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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urning of the tide

나우플리온 드림 | 삐쭈 님 커미션 :D

rhindon by 댜

5월. 달의 섬을 돌아보는 일정이 거의 마무리되었을 즈음이었다. 기원섬으로 복귀한 나우플리온은 마을 사람들과 서클릿의 사제에게 몇 가지를 물어본 후 짐을 풀지도 않은 채 다시 길을 나섰다. 마을 어귀를 떠날 무렵은 이미 늦은 오후였지만, 그는 한 시도 미뤄서는 안 될 용무를 가진 사람처럼 움직였다. 혹은, 미뤘다가는 영영 처리하지 못할 일을 아는 사람처럼.

하루하루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을지는 몰라도, 대륙에 비하면 섬의 낮은 원체 짧았다. 나우플리온이 산 중턱에 다다랐을 때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서는 보름을 손톱만큼 남겨둔 달이 고개를 내밀었다.

“멀리도 사는구먼.”

나우플리온은 들어줄 사람도 없는 불평을 내뱉으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등잔을 가져오기에는 늦어버렸다. 그렇다면 달과 별에 기대 나아가는 수밖에.

다행히 목적지까지 남은 길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가늘게 이어진 길을 따라 오르막을 하나 넘자, 비로소 주홍색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인가가 분명했다. 나우플리온의 걸음에 활기가 깃들었다. 불이 켜져 있다는 것은 그곳에 누군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집주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실은 마을에서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곳에 달리 머물 자도 드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빛은 작은 집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오래되었으나 군데군데 보수한 흔적이 엿보이는 건물이었는데, 양식으로 보아서는 역병이 돌기 한참 전에 지어진 듯했다. 건축에 흥미가 없는 나우플리온의 짐작은 거기서 끝났다. 또 집의 연식이야 애초에 그의 관심 밖이었고. 나무 문 앞에 선 그는 크게 심호흡한 후 손마디로 문을 두드렸다.

똑.

그가 찾아온 사람에게 노크는 한 번으로 충분했다. 문 옆 고리에는 작은 램프가 걸려 있었다. 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우플리온은 램프의 빛에 의지해 그 아래 못질 된 명패를 읽었다.

S의 집.

잊고 지내려 했던, 그러나 기억이 흐려질 때면 언제 그랬나 싶게 입안에 들어차던 이름. 달의 섬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재회를 각오하고 있었다. 단지 검의 사제인 자신이 모르페우스의 제자와 길이 겹칠 일은 흔치 않다는 점을 간과했을 뿐이었다. 먼발치에서야 몇 번 볼 수 있었지만, 그래도 늘 붙어 다니던 시절과는 달랐다. 이제 이 집의 주인은 그가 찾아 나서지 않는다면 마주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램프 속 불빛이 일렁거리고, 저물녘의 바람이 불어온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노크하려 손을 든 그때 문이 바깥쪽으로 열렸다. 나우플리온은 서둘러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네모난 빛이 풀밭으로 쏟아졌다. 문간에 선 사람은 잠시 정적을 흘려보낸 끝에 입을 열었다.

“나우플리온.”

삼 년만의 제대로 된 만남이었다.

 

 

짧게라도 대화하지 않겠냐는 말에 S는 걷자는 제안으로 응답했다. 램프를 빼 들고 앞장서는 S의 뒤로 나우플리온은 묵묵히 따라붙었다. 집을 반 바퀴 돌아, 어린 약초가 돋아난 텃밭을 지나자 편평한 풀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세는 북동쪽으로 뻗어 있었다. 이곳에서 밤하늘을 가로막을 것은 구름뿐이었다.

“인사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었거든.”

나우플리온은 S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뭐, 나와 다프넨이 워낙 뻑적지근하게 돌아왔으니……. 아마 소식은 접했겠지만. 할 이야기가 남은 것도 같았고.”

“제자로 들였다면서요. 소문은 들었어. 그렇게 생각 없다고 하더니.”

“내가 그런 말도 했었나?”

S는 멈춰 섰다가, 몸을 돌려 그를 바로 보았다.

“자랐네요, 당신.”

S는 덤덤히 말했다. 나우플리온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씩 웃었다.

“언제까지나 자존심 센 어린애일 수는 없었어. 섬 밖에서 그건 유지하기 꽤 까다로운 신분이었는걸.”

S는 여전히 감흥 없는 얼굴로 되풀이했다.

“섬 밖에서.”

“많은 곳을 다녔고, 여러 사람을 만났으니까.”

“하지만 나로는 충분치 않았어. 그렇죠? 이 년 넘게 함께 여행했지만, 결국 당신은 당신 혼자이길 택했잖아.”

부정할 수 없었다. 나우플리온은 S를 끌어들이지 않기를, 자신을 찾아드는 결말에서 S만은 멀리 떼어놓기를 바랐었다. S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말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는 아직 그 결정을 후회하지도 않았다. 그건 진심으로 S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끝내 남는 미련은, 나우플리온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네가 내게 미친 영향은 방향이 좀 달랐지.”

S는 더 말해 보라는 듯이 턱을 치켜들었다. 나우플리온은 말을 골랐지만,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치기 어린 청년의 미숙한 낱말들밖에 없었다. 그들이 헤어질 적 나우플리온은 어른이라 하기는 어려웠었고, 그가 품은 마음은 아직 그 시절에 정체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만 있어서도 안 될 노릇이었다. 나우플리온은 약간은 멋쩍게 말했다.

“좋아했어.”

S는 말이 없었다. 차마 S의 표정을 마주할 수 없었던 나우플리온은 대신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좋아해.”

보름에 가까운 달여왕은 냉엄한 백색으로 빛났다. 그 아래 뻗은 계곡은 검푸른 어둠. 계절의 전환을 앞둔 지금도 섬의 밤은 싸늘했고, 나우플리온은 그 추위를 뼛속 깊이 느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달의 섬 어디에서도 피할 길 없는, 짙은 소금기가 섞인 바람이었다.

“내가 이기적으로 굴고 있단 것 알아. 먼저 떠나 놓고서 이러는 게 네게 두 번 실례를 범하는 일이란 사실도. 난 맺고 끊는 게 깔끔하지도 않아서, 네가 거절한다면 다신 눈에 띄지 않겠다느니, 영영 네 삶에서 사라지겠다느니, 그런 입에 발린 말도 못 하겠어.”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겠는걸. 내가 원하는 바가 그런 거라면.”

가벼운 말투였으나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관계를 끊는 데 가장 확실한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죽음이다. 동시에 그것은 가장 불공평한 방법이었다. 죽은 자가 남기고 가는 미제들은 온전히 산 자의 몫으로 떠넘겨졌으니까.

하지만 나우플리온은 다른 말에 주목했다.

“그럼 S, 너는 뭘 원하지?”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달여왕의 시선 아래 그 소금기 섞인 바람이—은빛 가는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어깨를 쓰다듬으며 떨어져 내려 흰 치맛자락을 돛처럼 부풀리는 움직임. 램프의 불빛은 풀밭 위로 둥근 원을 그리고, 짤막한 풀잎이 일렁이며 물결친다…….

영영 이대로 머물러도 좋을 것 같다고, 나우플리온은 느꼈다. 단둘뿐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바람을 맞으며, 한 쌍의 낡은 석상이 되어도 좋겠다고.

그에게는 아쉽게도, 어떤 비겁자라도 죽을 때까지 땅바닥만을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 시선을 끌어들였다. 빛의 경계로부터, 풀밭을 지나, 나부끼는 치마와 램프를 모아든 두 손을 넘고, 어깨와 목의 곡선을 따라. 그에게 내려질 선고를 직시하려 했다.

아, 그러나 이것이 벌이라면 지나치게 가혹했다.

“S.”

나우플리온은 황망히 불렀다.

S가 지닌 섬사람의 이름, □□□□는 바다를 뜻했다. 종종 아이들에게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이름이 붙고는 했지만, S의 경우는 그보다 연관성이 명백한 편이었다. 해안부터 수평선까지 꽉 찬 채 넘실거리는 바다처럼, 눈물 몇 방울 떨어진들 아무렇지 않을 성품. 때로 풍랑이 되어 수면을 휩쓰는 감정마저 그뿐이었다.

제아무리 거센 폭풍일지언정 대양을 범람하게 할 수는 없었다. 가뭄도, 홍수도 이 사람과는 무관했다.

하지만 항해자인 그가 왜 몰랐던가. 몇천 년에 걸쳐 느리게 순환하며, 파도를 파묻고 심해를 밀어 올려 이윽고 대륙의 기후마저 바꿔 놓는 해류의 존재를.

S는 울고 있었다.

창백한 뺨 위로 반짝이는 선이 그어졌다. 나우플리온은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이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려던 게 아니었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랐지? 그의 무덤가에서나 울어주기를 기대했었나, 그가 S의 눈물을 목격하지는 않을 수 있도록? 그것 또한 이기심이었다. 적어도 S의 의사는 알아야 하지 않겠냐, 멋대로 그렇게 단정 짓기도 했었다. 하지만 막상 우는 얼굴을 보자 그런 변명은 마음속에서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

“나쁜 사람.”

S는 한 음절 한 음절 짓씹듯 말했다. 강한 원망이 실린 말이었다.

“당신을 아끼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나우플리온은 S가 입 밖에 내지 않는 속내를 이해했다. 그러는 데 ‘소통’의 능력까지 쓸 필요도 없었다. 오랜 세월 홀로였던 아이와 그 아이에게 생겨난 한 명의 친구, 말도 없이 다가오고 떠나더니 죽음의 그림자를 덮어쓴 채 돌아온 사람. 그는 S에게 못 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무성의한 이별이, 벌려둔 거리가 무색하게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성큼 다가선 나우플리온은 양손으로 조심스레 S의 뺨을 감쌌다. 눈물을 엄지로 문질러 지웠다.

“울지 마. S, 제발…….”

“나도 모르겠어. 내가 왜, 어쩌다가……. 막을 수 없는 죽음에 매달리는 짓, 정말로 하기 싫었어…….”

고개를 숙이면 나우플리온은 S의 정수리에 입을 맞출 수 있었고, 그는 그렇게 했다. 부슬부슬한 머리카락이 입술과 뺨에 닿았다.

옅은 약초 향, 온기, 떨리는 숨소리. 달빛 내린 풀밭을 스치는 바닷바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눈이 감겼다. 이번만큼은, 온전한 우정만이 담긴 행동이었다.

“미안해.”

나우플리온은 나지막이 말했다.

되짚어가야 할 밤길이라든지 사제의 직무, 어린 제자의 놀림 따위가 떠올랐고 또 빠르게 가라앉았다. 옆구리에 S의 손이 얹혔다. 차마 끌어안지 못하는 데서 그 주인의 머뭇거림이 고스란히 느껴져, 나우플리온은 애가 다 달았다. 마음이 숯으로 사그라든다면 이 아픔도 아무렇지 않은 게 될까.

“하지만 한 가지, 이것 하나만은 약속할 수 있어. 난 이제 섬을 떠나지 않아. S, 난……. 돌아왔어.”

S는 못나게 훌쩍였다.

“내가 뭘 원하냐고 그랬지.”

“무엇이든지,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쉽게 할 맹세가 아니었고, 나우플리온은 함부로 낭만적인 말을 뱉었다 주워 담을 만큼 어리지 않았다. 삶과 죽음 양쪽으로 얽매인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면, 무엇을 청한대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었다.

S는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물러섰다. 젖은 뺨에 불빛이 어른거렸다.

“가 버려.”

그건—

그건 분명 그가 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해 있었다. 나우플리온은 당황해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S가 원하는 게 그것이라면 그는 따라야 했다. 타협으로 진심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거든 그 외의 선택지는 없었고, 상상하려 해서도 안 되었다.

하지만 어째서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고통스러운지.

그의 마음을 읽은 듯, S가 후 짧은 숨을 뱉었다. 나우플리온이 움찔하며 시선을 떨구자 날숨은 한숨으로 바뀌어 반복되었다.

“그리고 다시 와요.”

나우플리온은 고개를 들었다.

“난 주로 여기 있으니까. 집을 오래 비우지도 않고. 다음에는 찻잎이라도 가져와.”

“정말 그래도 되겠어?”

설마 환청은 아닐까, 믿기지 않아 되물으니 S의 얼굴에 얼핏 한심해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던 나우플리온은 곧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씩 웃었다. 한번 바닥까지 떨어져 본 감정은 오히려 그로써 탄력을 입은 듯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괜찮은 것 맞지?”

소매로 얼굴을 거칠게 닦은 S가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귓가가 붉었다.

“똑같은 말 자꾸 시키지 마.”

대답에는 코맹맹이 소리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S는 나우플리온을 휙 지나치고는, 반쯤 뛰는 듯한 속도로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휘날리는 백금발을 멍청하게 쳐다보던 나우플리온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그리고, S보다 한 뼘은 긴 다리를 제대로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몇 박자 늦기는 했대도, 앞서가는 S를 따라잡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언제나 그랬었다. 대륙을 떠돌 적과 다름없는 것도 하나 정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S의 곁에서 모르는 척 다시 보폭을 맞추며, 나우플리온은 문득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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