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리프 이주 0P 사건

태양의 아이

후린의 아이들 | 190125 티스토리

rhindon by 댜

“우르웬!”

다급한 외침이 방 안에 울리기 무섭게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나동그라진 수틀이 저만치 굴러가다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잘못 가눈 바늘에 가운뎃손가락에 피가 맺혔다. 그러나 그녀는 상처를 살필 새도 없이, 허겁지겁 방으로 달려든 형제의 어깨를 붙잡고 간신히 눈을 맞추었다. 검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빠! 오라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우르웬…….”

그 이름이 불릴 때는 반드시, 큼직한 사고가 터지고야 만 후였다. 그것도, 그들 남매에게 어지간한 불운은 익숙하다 못해 친근한 것이었으니, 정말이지 감당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형제의 뺨을 감싸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오라버니, 제발, 랄라이스를 봐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리고, 거친 숨을 가까스로 다스린 투린은, 핏기 없는 입술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며 대답했다.

“모르웬의 딸, 내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미처 두려워했던 것보다 나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제아무리 고집불통에 귀머거리인 투린이라도 누이를 버리고 달아날 수는 없었던 탓이었고, 그리하여 싱골은 양아들의 변론에 귀를 기울였고, 여느 때처럼 멜리안의 무릎에 앉은 히슬룸의 인간 소녀를 보았다. 딤바르에서 한 해하고 하루를 보내라는 싱골의 판결이 떨어지고 투린이 울컥해 고개를 쳐들었을 때 그의 곁에는 침착한 미소를 띤 센활 벨레그가 있었다. (‘싱골이 명하지 않는다고 메네그로스에 머물 자네는 아니잖나,’ 하며 벨레그는 투린의 손목을 꽉 잡았었다. ‘허울뿐인 재판에 괜한 의미를 더하진 말게나.’)

투린이 형을 끝내고 메네그로스로 돌아온 날, 그들은 나란히 싱골과 멜리안 앞에 나아가 허리를 숙였다. 도리아스는 결코 고향이 될 수 없었다. 잿빛 도르로민에 그들의 친족이, 갓 얼굴이나 보고 떠나왔던 어린 동생들이 있었기에 그들은 왕에게 이별을 고했고, 랄라이스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동생을 생각했다. 싱골은 별다른 맹세를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다시 한 번 도리아스에 발을 들이고자 할 때, 멜리안의 장막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노라 경고했을 뿐이었다. 투린은 그녀의 눈에만 띄도록 설핏 웃었다. 어머니의 늙은 하인들 손에 이끌려 처음 장막을 헤맸을 때 난데없이 들려왔던 사냥개들의 울음소리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고, 랄라이스는 그의 우정을 믿었다.

싱골은 투린에게 금고를 열어주었고 투린은 검은 날을 가진 칼을 골라 들었다. 앙글라켈. 도르로민의 용투구 역시 고이 싸여 안장 주머니에 넣였다. 멜리안은 그들의 어깨에 요정의 망토를 둘러주고는, 랄라이스의 손에는 니프레딜 인장이 찍힌 꾸러미를 건넸다. 랄라이스는 마이아 여인에게 마지막으로 활짝 웃어보였다.

모르웬의 저택은 텅 비어 있었다. 투린은 아무런 말 없이, 오래 전 후린의 것이었을 방을 찾아들었다. 그는 마루 밑에 숨겨진 요정의 검을 그녀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검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면서도 검집을 허리띠에 매었다. 그러나 벽에 기대 놓인 작은 하프를 그녀는 제가 먼저 집어들었다. 도리아스의 궁정에서 그녀가 배웠던 것과는 천지차이였지만, 어쨌든, 한때 후린의 손이 닿았을 물건이었다.

투오르와 니에노르는 이제 열두 살쯤 되었을 터였다. 살아 있다면. 투린이 브롯다를 베어 죽이는 사이 그녀는 서둘러 아이린을 다그쳤다. 로르간, 로르간. 두건을 눌러 쓰고 회색 벌판으로 숨어들며, 투린은 그 이름을 짓씹듯 중얼거렸다. 등뒤로 브롯다의 집에 불길이 일었다. 한 무리의 도망자들이 그들의 발치를 쫓았다.

“당신은 누구요?”

깡마른 소년이, 아마 제 동생일 법한 사내아이를 꽉 끌어안으며 묻자 랄라이스는 잠시 망설였다. 두 아이들은 투린과는 달리 샛노란 금발이었고, 어쩌면 그들의 친족일지 몰랐다. 투린은 앙글라켈을 망토 끝자락에 슥 닦고는 그녀 곁에 와 섰다. 로르간의 시체는 저만치 널부러져 있었다. 전투는 막 끝난 참이었으나, 그들의 일행, 아니, 부하들까지 이끌고 자리를 벗어나려면 한 시라도 빨리 동생들을 찾아내야 했다.

“그녀는 모르웬 엘레드웬과 후린의 딸 우르웬이다. 너는 누구지?”

투린은 한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쥐었다. 몇몇 사내들이 지친 기색으로 그들 주위로 다가왔다. 갓 풀려난 노예들 중 제 발로 서 있는 이들은 눈앞의 아이들 뿐이었다. 그녀는 투린의 손을 마주 눌러잡고 말을 이었다.

“대답하라. 나의 오라비 투린은 북부의 대장 후린 살리온의 아들이며 도르로민과 라드로스의 정당한 후계자이다. 그대 군주의 물음에 답하라!”

아이들보다는 둘러선 어른들을 겨냥한 선언이었다. 낯선 문장이 입안을 할퀴고 지나갔다. 하지만 자리한 이들의 얼굴에 언뜻 자부심이 스치는 것에 그녀는 만족했고, 놀랍게도, 그 말에 제 형 뒤에 숨어 있던 아이가 앞으로 나서 고개를 세웠다. 새된 외침이 터져나왔다.

“이리하여 마침내 뵙는군요, 투린, 랄라이스! 나를 기억지 못하십니까? 나는 후린의 딸, 눈물의 딸 니에노르요!”

아, 여자아이였다. 그때에야 랄라이스는 오래 전 아버지의 푸른 눈이 똑바로 그녀를 올려다보는 것을 알아챘다. 투린이 풀썩 무릎을 꿇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이가 어색하게, 마디 불거진 손으로 투린의 등을 토닥였다. 투린은 거의 흐느낌같은 소리를 내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눈시울이 뜨거워, 랄라이스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세게 문지르며 시선을 돌렸다. 다른 아이 하나가 토끼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투린이 니에노르를 안아들고 일어서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투린의 발치에 몸을 낮추었다.

“후린의 아들.”

그 한 마디에 담긴 경외는 투린마저 잠시 아이에게 눈길을 주게 하기 충분했다. 아이는 허리춤을 뒤적여, 이 빠진 짧은 칼을 뽑아 눈높이로 올려 들었다. 투린이 입을 조금 벌렸다.

“나는…… 나는 후오르의 아들 투오르입니다. 사촌형제, 당신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칼은 넣어두거라, 투오르.”

그리 말하며 투린은 칼을 든 소년을 그대로 안아 올렸다. 한 팔에 한 아이씩 앉힐 수 있을 만큼 투린은 키가 컸고, 아이들은 지나치게 작았다. 랄라이스는 투린의 앞으로 걸어가 아이들의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

맥락 없는 위안에 니에노르가 미소지었다. 랄라이스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다섯 번의 겨울을 보낸 끝에, 그들은 결국 모르웬과 리안을 포기했다. 아무도 그들의 어머니들이 간 곳을 알지 못했고, 도르로민에 계속 머물기에는 나날이 더해 가는 위험이 두려웠다. 투린은, 처음 돌아온 이래 늘어나면 늘어났지 결코 줄어들지는 않았던 도망자들의 무리를 보며 브레실을 입에 올렸다. 랄라이스는 내심 이를 다행스럽게 여겼다. 후린의 아들과 딸을 환영할 곳은 몇 떠올릴 수 있었으나, 하도르 가문의 아이 넷에 부랑자 무리마저 받아들일 만한 데는 브레실뿐인 듯했다. 더군다나 도리아스와도 가까웠으니까.

산맥을 넘으며 랄라이스는 그때야 멜리안의 꾸러미를 풀었고, 브레실에 다다랐을 때 렘바스는 반의 반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라 식량이 없어진 게 다행이지, 하고 투린이 농담처럼 말했다. 투린의 눈썹 사이에는 이미 주름이 걱정의 흔적인 양 남아 있었다.

브레실의 젊은 영주는, 글쎄, 하도르 가문의 잔재를 두 팔 벌려 반기지는 않았으나, 투린을 친족이라 불렀고 머물 곳을 마련해 주었다. 조금 더 전사다운 이들은 드러내 놓고 투린을 칭송했다. 그들과 도르로민에서부터 그들을 따라온 이들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랄라이스는 브란디르를 연민했다. 고작해야 투린보다 한 해 늦게 난 젊은이.

니에노르는 그를 동경했다.

투린이 딤바르로 돌아가겠다며, 자신을 계속해서 따를 이는 나서라 말하자 랄라이스는 반론을 삼켜야 했다. 최선은 아니라도, 최악은 면한 선택이었다. 검을 잡을 수 있는 에다인치고 용투구를 꺼내쓴 투린을 따라나서지 않을 이는 드물었다. 투린은 조용히 그의 누이들과, 혼인하지 않은 그의 유일한, 아직 소년 태를 벗지 못한 후계자를 이야기했고, 결국 열 명 남짓을 데리고 사라졌다. 랄라이스는 니에노르와 브란디르를 지켜보았다. 치유자 브란디르. 최선은 아니라도, 역시나 최악은 아니었다.

몇 달 후 투오르는 투린을 만나야겠다며 혼자 딤바르로 향했다. 그는 투린과 함께 돌아왔다.

“마냥 순진한 생각만은 아니지.”

투린은 그답잖은 차분함으로 지적했다.

“우리 아버지들이 곤돌린을 찾은 것도 이 근방에서라 했으니까.”

“브라골라크 이후에 이 땅이 적의 하수인들로 들끓었다면, 지금은 모든 나무와 돌이 적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그리고 당신에게는 아들이 없소. 사촌을 그리 쉽게 보내서는 아니된단 말이오.”

브란디르가 곧바로 반박했다. 투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랄라이스는 새삼 그를 다시 보았다. 투린은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그의 오른편에 앉은 벨레그가 그녀와 눈을 맞추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브란디르,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소.”

브란디르를 불렀지만, 투린은 니에노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니에노르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투린은 웃음기 어린 어조로 계속해 말했다.

“내 누이, 후린의 딸 니에노르와 혼인하겠소? 그렇다면 나는 여기 모인 모두를 증인 삼아, 니에노르의 아들을 내 후계자로 삼으려 하오.”

브란디르는 한 동안 말문이 막힌 듯, 그들을 차례로 쳐다보며 침묵했다. 후린의 아들과 두 딸, 도리아스의 요정, 후오르의 아들. 그는 마침내 랄라이스를 보며 물었다.

“후린의 아들, 당신 누이는 둘이 아니오?”

“나는 투오르와 함께 갑니다.”

그리고 그녀는 손을 뻗어 사촌동생의 어깨를 감쌌다. 후린의 딸과 후오르의 아들. 투린은 마지못해 쓱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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