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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set a heart ablaze

어두운 충동 × 카를라크 | 탁 님 커미션 :D

rhindon by 댜

최후의 빛 여관에 도달한 다음에야 일행은 긴장을 늦출 수 있었다. 자헤이라와 하퍼들이 그들을 완전히 믿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자 저주에 휩싸인 바깥보다는 어둠을 염려할 필요 없는 이곳이 백 배 나았으니까. 반가운 얼굴들까지 있으니 실은 기대치 못한 행운을 맞은 셈이었다.

이 땅에 발을 들인 후 잠시 중단했던 기록을 그가 다시 떠올린 것도 여관에 들어서고 나서였다. 동료들이 지하실에서 ‘빌려온’ 포도주병을 쌓아놓고 즐거워하는 사이 그는 은근슬쩍 몸을 빼냈다. 이 층 구석의 탁자를 차지하고서 양초 불빛 아래 공책을 펼쳐 놓은 다음 생각을 가다듬었다. 음, 뭐라고 쓰면 좋을까. 아까 다몬과 나누었던 대화부터 기록해야 시간 순서에는 맞겠지만, 그런 데 너무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쯤 이미 알고 있었다.

잉크병을 열고, 깃펜을 푹 찍은 그는 종이 위로 펜대를 옮겼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장미 꽃잎처럼 붉은 살갗. 그 아래에서 일렁이던 강렬한 불……. 가슴뼈 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지옥불 엔진의 광채는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에 확 피가 몰리게 했다. 그는 실실 웃으며 첫 획을 내리그었다. 사각 소리 한 번에 온몸이 두근거렸다. 영감이 찾아들 때면 주변은 까마득히 멀어지고는 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숙고해 써넣던 펜 끝에 속도가 붙었다.

어느새 깃펜은 거침없이 종이 위를 가로지르고, 그의 귓가에는 희미한 음악이 피어올랐다. 그렇지, 좀 더 맹렬한 템포가 필요해. 더 잔혹한 언어가!

그때 탁자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게 뭐야, 솔져?”

순간 그는, 자신의 몰입이 지나쳐 환시를 보게 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환시라면 열기가 느껴질 리 없었다. 이것은 오직 카를라크에게만 깃든 황홀한 죽음의 열기였다.

“잠깐만!”

질겁한 그가 공책을 덮었지만, 그보다는 카를라크의 반사신경이 한발 빨랐다. 페이지 사이로 카를라크의 손이 끼였다. 얼떨결에 카를라크를 꼭 붙잡은 모양새가 된 그는 당황을 숨기려 애쓰다가 물었다.

“술 마시고 있었던 것 아니었어? 여긴 웬일이야?”

“네 빈자리가 느껴졌거든.”

카를라크는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힘을 준다면 얼마든지 공책을 펼칠 수 있다는 것쯤, 그도, 카를라크도 뻔히 알고 있었다. 그는 애써 태연하게 한숨을 쉬었다.

“별것 아니야.”

“왜 그래, 대단히 아름다운 걸 쓰는 중 같던데! 내가 읽으면 안 되는 말이라도 적은 거야?”

“그게…….”

이걸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공책 속에서 카를라크의 손이 꿈틀거렸다. 그는 서둘러 덧붙였다.

“네 이야기야.”

“어, 나?”

“내가 곡을 쓰는 것 알잖아. 사실 널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어. 널 보고 있으면 영감이 떠올라서…….”

심기가 상했을 법도 한데, 카를라크는 불쾌함 대신 호기심만을 내비치며 물었다.

“내가 봐도 돼?”

“일단 손 빼.”

카를라크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러났다. 그는 카를라크가 짚었던 페이지를 더듬어 찾아냈다. 실랑이에 얇은 종이가 잔뜩 구겨져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페이지를 눌러 펴며 그는 가까스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냈다. 아무리 심장이 쿵쾅거린들 카를라크가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궁금해?”

“당연하잖아? 네가 보는 나는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은걸.”

상기된 뺨은 유난히 붉은빛이었다. 역시 난감했다. 여기서 거절하면 음침하다고 낙인찍히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괜히 보여줬다가 사건을 키우는 게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기대에 가득 찬 카를라크를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결국 그는 협상을 시도했다.

“한 장은 보여줄 수 있어. 대신 딱 한 장만이야. 보고 나면 잊어야 해, 그래 줄 수 있지?”

“음, 내가 뭘 봤더라?”

카를라크는 입에 자물쇠를 채우는 시늉까지 하며 늠름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믿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뜯어내 낱장이 된 종이를 건네주자, 카를라크는 예상치 못한 선물이라도 받은 듯 화색을 띠었다.

“이야, 고마워! 한번 제대로 읽어볼게!”

“제발 내 앞에서는 말고……. 약속한 거야. 다신 묻지 않기로.”

“부끄럼이라도 타는 거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카를라크는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종이를 가슴에 댔다. 수리하고 난 심장은 종이 너머로 주홍빛 광채를 발할 뿐, 태울 만한 열기를 뿜지는 않았다.

그가 잉크로 적어 넣은 문자들이 그림자 연극처럼 빛을 등진 채 춤추고 있었다. 심장이 일렁거리는 박자에 맞춰, 쓰이지 않은 곡을 따라.

“역시 예술가라니까. 좋아, 나 혼자만 있을 때 읽지. 그럼 이만 술 마시러 오지 않을래? 네가 없으니까 분위기가 영 안 산다고!”

 

 

카를라크는 약속을 지켰다. 그림자 저주를 풀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토름 가문의 잔재들을 하나둘 처리하고, 달오름탑에 침입했다가 난감한 임무를 받을 때까지도. 이따금 그를 보는 눈빛에서 묘한 낌새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여관에서 들킨 글에 관한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어쨌든 카를라크만큼 신의가 깊은 인물을 찾아보기도 힘들었으니까.

덕분에 그는 조금 마음을 놓았을지도 몰랐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처절한 물음이었다. 그를 깔아 눕혀 제압해 놓고서도, 카를라크는 오히려 자신이 붙들려 있는 것처럼 애끓는 목소리로 다그쳤다.

“솔져, 나한테 왜 이래?”

“네 심장을 원해!”

그는 비명같이 내질렀다.

“너, 네 심장, 그걸 원해—카를라크!”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한순간 저항하려는 의지가 일었지만, 바람 앞의 촛불처럼 얼마 못 가 꺼지고 말았다. 그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널 갈기갈기 찢어버리겠어! 네 심장을 날로 씹어 삼킬 테다!”

“진정해! 씨발, 그걸 먹었다간 식도부터 아래쪽까지 전부 타 버릴걸?”

“네 심장의 피가 루비처럼 엉겨 붙겠지, 지옥의 용광로에서 빚어진 보석처럼 말이야!”

카를라크의 힘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억지로 더 용을 썼다가는 손목이 부러질 것을 알면서도 그는 부득부득 저항을 고집했다. 하지만 카를라크 역시 굳건했다. 날이 샐 때까지라도 이 자리에서 그를 붙들어놓고 있을 태세였다. 카를라크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충동이 영원하지는 않았다, 지금껏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를 몰아붙이던 충동은 서서히 사그라들었고, 이성은 그리 유쾌하지 못한 감각과 함께 돌아왔다. 신음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윽…….”

그는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머리가 윙윙 울렸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라면 스켈레리타스 펠의 흉측한 얼굴에, 이상하게도 깊게 몰려오던 잠이었다. 집사가 무슨 말을 했었지? 내가 가장 친애하는…….

콜록 헛기침하며 몸에서 힘을 푸니 카를라크가 그의 팔뚝을 고쳐 잡았다.

“그래, 이제 좀 제정신이 들어?”

카를라크는 불안을 여실히 드러내며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설명할 수는 있고?”

“카를라크.”

그는 막막하게 불렀다. 충동이 물러갔음을 알아차렸는지, 카를라크는 그를 놓아주며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는 하늘만 올려다보며 정신을 추스른 끝에 일어날 힘을 냈다. 허리를 세우고 앉아 둘러보니 그의 몸 아래 깔린 것은 카를라크의 침낭이었다.

“기생체 때문이야?”

그렇다고 말한다면 그대로 믿어줄 듯한 질문이었다. 그 신뢰가 문득 견딜 수 없어졌다. 미안함? 아니, 오히려 적반하장의 분노에 가까웠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낚싯바늘에 걸린 듯 말이 줄줄이 끌려 나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같잖은 벌레?”

그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

“좋은 추측인데 안타깝군. 내 안에……. 사악한 충동이 도사리고 있어. 그게 네 심장을 갈망해. 아니, 내가!”

카를라크의 안색이 납빛으로 변했지만, 그는 거침없이 계속했다.

“내 충동이 나야, 그리고 내가 곧 내 충동이지. 충동이 없다면 나도, 내 음악도 없어. 그리고 난 네 심장을, 그 폭발이 널 산산조각 내 날려버리는 그 순간을 바라고 있지! 내 눈으로 목격하고 내 손으로 써 내릴 최후를!”

“너, 너—내가 죽는 걸 보고 싶다고?”

“최고의 노래가 될 거야.”

이를 드러내며 웃자 카를라크가 흠칫 놀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곧 카를라크의 얼굴에 격분이 떠올랐고, 그 앞에서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저 사실을 고백했을 뿐인데 갓 살해라도 저지른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이 감정이 희열인지, 공포인지는 그 자신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씨발,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었잖아! 네가 자리엘이라도 돼? 돌았어? 눈깔 뒤집혔을 때 그냥 죽여버릴 걸 그랬어, 너…….”

“역겨워?”

“그래!”

그는 도발하듯 말을 이었다. 바드라면 누구나 이 정도 재주는 갖추는 법이었다.

“날 혐오해? 경멸하나? 내가 더러워, 어디 아베르누스의 지옥불에라도 뛰어들었다 나오면 내 오물이 씻길 것 같나? 아니면 배신감이야? 괜히 믿었나 싶지, 안 그래? 날 ‘솔져’라고 부른 혀를 뜯어내고 싶지 않아? 실망스럽나? 후회해?”

바득 이를 간 카를라크가 응수했다.

“그래!”

“이것도 어디 적어 둬야겠는걸. 못 해도 세 소절은 나오겠는데?”

“아주 좆같아! 너 따위를……. 후회해, 제기랄, 네가 날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게 쪽팔려서 죽겠다고!”

사랑한다고?

카를라크의 분노도, 미움도 하지 못 한 일을 그 한마디가 해냈다. 그를 주저하게 했다.

카를라크에게 주었던 페이지에 적어놓은 말들은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한 장만 본다면 누구라도 애절한 연서로 여길 만큼 낭만적인 언어. 카를라크가 오해할 것을 뻔히 알고서도, 차라리 그편이 낫겠다 생각해 페이지를 건네주었었다. 실은 아주 오해랄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하지만 사랑하는걸.”

“솔져?”

일말의 기대가 섞인 목소리였다. 그건 마치 전염되듯 그의 마음에도 희망을 심어놓았다. 마지막 기회일지, 만회의 여지일지 모를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된단 직감이 들었다. 카를라크의 표정이 다시 경멸로 물들기 전, 그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널 사랑해, 네 심장 때문만이라곤 못 하지. 사랑해. 하하, 네 심장이 터지는 순간까지 곁에 있어야겠어! 끝내주겠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대작을 쓸 수 있을 거야.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네 노래를 쓰겠어. 검의 해안, 아니, 페이룬에 길이 남을 전설이 되겠지……. 내 사랑, 누구도 그 노래를 잊지 못할 거야.”

카를라크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흰 이로 아랫입술을 누르더니, 그의 눈길을 피하며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답은 오랫동안 없었다. 그는 여전히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못했다. 이러다간 얼굴 가죽이 희극의 가면으로 굳어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너. 네 심장이 불타고 있나? 나로 인해? 가장 극심한 증오가 결국 애정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시인인 그는 알고 있었다. 동전의 양면이고 한 악상의 두 가지 변주였다. 어쨌건 심장을 줄달음질하게 하고 온몸의 피를 끓인다는 점에서는. 그가 침낭에 주저앉은 채 기다리는 동안 어금니를 악문 듯 꽉 다물렸던 카를라크의 입에서 서서히 힘이 풀리고 있었다. 찌푸린 눈가에서는 분노가 물러가고 깊이 고민하는 듯한 기색이 피어올랐다.

마침내 카를라크가 입을 열었을 때, 그는 하마터면 그 두 마디마저 놓칠 뻔했다.

“좋아.”

“젠장, 알았어. 네가 좋다면……. 잠깐, 뭐?”

“내가 죽을 때까지 곁에 있어. 허락할게.”

예상치 못한, 하지만 당장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반응이었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할 수만 있다면 카를라크에게 계약서라도 쓰게 하고 싶었다.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를라크는 어느새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쾌활한 말투를 되찾아 말했다.

“내 삶이 네 노래를 통해 전해진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장편은 못 되겠지만, 그래도 너라면 화끈한 노래를 지어 주겠지?”

“당연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도 그가 멍하니 앉아만 있자 카를라크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리고 무릎을 세우며 삐걱삐걱 어색하게 일어섰다.

“난 좀 걸어야겠어. 따라오진 마, 솔져. 내일도 강행군일 테니까, 이만 눈이나 붙이라고.”

 

 

야영지 가장자리까지 걸어간 카를라크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야영지의 불빛에서는 꽤 멀리 나온 셈이었지만, 티플링이 글을 읽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옷 속에서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낸 카를라크는 행여나 상할까 조심스럽게 종이를 폈다. 익숙한 글씨, 이젠 거의 외우다시피 한 글이었다.

 

타오르는

불을 꿈꾸는

너의 심장 디뎌 춤을 추리 회오리치는 선혈(鮮血)이 되어

만개하는

오월의 장미

흰 뼈 부숴 흩뿌리는 순간

달군 쇠 같은 심장을 품고 네가 웃었다 끌어안자 박동치는 소리 온몸을 순환하는 불길 너를 만진다는 것 뺨에 손등을 대고 가슴에 귀를 눌러도 좋다는 것, 열이 옮겨붙었다 운명의 북을 네 품에서 알았—

 

글은 잉크를 흘린 자국과 함께 멎어 있었다.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수도 없이 접고 펼친 끝에, 접은 선대로 해어지고 만 종이를 손에 쥐고 카를라크는 거친 숨을 뱉었다. 이게 다 비유가 아니었단 말이지. 그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심장이 폭발하면, 그걸 영감 삼아 노래를 짓겠다며 악다구니를 쓰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 울렸다.

그런데도 아직 설레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내가 미친 걸까.

분명 그는 카를라크가 가장 경멸하고 두려워해 마땅한 부류였다. 위험했다—어떻게 지금까지 몰랐는지 의아할 정도로 강한 위험이 그자의 영혼에 도사리고 있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스스로 지옥불 엔진의 도화선에 불을 댕기고 말 자였다. 동시에 그가 제안하는 것, 그의 제안에 담긴 맹목적 열정은 카를라크가 이제껏 자각하지도 못했던 어떤 아픈 구석을 제대로 찔렀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카를라크는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허락하는 게 아니었는데. 손목을 꺾어버렸어야 하는데.

하지만 역시 누군가는 지켜봐 주었으면 했다. 노래해 주기를 바랐다.

이 불타는 심장의 결말을…….

※ 대사 일부는 연인 살해 이벤트 스크립트를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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