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 커미션

거꾸로 가는 시계 ― 고장 난 것이 아닙니다

24.08.04 * 님 운문 커미션 (총 1,016자)

거꾸로 가는 시계 ― 고장 난 것이 아닙니다

시계는 거꾸로 간다 누가 보채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나 뒤돌아 가는 것을 당신은 상상해 본 적 있을까 하염없이 돌아가는 나침반을 들고도 주저앉지 않고 따가운 수풀을 헤치고 걸어가는 당신의 발 가시를 밟았는데도 멀쩡하다 왜 당신의 발에선 피가 나지 않는가

― 당신은 누구지?

의심스러운 빨간 눈초리 따라 시곗바늘이 촐싹대며 왼쪽으로 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당신이야말로 누구길래 이렇게 성가신 소리를 흘리며 다니는 건지 나는 아무것도 원해서 본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원해서 들은 것이 아닌데 당신은

그 순간 나침반이 깨진다

어라

당신은 나침반을 호수로 던져버린다

너는 네스호의 괴물에 대해 들어 보았니 그건 단순히 허위에 불과했지만 지금 네 뒤에 있는 것들은 결코 허위가 아니다 시간선을 멋대로 건드리고 흐트러트린 이들은 유구히 그들에게 먹혀왔고 너는 사라져버린 그림자들과 같이 판돈이 한가득 올려진 탁자 앞에 앉아있다 흰 셔츠는 조금 구겨져 있지만 너는 아랑곳 않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핑그르르 돌아가는 칩

호수가 양쪽으로 갈라지고 그 안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난다

귀가 가렵다 솜털 같은 공기가 재깍거리며 춤을 춘다

창밖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시작의 바람이 선선히 불고 초침 분침 시침이 빠르게 돌아간다 미쳐버린 시계를 당신은 가만히 쳐다보고 마침내 엄지로 그것들을 누른다 세상이 온통 하얗다

그렇게

하얗게 문질러져 있는 흐리멍덩한 시간

경사가 끝나지 않는 깊은 산 속에서도 당신은 거침없이 나아가고 마침내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나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당신이 다급히 나를 받아든다 이제 당신의 세상도 하얘졌다 우리는 흐르고 있지만 멈춰 있는 세상을 이제는 같은 시야로 본다

― 너도 이제 그 붉은 눈으로 지점토로 빚은 세상을 보는구나

모든 게 바싹 말라 있는데도 당신의 시계는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시큼한 향이 뒤를 쫓는데도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나는 시계를 보며

― 멈추지 않을 거지?

― 응.

― 그럼 가. 내가 지켜볼게.

재깍재깍재깍재깍재깍

시계가 요란하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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