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리프 이주 0P 사건

켈레브림보르 & 나르비 | 221025 포스타입

rhindon by 댜

“어쨌든 해냈어!”

켈레브림보르는 그날만 해도 열네 번째로 외쳤다. 나르비는 질리지도 않고 허공에 움켜쥔 주먹을 치켜들었다.

“끝났다고!”

“지긋지긋했어!”

“다신 안 할 테다!”

“나마리에!”

낄낄거린 켈레브림보르가 잔을 비웠다. 그의 잔에는 크하잣둠의 자랑인 밀맥주가 채워져 있었(었)다. 나르비의 잔에서는 아직 도르위니온산 포도주가 검푸른 빛깔로 넘실거렸다. 잔 주인인 나르비는 요정의 술은 과실즙이나 다름없다며 잔이 채워지는 대로 벌컥벌컥 들이킨 결과 이따금 딸꾹질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켈레브림보르로 말하자면 그는 타 문화에 몹시 개방적이었기에, 누구 하나 십이지장을 토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파티는 파티가 아니라는 난쟁이 식 신념을 신봉했다. 두 명짜리 파티라도 상관없었다.

아무튼 다음 날 깨질 듯한 머리로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모 요정이 잠들기 전 미루보르 나눠 마시는 것을 잊지 않는다는 전제가 붙었지만.

기껏 빚어준 코디얼이 숙취 해소제로 쓰이는 걸 안다면 엘론드는 경을 칠 것이다.

늦봄의 저녁은 한겨울 추위란 씻은 듯 잊은 것처럼 온화한 바람을 자랑했고, 돗자리 대용으로 펼쳐 깐 망토는 생각지도 못하게 푹신했다. 오색 등불을 밝힌 도시 위로 휘영청 뜬 보름달은 거울호수를 가득 메울 듯—이건 나르비의 의견이었다—혹은 요정석을 은빛으로 물들일 듯—당연하게도 켈레브림보르가 한 소리였다—환한 빛을 내뿜었고. 그리고 푸른 정원 한가운데, 달이 오스트 인 에딜의 가장 높은 첨탑에 드리운 그림자 꼭짓점에 그들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일이십 분에 한 번씩 망토를 옮겨 가면서.

그들의 궤도 위로는 부채꼴 모양으로 빈 술통과 육포 부스러기, 소풍 바구니 뚜껑 따위가 나뒹굴었다. 반쯤 빈 바구니는 가장 최근의 이주에서도 용케 켈레브림보르와 나르비 사이를 차지한 터였다.

“제기랄, 저 굴뚝 하나 세우느라 내 청춘이 다 갔어.”

나르비는 삿대질을 했다. 검지는 문제의 탑이 아니라 그 오른쪽 두 번째쯤의 건물을 가리켰지만, 켈레브림보르는 나르비의 말뜻을 적당히 알아들었다. 굴뚝이 아니라 배기구라고 좀 고상하게 말해주면 어디 덧나나 싶었지만, 그는 남의 언어 습관을 꼬치꼬치 물고 늘어지기 싫었다. 누구에게나 차별화 전략은 필요한 법이잖아? 대신 켈레브림보르는 실실 웃으며 대꾸했다.

“한 철 짜리 청춘이군.”

“필멸자의 청춘은 원래 한 철이야.”

나르비는 켈레브림보르를 따라 잔에 남았던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딸꾹 온몸을 흔들었다. 켈레브림보르는 잡히는 대로 손을 뻗어 나르비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이번에는 지난겨울, 켈레보른의 신다르가 빚었던 딸기술이었다. 자신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뭐 어때.

“숨 참고 마셔봐.”

맥주가 담긴 자그마한 참나무통을 더듬어 찾으며 켈레브림보르가 조언했다. 나르비는 눈을 굴렸다.

“그 대단하단 요정의 지혜란 게 고작 그거야?”

“그럼 넌 어쩌는데?”

나르비는 숨을 참기는커녕 깊게 들이쉬며 딸기술의 향을 맡았다. 송충이 같은 눈썹이 흡족한 양으로 움찔거렸다. 이어서 나르비는 굵게 땋아 내린 수염 끄트머리를 잡아 술잔에 붓처럼 쿡 찔렀다.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인가 했던 켈레브림보르는, 나르비가 젖은 수염으로 코끝을 간지럽히다시피 쓸어내린 다음 에취 재채기를 하자 미처 다 채우지도 못한 잔을 들어 미소를 가렸다. 나도 수염이 나면 좋은데.

“길러.”

명쾌한 대답이 돌아오자 켈레브림보르는 자신이 마신 술의 양을 다시 복기해야 했다. 내가 언제부터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더라?

“한참 됐는데?”

“그럼 있지, 요정들은 수염 지지리 안 난단 것도 알겠네.”

“자네 종족이 죄다, 딸꾹, 솜털도 안 빠진 애송이란 건 안다만.”

진외가의 마흐탄이나, 나르비가 좀 더 들어봤을 법한 키르단 얘기를 꺼낼까 하다 말고 켈레브림보르는 푸 한숨이나 내쉬었다. 그리고 젖은 허수아비처럼 몸을 무너뜨려 나르비에게 완전히 기댔다.

“됐다, 됐어. 수염 갖고 난쟁이 이기려 드는 게 멍청이지. 처음 봤을 때 난 네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진가 했다니까?”

그다지 우스운 말은 아니었는데도 나르비는 콧방귀를 뀌었다. 켈레브림보르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

“이제야 노처녀 다 됐지만 말이야?”

“네가 뭐가 늙었다고……. 잠깐, 노처녀?”

“왜, 내가 자네 몰래 결혼이라도 했을까 봐? 내 결혼식에 자넬 초대도, 아니, 하면 안 됐겠지. 적어도 연회에는 끌어다 앉혔을 거라고.”

“그게 아냐.”

나르비는 켈레브림보르를 돌아보았다. 켈레브림보르는 나르비의 어깨에 뺨을 누른 채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순한 눈망울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일족의 성스러운 예식에 초대 좀 못 받는다고 그렇게 서러워할 일이냐 물으려 했을 때, 켈레브림보르가 한 박자 먼저 잽싼 입을 놀렸다.

“난쟁이들은 요정의 혼인은 인정하지 않는 건가?”

“뭐?”

“난 너와 나 사이에 격식은 없더라도 일종의 합의는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달이 밝았다. 에레기온은 녹색과 붉은색으로 황홀하게 빛났다. 정원에 드리운 탑 그림자는 한 발짝 더 느긋한 걸음을 옮겼다.

나르비는 진실을 깨달았다.

“이 망할 놈!”

켈레브림보르는 숨넘어가도록 웃느라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했다. 나르비는 문득 딸꾹질이 멎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 사실은 난쟁이의 정당한 분노에 불을 지필 뿐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어라!”

“그것 좋지! 내가 페아노르의 핏줄을 끊어 놓는 것 아냐!”

머리 끝부터 수염 끝까지 화가 난 난쟁이에게 붙잡힌 켈레브림보르는 달아날 생각도 없이 돼지 멱 따는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 먼 곳, 요정의 청력으로나 들릴 법한, 아마도 실내일 어딘가에서 맞받아 고함쳤다. 지금 시간이 몇 신 줄 알아?

그러고 보니 시간이 지나기는 지났다. 켈레브림보르와 나르비는 주섬주섬 그림자를 따라 돗자리 대용 망토와 그새 사방으로 흩어졌던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망토가 어린 친척 동생 켈레브리안의 솜씨이며 켈레브리안이 제 어머니의 마뜩찮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런 선물을 한 것은 한때 켈레브림보르가 어느 난쟁이 여인에게 구애 중이라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그는 굳이 이 자리에서 꺼내지는 않았다. 술자리에서 하기 제격인 잡담이기야 했다. 하지만 그가 별말 하지 않는 것은 첫 번째로는 망토를 건네줄 때 ‘오라버니는 옷 좀 똑바로 입고 다닐 필요가 있어요’라던 켈레브리안의 표정이 퍽 어린애다워 사랑스러웠던 까닭이었고, 두 번째로는…….

지지난해였나, 모리아 서문의 각인을 마치고 밤새 자축했을 때 그 얘긴 이미 했었던 것 같아서. 확률은 반반이었다.

나르비도 그도 괴짜였고, 켈레브림보르는 그 점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둘은 잠시, 할 말은 다 해 버렸고 뭔가 더 새로운 말을 꺼내기에는 지난 몇 달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 다닌 친구들 특유의 침묵에 잠겨 술이나 홀짝였다. 어색한 시간은 아니었다. 서로의 목소리라고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을 만큼 시끄러운 대장간에서 쌓아 올린 관계는 세상 바깥 공허의 침묵이라도 버텨냈을 테니까. 하지만 동시에 켈레브림보르에게는 약점이 있었는데 그건 그가 약간 자아도취적인 성격이라는 점이었고, 소리가 들리는 환경에서라면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어디 밖에 나가서 했다가는 당장 가운데땅의 모든 항구로부터 출입금지령이 내려질 말이었다.)

“어쨌든 해냈네.”

몇 분 전이었다면 하루에 열다섯 번이나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겠다. 남중점을 지난 보름달은 날짜야 바뀌든 말든 변함없이 환하게 빛났다.

“그것도 봄이 다 지나기 전에.”

“흠.”

나르비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소리를 냈다. 켈레브림보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친구는 역시 현명했다.

“사실 진짜 될 줄은 몰랐는데. 너 아니었으면 못했을 거야.”

“왜 그렇게 조바심이 많아?”

처음에 켈레브림보르는 그게 핀잔을 주려는 설의법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조바심이 많은 것쯤 이미 알고 있었다. 발리노르에서 그건 자신과 다른 — 쿠루핀의 표현대로라면 ‘한심한’ — 또래 아이들을 구분 짓는 또 하나의 특성에 불과했다. 바다를 건너오자, 이전 시대에서는 상상치도 못했던 전장을 맞닥뜨리자 자신은 평범해졌다. 아니, 종종 딴생각에 빠진 그를 남들이 답답해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되찾은 평화 속에서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 두드러졌다.

그러나 힐끗 쳐다본 나르비는 정말로 대답을 요구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르비는 잔을 치켜들어 그들이 막 완공한 탑을 가리켰다. 이번에도 방향은 빗나갔지만 이해에는 무리가 없었다. 탑은 나르비의 말마따나 실은 굴뚝이었고 굴뚝은 자연히 용광로로 이어졌다.

“별빛처럼 맑고 용의 혀처럼 강력한 불을 원한다면, 은의 손, 어째서 거기 백 번의 봄을 바칠 수는 없는 거지?”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

“요정은 죽음을 겪고도 돌아올 수 있다고 들었는데.”

페아와 흐로아의 결합이니, 훼손된 아르다니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기에는 켈레브림보르의 신학적 지식이 얕았다. 대신 그는 눈길을 돌려 잔디 위를 슬금슬금 기어가는 그림자를 응시했다.

“가운데땅의 시간은 흐르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요정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아?”

“나르비, 나르비—내가 한 문장 엮는 것만도 머리 아파 죽을 지경일 때 꼭 이런 얘길 해야 해? 그냥 하고 싶어서, 는 어때? 내가 이 땅을 사랑한다는 걸 너도 알지, 여기선 병아리 눈물만 한 보석 하나 만들래도 내 유년보다 몇십 배는 더 공을 쏟아야 하는데도! 그러는 너는 대체 왜 나 같은 미친 요정이랑 어울려주는 건데?”

“필멸자의 청춘은 한 철이거든.”

그렇게 말하는 나르비의 음성에는 젊은이의 것이 아닌 인내심이 깃들어 있었다. 켈레브림보르는 가슴 한구석이 선뜩해졌다.

아무렴 모든 것은 죽는다. 아르다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발리노르에조차 죽은 자들의 전당이 존재하는걸.

이러나저러나 죽음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직은.

“할 수 있잖아.”

켈레브림보르는 한기를 떨쳐 내려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가, 잔을 잡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나르비보다는 그의 겨냥이 정확했다. 잔에 찰랑이는 술에는 정확히 둥근 보름달이 담겼다.

“할 수 있을 것 같잖아. 해내면 끝내줄 것 같잖아. 우린 뭔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있잖아. 더 이유가 필요해?”

“필요한가?”

“세 실마릴을 만들 때 페아노르가 그렇게 물었을까, 이게 어디 무슨 쓸모가 있을까? 이게 종족을 구원할까? 두 나무를 되살려낼까? 몇천 년을 살아남아 희망의 별빛으로 칭송될까? 아니면 그냥 해 봤을까?”

갈라드리엘이 들었다면 위험한 사상이라고 했겠지. 이유를 생각지 않고 내달리기만 하는 꼴이라고. 하지만 쓸모가 아니라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은—눈 씻고 봐도 소용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은 사치이고 축복이며 긴 싸움을 끝내고 검을 내려놓은 그에게 주어진, 말하자면, 선물이었다. 구질구질한 생존의 필요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얼마나 높이 올라갈 수 있는지! 아르다의 훼손에서 벗어나…….

나르비의 옆구리가 확 다가왔다. 나르비는 고꾸라진 켈레브림보르를 한쪽 팔로 끌어안았다.

다시는 이 녀석한테 미스릴 제련 온도보다 복잡한 걸 물어보나 봐라. 요정들은 별 시답잖은 소리를 엿가락처럼 길게 늘이려 드는 게 탈이었다.

그가 켈레브림보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난쟁이가 요정을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은, 사람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은 그랬다. 켈레브림보르는 대체로 딱 그 나이답게 불평불만에 목숨을 걸었지만 이따금, 특히 작업대 앞에 설 때는 세상을 다 잊은 것처럼 굴었다. 그런 몰두의 원동력은 결코 외부로부터 오지 못했다.

탑의 그림자는 그들을 완전히 비껴가 기울어지고 길어졌다. 도시 곳곳을 밝히던 등불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야 비로소 나르비의 눈에도 온 하늘을 가득 채운 별, 서서히 회전하는 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은 여전히 따뜻했고 바람은 여전히 상냥했다. 나르비에게 반쯤 파묻힌 채 꾸물거리던 켈레브림보르가 주먹만 한 병 하나를 꺼내 뚜껑을 땄다. 철 아닌 여름 과일의 향이 달큼하게 피어올랐다.

“어쨌든 우리 해냈어. 멋지지 않아?”

켈레브림보르는 그날만 해도 두 번째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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