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서광은 녹빛으로
1차 HL | 이못 님 커미션 ;)
꿈자리가 사나웠다.
깨고 난 후에는 내용도, 의미도 기억나지 않는, 오직 꺼림칙한 뒷맛만을 남겨놓는 꿈이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앉으려니 식은땀에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었다. 벽난로는 어느새 꺼져 있었다. 여관방 안에는 늦가을의 싸늘한 공기가 술렁거렸다. 창으로 비쳐드는 달빛은 아직 이 밤이 절반도 지나지 않았다는 점만을 일깨워 주었다.
I는 한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피로가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잠기운은 흔적도 없이 달아난 뒤였다.
사실 잠을 설칠 이유는 적었고, 그 점이 그를 약간 억울하게 만들었다. 길었던 전쟁이 막을 내렸으니 남은 일은 기사단을 이끌고 수도로 복귀하는 것뿐이었다. 며칠간 여행하면서 그들은 무수한 환영과 칭송을 받았으며 가는 곳마다 영웅으로 추켜세워졌다. 그런 면은 차치하더라도 전쟁터 한가운데보다야 평화 시의 여정이 편할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오랜 짐을 내려놓은 만큼 마음 또한 가벼워야 마땅할 텐데.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몇 쪽이 찢겨나간 책을 읽는 것처럼…….
이런 심정을 끌어안고 다시 잠들기는 글렀다. 그렇다면 다리라도 좀 뻗고 올까?
자리를 떨치고 일어서자 마루가 맨발 아래에서 삐걱거렸다.
이곳의 모든 건물이 그렇듯 여관 또한 마지막으로 보수한 지 십 년은 넘은 듯했다. 그런 면에서라면, 적어도 이번 마을은 그의 불안감에 꽤 적합한 장소였다.
젊은이들이 모조리 전장으로 향하고, 노인과 어린아이들만 남은 마을이야 그리 드물지 않았다. 오랜 전란은 제국 전체를 황폐화했다. 이곳같이 작고 고립된 마을일수록 피해가 컸을 테고. 개선하는 기사들에게 싫은 티를 내지는 않더라도, 이 사람들의 접대에는 어딘가 마지못한 구석이 있었다. 그편이 차라리 나았다. 이유 없는 경계심에 핑계를 붙이도록 허락해 주었으니까.
I는 장화에 발을 밀어 넣고 겉옷을 걸쳤다. 늘 지니는 단검이야 자연스레 품으로 들어갔다. 레이피어에서 머뭇거리던 손은 결국 칼자루를 쥐었다.
방을 나선 그는 소리 없이 동료들의 방문을 지나친 끝에 계단을 내려갔다. 여관 아래층에서는 A가 출입문을 지키며 불침번을 서고 있었는데, I가 문으로 다가가자 퍼뜩 고개를 들더니 경례했다.
“단장님!”
목소리가 컸다. 그래 봤자 위층까지는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I는 검지를 세워 입술에 붙였다.
“쉬어.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어, 산보라도 가십니까?”
“잠시만 다녀올게. 수행은 필요 없어.”
A가 일어서려는 낌새를 보이자 I는 재빠르게 뒷말을 덧붙였다. A는 불안한 듯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L 경이라도 동행하게 하지 않으시고요.”
순간 I는 그대로 동의할 뻔했다. 안전상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L과 함께 산책하고 싶다는 이유로. L의 얼굴을 본다면 그의 꿈을 어지럽힌 기분도 약간은 물러나지 않을까, 근거 없는 희망이 일었다.
하지만 L은 곤히 잠들어 있을 테다. 전날 여정은 지난했었고, □□□□□를 호위하는 임무는 전장을 떠났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I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전장도 아닌데, 무슨 일이 있겠어?”
A는 거듭 주저했지만, I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I는 지금의 고집이 평소 자신답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등불 하나만 건네받은 채 홀로 여관을 떠났다. 어째서일까, 하루하루 □□□□에 가까워질수록 폐소공포증 비슷한 두려움이 그의 의식을 갉아먹었다.
설명할 수도, 토로할 수도 없는 까다로운 감정이.
한밤중의 마을은 전날 보았던 것보다도 삭막했다. 여관이 위치한 사거리는 마을 중심부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는데, I는 아무 쪽이나 방향을 골라 걸음을 옮겼다. 버려진 길바닥 위로 등불이 타원형의 빛을 뿌렸다.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들은 어둠의 힘을 입어 한층 황량하고 스산했다.
머잖아 I의 눈에 마을을 둘러싼 목책이 들어왔다. 그 바깥으로도 농민들이 점점이 살고 있다고는 했으나, 제대로 된 시내는 목책에서 끝이 났다. I는 목책에 다다를 때까지는 멈추지 않을 심산이었다. 가로막힌다면 그때 가서 문을 찾아보면 될 일이었다. 찬바람에도, 흐리게 내리는 달빛에도 어느새 꽤 익숙해진 뒤였다.
그때 여린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
I는 흠칫 놀랐다.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어린 소녀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껏해야 몇 발짝 거리였다—아무리 밤이래도, 낯선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그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
소녀는 다시 한번 말했다. 정수리가 I의 가슴께에나 닿을까 싶은 어린아이였다. 등불 빛에 비친 얼굴은 꾀죄죄한 데다 젖살도 없이 비쩍 말라 있었다. I는 주변을 살피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어색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런 늦은 시각에 돌아다니면 위험해, 아이야. 무슨 일이니?”
“어머니가 아파요.”
말의 내용과는 달리 어조는 퍽 덤덤했다. 아무래도 귀찮은 일에 걸려들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알았다. 기사단에 의무부대가 있어. 내일 여관으로 찾아온다면…….”
“축복해 주세요.”
어린 눈동자에서 묘한 열기가 일렁거렸다. I에게는 익숙한 눈빛이었다. 강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일수록 그를 곧 잡아먹을 듯 응시하고는 했으니까.
아무리 지긋지긋하대도, 내색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기 마련이었다. 잠을 설친 밤만 아니었더라도 좋았을 텐데.
“□□□□□, 엄마를 축복해 주세요. 다시 살아나실 수 있게요.”
I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라도 아이를 여관으로 데려가 크림을 만나게 할까 싶었지만, 그보다는 아직 단원들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축복이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여차하면 시늉만 해주더라도 평민 아이와 그 어미는 알아채지 못할 것이었다.
“집이 어디니?”
별수 없이 묻자, 소녀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목책을 향해 달려갔다. 한 박자 늦은 후회가 일었다.
그래, 귀찮을 것 같더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녀가 안내해 준 개구멍은 I도 무리 없이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목책 너머는 숲이었다. 마을에 사람들이 좀 더 많았을 적에는 마을 가까이 자라나는 나무를 베거나 태우며 공간을 넓혔었겠지만, 오십 년간의 전쟁은 이 싸움에서는 자연의 손을 들어주었다. 목책 바로 앞까지 자라난 나무들은 한눈에도 그리 어려 보이지는 않았다. 그 사이로 난 오솔길은 등불이 있었기에 간신히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희미했다.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내리는 달빛은 보름밤인데도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인기척은커녕 짐승 소리도, 물소리도 없는 숲이었다. 어린 소녀가 어떻게 촛불 하나 없이 밤중에 마을에 올 엄두를 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I는 잠자코 소녀의 뒤를 따랐다. 머릿속이 영 어지러웠다.
□□□□□, □□□□□. 영원한 족쇄인 이름이었다. 수도를 향해 나아갈수록 족쇄의 사슬은 고리 하나씩 줄어들었고, 그에 따라 그의 심정도 무거워졌다. 전쟁은 끝났다. 그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는 축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를 굽어보는 교회가 있었다. 황태자와 그의 세력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짐승 잡듯 그의 멱을 따고도 남을 작자들이었다.
복잡한 생각에 깊게 잠겨있던 그는 소녀가 걸음을 멈추는 것도 보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다. 하마터면 소녀와 부딪혀 그 애를 넘어뜨릴 뻔한 다음에야 I는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들이 멈춘 곳은 높게 솟은 나무에 둘러싸인 공터였다.
예상했던 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제야 함정에 빠졌다는 자각이 일어났다. 공터 한가운데에 멈춰 서 그를 돌아본 소녀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말했다.
“□□□□. 당신은 죽지 않는다지.”
□□□□□를 부를 때와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어딘가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였다. 소녀에게서 더는 어린아이 같은 면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 시체 같은 얼굴에 깃든 것은 증오였다. 맹목적이고 강렬하며, 오로지 I 한 사람을 향한!
“그러니 잘 됐어. 새로 얻은 몸을 어찌 쓸까 고민하던 참이었거든!”
그리고 공터 주위의 숲에서 그림자들이 폭발했다.
A는 방문을 연거푸 두드린 다음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방 안의 손님이 좁은 방을 가로질러 문을 열어줄 때까지의 시간이 아득하게 길게만 느껴졌다.
문틈으로 비몽사몽 눈을 비비는 L이 나타나자 A는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L, 단장님을 찾아야 해요.”
L의 안색이 돌변했다.
“습격이야?”
이십 대 중반의 나이, 뛰어난 전공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소년처럼 여겨지는 사람이었다. 겉보기에는 무심하지만, 알고 보면 정이 깊고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그러나 지금의 L은 이미 한 명의 전사였고, 밤중에 깨어난 탓에 졸음에 겨워하던 여자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곳에는 □□□ 기사단의 선봉, 단장의 가장 신뢰하는 호위가 자리했다.
적에게라면 공포겠지. 한편인 A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믿음직스러웠다.
“아까 산책을 나가셨는데,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으십니다.”
“어느 쪽으로 갔지?”
“제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북쪽 길로 향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추적할 수 있는 부하들은 내보내 두었고…….”
A는 재빨리 문 옆으로 비켜섰다. L은 대답도 하지 않고 달려 나갔다. 띄엄띄엄 불을 밝힌 복도를 따라 거대한 검의 그림자가 휘청거렸다.
얽힌 나무와 덤불을 뚫고 뛰어나온 것들은 낯설지 않은 외양을 입고 있었다. 전날, 어색한 감은 있더라도 □□□ 기사단을 환영해 주었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폭동을 일으킨 군중이 따로 없었지만.
쇠스랑이니, 낫 따위가 얼핏 봐도 이삼십 대는 찾아보기 힘든 무리의 손에서 휘둘러졌다. 그 인상만으로 저도 모르게 방심해 버렸던 I는 첫 합부터 밀리고 말았다. 포위는 순식간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십 명에게 겹겹이 둘러싸인 I는 내심 혀를 찼다. 마을에서의 소녀도, 여기 이 자들도, 기척 없이 움직이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점을 오래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 기사단원들은 마을에 남아 있을 테고, 그는 숲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왔다.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지른대도 단원들에게 들릴 리 없었다. 믿을 건 자신뿐이었다—이 어찌나 익숙한 상황인지, 헛웃음이 다 나왔다.
이윽고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I는 등불을 오른손으로 넘기며 왼손으로는 레이피어를 뽑았다. 사방에서 짓쳐 들어오는 공격을 가느다란 칼날 하나로 받아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나마 행운인 것은 이런 어중이떠중이들이 협공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근거리에서 갈퀴며 대낫은 오히려 지나치게 긴 무기였고, 적들의 다음 일격은 I보다는 같은 편에 더 큰 피해를 주었다. 서로 찍고 후리며 난리가 난 틈을 타 빠르게 레이피어를 찔러 넣자 새된 외침들이 터져 나왔다.
하나같이 고통보다는 당황에 찬 소리였다. 그것을 알아차린 I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이 자들, 정체가 뭐야?
농기구를 든 농민들은 그에겐 적수는커녕 연습 상대도 되지 못해야 했다. 그의 검술이 평범하다고는 하나 어쨌든 전장에서 갈고닦은 실력이었다. 구를 대로 구른 기사단장이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노약자에 둘러싸여 고전한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들은 무서울 정도로 맹렬했다.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드는 공세 앞에서는 I도 당해낼 깜냥이 없었다. 살갗이 찢기고, 붉은 피가 튀고, 아물기도 전에 다시 공격이 날아들었다. 날아드는 장대를 간신히 막아냈나 싶더니 둔탁한 충격이 오른쪽 팔꿈치를 때렸다. 관절이 꺾였다. 힘이 빠진 손에서 등불이 떨어졌다.
파삭 소리를 내며 유리가 부서지고, 속의 불빛이 사그라들었다.
어둠에 익지 않은 눈이 순간 흐려졌다.
일 대 다수의 싸움에서 빈틈은 보이는 순간 끝장이었다. 머리에 무언가 거세게 부딪혀 왔다. 고통보다는 띵한 마비감이 먼저였다. 땅바닥을 구르기 직전에야 I는 가까스로 손목을 꺾어 제 검에 꼬치가 되는 꼴을 피했다. 곧이어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손목이 부러지는 감각이 솟구쳤다. 넘어진 그 위를 무딘 날들이 내리찍었다. I는 비명을 질렀다.
“아악!”
아파, 아프다. 통증도, 통증이 썰물처럼 밀려 나간 자리의 빠듯한 잔류감도. 어깻죽지에 갈퀴가 박히며 생살을 찢었다. 운 나쁜 곳에 떨어진 유리 조각이 허벅지에 파고들었다. 누군가 머리르, 또 다른 자는 옆구리를 걷어찼다. 갈비뼈가 부러지자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든 일어서야 했지만, 그러기에는 때가 늦었다. 레이피어를 놓치지 않는 것만이 그의 최선이었다. I는 힘껏 몸을 웅크리며 남은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 상태로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단 몇 분이었을지도, 몇 시간이었을지도, 혹은 영원이었을지도. 어느 선을 넘고 나자 부상은 부상 자체로 고통을 안긴다기보다는 오랜 기억을 상기시켰다. 묻어두었던 아픔들이 줄줄이 끌려 나왔다. 암습, 독, 가혹한 체벌과 달아날 길 없는 속박. 그를 에워싸며 짓밟는 사람들 사이사이마다 춤추며 비웃는 그림자.
까마득한 어둠의 끝, 해진 나막신이 그의 머리에 힘껏 발길질했다. 목이 꺾였다.
가물가물한 시선이 하늘로 튀어 오르는 순간, 그곳에서 I는 초록빛 섬광을 보았다.
“왜 이렇게 멀리까지 나온 거야?”
날카로운 외침이었다. 한번 번쩍인 빛이 사라지자 I의 시야는 새하얗게 물들었지만, 그 목소리만은 다른 누구의 것으로도 착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낡은 여관방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다음 소리 역시 익숙했다. 거대한 츠바이핸더가 허공과 육신을 찢었다. 세 번째는 외마디 비명이었다. 그것은 곧 거듭해서 반복되더니 공터 전체를 가득 메웠다. 어느새 I 주변에는 적이라고는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I는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다음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았다. 그때까지도 레이피어는 여전히 그의 손아귀에 들려 있었다.
반가움과 당황이 뒤섞여 제삼의 감정을 만들어냈다. I는 입만 몇 번 달싹거리다가, 갓 재생된 허파의 숨을 끌어모아 소리쳤다.
“내가 나온 건 어떻게 알았어?”
“A가 너 안 돌아온다고 수색대를 조직하고 있더라!”
녹색 불꽃, 은빛 대검. 혼자 힘으로 I와 적의 사이를 열 걸음 넘게 벌려 놓은 L은 이제 공터 한쪽으로 물러난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둘과 적 가운데에서 불의 장벽이 타올랐다. 반으로 나뉜 공터에는 잠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L은 자신이 쓰러뜨린, 그리고 그녀의 검에 제대로 맞았으나 여전히 두 발로 서 있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좀 늦은 질문이긴 한데 말이야, I. 이것들 대체 뭐지?”
“모르겠어. 대수롭지 않은 상대는 아니야.”
“경전에는?”
I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물들은 듣도 보도 못했다. 마법 생물에 익숙한 L조차 처음 보는 것들이라면, 답을 찾기란 정말로 요원하다고 여겨야만 했다. 애초에 이것들이 마을 사람들은 맞을까? 인간으로 변장한 괴물, 혹은 시체에 씌인 망령이 아닐까?
그러나 오래 고민할 수는 없었다. 하필 그때 새로운 인물이 무대에 오른 탓이었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구나?”
I와 L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낯선 목소리는 공터 경계로부터 들려왔다. 그곳, 그들보다는 적들에 더 가까운 위치에 긴 머리카락을 올려묶은 여자가 서 있었는데, 맹렬하게 타는 녹색 불꽃의 빛 속에서도 여자의 머리카락은 확연한 분홍빛이었다. 한 손에는 I의 것과 비슷한 레이피어가 들려 있었다. 비단부채라도 쥔 듯한 태도였으나 I는 그녀가 그 무기를 잘, 어쩌면 자신보다도 능숙하게 다룰 것임을 눈치챘다.
“누구냐?”
L은 그르렁거리다시피 말했다. 여자의 대답은 이런 싸움터보다는 수도의 무도회장에나 더 어울릴 법한 투로 돌아왔다.
“이런, 이 M을 모르시다니. 역시 인간이란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께서는 다르시겠지요?”
연극적인 존대에 신경이 긁힌 I는 L을 힐끗 바라보았다가, 그녀의 낯빛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L은 가장 위태로운 전장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금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담담하고, 어쩌면 무기질적으로까지 보이는 얼굴에서는 공포도, 동요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I는 L을 알았다. M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분명, L의 마음속 무언가를 자극했다.
그것도 꽤 위험한 방식으로.
L은 대검의 자루를 고쳐 쥐며 짐짓 어깨를 풀었다. 손에 든 무기에 본인의 기세가 더해지자 평범한 동작마저도 위협으로 변했다.
“너. □□□□를 알고 있나?”
M은 소리 높여 웃었다.
“□□□□를 아냐고? 이런 무지렁이를 다 봤나, □□□□를 아냐고?”
“대답해!”
I마저 움찔하고 말 정도로 확고한 명령에, 공터를 반으로 갈라놓았던 화염이 일순간 격렬하게 흔들렸다. 주변의 모든 공기가 그 불길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M은 태연하게 한 손을 들었다.
맨바닥에서 넝쿨이 솟아올랐다. 아찔하도록 짙은 장미 향이 퍼졌다. 그 중심에서 넝쿨의 주인은 입가를 가리며 만개한 꽃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친족들을 데리러 온 것뿐이었는데, 네놈들 같은 구경을 보다니. 난 정말 운도 좋아. □□□□가 궁금하니? 이건 어때.”
레이피어의 유려한 검신이 I를 겨누었다.
“저걸 넘겨준다면, 내가 아주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텐데. 네가 무척 흥미롭게 여길 이야기까지 말이야.”
“거절하지.”
즉답이었다. I가 놀람을 느낄 새도 없이, L은 자부심마저 엿보일 만큼 당당하게 선언했다.
“선제공격에 정체도 제대로 밝히지 않는 놈에게 친구를 넘기느니, 이 자리에서 제압하고 심문하겠다.”
“하!”
M이 비웃음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며 달려들었다. 그 이상의 협상은 없었다. 굵은 장미 넝쿨이 머리 아홉 달린 뱀처럼 I와 L을 향해 일제히 덤벼 왔다. 단검 같은 가시가 쏟아지는 사이로 마을 사람들—혹은 괴물일 것들까지 공격을 재개했다.
L은 그 꼴을 손 놓고 바라볼 사람이 아니었다. 장작도 없이 격하게 솟구친 불은 이전의 서너 배 높이를 넘는 파도로 변해 적을 덮쳤다. 넝쿨에 불이 붙고 사람들이 몸부림쳤다. 날아들던 가시는 절반 넘게 공중에서 타올라 재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일렁이는 불길을 피해 M이 레이피어를 내찔렀다.
거대한 츠바이핸더와, 그에 비하면 바늘이나 다름없는 레이피어의 싸움이었다. L의 공격은 그 무게를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물 흐르듯 이어졌다. 검 자체의 위압감만 아니었더라면 그녀의 검술은 우아하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거기에 사사건건 M의 가시를 태워 없애고 움직임을 제한하는 불꽃이 더해지자, 남은 적의 방해에도 L은 아슬아슬하게 대등한 싸움을 이어나갔다. 가느다란 레이피어를 쳐 내는가 하면 몸 사릴 줄 모르고 뛰어든 잔챙이의 허리를 갈랐다. 넝쿨을 타고 녹색 불길이 들불이라도 된 듯 질주했다.
I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L 대신 M을 무찌르지는 못한대도, L의 등을 지키는 것쯤은 가능했다. 상처는 대부분 회복되었다. 아물지 못한 부위가 쓰리고 아프대도,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누적된 피로로 팔다리가 비명을 지르는 것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그리고 L이 살아남는 것이었다.
M이 숨도 차지 않는지 다시 입을 놀릴 즈음, I는 이미 처음의 기세를 절반 넘게 되찾아 가고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아, 널 위해 조언 하나 해주마.”
가시와 불꽃의 싸움에서 불이 유리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무위를 따진대도 L이 한 수 앞섰다. 수세에 몰린 것은 M였지만, 희한하게도 그녀는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네가 이 남자의 친구를 자처한다면, 네 앞길엔 오직 파멸만이 있을 거란다.”
“본인 앞길을 걱정해야 할 텐데!”
거세게 부풀어오른 화염이 M을 덮쳤다. 그러나 지나치게 격정이 실린 대응이었다. 날렵하게 화염을 피한 M은 흥 코웃음을 치더니, L이 평정심을 되찾지 못하는 새 츠바이핸더의 공격권 밖으로 재빨리 물러났다. 새되다시피 높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이리 온, 내 친족들. 떠날 시간이야!”
그러자 적의 공세가 뚝 끊겼다.
I와 L이 등을 맞대고 경계하는 아래, 적들은 나타났던 것만큼 영문을 알 수 없는 기술로 신속하게 사라졌다. 나무 사이로 뛰어드나 싶더니 곧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I는 요동치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들리는 것이라고는 L의 분한 숨소리뿐이었다.
조마조마한 와중에도 I는 그들이 단둘이기를 다행으로 여겼다. 둘이서만 적을 추격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정말이지 더 싸워야 한다면 그는 짐이 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숲속으로 몸을 빼기 전, 그들을 한번 돌아본 M은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씩 웃었다. 초록빛 불이 어른거리는 얼굴은 유난히 섬뜩했다.
그리고, 마침내, 공터는 고요해졌다.
“L.”
I는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전투의 여파가 이제야 밀려와서인지, 온몸의 힘이 죄다 빠져나가 버린 듯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앞에 L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무릎을 꿇었다.
“괜찮아? 다치진 않았어?”
“날 알잖아. 벌써 다 나았는걸.”
하지만 그에게는 고개를 들어 L을 마주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둠이 내린 땅만 멍하니 쳐다보던 그의 시야에 갑자기 다른 것이 들어왔다.
L이었다.
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들어 올린 L은 걱정이 가득 실린 눈으로 그를 살펴보았다. 불은 다 꺼졌는데도, L의 눈동자 안에서만은 아직 녹색 빛이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참을 수 없는 감정이, 깊은 신뢰와 고마움이 벅차올랐다. 가슴에 다 담기지도 못해 넘치며 목을 메이게 하는 애정이었다. I는 반쯤 무의식적으로 몸을 기울여 L을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비누와 땀 냄새, 옅은 탄내. 영문도 모르고 그를 마주 안아주는 L이 그에게는 성채처럼, 장벽처럼 든든했다.
곧 단원들이 달려올 터였다. L이 벌인 전투는 효과적이었을지는 몰라도 조용하지는 않았으니까. 한밤중을 새벽같이 밝히는 녹색 불꽃이 눈에 띄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해가 뜨면 마을의 일이야 어찌 처리되든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나겠지.
□□□□는 몇 년 전 그가 떠나왔던 곳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었다. 열일곱 살의 그에게 수도는 거대한 새장이나 다름없었었다. 스물한 살의 그는 □□□ 기사단의 단장이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으며, 무엇보다…….
그의 곁에는 L이 있었다.
고된 밤이었다. L의 품으로 파고든 I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우리 잠깐만 더 이대로 있자,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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