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2
일단 "멸망" 하시오 글 커미션
개장 전 커미션과 같은 테마로 작업한 리퀘스트입니다. 오탈자, 비문 등의 수정만 거쳤습니다.
1인, 자율 작업, 공백 포함 5,304자.
〈신세계에서〉를 오마주한 창작 세계관 자캐 커뮤니티의 캐릭터로, 커뮤니티 세계관과 스토리를 일부 차용했습니다. 원작 및 커뮤니티와 무관한 일종의 2차(3차) 창작입니다.
살해, 사회적 혼란, 파괴적 충동 등이 다소 묘사됩니다.
자작 캐릭터의 저작권자로서… 전문 공개합니다. 이하 이미지와 텍스트의 내용은 같습니다.
커미션 바로가기: https://kre.pe/TogX
그날 라디오에서는 하루 종일 파도 소리가 흘러나왔다.
♦ ♦ ♦
지상 땅을 밟았을 때 아라울은 죽음을 예감했다. 복귀한 이탈자는 없다. 지상은 여전히 지나치게 척박하고 진신은 배신을 용서치 않는다. 세상은 넓으니 저 멀리 어딘가에 다른 삶을 가꾸는 이들도 있지 않겠냐기에는, 글쎄. 그곳까지 도달하기 전에 이름 없는 유해가 되는 편이 빠를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가 가진 것들은 어느 것이나 긴 생존에 아주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지상에 올 때 탈취한 호버크래프트는 그야말로 이동을 염두에 둔 물건이었다. 수면이나 기본적인 청결 유지 외에 쓸만한 기능을 거의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형혹 정도 되는 것을 개인에게 그리 쉽게 빼앗길 수준이었다면 진신은 진작 폐허가 되었을 테니, 그는 진신의 보안이 대충 건재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연하게도 식량이며 생필품을 스스로 생산할 수단은 없었다. 아라울이 가진 몇 가지 잡다한 재주들은 하나같이 사회가 만들어지고 원초적인 생존 요건이 보장된 뒤에나 유효한 것이었다. 몇백 년 전의 야생동물이었다면 모를까, 아무것도 없는 오염된 땅에 홀로 내려온 인간에게 빠른 발은 변이종 앞을 제외하면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본래 역할보다도 호버크래프트를 작동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일이 더 많을 것이 틀림없었다. 달려가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전하고픈 승전보도 없다. 그나마 도망 하나는 잘 다닐 수 있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이미 한 차례 도망치다 여기까지 온 것이긴 했으나.
통신과 비행이 가능한 소형 호버크래프트 한 대, 원래 실려 있던 간식류와 물 약간, 아직 기능하는 신체 하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몇 가지 정보들. 자원을 셈해 본 아라울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가늠했다. 건강한 인간이 물 없이 생존할 수 있는 기간은 사흘 정도라던가. 물자를 최대한 아껴도 길어야 한 달. 추격대나 변이종 같은 변수를 고려하면 그보다 짧을 것이 분명했다. 죽을 날 받아 놓은 기분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아라울은 조금 웃었다.
♦ ♦ ♦
아, 이거 그때 생각난다. 물도 없이 건빵을 으적으적 씹던 아라울이 중얼거렸다. 진신을 떠난 지 일주일이었다.
심수 추락 사건. 그 어느 때보다도 생존에 필사적이던 날들이었다. 새 아침이 밝을 때마다 남은 식량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셈하던 것이, 진신으로 돌아온 뒤에도 짧은 기간 습관으로 남아 있었다. 설마하니 멀쩡하던 섬이 갑자기 지상으로 추락할 줄 누가 알았을까. 거기에 아직 학예원을 졸업하지도 못한 어린애들만 있을 거라고, 또 그 아이들 모두가 살아 돌아올 거라고도. 그래도 예민하고 걱정 많은 자들이니 좋지 않은 소문의 동향 정도는 파악하고 있지 않았을까, 아라울은 짐작했다. 생각이 고스란히 실현되는 세상이란 옛사람들이 생각한 것만큼 편리한 세상은 절대로 아니었다.
견습 기간만 지나면 평생 지상에 발끝도 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인생 정말 모르는 거야─ 듣는 사람도 없는데 그는 태평한 투로 중얼거렸다. 제 발로 지상에 내려올 줄은, 심지어 탐사도 취재도 아닌 이탈일 줄은 그 걱정 많고 머리 좋은 자들도 몰랐으리라. 아무렴 자기 자신도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또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옛 기억을 말벗 삼아 식사─건빵 반 봉지─를 마친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해가 뜨기 전에는 이동해야 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아야. 습관처럼 노래를 흥얼거리며 쭉 뻗은 팔이 어깨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멈칫했다. 기지개도 마음대로 못 켜는 건 좀 불편하네에. 떠나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새 습관이 하나 더 늘었다. 혼잣말.
호버크래프트가 적막을 가르며 다시 떠났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 ♦ ♦
바다에 도착했어.
♦ ♦ ♦
당연하게도, 죽기 전에 바다 구경이나 실컷 하다 가자고 온 것은 아니었다. 추격대와 변이종을 피해 이동하는 내내, 호버크래프트의 조종속 옆에는 알처럼 생긴 기기가 놓여 있었다. 호란보다는 커다랗고 투박한 모양새였지만 잘 보면 그래도 제법 닮은 구석이 보였다. 진신에서 도망칠 때 훔쳐 나온 대용량 저장 장치. 호란의 사본이었다.
최근 열흘간 아라울은, 별다른 준비도 없이 지상에 혼자 뚝 떨어진 사람치고는 꽤 바빴다. 지상에 내려오자마자 며칠은 추격대나 변이종에 쫓기고 있지 않을 때면 사본에 담긴 내용 전체를 읽고 또 읽었다. 급조한 물건이라 검색 같은 편리한 기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견습 최종 임무 당시 확인한 내용은 기억하고 있었으나 지금 필요한 것은 요약된 결론이 아니라 디테일이었다. 며칠을 내리 소모한 끝에 아라울은 동해안에서 구시대의 통신 시설이 발견된 적 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제발이, 내가 드디어 해냈다. 제발이는 잠도 오지 않던 어느 밤 말 그대로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던 아라울이 호란의 사본에 붙인 이름이었다. 유용한 게 있으면 제발 좀 내놓으라고.
아라울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은 진신 전체에 비하면 소수였지만 분명히 어디에나 존재했다. 그를 포함한 몇몇이 전면에 나서 목소리를 내고 시선을 끄는 동안 그늘에 몸을 숨기고 길을 찾는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는 뜻이다. 이능력자와 오염의 상관관계에 관한 기록은 당연하게도 기밀로 취급되어 아무나 접근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그들은 마침내 그 원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사본을 만들어 빼내는 작전은 아라울이 맡았다. 신뢰받는 시민의 가면을 쓴 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도록, 전령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제발이는 그때 얻어낸 결과 중 하나였다. 어쩌면 이제 유일하게 남아 있을.
여름의 바다가 궁금하다고는 했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보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바닷가에 도착하자마자 아라울은 왜 옛사람들이 여름마다 바다를 찾았는지를 이해했다. 이 반도에서는 동쪽 바다가 가장 파랗다더니 정말로 그랬다. 비록 오는 길에 변이종을 마주치는 바람에 호버크래프트는 제대로 박살 나 버렸다지만, 어쨌든 목적지에는 도달했으니 나름 역할은 다하고 간 셈이었다. 바다 앞에는 높은 첨탑이 하나 우뚝 서 있었다. 어째 그 연구소 비슷하게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저기도 도올 같은 게 있으면 그냥 죽어야겠다. 친구들이 들었다면 등판을 열 대는 얻어맞았을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자신에게, 아라울은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반성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그의 발끝을 파도가 쓸고 지나갔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때의 작전은 성공도 실패도 아니었다. 계획이 완벽하게 흘러갔다면 진신 지도층은 기밀이 유출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눈치채더라도 범인을 특정하지는 못했거나. 그러나 모든 계획은 완벽할 수 없고, 사람이 하는 일은 반드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아라울은 호란과 다른 몇 가지 기밀자료의 사본을 만들어 빼내는 데에 성공했으나, 거의 동시에 동료 몇이 혐의점을 잡혔다. 크고 작은 충돌이 오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로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말 사고였는지 아니었는지, 사고가 아니라는 의혹조차 누군가 의도적으로 제기한 것이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의 죽음은 여러 시민에게 목격되었고, 안심과 불신이 동시에 싹을 틔웠다. 아라울과 동료들이 작전을 행한 근본적인 목적은 진실의 폭로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 외에 방법이 없을 것임을 직감했다. 서로의 안위를 포기한 채 그들은 말 그대로 정보를 ‘뿌리기’ 시작했다.
돌이킬 수 없는 급류가 진신 전체에 밀어닥쳤다. 베껴 쓴 기밀 서류가 하늘을 날았고 탈취당한 라디오가 규탄의 목소리를 뱉었다. 오래전 자식을 잃은 부모가 울부짖으며 불을 놓았고 폭동에 부모를 잃은 자식이 노도처럼 창을 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수배서가 나붙었고 다시 하루가 멀다 하고 수배서가 뜯어졌다. 전령은 자신이 방금 죽여 버린 어린 치안대원의 시체를 바라보면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를 들었다. 네가 바란 게 이런 거였어?
기습적인 전개와 폭로 직후의 기세를 탔다고 해도, 반동 세력의 기반은 진신보다 약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차피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니 현상 유지가 최선이지 않냐는 회의론이 힘을 얻은 탓도 있었다. 개혁을 꿈꾼 이들은 진실이 언제나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소요는 반년을 채 이어지지 못했다.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할 수는 없다는 듯, 진신 사회는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동료 중 대다수는 뜻을 꺾고 흩어졌고 몇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새 터전을 찾아 진신을 떠났다. 돌아선 이들은 주모자들의 이름을 낙원의 통행삯처럼 바쳤다. 마지막 남은 아지트가 불타 무너지던 날에, 아라울은 호란의 사본 하나만을 챙겨 도주했다. 정거장을 습격해 호버크래프트 한 대를 빼앗아서는 공중요새를 영원히 떠났다. 막아서는 이들과 싸우다 왼쪽 어깨가 박살 났어도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전부 지긋지긋했다. 진신도, 끈질긴 치안대도, 호루라기와 고함도, 승리와 안정을 떠들어대는 라디오도, 불안에 떨던 밤들도, 그리고 여태껏 목숨 붙이고 사는 자기 자신까지도.
♦ ♦ ♦
옛 통신 기기를 조금이나마 다룰 수 있게 되는 데에는 다시 이틀 정도가 더 걸렸다. 방송국에 몸담고 있었던 것은 1년. 기초를 배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전문가가 되기에는 턱도 없이 짧았다. 그나마 진신의 기술이 구시대의 것을 참고한 것이 대부분이라 다행이었다. 어떻게든 손을 대 볼 수는 있는 수준이었으니. 마침내 원하는 조작을 해낼 수 있게 되었을 즈음 그는 스스로의 한계를 느꼈다. 호버크래프트를 버리면서 식량도 전부 잃어버렸으니 그간 먹은 것이라고는 어찌저찌 끓여 마신 바닷물뿐이었다. 간식 같은 거라도 좀 남겨 놓고 가지, 매정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몇 년, 몇십 년 전 살던 사람들이 남겨 봐야 이미 미생물의 밥으로 돌아갔을 텐데도 아라울은 그런 소리를 하며 웃었다. 기기를 조작하는 내내 자꾸만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뭐야,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도 다 거짓부렁이었잖아.
지상연구소 신설 이후 지상에 상주하는 인원이 늘어나면서, 방송국과 기술연구위원회는 방송 범위를 지상까지 넓히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49기가 복귀한 그 겨울 이후 한동안 주춤했으나, 그래도 이 모든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나름의 성과는 거둘 수 있었다.
그래, 적어도 이 먼 거리에서도 라디오 통신이 닿을 정도로는.
♦ ♦ ♦
…
… …
들려?
…
보고 싶다.
✕ ✕ ✕
어느 여름날, 진신 방송국에는 조금 이상한 기록이 남았다. 외부로부터의 갑작스러운 전파 하이재킹,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그리움의 말. 바다에 도착했어. 들려? 보고 싶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누구에게 전하는 말인지, 왜 방송을 탈취해 놓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지 진신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는 알아챘을지도 몰랐다. 그 목소리가 하염없이 사랑했을 누군가는.
그날 라디오에서는 하루 종일 파도 소리가 흘러나왔다.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