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리프 이주 0P 사건

검과 포위망과 수비의 울타리

아에그노르 × 안드레스 | 210420 포스타입

rhindon by 댜

안드레스 | 희망이 무엇입니까?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확실치는 않으나 알려진 것에 기반을 둔 기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핀로드 | 그것은 인간이 희망이라고 부르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를 암디르 곧 ‘올려다보기’라 부르지요. 하지만 더 깊은 곳에 기반한 또다른 희망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 곧 에스텔이라 칭합니다. 에스텔은 세상의 방식에 패배하지 않는데, 이 희망은 경험이 아니라 우리 본성과 일차적인 존재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중략) 당신은 당신 자신이 암디르는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에스텔도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겁니까?

안드레스 | 어쩌면요. 하지만 아니요! 당신은 에스텔이 쇠퇴하고 그 기반이 흔들리는 것이 우리 상처의 일부임을 깨닫지 못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유일자의 아이들이 맞습니까? 마침내 내버려진 것이 아니고요? 혹 우리는 결코 에루의 아이들이었던 적이 없었던 겁니까? ‘이름없는자’가 세상의 군주이지 않습니까?

“아이카나로.”

불타는 북녘 하늘을 뒤로 한 형이 그를 불렀다. 아에그노르는 잿가루 낀 손가락으로 뺨을 문지르며 답했다.

“그래.”

암바라토 아이카나로 아라핀위온, 그것이 한때 그의 이름이었으니까. 이제 그를 그리 부르는 사람이 그 곁에는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해도, 불러주는 사람이 있는 한 그 이름은 아직 잊힌 것이 아니었다. 관자놀이에 따라붙는 형의 시선이 무거웠다. 아에그노르는 한숨을 쉬었다.

“불렀으면 말을 해, 형.”

“네가 지금 이 자리를 떠난다고 해도…….”

아에그노르는 형을 날카롭게 쏘아보았지만, 형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장갑 낀 손이 흉벽 위를 휩쓸 듯 넓게 가리켰다. 벽과 벽 이쪽의 병사들과 너머의 참혹한 대지를.

“누구도 네 명예를 의심하지는 못할 거다.”

“맙소사, 앙가라토!”

그제야 형이 어째서 퀘냐를 썼는지 알아차린 아에그노르가 외쳤다.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베오르 가문의 인간들은 신다린에는 그럭저럭 능했어도, 싱골이 금지한 퀘냐는 알지 못했다. 형의 등 뒤에는 브레골라스가 언제나처럼 충실히 서 있었으나 그 얼굴에 서린 표정은 담담한 인내뿐이었다. 아에그노르는 이를 악물었다. 형의 표정이라고 가신의 것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형의 그 권유야말로 내 명예를 의심하는 짓이야. 아니, 명예 때문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형 뜻대로 할 수는 없어!”

앙그로드가 아에그노르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에그노르는 형을 밀쳐내려다가, 마지막 전투에서 형이 갈빗대를 부러뜨렸던 것을 기억해 내고는 어쩔 수 없이 애먼 칼자루를 쥐었다.

“아직 군마가 남아있지. 원한다면 병사 몇을 데리고 빠져나가. 포위와 화염을 뚫을 수 있다면…….”

“그리고 형을 여기 버려두라고?”

“둘 중 한 명은 이곳을 지켜야 하니.”

아에그노르는 형을 노려보았지만, 앙그로드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질투가 날 만큼 부러운 일이었다. 제 손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는데.

긴 평화는 깨어졌고 상고로드림으로부터는 거대한 금빛 괴물이 적군의 파도와 함께 쏟아져나왔다. 아르드갈렌은 불탔으며 그들은,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을 예지력으로, 이 자리가 그들의 무덤이 되리라는 것쯤 내다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형이 자신을 떠나보내려는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다.

날카로운 말로 응수하려던 아에그노르는 결국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지간한 불길은 강철을 녹이지 못하는 법이었고, 앙그로드는 그가 아는 한 가장 그 비유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야.”

마굿간에서 오로메의 말 나하르가 기다린다 해도 그는 떠날 수 없었다. 앙그로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째서?”

“이건 의지의 문제거든. 난 이미 선택을 내렸고, 내 결정을 번복하지는 않을 거야.”

마지막 음절을 입 밖에 낸 후에야 아에그노르는 제가 이 이야기를 일전에 앙그로드에게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아차 싶었던 심정과는 달리 앙그로드는 어리둥절하다기보다는 진지한 낯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에그노르가 말을 잇기 전, 앙그로드가 먼저 나서 그의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그래, 그럴 것 같았다.”

맥이 탁 풀렸다. 아에그노르는 어깨에 얹힌 형의 손을 흘깃거리다 끝내는 그 손목을 맞잡았다.

“숨길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핀다라토는 나보다 배는 눈치가 빠르니까.”

그들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허공에는 아르드갈렌을 태운 먼지가 가득했다. 하늘은 긴 평화의 저묾을 드러내듯 석양처럼 붉었고, 화염의 열기는 그들 이마에 땀으로 맺힐 만큼 가까웠다. 이 요새는 만 하루도 버티지 못할 터였으나 형제에게는 달리 후퇴할 곳이 없었다. 물시계는 정오를 가리켰지만, 태양은 재 구름 너머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앙그로드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브레골라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앙그로드에게 피나르핀의 문장이 양각된 방패를 내밀었고, 흉벽 너머를 내려다본 아에그노르는 적군이 화살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것을 보았다. 화살이 남아있기나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그는 저도 모르게, 한때 핀로드가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을 기도문처럼 읊조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밤이 오기 전 아직 한동안은 벨레리안드에서 강이 맑게 흐르고, 나뭇잎이 돋아나고, 새들이 둥지를 틀 수 있도록.”

신다린을 알아들은 브레골라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앙그로드는 브레골라스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오르크들의 뒤로는 원근감이 사라질 지경으로 거대한 용이 맹독의 안개를 몰며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불과 칼날의 바다에 갇힌 채였고 친족들의 생사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벨레리안드의 완전한 파괴가 목전으로 다가온 날, 아에그노르 아르피니온이 이 땅을 살아 디딜 마지막 날이었다.

형은 다시 한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오래전 너를 상처 입힌 적에게 훼손을 갚아 줄 수 있도록.”

아에그노르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이름대로, 난폭한 불길처럼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도르소니온의 여름이 으레 그렇듯, 그날 아침은 상쾌하고 푸르렀다. 밤이 내리면 산봉우리 사이의 아엘루인 호수는 거대한 검은 거울이나 다름없었지만, 해 뜬 후 그 물은 맑고 잔잔했으며 그리 차갑지 않았다. 양털 같은 뭉게구름은 하늘과 수면에서 똑같은 호흡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바람은 소나무 가지 사이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보로미르의 딸 안드레스는 호숫가의 잔디밭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요정이든, 인간이든 지식은 나무껍질이나 짐승의 가죽이 아니라 산 자의 마음속에 담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핀로드는 동생의 봉신인 보로미르에게 각별히 너그러웠고, 발리노르로부터 가져온 귀중한 서적들은 나르고스론드의 학자들에게는 쓸모없었을지 몰라도 이전에는 인간의 눈이 닿은 적 없는 것들이었다. 핀로드의 관심이 향한 대상이 가주가 아니라 그 딸이었다는 점도 아주 특이하지만은 않았는데, 텡과르를 능숙하게 읽고 쓸 줄 아는 인간은 손에 꼽았고 핀로드가 내어주는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베오르 일족에서 안드레스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이마저도 아다넬에게 손등을 맞아 가며 배운 덕이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햇살은 맑았고 요정의 종이는 손안에서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어두컴컴한 아버지의 집을 나와, 여름 바람을 느끼며 혀끝에서 신다린을 굴리는 것만으로도 안드레스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노래하는 듯한 언어였다! 회색요정들의 살짝 쉰 듯 그늘진 속삭임도, 피나르핀 가문 병사들의 낭랑한 함성도 모두 이 낱말들로 이루어졌다. 누구나 배울 수 있는 비밀이었으며 새로운 생각의 방식이었다.

책에 적힌 서사시는 최초의 별들을 밝히는 엘베레스 길소니엘을 노래했고, 안드레스는 까마득한 어둠과 물처럼 쏟아지는 빛을 읽었다.

베오르가 청색산맥을 넘어온 이래 인간들 사이에서는 다섯 세대가 지났다. 그해 여름 안드레스는 스물두 살이었고, 이제 남쪽의 에스톨라드보다는 도르소니온의 고원이 더 익숙했다. 그 자신마저 대개 잊고 지내는 사실이었으나 어쨌든 그는 용감하고 열정적인 청년이었으며 낯선 것을 두려워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온 북부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는 한들 안드레스는 평화의 아이였다.

그러니 호수 반대편에서 우 함성이 들리자 안드레스의 반응은 벌떡 일어나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피는 데서 그쳤다. 다른 시대였다면 목숨으로 값을 치렀을지도 모르는 행동이었다.

남쪽의 소나무 숲을 뚫고 한 무리의 기마대가 내달려 나왔다. 열, 열다섯 명쯤 되는 기수들은 요정의 갑주를 두르고 있었다. 흥미가 돋은 안드레스는 책을 덮어 가슴 앞에 안은 채 일어섰다. 무리 앞쪽의 요정 중 하나가 든 기치에는 피나르핀 가문의 태양이 번쩍였다.

가장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요정은 투구를 벗고 있었는데, 아침 햇살 아래서 요정의 금발은 불이 붙은 것처럼 찬란했다.

어딘가 낯익은 듯한 느낌에 안드레스가 눈을 깜박이는 사이 기마대는 능란히 방향을 바꿔 호숫가의 잔디밭을 따라 다가왔다. 안드레스는 멈칫했다. 호숫가에는 길이 없었지만 그가 앉아 있던 자리는 라드로스로부터 올라오는 산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요정들을 피하려면 지금이라도 그쪽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하나 피나르핀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주군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요정의 시력이라면 호수 반대편에서라도 그를 보지 못했을 공산은 적었다. 도망치는 것은 무례였다.

마음을 다잡은 안드레스는 기마대가 호수를 반쯤 돌아왔을 때 크게 소리 높여 외쳤다.

아이야 엘달리에!”

잘못 보았던 것일지도 몰랐지만, 선두의 요정은 분명 환하게 미소한 것 같았다. 거리도 거리였거니와 말발굽 소리 사이로 그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대답하는 음성은 뿔나팔처럼 힘이 넘쳤다.

“반갑소, 아다네스, 인간의 딸이여!”

그리고 안드레스가 제 외침을 후회할 만한 여지도 주지 않고, 기마대는 순식간에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최초란 그런 것이었다.

밤의 검푸른 비단 위로 첫 별들이 흩뿌려졌을 때, 엘베레스 길소니엘은 자신의 솜씨에 감탄했을까? 안장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요정영주는 큰 키에 타오르듯 강렬한 눈빛을 지녔고 걸음걸이에는 표범 같은 우아함이 있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태양의 가장자리처럼, 아스라한 겉불꽃처럼 나부꼈다. 안드레스는 숨을 삼켰다.

화톳불로 날아드는 나방의 마음을 알 듯도 했다. 아주 오래 그의 염두에 남게 될 인상이었다.

요정은 그네들만의 예법대로 주먹을 심장 위로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신다린으로 이어지는 의례적인 인사를 안드레스는 그저 흘려들었다. 손에 쥔 책이 점차 따스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요정의 입에서 이름이 나오자 그는 고개를 젖혀 아에그노르와 눈을 마주쳤고, 어쩌면, 제 운명을 깨달은 피나르핀의 아들이 어떠한 표정을 짓는지를 배웠다.

만약 발리노르에서 누군가 그에게, 그가 스물두 해를 산 상대와 사랑에 빠지게 될 거라 말해주었었더라면 아에그노르는 일단 주먹부터 휘둘렀을 것이고 해명을 요구한 다음 이치에 맞는 한에서 사과했을 것이었다. 스스로를 때리는 데 힘을 싣기 어렵다는 사실은 그러니 그로서는 꽤 통탄할 만했다.

하지만 안드레스는 둘째자손이었다. 그래서 아에그노르는 앙그로드에게 한 대 쳐 달라고 부탁한다는 선택지는 잠시 보류해 두었다.

“아에그노르!”

그는 벌떡 일어났다. 라드로스의 에다인 정착지를 굽어보는 언덕에서 안드레스가 뛰쳐 내려오고 있었다. 아에그노르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소리쳤다.

“조심하세요, 비탈이 가파릅니다!”

아, 그러나 그의 안드레스는 열정적인 소녀였으며 고원의 자갈은 가죽 장화 아래서 빗방울처럼 튀어 올랐다. 화들짝 놀라 안드레스를 향해 달려가려던 그는 어느새 언덕 발치에 멈춰 양팔을 벌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리도 가슴이 벅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안드레스는 속도를 줄이는 법도 없이 그대로 그의 품 안에 안겼고, 그는 빙글 돌며 안드레스의 작은 몸을 들어 올렸다.

햇볕이 달군 정수리에 턱을 포개자 안드레스는 까르르 웃으며 그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내 친족이 보면 무슨 소리를 할 줄 안다고!”

“그대와 나 사이의 일에 누가 감히 말을 더합니까?”

그대, 그는 언제나 안드레스를 그대라고 칭했지만, 안드레스가 그 의미를 정확히 아는지는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안드레스는 발끝으로 그의 발목을 가볍게 걷어차고는 투덜투덜 불평했다.

“하필 오늘이에요? 아버지가 방금 에스톨라드로 떠나셔서, 오늘은 마을을 비울 수 없는데.”

아에그노르는 순순히 안드레스를 내려주면서도 안드레스의 허리를 놓지는 않았다. 안드레스 역시 아무렇든 그를 쉽게 보내줄 심사는 아닌 듯했으니 다행이었다.

“브레고르가 있지 않습니까?”

“오라버니는 그대 형님께서 데려가셨는걸요? 그리고 내 여동생에 대해서는 묻지 마세요, 아에그노르, 베릴은 너무 어려요!”

아에그노르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별수 없군요. 그렇다면, 숙녀님, 오늘 하루 내게 그대를 호위할 영광을 허락하시렵니까?”

안드레스의 콧잔등에 곧장 주름이 잡혔다. 아에그노르는 더는 참지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싫어할 이유는 없잖습니까!”

“싫은 게 아니에요! 하지만 아에그노르, 제기랄, 그만 좀 웃어요!”

“약속한 바 없었더라면 오해했을 겁니다.”

그리고 아에그노르는 가슴팍을 때리는 안드레스의 주먹을 감싸 잡으며 간신히 웃음을 억눌렀다.

“그대는 날 기다린 게 아니라 고원의 종달새들을 그리워한 것이로군요?”

얼마 전, 말을 타고 고원에 올라 회색 종달새들이 아침을 깨우는 것을 보았을 때 아에그노르는 안드레스의 모은 손에 밀알을 부었고 새들은 곧은 손마디에 내려앉아 지저귀었었다. 안드레스는 부루퉁하니 대꾸했다.

“고작 그런 말이나 할 셈이라면, 그래요, 그대보다는 종달새들을 더 사랑한다고 하죠.”

아에그노르는 혀끝까지 치받고 올라온 질문을 되삼켰다. 나를 사랑하시나요? 대신 그는 안드레스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따스한 머리카락 위로 고개를 숙였다. 함께 새소리를 듣지 못한대도 괜찮았다. 안드레스만 그의 품에서 웃어주고, 그래, 고작 이런 사소한 불행 외의 슬픔은 그들에게 손대지 못한다면.

온종일 안드레스의 뒤를 따르며 그가 베오르 일족을 돌보는 모습을 지켜본 끝에 아에그노르는 그가 바랐던 다정한 시간을 얻어냈다. 몸에 열꽃이 오른 아이의 어머니에게 약초 다발을 쥐여 준 안드레스가 그를 돌아보며 웃었던 것이었다.

“좋아요, 이만하면 된 것 같네요.”

“끝나신 겁니까?”

“영주님, 인간의 고통은 끝을 몰라요.”

안드레스는 빗방울에 젖은 조약돌처럼 단단한 눈으로 아에그노르와 시선을 마주쳤다. 아에그노르는 저 자신의 심장 박동을 들었다. 북처럼 울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유예는 주어지죠. 희망을 가지세요! 고원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늦었어도, 잠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주변을 거닐 수는 있을 거랍니다.”

아에그노르는 허리 숙여 안드레스의 손마디에 입을 맞추었고, 안드레스는 사랑스로운 미소로 답했다.

“바라시는 대로. 어디로 가고 싶으신지요?”

“어디로든요, 그대를 쫓아 달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하나 그런 순간이 영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날 저녁, 아에그노르는 안드레스와 손을 잡은 채 정처 없이 라드로스를 거닐었다. 가을이었다. 솔잎은 여전히 푸르렀으며 안드레스의 머리카락은 목 아래에서 단정히 묶여 있었고, 아에그노르는 시선을 드러난 살결에만 두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해가 서쪽 산봉우리들을 붉게 물들였을 무렵 땅은 서서히 내리막길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에그노르는 안드레스의 손을 꾹 쥐며 걸음을 멈추었다.

“더 멀리는 아르드갈렌입니다. 병사들 없이 가기는 위험할 거예요.”

안드레스는 조금 아쉬운 낌새를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지키는 땅이로군요. 그대가 달리는 평원이고요.”

“아름다운 곳이죠.”

아에그노르는 반쯤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툭, 팔을 건드리는 감촉에 고개를 숙이니 안드레스는 그의 상완에 뺨을 기댄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대 고향만큼 아름답지는 않을 텐데요.”

“비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안드레스 아다네스, 이곳 라드로스는 그대 유년기의 에스톨라드보다 아름답습니까?”

“에스톨라드에는 그대가 없었죠.”

아에그노르는 안드레스의 손을 놓고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말 한 마디로 그의 가슴을 터질 듯 벅차게 하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안드레스는 말 없이 팔을 뻗었고, 그의 허리띠에 검지를 꿰며 나지막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들은 라드로스의 북쪽 경계를 긋는 언덕 비탈에 서 있었다. 이 부근에서 큰키나무는 거의 자라지 않았지만, 발치에는 가을꽃이 무더기로 산들거렸고 바람은 서늘했으나 견뎌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새들이 노래하는 나르고스론드나 금가루가 모래처럼 흐르던 티리온과는…….

결이 달랐다.

아에그노르는 조용히 말을 골랐다. 안드레스는 그가 생각 없는 말로 모욕할 수 있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리고 어쨌든, 안드레스가 그들의 전쟁을 모르지도 않았으니까.

“만웨와 바르다의 발치에 앉은 적 있는 내게도, 축복받은 땅을 민돈 엘달리에바 꼭대기에서부터 내려다본 적 있는 내게도 이곳은 아름답습니다. 우린 빼앗긴 것들을 되찾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만, 이유가 그뿐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모르고스를 무찌르고, 그리하여 그 세상의 검은 적이 죗값을 치르도록. 그것 역시 우리 까닭이었죠.”

“죗값을……. 북녘의 어둠이?”

아에그노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들어 북쪽을, 너른 아르드갈렌 들판 너머 지평선을 가리켰다. 어둠이 깔려 구정물을 쏟은 듯 칙칙한 빛깔이 된 땅 너머로, 그의 눈에는, 세 봉우리 검은 산이 솟아 있었다. 어째서인지 목이 메었다.

“저쪽이, 저게 앙그반드입니다. 등불의 시대에는 우둔을 지키던 요새였죠.”

“전 잘 보이지 않는걸요. 그대는 어떤가요?”

보입니다, 대답하려다가 아에그노르는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막연한 무게가 가슴 한쪽을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도르소니온에서는 상고로드림의 절벽이 보였다. 그와 앙그로드는, 피나르핀의 두 아들들은 세상의 검은 적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안드레스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에그노르?”

순간 밀려오는 충격에 아에그노르는 휘청 비틀거렸다. 황급히 그의 팔꿈치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아에그노르!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답지 않게 말을 얼버무리려 드는 것이 걱정을 살 뿐임을 알아도, 달리 변명이 떠오르질 않았다. 꿈결 같은 한때에 빠져 상고로드림을 잊고 있었다. 뻔히 보이는 북녘의 그림자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혀뿌리에 울컥 신맛이 올라왔다. 두 나무의 빛이 꺼졌을 때 온 천지를 덮었던 어둠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었고, 잠시라도 이를 잊었다는 자각은 끔찍이도 역겨웠다. 그는 막연히 머릿속을 더듬었다. 더 무슨 말을…… 감히, 더 무슨 말을.

다음에는, 운을 떼고서도 그는 머뭇거렸다. 어느 아침의 풍경이 그림처럼 눈앞에 드리워졌다. 태양빛은 냇물처럼 맑았고 여름의 야생화는 흰 꽃봉오리를 틔우던 그날. 아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 그는 운명을 깨달았으므로.

“다음에는 아엘루인 호수에 가 봅시다.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요.”

그리고 그곳에서 바르다 틴탈레의 별은 보석처럼, 진주처럼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머리카락에 엮이겠지. 여느 때처럼 확고부동한 예지는 맹독만큼이나 고통스러웠다. 희망이 죽어가고 있었다. 서서히, 피할 수 없는 종말처럼.

요정은 희망을 두 종류로 구분했지만, 누구도 아에그노르에게 때론 에스텔이 암디르만큼이나 연약할 수 있음을 알려주지는 않았었다.

호숫가에서 아에그노르는 망토를 벗었다. 저녁 잔디는 이슬을 잃은 지 오래였지만, 안드레스는 그즈음 되자 놀도르의 예법에 익숙해진 후였기에 별다른 말 없이 호의를 받아들였다. 요정의 망토는 공들여 가꾼 머리채보다 부드러웠고 양털이 물을 머금듯 온기를 품었다. 안드레스는 망토 위에 무릎을 접어 앉으며 아에그노르를 올려다보았다.

“이것도 나쁘지 않네요?”

해가 저문 후였으나 아에그노르가 가져온 등불은 별빛 같은 청백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등불 빛으로 청록색에 가깝게 물든 잔디밭에 선 아에그노르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온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거친 금발은 거의 희끄무레하도록 바랜 채였다.

“마음에 드십니까?”

“밤에는 여기 와 본 적이 없어요. 별이 이렇게나 환히 비칠 줄은 몰랐는걸요!”

“이 호수는 멜리안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아에그노르는 안드레스의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연스레 그의 품에 몸을 기댔던 안드레스는 익숙한 듯한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도리아스의 왕비인 멜리안이요? 장막을 드리웠다는?”

“맞습니다. 내게는 외종조모님이시죠.”

안드레스는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멜리안, 할레스 일족의 인간들이 모르고스를 대하듯 두려워하고 태양을 대하듯 경외하는 그웬델링, 그가 아에그노르에게는 친족이라고?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는 것만 같은 아찔함에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에그노르와 이야기하노라면 퍽 자주 느끼게 되는 기분이었다. 아에그노르는 어째 무언가 재미있기라도 하다는 기색이었고, 안드레스는 픽 헛웃음을 뱉었다.

“직접 뵌 적 있나요?”

아에그노르는 기억을 더듬는 요정 특유의 멍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오래 전, 딱 한 번이요. 멜리안 님은 마이아이며 서녘의 권능 중 하나이십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내 외조부의 형님 되시는 엘웨, 그러니까 엘루 싱골과 혼인하셨고, 발리노르가 망명 요정들에게 닫힌 지금까지도 이 땅에 남아 계시지요. 그대 말씀대로 장막을 드리운 것도, 가운데땅의 나이팅게일들에게 노래하는 법을 가르친 것도 그분이고요.”

“인간은 넘을 수 없다는 그 장막을요.”

“도리아스를 방문하고 싶으십니까?”

안드레스가 흠칫 놀라 시선을 돌렸을 때 아에그노르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언제나 당당하면서도 고귀한 그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안드레스는 찰나, 말이 안 되게도, 아에그노르가 무엇인가를 겁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밤의 아엘루인 호수에는 별빛이 가득했고, 아에그노르는 어둠 속에서 창백해진 안색으로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대가 도리아스의 안전과 그 군주들의 보호를 바라신다면, 나는 그대에게 그것들과 그 이상을 얻어드릴 수 있습니다. 엘루 싱골과—엘웨 신디콜로와—로리엔의 딸 아르멜리안은 나의 친족이니까요.”

말문이 막혔다.

이제껏 어떤 인간도 받지 못했을 제안 앞에서, 안드레스는 아에그노르의 말 끝에 이어졌을 이유를 이해했다. 싱골과 멜리안은 아에그노르의 친족이고, 안드레스 자신은 그의…… 무엇이지? 무엇이 되었든, 어떠한 의미와 무게를 가진 사람이므로. 과분한 영광이라 해도 좋을 초대였다.

안드레스는 손을 뻗어 아에그노르의 손을 붙잡았다. 그를 바라보는 두 눈은 가식 없이 정직했다. 아에그노르는 진심이었지 안드레스가 거부하리라 간주하고 빈말을 한 것이 아니었고, 때문에 안드레스는 놀림받았다는 모욕감조차 느낄 수 없었다. 아에그노르는 순수한 호의로 도리아스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둘째자손에게 이러한 초대가 얼마나 공허한지 당신이 어찌 알까?

“……안드레스?”

“제 친족은요?”

아에그노르는 허를 찔린 듯 짧게 탄식하더니 침묵했다. 안드레스는 저 스스로도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격정에 사로잡혀 말을 이었다.

“제 친족은요? 제 아버지와 형제들은, 베오르 일족의 모든 이들은요? 그들을 저버리란 말씀이신가요? 피나르핀의 아들, 저를 도망자로 만들려 하십니까?”

“무엇이 당신을 당신의 친족에게 매어 둡니까? 안드레스 아다네스, 그대는 느끼지 못할지 모르겠으나 온 가운데땅은 전쟁 중에 있습니다. 도리아스를 원치 않는다면 더 먼 곳은 어떠십니까? 내 형 핀로드와 교류하는 난쟁이들은 청색산맥 너머에 드넓은 대지와 위대한 왕국들이 펼쳐져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곳들은요?”

“그럼 그대는?”

다듬지 못한 채 날카롭게 쏘아붙인 물음에 아에그노르가 멈칫하자 안드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손아귀 안에서 아에그노르의 손이 곰지락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대와 함께라면 어디든 가도 좋아요. 하지만 그대는 떠나지 않을 작정이잖습니까? 저를 떠나보내려고 하지는 마세요, 보호와 안전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나는 모르고스에게 원한이 있으나 그대는 아닙니다!”

“원한이 없다고요? 제가 인간이기에?”

벌떡 일어난 안드레스는 호숫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에그노르가 뒤늦게 그를 뒤따라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곳 고원에서 하늘은 손에 잡힐 듯 가까우면서도 아득히 멀었고, 별빛은 빗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안드레스는 발끝이 물에 젖기 직전 멈춰 서 숨을 골랐다.

“죽음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습니까? 저를 친족에게 매어 두는 것이 무어냐고요? 필멸이요, 필멸이 인간을 속박합니다. 그대 역시 그대 입으로 인정하시지 않았습니까? 가운데땅 어디에서든 싸움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어요!”

“미안합니다.”

다급한 한 마디에 안드레스는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아에그노르는 그의 등 뒤로 다가와 그를 끌어안았다. 혼란이 잦아들었다. 아에그노르는 그와 손을 겹쳐 잡았고, 안드레스는 덜덜 끊기는 숨을 내쉬며 아에그노르의 어깨에 뒤통수를 기댔다. 조곤조곤히 이어지는 해명은 그 목소리의 절반만큼의 몫도 하지 못했지만, 더해진 둘은 안드레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그대를 분노케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안드레스. 이러려던 건…… 미안합니다. 그러나 숙녀님, 만일 그대가 나를 용서할 수 있다면……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수면은 거울처럼 평평했고, 검은 물 위로 안드레스는 아에그노르와 눈이 마주쳤다. 은회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별빛과 분간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요정의 눈, 신다르와 에다인이 아울러 불붙은 것만 같다며 수군거리고는 하는 높은요정의 눈이었다.

별과 분간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아에그노르를 키워낸 두 나무의 빛은 가장 어린 별들보다 오래된 것이 아니던가? 해와 달 이전의 빛이 아엘루인의 물에 비쳐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문득 가슴께가 저렸다.

“우리 사이에 용서라니요.”

안드레스는 자그맣게 속삭였다.

그 말이 신호였던 듯, 팽팽하던 기류는 언제 그랬냐는 양 풀어졌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되풀이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아에그노르는 주인의 신발을 물어뜯은 사냥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드레스는 그 사랑스러움을 이기지 못해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그들은 호숫가에 앉아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둠이 깊어지자 아에그노르는 일어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잡고 일어선 안드레스는 자연스레 양팔을 아에그노르의 목에 둘렀다. 금발이 손등 위로 내려앉았다. 아에그노르는 그를 꽉 끌어안으며 무어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안드레스가 아는 신다린은 아니었지만, 낱말의 어감은 익숙했고 그렇지 않았더라도 안드레스는 아에그노르의 말뜻을 쉬이 짐작했을 것이었다.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안드레스의 눈길은 하늘 가득한 별빛에서 끝을 맺었다.

그 저녁이 마지막이었다.

아에그노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안드레스는 기다렸고, 지쳐갔다.

죽음, 죽음을. 필멸을 사랑함은 결국 죽음을 사랑함이 아닌가?

암바라토 아이카나로, 아라핀웨의 아들은 인간의 딸을 사랑했다. 이제껏 어떤 요정도 인간을 사랑한 바 없었음에도.

핀로드는 그들 종족 사이의 심연을 뛰어넘은 결합은 반드시 불행으로 끝을 맺을 것이라 말했고, 아에그노르는 형의 단언을 헛된 위로로 치부하면서도 반박하려 들지는 않았다. 안드레스와 그 사이의 일을 전부 아는 것은 핀로드 한 사람이었다. 대신 그는 핀로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물었다. 형, 우리는 어째서, 어째서 말이야. 어째서 우리가 원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까.

“어째서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거지? 사랑해도 좋을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형, 우리는 어째서…….”

“아이카나로, 내 동생.”

“나는…….”

일루바타르를 원망해, 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그의 큰형은 지나치게 선량하고 신실한 사람이었기에, 형 앞에서 그런 신성 모독을 뱉을 수는 없어서. 대신 그는 핀로드의 소매를 붙잡은 채 말을 이었다.

“나는, 모르고스 바우글리르를 증오해.”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비난의 방향을 돌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일루바타르도 모르고스도 이 고통에 책임이 없다면, 남는 것이 무엇일지는 상상만으로도 두려웠으니까.

그렇게 오르크들은 그의 눈빛을 두려워하는 법을 익혔다.

아르드갈렌 벌판 위로 그의 기치는 붉게 휘날렸고, 그의 기마대는 감히 앙그반드의 포위를 깨뜨리려 드는 적병을 백이면 백 들불처럼 휩쓸었다. 전투에 임하는 아에그노르는 마치 죽음과 춤을 추는 사람 같았다. 브레고르가, 또 그 아들이 그의 곁에서 말을 달리며 사냥을 이끌어도 아에그노르는 그들 친족의 안부는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형들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은 알았다. 사정을 모두 꿴 핀로드는 말할 것도 없었거니와, 앙그로드 역시 그에게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것쯤은 짐작하는 듯했으니까. 그리고 실상 아에그노르 자신조차 심란한 감정을 숨기려는 노력은 일말도 기울인 적 없었다. 어차피 무의미한 짓일 터였다. 대신 그는 검을 들었고, 오르크 떼와 타락한 짐승들을 베어 넘기는 데서 불길 같은 즐거움을 찾았다.

※ 아래 핀로드와 안드레스의 대화 중 대사는 아스라베스에서 일부 각색을 거쳐 가져왔습니다.

그 후 안드레스는 스승인 아다넬의 집에 오래 머물렀다. 그는 피나르핀 가문의 봉신이자 라드로스의 영주인 보로미르의 딸이었고, 아내가 되지 않으려거든 최소한 친족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아야 했다. 어쨌든 그가 결혼을 진정으로 원했다 한들 현자의 길은 매력적이었을 터였다. 나르고스론드의 요정왕은 종종 그를 방문했고 마라크와 할레스 일족의 장로들조차 그의 말에는 귀를 기울였다. 후회는 없었다.

없다고 여겼었다.

스물두 번째 여름으로부터 스물여섯 번의 겨울을 더 떠나보냈을 때, 핀로드 펠라군드는 그에게 죽음을 물었다. 토론은 격렬했고 종잡을 수 없었으며 완전히, 완벽하게 안드레스의 통제를 벗어났다.

“바람이 촛불을 꺼뜨릴 때 나방은 촛불을 연민합니까? 아다네스, 인간의 딸이여, 날카로운 불꽃 아이카나로는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그대를 위해 이제 그는 자기 일족의 어떤 신부도 택하지 않은 채 도르소니온의 언덕에서의 아침을 기억하며 종말까지 홀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북풍 속에서 너무도 이르게 그의 불꽃은 꺼질 터랍니다!”

그는 칼에 찔린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핀로드의 말은 절박하면서도 힘있었고, 당시의 안드레스야 알지 못할 일이었으나 그 목소리는 마이아와 대결할 만한 것이었었다. 하지만 핀로드는 잠시 격정을 추스리는 듯하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다. 안드레스에게는 세 겹의 고통이었다. 뒤늦은 실연과, 막막한 예언이 일으킨 절망과, 동생을 잃을 형을 향한 연민.

“엘다르의 삶과 사랑은 기억 속에 크게 머물고, 우리는 후회스러운 끝을 맺는 기억보다는 아름다울지언정 끝나지 않은 기억을 원한답니다. 이제 그는 아침 태양 아래 처음으로 보았던 그대의 모습을, 그리고 그 마지막 저녁, 그대 머리카락에 별 하나가 얽힌 채 아엘루인 호수에 비쳤던 반영(反影)을 기억할 겁니다. 북풍이 그의 불꽃의 밤을 가져올 때까지요. 그리고 그 후 만도스의 전당에서는, 영원히, 아르다의 종말이 올 때까지.”

“그럼 나는 무엇을 기억하게 될까요? 내가 떠날 때 나는 어떤 전당으로 향하겠습니까?”

안드레스는 양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손꿈치에 물기가 묻어났다.

“날카로운 불꽃의 기억마저 꺼질 어둠 속으로? 거절의 기억마저도요. 적어도 그것만큼은.”

핀로드는 한숨을 쉬고 일어섰다.

“그가 그대를 거부했다고 여기십니까? 적어도 그 생각은 치워 버리세요. 그럴 수 있다면 우리 만남이, 요정과 인간의 손끝이 어둠 속에서 최초로 맞닿았던 것이 완전히 헛되지만은 않았겠지요. 안녕히!”

방에 어둠이 내렸다. 그는 불빛 속에서 안드레스의 손을 잡았다. 핀로드의 살갗은 인간의 것이라고는 착각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으나 체온은 안드레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드레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 가나요? 답을 듣고 싶어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핀로드는 담담히 말했다. 온 세상을 향해 그의 의지를 선언하듯, 그야말로 요정의 군주다운 어조로.

“북쪽 멀리로요. 검과 포위망과 수비의 울타리로, 그리하여 밤이 오기 전 아직 한동안은 벨레리안드에서 강이 맑게 흐르고, 나뭇잎이 돋아나고, 새들이 둥지를 틀 수 있도록.”

“그도 거기 있을까요, 머리카락에는 바람이 깃든 찬란한 모습으로? 그에게 전해 주세요. 무모해지지 말라고, 필요한 것 이상의 위험을 찾아 나서지 말라고!”

“전해 주겠습니다. 하지만 소용은 없을 겁니다. 그는 전사이고, 안드레스, 분노의 영혼입니다. 그가 적에게 가하는 모든 공격에서 그는 오래전 그대에게 상처 입힌 적을 봅니다.”

그러나 이때 핀로드는 잠시 말을 멈추었고, 더는 안드레스를 ‘그대’라고 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아르다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지요. 당신이 어디로 가든 빛을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려 주세요. 내 형제를…… 그리고 나를.”

핀로드가 떠나고도 오랫동안, 안드레스는 화롯불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런 식의 말에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했던 걸까? 아에그노르, 사랑하는 아에그노르. 선택은 그들이 함께 내렸어야 마땅했으나 안드레스는 그러지 않은 그를 죄인으로 여길 수 없었다.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럴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던 탓으로. 한때 그는 젊었고 아에그노르의 불꽃을 바라보았으며, 이제 그는 늙었고 길을 잃었다.

어둠 속에서 최초로 맞닿은 손끝. 그 손을 붙잡아 심연을 건넜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희망을 가졌더라면?

그러나 선택할 기회는 안드레스에게 주어진 적 없었고, 그는 심연의 이편에 남았다. 안드레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정의 희망은 두 종류였으나 인간은 근거 없는 절대적인 희망, 오직 요정만의 희망인 에스텔은 알지 못했다. 그는 아다네스였으며 인간의 딸이었다. 그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그리하여 455년 어느 새벽, 베오르 일족의 여현자 안드레스 사엘린드는 도르소니온 고원의 남쪽 끝이 마침내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바라히르의 아내 에멜디르가 그의 팔뚝을 잡으며 침통히 말했다.

“엘다르도 영원한 것은 아니었네요.”

에멜디르는 요정의 부귀와 강성을 이야기한 것이었겠으나 안드레스는 요정의 불멸을 생각했다. 그는 에멜디르의 손을 풀어내 깍지껴 맞잡고 눈을 마주쳤다.

“여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세요, 에멜디르. 앙그반드의 포위가 무너졌으니 이곳은 이제 최전선입니다.”

“제 남편과 아들이 오지 않았어요! 그들을 두고 떠날 수는…….”

안드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오지 않을 겁니다. 아르다의 원 안에서 다시 바라히르와 베렌을 만나지는 못하리란 예감이 들어요. 하지만 에멜디르, 이곳에는 아직 당신이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남아있잖습니까.”

안색이 창백하기는 했으나, 에멜디르는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안드레스는 에멜디르의 손등을 토닥였다.

“자, 친구여, 그럼 가세요.”

“현자님은요?”

“나는 늙었고 당신들이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분명 웃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는데도 이상하게도 미소가 떠올랐다. 안드레스는 언덕 위의 영주관을, 나무와 돌로 지은 방벽을, 마을을 둘러싼 소나무 숲을 아울러 가리키며 손짓했다. 딸뻘의 여인을 겁주지 않으려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또 누군가는 머물러 불을 질러야지요.”

에멜디르는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현자님을 설득할 수는 없겠군요.”

“바로 보았어요, 에멜디르.”

“그렇다면 행운만이라도 빌어 드리겠습니다. 만도스가 당신께 자비를 베풀기를.”

그에게는 필요 없는 자비이겠지만, 안드레스는 굳이 그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사람들을 불러모으러 달려가는 에멜디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 손으로 귀 옆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손끝에 걸리는 가닥들은 하나같이 눈처럼 희었다. 새삼스레 깨닫게 될 만큼 기나긴 시간이었다.

보로미르가 피나르핀의 아들들에게 충성을 맹세했을 때 안드레스는 어린 소녀였었고, 그가 라드로스의 영주로 인정받았을 때는 어엿한 현자가, 오라버니 브레고르가 아이들을 낳고 다시 그 아이들이 혼인했을 때는 허리 굽은 노인이 다 되어 있었다. 모닥불 둘레로 춤을 추던 에멜디르와 바라히르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했다. 그보다 오래된 과거는 그만 흐려지고 말았다.

노쇠한 다리로는 오를 수 없는 산맥의 푸른빛, 돌아가지 못할 에스톨라드의 바람 소리, 어렴풋한 감흥으로만 남은 시와 노래와 아엘루인 호숫가의 어스름…… 모래알인 양 흩어지는 순간들.

그리고 그 앞에는 지금까지를 찰나로 여기게끔 할 기다림이 남아있었다.

바람이 촛불을 꺼뜨릴 때 나방은 촛불을 연민합니까? 그 물음의 답을 이제는 안다. 그가 내 대답을 들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한대도 진실이 달라지지는 않을 테다.

연민하지 않으나 사랑한다. 희망 없이, 기대 없이, 단 한 번의 아침을 위하여 영원을 바치는 각오로.

 

다고르 브라골라크의 화염 속에서 아에그노르는 육신을 버렸다. 그의 영혼은 아르다의 끝날까지 추억을 거닐 것이었다. 희망 없이, 기대 없이, 사랑 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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