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nger fortunes
켈레고름 × 아레델 | 210406 포스타입
힘라드의 요새에 도착했을 때 아레델의 흰 사냥복에는 거미줄 같은 그림자가 엉겨 있었다. 아레델이 백마에서 훌쩍 뛰어내리자 그림자는 눈 녹은 물처럼 흘러 떨어졌다. 켈레고름은 요새 문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아레델은 고삐를 쥔 채 서두르는 법 없이 천천히 걸어갔다. 켈레고름의 입꼬리가 조금 삐뚜름했다.
말소리가 들릴 거리의 다시 절반까지 다가가니 그제야 켈레고름이 입을 열었다.
“환영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아레델은 씩 웃었다. 북부의 차가운 햇살 아래서 켈레고름의 머리카락은 창백한 은빛으로 반짝였다. 예리하게 빛나는 두 눈에는 위험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후안보다도 더 맹수답고 오로메의 산짐승들보다도 야성적인 모습이었다. 힘라드에서의 몇백 년은 티엘코르모를 켈레고름으로 바꾸어 놓았다.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그래? 그렇다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환영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이릿세.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모욕이 될 테니.”
그리고 켈레고름은 성큼성큼 내달리듯 다가와 그를 끌어안았다.
긴 평화의 시대였다. 적어도, 그 무렵을 돌아보는 이들의 말은 그랬다. 아레델의 의견으로는 '긴 평화'라는 이름은 문제의 시대보다는 그런 이름을 붙인 이후의 시대들에 관해 더 많은 것들을 시사했지만, 아무렇든 당시에 중요했던 것은 평화의 장단(長短)이 아니라 여부(與否)였다. 되짚어보자면 그래서였다. 그가 가장 친애하는 사촌의 청혼을 받아들인 까닭은.
“하기 싫으면 마,”
라고 말한 켈레고름 페아노리온에게는 힘라드를 메운 창날과 발리노르의 피가 흐르는 군마와 그의 명령 한 마디라면 동족살해라도 저지를 맹목적인 부하들이 있었다. 아레델 아르페이니엘, 핀골핀의 딸에게는 대륙 건너편의 아버지와 형제, 그가 몸 성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또 요구하는 왕이 있었다. 아레델은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누가 싫대?”
켈레고름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송곳니 끝이 갈려 날카로웠다. 이따금 힘라드를 방문하는 암로드와 암라스의 난도린 부하들에게서도 비슷한 모양을 찾을 수 있었다. 숲의 왕, 오로메 알다론을 향한 경배의 표식이라고 했었다.
페아노르의 아들들은 저들 사이에서는 늑대 새끼들처럼 서로 물어뜯고 난도질할지 몰라도, 세상을 대할 때는 언제나 단 하나의 의지만을 내세웠다. 그 의지가 대부분 경우에는 마에드로스의 것이기는 했으나, 셋째로서 켈레고름의 권위 역시 작지 않았다. 더군다나 혼인에 관한 문제라면 마에드로스가 켈레고름을 막으려 들 리 없었으니까. 켈레고름은 자신감이 넘쳤고 덕분에 아레델도 이 일의 가능성에 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쟁점은 그가 이 일을 원하냐는 것이었다.
그가 힘라드에 머문다는 사실은 켈레고름과 쿠루핀의 침묵만으로 지켜질 비밀이 아니었었다. 투르곤은 결국 아레델의 소식을 들었고 곤돌린의 위치가 발각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페아노르의 아들들은 어차피 짐작하는 바가 있었지만, 원칙적인 문제를 무시하기도 어려웠다—그의 귀환을 권고했다. 말이 권고지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대안으로 켈레고름은 혼약을 꺼내들었다. 쿠루핀이 유부남만 아니었어도 그 녀석을 시키는 건데, 하는 농담도 빼먹지 않았다. 켈레고름도, 아레델도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어쨌든 그 정도 가식은 필요했다. 청혼을 함으로써 켈레고름은 평형을 깨뜨렸다. 관계는 아슬아슬한 임계점에 서 있었다.
이대로 청혼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미래는 그리 불행하지 않을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결혼의 최저 조건은 양측이 자유롭게 합의할 것뿐이었고, 실제로 나무의 시대, 정쟁이 벼랑 끝으로 치닫던 발리노르에서는 정략적인 이유만으로 이루어지는 혼인이 적지 않았었다. 페아노르의 아들과 핀골핀의 딸이라면 모두가 환영할 결합이었다.
거절한다면 무슨 이유를 댈 수 있을까. 아레델은 켈레고름과 눈을 마주치며 생각했다. 거절한다면……. 그와 결혼하기 싫은 것은 아니다. 거절할 이유는 없다. 거절하지 않을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리고 켈레고름과 달리 그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반지는 준비했어?”
그래서 아레델은 청혼을 승낙했다.
투르곤이 이 결혼에 대해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그들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아마 핀곤 선에서, 혹은 마에드로스 선에서 적절한 가지치기가 있었을 터였다. 쿠루핀은 아레델에게 종달새 알만 한 유백색 보석이 박힌 브로치를 선물했고 아버지의 역할은 장남이 대신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무시했다. 켈레고름은 히슬룸을 방문했다가 눈두덩의 시퍼런 멍과 정교하게 세공된 단검을 받아왔다.
전통대로라면 일 년간의 약혼을 유지해야 했겠지만, 어째서인지 이 결혼을 ‘진짜 결혼’으로 취급하는 것은 신성 모독처럼 느껴졌다. 더군다나 아레델은 아무리 결혼식을 위해서라도 히슬룸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석 달 후 그들은 힘링에서 손을 맞잡았고, 바라드 에이셀을 지키는 핀골핀 대신 핀곤과 마에드로스가 예식을 거행했다. 만웨와 바르다, 에루의 이름이 적법한 순서에 따라 거론되자 마에드로스는 어딘가 불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핀곤은 화관을 쓴 아레델을 바라보며 눈물을 찍지 않을 때마다 켈레고름을 협박을 담아 노려보았다. 마글로르는 용케도 예의바르게, 무려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의외로 카란시르도, 쿠루핀도 불쾌한 이야기는 자제하는 듯했고, 암로드와 암라스는 비로소 그 또래의 청년들답게 싱글거리며 웃었다.
첫날밤은 무난했다.
이제 내가 힘라드의 여주인인 건가? 묻자 켈레고름은 아주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소리 내어 낄낄거렸다. 언제는 아니었다고? 그 말에 아레델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불길이 아르드갈렌을 집어삼키고 아글론 고개를 향해 몰려오자 그들은 최악을 준비했다. 로미온은 성년은 넘었다 하나 지나치게 어렸다. 아버지가 된 지 백여 년은 지난 켈레고름에게는 여전히 미성숙한 면이 적잖이 남아있었다. 어느날 요새의 흉벽 위에서 켈레고름이 물었다.
“난 둥고르세브를 다시 지날 수 있겠어?”
“티엘코르모. 내가 너와 쿠루핀웨를 두고 떠날 거라고 여긴다면, 단단히 착각한 거야.”
켈레고름의 진의를 이해했기에 로미온을 떠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켈레고름은 북쪽을 응시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켈레고름의 머리카락은 강철 같은 은빛이었다. 아레델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미리엘에게서 물려받은 색이라고 했다. 앙그로드와 아에그노르의 부고를 들은 이래 아레델은 하루에도 몇 번씩 미리엘 세린데를 떠올렸다. 대체 어떻게 가족을 저버릴 수가 있었지? 그러나 나무의 시대에 아만은 평화로웠었다. 전시에는 차마 저지르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보름 후, 힘라드의 요새는 무너졌고 패잔병을 수습한 켈레고름은 아레델을 찾았다. 정찰대원들 사이 섞여 있던 아레델은 켈레고름이 제 두 발로 그에게 걸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있는 줄도 몰랐던 절망이 녹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릿세. 길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내가 마지막으로 이 길을 지났을 때 난 죽을 힘을 다해 그림자로부터 도망치고 있었어. 전부 기억이 날 것 같지는 않은데.”
켈레고름은 짖듯이 웃었다. 낮은 저녁처럼 어두웠고 어스름 속에서 켈레고름의 송곳니 끝은 유독 눈에 띄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도망치고 있으니,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아레델의 길잡이별은 켈레고름이었다.
딱히 낭만적인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아레델은 켈레고름을, 로미온을, 저 멀리 기마대를 통솔하려 애쓰는 켈레브림보르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쿠루핀을…… 동부변경의 페아노르의 아들들과 가운데땅 놀도르의 대왕인 아버지와 지금도 아버지의 곁을 충실히 지킬 첫째 오라비와 소식 한 번 그에게 닿은 적 없는 곤돌린의 투르곤을 생각했다. 그의 심장이 가리키는 곳은 한 곳뿐이었다.
“네가 함께 가니 도움이 되겠지.”
그렇게 말하고서 아레델은 켈레고름의 얼굴에 난데없이 떠오르는 희망의 빛은 무시하려 애썼다.
난 둥고르세브를 빠져나가는 길에 웅골리안트의 새끼 중 하나가 로미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레델은 본능적으로 아들의 앞을 막아섰다. 다른 운명에서라면 맞았을 것보다 반 세기 늦은 죽음이었다. 발버둥치는 로미온을 켈레고름은 막무가내로 도로 말 안장에 밀어올렸다. 북쪽으로는 아직도 꺼지지 않은 업화에 아르드갈렌이 비명을 질렀다. 남쪽은 멜리안의 장막이었다. 남쪽은 도리아스였다.
켈레고름은 나르고스론드로 말머리를 돌렸다.
아레델 아르페이니엘, 놀도르의 백색 숙녀는 이후의 모든 시대에 켈레고름 페아노리온의 아내로 남는다. 그 정도로 만족했을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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