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슬 이주 4000P 사건

rain

파라미르 × 에오윈 | 230710 포스타입

rhindon by 댜

포스타입

그해 여름은 무더웠다.

세차게 내리는 폭우조차 식히지 못하는 더위였다. 오히려 비는 한여름의 습한 대기가 품은 앙심처럼 쏟아부었고, 며칠을 내리 달구어졌던 땅은 기꺼이 그에 호응했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는 내내 진흙은 장화 밑창에 달라붙었다가 끔찍하게 끈적이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가 형체 모를 곤죽 속으로 녹아들었다. 빗물은 장화와 망토 자락을 뚫고 스며 무릎께를, 허벅지를 적시고는 뱀처럼 기어올랐다. 셔츠는 이미 땀과 비에 있는 대로 젖어 있었다. 곁눈에 빛이 번쩍였다. 곧이어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더니, 멍한 정적에 이어 서서히 빗소리가 솟아올랐다.

그러므로 이실리엔은 자랑스러워해 마땅했다. 곤도르의 그 어느 땅도 이렇게나 대단한 진창을 생성해내지는 못할 테니까.

언덕 정상에 올랐을 때 그는 더 이상 진흙과 자신을 구분할 수 없었다. 복면을 턱까지 끌어내린 채 숨을 몰아쉬고 있으려니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밀었고, 그는 가까스로 휘청이지 않고 중심을 잡았다. 짜증을 담아 돌아본 시선 끝에는 역시나 두건과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유격대원이 서 있었다.

“마블룽.”

그는 키와 어깨너비, 눈가의 주름으로 상대를 짐작했다. 마블룽은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말했다.

“어쩌다 책상물림이 다 되셨습니까? 대장.”

“자네들이 음모를 꾸몄지, 분명해. 그게 아니고선 하필 내가 순찰하는 날 날씨가 이 모양일 리 없어.”

“저희가 대장께요? 이실리엔이 아직 제 영주가 누군지 모르나 봅니다. 당장 체포할까요?”

파라미르는 장갑 낀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제대로 거절하지 않았다가는 그의 부하들이 언제 어린나무 한 그루라도 밧줄로 꽁꽁 묶어 올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마블룽은 작게 키득거리며 허리춤의 물통을 꺼내 건넸다.

“됐어. 그냥 입 벌리고 고개나 젖히면 되겠는걸.”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그러지 않으실 거면 복면은 다시 쓰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의 복면은 차라리 걸레라고 하는 게 정확할 만큼 흠뻑 젖은 채였다. 파라미르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마블룽은 이번에는 말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마블룽이 가리킨 곳에서는 그들이 이끌고 온 대원들 몇몇이 무리를 지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 중 몇은 파라미르와 함께 전쟁을 헤쳐온 경력자들이었고 몇은 전쟁 이후에야 어른이 된 젊은 신병들이었지만, 마블룽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파라미르에게는 그들 앞에서 모범을 보여야 할 책임이 있었다. 때로 그건 아주 사소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 그리고 파라미르는 마블룽이 자신과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대원들이 그가 맨 얼굴을 드러낸 것을 보지 못하도록.

오랜 규율의 문제였다.

“몇 년 전 일입니다만.”

마블룽이 그답지 않게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동안 파라미르는 복면을 올려 썼다. 후덥지근한 공기마저 젖은 천에 가로막히자 곧바로 목이 졸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본능에 따라 복면을 뜯어내는 대신 파라미르는 두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알아. 담로드가 멋대로 위장을 바꿨을 적 말이지.”

“동참한 대원들 모두 엄벌하셨잖습니까.”

“알아. 아네.”

복면이 입에 달라붙었다. 파라미르는 후 깊게 숨을 내쉬며 허리를 세웠다.

빗물에도 불구하고 언덕 위에서의 시야는 상당히 먼 곳까지 뻗어나갔다. 잿빛 먹구름 아래로 연둣빛 벌판이 울퉁불퉁하게 굴러나갔다. 흉터처럼 찢어지고 벌어진 검은 흙은 오르크의 사체를 태운 자리였다. 듬성듬성하게나마 풀과 덤불이 다시 자라난 곳들에서의 전투도 파라미르는 여럿 기억하고 있었다. 병사들 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이곳에서 한때 그였던 소년을 죽였다. 그 자리를 차지한 남자는 눈을 가리고도 헨네스 안눈의 은신처를 찾아낼 수 있었고 지금보다 배는 거센 폭풍우 속에서도 적을 범람하는 계곡으로 밀어 넣을 수 있었다. 그의 손은 검고 붉은 피로 범벅이었고 발디딘 자리에는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이실리엔에는 악의 없는 비가 내렸다.

빗방울은 마셔도 좋을 만큼 깨끗했다. 먹구름을 뚫고 비치는 햇살은 은빛이었다. 언젠가는 검은 흙 위로 싹이 트고 나무가 자라날 것이다.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높은 파도에 쓸려갈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실리엔은 자랑스러워해 마땅했다. 곤도르의 어느 땅도 이곳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전시가 아니야.”

전쟁은 끝났고 예전의 그들이 거의 종교적으로까지 따르던 규칙들은 어느새 지나간 시대의 유산이 되었다. 생각 없는 몸짓 하나에 화살이 날아들던 시절은 더는 그들 몫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그칠 빗줄기 속에서 곤도르의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블룽은 순순히 수긍했다.

“아니죠.”

파라미르는 변명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그보다 강렬하게는, 그를 신뢰하는 동료 앞에서 솔직해지고 싶다는 욕구를.

“게다가 나는……. 곧 그만둘 걸세. 지금은 아니지만, 곧. 아마도 머잖아…….”

이번에는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만약 마블룽이 이유를 물었다면 파라미르는 자신이 어떤 핑계를 댔을지 알 수 없었다. 예전처럼 젊지 않아서 (그는 아직 형이 죽었던 나이보다 어렸다),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아서 (치유의 집 원장이 들었다가는 경을 칠 소리였다), 혹은 섭정의 직무에 충실하고 싶어서. 그도 아니라면, 자신이 더는 유격대장의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 되지 못해서. 전부 나쁘지 않은 이유겠지만, 그런데도 마블룽이 다시 한번 묻는다면, 그에게서 받아 마땅한 진실을 요청한다면…… 그는.

나는 이제 내가 사랑하는 것을 위해 죽어야 한다고 믿지 않아.

두서없는 생각이었다. 파라미르는 정제되지 않은 의견을 내놓는 데 익숙지 않았다. 아버지의 훈육 탓도 없지는 않았겠으나 대체로는 그 스스로부터 자신의 영리함에 의존하기 때문이었다. 정해진 문제를 두고 몇 달씩 고민하는 일은 그의 짧지 않은 일생을 통틀어서도 퍽 드물었다.

하지만 무언가 바뀌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었는데, 예컨대 그는 더는 곤도르를 위해 죽는 것만이 그의 숙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상 난생 처음으로 그는 전사 외의 죽음을 고려하게 되었고, 죽음이 아닌 방식의 헌신을 요구받았으며, 이른 새벽 잠에서 깨어남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침묵 끝에 마블룽은 마치 파라미르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그게 어쩐지 위안이 되기에, 문득 파라미르는 비가 내리기를 다행으로 여겼다.


이실리엔의 대공이 머무는 저택은 아직 이름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서부의 왕은 그곳을 ‘최초의 아늑한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건 어찌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는데, 하라드와 룬, 혹은 그보다 더 동쪽으로부터 오는 손님이 처음 겪는 곤도르의 환대는 이실리엔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에뮌 아르넨 꼭대기에 자리한 저택 자체는 엘렛사르가 염두에 두었을 곳보다는 곤도르 영토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오래된 홀들을 더 닮아 있었다 – 적어도 겉보기에는.

어쨌든 이실리엔 사람들은 그곳을 그저 영주관이라고 불렀다. 그들 대다수는 파라미르가 저택의 이름을 고르는 데 불합리한 정도의 시간이 소모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파라미르가 옛 폐허를 넘어 저택 현관에 다다랐을 때쯤에서야 비가 멎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문턱을 넘은 그는 시종이 가져다준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다음 망토와 장화를 벗었다. 젖은 장갑과 양말까지 망토와 한데 뭉쳐 넘기자 비로소 사람의 형체를 되찾는 기분이었다. 파라미르는 내친김에 문간에 선 채로 가죽 흉갑의 고정끈을 풀며 물었다.

“백색부대는? 복귀했나?”

“조금 전 돌아왔습니다.”

시종은 충실하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샐쭉 웃으며 덧붙였다.

“에오윈 님은 욕실에 계시고요.”

파라미르는 이 맹랑한 녀석을 꾸중해야 할지 갈등하다가, 에오윈을 보러 가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맨발로 안뜰을 가로지르고 복도를 지나 욕실로 향하는 동안 그는 습한 온기가 그림자처럼 발치를 따르다가 이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바다에 면한 돌 암로스나 온통 흰 돌뿐인 미나스 티리스보다 이실리엔의 여름이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일정 부분 안두인 대하로부터 부는 더운 바람이 원흉이었는데, 이 날 역시 비가 그친 뒤에도 기온은 떨어지지 않아 사람을 괴롭게 했다. 집 안에서까지 푹푹 찌는 더위에 허우적거리고 싶은 이가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러나 해가 저물고 나면 풍향이 바뀌었고 저택의 기둥 사이사이로도 서늘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왕이 그의 집에 붙여준 별명을 새삼스레 떠올린 것도 그래서였다.

아늑하다고. 완성된 지 채 한 해가 되지 않은 이곳이, 이제야 그 첫 여름을 겪는 이곳이. 흰 돌벽에 녹색과 금색의 태피스트리가 걸리고 어린 사과나무 사이로 위풍당당한 군마가 걷는 이곳이. 그는 은빛 화병에 한가득 꽂힌 여름의 잔꽃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죽은 동료들을 가매장한 자리에 며칠 후 같은 꽃이 피었던 것을 본 적 있었다. 얼마 전 그의 아내는 이 꽃의 이름을 알아야겠다며 밤새 도록을 뒤적였었다. 에오윈에게는 곤도르의 기름을 물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었고 그는 에오윈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에 귀기울이다 까무룩 잠드는 것이 좋아서…….

아늑하다는 말로는 그가 얻은 안식을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서른 해 넘는 기억을 모두 쏟아놓는대도 이런 나날은 한 줌이 채 되지 않을 텐데.

바짓단에서 떨어진 흙물이 작은 웅덩이를 만들 때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남은 거리는 짧았고 그는 서둘렀다. 서두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그를 재촉했다. 욕실 문앞에 이르렀을 때 그는 어느새 들판을 내달리다 돌아온 소년처럼 가쁘게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날은 더웠고 그는 빗물에 절어 있었고 내일이면 복도 곳곳에 말라붙었을 진흙에 대한 책임을 져야겠지만, 그렇대도 상관없었다. 이실리엔의 백색부대와 함께 말 달리다 돌아온 숙녀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는 삐걱이는 문 너머 들어서며 등 뒤로 문을 닫았고,

그리고 에오윈은 나무 욕조에 길게 몸을 뉘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젖은 금발이 무겁게 흘러내렸다. 유리 덮개를 씌운 등잔에서 비쳐나온 불빛이 머리카락 가닥가닥에 바랜 황동 같은 광택을 입히고 창백한 피부를 물들였다. 에오윈은 욕조 가장자리에 왼팔을 걸치고 있었는데 뼈가 부러졌던 자리에는 물을 잔뜩 먹은 수건이 덮여 있었고 손가락에는 반지 하나가 홀로 반짝거렸다. 검지와 중지가 들리지 않는 노래에 박자를 맞추듯 까딱이고 있기에 잠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뿐, 표정은 한없이 평온했다. 긴장도 두려움도 없이 완전히 누그러진 얼굴에 연한 붉은빛이 달떠 감돌았다.

김 서린 공기가 뺨에 닿아 파라미르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왜 그렇게 울상이에요?”

에오윈은 눈도 뜨지 않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냐 묻는 대신 파라미르는 욕조 가장자리를 짚고 몸을 숙였다. 입술에 닿은 에오윈의 이마는 적당히 따끈하고 부드러웠다. 자연스럽게 그의 턱끝을 받치는 손길이 있었다. 그는 둥근 귓바퀴로 입을 옮겨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말씀드린다면 화를 내실 겁니다.”

“말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정당하게 분노할 기회를 잃게 됩니까?”

“당신이 내 것임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못이기는 척 고백하자 에오윈은 비로소 그와 눈을 마주쳤다. 회색 눈동자는 그날 종일 그의 머리 위로 드리워 있던 먹구름을 연상시켰다.

“불쾌하네요.”

에오윈은 조용히 말했다. 물방울을 뚝뚝 떨구는 흰 손이 그의 뺨을 쓰다듬고 목을 따라 내려갔다. 그는 에오윈이 그의 옷깃을 쥐고 다시 고쳐잡도록 두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곤도르의 법률은 그들을 서로에게 귀속된 존재로 간주했다. 그 시각에는 편협한 면이 있어, 미나스 티리스의 조신들이 수군거리는 바만 들어서는 섭정인 그가 아내를 맞은 것인지 야생마를 길들인 것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곤도르에서 평생을 살아왔고 때로 오직 그 양육에 의거한 전율을 느꼈다. 로한의 백색숙녀가 그의 소유이며 그가 에오윈의 소유라는 데서 오는 어떤 짜릿한 기쁨을.

로한의 전통은 – 로한은.

이국의 전장에서 죽음을 외치던 전사의 삶을 그가 얻었다. 마땅히 돌려주어야 할 값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에 듭니다. 이리 와요, 파라미르.”

거부할 기회가 허락되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균형을 잃은 파라미르는 욕조 안으로 넘어졌고, 그를 당겨 넘어뜨린 범인은 소리 없이 웃으며 두 팔로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빗물과 진흙과 풀잎 부스러기가 목욕물에 퍼지는 것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