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리프 이주 0P 사건

terminal velocity

안나타르 × 켈레브림보르 | 200105 포스타입

rhindon by 댜

At the beginning of the Second Age he was still beautiful to look at, or could still assume a beautiful visible shape—and was not indeed wholly evil, not unless all “reformers” who want to hurry up with “reconstruction” and “reorganization” are wholly evil, even before pride and the lust to exert their will eat them up.

선물의 교환, 내지는 거래가 익숙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르비가 불평했듯 당시 그의 사고는 젊은 난쟁이의 것에 가까웠고, 그렇지 않았다 해도 그가 걸어온 길 위에 서서 대가의 존재를 잊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벌써 밤이군요.”

당연한 말을 입 밖에 내며, 켈레브림보르는 달빛이 눈에 부시기라도 하단 듯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보였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기는 했지만 등 뒤 열린 문으로 쏟아져 나오는 불빛이 더했으니 그 동작에는 과장된 감이 없잖았다. 그러나 그가 밀어내려는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임을, 상대는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겨울 해가 짧다 한들 당신에게는 의미 없겠지요. 당신은 아르다의 시계와는 동떨어진 생활이 일상이잖습니까.”

두 나무의 빛 아래 태어난 요정치고 어둠을 달가워하는 이는 없었다. 어디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은 차치하고서라도, 아무도, 정말이지 아무도 발리노르 전역에 암흑이 덮이던 순간을 되살고 싶어 하지는 않았으니까.

“너무하다. 이것 좀 봐요, 여기선 내가 정상이라니까?”

반면 밤은 사랑받았다.

미르다인 본부는 부러 오스트 인 에딜과 거리를 두고 지었으니, 켈레브림보르가 바라보는 하늘에는 유독 환하게 반짝이는 별이나 새까만 어둠에 물든 호랑가시나무 가지는 없었다. 거대한 반구를 엎어 놓은 요정의 전당도, 그 주위를 피나르핀 가문의 별을 그리며 솟아오른 탑들도 공방 문턱에서 보일 리 만무했다. 붉은 열매를 종종 달아놓은 듯 밝힌 둥그런 양초는 말할 것도 없이.

그러나 저 높이 공방 지구를 뒤덮은 금속 그물에는 낮이면 보석으로, 밤이면 오색 등불로 빛나는 수정이 한가득 엮여 있었고, 멀찌감치 불 꺼진 창고 열 뒤로 늘어선 유리 온실은 산 주목 뼈대에 매달린 불빛에 하나의 원석처럼 휘황했다. 길가에는 창과 문간에서 흘러내리는 빛이 넘쳐, 매끄러운 포석 위를 빗물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로리엔이 일렁이는 그림자를 사랑하듯 밤은 미르다인에게 거대한 화폭이었다. 자리 잃은 돌멩이 하나, 풀꽃 한 포기마저 훤히 보이는 길을 향해 켈레브림보르는 씩 웃었다.

“하, 곧 축제라고 다들 철야인가 본데요. 대낮같이 밝네. 이러다간 나도 한물가는 거 아닌가?”

말투와 마찬가지로 계단을 앞서 내려가는 발걸음은 경쾌했다. 그 자신이 뒤처질 리 없다, 따위의 오만마저 확신으로 들리게끔 하는 것은 그가 타고난 재능 중 하나였다. 그를 뒤따르는 이는 대답 대신 쿡쿡 웃음을 참았다. 그는 슬쩍 어깨너머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당신은 아예 그냥 걸어 다니는 횃불이고요.”

실마릴이 단순한 수정이 아니듯, 안나타르의 머리카락을 금빛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안나타르는 멋쩍은 듯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에레기온에 도착해 미르다인의 일원이 된 게 지난 여름이었지만, 그는 아직 한 번도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았었다. 그러니 공방에서 작업하려거든 머리나 묶으라는 켈레브림보르의 협박 아닌 협박도 소용없었다. 그는 다만 그날그날 마음에 드는 장인을 골라 작업을 눈여겨볼 따름이었는데, 그러면서도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내뱉는 조언만큼은 서녘의 사자란 주장에 어울렸다. 사흘에 한 번 꼴로 켈레브림보르를 찾아오는 것마저 대개는 수상히 여기지 않을 만큼 미르다인을 사로잡은 데는 그 공이 컸다.

켈레브림보르는 어쨌든 순수한 선의를 경계했다. 몸은 컸대도 마음은 소년이었던, 장인으로서 한창 가파르게 성장하던 시기를 하필 척박한 힘라드에서 보낸 탓일 터였다. 그때 그는 째진 신다린이 새어 나오는 쿠루핀의 집무실을 지나 대장간으로 향하곤 했었고, 정밀성과 내구도, 기교와 실용 사이에서 한정된 재료를 저울질하는 버릇은 몇백 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몇 날 며칠 밤을 꼬박 새워 가며 완성했던 목걸이를 곡식 두어 자루와 맞바꿔야만 했던 시절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말마따나 대낮은 아니라도 어스름쯤은 되는, 어둠이 스며든 빛의 거리에서 안나타르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오래 전 배운 대로 세상을 한 꺼풀 벗겨내 바라보면, 아이누의 것이랄밖에 없는 화려한 이목구비를 두르고, 새하얗게 달아오른 쇳물 같은, 한 시대의 끝을 고한 용암 같은 갈기를 세운 권능이 드러났다. 어른거리는 주홍빛에서 켈레브림보르는 문득 지극히 개인적인 불길함을 읽어냈다.

“당신이 보기에나 그렇지요. 당신과 당신 가까운 친족, 요정왕의 자손들에게나요.”

한 박자 늦은 대답에 그는 움찔 눈길을 피했다. 어색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지만 안나타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소매를 잡았다.

“그나저나 벌써 자러 갈 건 아니죠?”

호랑가시나무땅 가장 높은 탑, 미르다인의 빛의 그물이 아득히 먼 꼭대기에서 그는 산딸기술을 홀짝이며 옛 노래를 흥얼거렸다. 칼반다, 두 갈래 길, 나는 거꾸로 서고 너는 손을 뻗으면, 손끝이 스칠까 두 갈래 사이로, 칼반다 두 갈래 길을 땋을까. 물끄러미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무거웠다. 그는 마침내 묻고 말았다.

“경치가 마음에 안 드나요?”

“멋지네요. 하늘에는 바르다, 땅에는 당신네 빛이군요. 이러니 밤이 긴 것도 즐겨 볼 만하네요.”

“당신은 좋겠어요, 추위도 잘 안 타고 말이에요.”

켈레브림보르는 짐짓 양팔을 문질렀다. 공방에서 입고 나온 해진 셔츠는 초가을부터 바람을 숭숭 들였고, 위로 걸친 양모 겉옷은 바냐르 식, 요즘 말로는 수도자 식으로 죔쇠가 없었다. 안나타르는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휘어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놀도르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이들 중에는 추위 하면 제 발로 살을 에는 얼음을 건넌 적은 없대도 헬카락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자가 드물었다. 이유를 짐작하며 켈레브림보르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난 모닥불 취향이라.”

아니면 백조 날개를 타고 치솟는 화톳불이라거나. 안나타르가 입속으로, 하여튼 악취미라니까,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켈레브림보르는 어느새 바짝 긴장한 눈가를 엄지로 문지르며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할 수도 있었다. 예감은 오롯이 그의 것일 수도, 안나타르가 슬며시 찔러넣은 속삭임일 수도 있었다. 전자라면 그가 뭐라 하든 대화는 정해진 방향으로 흘러갈 테고, 후자라면, 역시나, 그가 뭐라 하든 대화는 정해진 방향으로 흘러갈 터였다. 그리고 그는 끌려가는 일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그는 결국 엉뚱한 소리로 들릴 위험을 감수하고 덧붙였다.

“당신 취향은 도무지 알지 못하겠지만요.”

“황금, 붉은색, 불협화음 속 이어지는 가락.”

답은 순식간에 돌아왔다. 켈레브림보르는 허탈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 우스운 말은 아니었던 데다 정신도 아직 맑았는데도. 기실 병째 술을 마시고는 있었지만 좀처럼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높은요정의 직관은 그가 계절이 바뀌도록 답을 고민해 온 질문이 가까이 있음을 외치고 있었다.

아르타노 아울렌딜의 대가는 무엇인가?

“당신이 왜 여기 있는지도.”

금가루를 흩뿌린 듯 반짝이는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아이누르에게 육신은 의복일 뿐이라 해도, 요정이나 인간이 저도 모르게 머리끈으로 손장난을 치는 것처럼 저들 역시 감정의 동요를 몸으로 드러냈다. 가운데땅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라면 몰라도 켈레브림보르는 어릴 적 아울레의 권속들과 어울렸었다. 적당히 꾸며낸 반응과 미처 그러지 못한 것의 차이쯤은 구별할 줄 알았고, 어쩌면 그런, 안나타르의 계획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어긋나는 순간들이야말로 미묘한 친밀감의 시작이었을 법도 했다.

“나야……. 당신이 여기 있잖습니까.”

“아부는 내가 당신에게 해야 할 텐데요. 왜 여기 있습니까?”

“가운데땅을 재건하고 싶어서, 미르다인의 재능이 열매를 맺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이 땅에 아름다움을 돌려주려고. 뭐, 달리 더 듣고 싶은 말이 있나요?”

그렇지만 그가 마이아에게 갖는 감정은 필연적으로 복잡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는 안나타르의 잘난 오만함을, 들추지 못하면 찢어서라도 답을 찾아야 했다. 그건 요정영주로서 그의 의무인 동시에 페아노르의 손자로서 그의 능력 안에 있는 일이었다.

“난 내가 언젠가 갚아야 할 금액을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과연 채무자가 나 혼자인지도.

안나타르는 눈을 깜박이는 법도 없이 한참 그를 쳐다보았다. 켈레브림보르는 순순히 시선을 받아냈다. 씁쓸한 뒷맛이 남은 입안에 침이 고였지만 안나타르 앞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안개산맥 서쪽, 해안 동쪽의 대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다. 얕은 난간을 누르는 바람은 심해처럼 묵직했고 하늘 한 귀퉁이에는 눈을 품은 구름이 차올랐다. 별들을 회전하는 불로, 불의 바퀴로 묘사한 이가 있었다. 아마 북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을 어느 호숫가의 요정이.

“누가 빚을 졌는지 모르겠네요.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말입니다. 나는 안나타르예요. 내게 보답하겠다는 겁니까?”

왠지 모를, 아니, 이유를 너무나 잘 알 만한 모욕감에 켈레브림보르는 확 눈을 치떴다. 안나타르는 못본 척 말을 이었다.

“당신은 다정하고 이타적인 사람이죠. 그런데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나요?”

“남의 다정을 믿지 않을 만큼 현명하기도 합니다. 특히나 당신 족속의 다정은요. 조건 없이 베푼다던 어버이가 아이에게 분노하는 것은 어째서인지 아시잖습니까.”

안나타르는 가만히 그를 응시하다가, 오른손을 펼쳐 손등이 위로 향하게끔 팔을 뻗었다. 매끄럽게 끝이 갈린 다섯 손톱 위로 반사광이 뚜렷한 선을 그렸다. 빛의 근원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아울레의 마이아는 그 자체로 용광로요 활화산이었으니까.

“이런 탑을 세울 거예요. 저 서녘의 펠로리보다도 높이, 장벽이 아니라 중앙이 되는 탑을.”

아, 그리고 한 순간 그는 마음 속 그림이라기엔 지나치게 선명한 세계를 보았다.

끝없이 펄쳐진 검은 사막 어딘가의 거대한 저수지, 색색깔의 옷감을 두른 낯설고 유한한 얼굴들. 잿빛 흙거죽을 뚫고 솟아오르는 현무암 덩어리를, 그 바위가 거삼나무처럼 하늘 높이 자라는 것을, 그가 아는 어떤 기술로도 실현 불가능할 가파른 돌벽과 먹구름을 꿰뚫는 첨봉을. 의심의 여지 없이 안나타르가 불어넣은 환상이었다.

용융된 황금 같은 음성이 의식을 가르고 들어왔다.

“그건 가운데땅에 대한 내 선물이 될 겁니다. 난 안나타르예요. 텔페린콰르, 내게 보답할 건가요?”

무엇으로요? 질문의 반쪽은 침묵 속에서 긴 날숨을 내쉬었다. 켈레브림보르는 갑작스레 웃었다. 오래 전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 탓이었다. 무얼 받고 싶으세요, 아버지? 이런, 티엘포. 마음만으로 충분하단다.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지낸 기억이었다.

“그러죠. 그래야 수지가 맞을 거 아닙니까?”

그리고 그는 안나타르의 관심이 번개처럼 그에게 내리꽂히는 데서 약간의 가학적인 기쁨을 느꼈다. 당황해 평정을 잃는 권능보다 멋진 게 있을까. 그러니까 답은 벌써 정해져 있던 셈이었다. 이 밤은 단지 확인할 시간일 뿐.

“내 우정과 신의로 말이야, 안나타르.”

점점이 빛이 박힌 밤하늘을 뒤로 하고, 마이아는 어린아이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엉긴 버터 색으로 나부꼈다. 켈레브림보르는 술병을 기울여 마지막 한 모금을 털어넣었다.

거짓말쟁이에게서도 배울 점은 있다. 진실을 담는 법은 아니라도, 진심을 담는 법만은. 그렇다면 자유로이 내어주는 법 역시 누구에게서나 배울 수 있는 것일 테다—그렇게 그는 믿음을 약속했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야 처음부터 들었지만, 어쨌든 그는 앎을 후회하는 성품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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