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te / midsummer’s day
곤돌린 | 190105 / 190118 티스토리
늦은 아침, 엘렘마킬은 지독한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 두 눈을 끔벅거렸다. 주변은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았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한 끝에 그는 제가 두 번째 관문의 숙소에 놓여 있는 모양이라고 결론내렸다. 숙소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은 태반이 돌의 관문의 제복을 입고 있던 것이었다.
엘렘마킬은 머릿수를 거듭 어림해, 잠든 이들의 수가 다섯은 넘으며 스물은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한 후 도로 눈을 감았다. 그는 용케도 벽에 기대 앉아 있었지만 어쨌든 제 발로 일어서는 데는 가히 영웅적인 노력이 필요할 터였다.
“괜찮아, 엘렘마킬?”
그는 눈을 떴다. 깎아지른 벼랑 사이 관문으로 비치는 햇살은 희게 시렸고, 아란웨의 아들에게는 엄숙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미처 자각하기 전에 엘렘마킬은 손을 뻗어 보론웨의 얼굴에 어리는 빛을 가렸다. 그것만으로도 두통이 한결 가시는 듯했다. 아니면 그가 끝내 짓누르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보론웨가 푸스스 웃었다.
“그래서, 경비대장님, 기분은 어때?”
그러나 나는 네 목소리를 기억하지, 하고 생각하며 엘렘마킬은 영 딴소리를 뱉었다.
“다시는 자네와 대작하나 봐라. 자네가 키르단의 친족인 걸 잊었지 뭐야.”
새하얀 침대보 위에 금발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엑셀리온은 문간에 기대 엷은 미소를 짓다가, 이내 다가가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글로르핀델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잔뜩 구겨진 여름 이불을 아이처럼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웅크린 어깨가 숨소리에 맞추어 깊게 오르내렸고, 등에 달라붙은 셔츠로 뼈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글로르핀델을 흔들어 깨우려다 말고 머뭇거렸다. 셔츠의 흰 천이 흠뻑 젖어 있었다.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투명한 별빛을 굳히고 검날을 축성하는 손길로, 그는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모았다. 무릎을 접어 올리며 붙어 앉자 침대 틀이 조용히 끼익거렸다. 결 고운 머리카락은 손가락으로 몇 번 빗어내리는 것으로도 쉽게 정돈되었고, 뺨 밑의 몇 가닥을 살며시 빼낼 때마저 글로르핀델은 뒤척이지 않았다. 언뜻 손끝에 스치는 맨살이 땀과 체온에 뜨끈했다.
허리춤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그가 거의 다 땋아내리고서야 글로르핀델은 무언가 웅얼거렸다. 엑셀리온은 땋은머리에서 한 손을 떼어 친구의 날개뼈 가운데 가만히 얹었다. 조금 더 명확한 발음이 들려왔다. 아이카스텔.
강인한 결의, 또는 혹독한 희망. 어느 틈엔가 글로르핀델은 돌아누워 그의 손을 마주잡았고, 한없이 어린, 물같은 얼굴은 우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황금꽃의 영주는 나직이 속삭였다.
“꿈을 꾸었어.”
너를 죽였어, 라고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이드릴은 소리없이 몸을 일으켰다. 관도 신도 없이 춤추는 왕녀는 양탄자를 맨발로 딛으며 서너 걸음 나아가, 벽난로 옆에 걸려 있던 푸른 망토를 찾아 둘렀다. 잠옷 자락이 발목에 감겼다. 그녀는 침대를 지나, 요람을 지나, 서랍에서 눈처럼 흰 초 하나를 꺼내 들고는 문을 나섰다. 발꿈치에 와닿는 돌이 차가웠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흉벽에 양 팔꿈치를 짚고 선 뒷모습은 사랑스러운 것이었고, 부러 크게 타박거린 마지막 몇 발짝에 청년은 황급히 뒤를 돌아 그녀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곁에 다가섰다. 투오르는 그답잖은 흐릿한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그는 아마, 한 때 그들의 도시가 이 날을 얼마나 성대히 기념했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이드릴은 제 입가에도 마찬가지로 뿌연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투오르의 가슴께에서는 이미 흰 초가 흰 돌 위로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타고 있었다. 이드릴은 제 초를 기울여 심지를 맞대고, 불꽃이 일렁이며 옮겨붙는 것을 지켜보았다. 투오르가 잡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
“날은 다시 밝아올 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수많은 예언과 예지를, 한밤에 날아드는 악몽같은 환영을 기억했고, 그 모두를 입에 담는 대신 엄지로 투오르의 손등을 쓸었다. 조금 더 활짝 웃었다.
“그리고 놀도르의 승리는 위대하리라.”
초여름 도시는 흰빛에 젖어 있고, 하짓날 시답잖은 업무를 맡길 만큼 그들의 왕은 잔인하지 않아, 샘물의 영주는 날이 완연히 새기가 무섭게 제 집을 나섰다. 몇 안 되는 층계를 밟아 거리에 닿으니 지나는 문간마다 연한 빛깔 화환이 내걸려 있어 그는 저 혼자, 햇살에 바랜 것인가, 당치 않은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일러야 전날 저녁에 엮인 꽃들일 터였다. 그러나 그는 괜한 마음에 제 소매를 손끝 사이로 잡았다가, 창가의 누군가 눈길 주었을세라, 다시 턱을 쳐들고 발길을 옮겼다. 아직은 아침 바람이 찼다.
도시에 꼬박꼬박 문을 잠그는 이는 없었으나 아예 걸쇠마저 마련하지 않는 이는 드물었다. 그는 반 뼘쯤 열린 문을 마저 밀고 빈 복도에 발을 들였다. 드디어, 어쩌면 마침내, 진중한 초록빛이 시야를 메워, 은백색 예장의 요정은 싱긋 웃고야 마는 것이었다. 저가 그랬듯, 집주인 역시 오늘만은 시중드는 이들을 죄 물렸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소리죽여 긴 복도를 밟아나가, 한 번에 두 단씩 계단을 올라, 철의 관문을 여는 양 가만가만 침실 문을 안으로 밀었다.
한껏 젖힌 휘장 사이로 쨍한 일광이 내리쬐는 가운데, 새하얀 침대보 위에는 금발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는 문간에 기대 엷은 미소를 짓다가, 이내 다가가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글로르핀델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잔뜩 구겨진 여름 이불을 아이처럼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웅크린 어깨가 숨소리에 맞추어 깊게 오르내렸고, 등에 달라붙은 셔츠로 뼈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글로르핀델을 흔들어 깨우려다 말고 머뭇거렸다. 셔츠의 흰 천이 흠뻑 젖어 있었다.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투명한 별빛을 굳히고 검날을 축성하는 손길로, 그는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모았다. 무릎을 접어 올리며 붙어 앉자 침대 틀이 조용히 끼익거렸다. 결 고운 머리카락은 손가락으로 몇 번 빗어내리는 것으로도 쉽게 정돈되었고, 뺨 밑의 몇 가닥을 살며시 빼낼 때마저 글로르핀델은 뒤척이지 않았다. 언뜻 손끝에 스치는 맨살이 땀과 체온에 뜨끈했다.
허리춤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그가 거의 다 땋아내리고서야 글로르핀델은 무언가 웅얼거렸다. 그는 땋은머리에서 한 손을 떼어 친구의 날개뼈 가운데 가만히 얹었다. 조금 더 명확한 발음이 들려왔다. 아이카스텔.
강인한 결의, 또는 혹독한 희망. 어느 틈엔가 글로르핀델은 돌아누워 그의 손을 마주잡았고, 한없이 어린, 물같은 얼굴은 우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황금꽃의 영주는 나직이 속삭였다.
“꿈을 꾸었어.”
너를 죽였어, 라고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무슨 꿈을 꾸었던지, 글로르핀델은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고, 답을 독촉하는 대신 엑셀리온은 창턱에 기대 서 그가 잠자리를 정리하는 것을 기다렸다. 글로르핀델은 옷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가, 생각을 고친 듯 바닥에 구겨져 떨어진 겉옷에 대충 팔을 꿰었다. 엑셀리온은 쯧, 혀를 찼다.
“그러다 또 허둥대지.”
“의식은 정오니까, 잠부터 깨고 생각해 보련다. 뭐라도 마실래? 집에 먹을 건 없는데.”
그러며 그들은 동시에, 온갖 보고며 명단이 난잡하게 흩어진 탁자 한 구석에 위태롭게 놓인 접시와 먹다 남은 빵 조각을 보았고, 엑셀리온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글로르핀델은 태연히 장화 끈을 묶으며 말했다.
“이 앞 광장에서 꿀빵을 파는데…….”
“그리고 오늘은 장사 쉬겠지? 알 만하다. 보자, 위병소에 들르면 뭐라도 있을 텐데.”
친구는 역겹다는 듯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한 번 거른다고 죽기야 하겠어, 하는 말에 글로르핀델이 활짝 얼굴을 폈다. 도로 침대에 드러누워 버린 그가 조급하게 제 옆을 탁탁 두드리길래, 엑셀리온은 못이기는 척 다시 그 곁에 앉아 침대 가 너머로 다리를 늘어뜨렸다. 친구의 땋은머리는 벌써부터 서서히 헝클어지고 있었다.
“머리 좀 푼다고 큰일나는 것도 아니고.”
글로르핀델이 자연스레 투덜댔고, 엑셀리온은 별 말 없이 제 생각을 싼 벽을 조금 더 내렸다. 심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나라도, 아무리 투루카노라도, 그건 아니지. 잠옷 바람으로 추방당할 일 있어?”
“글쎄, 그대가 그리도 차려입는 것을 귀찮아 하니까 말이야.”
글로르핀델은 양손을 머리 밑으로 베고는 다시 킬킬거렸다. 내가 추방당했다 돌아오면, 들여보내 줄 건가? 그는 아랫입술을 물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 성품에 울모같은 후견인은 어림도 없지만, 어지간한 마이아라면 또 모르지.
“발라라우코라도 잡아와야 하나,”
하며 글로르핀델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라우코를 잡아오면 마이아로 쳐 주지, 어때?”
확 찡그린 표정 너머로 엑셀리온은 로그의 거대한 몸집과, 그에 못지 않은 망치의 연상을 읽어냈고, 게으르게 실소했다. 먹구름낀 하늘이 눈 깜짝할 사이 개듯 가벼이, 글로르핀델은 그를 따라 웃더니, 한 팔을 뻗었다. 그가 잠시 뜻을 몰라 망설이자 글로르핀델은 천장을 힐끗 쳐다보고는 아예 윗몸을 일으켜 덥석 그의 허리를 그러안았다.
“라우레핀딜?”
갑작스런 움직임에 예복이 요란하게 부스럭댔다. 글로르핀델은 빳빳한 천에 입김을 뱉으며 속삭였다. 명치에서 조금 빗겨난 곳에 대고,
“그래, 내가 잡아올 테니까.”
이, 의미는,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엑셀리온은 잠자코 친구의 등을 쓸어내릴 뿐 아무 위안도 건네지 않았다. 이 꿈 아닌 악몽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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