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리프 이주 0P 사건

a thin red line

핀웨 家 | 180920 티스토리

rhindon by 댜

광기와 이성 사이에는 가느다란 붉은 선이 있어, 세상의 적과 싸우는 이라면 누구든 그 선 위를 걷게 된다 했더랬다. 그러니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로, 에레이니온.

초반에는 분명 잔뜩 달구어졌던 야영지의 공기는 하루하루 식어내렸다. 치료사들이 마에드로스가 죽지는 않을 거라 장담한 탓도, 기운을 차린 핀곤이 여느 때처럼 임무에 복귀한 탓도, 마에드로스가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결국은 아무도 페아노르의 아들들에게 그들 형의 소식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암로드의 이름이 거론되기는 했으나 사실 그들 중 누구도 암로드의 감정 상태를 장담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야영지를 비우고 떠난 후로 아직도, 페아노르 가문과 그들 사이에는 공식적인 교류가 없었다. 핀곤 말마따나 회색요정들이 까마귀가 보석을 물어나르듯 열성적으로 소문을 옮기기는 했지만.

모두가 경황이 없던 처음 이틀 간 핀곤은 제 모험 이야기를 못해도 대여섯 번은 되풀이했을 것이었다. 주로 페아노리안, 아니면 앙그반드의 방비를 알아내야 한다는 집념으로 똘똘 뭉친 가신들의 소행이었지만 핀곤은 이야기를 풀어내다가도 자주 눈시울을 붉혔고, 핀골핀은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 핀곤에게 보고서나 하나 적어보라는 권유를 했었다. 그러니 핀곤의 탁상에 나뒹구는 구깃구깃한 피지는 그 노력의 산물임이 틀림없었다.

임무로 복귀했다고는 하나 핀곤은 여전히 남는 시간 대부분을 마에드로스 곁에서 보냈다. 돌아온 지 여드레쯤 되었을까 하니 깨어날 법도 하련만 마에드로스는 좀처럼 눈을 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에 더불어 손끝에 비뚤거리는 핀곤의 큼직한 글씨에 힘입어, 핀골핀은 어렴풋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오래 전 그가 조카를 두고, 울지도 않는 얌전한 아이라 했을 적 피나르핀은 운명이 확고한 의도를 갖고 그를 기다리노라고, 그러나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는다 답했던 일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막상 만도스의 심판이니 하는 것들에 맞닥뜨리고 나니 동생의 예지를 믿어봐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니 마에드로스는 깨어날 테다. 그 후의 운명은 아직 알 바 아니었다.

보고서에 제대로 시선을 주자, 그러고서야 핀곤이 꾹꾹 눌러 써놓은 글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편지나 다름없이, 격식이라고는 내팽개친 서술에 핀골핀은 또 한 번 싱긋 웃고는 그래, 뭐라고 썼나 볼까 하는 마음으로 종이를 집어들었다.

동생 하나는 잘 뒀더구나, 하는 비꼼에 돌아온 것은 하나만이 아니라는 무심한 대답이어서, 핀골핀은 목검을 세게 틀어 쳐내고는 곧바로 멈칫했다. 마에드로스의 검은 일부러 던진 듯 날아올랐다. 조카가 발을 헛디뎌 주저앉자 핀골핀은 생각없이 제 검을 내팽개치고 달려갔다. 꺾인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는 조카는 그러나 별다른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는 상고로드림을 떠올려야 마땅했으나 눈앞에 겹치는 것은 티리온 궁성 안뜰의 붉은머리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오른손을 내밀려다 그는 반대쪽 손을 뻗었다. 마에드로스가 엷은 한숨을 뱉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무릎을 골이 파이도록 긁어놓고서도 제 숙부를 빤히 올려다보며 도와줄 수 있느냐 물었던 꼬마와 이제 검을 도로 잡아들고 자세를 고치는 청년은 아무래도 닮아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마침 생각났다는 양 말해버렸다.

“텔루핀웨 일은 유감이다.”

모르고스는 조카의 얼굴에 흉터를 그려넣은 대신 표정은 말끔히 지워 놓은 것 같았다. 마에드로스는 고개를 까딱 옆으로 기울였고, 짧은 적발은 나무 사이 비쳐드는 햇살에 노란빛을 띠었다. 네르다넬이 이 자리에 있다면 그를 여전히 마이티모라고 칭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아라카노도요. 좋은 아이였는데.”

“카나핀웨는 페아나로가 배에 불을 질렀다더군. 사실이냐?”

마에드로스가 그날 처음으로 슬며시 웃더니, 카나핀웨가 어떻게 말했을지 압니다, 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잊었다가 새로 익힌 동작은 전과 같지 못했다. 핀골핀은 눈을 껌벅이다가 계속 이야기하라고 손짓했다.

“페아나로가 한 순간의 광기로 배를 태웠고, 우리는 거기 휩쓸린 잘못밖에 없다는 식으로 암시했겠죠. 틀렸어요. 방화도, 텔루핀웨가 죽은 것도 페아나로가 홀로 저지른 짓은 아닙니다.”

“너는 비켜 섰다고도 하던데.”

무슨 상관입니까, 중얼이는 조카의 손 안에서 목검이 비틀거렸다. 공터는 덤불을 치워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군데군데 맨 흙이 드러나 있었고, 둘러선 나무들 한쪽으로는 언뜻 미스림 수면이 일렁였다. 북쪽 언저리에 얼추 더 가까운 곳이었다. 핀골핀은 핀곤 대신 공터 가운데 서 기다리던 그를 보고도 눈 한 번 깜짝 하지 않던 조카를 되새기고는 미간을 찡그리지 않으려 애썼다. 핀곤은, 대체. 하기야 이쪽해안은 매일같이, 그가 가장 잘 안다 여겼던 아들이 그리 가늠하기 쉽지 않음을 그에게 입증해 왔었다.

핀골핀은 소론도르가 호반에 내려앉는 것은 보지 못했었다. 어린 오로드레스가 질린 낯으로 달려와 그의 소매를 당기자 그는 손질하던 활을 내던지고 호숫가로 뛰쳐나갔으나, 피나르핀의 아들들보다는 한 발 늦었다. 밀려든 요정들의 웅성임 위로 핀로드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때맞춰 도착한 그는 혀뿌리까지 올라온 것만 같은 심장을 도로 삼켜야 했다. 다른 이도 아닌 핀로드가 내뱉으리라고는 채 상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내리지 마!”

솜이불을 덮어씌운 듯 모인 모두가 일제히 숨을 죽였다. 거리가 있었지만 소론도르 위에 탄 핀곤의 얼굴은 또렷이 보였고, 핀골핀은 아들의 청회색 눈 너머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군중을 헤치고 독수리에게 다가가는 핀로드 양옆으로 앙그로드와 아에그노르가 따라붙었다. 핀골핀은 차마 더 다가가지 못했다. 반은 두려움, 나머지 반은 아직 그가 나서서는 안 된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핀로드는 소론도르의 날갯죽지까지 성큼 걸어가, 흐트러짐 없는 발음으로 물었다.

“넬랴핀웨야?”

핀곤은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피어오르는 수군거림 사이로 헬카락세니, 만도스의 저주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가, 앙그로드가 사납게 휘 둘러보자 잦아들었다. 핀로드는 이번에는 소론도르를 응시하며 물었다.

“소론타르,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핀곤은 손을 뻗어 핀로드를 끌어올려 주었다. 핀로드가 잿빛 덩어리 위로 몸을 숙이고서야, 불가피하게, 핀골핀은 페아노르의 장자를 보았다. 살을 에는 얼음과는 이 어찌나 동떨어진 잔혹함인지! 놀도르가 헬카락세를 흉폭하다 부를 때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덧입힌 성질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애걸하는 심정으로 핀로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가 선 곳에서는 도무지 핀로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둥근 머리 위로 빛이 바뀌었고 핀로드는, 힘을 담은 음성으로, 크게 소리쳤다.

“앙가라토! 고모님을 모셔 와. 거기 너, 겔미르, 너는 들것! 아르미나스는 어딨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돌아 달리기 시작한 앙그로드가 핀골핀을 알아보고서는 미간을 좁힌 채 씩 웃었다. 핀곤의 등이 훅 허물어지면서 핀로드가 사촌 둘을 받쳐 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로만 바라보는 구경꾼들에게 아에그노르가 짐짓 자랑스럽다는 듯 제안했다. 모르고스의 잘난 콧대에 한 방 먹인 내 용맹스런 사촌에게 만세 한 번 외쳐줍시다—hail, Findecáno Astaldo, son of Finwë-Nolofinwë our king! 아이야, 하고 군중이 맞받아 소리 질렀다. 핀골핀은 그때에야 안도했다. 빌어먹게 영리한 아이들이었다. 만약 독수리에게 먼저 다다른 것이 투르곤이었다면.

 그러나 아에그노르는 뒤이어, 이만 제자리로 돌아갑시다, 하며 사람들을 흩었고, 핀골핀은 서둘러 호숫가로 걸음을 옮겼다. 핀로드가 귀뜸을 했는지 홱 고개를 든 핀곤이 그를 보더니 흠칫 놀랐다. 먼지투성이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다친 기색은 없었다. 핀골핀이 조금 전 핀로드가 섰던 곳에 이르자 그는 심지어 뻔뻔하게 미소짓기까지 했다.

“다녀왔습니다, 나의 아버지.”

아타리냐. 핀곤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목이 꽉 메어 오는 것을 한숨으로 감추며 그는 손을 뻗어 아들의 발목을 토닥였다. 예상했다시피 미소가 무너지는 것은 찰나의 일이었다. 아버지, 루산돌이, 하며 더 말을 잇지 못하는 아들은 결국 안쓰러워서 그는 그만, 괜찮을 게다, 믿지도 않는 소리를 하고 말았고, 그 한 마디에 다시 환해지는 얼굴은 나이답지 않게 어려 보였다.

요정 둘이 들것을 메고 달려옴과 거의 동시에 랄웬이 도착했다. 핀로드가 먼저 내려 핀곤에게서 사촌을 넘겨받고 들것에 누였다.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악취에 핀골핀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어느 틈엔가 곁에 다가온 아레델이 낮게 속삭였다.

“저쪽에서 난리나겠네요.”

그가 돌아보기 무섭게 아레델은 그를 지나쳐, 막 땅에 발을 딛는 핀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형제의 등을 퍽퍽 두드리는 딸아이의 흰 옷에 피고름이 묻어나자 그는 눈길을 돌렸었다.

오늘은 이만 할까요, 묻는 조카에게 핀골핀은 그러자며 동조해 주었다. 마에드로스는 벗어둔 겉옷 쪽으로 움직이며 맞은 적 없는 다리를 절뚝였고, 핀골핀은 그가 무리를 시켰나 고민했다. 하루 걸러 하루 갖는 만남을 놓치게 되는 것을 망설이던 핀곤에게 대신 나가주마 이야기했을 때, 핀곤은 제발, 제발 그를 여느 신병 다루듯 하지는 말라고 당부했었다. 그래도 군말없이 따라오길래 걱정하지 않았는데. 예기치 못하게 솟아난, 분명 오지랖일 충동에 핀골핀은 마에드로스를 쫓아가 그의 목검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야영지까지 같이 가자. 논의할 게 있는데.”

직접 이야기할 필요야 없다 뿐이지 거짓말은 아니었다. 마에드로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서야 정찰에서 돌아온 갈라드리엘은 왜 진작 자신을 부르지 않았냐며 아에그노르를 타박하고는 치료소를 겸하는 가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아에그노르는 핀골핀을 보면서 쑥스럽게 변명했다.

“투루카노랑 같이 나가 있어서 못 부른 거였는데요.”

“핑계는.”

아에그노르는 피식 소리내어 웃었다. 조금 전, 좌우에서 투르곤의 팔짱을 끼고 끌고 가던 핀로드와 앙그로드도 그랬지만, 가건물 안쪽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다급한 소음에도 피나르핀의 아들들은 썩 유쾌한 듯했다. 핀골핀은 구태여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는 다만 그들이 내다보는 미래가 한동안은 밝을 것임을 확신했고, 그로써 위안을 얻었다. 좀처럼 실감은 나지 않았으나, 어쨌든 그의 아들은 앙그반드로 홀로 걸어 들어가 제 사촌을 구해낸 것이었다.

그때 노을빛 바람을 굳힌 것처럼, 허공에서 느닷없이 암로드가 나타났다.

“내 형님은 어디 계시지?”

아에그노르는 섣불리 앞으로 나서면서 핀골핀을 밀쳤고, 그는 균형을 잡으려 뒷걸음질했다. 아에그노르가 허리춤의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내가, 망설이리라고는, 생각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툭툭 끊긴 협박을 뱉으며 에아르웬의 아들은 그와 암로드 사이를 가로막았다. 암로드가 비릿하게 웃으며 재차 물었다. 내 왕은 어디 계시냐고.

“네 눈앞에. 무릎 꿇어라, 피탸핀웨.”

사냥칼을 말아쥔 아레델이 아에그노르와 어깨를 맞댔다. 먼 발치서 주춤거리며 일어서던 요정들이 이내 각자 무기를 찾아들고 그들 주위로 원을 그렸다. 암로드는 꼿꼿이 서 움직이지 않았다. 애시당초 그는화려한 옷을 즐기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의 차림은 지나치게 단순했고, 딱 달라붙는 소매 폭도, 팔목과 정강이에 감은 가죽끈도 눈에 익지 않은 형태였다. 핀골핀은 한숨을 누르며 딸과 조카를 양쪽으로 밀어냈다.

“오랜만이구나. 몇 년이지? 너희가 이쪽 해안에 있었던 게 말이다.”

“루산돌. 내 형 어디 있냐고!”

등장만큼이나 갑작스러운 발악에 핀골핀은 떠올렸던 질문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원래 저들 것이었던 야영지의 구조, 호수를 둘러가는 길, 모리퀜디와의 연관성, 전부 알 바 아니었다. 말에 명백하게 깃들어 뼈보다는 가시인 암시에 페아노르의 아들이 반응하지 않는 것은 나름의 비상령이었으니. 아레델이 황망히 아에그노르와 눈을 맞췄다. 암로드는 발을 탕 굴렀다. 더 적대해 보았자 얻을 게 없겠다는 판단을 내리고서 핀골핀은 차분한 어조를 유지하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피탸핀웨, 암바룻사—

암로드가 내지른 비명은 처참했다. 오죽하면 치료소에서 랄웬이 피묻은 앞치마 그대로 달려나올 정도였고, 그 소리를 코앞에서 들은 아에그노르는 덩달아 단말마와 함께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레델은 할 걸음씩 물러나다가 핀골핀의 옷깃을 잡았다. 핀골핀은 그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내닫았다. 붉은머리 요정은 허리를 반으로 꺾으며 귀를 막았다. 침인지, 눈물인지 흙에 물방울이 후둑 떨어졌다. 손끝이 암로드의 팔뚝에 닿았을 때쯤 아버지, 하는 속삭임이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스스로의 얼굴에 박혀드는 손을 떼어내고 그를 끌어안은 후에야 단검이라든지, 암기에 생각이 미쳤다. 그것도 잠시뿐, 암로드가 정신없이 몸부림쳤다. 암바룻사, 다시 부르자 새삼 더해지는 발악에 문득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거센 타격음이 울리며 암로드가 축 늘어졌다. 랄웬은 주먹을 내리면서 잇새로 으르렁거렸다. 오라버니는 너무 물러. 핀골핀은 누이에게 흐릿하게 웃어주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텔루핀웨가 죽은 것 같지. 아이카나로?”

컥컥거리던 아에그노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아, 하고 신음했다. 핀골핀은 의식을 잃은 암로드를 반쯤 들쳐업었다. 이걸 이제 어쩐다.

“일단 이 아이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보고, 괜찮다 싶으면……. 랄웬, 그, 상태는 어떻지?”

“오라버니가 그 애 아비도 뭣도 아니라 하는 말이지만, 살 것 같은데.”

그리고 랄웬은 적잖이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그렇지만 아라카노, 나는 오라버니가 핀데카노와 이야기를 좀 해 봤으면 해…….

몇 시간 후 깨어난 암로드는 치료사들의 반대에도 치료를 끝낸 마에드로스의 옆구리에 몸을 말고 누워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었다. 핀골핀이 새벽녘에 들여다 보았을 때 그는 마에드로스의 오른손목을 제 손으로 감싸고 있었고, 핀골핀은 랄웬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핀곤은 지금쯤 일어났으려나. 그가 잠깐 방을 나서 보초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자 페아노르의 막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낙엽을 밟으며 가볍게 걸어가는 요정은 그때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달라져 있어 핀골핀은 위화감마저 느끼고 마는 것이었다. 그가 눈에 담았으나 차마 직시하지는 못했던 마에드로스에게는 차라리 찢겼다는 말이 어울렸었다. 그럼 제 조카의 얼굴을 하고서 낯선 이처럼, 또는, 세상에 낯선 이처럼 구는 자는 누구인가. 핀골핀은 문득 자신이 보지 않은 것들과 보지 못하는 것들을 후회했다. 잇단 질문은 실은 그 감상의 산물이라 할 만했다.

“티리온을 기억하느냐?”

마에드로스는 경첩같이 멈춰 서 그를 돌아보았다.

“당연하지요.”

“그때 네가 어땠는지도?”

“논의한다는 게 이것이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알고 싶다, 라는 말에 마에드로스는 느릿하니 눈을 감았다 떴다. 먼 옛날 스쳐지난 이후 다시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그러니 아이들이 저희 사촌을 낯설어 하는 것인가.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쿠루핀이 찾아왔었다. 하필 랄웬이 마에드로스가 열이 올랐다며 핀곤을 치료소에서 쫓아냈을 때였고, 야영지 목책으로 달려오는 그의 뒤로 투르곤이 따라붙었기에 핀골핀은 둘이 함께 있었던 모양이다고 짐작했다.

뭐, 쿠루핀은 싸울 생각은 없는 듯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핀골핀은 그가 페아노르를 얼마나 빼닮았는지 잊고 있었다. 그리고 쿠루핀의 차분함이 꽤 소름끼친다는 것도. 경비병들이 요구하는 대로 쿠루핀은 순순히 호위를 떼어놓고 홀로 야영지에 발을 들였고, 검을 풀어 넘기더니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비수마저 꺼내 맡겼다. 그러고는 핀골핀 앞에 다가와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숙부님. 투르곤이 그를 심상치 않게 노려보자 핀골핀은 핀로드를 불러오라며 둘째 아들을 떠밀어 보내고는 대답했다.

“오랜만이구나, 쿠루핀웨.”

야영지를 비우고 떠난 것을 공적인 첫 전언으로 친다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소문이야 무성했었지만, 정작 페아노르든, 마에드로스든, 마글로르든 말을 전해 와야 할 자는 침묵을 고수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쿠루핀은 무슨 생각인지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건 어쩌면, 감히 그리 믿을 수만 있다면, 어딘가 뉘우치는 것 같이도 보여 핀골핀은 입가를 굳혔다. 그는 쿠루핀이 페아노르와 달리 감정을 속이는 데 능함을 모르지 않았다.

“살을 에는 얼음을 무사히 건너오신 것에 마땅한 경의와 찬사를.”

그 뒤에 환청처럼, 친족의 신의를 알게 되어 기쁩니다, 하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쿠루핀이라면 그렇게 덧붙이고도 남았다, 제 형의 구출까지 신의라는 미명 하에 포장하고도. 핀골핀은 오히려 쿠루핀이 그러지 않은 것에 놀랐다. 그러나 쿠루핀은 뜻밖의 노선을 취했다.

“그리고 내 형제에게 보여주신 자비에 감사를, 페아나로 가문의 카나핀웨 마칼라우레를 대신해 표합니다.”

아주 굽히고 들어오겠다고 작심한 모양이었다. 암로드를 말이냐, 물으려다가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놀도르는 그대들을 반기지 않네만.”

“시험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형제가 언제부터 네게 이런 의미를 가졌지? 쿠루핀웨.”

핀로드가 슥 그의 뒤로 붙어 섰다. 앙그로드와 함께였다. 앙그로드가 주위를 기웃거리는 요정들을 떼어놓으려 막 손짓했을 때, 쿠루핀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언제부터요? 글쎄, 페아나로가 내 막내동생을 태워 죽이고부터가 아닐까. 핀로드는 곧장 핀골핀의 어깨를 붙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믿지 마세요.

“저럴 아이가 아닙니다, 백부. 믿지 마세요!”

 안다, 입모양으로 말하고서 핀골핀은 쿠루핀에게 시선을 돌렸다. 쿠루핀은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조금 씩씩거리며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진심이거나, 모르고스 뺨치는 연기력이거나. 로스가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고백이기는 했다. 그리고 뒤이은 말은 지나치게 시기적절했다.

“그가 한 일이 아닙니다. 숙부님께서 제 가문을 증오하셔도 저는 변명할 수 없지만, 그는 아니라고요. 배를 불태우길 거부한 건 형님밖에 없었단 말입니다.”

거기서, 우리 중 당신 편을 든 건 마에드로스뿐이었으니 그를 해친다면 당신들에게도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도움이 필요한 건 맨몸으로 여기 온 당신들도 마찬가지 아니냐, 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읽은 것은 무리한 일이었을까. 쿠루핀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입술을 꾹 물었다. 큰형을 걱정하는 미숙한 동생의 가면은 썩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 걱정은 거짓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핀로드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물었다. 쿠루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말을 이었다.

“형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모시고 돌아갈 수 있게.”

“상고로드림에 버려둔 주제에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보군.”

핀곤이 끼어든 것은 처음이었다. 성을 가까스로 다스리는 모습이 낯설었다. 그러나 쿠루핀은 마른 눈으로 핀골핀만을 바라보았다.

“부탁합니다, 숙부님.”

그리고 핀골핀은 그저, 이 대치가 진저리가 났다.

“데려갈 만한 상태는 아닐 게다. 몇 시간 기다리겠다면 만나게는 해 주마.”

쿠루핀이 토끼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가, 감사합니다, 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핀골핀은 핀곤에게, 쿠루핀을 치료소 앞까지 데려다 주고 경비를 붙이라는 언질을 주고 나서, 안절부절못하는 핀로드를 돌아보았다. 핀곤과 쿠루핀이 말소리가 들릴 범위를 벗어나자마 핀로드가 와락 따졌다.

“저걸 믿으셨습니까? 왜?”

“믿은 게 아니다. 어쨌든 제 형제지 않느냐.”

“그게 문제라고요!”

핀로드가 미간을 짚었다가,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저들은 넬랴핀웨의 형제지 백부님의 조카가 아니란 말입니다. 저들의 맹세와 살육과 배반을 잊으셨습니까?”

“넬랴핀웨……가 방화에 동조하지 않은 게 사실이라면,”

핀골핀은 내처 말했다.

“넬랴핀웨로서는 우리를 친족으로 여긴 거겠지. 어차피 우리가 이곳에 온 이상 저들과는 협력해야 한다. 남은 고리가 넬랴핀웨뿐이라면 그를 잡아야 하지 않겠느냐.”

앙그로드의 얼굴이 확 일그러지는 것을 핀골핀은 똑똑히 보았지만, 문제삼을 여력이 없었다.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왜 카나핀웨는 직접 오지 않았는가.

……며칠을 걸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땅이 넓다는 것은 헛말이 아니더군요. 평원을 반쯤 건넜을 때였나, 정오의 햇살이 따가워 문득 바사를 바라보았다가, 빛을 못이겨 눈길을 내렸더니, 세상에. 넓이가 가파르더군요. 꿀같은 황금빛의 야반나의 들판이나, 새빨간 양귀비가 피어나고 그림자가 춤추는 로리엔과도 같지 않았어요. 선연한 녹색으로 솟는 오로메의 너도밤나무와도 달랐고요. 그건 그러니까, 수채화로 아만의 풍경을 그려내던 화가가 그만 물통을 엎은 것만 같은, 그런 회색이었단 말입니다. 감히 잿빛이라고는 하지 않겠어요. 잿빛은 상고로드림 절벽과 앙그반드의 강철 문에나 어울리는 말이니까. 하지만 아타리냐, 저 멀리 고원을 뒤덮은 소나무숲을 아버지도 보셨어야 하는 건데!

아, 왜 핀곤이 거기서 펜을 멈췄는지 알 법했다. 핀골핀은 편지를 덮고 조용히 핀곤의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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