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리프 이주 0P 사건

full circle

안나타르 × 켈레브림보르 | 210106 포스타입

rhindon by 댜

“사람들이 너를 멜리안에 비견한다더군.”

별 것 아니라는 투로 흘러나온 한 마디는 허공에 나른하니 흩어졌다.

안나타르는 씩 웃으며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순백의 예복이 몸 아래에서 구겨지며 바스락거렸다. 작업실에야 온갖 미완성작과 도면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으나, 켈레브림보르의 침실은 그리 넓지도 않을 뿐더러 책상 하나 없이 단출했고, 가구라고는 침대와 옷장, 한쪽에 놓인 경대가 전부였다. 삭막한 방의 문턱을 넘으며 눈을 크게 떴던 안나타르에게 켈레브림보르는 짧게 설명했었다. 작업실에도 침상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이런 곳은 격이 떨어지는데, 되묻자 돌아온 대답은 실없는 웃음과 섞여 있었다. 갈라드리엘 일가와 함께 쓰는 구역에서 잠들기 싫다는 이야기였다. 안나타르는 잠시나마 그것이 저 때문일까 희망해 보았지만, 자그마한 방에는 이미 켈레브림보르의 존재가 깊이 스며들어 있었고, 그런 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이쪽은 공방과 가까워 장인들이 종종 사용하는 숙소였다. 그러나 이 방의 방문에는 에레기온에서는 흔치 않게도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손안에 누메노르 산 면이 매끈하게 감겨 오고서야 비로소 안나타르는 이곳이 작업실만큼이나 켈레브림보르에게 중한 장소임을 알았다.

한 발 너비쯤 될 창문으로는 공방 앞의 소광장이 내다보였다. 포석 위로 하얗게 부서지는 햇빛이 증거하듯 과이스 이 미르다인의 본부는 이 땅에서도 빛이 가장 맑은 곳에 세워졌으나, 창틀에 덧붙여진 가림막은 방의 대부분을 그늘에 잠가 버렸다. 일없이 창 양쪽에 매듭 지어진 휘장도, 바닥에 깔린 양탄자도, 하물며 켈레브림보르가 뭉쳐 끌어안은 이불까지도 붉은빛이었다. 딱 쨍하지는 않을 정도로 진한 색깔은 그 자체로 고귀해 안나타르는 염료를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괜찮았다. 옷장과 경대는 나무의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그것도 그리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왜지?”

“응?”

켈레브림보르가 잿빛 눈을 끔뻑거렸다. 안나타르는 폭 한숨을 쉬며 두 손가락으로 켈레브림보르의 손등을 쳤다. 작업실에서 시작된 버릇은 이제 켈레브림보르가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있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았다. 심지어 켈레브림보르의 옷차림도 작업실에 있던 그대로였으니까.

“나를 아르멜리안께 비견하는 것. 왜 그런 말을 하지?”

시선이 흔들렸다.

“네가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맥락이겠지.”

“내가 너와 동침한다고 여기는 건가?”

아, 옳게 맞췄군. 요정의 낯빛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다시 희게 변하는 데서 안나타르는 애매한 만족을 얻었다.

평상시의 켈레브림보르라면 열어 두지 않았을 틈이었다. 이런 식의 암시만 나와도 펄쩍 뛰다시피 하며 도망쳐 버리고는 했었는데. 그러나 엘다르의 영혼은 결국 육신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었고, 때론 틈을 만들어내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누적된 피로와 약간의 미열이었다.

안나타르는 켈레브림보르의 상태를 그럭저럭 짐작했다. 지나치게 제 자신을 몰아붙여 잠드는 법마저 잠시 잊어 버린 어리석은 아이. 그를 질책할 마음은 들지 않았고, 대신 안나타르는 손을 뻗어 켈레브림보르의 품 안에서 이불을 끌어냈다. 당혹한 눈길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붙었다. 금실로 장식한 천에 호랑가시나무의 열매가 수놓인 것을 보며 안나타르는 조금 웃고 말았다. 어쨌든 누구도 켈레브림보르 쿠루피니온이 주제에 충실하지 않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었다.

“페아나린케.”

일어서 양손으로 이불을 털자 켈레브림보르는 입엣말로 웅얼거리며 몸을 말았다. 기름때 묻은 미색 셔츠에 주름이 늘었다. 소맷단의 붉은 자수를 응시하는 눈이 복잡해졌다. 안나타르는 공허로 달아나려는 생각의 꽁무니를 붙잡아 짓눌렀다.

켈레브림보르는 어쩌면, 진심으로 붉은색을 좋아한다.

“페아나린케. 내 말 들어. 나의 선물은 아르멜리안의 것과 같지 않아.”

“루시엔을 낳아 주지 않겠다는 말이라면 관둬, 나도 관심 없으니까.”

적응 하나는 더럽게 빨랐다. 루시엔의 이름에 떨리는 손끝을 숨기려 안나타르는 부러 강하게 이불을 내리쳤고, 가슴께까지 올라온 이불을 밀쳐내고 일어나 앉은 켈레브림보르는 설핏 웃어 버렸다. 땋아 올렸던 검은 머리카락이 반쯤 풀려 긴 가닥으로 흘러내렸다.

“네가 날 그렇게 부르는 게 좋아.”

“그래?”

“페아나린케. 모두가 내게서 페아나로를 찾을 때 너만은 내 혈관에 흐르는 그의 피를 보지.”

그들은 퀘냐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분노의 전쟁 이후 차츰 다시 쓰이기 시작한 바냐린 퀘냐가 아니라, 두 나무의 빛이 꺼지기 전부터 장인과 예술가들의 언어였던 놀도린 퀘냐로. 그중에서도 동부 변경의 영주들이 사용하던 힘링의 방언, 켈레브림보르가 손수 가르친 그 혼란한 억양으로. 안나타르는 그만 켈레브림보르와 마주 미소 지으며 제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켈레브림보르가 두 손가락으로 그의 손등을 건드릴 차례였다.

“너는. 안나타르…… 너는. 내가 없다고 가운데땅에 내린 선물을 거두어 가는 일은 없겠지. 멜리안은 그의 장막을 걷고 축복의 땅으로 돌아갔지만, 너는 나를 이유로 엔도르에 머무는 것이 아니니.”

“그게 걱정이 돼?”

마이아의 감각은 소용돌이치는 지문을 선명하게 지각할 만큼 예민했으므로, 그늘진 방 안에서도 퀭한 안색을 살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만에서 나고 자란 강인한 육신에 무리가 갈 정도로 몰두했던 작품은 이제 에레기온의 가장 높은 첨탑 꼭대기에 안치되어 있을 터였다. 빛무리에 온통 휘감긴 도시에서도 유독 찬란하게 빛날 광원. 문득 안나타르는 침실에 난 창문이 첨탑의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켈레브림보르의 손가락 끝은 여전히 그의 손등 위에 얹혀 있었다.

켈레브림보르는 담담히 답했다. 죽은 언어는 그의 발음을 힘입어 폭포에서 튀는 물방울처럼 유려해졌다.

“나는 영원을 원해.”

변치 않는 것, 배신하지 않는 것. 안나타르는 어째서인지 그가 입은 육신의 심박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긴장일까, 우스움일까, 설마 두려움은 아니겠지. 세상의 나이에 비하면 가없이 어린 요정이 영원을 논한다는 것은 당치않았다. 하지만 그는 켈레브림보르의 침실에 앉아 있었고 방은 대낮임에도 어두침침했으며 높은요정의 눈동자 너머에는 잉걸불이 일렁거렸다. 영원을 원한다고. 억겁의 시간에 눌려 이 방 안의 모든 빛깔은 색이 바래고 나무는 썩어들고 천은 조각 나 바스러질 터였다. 놀도르의 기예로도 늙어 가는 세상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페아나린케의 믿는 구석이 되어 보는 경험은…….

그리 불쾌하지는 않았다.

지쳤기 때문에, 투명한 요정석을 빚어 내는 데 이미 많은 기력을 소모했기에 켈레브림보르는 제 생각을 이전처럼 굳게 숨기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안나타르가 그의 침실 안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이유야 어찌 되었든 켈레브림보르의 표정은 가식 없이 정직했다. 금방이라도 목표는 높게 잡아야 하는 법이야, 안나타르, 하며 웃음을 터뜨릴 듯 아슬아슬했지만. 안나타르는 뻐근한 가슴놀이를 문질렀다.

아, 그래. 이곳에는 페아노르의 별이 없었다.

갈라드리엘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좁혔다. 흰 이마에 골이 파이자 켈레브림보르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는 아르타니스 네르웬의 성미를 잘 알았고, 어지간해서는 이를 거스르는 일은 기를 쓰고 피하고는 했다. 하나 요즘 들어 어지간한 일이 점차 줄어드는 것이 문제였다. 찻잔 손잡이에서 손을 뗀 갈라드리엘은 벌꿀이 담긴 종지를 집으려는가 싶더니 꾹 주먹을 쥐었다.

켈레브림보르는 폭발에 대비했다.

“나르비가 크하잣둠으로 돌아갔다고 들었어.”

침착하게 서두를 뗀 갈라드리엘은 할 말은 그뿐이라는 듯 조카를 바라보았다. 켈레브림보르는 조용히 제 찻잔을 들어 입매를 감추었다.

“나이가 나이니까요. 손주들이 보고 싶다고 하던걸요.”

“귀한 재능이었는데, 아깝게 되었지.”

잠자코 들이켠 차는 상큼하던 향과 달리 쓴맛이 강했다. 아무래도 갈라드리엘은 오늘 단단히 마음을 먹고 그를 부른 성싶었고, 그로서는 버티는 것 외의 방법이 없었다. 갈라드리엘이 바라는 것이야 뻔했으나 그도 그대로 고집을 꺾지 못할 처지였으므로.

“난쟁이들은 감이 좋지.”

그 말씀을 부군께 해 보시는 건 어떨까. 순간 튀어나가려던 물음을 가까스로 억누른 켈레브림보르는 잔의 테두리 너머로 갈라드리엘과 눈을 마주쳤다. 청회색 시선이 그를 꿰뚫었다.

“그가 떠난 이유를 정말 모르겠니?”

“아르타니스!”

텔페린콰르.”

갈라드리엘은 그의 이름을 텔레리 식으로 불렀다. 핀로드가 그랬고 오로드레스가, 핀두일라스가 그러했듯. 티엘페린콰르가 아닌 텔페린콰르. 석회수가 흐르는 동굴, 페아노르의 등불 아래 내리쳐지던 은빛 왕관. 차에서 횟물 같은 역한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켈레브림보르는 찻잔을 내동댕이치다시피 하며 받침에 놓았다.

그와 갈라드리엘은 마지막 전쟁 이래 한 번도 퀘냐로 대화한 적이 없었고, 한 차례씩 이름을 말한 것을 마지막으로,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누구도 그를 그런 고저와 장단으로 호명하지 않았다. 엘다마르의 바닷가에서, 이브린 호수변의 축제에서, 나르고스론드의 어스름 속에서 거닐던 핀로드의 조카를 되살릴 이유란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와 함께 씻지 못한 죄를 상기시킬 작정이 아니라면.

쿠루핀이 몇 마디 말로 나르고스론드의 용기를 꺾은 이래 켈레브림보르는 감정적인 조종에 죽도록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과이스 이 미르다인은 내 영역입니다! 당신이 오스트 인 에딜을 다스리고, 나는 장인들을 맡고. 그게 우리 합의 아니었습니까?”

“내겐 너를 걱정할 자격이 있어.”

벌떡 일어선 갈라드리엘의 등 뒤로 금발이 물결쳤다. 켈레브림보르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당신의 걱정이요, 예. 적어도 나는 나르고스론드가 몰락할 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네 아비의 전철을 밟으려는 거냐?”

갈라드리엘은 그리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으나 날카로운 물음 뒤로는 쩡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온몸을 떨고 지나가는 진동에 사지 끝이 저릿저릿했다. 유리 온실 안에 있는 탓이었다. 에리아도르의 온갖 화초를 모아 놓은 은신처에 갈라드리엘이 내지른 분노는 지진이나 다름없었고, 유리창은 사정없이 떨리며 몸부림했다. 켈레브림보르는 아득 어금니를 갈아붙였다.

당신께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켈레브림보르—!”

당신이 나무와 숲의 켈레보른에게로 돌아섰다고는 하더라도요. 그러니 그 사랑을 위해 난 내 능력 안의 일을 하겠습니다. 행여나 내 기예를 통해 당신의 비애가 덜어질 수 있다면 말입니다.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네가 그리도 네 기예에 눈이 멀었다면 나는 더는 널 막지 않겠다.”

결국 켈레브림보르는 무작정 울화를 터뜨렸다.

“당신도 멜리안의 제자였잖습니까!”

씨근덕거리는 조카를 앞에 두고 갈라드리엘의 호흡은 천천히 원래의 박자를 되찾았다. 켈레브림보르는 수치심에 낯을 벌겋게 붉히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갈라드리엘은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참담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멜리안에게 매혹된 적은 없어,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갈라드리엘을 앞에 두고 그는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었다. 틀렸다. 눈이 먼 것이 아니라 보지 않는 것이었다. 법칙을 밝혀 내려는 학자가 사소한 예외에 신경 쓰지 않듯이.

은을 사용하자고 주장한 것은 켈레브림보르였다. 모르고스의 흔적이 비교적 적게 남은 금속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안나타르는 하마터면 모르고스가 걱정되거든 자신부터 내쫓아야 할 거라 고백할 뻔했지만, 용케 입을 다물고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은보다야 황금이 배는 다루기 쉬울 테고, 권능을 안정적으로 담아 낼 터였으나 어차피 지금 만들 반지는 시제품에 불과했다. 이런 일로 켈레브림보르와 마찰을 빚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어쨌든 켈레브림보르의 솜씨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의 예상을 뛰어 넘었다. 은에 힘을 싣기는 까다로우니 설계를 수정하자고 한 말에 가문을 모욕받기라도 한 양 눈을 치떴던 켈레브림보르는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은사를 끈질기게 엮고 모래알 같은 보석을 꿰어 넣는 것으로 재질의 한계를 극복해 냈다. 터무니없이 복잡한 작업이었다. 도식의 대부분을 제공한 안나타르마저 그걸 완수해 낸 고집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 정도였으니.

고리의 끝과 끝을 마침내 연결한 켈레브림보르가 눈을 들자 안나타르는 심란함을 감추며 환하게 웃었다.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페아나린케.”

“너무 오래 걸려.”

켈레브림보르는 아랫입술을 비죽였다.

“이런 식이었다가는 힘의 반지를 만들 수 있는 요정은 나 혼자일 거야.”

그래서는 곤란하지, 음. 맞장구를 치면서도 안나타르는 자신과 켈레브림보르가 염려하는 바가 영 다를 것임을 알고 있었다. 켈레브림보르는 힘의 반지가 엘렛사르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해 주길 바랐다. 원을 이루는 금속을 증폭의 매개체로, 보석을 힘의 근원으로 삼아서. 안나타르는 증폭 효과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 제공할 힘은 그 자신이 지닌 것으로도 차고 넘쳤다.

그러나 당장은 그들 둘 다, 더 많은 반지들이 더 널리 퍼지는 것을 목표했다.

켈레브림보르가 첫 번째 시제품에 반 년 가까이 매달려 있는 동안 그들의 이론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필요한 보석의 수를 줄이고 중복되는 매듭을 쳐 내는 것은 단순한 축에 속했다. 바느질하듯 한 땀 한 땀 노래를 깁는 것이 아니라, 정밀한 거푸집을 만들어 내 반복될 작업의 기틀을 잡는 것. 시제품이 삼 분의 이쯤 완성되었을 무렵 켈레브림보르는 그렇게 포부를 밝히고는 반지를 반쯤 풀어 버렸었다.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 꼭 설계도의 잘못만은 아니었던 배경 중 하나였다.

이제 켈레브림보르의 손바닥 위에 놓인 반지는 정교했으나 아름답지는 않았다. 켈레브림보르는 이 역시도 단점으로 꼽았는데, 안나타르는 요정의 미에 대한 집착을 잘 이해하지는 못하면서도 가능한 한 신경은 써 주었다. 은사만 섬세할 뿐이지 포도 넝쿨처럼 얽힌 반지는 미묘하게 균형이 어긋난 데다 테의 굵기가 들쭉날쭉한 구석이 있었지만, 그래도 실패작은 아닐 터였다. 켈레브림보르의 손이 닿았는데 실패라니, 안나타르에게 그보다 낯선 말은 존재할 수 없었다.

“끼어 보겠어?”

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안나타르는 몸을 움직였다. 작업실 한편의 화병에는 사흘 전 꺾어 온 꽃가지가 얌전히 꽂혀 말라 가고 있었다. 켈레브림보르는 조금, 아주 조금 망설이더니 곧이어 장갑을 벗고 반지를 오른손 중지에 끼었다. 시든 꽃을 되살려 내는 것쯤은 웬만한 신다르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켈레브림보르는 유달리 그런 데 재주가 없었다. 벌어진 손아귀가 꽃가지를 가리켰다. 안나타르는 숨을 삼키며 켈레브림보르가 의지를 구현하는 것을 응시했다.

누렇게 바래던 잎사귀가 고개를 들었다. 잎맥부터 뻗어나가는 진녹색에 켈레브림보르의 손끝이 일순간 흔들렸다. 손바닥 절반만 한 잎의 가장자리마다 톱날 같은 모서리가 바짝 서고, 꽃잎이 다 떨어져 외롭게 남아 있던 꽃받침에 흰빛이 돋아났다. 꽃잎 끄트머리가 옅은 자줏빛으로 물들고서야 안나타르는 말을 되찾았다. 호랑가시나무 가지에 피어난 자그마한 꽃송이를 보면서,

“켈레보른 못잖은걸.”

“이실딘으로 덮으면 봐 줄 만하겠는데.”

켈레브림보르는 반지를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지금 기술로는 별빛 아래에서만 볼 수 있겠지만, 이실딘의 현현 조건을 반전시킬 수 있다면…….”

안나타르는 참지 못하고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르다의 역사에 남을 성과를 거둔 것에 비해 켈레브림보르의 반응은 심드렁했지만, 당연히, 당연히 그렇겠지. 그의 페아나린케, 넬랴쿠루핀웨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켈레브림보르에게 첫 반지는 잘 봐 줘야 시작이었다. 성공에 따른 고양감,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를 재확인한 데서 오는 즐거움,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고스란히 넘쳐 흘렀다. 소리 내어 웃는 그를 바라보며 그제서야 켈레브림보르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안나타르는 고개를 저으며 한 손으로 입가를 훔쳤다.

“영원을 원한다고 했지, 페아나린케.”

켈레브림보르의 손바닥은 마르고 단단했고, 어렴풋이 사느란 느낌을 주었다. 안나타르의 체온이 워낙 높은 탓이었다. 안나타르는 켈레브림보르의 중지에서 반지를 빼어 검지로 옮겼고, 켈레브림보르는 손을 맡겨 둔 채 묵묵히 안나타르가 하는 일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이마와 이마가 맞닿을 만큼 가까이 붙어 서 있었다. 약간 헐렁한 감이 있는 반지는 그물처럼 수많은 보석을 가두고 빛을 냈다.

왼손을 든 켈레브림보르가 서서히 안나타르의 뺨을 감싸 잡았다. 눈언저리에 스치듯 더해지는 압감에 익숙해질 새도 없이 손끝이 속눈썹을 더듬었다. 안나타르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으며 켈레브림보르를 마주보았다.

멜리안과 싱골에게 밤꾀꼬리가 지저귀는 난 엘모스가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오후의 햇살에 금과 황동의 빛깔로 젖어 든 호랑가시나무땅이 있었다. 작업실의 천장은 그림자조차 드리우지 않는 유리였으며 서까래는 선명한 금갈색이었다. 에레기온의 초여름은 매년 그린 듯이 유순했고, 원목 탁자에 눈처럼 소복이 쌓인 은싸라기마저 엷은 온기를 덧입었다. 켈레브림보르는 안나타르의 눈꺼풀이 접힌 선을 따라 손가락을 옮겼다.

“이게 네 대답이야?”

정말로 적응 하난 빌어먹으리만치 빨라서는. 안나타르는 짐짓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이번에 켈레브림보르의 평온한 말투 아래 숨겨진 것이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임을 알지 못할 수는 없었다. 안나타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 잡은 짐승을 놀래지 않으려는 사냥꾼처럼 찬찬히, 조심스럽게. 페아나린케, 나는.

“이로써 나의 영원을 약속하겠어.”

켈레브림보르의 시선이 추를 매단 듯 툭 떨어져 내렸다. 안나타르는 본능처럼 그 끝을 좇았다. 두 계절을 뛰어넘어 호랑가시나무 가지에 영근 열매는 선명한 진홍색이었다.

그날따라 유독 하늘은 푸르렀고 태양빛은 냇물처럼 새맑았다. 미르다인 본부 중앙의 첨탑에서 등불을 손보던 켈레브림보르는 문득 오른손 검지에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베였나 싶어 내려다본 손마디에서는 반지가 달아오른 듯 창백한 아지랑이를 피워올렸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금속이 손가락 둘레를 빠듯하게 옥죄어 왔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잠식해 켈레브림보르는 공구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 예감이 형체를 갖추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반지를 낀 모든 이들의 영혼에 고르사우르의 말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나선 계단을 뛰쳐 내려가고 있었다.

적의 이 보물 반지에는 그의 모든 원한과 예로부터 전해 오는 마력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에레기온의 장인들이 들었고, 자신들이 사우론에게 배신당했음을 깨닫게 된 그 말은, 바로 그 암흑기로부터 전해 오는 말입니다.

‘모든 반지를 지배하고, 모든 반지를 발견하는 것은 절대반지, / 모든 반지를 불러 모아 암흑에 가두는 것은 절대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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