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님 커미션 B타입-경계선(강다)
2023년 작업
경계선(境界線)
“찾았어?”
그건 언제나처럼 거슬리는 목소리였다. 경계를 아득하게 흔드는, 듣그러운 음성은 너무 명료하여 신경을 긁어내는 듯한 잡음 같기도 했다.
“아니.”
“그래?”
“그래.”
또랑또랑한 음성을 낸 정다현이 되묻는다. 하강현은 무정하게까지 들리는 성의 없는 대답을 돌려주며 책장을 뒤적였다. 차가운 말에 아랑곳한 정다현은 낡고 쿰쿰한 책의 냄새가 싫지 않은 듯 잘도 구석진 곳을 열성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스며든 빛을 등지고서 오래된 낱말들을 입 안에서 굴리는 옆모습은 퍽 밝기도 하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아 좋게 보이지도 않는 밝은 색감이었다.
‘얄미울 정도로 태평한 얼굴이군.’ 강현은 그녀의 뺨에 스며든 빛을 노려보며 그리 생각했다. 어두운 곳이었기에 조막만한 햇볕은 더욱 밝게 보였다. 곧장 눈에 들어오는 흔한 갈색 머리칼, 곱게 자랐음을 표명하듯 짜증 나게도 결이 좋은 그 머리칼, 하지만 그녀 또한 보통과 다르다는 것을 알리듯 선홍색으로 빛나는 두 눈이 총명한 기를 품고 책장을 따라 천진하게 굴러가고….
‘아. 진짜 짜증 난다.’
그런 감상이 스치던 때. 그녀가 하강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고갤 돌렸다. 잠시 두 눈이 마주치고, 밝고 맑은 두 눈 속에 강현의 검은 상이 맺혔다. 기분이 나쁘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충족된다. 꾹 차는 가슴 속이 더욱 이상했다. 본래라면 텅 비어야 하는 마음일 텐데.
“….”
꾸물거리며 책장을 넘기던 그녀가 점점 강현과 가까워졌다. 아무래도 또 못 읽는 한자를 찾은 모양이었다. 무리도 아닌 일이었다. 정다현은 애당초 여기에 발을 들일 생각도 없는 여자였으니까. 제 운명이 어떤지도 모른 채 과분한 보호를 받으며 살아온 계집애니까. 줄곧 빛이 닿던 오른편에 있던 그녀가 그림자 진 왼쪽으로 가까워진다. 숨소리가 새근거리듯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역겨울 정도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소녀였다.
“강현아.”
“나 이 단어 잘 모르겠어.”
봐, 넌 쉽게도 나를 보려 들지. 무얼 믿고 순순히 도움을 청한단 말인가? 강현은 옆으로 찬 부적을 되잡았다. 기를 흩트리는 일이면 충분하다. 사람은 그런 단순한 장난질만으로 망가진다. 죽일까, 그렇게 만들어 버릴까. 생각은 속도를 붙여가며 팽팽 돌고 돈다. 오래된 주목 나무, 말라서 비틀어진 꽈리 열매, 낡은 기록, 핏자국, 그런 감정…붉게 변해 시들어버리는 것들 따위와 넌 과연 뭐가 달라서.
“응?”
툭. 머리통이 재촉하듯 어깨에 닿았다. 눈과 눈은 다시 마주쳤다. 선홍색 눈은 계속해서 떠올리던 핏물 같았다. 강현이 고갤 돌렸다.
‘멍청한 계집애.’
“줘봐.”
“응.”
순순히 책을 넘기는 손이 작고 희다. 굳은살이나 상처는 잘 보이지 않는다. 심사가 괜히 뒤틀린다. 뭐가 좋다고 실실 웃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이게 다 일이 아니었다면…그는 만약을 가늠해본다. 하지만 만약은 그야말로 의미가 없었다. 그는 확실한 것만을 좋아하는 사내였으니까.
“뭐라고 읽어?”
붙어서 재잘거리는 모습이 기가 차다. 위기감이란 게 결여된 채 살아도 좋은 ‘보통 사람’ 같은 모습. 용서받을 수 있던 삶의 파편을 내보인다. 서류상으로도 잘 엿보였던 이 일에 맞아 보이지 않는 성정의 배경…실로 유감스러운 회사의 인재나 다름없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는데.’ 하강현은 속으로 빈정거리면서도 착실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반짝이는 눈망울이 더욱 흔들렸다.
“…경계선이라고 읽어.”
“아! 그럼 우리가 찾던 책인가?”
“내용은 달라. 같은 줄에 있는 책 전부 뒤져봐야겠지.”
“내가 앞장설게! 이 책은 저기 떨어져 있었으니까 아마 근방을….”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구석 하나 없는 계집애였다.
하강현은 말없이 그녀의 등 뒤를 따랐다. 빛이 닿는 오른편은 왼편보다 조금 더 따스한 면이 있었다. 그의 검은 장포가 빛을 대신 받아 희미하게 빛난다. 음울하게 보이는 소년은 이제 앳된 티를 벗어나기 시작하여 말쑥한 청년의 모습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변하기 위해선 모조리 버려야 한다. 그는 버리는 데에 익숙한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강현아?”
돌연, 그는 어떠한 ‘감정’을 깨닫고 말았다.
“…이봐. 차라리 찌르도록 해.”
갑작스럽게 멈춰 선 발. 저편에서 돌아온 부름에,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옅게 푸른 빛을 반사하는 오래된 책장들 때문에 빛을 등진 하강현은 마치 물에 잠긴 것처럼 보였으며 그렇게 바라본, 마주한 얼굴은 그림자에 잠겨 침잠한 채다. 마치 심해로 떨어지고 마는 무거운 돌처럼 그는 무게가 있어 더욱 괴로워 보였다.
그래, 정다현이 보기엔 하강현은 그런 사람이었다. 소년이라기엔 차라리 노인 같은 회한이 서렸고, 스산하고도 수많은 의문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스라한 낯을 가진 채, 마치 흰 석고상처럼 무기질함을 내비치면서도 종종 마음 깊숙한 곳에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곤 하는 음울한 눈을 가진….
‘왜일까.’
빛은 하강현을 똑바로 비추지 않아 그의 그림자는 조금 일그러져 보였다. 큰 몸이 가깝다. 분위기는 심상찮다. 이치대로면, 그녀는 겁을 집어먹어야 했다. 심지어 그는 상대가 제게 공포를 품길 바라는 듯, 그녀의 부름에도 답하지 않은 채 오히려 형형한 기색을 풀어놓고서 점점 가까워지는 게 아닌가.
‘정말로 왜일까.’
그러나 어째서일까. 정다현은 하강현이 두렵지 않았다. 굳이 대답을 내자면 그의 변덕은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니었고, 그가 밝은 인간이 아니란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으므로. 하여 그저 그를 바라보기로 했다. 붉고도 곧은 시선이 그의 창백하고도 푸른 얼굴에 닿았다. 마치 죽은 자와도 같은 기척을 가진 소년은 그러한 온기를 움켜쥐듯 그녀의 어깰 붙들었다.
“위협하는 거야?” 다현이 물었다.
“…그렇다면?” 강현이 대답 대신 되물었다.
“찌른다고 해도?” 다현이 다시 물었다.
“차라리 그래라.” 죄어드는 목소리의 강현이 대꾸했다.
-네가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 쥐어짜듯이 기어 나온 하강현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흩어진다. 정다현의 몸이 움칫 떨리자 그는 보란 듯 실소했다. 조롱하는 듯한 미소가 만면에 펼쳐진다. 다현은 일그러진 입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입술을, 뺨을 훑던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그의 등허릴 감쌌다. 빈틈없이 서로의 품이 맞물렸다.
‘안아주고 싶다.’
그래서 안기고 싶다.
정다현은 팔을 뻗어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등이 그의 등을 두드리자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 떨렸다. 의외로 강한 힘과 산 자 특유의 온기가 아프도록 뺨을 달아오르게 만든다. 강현은 허를 찔린 것처럼 저항하지 못했다. 한차례의 떨림, 그 미묘한 실랑이 끝에, 그는 밀어내는 일을 포기했다. 하여 하강현은 떠올렸다.
‘왜?’
“……….”
왜 넌 날 진창으로 처박나? 그런 걸 즐기는 건가?
‘왜?’
답을 알 수 없으므로 걷잡을 수 없는 원망은 내달린다. 정다현, 얄미운 계집애, 멍청한 것, 너는 여기 있어서 좋을 일이 없어. 계속해서 좋을 일이 없다고. 아, 내게 말하는 건가? 곁에 붙어있으라고. 바보같이 감정놀음에 휩쓸리라고…! 강현은 아까의 문자를 떠올렸다. ‘경계선-境界線’ 그 한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사실 모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애도, 회사도, 세상 돌아가는 꼴도………이렇게 안아주면 네 가슴이 편하단 걸 안다. 네가 포옹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 네가 좋아할 뿐이지. 모든 게 너의 만족일 뿐인데도…왜 나는 달아오르고 마는가?
“강현아.”
아, 다정히 부르는 목소리. 하강현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어떠한 볕.
가슴이 욱신거리는 온기. 동정은 필요 없다. 가지처럼 쳐내려던 마음은 흔들리고 머리는 아프도록 열이 올랐다. 그는 문득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가 모조리 그녀 탓임을 깨달았다. 평범히 가슴이 뛴다. 평범히 통각을 느끼고 당혹스러워한다. 그래, 이건 네 탓이다. 품에 안은 것이 이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부차적인 이유 탓이 아니라. 너여서…그 인간이 정다현이기 때문에….품에 감싸 안은 여인이 너라는 이유 하나로 난 비참하게도 평범해진다.
‘왜일까.’
‘안고 싶어.’ 그는 어떤 충동을 느꼈다.
“나를……찔러도 좋아.”
‘안기고 싶어.’ 어떤 마음을 깨달았다.
‘왜일까.’
그는 끝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어떠한 것을 찾아내고 말았단 사실을 사무치게 깨달았다. 조심스레 말을 꺼내 보았으나 기어들 듯 고개를 들이민 목소리는 다 쉬었고, 볼품없는 서고는 빛을 잃어가며 더욱 낡고 퀴퀴해졌다.
“너에게라면 그렇게 죽어줄 수 있어.”
고백이라기엔 부적절하고 부적격한 말이 거친 숨에 섞여 내린다. -그럴 수 있어. 해가 저물어갈 무렵, 그는 바들거리며 겨우 말을 마쳤다. 정다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마주한 것은 떨고 있는 한 평범한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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