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ilor's delight
섭정가 | 211103 포스타입 (합작 참여 글)
여름이 끝나가는 도시에는 더위가 채 마르지 않은 땀방울처럼 남아있었다.
핀두일라스는 긴 소매를 접어 올리며 난간에 두 팔을 올렸다. 이맘때의 미나스 티리스는 거대한 해골 같았고 순백의 묘비 같았다. 바람에 해어지고 파도에 쓸려 흰 나뭇결밖에 남지 않은 난파선 같았다. 허공을 잠식하는 열기가 단지 태양의 것만은 아니리라고, 이따금 핀두일라스는 상상하고는 했다.
일곱 번째 원의 가장자리로부터는 그림자 산맥 너머 붉은 어스름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황혼이었다. 황혼이 아니었다. 서녘 인간들의 황혼이었다.
“핀두일라스.”
“각하.”
익숙한 무게가 어깨를 눌렀다. 데네소르는 그를 등 뒤에서 끌어안은 채 드러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핀두일라스는 자연스레 데네소르의 품에 몸을 기대고는 중얼거렸다. 언제 오셨어요?
저녁이라고는 하나 계절이 계절인지라 기온은 오래 붙어 서 있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일곱 번째 원에는 탑의 경비병들이 순찰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데네소르는 경비병들을 부조(浮彫)의 일종으로 생각할지 몰라도, 핀두일라스는 투구 아래 가려진 눈들을 좀처럼 잊지 못했다.
그의 마음을 읽어낸 듯, 데네소르는 가볍게 웃더니 반 발짝 뒤로 물러났다. 신사적인 행위에는 보상이 따름이 합당했다. 핀두일라스는 못 이기는 척 몸을 돌려 데네소르의 목에 팔을 둘렀다. 완전히 끌어안은 것은 아니되 춤을 추려 붙어 선 것처럼 친밀한 자세였다. 데네소르의 미소가 짙어졌다.
“회의가 일찍 끝나더군요, 부인.”
“어머? 말씀은 바로 하셔야지요. 각하께서 일찍 끝내신 것이 아니고요?”
뺨을 감싸 쥐는 손은 굳은살로 거칠었지만, 핀두일라스는 개의치 않았다. 둘뿐이었다면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을 텐데……. 대신인 양 데네소르는 엄지로 조심스레 그의 눈 밑을 쓸었다. 우셨느냐는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데네소르 식의 예의였다.
“부인께서 기다리실 생각을 하니, 좀처럼 머저리들을 참아줄 수 없어서 말입니다.”
“데네소르.”
“나무라지 마세요, 핀두일라스.”
그렇다면 핀두일라스 식의 예의는 데네소르의 말을 겉뜻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이었다. 일부러 한숨을 쉬며 데네소르의 손을 붙잡은 핀두일라스는 손수건을 접어 개키듯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각하의 아들들도 각하를 기다렸답니다. 함께 보러 가시겠어요?”
미련이 남는 것처럼 핀두일라스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본 후에야 데네소르는 그를 놓아주었다. 내민 팔에 손을 얹으며 핀두일라스는 데네소르와 눈을 마주쳤다. 돌 암로스 대공가 사람들의 눈동자는 폭풍 치는 바다 같은 잿빛이었다. 그러나 데네소르는, 마르딜 보론웨의 후손들 곧 에뮌 아르넨의 후린 가문 사람들의 눈은—뼛가루. 대리석. 마모된 긍지.
핀두일라스는 눈길을 돌렸다. 동쪽으로는 여전히 무엇인가 붉게 저물고 있었다.
1.
왕의 서재는 집무실과는 달리 온갖 곳에 책이며 서류가 흐트러져 너저분했고, 아라고른은 언젠가 시간이 남는다면 분명 그 점을 개선할 생각이기는 했지만, 그의 젊은 섭정이 문턱을 넘을 때마다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는 것은 좀처럼 포기하기 힘든 구경거리였다.
“폐하.”
파라미르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아라고른은 책장에 기대 선 채로 한 손을 흔들었다.
“파라미르! 날 보자고 청했다지?”
“여쭐 것이 있었습니다, 폐하.”
일 년 전이었다면 파라미르는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대신 좀 더 가벼운 화제로 말문을 연다든가, 그를 왕 앞으로 데려올 만한 타당한 핑계를 내놓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파라미르는 아라고른에게라면 자연스레 자신의 본론부터 꺼내고는 했고, 아라고른은 아직 그것이 관계의 발전을 증명하는지, 아니면 파라미르의 예리한 감각을 증명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 정답이든, 아라고른으로서는 곤도르의 귀족 중 파라미르보다 편한 대화 상대가 없다는 사실만은 부인하기 힘들었다.
“무엇을 물으려는 건가?”
아라고른은 훑어보던 책을 덮고 난롯가의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파라미르는 먼저 허락을 구하지 않은 채 그와 마주 앉았는데, 이것 역시 이전과는 달라진 점이었다.
북왕국의 순찰자와 곤도르 정규군의 유격대원 사이에는 여우와 승냥이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파라미르의 소리 없는 걸음걸이와 기민한 움직임은 종종 아라고른의 옛 동료들을 연상시켰다. 공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신다린에서 온 단어를 말할 때면 유독 정확해지는 발음 역시 북부 두네다인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오후의 회의에서 임라힐 공이 벨팔라스와 레벤닌 바닷가에서 도는 소문을 이야기했을 때, 폐하께서는 퍽 놀란 듯 보이셨었습니다.”
파라미르는 아라고른에게 부정의 기회를 주려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라고른은 굳이 쓸데없는 변명에 숨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파라미르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곧 스스로를 추스르셨지요. 폐하의 뜻을 지레짐작하는 것이 제 본분은 아닙니다만, 오늘 폐하께서는 마치 소문의 진상을 바로 깨달았으며 또한 그 진상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셨습니다. 아니 그러합니까?”
“파라미르.”
“예?”
아라고른은 한숨을 쉬었다.
“자네가 꽤 걸리적거린다는 말을 내가 했던가?”
“가장 최근에 말씀하셨던 것은 에루한탈레 직전으로 기억합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한 파라미르는 뭘 어쩌시겠냐는 듯이 아라고른과 눈을 마주쳤다. 아라고른은 섭정의 퀘냐 발음을 지적하고픈 충동을 왕답게 눌러 삼켰다.
“자네는 내가 곤도르와 아르노르의 여러 비밀을 지키고 있음을 알고, 게다가 자네는 사소한 일에 참견하는 성미가 아니지. 굳이 이 일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있는가?”
“바람이.”
파라미르는 그답지 않게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기는 했지만 딱히 긴장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가 아라고른의 반응을 손쉽게 해석했듯이 아라고른도 그를 큰 어려움 없이 읽어낼 수 있었다. 만약 그에게서 희망이나 걱정의 낌새가 엿보였더라면 아라고른은 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고 서재에서 내보냈을 것이었다.
그러나 파라미르는 호기심과 예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라고른은 이 문제에 있어서는 후자를 이유로 전자를 막고 싶지 않았다.
“보로미르의 장례를 치를 때…….”
파라미르는 신중한 눈빛으로 아라고른의 얼굴을 살폈다. 아라고른은 양손에 입가를 묻었다.
“나와 레골라스는 서풍과 남풍과 북풍에게 보로미르의 소식을 물었었네.”
자리에서 일어설 때도 파라미르는 왕의 허락을 구하지는 않았다. 의자 다리가 조용히 끌리는 소리에 눈을 들자 아라고른은 파라미르가 오른손을 심장 위에 댄 채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파라미르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2.
“마음에 드시오?”
젊은 섭정은 정중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이 아름다움을 다 형용하지 못할 것이 안타까울 따름일 정도로요.”
“글쎄, 둘째자손 가운데도 뛰어난 시인은 언제나 있었소.”
아르웬은 섭정의 곁을 지나쳐 다음 태피스트리를 향해 걸어갔다. 비단신의 밑창은 대리석 바닥에 쓸려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손끝의 기예는 언제나처럼 온전히 그의 것이었으나, 나뭇가지 하나 꺾지 않고 숲속을 달리는 요정의 몸놀림은 이제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미나스 티리스의 백색 성채 곳곳에 푸른 정원이 피어났듯 왕궁의 흰 벽에도 점차 색이 입혀지고 있었다. 창틀이나 구석 탁자에 화병이 놓이는 것도 이제는 드문 일이 아니었고, 연회라도 열릴라치면 회랑과 홀에는 염색한 천이 드리워졌다. 아르웬의 직물도 그 일환이었다.
후회는 없어도 아쉬움은 잔존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은 이로써 충분히 상쇄되고도 남았다.
그가 발을 딛는 곳에는 발자국이 새겨졌다.
“왕께서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에 다다르셨을 때 날리신 깃발 역시 폐하의 솜씨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느새 그의 한 걸음 뒤로 다가온 섭정이 말했다.
“그렇소. 오래…… 오래 공을 들였지.”
“수를 놓으시는 데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리고 아니오.”
“반지의 사자가 이르기를 요정들은 ‘예’와 ‘아니오’를 동시에 말한다더군요.”
이 태피스트리에 아르웬이 담은 것은 회색항구에서 바라본 황혼의 풍경이었다. 반쯤 물에 잠긴 태양에 한 손을 얹은 아르웬은 인간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해 보았다.
“수를 놓기도 까다로웠소. 그러나 수십 번 실을 뽑아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끔 하는 것은 문양의 복잡함이 아니니.”
파라미르는 잠시 이 말을 곱씹는 듯하다가 물었다.
“문양이 없다면, 그래도 오래 걸릴까요?”
평소와는 달리 퍽 허물없는 질문에 아르웬이 의아해할 틈도 없이, 섭정은 제풀에 멋쩍은 미소를 짓더니 태피스트리를 향해 눈짓했다.
“꼭 저 바닷가에 직접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제 모친은 돌 암로스 대공가의 딸이었고 저는 곤도르의 모든 해변을 제 고향처럼 알고 있는데, 이곳은 퍽 낯설어요. 북부의 바다입니까?”
“곧은 길 너머에는 발리노르가 있소.”
아르웬은 동문서답으로 들릴 법도 한 말을 내놓고는 손을 떼었다. 섭정은 존경과 연민과 감탄이 뒤섞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웬은 문득 자신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에스텔이 말하기를 그대 마음에 걸릴 만한 일이 있었다는군.”
“그래서 저를 부르신 겁니까?”
그 물음 밑에는 왕과 왕비는 어떤 터무니없는 이유로 섭정을 소환해도 무방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아르웬은 조금 더 거리낌 없이 이어지는 말을 흘려냈다.
“파라미르. 서녘으로 떠나간 사람은 쫓는 것이 아니오.”
“태양에게 저물지 않을 것을 명할 수 있습니까? 시간에게 흐르지 않을 것을 청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떠난 이에게 얽매이는 것도 그처럼 불가피합니다, 폐하.”
하지만 파라미르는 그를 마주보며 웃었다.
“노력은 해 보지요. 노력이야 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젊은 섭정의 정중함과 연민과 슬픔을 이유로 아르웬 운도미엘은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의 길은 인간의 길이었고, 인간의 길은 굽어져 어디로도 향하지 않을지언정 결국에는 발자국 하나씩이나마 나아가는 길이었으므로—
“내가 도울 일이 있겠소?”
3.
“벨팔라스 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고 하셨었죠?”
임라힐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조카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소문의 그 바람 말입니다. 말소리가 들린다는…….”
“그래.”
그리고 임라힐은 잠시 망설인 끝에 덧붙였다.
“벨팔라스 남부와 레벤닌에서만 도는 소문이라더구나. 적어도 돌 암로스에서는 그런 바람을 마주했다는 사람이 나왔던 적은 없어.”
“하론도르에서는요?”
이실리엔 남쪽, 지금은 명목상으로만 곤도르의 영토인 사막 지대의 이름이 조카의 입에 오르자 임라힐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하론도르는 버려진 땅이었다. 전쟁이 끝난 요즘이야 종종 하라드 대로를 따라 하론도르를 오가는 이들이 있다지만, 제정신이고서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해변을 얼쩡거릴 사람이 많을 리가.
조금 더 정제된 대답을 들려주자 파라미르는 실망스러운 소식을 들었을 때의 버릇대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군요.”
“직접 조사할 생각은 아니지? 파라미르, 이건 그저 어부의 아내들이 떠드는 이야기일 뿐이야.”
“그래도 그 정도라면 안두인 하구 근처인 셈이지.”
파라미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임라힐은 순간 이 아이가 어렸을 적 돌 암로스의 장서관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던 모습을 떠올리고 말았다. 파라미르는 늘 기묘한 요정 이야기를 사랑하고는 했고, 사람의 말을 하는 바닷바람이라면 파라미르의 흥미를 단번에 잡아채기에는 제격이었다. 그리고 파라미르에게는 겉보기와는 달리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었으니…….
“파라미르.”
“에오윈이 함께 간다면…….”
“파라미르!”
조카는 문득 찌푸린 잿빛 눈을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뼛가루 같은 눈이야, 라고 핀두일라스는 언젠가 그에게 털어놓았었다. 데네소르와 사랑에 빠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 그런 호의적이지 않은 묘사는 퍽 부적절하기 마련이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미나스 티리스는 색이 바랜 관 같고 섭정가 사람들의 눈은 타고 남은 재, 긁어 모은 뼛가루 같아, 임라힐. 하지만 난 그들을 사랑해. 해가 어서 져 버렸으면 좋겠어.
임라힐은 단 몇 분이었을망정 자신이 조카의 시신을 그 아비에게 가져가는 중이라고 믿은 적이 있었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상념을 꿰뚫고 파라미르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임라힐은 퍼뜩 정신이 들어 파라미르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파라미르는 입술을 붙인 채로 씩 웃었다.
“외숙, 바람이 곤도르의 안부를 묻는다면, 곤도르는 마땅히 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무언가 놓친 것이 분명했다.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하지만 파라미르는 더는 서가 사이에 숨은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파라미르의 자신감에는 기이할 정도로 간편하게 사람을 안심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아무튼 괜찮을 것이라고, 더는 염려할 것 없다고.
임라힐은 망연히 조카의 뒷모습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4.
안두인 강변을 따라 말을 달리는 내내 파라미르의 기분은 활기찼다가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를 반복했다. 이실리엔의 남동쪽 끝, 포로스 강이 안두인에 합류하는 곳에서 강을 건너 안두인 하구의 삼각지 중 하나에 들어선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파라미르와 한 침실을 쓰는 에오윈은 그 어떤 살아 있는 사람보다 더 파라미르의 변덕에 익숙했지만, 낮에는 쉼 없이 말을 타고 밤에는 덤불 틈에서 잠드는 여정을 시작한 지 엿새가 지나자 조금은 그에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파라미르가 승마에 익숙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불쌍한 말을 구해 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으니까.
“파라미르!”
난데없이 속도를 높인 파라미르를 따라 말에 박차를 가하며 에오윈은 내심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핀잔을 삼켰다. 파라미르는 위험하게도 어깨 너머로 그를 돌아보더니 즐거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곧 해가 질 겁니다, 에오윈!”
“아직 두어 시간은 남았잖아요?”
“그래요, 빠듯할 겁니다!”
에오윈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삶의 절반 가까이를 이실리엔에 쏟은 주제에 파라미르는 곤도르 전역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뚫고 있었고, 그에 유격대원의 기량을 더하면 파라미르의 예측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파라미르가 염두에 둔 목적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에오윈은 공기 중의 짠 내 덕분에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엿새는 미나스 티리스로부터 바닷가까지 달려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와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에오윈—그때 에오윈은 이미 파라미르가 무엇을 위해 떠나려 하는지 넘겨짚었었고, 어쨌든 그는 세오덴 왕의 장례식을, 에도라스의 궁정에 선 파라미르의 모습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거절은 상상치도 못할 일이었다.
최대한 가볍게 여장을 꾸린 파라미르가 마지막으로 모포로 싼 꾸러미 하나를 안장 뒤에 묶었을 때도, 그 이후로 그의 감정이 내내 널을 뛰다 못해 엉망으로 뒤엉켰을 때도, 모닥불 불빛을 받은 그의 얼굴에 갈퀴같이 찢어진 슬픔이 선명했을 때마저도 에오윈은 자신의 짐작을 확인하려 들지는 않았었다.
지난 며칠간 그랬듯 그들은 지는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달려갔다. 이날 저녁의 구름은 그들 편이 아니었고, 에오윈은 이따금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거나 눈을 찡그려야 했지만 파라미르는 마치 빛의 근원이 사막 가운데 샘인 양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어느새 매섭게 변한 바람이 뺨을 할퀴기 시작하고서도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시야 끝에 수평선이 떠오르고 나서야 파라미르는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삼각지의 모서리 하나가 될 법한 곳, 한쪽으로는 강물이 달음질치고 그 옆으로는 파도가 밀려오는 지점에 낮은 언덕이 솟아 있었다. 파라미르는 언덕 발치에 말을 세우고는 종일 말을 탄 사람답지 않게 날렵히 뛰어내렸다. 에오윈이 땅에 발을 디뎠을 때 그는 이미 말 등에서 회수한 꾸러미를 옆구리에 낀 채 언덕을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기다리라거나, 함께 가자는 식의 말은 소용없을 터였다. 에오윈은 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서둘렀다. 파라미르가 내팽개친 모포는 공처럼 구겨진 채 언덕 비탈을 따라 굴러 내려갔고, 에오윈은 모포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것을 피한답시고 또 몇 초를 허비해야 했다. 젠장맞을 바람은 걸음걸음마다 에오윈을 뒤로 넘어뜨리려 안간힘을 쓰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에오윈이 파라미르를 따라잡자 파라미르는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사(流砂)가 쌓여 생겨난 언덕에는 꼭대기랄 것이 없었지만, 그들은 나란히 대여섯 걸음을 더 걸은 다음 동시에 멈춰 섰다.
파라미르는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형님!”
대하는 은빛 창날처럼 흘러가고 파라미르의 손에 쥐인 것은 흰 천이었다. 바다, 먼 바다로부터 불어온 바람에 천은 속절없이 펼쳐졌다. 망토 정도 크기이리라 짐작했던 것은 그 두 배, 아니 세 배로, 폭풍 속의 돛처럼 세차게 펄럭거렸다. 에오윈은 그제야 파라미르가 그토록 고이 가져온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섭정의 무늬 없는 백색 기치가 파라미르의 손을 깃대 삼아 휘날리고 있었다.
“형님, 곤도르는—”
바닷바람에 집어 삼켜진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영영 파라미르와 서풍 사이의 비밀로 남겠지만, 에오윈은 파라미르의 표정만으로 그가 전하려는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듯했다.
이마와 콧대와 인중과 턱으로 떨어지는 선은 대리석을 깎아 만든 것만 같았다. 지는 햇빛을 받아 곤도르인 특유의 회색 눈은 숨길 수 없는 긍지로 빛나고 있었다.
파라미르는 이내 예의 그 고집스러운 일자로 입을 꾹 다물었다.
마른 풀이 버석이는 언덕 위에서 곤도르 최후의 통치 섭정은 기치를 잡은 손을 놓았다. 장궁의 시위를 풀려 낸 듯, 연붉은 하늘에 잠시 멈춰 있던 손은 곧이어 천천히 몸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람을 받은 천은 허공 높이, 성벽만큼, 탑만큼 드높이 떠올랐다.
파라미르의 시선은 줄곧 수평선의 노을을 향했다. 그러나 에오윈에게는 그럴 만한 자제심이 없었다. 그의 눈길 끝에서 흰 천은 그 크기답지 않은 우아함으로 정점에 다다라 한순간 완전히, 구김 하나 없이 펼쳐졌다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낙하를 시작했다. 행여나 맨땅에 떨어질까 염려가 솟았던 것이 무색하게 기치는 한 번 난류에 휩쓸려 손쉽게도 강물 위로 내려앉았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이곳에서 대하의 너비는 아득했고 그에 비하면 유속은 한없이 느렸으나, 반쯤 물에 잠긴 기치가 그들이 선 자리 옆으로 지나가는 데는 눈 한 번 깜짝할 사이도 걸리지 않았다. 에오윈은 점차 물을 먹어가는 천에서 고개를 돌려 파라미르를 바라보았다.
에오윈, 하고 그가 부르자 거셌던 바람은 연극처럼 잠잠해졌다. 에오윈은 천천히 파라미르의 곁으로 다가가 한 손을 내밀었다. 파라미르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마주 손을 뻗어 깍지를 꼈다.
“우린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파라미르는 몸을 숙여 그에게 입을 맞추었고, 저무는 시대의 빛살은 그들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헝클고 지나갔다.
Red sky at night, sailor's delight. Red sky in morning, sailors take warning.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