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별곡 少年別曲

하이큐 / BL 드림 / 이니셜 치환

포말 by 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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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님 커미션입니다. (10,000자)


“K, 좀 평범하게 말할 수는 없어?”

평범하게 말한다는 게 뭐였더라.

팀 메이트와 사이가 좋은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승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채찍질했다. 내 방식은 옳은 것이었고 그대로 따라와 준다면 승리는 따놓은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너희도 이기면 기분 좋잖아. 이기기 위해 시합하는 거잖아.

평소 큰소리 내는 법 없던 H의 말이 비수처럼 박힌 건, 분명 내 방식이 글러 먹었다는 사실을 내심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토스를 올렸던 그곳이 텅 비어있던 그때부터.

“평생 그렇게 패배자처럼 사는 게 더 낫단 소리야? 내 토스만 받아낼 수 있으면 이길 수 있었다고!”

또 언성이 높아지고 말았다. 아, 이게 이 녀석이 말한 ‘평범’하게 말하는 것의 반대인가. 그럼 난 지금 전혀 평범하지 못한 건가.

H의 얼굴이 화가 난 듯 일그러졌다가 침울해지는 걸 바라보면서도 내 입은 멈출 줄 몰랐다. 멈추고 싶어. 그렇지만 이기는 건 더 중요해. 좀 더 날 따라와 줬으면 됐잖아.

“그 정도도 노력하지 않으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건 변명이야.”

난 하나도 잘못한 거 없어.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소년별곡

少年別曲


“고기만두 먹을 거지?”

“감사합니다!”

K가 ㄱ에 오고 좋은 것 중 하나로 꼽는 것은 단연 사카노시타 상점의 고기만두가 무척 맛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해 팀의 분위기가 예전만큼 살기등등하지 않다는 것. 이곳에서 제 토스의 장점을 가장 잘 살려줄 ‘말’을 구했고 이 정도의 무기라면 충분히 어지간한 강팀에겐 먹히리라는 확신이 섰다. 평소 셈에 밝진 않아도 배구에 있어서만큼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이 뛰어난 K는 지금 이 팀을 어떻게 갈고 닦아야 정상에 설 수 있을지 가늠했다.

ㄴ와 첫 연습시합을 앞두고 오히려 불안해보이는 건 S였다. 이리저리 마음 써주는 선배의 말에 K는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적으로 싸우면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그 말 그대로였다. 전 팀메이트가 어쩌고, 싸움이 어쩌고. 그런 자잘한 것들이 눈앞에 닥친 시합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 그저 최선을 다해 이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조금씩 합이 맞아가는 이 오합지졸 팀의 중심에서 팀플레이의 기쁨을 알아갈 때,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섯 명이 함께 하는 스포츠란 게 무슨 의미인지.

“H!”

H?

늘어지게 하품하며 복도를 걷고 있던 K가 순간적으로 들려온 익숙한 이름에 반응해 뒤돌았다. 뒷목이 살짝 드러난 잿빛 머리카락이 이제 막 창을 투과해 들어오는 오후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H…?”

저보다 머리 하나정도는 작은 그의 뒷모습에 K가 저도 모르게 떠오른 이름을 부르자, 천천히 돌아보는 눈동자가 금빛으로 일렁였다.

“누구?”

제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S를 손바닥으로 꽉 누른 K가 “중학교 팀메이트.”하고 설명했다. 저와 그리 차이 나지 않는 신장에 혹여나 S가 허튼 희망을 품을까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매니저였어. 근데 네가 왜 여기에…. ㄴ로 간 거 아니었어?”

웬일로 반가운 소리를 내는 K와 그 옆의 S를 바라보는 노란 눈빛이 매서웠다. K의 기억 속 H는 그리 불같은 성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A처럼 조금 더 에너지를 비축하는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대꾸없이 돌아 제 친구에게로 달려가는 H의 뒷모습에 S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너 진짜 중학교 사람들하고 사이 안 좋았구나? 그러게 사람이 마음을 곱게 써야한다니끄아악! 아파! 아파!!”

S의 머리통을 쥐어 터뜨릴 것처럼 움켜쥔 K의 눈이 이미 사라지고 없는 H의 잔상을 좇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 그를 불러세웠던 걸까. 텅 빈 복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K가 쥐고 있던 S의 머리통을 던지듯 놔줬다.

“가자.”

나도 나름 평범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건가.

*

“사과 같은 거 하지 마! 나도 안 할 거니까!”

버럭 소리치는 D의 앞에서 K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고 제 기억 속에 난폭한 제왕이자 열받는 녀석, 가장 쓰러뜨리고 싶은 상대일 거로 남겨두겠다는 그의 말에 섭섭함이나 이견은 없었다.

K가 식어버린 사과를 목구멍 아래로 미지근하게 삼켜내고 돌아서려할 때, D가 “야.”하고 그를 불러세웠다.

“근데 너 H는 만났냐?”

“만났어. …얘기는 못해봤지만.”

구태여 저를 피하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D는 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음에도 우리가 이기겠다는 K의 말에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 못박힌 듯 서있던 D의 곁으로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은 A가 느릿하게 걸어왔다.

“저 녀석 H 만났대.”

“아아. H ㄱ로 갔지?”

“난 그 녀석도 분명 ㄴ로 올 줄 알았는데 이해를 못 하겠어. 왜 굳이 K가 있는 ㄱ로 간 거지? 둘이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니잖아.”

보기보다 정 많고 외로움도 잘 타는 D는 아무래도 뿔뿔이 흩어진 저희의 처지가 싫은 모양이었다.

“난 어쩐지 알 것도 같은데. H 걔는 K를 그냥 내버려두지 못하는 구석이 있었어.”

“으응? 그런 게 있었나?”

“하아. 너도 참 둔하다.”

“무슨 소리야!”

한숨을 푹 내쉬는 A의 말에 D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날 이후 K는 그동안 마주치지 않았던 게 신기할 정도로 H와 마주치는 빈도가 늘었다. 학교 복도나 매점, 자판기 앞, 때때로 등하굣길에서까지 마주치는 얼굴에 K는 그저 난감할 따름이었다. D가 그러했듯 H 역시 저와 엮이는 걸 불편해 할 수 있으니 되도록 그냥 지나치는 방법을 택했지만, 역시 등굣길에 단 둘이 마주치게 된 상황에서는 어색하게나마 손을 들어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안녕….”

기어들어가는 K의 목소리에도 H는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괜히 인사했나. 멋쩍어진 K가 슬그머니 손을 내리자 “안녕.”하고 기대 않던 답이 돌아왔다. 깜짝 놀란 눈이 기력 없는 얼굴의 H를 살폈다.

“너….”

“왜.”

“너 열 나냐? 가, 갑자기 사람이 안하던 짓을 하면 아픈 거라던데.”

우왕좌왕 허둥대는 K의 모습에 결국 H도 웃음이 터졌다.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말에 K는 아픈 게 아니라면 다행이라고 구슬땀을 훔쳤다. 학교까지 함께 걷는 길이 어색해도 싫지는 않았다.

“얼마전에 ㄴ랑 연습시합 했어. D랑 A도 있었고 선배들도 다 있었어. 여전히 강하더라.”

“뭐, 그렇겠지. 거기는 O 선배도 있으니까.”

작게 웃는 H의 옆얼굴을 흘끗 바라본 K는 문득 ㄷ 시절을 떠올렸다. 아직 어긋나기 전에는 이렇게 종종 아무렇지 않은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오늘은 뭐가 좋았고 이 부분을 좀 더 연습하면 좋을 것 같고 내일은 어떤 부분이 기대가 된다는 둥….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 따위로 가득한 일상이었다.

K의 기억 속 H는 언제나 고요한 눈으로 코트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도 키가 작은 선수는 얼마든지 있었다. 주변에서 배구를 시작해보면 어떻겠느냐 권유해도 H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난 너희를 보고 있는 게 좋아. 그건 매니저의 특권이야.”하고 씩 웃어보였다.

그런 추억 속 이야기는 꺼내지 않은 채 빙글빙글 겉돌던 대화가 의미없이 오갈 무렵, 저 멀리 희끄무레하게 교문의 끄트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교문을 지나면 이 대화도 끝일 게 뻔했다. 누가 그러자고 말한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고작해야 100m. 우리에게 주어진 인사의 길이는 그토록 짧았다.

“H.”

우뚝 멈춰선 K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어쩐지 망설이게 되는 건, 그 이유의 원인에 제가 있을 것 같아서.

“…아직도 배구 좋아해?”

이제 더 안 좋아한다고 하면 어쩌지.

이제야 평범하게 말할 수 있게 됐고 팀으로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제게 주어졌다. 이게 제 과거를 청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K는 적어도 H가 아직 배구를 좋아하길 바랐다. 인연이라는 건 무 자르듯 숭덩 잘려나가는 게 아니었다. 배구를 향한 그의 애정이 여전하다면 이번에는 H와 함께 승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자라났다.

아침해를 받은 금색 눈이 끔벅이며 눈앞에 선 요령없는 천재를 담았다. 얼굴은 벌개져서 가방끈을 꽉 쥔 손이 긴장으로 하얗게 질려있었다. 어쩐지 중학교 1학년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배구를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한없이 눈을 빛내던 어느 꼬마가 떠올랐다.

“빨리도 물어본다.”

희미하게 웃는 얼굴에 K는 발아래가 쑥 꺼지는 기분이었다. 발끝부터 올라오는 전율에 머리끝이 쭈뼛서는 것 같았다. 교문 앞에 선 H가 눈을 둥그렇게 뜬 K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여전히 탄탄한 근육이 두꺼운 교복 너머로도 느껴져 안심했다.

“연습 힘내.”

“어. 너도 그, 공부 힘내라.”

“하하! 바보야. 공부는 너도 힘내야 하는 거야.”

교문을 중심으로 갈라지는 수업 건물과 체육관 사이에서 두 사람이 등을 돌렸다. 인사는 필요치 않은 듯했다. K의 생각에 아마 이건 평범의 범주에 드는 것이었다. 저 멀리서 우다다 달려오는 S의 외침에 K도 서둘러 땅을 박차 부활동 실로 내달렸다.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아직, 좋아하는구나. 그렇구나.

…다행이다.

*

열혈 스포츠 만화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기적 같은 연출은 유독 현실에 박하다. 첨예하게 날을 세운 새로운 무기가 철저히 셧아웃당하고 말았다. 

‘새로운 팀을 만나 독재자를 벗어난 왕이 이전 팀원을 꺾는 아름다운 스토리는 없었답니다.’

잔혹 동화도 이런 잔혹 동화가 따로 없다. 밀려 들어오는 다음 순서 학교에 패자는 정신없이 떠밀려 코트를 떠나야 했다. 제아무리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한들 패배라는 단어에서 영영 해방일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시절부터 지금껏 배구를 해왔으니 못해도 수십, 수백의 경기를 뛰었다. 배구는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하는 팀 경기인 만큼, 제아무리 대단한 선수일지라도 언젠가는 패배를 겪게 되어있었다. K는 그게 싫었다. 코트 위의 사령관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만 준다면 실패할 리 없는 게임이라 생각했다. 패배의 맛은 언제 먹어도 지독한 쓴맛뿐이었다.

쓰라린 눈을 비비며 걷던 K의 앞에 잿빛 머리카락의 소년이 이제 막 한 방울 흐른 땀을 훔쳐내는 게 보였다. 고요하던 골목에 인기척이 느껴지자 H의 고개가 느직하게 움직였다.

“오늘 시합 보러 갔었어.”

“…어.”

“잘 싸웠어.”

저지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던 K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결국 져버린 경기에 ‘잘’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O 선배, 너무 강해.”

“그 사람 대단하긴 하지. 옛날부터 그랬어.”

H는 영 감흥 없는 투로 대꾸하며 발아래 작은 돌무더기를 바라봤다. 어느 초등학생들이 장난을 쳐놨는지 작은 돌멩이가 한데 뭉쳐져 있는 꼴이 보기 싫어 툭 걷어차자 유독 모난 돌 하나가 튀어 잡초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사실 네가 지길 바랐어.”

툭 던진 진심에 K의 두 눈이 큼직하게 뜨였다. 여름밤의 습한 공기에 풀벌레 우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렇게 새로운 팀을 꾸려서 예전 팀을 바로 이겨버리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 그때 네가 그렇게까지 몰아세우지만 않았더라면, 오늘 우린 그 자리에서 다 같이 이겨서 웃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H가 크게 숨을 삼켰다. 다신 돌이킬 수 없을 지난 시간이 파도처럼 밀려와 머리끝부터 흠뻑 젖어들어 갔다. 후회와 미련, 서운함, 원망. 우리의 추억이 이토록 부정적인 감정으로 덧칠해진 게 못내 서러웠다.

“너의 분함도 우리 몫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다들 널 싫어한 게 아니었는데.

차마 뱉지 못한 말은 한숨으로 흘려보낸 H가 가방을 뒤적여 작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척척 다가와 제 품에 퍽 안기는 수첩을 얼떨결에 받아들자 그는 미련없이 제 집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다음엔 이겨. 어쨌든 나도 이제 ㄱ 학생이니까.”

오늘 경기에 관한 피드백이 빼곡하게 적혀있는 수첩에 K가 뺨을 긁적였다.

“H.”

“왜.”

“이 정도면 그냥 배구부 들어오는 게 낫지 않아?”

“이제 그런 거 귀찮아서 안 할 거야.”

H가 웃을 때마다 가로등에 비춰 길어진 그림자가 촛불처럼 흔들렸다. K는 홀로 걷는 H의 뒷모습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저 투지에 다시금 불씨가 야금야금 피어올랐다. 다음에는 이긴다. 단순한 목표. 그러나 확실한 동기. 질 수도 있지만, 지고만 있는 건 그의 성미에 어울리지 않았다. 

*

한여름 밤의 꿈 같던 만남이 거짓말처럼 H는 얼마 가지 않아 ㄱ 배구부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다시는 하지 않겠다던 매니저의 이름으로.

이제 막 탄력이 붙기 시작한 ㄱ로서는 시미즈가 졸업한 뒤 홀로 남을 야치를 위해 좀 더 베테랑 매니저를 붙여두고 싶은 마음이 컸을 터였다. 방법을 고민하는 팀원들 사이에서 슬그머니 손을 든 K가 “ㄷ에서 같이 ㄱ로 진학한 배구부 매니저가 있는데요.”라고 하자 그런 중요한 사실을 저 혼자만 알고 있었다며 곧장 애정 어린 주먹이 날아들었다.

처음엔 싫다며 도망 다니던 H도 결국 집요한 까마귀들의 협공에 두 손 두 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새까만 유니폼을 건네던 K의 표정이 어딘지 뿌듯해 보인 건 착각이었을까.

 

“K가 그렇게 성격이 형편없었어?”

쪼그려 앉아 정신없이 달리고 뛰는 배구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H가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저와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키로 잘도 저 장신 그룹에 대항하는 S는 K가 이곳에서 찾아낸 무기였다. 예전이라면 달가울 리 없었을 아는 체가 같은 유니폼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로 희석되는 걸 느끼며, H는 저 역시 어쩔 수 없이 체육계에 길들여진 인간이구나 자각했다.

K가 성격이 안좋았냐 물으면, H는 딱히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쟤는 그냥 승부욕이 강한 거야. 그 하늘을 찌를 듯한 호승심에 엄청난 실력까지 있으니, 모두 쟤를 이해하지 못한 것뿐이야. 요령도 없으면서 마음만 급해가지고 그렇게 화를 냈다니까?

그 모든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없는 H가 “그런 것도 아니었어.”하고 짧게 대답하자, 저 멀리서 K의 호통이 날아들었다.

“S, 이 멍청아! 잡담할 시간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뛰기나 해!”

“히익.”

K는 S가 H에게 달려갔을 때부터 괜히 신경 쓰인 참이었다. 물끄러미 H를 바라보자, S의 작은 등을 빤히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제게 향했다. 금색의 눈이 온전히 저와 마주치기 전에 K는 시선을 갈무리하고서 코트로 들어섰다.

ㄱ의 체육관에 H와 함께 있는 기분이 영 익숙해지지 않은 채, 춘고의 준결승에서 ㄴ와 다시 한 번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내내 느껴지던 위화감의 이유를 깨달았다.

“H, 그쪽에서 매니저 하는 건 어때?”

“매니저 하는 일이 다 비슷하죠, 뭐.”

“으음. 차가워. 저기, I. H 조금 차가워지지 않았어?”

“후배 괴롭히지 말라고 했지, 멍청아!”

“엑. 안 괴롭혔어! H도 뭐라고 말 좀 해줘!”

워밍업에 들어간 시점부터 ㄴ와 아무렇지 않게 섞여들어 대화하고 작게 웃는 H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가 왜 ㄱ로 왔는지에 관한 의문이 들었다. ㄴ에 가고 싶었던 건 아닌가.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과 함께 의문은 묻어두고 오로지 눈앞의 승리를 먹어치워 갔다. 과거는 더이상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열망과 더욱 강해져 보다 강한 녀석과 맞붙겠다는 일념 하나로 K의 공이 다시금 네트 위로 떠올랐다.

서로의 가장 자신 있는 무기로 맞붙어 인터하이의 설욕을 성공리에 마친 K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경기에 그전까지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은 채였다. 잠시 짐을 챙기러 돌아간 대기실의 복도에서 H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며칠이 지난 뒤에야 “아, 그거.”하고 떠올렸을지 모르겠다.

“축하해. H. 그 빌어먹게 귀여운 K한테는 절대 해주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선배는 정말 여전하네요.”

“흥이다!”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장난스레 웃는 게 들렸다.

아무래도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약간의 눈치란 게 생긴 덕에 K는 코너 뒤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H은 왜 ㄱ로 간 거야?”

“…글쎄요.”

“K 때문?”

“으음, 비슷할지도.”

거기서 제 이름이 나올 줄 몰랐던 K가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배구 말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잖아요, 그 녀석.”

끄응. 분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말에 입술이 삐쭉 나오고 말았다.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랬나 봐요.”

K는 문득, 제게 평범하게 말할 수 없느냐던 H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게 절 향한 원망과 힐난인 줄 알았다. 팀 분위기를 망치고 있다느니 그런 소리는 수없이 들어왔으니까.

그는 이제야 비로소 그 말이 저를 걱정해서 한 것임을 깨달았다. 친구들과 어긋나는 저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던 H의 다정이었다. 나서기도 꺼리고 시끄럽게 떠드는 녀석도 아니면서 굳이 저를 불러다 놓고 타이른 것은 그런 이유였다.

“H도 은근히 얕잡아 볼 수가 없단 말이지.”

“선배만 하려구요.”

“네, 네. 패배한 선배들은 이제 물러갑니다.”

H에게 제 모습을 들킬까 먼저 경기장을 빠져나온 K는 인터하이 패배 이후, 구태여 제게 피드백이 담긴 수첩을 주기 위해 찾아왔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더위도 추위도 싫어하는 미적지근한 그가 습한 여름날에 가로등 아래서 한참이나 저를 기다렸던 그날을.

미팅이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있던 K가 골목길이 갈라질 무렵에 “야.”하고 그를 불러세웠다. 강행군에 피곤한지 하품을 길게 하는 H의 앞에서 우물쭈물 “그, 저, 뭐냐.”하고 말을 고르던 K가 눈을 번득였다.

“고기만두 먹을래?”

“…아니. 피곤해서 뭐 안 들어갈 것 같은데.”

예상치 못한 발언에 충격받은 K가 “그, 그러냐….”하고 돌아서려 하자 뒤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단 H가 허리를 접어 웃고 있었다.

“너 지인짜 요령 없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하여튼 배구 관련한 게 아니면 말 하나 거는 것도 제대로 못 한다니까.”

“으윽.”

훌륭하게 경기를 마치고도 두 번이나 사회성 떨어진단 얘기를 듣고 말았다. 표정이 삽시간에 험악해지는 K의 얼굴에 H는 대수롭지 않게 그의 미간을 톡톡 두드렸다.

“인상 쓰는 것도 그래. 변하지를 않았네.”

“…내가 그랬나?”

“그래.”

고기만두를 하나 집은 H가 “사주는 거지?” 묻자 K가 고개를 끄덕였다.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그저 만두만 우물우물 씹었다. 어느새 쌀쌀해진 날씨에 옷깃을 여민 H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K도 굳이 그를 잡는 법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기자. ㄹ.”

“당연하지.”

*

“저는 좋은 토스를 올리고 있어요!! 좀 더 성공을 해주세요!!!”

무사히 전국행 티켓을 손에 쥔 것까지는 좋았지만, 강자의 틈바구니에 끼어 그동안 잠시 잊고 살았던 혼란 속의 아늑함에 눈을 뜬 K는 잠시 방황하는 시기도 있었다. 승리에 집착하는 건 운동선수가 지녀야 할 제1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실력이 있음에도 주변에서 따라주지 못한다면 강자와 부딪쳐 더 성장할 기회를 놓치고 이대로 영영 도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 무렵의 K는 그런 불안이 스멀스멀 발목까지 잠식해가던 시기였다.

마음은 너무도 조급하고 시간은 쉼 없이 흐르며 성장은 정체기였다. 이대로라면 팀이 지고 만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 빌어먹을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이마저도 바로 전하지 못해 또 못난 소리를 지껄였다.

K의 흔들리는 동공이 주변을 살폈다. 문득 눈이 마주친 H의 표정은 그날과 사뭇 달랐다. 신뢰의 거름을 먹고 자라난 아무 걱정 없는 그 얼굴에 어쩐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때와 달라. 달라졌다고.

“최고의 세터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이 팀으로 우승하는 거야.

나 혼자만의 힘으론 어렵겠지만, 이 멤버들로 가능한 한 높은 곳까지 올라가고 싶다. 남들이 말하는 ‘천재적인 재능’이란 건 나를 위해 있는 건 아닐지 모른다. 그 힘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지만, 외롭게도 만들었어. 그러니 이 힘은 나 자신이 아닌 팀을 최고로 이끌기 위한 게 아닐까.

그토록 승리에 굶주려있던 미완성의 고교 시절은 너무도 짧아서 마치 움켜쥐면 사라지고 없는 빛처럼 쏜살 같이 지나갔다. 토 할 때까지 연습하고 몸을 만들고 이기고 지고. 다시 이기고 지는 날의 반복이었다.

대학교에 올라가거나 취업을 하거나 모두 길을 찾아갈 무렵에도 K는 우직하게 프로의 길을 선택했다. H는 그의 프로 입단 소식을 들은 날, 남몰래 조금 눈물을 흘렸다. 스포츠란 신기하다. 내가 노력한 것도 아니면서 타인의 노력과 성취에 이토록 감동 받을 수 있는 것은 대체 왜일까? K의 인생이 260g의 배구공으로 가득하단 걸 알았을 때 H는 안도했다.

이별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라는 그 어느 노랫말의 가사처럼 다시금 만날 날을 기약하며 뿔뿔이 흩어졌던 그 시절의 얼굴들이 센다이의 체육관으로 모였다. K로부터 도착한 티켓을 손에 쥐고 들어선 체육관은 그날처럼 코끝이 시큰한 스프레이 파스의 냄새로 가득했다.

「Schweiden Adlers 선수 소개!!」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고 착석하자 커다란 경기장의 조명이 꺼지고 슈바이덴 애들러스의 테마 음악이 흘러나왔다. 입장하는 선수들 뒤로 서서 대기하는 K와 슬쩍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쏟아지는 함성에 퍼뜩 정신을 차리자 VCR로 지나가는 K의 얼굴에 H의 얼굴은 드물게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No.20! K!!」

배구 말고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저 바보가 너무도 멋있으니까.

그러니까, 오늘도 이기고 와.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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