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리프 이주 0P 사건

our plain duty

파라미르 × 에오윈 | 210512 포스타입

rhindon by 댜

하지만 그분이 조금 이기적이라곤 생각지 않나요?

“미안합니다.”

“무엇이요?”

에오윈은 쾅 방문을 젖혔다. 빈 방이었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미나스 티리스의 인구는 예전 같지 않았으며, 걷지도 못할 환자들이 아니라면 대부분 모란논을 향해 떠나 버렸기에. 에오윈이 발 딛는 곳마다 피어오르는 먼지를 바라보던 파라미르는 결국 그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에오윈은 흰 천을 덮어씌운 침대의 머리맡에 주저앉았고, 파라미르는 침대 발치에 몸을 걸쳤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내 도시에 있다는 것이.”

“거창하게 말씀하지 마세요, 성년도 안 된 어린아이였는걸.”

“그러나 당신께는 상처가 되었잖습니까?”

에오윈은 아랫입술이 하얗게 핏기를 잃도록 입을 다물었다. 안색이 확연히 좋지 않았다. 파라미르는 조금 전 그들의 귓가를 스쳤던 말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분이 조금 이기적이라곤 생각지 않나요? 그가 나서기도 전에 에오윈은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고, 파라미르는 그를 뒤쫓는 것이 누군지도 모를 질문자를 채근하는 것보다는 중요하리라 판단했었다. 그가 옳았었을까?

상처라, 중얼거리고서 로한의 백색숙녀는 실소에 가까운 웃음소리를 냈다.

아직 그들은 원장의 보호 하에 놓인 병자 둘일 뿐이었다. 에오윈은 저 밖 잔디밭 위에 앉은 것처럼 허리를 뒤로 기댄 채 양손을 몸 아래 짚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을 금빛 머리가 감싸고 흘러내렸다. 그나마 날씨가 좋은 아침이었었다, 난데없이 이런 상황으로 치달으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던. 에오윈을 묵묵히 지켜보며 파라미르는 이내 정적이 압박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어째서, 어째서 에오윈에게라면 자신이 내심 뿌듯이 여기던 언변이 말라 버린 우물처럼 시드는 것인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에오윈.”

“맞아요, 이기적이죠.”

“에오윈! 당신이 정말로 이기적이었더라면 당신은 로히림과 함께 전장으로 달려오는 대신 검산오름에 남아있었을 겁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보호받았을 테니까요.”

“그건 곤도르인의 생각인가요? 우리는 영예로운 죽음을 구차히 이어지는 삶보다 값지게 여깁니다.”

에오윈, 다시 한번 부르고서 파라미르는 입을 다물었다. 에오윈은 한 손을 들어 입가를 문질렀다. 수많은 의문 속에서 단 하나만이 파라미르의 마음속에서 문장의 형태를 취했지만, 그는 감히 그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왜 이리 상심하셨습니까? 그는 아직 에오윈이 그런 직설적인 물음에 어찌 반응할지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왕녀를 잘 알지는 못했고, 신중함이 그의 말문을 막았다. 그러나 에오윈은 그의 뜻을 느꼈다는 듯 홱 고개를 돌리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바는 그런 게 아니에요.”

파라미르가 눈을 깜박이는 사이 에오윈은 말을 이었다.

“검산오름에 남았더라도 난 죽었을 거예요. 난 죽음의 방식을 택했을 뿐이고, 그건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게 비난받을 짓인가요?”

“죽었으리라고요? 에오윈—!”

“그래요! 검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절망에 의해서요.”

침대 틀이 삐걱거렸다. 파라미르는 무의식적으로 에오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기라도 한다면 그가 무언가 해낼 수 있을 것처럼.

“당신이 절망 탓에 죽을 만큼 약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에오윈의 시선이 힐끗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그를 응시했고, 파라미르는 거두어들인 손을 가만히 무릎 위에 얹었다. 에오윈은 처음에는 조용히, 그러나 갈수록 거칠어지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뇨, 당신은 틀렸어요. 절망에 죽는 사내는 약했던 것일지 모르죠. 하지만 여인에 한해서라면 절망은 강한 자일수록 빠르게 죽입니다. 내 어머니를—내 어머니를 죽인 건 병이 맞았어요, 그리고 또 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에겐 검이 주어진 적 없어요, 누구도 세오드윈에게 창과 방패를 쥐어 주고는 이것들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해 주지 않았었죠.

“손발이 묶였을 때 가장 먼저 기력이 다하는 건 가장 자유를 갈구하는 사람이에요. 창살에 부딪히고 또 부딪히다 끝내 새장 바닥에 떨어져 죽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새고요. 너른 하늘을 안다면, 짐작이라도 할 수 있다면 새장 안에서는 버틸 수 없어요.”

에오윈은 벌떡 일어나 좁은 방 안을 좌우로 가로질러 오가기 시작했다. 파라미르는 흰 옷자락이 돌바닥을 쓸고 지나는 마찰음 사이로 에오윈이 다스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숨소리를 들었다. 에오윈의 얼굴에는 열이 오른 듯 병적인 홍조가 붉게 피어난 채였다. 그러나 파라미르가 에오윈을 제지하기 전, 에오윈은 벽에 한 손을 대며 멈춰 서 고개를 돌렸다. 잿빛 눈은 먹구름 아래 강물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에오레드의 기사들은 아버지의 검을 가져왔어요. 어머니 앞에 무릎 꿇고 그 검을 눈가까지 올리며 애도를 전했죠. 칼집과 손잡이를 양손으로 붙든 채 망연해 하던 어머니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 나요. 어머니는 그 검을 뽑는 법을 알지 못했었던 겁니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검을,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을 에오메르가 아니라 내게 주었어요. 에오메르를 불러서는 내게 꼭 검을 다루는 법과 방패 드는 법을 가르치라 당부하셨고요.”

한숨처럼 숨을 터뜨린 에오윈은 성큼성큼 책상으로 걸어가 의자를 죽 끌어 빼 냈다. 그때쯤 이미 파라미르는 이 여인이, 로한의 백색 숙녀가 좀처럼 한 군데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영혼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한여름 폭풍 같고 풍랑 이는 바다 같은 혼이 한 사람의 육체에 깃들어 있었다. 살갗이 갈라져 터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였다.

에오윈은 의자에 앉으려는 듯하더니 주먹 쥔 손을 등받이에 올려놓았다. 앉지는 않았다. 의자의 등받이가 믿음직스러운 군마의 갈기라도 된다는 것처럼, 손마디로 나뭇결을 가볍게 쓰다듬었을 뿐이었다.

“비록 절망과 비탄이 그분의 목숨을 앗아가기는 하였으나, 전장에서 죽을 수 있었다면 전장에서 죽으셨을 겁니다. 나의 어머니는 그러셨을 거예요. 나는 세오드윈의 딸이자 모르웬의 외손녀이고, 전장에서 죽을 수 없었다면 비탄이 나를 죽였을 겁니다. 아니, 충분히 그럴 뻔했었죠. 엘렛사르께서 그리 말씀하지 않으셨던가요? 나를 쓰러뜨린 것은 마술사왕의 악의뿐만 아니라 그보다 오래 전 시작되었던 병이었다고.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택해야 했습니까?”

에오윈은 파라미르를 노려보았다. 나비의 몸을 꿰뚫는 침 같은 시선을 한참이나 견딘 끝에 파라미르는 비로소 자신이 무언가 말을 해야 할 차례임을 깨달았다. 에오윈은 마치 평가를 기다리는 신병처럼 뒷짐을 진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창문으로 비쳐든 햇살이 금빛 머리카락과 눈처럼 새하얀 옷에 반사되어 에오윈의 얼굴 반쪽만을 밝게 비추었다.

문득 파라미르는 에오윈이 정말로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왜 그의 앞에서 이러한 말을 한 것인가? 그는 곤도르의 섭정일 뿐 로한의 왕이 아니며, 세오드윈의 딸 에오윈의 지휘관은 더더욱 아닌데. 까닭이라고는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밖에 없다. 반쯤은 에오윈에게 이끌려, 반쯤은 그 자신의 의지로.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 전,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듯 에오윈은 거침없이 말을 끝마쳤다.

“나는 비탄으로 인한 죽음을 피해 도망쳤어요. 그러나 내 의무를 저버리지는 않았습니다. 탈출이 나의 의무였으니까요.”

만약 데네소르가 지금 그의 앞에 서 있었더라면.

에오윈이 자신의 어머니를 이야기했기에 파라미르의 상념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향해 비틀거리고 말았다. 데네소르가 이 자리에 있다면—에오윈의 항변은, 그 전달에 서린 당당함과 애달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항변이었다, 다시 말해 변명이었다. 누구 앞에 내어놓기 위한? 파라미르는 에오윈이 잃은 누군가를 대신하고 있었다. 누구를?—데네소르의 아들 파라미르는 무엇을, 어떻게 변명할 텐가.

난 내 의무를 저버리는 게 아닙니다, 그는 가만히 생각했다. 그가 본 적도 없는 로한의 평원과 이스트폴드의 푸른 녹지가 좁은 방을 깨뜨리고 펼쳐지는 듯했다. 어디로부턴가 불어온 바람에 에오윈의 금발이 밀밭처럼 일렁거렸다. 파라미르는 자신의 변명을 떠올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데네소르는 이곳에 없었고, 그 앞에 선 것은 로한의 백색숙녀였다.

“당신이 내 부하였다면…….”

그는 침대에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에오윈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정도 거리가 적당할 이야기였으니, 굳이 바꾸려 할 필요가 없었다.

“꽤나 창의적인 거짓말을 해서라도 당신의 이탈을 명령에 의한 것으로 덮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펠렌노르 평원에서의 당신 행위는 고귀한 것이었고, 나아가 전선 전체에 이로운 것이었으니까요. 그 의도가 무엇이었든 지휘관으로서 승리를 처벌할 수는 없지요.”

에오윈의 손등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파라미르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지금 당신은 세오드윈의 딸 에오윈이 아닙니까? 그러니 나는 데네소르의 아들 파라미르로서 답하겠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잘하셨어요. 생존은, 탈출은 당신의 의무였고 당신은 의무를 훌륭히 완수하였습니다. 누가 당신을 탓하겠습니까? 당신이 받은 명령이 아무리 당신과 나라의 안위를 염려한 것이었다고는 한들 일정 부분 당신 간수看守로부터 온 것이었는데, 어찌 그 명령을 따르는 것만이 당신의 의무였겠습니까? 사로잡힌 병사의 의무는 탈출이지 않습니까? 에오윈, 당신은 새장을 벗어났으며 그것 하나로 당신이 한 일은 칭송받을 만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마술사왕을 무찌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 같은 대답을 내놓았을 겁니다.”

그러자 에오윈은 무너지듯 의자에 걸터앉았고 등받이에 팔꿈치를 괴어 양 팔뚝으로 얼굴을 가렸다. 침묵이 적잖은 시간 이어지자 문득 파라미르는 에오윈의 어깨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이것은 그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였다.

If a soldier is imprisoned by the enemy, don’t we consider it his duty to escape? … if we value the freedom of the mind and soul, if we’re partisans of liberty, then it’s our plain duty to escape, and to take as many people with us as we can.

Ursula K. Le Guin, The Language of the Night: Essays on Fantasy and Science Fiction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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