어 흥분한 쿠기사키를 뒤로 물렀지만, 삽시간에 험악해지는 그녀의 표정에 말끝이 흐릿하게 퍼져버렸다.

“이타도리. 넌 갈 거야?”

이럴 때 필요한 건 저와 의견이 맞는 사람이었다. 냉정한 후시구로는 다수결의 원칙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 생각했다. 이타도리는 그런 면에서 가장 좋은 타겟이었다. 그는 보통 이름을 부른 뒤 의견을 묻는 상대의 갈피를 따라주는 경향이 있었다.

“응. 갈 건데.”

“…하아.”

선수를 쳤겠다.

부글부글 끓는 눈으로 쿠기사키를 바라보자 입을 가린 그녀가 풉 소리 내 비웃었다. 하지만 쿠기사키도 억울한 면은 있었다. 그녀가 고전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불꽃놀이 이야기를 꺼낸 건 사실이지만, 이타도리는 순전히 사쿠라자와의 흥미에 어울려줬을 뿐이었다.

「축제 가고 싶어?」

그렇게 묻는 이타도리의 음성에 사쿠라자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지만 않았다면 후시구로도 붐비는 시부야 한복판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아무래도 도쿄로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대도시의 유흥을 마음껏 즐기고 싶은 어린 욕망은 쿠기사키 뿐만 아니라 사쿠라자와에게도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이타도리가 자수정처럼 빛나는 자색의 눈동자를 앞에 두고 무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 가면 되지! 기대된다.”하며 웃는 그의 얼굴에 작게 발을 구르는 사쿠라자와가 무척 귀여웠다는 건 저 홀로 간직할 셈이었다.

이타도리가 여자들 편에 섰으니 후시구로는 도망칠 길이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가 “호출 오면 바로 돌아오는 거야.”하고 으름장을 놔도 쿠기사키와 사쿠라자와는 서로 끌어안은 채 기분 좋은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후시구로가 익숙한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없이 가벼운 고죠는 자초지종을 듣고는 “축제? 좋아~”라며 흔쾌히 허락해줬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이만큼 고생을 해주는데 그 정도도 못해주겠냐는 말은 후시구로가 칼같이 전화를 끊어버린 바람에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일은 없었다.

*

“인파! 미쳤어!”

“내가 뭐랬어?”

스크램블 스퀘어가 내려다보이는 시부야의 카페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후시구로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이타도리를 타박했다. 복잡한 도쿄 한복판에서 진행된다는 불꽃놀이 소식에 평소보다 인파가 몰렸다. 이런 날은 필연처럼 사고가 따랐기에 후시구로의 신경이 날카로웠다.

창에 붙은 사쿠라자와는 정처 없이 오가는 수많은 군중에 경탄하며 작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언제나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 다니며 음지에서 활동하는 일이 생업인지라 이토록 셀 수 없을 정도의 인파를 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이거 여기서 구경할 때가 아닌데? 밑에 포장마차도 열렸어. 푸드트럭 줄 선 것 좀 봐.”

“잘도 허가를 내줬군.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데.”

“뭐 어때! 후시구로도 매일 그렇게 딱딱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늘은 즐기자, 응?”

“하아…. 저 인파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제정신이냐, 너희.”

후시구로의 질린 투에도 쿠기사키는 눈을 반짝였다. 작게 웃은 사쿠라자와가 너는 괜찮으냐는 후시구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애들 데리고 나온 주말의 아빠도 아니고. 사쿠라자와가 가겠다면 이타도리는 분명 따라나서겠다 할 테니, 결국 또 다수결의 승리였다.

별수 없이 몸을 일으키는 제 모습에 신이 난 친구들을 보니 아무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후회하지 마라.”

종종 성격 나쁜 미소를 짓는 건 후시구로의 버릇이었다.

사쿠라자와는 시부야의 지면에 발을 붙이게 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후시구로의 말뜻을 이해했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저 군중에 휩쓸려 함께 어울리고 싶었는데 막상 내려와 보니 어디론가 휩쓸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어디론가 모습을 감춘 쿠기사키의 “으아아…. 살려 줘어….”하는 힘없는 SOS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노, 노바라!”

우왕좌왕 어쩔 줄 모르는 사쿠라자와가 쿠기사키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움직이려 하자, 작게 혀를 찬 후시구로가 이타도리를 향해 그녀의 어깨를 밀었다. 작게 소리친 사쿠라자와를 안정적으로 받아낸 이타도리가 “쿠기사키 잘 부탁해!”하자 후시구로는 너희를 따라나오는 게 아니었다며 서둘러 인파 속에 몸을 던졌다.

만원 버스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사쿠라자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등 뒤에 닿는 이타도리의 체온에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우와. 사람 너무 많다. 잠깐 저쪽으로 갈까?”

“응? 아…!”

제 허리를 감싸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 사이를 잽싸게 돌파하는 이타도리의 속도에 사쿠라자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주변에서 “우악! 앞 좀 보고 다녀!”하는 남자의 고함에 이타도리는 “어, 미안!”하고 손을 들어 가볍게 넘기기도 했다. 혹시라도 사쿠라자와의 몸이 타인에 닿을까 봐 조금 더 추슬러 안자 그녀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미안, 사쿠라자와.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괘, 괜찮아. 그보다 나 무, 무거운데….”

말하면서도 울고 싶어진다. 양팔로 얼굴을 감춘 채 “미안해, 이타도리.”하는 그녀의 음성에 이타도리는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하나도 안 무거워. 신경 쓰지 마.”

시부야에서도 가장 후미진 골목으로 몸을 숨긴 이타도리는 그제야 사쿠라자와를 사뿐히 내려주었다. 사쿠라자와는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다이어트를 해둘걸. 그치만 요즘 노바라하고 여기저기 다니느라 맛있는 디저트를 많이 먹었었지. 아아, 나는 정말 바보야!

얼굴이 붉어진 사쿠라자와의 옆으로 허리를 숙인 이타도리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쿠라자와, 멀미나?”

이마에 닿아오는 이타도리의 손은 너무도 따뜻했다. 사쿠라자와는 내내 감춰왔던 마음이 금방이라도 들킬 것 같아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때, 거리를 등지고 선 이타도리의 뒤에서 붉은 불길이 쏘아 올린 화살처럼 쉬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퍼엉

도쿄의 밤하늘에 퍼지는 찬란한 불꽃이 건물 틈에 가려져 잔상만 보이고 사그라졌다. 퍼벅 퍼버벅 곧이어 마치 총을 연사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큭. 크흑….”

“아하하!”

“말이 되냐고! 여기까지 나왔는데 저만큼 보이는 게 말이 돼?”

동그랗게 커진 눈이 마주쳤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웃어서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힌 사쿠라자와가 풀려버린 긴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옆에 털썩 주저앉은 이타도리는 여전히 보일 듯 말 듯한 불꽃에 잔웃음을 흘렸다.

“후시구로랑 쿠기사키는 봤으려나?”

“이따 만나면 물어보자.”

“아아. 아쉽게 됐네. 도쿄에서 첫 불꽃놀이였는데.”

다음에 또 보러 오자.

그 말은 차마 누구의 입에서도 쉽게 나오지 못했다. 불꽃의 잔해를 좇던 사쿠라자와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는 사쿠라자와의 옆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터진 불꽃에 이타도리와 사쿠라자와의 뺨에 붉은 열이 옮았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의 눈을 5초 이상 바라보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5.

언제 들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그 이야기가 왜 지금에 와서 떠올랐을까?

4.

머릿속에 시끄러운 경보가 울리는데 어쩐지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3.

기침처럼 튀어나와버리는 이 감정을 어떻게 감출 수 있을까?

2.

“키스…해도 돼?”

1.

떨리는 그 목소리에 사쿠라자와의 두 눈이 잘게 떨리며 감겼다. 

조심스럽게 닿은 입술이 뜨겁고 부드러워서 이타도리는 바닥을 짚은 손으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허락을 구하는 듯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핥자 머뭇머뭇 열어 절 받아들이는 입술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사쿠라자와는 입에서도 꽃향기가 났다. 장미처럼 화려한 것이 아닌 어딘가 수줍고 아련한 향에 머리가 그만 아찔해져 간다.

질척거리는 혈기가 뒷골목에서 한데 뒤엉켜 진득한 소리를 냈다. 이타도리는 제 욕망이 더 짙어지기 전에 천천히 사쿠라자와로부터 입술을 뗐다. 아쉬운 듯 끝까지 그녀의 아랫입술을 쪽 빨아들이고서야 이타도리는 이게 아카시아 향이란 걸 눈치챘다.

발갛게 물든 그녀의 얼굴에 열이 훅 끼쳐 올랐다. “더, 덥다!” 외치는 목소리가 꼴사납게 뒤집어졌다. 사쿠라자와의 손을 잡아 일으켜준 그는 골목을 나서기 전 그 작은 손에 제 깍지를 끼워왔다.

빈틈없이 들어차는 이타도리의 단단한 손에 사쿠라자와는 발끝부터 곱아 드는 간질간질한 기분에 푹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인파 사이를 헤치고 걷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가 실종했다. 분홍색 머리카락 아래 붉은 얼굴과 보라색 머리카락 속에 감춰진 붉은 얼굴이 제 친구들을 찾겠다는 명목으로 시부야 거리를 배회했다.

“사쿠라자와, 잠깐만.”

한참을 돌아다녀도 후시구로와 쿠기사키는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잘 구경하고 있겠거니 생각한 이타도리는 문득 눈에 들어온 가게에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이 붐비지 않는 벤치에 사쿠라자와를 앉히고 가게를 향해 달려갔던 그가 머지않아 작은 꽃다발을 쥐고 돌아왔다. “응.”하고 건네는 꽃다발을 안아 들자 기분 좋게 퍼지는 향기에 내내 긴장하고 있던 사쿠라자와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제야 이타도리의 얼굴에도 조금의 여유가 돌아왔다.

“그래도 첫 데이트잖아.”

생각지도 못한 말에 사쿠라자와는 꽃다발 안으로 얼굴을 폭 파묻어 버렸다. 으악 소리친 이타도리가 괜찮으냐며 상태를 살피자, 물기 어린 얼굴로 고개를 든 사쿠라자와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와 함께 짧은 숨을 토해낸 그가 꽃다발에서 꽃 한 송이를 빼내 줄기를 짧게 잘라내곤 보라색 머리카락 사이 드러난 귀에 꽂아주었다. 사쿠라자와를 보면 항상 이렇게 해보고 싶었다. 하나코라는 이름에 정말 잘 어울리는지 궁금해서.

“하나코, 역시 꽃이랑 잘 어울리네.”

씩 웃는 얼굴에 사쿠라자와는 입을 벙긋거리다 꾹 다물었다.

저 멀리서 후시구로와 쿠기사키가 잔뜩 지친 모습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척 보기에도 끝내주는 데이트를 즐긴 것 같은 모습에 두 사람은 구태여 놀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가는 사쿠라자와가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도 재미없어!”

“다음부터는 이런 데로 부르지 마.”

“후시구로군, 그렇게 매정하면 여자한테 인기 없어.”

“없어도 되거든?”

“둘 다 뭐하다 이제 온 거야? 불꽃놀이는 봤어?”

“말도 마. 우리가 뭐하다 이제 왔냐면….”

무용담을 떠드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걸으며 사쿠라자와는 어지러운 도시의 불빛을 눈에 담았다. 예전만큼 낯설지 않은 이 콘크리트 정글에서 그녀는 제 걸음에 맞춰주는 이타도리를 바라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아아, 도쿄. 이 마법의 도시.

너는 날 자꾸만 울렁거리게 만들어.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