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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플리온 드림 | 삐쭈 님 커미션 :D

rhindon by 댜

“□□□□ 님.”

정중한 인사에 S는 고개를 숙여 묵례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청년은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마 전부터 나우플리온의 집에는 검의 길을 걷는 젊은이들이 돌아가며 한 명씩 머물고 있었다. 낮에는 가벼운 말 상대 노릇을 하려 들다 쫓겨나기 일쑤였지만, 저물녘이 다가오면 나우플리온도 그들을 대개 내버려 두었다. 오늘의 청년이 문간 안쪽, 등받이 없는 의자에서 서둘러 일어서는 것을 보아하니 나우플리온의 기분이 괜찮은 모양이었다. 해도 지지 않았는데 집안에는 들여놓았으니까.

“방에 계신가요?”

“책을 읽고 싶으니 조용히 하라시던걸요.”

그가 책을? 미심쩍게 눈을 깜박인 S는 다른 말 없이 나우플리온의 방으로 향했다. 자주 환기를 하는데도 집 안에는 진한 약 냄새와 병실 특유의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씁쓸하면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옛 상처가 다시 이빨을 드러낸 후 나우플리온은 점차 쇠약해졌다. 병세가 진행하는 속도는 종잡을 수 없었다. 체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자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한 달여 전부터는 집 밖으로 나서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사흘에 한 번, 모르페우스의 왕진에만 동행하던 S의 방문이 매일로 바뀐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모르페우스의 지시 때문이었는데, 나우플리온의 병을 위함이었는지, 두 사람의 마음을 위함이었는지는 불분명했다. 차마 이유를 묻지는 못했으나 스승의 배려라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비슷한 배려를 S는 여러 차례 경험하게 되었다. 모르페우스의 비좁은 연구실 대신 자기 집의 남는 방에서 지내도록 해준 수도사라든지, 장에 들를 때면 사제님과 (서클릿의 사제를 일컫는 게 아니란 건 S의 눈치로도 알 수 있었다) 나누어 먹으라며 신선한 과일을 얹어주는 상인이라든지…….

나우플리온 본인은 개의치 않았던 바였지만, 달여왕의 백성들에게, 그중에서도 검의 길을 숭상하는—다시 말해 대부분의—청년들에게 그는 꽤 인망이 높았다. 대외적으로 그는 본연의 직무에 충실하면서도 탁월한 실력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이따금 보이는 괴짜 같은 면모도 가벼운 일탈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큼. 더군다나 지금의 병세는 그가 십 년 전 괴물과 맞서 싸우고 얻었다는 것이었다. 소문이 퍼지기 전에도 그를 안타깝게 여기던 사람들은 이제 그의 집 옆을 지날 때면 발뒤꿈치까지 들고 살금살금 다닐 정도에 이르렀다.

하지만 S는 그런 태도에서 감사보다는 불안을 먼저 느꼈다.

방에 들어선 S는 약병과 기구가 든 가방을 내려놓으며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는 창가로 밀어붙여 놓았다. 그 위, 두 벽이 수직으로 만나는 모서리에 흰 튜닉을 걸친 남자가 기대앉아 있었다.

“나우플리온.”

멍한 눈이 S를 돌아보았다. 마른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기까지 하나, 둘, 셋.

“S. 오늘도 왔어?”

“어째 한숨도 못 잔 얼굴이야.”

S는 침대 옆 낮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나우플리온은 피식 웃고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목의 힘줄이 돋았다가 가라앉았다. 이불 위에는 얇은 책 한 권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는데, 내용이 궁금해 기웃거리니 글자 방향이 거꾸로였다. 바깥의 청년을 피하려고 대충 둘러대는 데 쓰였던 모양이었다.

S는 무릎 위로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았다.

한 사람은 집에 갇힌 병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취미랄 게 없으니 대화는 초장부터 막혀 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제자 자랑을 하든, 사람들 욕을 하든, 하다못해 날씨에 대한 불평이라도 꺼냈을 나우플리온은 이날따라 영 달갑지 않은 표정만 하고서 뚱하니 앉아 있었다.

이런 상황은, 침묵을 스스로 채워야 하는 처지는 낯설었다. 오늘도 말없이 나우플리온의 곁만 지키다 떠날 미래를 내다보며 S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시한부의 연인이란 노래 속에서나 아름답지, 실제로는 꽤 지루한 신분이었다.

“잠이 안 와서 그래? 모르페우스 사제님께 수면제를 달라고 할게. 그래도 체력은 비축해 놔야지.”

“종일 집 안에만 있는데, 피곤할 리가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나우플리온은 눈 아래에는 너구리가 이웃사촌을 외칠 만큼 짙은 그림자를 달고 있었다. 그가 쉽게 잠들지 못하는 이유를 아는 S는 다시 한번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침대 틀에는 밧줄이, 나우플리온의 양손에는 두꺼운 끈이 묶여 있었다. 광증이 처음 발작한 후 그가 직접 부탁한 대로.

본래 그토록 굳건한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의 의식은 폭풍을 헤치는 작은 조각배 같았다. 경계를 늦출 때면 광증은 어김없이 밀려와 그를 잠식했다. 낮 동안에는 그의 의지로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고, 깊이 잠들어 있을 때는 오히려 안전했지만, 잠들기 직전이나 깨어난 직후는 위험했다.

그렇다고 종일 골방에 가둬둘 수만은 없으니 타협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손목을 두른 가죽끈은 안쪽에 양털을 덧대고, 바깥에 줄을 동여매거나 풀 수 있게 고리를 달아 놓았다. 구멍을 통해 쇠 버클로 고정하는 방식이었는데, 처음 제작한 다음부터 이제껏 두 번 새로 구멍을 뚫어야 했다. 길이를 다시 줄일 날도 멀지 않았을 것이다.

나우플리온의 손등 위로 손을 겹친 S는 가죽끈 안으로 검지를 밀어 넣어 보았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팔뚝에서 아직은 맥이 뛰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을까?”

누군가 자신의 입을 빌려 대신 말한 것만 같았다. 평소답지 않은 제안에 나우플리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있겠다고?”

“이래 봬도 난 서클릿의 사제의 제자야. 당신은 잠이 필요한 환자고요.”

“자장가도 불러주시나, 사제의 제자님?”

웃으며 장난스레 물은 나우플리온은 곧이어 조금 숙고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지 말라고 묶어놓는 거잖아?”

S는 가볍게 말했다.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단 것을 뻔히 잘 알면서도, 오직 좀 더 오래 함께 있고 싶다는 이유로.

S의 마음을 읽었는지, 나우플리온은 더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밧줄을 매는 법을 가르쳐주고 몇 번 반복하게 시켰을 뿐이었다. 옆집 이웃이 저녁거리를 가지고 찾아왔을 때 그들은 이미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조용히,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래서 결과가 어땠냐면, 거한 실패였다.

등잔 빛 아래 나우플리온 대신 『어린이를 위한 101가지 동요』를 훑어보던 S는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가, 난데없이 들린 뿌득 소리에 흠칫하며 깨어났다. 그런 소리가 들려올 곳이라고는 침대밖에 없었다.

“나우플리온?”

돌아온 대답은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S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기 무섭게, 무언가 묵직한 것이 그를 덮쳤다. 나우플리온이었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체중이 그대로 S 위로 실렸다. S는 의자 모서리와 바닥에 연달아 세게 머리를 찧으며 넘어졌다.

“윽!”

젠장, 무겁잖아!

S는 간신히 나우플리온과 제 몸 사이에 팔 하나를 끼워 넣었다. 그래 봤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환자라고는 하나, 건강할 때는 대륙의 강자들과 견주어 손색이 없던 사람이었다. 살이 내렸대도 아직 근골이 다 상하지는 않았다. 나우플리온의 몸 아래 짓눌린 S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발버둥 쳤지만, 그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 미소라곤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듯 일그러뜨린 얼굴. 구겨진 튜닉 아래 드러난 빗장뼈. 눈에 묻힌 채 얼어 죽은 짐승을 보았었다. 봄이 와 눈이 녹으면, 해골 위로 검은 가죽만이 남아 달라붙어 있는 것을.

몸에서 힘이 빠졌다.

나우플리온의 왼손은 여전히 침대 틀에 묶여 있었으나, 다른 손이 자유로운 이상 밧줄의 길이로는 운동 범위를 충분히 제한할 수 없었다. 문제의 오른손이 S의 목 위로 덮였다. 조르는 듯 그러지 못하는, 어딘가 불완전한 동작이었다. 가죽끈이 느슨해졌다고는 해도 손을 다섯 손가락 멀쩡히 빼낼 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경황이 없는 중에도 S는 짐작했다. 엄지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걸 봐서…….

“나우, 플리온. 나야. 당신…….”

나우플리온의 두 눈은 정말로 미친 것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병세가 짙어지며 깊게 파인 안와는 그를 한층 시체 같은 몰골로 만들어놓았다. 볕을 보지 못해 파리하게 바랜 안색, 불거진 광대뼈, 새로 씹었는지 핏방울이 맺힌 창백한 입술.

숨이 가빠 왔다. 손가락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는 해도 체중이 실린 압력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하지만 어떤 생명의 위협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이 순간, 모든 가장이 벗겨져 나간 나우플리온이었다.

이런 모습이었나, 애써 괜찮은 척하려 하지 않는 당신은?

S는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든 그의 얼굴을 직시하려는 시도였다. 차마 눈을 감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광기로 번뜩이는 눈동자마저 S는 결국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때 그 위로 흰 천이 나타났다.

“□□□□ 님!”

아까 문가를 지키고 있던, 검의 길을 걷는 청년이었다. 잘도 기척을 숨기고 들어온 그는 넓은 수건으로 나우플리온의 머리를 통째로 휘감고는, 달리는 말의 고삐를 잡아 세우듯 양 끝을 힘껏 당겼다. 나우플리온의 몸이 그대로 뒤로 꺾였다.

예전 같았다면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었겠지만, 광증이 도진 나우플리온은 한 마디 신음도 없이 얼굴을 덮은 수건에 헛손질할 뿐이었다. 청년은 잰 동작으로 수건을 머리 뒤에서 묶어버린 다음 나우플리온을 끌어안듯 덮쳤다. 균형을 잃은 나우플리온이 도로 앞으로 넘어지기 직전, S는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 청년은 나우플리온의 등에 올라탄 채 풀려난 손목을 잡아 바닥에 눌렀다.

“□□□□ 님, 괜찮으십니까?”

S는 생각했다. 괜찮은 건가, 이게?

청년의 빠른 구조도 구조였고, 나우플리온에게 붙잡혔을 때도 되새겨보니 그리 위험하지 않았던 듯했다. 적어도 누가 달려들었는지도 모를 새에 목이 꺾이지는 않았잖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인데.

하지만 몸이 오한이라도 든 듯 바들바들 떨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청년에게 제압당한 채 바닥에서 몸부림하는 나우플리온을 내려다보던 S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나요?”

“밤에 가끔 깨어나셔서요. 저, 계신 김에 진정제를 부탁드려도 될지. 제가 손이 남질 않아서요.”

S는 간신히 두 발로 일어서 침대 머리맡의 탁자로 다가갔다. 직접 써야 할 상황을 맞닥뜨린 적은 없었지만, 진정제의 위치는 알고 있었다. 밀랍으로 봉인된 단지 중 하나를 집어 깨뜨리자 악취에 가까운 냄새가 풍겼다. 단지 안에 든 해면은 이럴 때 사용하기 위해 독한 진정제에 미리 적셔둔 것이었다. 수건 아래로 해면을 쑤셔 넣고 얼마 가지 않아 나우플리온은 잠잠해졌다.

청년과 힘을 합쳐 나우플리온을 침대로 밀어 올리면서, S는 나우플리온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고 생각했다. 의식이 없는 사람이란 원래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지기 마련인데도.

끝으로 살펴본 나우플리온의 오른손은 예상한 대로 벌써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모르페우스를 불러와야 하겠으나, 손의 뼈를 다치지는 않은 듯했고 또 시각이 워낙 늦었다. 그렇다면 날이 밝기를 기다려도 되겠지……. S는 심호흡하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이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정도는.

하지만 가방에서 붕대를 꺼내 감고 있으려니 진이 다 빠졌다. 대륙을 유랑할 때도, 모르페우스의 일을 도울 때도, 누구의 상처를 앞두고서도 손을 떤 적은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유난히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몇 번 실수한 끝에야 붕대 끝을 클립으로 고정할 수 있었다.

“차라리…….”

무심코인 듯 입을 열었던 청년은 말끝을 흐렸다. S는 이를 악문 채 그 뒷말을 짐작해 보았다. 차라리, 어서 죽는 게—

그러나 청년은 때맞춰 말을 바꾸었다.

“이솔렛 님께서 어서 돌아오셔야 할 텐데요.”

S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솔렛은 치료제를 찾으러 섬을 떠난 것이었지만, 청년의 생각이 향하는 곳은 치료제가 아닐 테다. 사제직을 물려받을 후계자겠지. 그리고, 데스포이나와 모르페우스가 나우플리온의 죽음을 나서서 권할 리 없는 이상, 그에게 마지막 선고를 내려줄 사람은 다음 대 검의 사제여야 했으니까.

그런데도 S는 거기에 말을 얹을 수 없었다. 검의 길을 걷는 젊은이 앞에서 나우플리온을 욕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우플리온은 일리오스와 달리 달의 섬에 벌어둔 미움이 없었으나, 그가 죽어야 할 때가 온다면—그의 광증이 섬에 미치는 어둠이 그간의 공을 넘어선다면, 섬은 가차 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그 순간을 미루지는 못할망정 앞당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고마워요.”

대답 대신 S는 축객령을 겸한 인사를 건넸다. 눈치를 챘는지, 아니면 미쳐 가는 검의 사제를 더 오래 지켜보고 싶지는 않았던지, 청년은 꾸벅 허리를 숙인 다음 방을 나섰다. 교대할 사람이 올 때까지는 그가 이 집을 지키고 있을 터였다. 섬사람들을, 나우플리온으로부터.

그러자 방 안에 남은 것은 그와 나우플리온뿐이었다.

방금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 아무래도 현실 같지 않았다. 도로 침대에 뉘어진 나우플리온은 무고한 순례자처럼 잠들어 있었다. S는 후들거리는 팔을 뻗어 쓰러졌던 의자를 도로 세우고, 그 위로 기어 올라가다시피 해 앉았다.

이건 악몽일까, 차라리 악몽이라면 좋을 텐데, 잠에서 깨어 찬물을 뒤집어쓴다면 곧 잊힐 꿈이라면. S는 침대 위로 팔을 포개며 엎드렸다. 야윈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한 손을 나우플리온의 가슴에 얹었다.

아직 뛰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일정한 박자로. 얇은 튜닉은 식은땀에 젖어 있었고 체온은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하나 제발 끝나기를. 어떤 방식으로든, 결말이 나기를…….

“가는 게 좋겠어.”

S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깨어난 나우플리온이 조금 전보다 퍽 차분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듣고 있었어?”

그걸 전부? 이솔렛의 이야기를, 당신을 따른다는 청년이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까지?

내가……. 당신의 생존을 변호하지 못하는 것도?

“S. 오늘은 이만 돌아가.”

나우플리온은 힘없이 말했다. 문득 부끄러움과 자책을 뚫고 화가 치밀었다. 나우플리온을 곁에 두고 멋대로 입을 놀린 청년에 대한, 사제를 헌신짝으로 여기는 섬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말이 옳을지 모른다 생각한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그건 당신 역할이지.”

날카로운 대꾸가 튀어 나갔다.

“떠나는 건 항상 당신이잖아.”

“원해서 그러는 건 아니야. 내가 죄가 깊긴 하지만, 이번엔 정말로 내 탓이 아닌걸.”

나우플리온은 붕대를 감아놓은 오른손을 들었다. 반쯤 몸을 일으켜 세운 그는 손끝으로 S의 목을 쓸어내렸다. 조금 전 조르려 들었단 바로 그곳이었다.

“가. 안 그러면 정말 화낼 거야.”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단호한 어조였다. 그러나 단호하기로는 S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내 자리를 당신 멋대로 결정하지 마.”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더라도 나와 비슷한 생각일걸. 머물러 봤자 몸이든 마음이든 다칠 뿐이야. 이게 낫는 병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알잖아, S. 당신도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잘 알잖아.”

“그래서 죽는 날만 기다리겠다고? 이렇게 간단히 포기할 셈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나우플리온?”

대답이 얼른 돌아오지는 않았다. S는 마른침을 삼켰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우플리온…….”

“아니.”

뜸을 들인 뒤에야 입을 연 나우플리온은 희미하게 웃었다.

“살고 싶어. 조금 괴로운 것 때문에 달아나고 싶지는 않아. 죽도록 괴롭다 한들 정말로 죽어버려서는 안 되겠지. 그건 이 세상에 대한 예의도, 날 살려놓으려 갖은 애를 써온 사람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야. 널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고.”

“잘 아네. 그러니까 죽지 마. 지레 체념하지 말란 말이야!”

S는 목에 놓인 나우플리온의 손을 잡아서 떼어 냈다. 양손으로 감싸 쥐고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부은 손은 열감이 더해져 뜨끈했다. 힘줄과 뼈만 남았던 때는 그보다 마음 아픈 느낌도 다시 없을 거라 여겼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몰랐었다.

“그러면 네가 정해 줘.”

나우플리온은 가볍게 말했다. 손바닥 뒤집듯 바뀐 태도에 S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뭐?”

“언제쯤 그만두어도 좋을지. S, 그걸 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내게 너뿐이야.”

S는 말문이 막혀 나우플리온을 내려다보았다. 핼쑥해진 얼굴 위로 미소가 번져 있었다.

할 말은 모두 한 듯 S의 손바닥을 두 번 툭툭 두드리고서 나우플리온은 눈을 감았다. 제멋대로 잠이라도 청하려는 듯하더니 곧 정말로 호흡이 느려졌다. 자는 척일까 싶었지만, 그는 어쨌든 진정제에 취한 사람이었다. 얕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릴 만큼 시간이 지나도 발작의 낌새가 보이지 않자 S는 겨우 마음을 놓았다.

나우플리온의 부탁을 돌아볼 여유는 그제야 생겼다.

이건 신뢰의 표시일까, 아니면 누이같이 따르는 데스포이나나 그가 책임져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차마 지우지 못할 짐일까. 아마 양쪽 다겠지. 죽음을 결정할 권리, 마지막까지 죽음을 거부하여 마침내 최후의 승낙자가 될 권리는 누구보다 더 우선하여 생의 반려에게 주어지니까.

결국 나우플리온은 이런 때에마저 그다웠다. 이토록 멋대가리 없는 고백이라니.

이토록 멋대가리 없는 고백이라니, 그리고 그걸 거절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이…….

 

 

나흘 뒤, 이솔렛은 괴물의 붉은 심장을 지니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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