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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 vengeance

암굴왕 드림 | 쩌리 님 커미션 :3

rhindon by 댜

“휘핑크림 올려 드릴까요?”

“뭐래?”

J는 무심코 물었다. 암굴왕은 J를 흘낏 내려다보고는 친절하게 되풀이해 주었다.

“휘핑크림을 올리겠냐고 물었다.”

“많이 달라고 해줘. 엄청 많이.”

얼굴에 못 미더워하는 빛이 비치기는 했지만, 암굴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딴 데 정신이 팔린 J는 암굴왕이 직원에게 말을 옮기는 것도, 직원이 미소를 숨기며 주문을 받는 것도 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오후가 다 지나간 지금까지, 괜찮게 풀린 일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날이었다. 엉킨 머리카락에 걸려 빗살이 딱 부러지질 않나, 모닝커피를 수혈하러 들른 카페에서는 하필 에스프레소 머신이 고장 나 있댔고. 눈앞에서 버스를 놓치고서 전광판을 보니 다음 버스는 이십 분 뒤라던 것도 모자라, 그날따라 첫 강의 교수는 안 하던 출석 체크를 다 했다. 점심 즈음에는 한없이 짙어진 우울을 안고 암굴왕에게 문자를 하려다 끼니였던 빵을 떨어뜨렸다.

그 뒤로 이어진 일들까지 전부 거론하자면 입이 아플 지경이므로 생략. 벤치에 앉아 처량하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J 앞에 암굴왕이 나타난 것이 조금 전이었다. 암굴왕이 J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사이, 눈치 없는 위장이 꼬르륵거렸다. 뭐라도 먹었나? 응, 그게 말이지. 초라한 대답을 듣자마자 암굴왕은 그대로 J를 근처의 카페로 데려왔다.

우습게도, 암굴왕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축 처졌던 기분은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말하자면 이 우중충한 하루가 반쯤은 카페인 부족과 저혈당 탓이 아닐까, 떠올리게 될 정도로는.

그러니까 달다구리가 당긴다면 푸딩 라떼 한 잔쯤, 고혈당이 찾아올 만큼 마셔줘도 괜찮잖아?

라떼가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기가 송송 맺힌 일회용 컵이 손에 쥐어지자 저절로 헤실거리는 웃음이 샜다. 암굴왕은 흐뭇함과 어이없음이 뒤섞인 표정으로 J와 마주 웃어주었는데, 그것까지도 J의 마음에는 쏙 들었다.

유리문을 나서며 J는 빨대에 입을 대고 힘껏 빨았다. 익숙한 휘핑크림과 그 뒤를 따르는 차가운 액체, 냉기에 흠칫하고 나면 입안에 퍼지는 진한 단맛과 쌉싸름한…….

말차 향?

“에.”

J는 저도 모르게 의아한 소리를 흘렸다. 암굴왕은 J의 등 뒤로 문을 닫으며 물었다.

“왜 그러나?”

“맛이 좀 이상해서. 이거 내가 주문한 게 아닌 것 같은뎅…….”

맛뿐이랴, 인제 보니 색깔까지 이상했다. 눈살을 찌푸린 암굴왕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내라. 제대로 바꿔오지.”

든든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J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지. 그냥 마실게!”

평소라면 나서서 펄펄 뛰었을 일이었으나 오늘은 달랐다. 가뜩이나 엉망인 하루에 문제를 더하고 싶지 않았다. 음료 하나 잘못 받은 것쯤, 뭐 어때서? 속상할진 몰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잖아. 그것보단 그의 기분을 알아채고, 달래려 애를 써 준 남편이 아쉬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문제의 남편도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어어 하는 새 J의 손에서 컵을 빼앗아 든 그는 급기야 카페 문밖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진지한 어조로 선언했다.

“부인. 난 부인의 복수자요.”

왐마야.

이거 난리 날 만한 상황인 거 아니야? 내 복수자래, 내 거래……. 아니지, 복수자란 게 더 중요한가? J가 갈팡질팡하는 생각을 걷잡지 못하는 새 암굴왕은 허리를 숙이며 J의 귓가를 한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쪽. 뺨과 눈물점 위로 연달아 입을 맞춘 그는 둘의 속눈썹이 스치도록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동자에서는 강렬한 열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여튼 멋있다니까. 암굴왕의 깊은 눈에 헤어나지 못할 만큼 빠져버린 J는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암굴쿤…….”

“그럼 다녀오겠다.”

얼굴이 뒤로 물러나고, 손이 떨어졌다. 암굴왕은 곧장 문 너머 카운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카페 문간에 혼자 남겨진 J는 멍하니 눈만 깜박거리다가, 한 손을 올려 뺨을 만졌다.

그리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남편, 정말 사생결단을 내고 오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도 아니었다. 휘핑크림을 산처럼 쌓은 푸딩 라떼를 들고 돌아온 암굴왕은 어쩐지 몹시 뿌듯해 보였다. J는 별수 없다는 듯이 웃어주고는 냉큼 컵을 받았다. 이번에야말로 기대했던 맛이었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 그런가, 카페 주변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근처에 맛집이 여러 곳 생겼다고는 하던데. 일찌감치 켜진 가로등과 화려하게 빛나는 간판, 그 아래로 북적이는 인파. 도회적이면서도 낭만이 담긴 풍경이었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암굴왕과 J는 나란히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그저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가게들을 하나둘 지나칠 때마다 유행하는 노래들이 소리를 높였다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숙녀를 에스코트하듯 J와 팔짱을 꼈던 암굴왕은 사람들에게 부딪히는 일이 잦아지자 이젠 J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싼 채였다. J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음료를 마시다가, 빨대로 올라오는 것이 거의 없게 되자 아예 뚜껑을 열었다. 얼음이 녹아 좀 밍밍해지긴 했지만, 부서진 푸딩에 뒤섞인 휘핑크림은 여전히 달콤했다.

컵을 비운 J를 한 번 내려다본 암굴왕은 둘을 멈춰 세웠다. 노란 조명을 크리스마스 갈랜드처럼 매달아 둔 옷가게 앞에서였다.

“묻었다.”

“어디?”

J는 생각 없이 입가를 더듬다가, 암굴왕이 고개를 젓자 손거울을 꺼내려 가방을 뒤적였다. 피식 웃은 암굴왕은 J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가만히 있어라.”

닦아 주려나, 했는데 암굴왕은 J의 얼굴을 이리저리 기울일 뿐이었다. 그러고는 J가 도로 물러나려는 찰나, 훅 가까이 다가왔다. 숨결이 먼저, 그리고 입술이 J의 입 언저리에 닿았다. 그러더니 그 사이로 뭔가 촉촉하고 말랑한 게…….

사람이 이렇게 많은 데서, 이게 무슨 짓이야!

뻔뻔하게 휘핑크림을 핥아낸 암굴왕은 거기서 만족하지도 않았다. 입가에서 귀까지, 부드럽게 키스하며 올라간 그는 J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달군.”

“머, 먹어보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엉?”

“부인이.”

그리고 J의 허리에도 남은 손이 얹혔다. 명백히 불순한 의도를 가진 손길이었다. J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가, 암굴왕이 다시 입술을 붙여오기 시작하자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귓불과 턱 모서리에 이어 목으로 내려가는 일련의 키스는 정말로 맛을 느끼는 듯 느릿했고, 또 진득한 구석이 있었다.

암굴왕의 어깨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이는가 싶더니, 눈앞은 순식간에 어느 담벼락으로 바뀌어 있었다. 우렁차게 울리던 유행가도 이젠 몇십 미터는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듯 희미했다.

언제나처럼 암굴왕은 J가 원하는 바를 빤히 꿰뚫어 보았다. 망설일 이유가 없어진 J는 암굴왕을 꼭 끌어안으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J의 허리를, 다른 손으로는 목 뒤를 단단히 감싸며 능숙하게 J의 입술 위로 제 입을 포갰다. 입 안에 남은 단맛 위로 암굴왕의 숨이, 얇은 타액이 덧씌워졌다. J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리감겼다.

행복하다.

하루의 모든 불운이 깔끔히 잊힐 만큼 충만한 기쁨이었다. 아름다운 저녁, 사랑하는 반려, 그리고 설탕보다 달콤한 키스.

호흡이 가빠질 때까지, 아니, 그러고도 한참 더 입을 맞춘 뒤에야 암굴왕은 J를 놓아주었다. 포옹은 풀지 않은 채였다. 저도 모르게 까치발을 든 J의 체중을 그대로 받아내면서도 암굴왕은 깃털 베개를 안은 듯 끄떡없었다.

“있잖아용.”

J는 헤헤거리며 물었다.

“아까 카페에서, 진짜 복수하고 온 건 아니지?”

“걱정되나?”

글쎄, 암굴왕이 원하는 일이라면 J는 언제든 찬성, 대찬성이었다. 뭐하러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으로 입술만 삐죽이고 있자 암굴왕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품에 갇힌 J의 몸까지 뒤흔들릴 만큼 크고 즐거운 웃음소리였다.

“실수였다며 사과하더군. 그리고 좋아 보인다고 했다.”

암굴왕은 손마디로 J의 뺨을 쓸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안, 붉은 눈동자에 그대로 J가 비쳤다. 뾰로통한 입, 암굴왕을 따라 하듯 맑게 웃고 있는 눈, 키스 중의 손길 탓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스스로 조금 신기할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이었다. 암굴왕이 바라보는 자신은.

“우리가?”

“우리가.”

아잉, 부끄럽게. J는 암굴왕의 등 뒤로, 깍지 낀 손을 팡팡 쳤다. 암굴왕은 너그러운 미소를 짓고는 J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몹시 가까운 거리였다.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또 한 번 입술을 맞댈 수도 있을 터였다.

“그래서, 기분은 풀렸나?”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대답 대신 J는 고개를 기울였다. 눈치 빠른 남편이 다시 거리를 좁혀, 세상 무엇보다 달콤한 키스를 이어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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