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1

일단 "멸망" 하시오 글 커미션

빵글빵글 by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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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장 전 커미션과 같은 테마로 작업한 리퀘스트입니다. 오탈자, 비문 등의 수정만 거쳤습니다.

  • 1인, 일부 키워드 제시, 공백 포함 5,079자. 질병 아포칼립스를 테마로 작성했습니다.

  • 〈단간론파〉 시리즈 기반 창작 세계관 자캐 커뮤니티의 캐릭터로, 커뮤니티 세계관 내의 고유명사와 설정이 일부 활용되었습니다. 원작 및 커뮤니티와 무관한 일종의 2차(3차) 창작입니다.

  • 질병, 죽음, 자기파괴적 충동 등이 다소 묘사됩니다.

  • 신청자의 동의를 받고 전문 공개합니다. 이하 이미지와 텍스트의 내용은 같습니다.

  • 커미션 바로가기: https://kre.pe/TogX

왕 위엔쯔는 끝을 종종 생각해 보는 사람이었지만, 언제나 끝은 그가 생각한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마지막을 상상하는 것이 비단 그만의 습관은 아니라서, 인류는 때때로 스스로의 종말을 상상했다. 생존이 모든 권리보다 우선시되는 극한상황, 때로는 공권력에 의해 소수가 희생되며, 그 압제의 시기마저 지나 힘이 좋거나 재치가 뛰어나거나 운이 따라 살아남은 개인들만이 잿빛 폐허를 헤매고, 영겁 같은 기다림 끝에 마침내 사태의 종결을 선언하는 낡은 라디오 음성, 어째선지 꼭 미국의 어느 거리로 상상되곤 하는 그 풍경… 하지만 위엔쯔는 그런 풍경 속의 자신을 상상하지는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끝은 조금 더 일상적이고 순간적이며 인류 전체가 아닌 자신 하나만을 매듭짓는 어떤 것이었다. 상상한다 해도 옛 재난 영화들을 보며 자신이었다면 영화가 시작하고 몇 분 만에 죽었을지를 점쳐 보는 정도에 그쳤다. 그는 이미 자신의 끝을 한 차례 본 뒤였으니, 두 번째 목숨은 이전보다 조금 더 쥐고 있기 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때보다 나쁘진 않을 것이다, 죽음을 한 차례 선택해 본 사람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을 정도는 아니다’를 판단하는 감각이 생겼다.

어쨌든, 왕 위엔쯔가 생각하기에 그 자신은 재난이 일어난다면 얼마 못 가 죽거나 폐허를 헤매게 되는 운 나쁜 일반인일 것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재난의 원흉도, 영웅도, 종결자도 되지 못할 평범한 사람. 세계 최고의 칭호를 달고 있으니 재단의 보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기껏해야 종결 선언을 기다리며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이 고작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연구실에나 틀어박혀 있을 것이 아니라. 재난이라는 단어는 사람에게 공통적인 심상을 안겼다. 나는 어디까지나 재난의 피해자이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야닉 후원 재단의 이름 아래, 왕 위엔쯔가 이끄는 백신 연구팀은 또 하나의 ‘엑셀렌티아다운’ 업적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인류가 초능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완치할 수 있는 병의 목록에 마침내 하나가 더 추가되려 하고 있었다. 바이러스에 의한 난치성 신경계 질환이었다. 치사성이 아주 높진 않지만 평생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병인데,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가 주기적으로 변이하는 탓에 치료도 예방도 곤란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빨랐던 바이러스의 변이 속도를, 왕 위엔쯔는 따라잡고 있었다. 기나긴 싸움의 끝을 직감할수록 그의 신경은 날카로워졌다.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소한 실수에 대한 지적은 금방 비난이 되었고, 단순 착오는 악의로 둔갑했다. 감정적 불화가 열매 맺기 시작한 나무를 뿌리부터 불살라 버리지 않도록, 그는 어느 때보다 자신의 일기를 자주 뒤적여야 했다. 그러고 나면 다시 웃는 얼굴로 팀원들을 다독일 수 있었다. 팀원들은 당신 덕에 우리가 버틴다고 종종 그를 치켜세웠다. 위엔쯔는 그런 말을 할 거면 애초에 싸우지를 말라고 생각만 하며, 예의 바른 미소와 함께 여러분이 잘해 주신 덕이라고 공을 돌렸다.

그러지 말걸, 왕 위엔쯔는 이제야 곱씹는다.

 

유독 작업이 늘어지는 날이었다. 위엔쯔는 팀의 막내 격인 E와 함께 미처 거절하지 못하고 맡게 된 오늘치 연구일지를 정리하고 있었고, 건너편 후드에서 연구원 T가 실험기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T는 위엔쯔가 팀원 중에서 가장 오래 봐 온 사람이었다. T도 위엔쯔도 지쳐 있었고, 위엔쯔는 T가 다른 팀원과 낮에 벌인 말다툼 탓에 신경이 곤두서 있음을 알았다. T는 기구를 세척하고 일회용품은 수거함에 넣은 뒤, 마스크와 장갑과 헤드캡을 폐기하고 보안경과 랩 가운을 정리하는 내내 누구라도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위엔쯔는 그가 마지막으로 손을 소독하고 나가지 않았음을 미처 지적하지 못했다. 어, 소독… 일지 정리를 돕던 E가 같은 것을 눈치채고 머뭇거렸다. 제가 다음번에 따로 당부드리죠, 위엔쯔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결론부터 말해서, 그 다음번은 오지 않았다. 일지에 적어 넣은 실험 데이터를 점검하던 위엔쯔는 비정기심사 이후 처음으로 심장이 차가워지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범위 내의 오차라고 생각했던 수치들은 조금씩, 아무도 모르게 쌓여 어느새 거대한 오류를 가리켰다. 바이러스는 변이했다. 가장 안도하는 순간이 가장 취약하다는 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왕 위엔쯔가 모르지 않았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위엔쯔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연구동 봉쇄하세요, 지금 당장! 아마 그가 근 몇 년간 낸 목소리 중에 가장 컸을 것이다.

봉쇄령은 빨랐으나 바이러스는 그보다 빨랐다. 며칠간은 조용했다. 좋지 않았다. 반응이 즉각적이고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는 위험할지언정 멀리 퍼지지는 않았다. 퍼뜨리기도 전에 숙주가 죽어 버리니까. 바이러스 유출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조용하다는 것은 딱 두 가지를 의미했다. 바이러스가 반출되지 않았거나, 잠복기가 길거나. 퇴근길에 도로 불려 들어온 T가 그사이에 몇 사람이나 만났는지는 그 자신조차도 몰랐다. 검사에서 양성 표시가 보인 순간 모두가 탄식했다. T만이 격리실 유리 너머에서 묵묵히 그 결과를 바라보고 있었다. 격리실 창문에 두꺼운 커튼을 다세요, 그가 말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시고요. 그는 그로부터 5일 뒤에 죽었다. 위엔쯔는 시신의 소각을 지시했다.

 

두 달, 고작 두 달이었다. 두 달이면 망할 기적처럼 만들어진 치사율도 전파력도 높은 바이러스가 세상을 지배하기에 충분했다. 전 세계는 너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이제 와서 달걀을 여러 바구니에 나눠 담기에는 그 달걀들이 한 바구니의 편리함을 놓고 싶지도 않고, 놓을 수도 없게 된 뒤였다. 사람들은 죽어갔고 그보다 더 자주 서로를 죽였다. 세계 어디를 떼어다 놓아도 재난 영화의 클리셰였다.

위엔쯔가 있는 연구소는 이제 한 줌 남은 달걀들마저 깨져 버리지 않도록 애쓰는 전장의 최전선이다. 연구소 전체가 외부 세계로부터 격리되어, 재단의 철저한 관리하에 바이러스의 확산을 저지하려 애쓴다. 사망자 추산, 주요 도시들의 치안 수준과 붕괴율, 치사율과 같은 수치들은 끊임없이 갱신된다. 사망자 수의 증가 추세는 줄어들지만 단지 출생보다 사망이 훨씬 많아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의 총량이 줄어서일 뿐, 희망적인 신호는 아니다. 옛날에 이런 게임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중앙 모니터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E가 중얼거리며 웃는다. 아무도 그 웃음을 지적하지 않는다. 자조로라도 웃지 않으면 웃음이 인류와 함께 멸종할 것 같은 시대다.

퇴근의 개념은 진작에 멸종했다. 인류의 존속이라는 구체적이고 거대한 명분 앞에 노동자의 권익 따위는 휴짓조각이 되었다. 지속 가능한 노동을 생각하기에는, 노동 이전에 목숨조차 지속 가능한지 불투명했다. 우리는 가장 오래 연속 근무한 사람들로 기네스북에 오를 거야,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거기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때면 위엔쯔는 종종 목 끝까지 차오른 비아냥 섞인 농담을 삼켰다. 적당히 유쾌하고 적당히 뼈가 있는 블랙조크는 언제나 그의 전공이 아니었다.

자조가 치밀 때 그는 자신보다, 자신이 아는 누구보다 블랙조크에 뛰어났던 사람을 떠올린다. 종말이 와도 분명 한순간 머리를 짚게 만들 어처구니없는 농담을 던지겠지. 지금껏 그래 왔듯 죽음을 불사하고 사람들을 구하면서. 그는 타고난 체질로 지구상에 없었던 변종 바이러스마저 이겨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사람도 떠올린다. 걱정이라는 것이 어울리는 사이는 결코 아니나, 이런 상황에 학문적 탐구심을 불태울 성정도 아니므로 위엔쯔는 그 생각을 어떤 범주에 넣기를 거부한다. 그밖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고 있었으면 하는 사람, 이런 때마저 다정할 사람, 다정하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책임감이 있었던 사람, 이 시대에마저 살아남을 힘이 있을 사람, 도무지 지금 어떤 모습일지 상상되지 않는 사람, 이 사람, 그 사람, 또, 그리고 또… 그는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면 자신이 아는 사람들로 머릿속을 채운다. 그가 당장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그럴 수도 없는 사람들로.

위엔쯔는 이 전장의 지휘관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과 ‘최전선’이라는 단어를 결부해 본 적이 없었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으나, 이 자리에서 승리에 가장 근접했던 것은 단연 그였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무거운 책임이 어깨에 얹혔다. 요즘도 그는 이전에 하던 것처럼 자주 일기를 뒤적이고, 예의 바른 투로 사람들을 다독이고 연구팀을 이끈다. 이전과 달리 일기에는 점차 공백이 늘어 간다. 기록으로조차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일들이 때때로 있음을, 그는 깨달은 지 오래다.

그렇게 낮이 지나고 마침내 고요한 밤이 찾아오면, 그는 도움 될 것이 없음을 알면서 모든 것을 돌이켜 생각한다. 대개 미진한 오늘의 연구 성과와 지난주에 죽어서 연구소를 떠난 얼굴들과 지지난주에 넘겼던 고비와… 생각은 자꾸만 거꾸로 돌아가서 소독 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그런 말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그저 미움받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던 자신에게 도달한다. 엑셀렌티아 자책가 같은 칭호가 있었다면 그는 아마 최초로 두 개의 엑셀렌티아 칭호를 동시에 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세상은 나의 소심함 때문에 멸망하는 걸까? 그렇다면 이건 가능한 것 중에서도 가장 어처구니없는 멸망일 거라고, 그는 자조한다. 왕 위엔쯔는 이제 스스로를 재난의 원흉이라고 생각하며, 재난의 영웅이자 종결자가 되어야만 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따뜻한 녹차 한 잔을 절실하게 바라면서, 해가 뜨면 위엔쯔는 다시 하얗고 삭막한 연구실로 돌아간다. 약품 냄새와 희미한 곰팡내와 기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똑같이 하얗지만 여기저기 얼룩이 진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쓴 얼굴들이 그를 바라본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알약 한 알이 아님에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는다. 자칭 엑셀렌티아 자책가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에서 자신과 똑같은 종류의 죄책감을 읽어낼 수 있다. 이 연구소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병사자보다 스스로 죽은 사람이 많은 공간이다. 서로가 서로의 책임감을 집어삼켜 주어야만 맨땅에서 익사하지 않을 수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나 혼자만이 죄인은 아닐 거라고. 그는 미약한 희열과 그보다 훨씬 거대한 죄악감을 안겨주는 생각을 자신을 죽일 알약 대신 삼킨다. 그러고 나면 다시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시작하죠, 여러분. 분명 곧 끝낼 수 있을 거예요.

그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그 말을 진심으로 믿지는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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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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