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게이트3

[BG3] 4

타브아스타브

틴케이스 by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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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과 이어집니다. 전편 →

질러놓고 수습하는게 제일 재밌다 그쵸 (?)

근데 전 발더게3 플레이하면서 야영지 주요 이벤트마다 레이젤이 대검을 회전 숫돌에 드르르르르륵 갈아대서 ‘이거 야영지내 연애금지란 소린가?’란 생각을 자주했어요.

여기서 '그'는 무성을 표시하는 인칭대명사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예나입니다. 지금까지도 발더스 게이트의 모든 음유시인들이 칭송하는 일리시드 침공 저지 사건에서 큰 공을 세웠던 영웅들과 같이 야영지에서 밤을 지샜던 아이입니다. 당시에는 같이 피난 나왔던 어머니도 잃고 의지할 만한 데도 없어 헤매다 낮에 상냥하게 대해주던 그분들을 만났죠. 그분들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지금 저는 이렇게 발더스 게이트에, 아니 그 전에 살아있을 수도 없었을 거예요!

앞서 음유시인들이 칭송했듯이, 그들의 결속력은 마치 한 몸을 보듯 했을 거예요. 야영지에서 뵙는게 전부였지만요. 그분들은 각기 개성이 넘쳐서 서로 부딪힐만 하더라도, (실제로도 부딪힌 적이 몇 번 있었던 것 같아요.) 바드 헤일이 귀신같이 나타나 그 충돌을 막아냈죠. 물리적인 힘은 남들에 비해 부족하더라도 이 모든 인원을 한 목표로 이끄는 사람은 바드 헤일, 그분 하나였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전투 시 그분의 모습은 모르겠지만 야영지 내에서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어요.

하지만 그분도 사람은 사람이었는지, 이성을 잃고 화를 내실 때가 딱 한 번 있었어요. 심지어 그 상대는 지금의 연인이었죠.


일행은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뻔뻔한 얼굴의 신생 뱀파이어 초월체를 보고선 두통에 머리를 감쌌다. 심지어 일리시드 올챙이 때문이 아니었다. 평범한 연인이었다면 단순히 이념차이라고 치부할법한 싸움이었는데, 종족의 특성이 상황을 극단적으로 만들었다. 게일은 자동으로 구겨지는 얼굴을 애써 펴며 아스타리온에게 물었다.

“하, 아스타리온. 연인 사이의 갈등이라면 보통 끼지 않겠지만 헤일이 일행에서 나갈지도 모르는 지금은 끼어야 겠어.”

“난 잘못했단 생각 들지 않는 걸, 헤일은 이제 우리만의 성에서 영원을 연주할 수 있게 될 거야. 그게 무슨 잘못이지?”

“가랑이를 안 채인게 용하군. 이것도 사교성인가?”

뒤조차 없는 레이젤의 말에 누구 하나는 그를 제지할 만 했지만 이번만큼은 사안이 심각하고, 누가 죄를 더 많이 졌는지 확실해 그 누구도 아스타리온의 편을 들지 않았다. 그야 전날의 헤일은 전투의 여파로 잔뜩 지쳐있었고 밤 늦게까지 자헤이라와 발더스 게이트의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으니 피곤해서 금방 잠들었을 테고, 아스타리온은 지친 연인에게 영원한 안식과 영생을 선물했겠지.

“네가 지금 무슨 일을 벌였는지도 잘 모르는가 본데, 헤일의 허락은 받은 거야?”

“물론 아니지, 우리 연인은 어리석게도 정점에 올라서는 것에 대한 쾌락을 몰라, 내 친히 그걸 직접 경험케 힘을 나눠줬지.”

“헤일이 주문 시전할때 막지 말라 할걸 그랬어.”

섀도하트가 순간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헤일이 시전하지 못하고 떠난 주문을 찾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 주변 눈치야 신경쓸 게 아니라는 듯 가슴을 펴고 모두를 내려보는 듯한 뱀파이어 초월체 앞에 당당히 선 건 외뿔의 티플링이었다.

“헤일은 어리석지 않아.”

“그건 맞아, 그가 만일 바드가 아니었다면 어디 한 자리 해서 사람들을 이끌었겠지.”

헤일이 그나마 연인한테 관대해서 그의 눈에 무지렁이처럼 보였던거지,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어디 둔치 순둥이가 화술로 물품 가격을 깎고 대화에서 유리한 지점에 올라서 상대를 설득하는가? 상대가 도발해도 여유롭게 넘기고 상대가 숨기는 것을 교묘히 드러내게 하는 통찰력,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든 손동작과 표정 모두가 어느정도 계산된 인간이었단 말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자헤이라는 팔짱을 끼고 카를라크 옆에 나란히 서 물어보았다.

“헤일에 대해서 아는 게 얼마나 있지, 뱀파이어 초월체 씨?”

“자기들이 알법한 것들은 다 알고 있어. 노래와 이야기를 좋아하고, 발더스 게이트 출신에, 귀족 집안 자제인 것.”

“전승학파 학자로 이야기를 수집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안 하던가?”

“매일 밤 여정을 거치면서 얻은 책들을 한 두 권 읽어내는 건? 헤일이 여태 읽지 못한 책은 네가 들고있는 ‘테이의 사령술’ 단 한권이야.”

“페이룬 이곳저곳을 여행다닌다고 하더군, ‘할루아’라는 곳을 가 보고 싶어했어.”

“아닌 척 하면서도 주변인들의 안위를 위해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한다는 것도 알아?”

고위 하퍼의 한 마디에 모두가 한 두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뱀파이어 초월체는 자신이 모르는 반려의 이야기를 듣고 당당한척 그대로 계속 듣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그 상대와의 기억을 꺼내 빠르게 읽어내리고 있었다. 헤일이 무슨 말을 했었을까, 달빛을 받아 빛나던 자신의 파트너는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보통 상대는 자신이었던 경우가 많았기에, 그의 이야기를 허투루 버리지 않는 듯 손을 꼭 잡고 있곤 했다. 수 많은 기억 속에서 헤일은 자신에게 뭔가 풀어낸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당사자가 말 하진 않았지만 난 헤일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지. 꽤나 사고뭉치였어.”

“뭐? 자헤이라, 그걸 어떻게 알아?”

“물론 같은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 일부러 내게 본명을 말 안 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그 사건’을 겪어서 그런거겠지.”

대화에 끼어들었던 모든 사람이 자헤이라를 바라봤지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풀어놓지 않았다. 그냥 헤일도 당신들처럼 어떤 사건을 겪었고, 겪고 있는 중이라고 넌지시 암시만 해 줬단 것만으로도 일대는 술렁거릴 수 있으니까. 어떤 역경을 겪었는지 이야기하지 않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줄 알았고, 실제로도 그런 체를 했던지라 다들 헤일이 유도하는 대로 함정에 빠져 있었던 거였다.

“앞뒤 다 떼고 말해도 알겠지, 자르 가의 후계자. 한 곳에 뿌리박는 뱀파이어와 여행가가 얼마나 맞지 않는지?”

“햇빛과 물, 은이라니, 귀족출신 여행자라면 숨쉬듯이 마주치는 거네.”

아스타리온은 그제야 침묵의 무게를 느꼈다.


잔뜩 열이 올라서 밤 늦게쯤 올 것으로 예상됐던 헤일은 해질녘이 되기 전에 돌아왔다. 옷에는 먼지가 좀 붙어있었고, 연하게 술냄새가 났지만 취한 얼굴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들고 다녔던 류트는 자신의 짐 구석에 놓고 하루종일 움직여서 피곤했던 다리를 풀어줬다. 오전 늦게 나간 몇 인원들을 제외하고 여관에 머물러있던 다른 인원들은 헤일이 괜찮은지 물어보러 왔다.

“솔져, 괜찮아?”

“음, 일단 ‘지금은’ 괜찮아. 그리고 나가서 이것저것 하고 왔지. 그러고보니 자헤이라는? 젠타림 비밀 기지 위치를 어쩌다가 얻었어. ‘바위 군주’ 민스크를 찾을 수 있을거 같아.”

“화를 죽이다 못해 정보도 얻어 왔네.”

“그럼, 내가 누군데. 에텔을 두들겨 잡은 주점에서 자리 하나 구해 어제 일을 상세히 정리하고 있었어. 근데 어디 술주정뱅이 불주먹 용병단이 내가 들고 있던 류트 연주를 듣고 싶다길래 시간도 남겠다, 대충 아무 즉흥곡을 연주했거든. 그랬더니 근처에 있던 또 다른 술주정뱅이 젠타림이 듣고는 흥에 취해 자기네 은신처 위치를 불고 와서 연주해달라는 말을 하는거 있지. 이게 얼마나 낮은 확률일까? 그리고 근처에서 이를 듣던 길드원 몇 명이 움직이는 낌새를 보였어, 내일 중으로는 가봐야 할 거 같아.”

자신의 즉흥곡을 기록해두려고 수첩을 꺼내들었던 헤일이 익숙하게 자신의 바이올린을 찾아 해멨지만 어떤 사기꾼이 훔쳐선 아직도 돌려놓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헤일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선 독서중인 아스타리온을 흘긋 쳐다보고선 눈을 감고 고개를 휙휙 털었다.

“어디서 술이라도 마시고 왔나?”

“아, 이건……. 냄새 좀 지우느라고, 독한 건 아냐. 그냥 아무 레드 와인 한 잔만 했어. 아참, 술집에서 류트 연주했더니 술이랑 안줏거리를 받아왔단 말은 했던가? 가방 안에 있는데, 오늘은 야영지 구석에 박혀있던 빈티지랑 같이 먹을래? 내가 오늘 일탈하는 바람에 일정에 문제가 생겼잖아.”

“네가 오늘 그렇게 행동한 건 모두가 추궁하지 않을 걸, 하지만 술은 좋지.”

헤일은 동료들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곤 야영지 상자에 숙성되어가고 있던 술도 몇 병 꺼냈다. 억지로라도 분위기를 올려야 하는 상황을 술로 상기시키고, 즐겁게 음악을 연주하며 시간을 지내다 보면 따로 떨어져서 움직이던 일행도 모여 왁자지껄하게 한 판 열었다. 그들이 한참 밤의 빛무리를 만들고 화기애애하게 즐기다 보면 뱀파이어 초월체가 끼어들지 않을까 싶어 쳐다보면 그는 아닌 척 자신의 침실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다. 자신이 버린 무언가, 어떤 것을 갑자기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 끔찍한 감각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지만, 어떤 손이 그를 잡았다. 자신과 비슷한 체온이 느껴졌다.

“―너도 같이 끼어.”

“…난.”

“괜찮으니까.”

헤일은 고개를 까딱이며 옅게 미소를 띄웠다. 과거를 털어놓지 않아도 밝은 아이, 모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 그 날 뱀파이어는 상대에게 물어야 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심지어 물어보는 것도 잘못됐다. 줘야 했던 건, 질문이 아니라…….

왁자지껄하던 사이에 일순 침묵이 돌았지만 헤일은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스타리온을 무리에 합류시켰다. 굽히고 들어가는 모양새인 건 알고 있었지만 보랏빛 눈의 하프엘프는 상관 없다는 눈을 감고 눈썹을 으쓱거렸다. 그 짧은 순간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꽤 누그러진 분위기에 화해했을 것이라 추측하곤 다시금 열을 올리는 거였다. 오늘 바이올린은 없었다. 그 자리엔 리라와 류트가 채워나갔다.

밤의 열기가 한참 높아질 때 즈음, 헤일은 침실로 몸을 옮겼다. 내일은 자헤이라를 데리고……. 어떻게 일정을 짜야 할 지 고민하며 책상 위에 수첩을 올려놓았다. 오늘의 일지를 적을 차례였다. 우선적으로 젠타림, 그리고 길드의 동향을 우선적으로 적어냈다. 내일은 바위 군주를 보게 될 수도 있음. 그 이후는 약간 고민하는 듯 깃펜의 깃털 부분이 그의 이마에 닿았다. 그래도 기밀이 아니라면 어떤 정보라도 적어놓는 것이 좋았다. 어제 뱀파이어가 됐던 것도 대충 적어넣긴 했으니. 빨리 적고 털어버리자는 생각으로 이마에서 펜을 떼어내자 자신의 품에 오늘 만나지 못했던 바이올린이 들어왔다.

“무슨 고민이 되나보네, 달링?”

“아, 아스타리온.”

“어제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그래. 이야기 안 하면 새벽에 몰래 여관에서 나갈까 싶었는데.”

아직 분노가 덜 가신 건지 헤일은 받은 바이올린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곤 여유롭게 미소짓고 있었다. 오며 갔던 술잔이 꽤나 많았는데 그걸 다 마신 건 아닌지 만취한 상태도 아니었다. 하긴, 라이스윈 마을에서 티소발드에게 공연만으로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지 보여줬던 사람이었다. 아스타리온은 침대에 앉아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이 내가 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더 알고 나서 널 물어도 됐을 텐데 말야.”

“네가 지금 최대한의 힘을 내서 내게 사과하고 있단 건 알겠다. 좀 더 해봐, 뱀파이어 초월체씨.”

헤일은 다리를 꼬고 허리를 숙여 고개를 들어 그에게 집중했다. 아스타리온은 지금의 상황을 즐기는 제 반려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최악의 상황-그는 헤일이 영구히 자신이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갈지 모른단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 마법이 담긴 은 단검을 들고 햇빛 가득한 곳으로 사라진다던가.-까지 갈 일이 오늘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눈을 질끈 감고는 자신의 마음을 뱉어냈다.

“마음같아선 우리만의 궁전에 너와 한 10년은 바깥 세상은 신경쓰지 않고 살고싶었어. 그 사이에 나는 네 연주 독점해 듣고 말야.”

“그리고, 또?”

“―너는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거지, 그렇게 되면 너는 내게 네 모든 일생, 그리고 네 여행을 이야기 하게 될거고.”

“반 정도는 괜찮은 생각이야. 물론 나는 이번 일만 끝나면 말 해줄 요량이었지만.”

“네 옆에는 내가 언제나 있어야 한다고. 우리 둘은 항상 하나여야 완벽하니까.”

헤일은 최대한 그의 의도를 선해해 들어보고 있었다. 저놈의 화법이 연극처럼 과장되긴 했지만 못알아 들을 정도는 아니었고, 문구의 해석은 헤일이 꽤나 잘 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니까, 자르 궁전에서 10년정도는 자신을 가두고 보고 싶으며, 서로 함께하고 싶다는 진실의 보고. 이는 그저 어떤 불안함의 고백이었다. 삶이란 여정에 한 쌍이 되어 곁을 지키고 싶다고. 헤일은 몸을 바르게 폈다.

“오늘은 사냥을 해봤어. 발더스 게이트의 양지에 있는 동물들은 주인이 있거나 눈치가 빠른 편이니 하수구로 갔지. 왜 그랬냐는 얼굴인데, 이 올챙이가 언제고 나를 지키겠어? 변수가 차단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그래서 쥐를 잡아먹었지. 확실히 식성이 바뀌긴 했어.”

“굳이 사냥하지 않아도 너는 그런 걸 먹지 않아도 돼. 세상에 우리 먹잇감이 얼마나 많은데.”

“딱 그 생각 하면서 지상으로 올라왔다가 바로 가족과 눈을 마주쳤어.”

헤일이 아직 적지 못한 페이지. 사냥을 마치고 나서 혈향이 풀풀 나는 상태로 마주친 상대. 자신의 손윗 형제, 하메른 가의 쌍둥이 형제중 한 명을 만났던 일을 상기했다. 음유시인은 여기에서 자신의 가족을 볼 줄은 몰랐다. 장남과 마찬가지로 하메른의 이름을 받은 아이들은 세계의 바다를 한 번 돌아볼 의무가 있었고 경영이 아닌 항해와 입재담에 재능이 있던 쌍둥이 형제들이 발더스 게이트에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헤일은 내가 노틸로이드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 잡혀있었나 생각했다.

“헤일! 네가 왜 여기 있어? 너 분명 앰으로 간다 그랬잖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아스카틀라에서 만나기로 했잖아.”

“아, 바다가 조금 이상해서. 풍랑이나 해일이 몰아치는 건 아닌데, 근래 들어 좀 이상하더라고. 먼 바다가 아니라 그냥 검의 해안 앞바다 아래에 뭔가, 거대한 생물이라도 있어 보여. 심해 신전의 클레릭이 나갔다가 생물에게 갈려서 잡아먹혔다는 정보도 잡혔고.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지. 아무튼, 그 전에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 지금 귀족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 도는 건 알아? 이것도 네가 짠 거야? 발더의 목소리 신문에서도 모험가 적대적으로 뭔가 낸다 그러고.”

“잠깐, 잠깐. 나 멀쩡해. 바이올린은……. 두고 왔지만 숙소도 있고. 내 집이나 본가에는 지금 못 가지만, 나 멀쩡해. 이거봐.”

헤일은 양 팔을 넓게 뻗어 보여 자신이 멀쩡함을 표현했다. 헤일의 과장된 연극같은 표현에 그의 형제는 눈썹을 으쓱거리며 코를 킁킁거리곤 대답했다.

“피 냄새 나는데. 어디 다친거 아니지? 당장에 집에 가서 사용인을 불러봐야겠는걸.”

“진짜 괜찮아. 지금 일이 좀 많이 꼬여있어서 설명하기 복잡하긴 한데……. 그래도 얼굴 보니 좋네.”

“그래, 나도 여기서 이렇게 보니 좋아. 숙소에 지낸다고 했지. 불편한 건 없어? 사용인을 보내줄테니 주소를 불러줄래?”

“아……, 그건 좀. 숙소엔 내가 하메른 가문인 걸 모르는 사람들 뿐이라. 지금 생긴 일을 해결하면 내가 가거나 사람을 시켜서 그쪽으로 갈게. 오늘은 어서 돌아가. 나도 슬슬 가봐야하니까.”

“아, 그러네. 너도 네 일정 있을텐데 오래 붙들었군. 잘 가, 우리 가족은 언제나 널 믿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응, 그래. 미안. 곧 연락할게.”

헤일은 멀어져가는 자신의 형제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해주곤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 꾹 쥐었다. 신생 뱀파이어는 지상으로 올라오자마자 자신의 밑바닥을 마주하고선 거대한 벽을 마주한 느낌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을 자랑스런 동생이며 친구로 보고 있는데 처음 든 생각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이게 뱀파이어의 사고방식일까? 한없이 추락한 자신의 내면을 보라고 비난하고 천천히 사악함에 침잠하게 만드는.

“나는 이야기를 채록해서 기록하고, 학회에 분석해 보고하는 학자야. 특히 나는 페이룬의 지상 이곳저곳을 돌아 다니고. 온갖 강이란 강은 다 건너봤어. 바다도 안 건넜냐고 물어보면 섭하지. 햇살이 가득한 곳도 가봤고, 상거래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이제 내가 화났던 이유를 알겠어?”

이젠 헤일이 아스타리온과의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가문 이름과 그가 가야했던 목적지는 빼고 이야기 했지만 누군가 손으로 그린듯한 따뜻한 가족애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스타리온이 잡아 먹은 것엔 그런 것이 담겨 있었다. 사람과, 사랑과, 이상들이. 헤일은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뭐 어쩌겠어. 이렇게 된 이상 뒤만 돌아보며 후회하진 않아. 하지만 나는 학자의 명성을 포기하면서까지 네 옆에 있진 않을 거야. 내 욕심마저 버리라는 건 네 과욕이야. 그러니 네가 책임져.”

“뭐, 뭘?”

“난 페이룬 전역을 돌아다닐 거야. 겪을 수 있는 모든 황당한 사건은 다 겪을 거라고, 이번 여행과 같은 온갖 기상천외한 일들이 가득하고. 그리고 그 옆에는 네 자리 하나를 둘거야.”

전례없을 미친 여행들이 기다릴걸? 불안한 감각에 말을 버벅거리던 아스타리온이 헤일의 설명에 잠깐 곱씹더니 용서한다는 의미가 담긴 헤일의 말에 고개를 홱 돌리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전례 없을 정도로 붉은 얼굴은 아마도, 술을 마셔 붉을 거라고 변명할 법했다. 헤일은 눈을 질끈 감아 그 시선을 꽉 차단했다. 이내 참지 못한 것인지 횡설수설 말을 늘어놨다.

“궁전에 머무는 삶은 나한테 맞지 않아, 그런 건 성인이 되던 해에 버렸어! 지금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 거야, 세상의 모든 노래와 음악, 이야기 사이에서 살거라고. 나를 자꾸 추악하게 추락시키려는 이 성향도 해결할 수 있다면 그리 할 거야. 거기에 네가 있으면 더 좋겠지! 그런 생각 한 거 뿐이니까…….”

“으흠, 뱀파이어 초월체는 그걸 지켜줄 수도 있으니까 같이 있자고. 매력적인 제안인걸.”

“용서했다는 소리는 아니야. 다음부터는 서로 의견을 나눠, ‘완벽한 한 쌍’이라며. 의견 조율을 하면 더 완벽해질 거야. 안 그래?”

말을 무슨 쏟아붓듯이 했지만 이야기는 간단했다. 다음부턴 뭔갈 할 때 대화로 풀어보자. 미래에 있을 수 많은 여행의 동반자가 되자. 그런 내용을 듣고는 아스타리온은 벌떡 일어나 그를 바라봤다. 자기가 뭔가 잘못 말했는가 싶어 반사적으로 일어난 헤일은 이내 양 팔을 벌린 자신의 반려를 바라봤다. 공백이 지나가고, 둘은 서로의 품에 파고들었다.


승전 연회의 밤. 헤일은 숙소 구석, 한 손에 들고 다닐 법한, 자신의 인장이 박힌 작은 소형 보관함 앞에 한참 서 있었다. 한 시간 전에는 편지를 쓰고 있더니, 이제는 물품을 어떻게 구겨 넣어야 좋을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게일이 다가오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손을 휘적휘적거리다가 아닌 듯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너무 무거우면 고생할텐데.”

“뭘 그리 고민하고 있어?”

“해결하지 못한 일.”

그러면서 헤일은 결심했다는 듯 상자에 자신의 인장으로 봉해진 편지와 양피지, 그리고 쩔그럭거리는 주머니를 넣고 닫았다. 비전 자물쇠 주문을 상자에 건 그는 그것을 들고 숙소에 서 있는 예나의 앞에 섰다. 홍당무 색의 머리를 가진 아이는 안 그래도 자신의 미래 때문에 약간은 우울한 상태였는데, 헤일은 상자에 넣지 않은 작은 종이를 아이의 손에 쥐여줬다.

“이거, 글자 읽을 수 있어?”

“네? 잘 모르겠어요.”

“좋아. 예나, 네게 마지막 심부름을 시킬 거야. 그륍과 함께 윗 도시, 하메른 가문의 둘째와 셋째. 쌍둥이 형제에게 이 상자를 주면 돼. 언제든 가도 상관 없지만 내일 아침에 해가 뜨고 나서 가는게 좋아.”

오늘은 그 둘 다 여기 승전연회에 참석할 거고, 발더스 게이트의 밤은 중상모략과 도적들로 가득하니까. 헤일의 말에 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듣고 있던 게일은 헤일과 하메른이란 이름과 성을 조합하다가 펄쩍 뛰었다.

“헤일, 하메른. 헤일……. 헤일리. 네가 그 전승학파의 채록자야?”

“뭐야, 위저드들 사이에도 이름이 소문 나 있었어?”

“물론이지, 왜 본명으로 소개 안했어? 그랬으면 여행하면서 더 심도있는 이야기를 나눴지…….”

“지금은 뭐 또 심도있는 이야기를 안하나? 그리고 본명으로 불리는 거 안 좋아해. 헤일이면 됐지.”

“예상했지만 진짜 맞았구만. 하메른 가문의 사고뭉치 넷째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자헤이라를 믿었죠. 함부로 말 안하는 것도 아실 거고요.”

헤일의 말에 자헤이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예나는 이들의 이 화기애애한 모습도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했다. 카를라크와 윌은 이미 아베르누스로 갔고 레이젤이나 섀도하트는 연회가 끝나는 대로 떠난다. 헤일이나 게일, 아스타리온은 각자의 사정으로 여기에 얼마간 머물 거였지만 떠날 예정이었다. 여태까진 잘 지냈지만 이젠 어찌 해야하나 고민이 들었다.

다음 날, 예나는 날이 밝자마자 헤일이 말했던 주소로 걸어갔다. 승전 연회에서 헤일이 연주를 리드하며 나타나 자신이 헤일리 하메른임을 다시금 밝혔고, 그 덕에 아침의 하메른 가 앞에는 수 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헤일은 거기 없을 텐데. 분명 자신의 집으로 가서 지붕 보수작업과 편지 작성을 끝낸 뒤에 아스카틀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탄다고 전했다. 예나는 상자와 그륍을 꼭 쥐고 하메른 가문의 문 앞에 섰다. 인파의 맞은 편엔 건장한 하프엘프 남성 하나가 울타리를 부술 기세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말리고 있었다.

“자중해 주십시오, 가주님께선 지금 일련의 일들로 몸이 안 좋으신 상태니 미리 약속이나 언질이 없던 분들은 다 돌아가 주십시오. 협약이나 동업 제안은 하메른 사에서 말씀 듣겠습니다!”

“잠깐만 들여보내 줘!”

“발더의 목소리 신문사에서 왔습니다!”

“아니……. 음? 꼬마야, 그 상자는 뭐니?”

구석에서 상자를 꾹 쥐고 있던 예나는 남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걸 보고 기겁했지만 당당히 앞으로 나아갔다. 상자는 비전 자물쇠로 잠겨 있었고, 헤일의 인장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남자의 눈에 뜨이긴 했다. 예나는 전날 헤일이 줬던 쪽지와 상자를 건네주며 당돌히 말했다.

“바드 헤일님께서 이걸 심부름으로 시켰어요. 하메른의 둘째와 셋째인 쌍둥이 형제에게 이걸 보여주라고요.”

“우리 넷째 인장이랑 필체가 맞긴 한데……. 일단 들어와라. 다른 분들은 돌아가 주십쇼.”

남자는 종이와 상자를 둘러보더니 아이와 고양이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꽤나 높은 직위를 가진 남자였는지 사용인들에게 이제 약속이 잡힌 손님이 아닌 사람들은 막으라고 전달했다. 아이를 응접실로 안내한 그는 다음 일정이 있다며 홀랑 사라졌다. 테이블 위에 상자를 올려둔 예나는 상자 안, 편지의 내용물을 추측하며 서 있었다. 한참 집중해 있자. 아이의 뒤에서 열쇠를 쥔 손이 불쑥 나타나 상자를 열었다. 제법 닮은 두 하프엘프가 기척도 없이 나타나 예나의 맞은 편에 앉았다.

“우리 넷째가 뭘 부탁했는지 볼까?”

“지난번엔 철트의 뭐 어떤 책을 구해달라고 해서 개 고생했던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그러면 엉덩이를 까러 가 줄테다. 음……. 그건 아니구만.”

“이건 뭐, 어렵지 않긴 한데. 그때 마무리 못했다던 일이 이건가?”

두 하프엘프는 편지, 양피지, 주머니와 고양이, 예나를 돌아가면서 보다가 팔짱을 꼈다. 이제 보니 헤일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얼굴형이나 장난끼가 있다던가. 둘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예나에게 말했다.

“헤일이 우리를 네 보호자로 지정하고 널 하메른 직속의 보육원에서 양육하도록 부탁했단다. 여기엔 네가 여러 사고가 겹쳐서 보호자 없이 돌아다니다가 헤일과 같이 다녔다고 적혀 있는데 맞니? 여긴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양육과 교육비용, 헤일 본인임을 인증하는 인장이 담긴 양피지와 편지가 들어가 있단다.”

“성인이 될 때까지 보육원에서 교육과 의식주를 해결하게 도와주마. 이젠 걱정 말렴.”

“그러고 보니 이번 일로 피난민 문제가 생겼겠네. 이걸 형님한테 말씀을 드려봐야 할 거 같아.”

“이러라고 우리한테 부탁한 거 아냐? 막내는 장사수완 없으니까.”

아마도? 예나는 둘의 대화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단 하나, 자신이 이제 불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뿐이었다. 헤일은 아직 사악해지지 않았다. 아이가 그것을 증명해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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