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의 종말
안나타르 × 켈레브림보르 | 210426 포스타입
“하지만 아이를 낳을 마음은 없는 겁니까, 페아나린케?”
묻는 바부터 그 끝의 호칭까지 완벽하게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질문이다. 켈레브림보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안나타르를 노려본다. 이 무렵의 그는 아직 안나타르를 친구처럼 여기지는 못하나, 그렇다고 몇몇 장인들이 그러듯 숭배하지도 않기에. 두 나무의 빛 아래에서 자란 그에게 서녘의 사자는 그 신분만으로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하다. 그래 이 안나타르 아울렌딜이 진정으로 마이아면 또 어떠랴, 태초부터 그의 부계는 어떤 권능 앞에서도 스스로 굴종한 적이 없다.
하지만.
하지만 이 질문에는 무슨 답을 내놓아야 할지는 불분명해, 켈레브림보르는 곧바로 입을 열지 않는다. 말에는 무게가 있고 한 번 소리가 된 뜻은 세상의 역사에 기록되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남게 되므로. 대신 그는 불쾌함을 억누르고 생각을 더듬는다. 후회하지 않을 대답을 찾기 위해서.
“당장은요.”
고민에 비해 답은 짧다. 당연하지만 안나타르는 그쯤에서 만족하지 못한다.
“어째서?”
“반대로 묻지요.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안나타르는 흐음, 콧노래 같은 소리를 내며 잔을 기울인다. 켈레브림보르는 한숨을 내쉰다. 부연은 필수적이다. 다른 이에게라면 기대치도 않았을 납득이 단 한 사람, 안나타르와의 일에 있어서라면 얻지 못해서는 안 될 것이 되고 만다.
그는 안나타르를 이해해야만 한다. 낯선 사자를 오스트 인 에딜에 들였을 때 그는 자처해 경계와 관찰의 의무를 짊어지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그는 안나타르에게 이해받아야만 한다. 심장을 갈라 안팎을 뒤집어 보여서라도, 손등의 가죽을 벗겨내고 하나하나 힘줄을 당겨서라도. 서녘의 힘이요 아울레의 권속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켈레브림보르를 온전히 간파할 수 없고, 그는 지나치게 오랜 시간 외로웠던 탓에 절박해졌다. 그래서 그는 말을 곱씹는다. 에레기온의 기후는 온난하고 여름 밤은 얇은 담요 한 장처럼 편안하며 그들은 풀벌레 울음 잔잔한 정원에 앉아 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별빛은 지난 시대의 것보다 한참 흐려지고 말았으나, 여전히, 애가 닳도록 아름답다.
흰 테이블 위로 켈레브림보르는 조심스레 두 손을 올려 놓는다.
“내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압니까?”
“은의 손.”
질문의 답이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안나타르는 아두나익으로 말한다. 켈레브림보르는 웃으며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린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이제 동부변경의 억양이 남은 신다린이다. 옛 시대 놀도르의 영주들은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자리에서는 자신들만의 퀘냐를 사용했지만, 켈레브림보르에게 언어란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는 것이었다.
그는 장인이지 시인이 아니나 그의 가문에는 학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 가문에 오직 그만이 남은 지금에 와 그 점은 더더욱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된다.
“내 백부는 날 티엘페라고 부르고는 했는데. 그래서는 안 되었습니다. 은빛이란 수식일 뿐 정작 중요한 것은 뒤에 있었으니까요. 잡고 놓치지 않는 손아귀, 그들이 날 그리 불렀더라면 난 좀 더 욕심을 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안나타르를 직시한다. 요정의 은회색 눈 속에서 안나타르는 텔페리온의 흔적을 읽어낸다. 달은 기억을 간직한다고 했던가. 엘다르는 어째서 황금보다 은을 더 값지게 여기는가.
“그대는 놓을 줄 안다는 말이로군요. 후계자를 원치 않으십니까? 린돈의 어린 왕 때문에, 혹은 오스트 인 에딜의 숙녀 때문에?”
“난 내 친족들을 사랑합니다만 그들의 알량한 혈통까지 존중하지는 않습니다,”
라고, 켈레브림보르는 농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어조로 말한다. 안나타르는 그의 말과 표정에 꼬리표를 붙여 정리해 둔다. 이따금 켈레브림보르는 평소의 유순함을 가면 벗듯 떨쳐낸다. 그 가면이 완전한 거짓이라 하기는 어렵다, 요정들이 꽃과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함은 육체에의 모욕이 아니듯. 가면보다는, 그러니, 불편한 예복이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안나타르는 켈레브림보르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러나 손과 손이 맞닿기 전, 켈레브림보르가 먼저 입을 열어 묻는다.
“왜 나를 페아나린케라 칭합니까?”
“…….”
“왜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 아니라 분신으로 알려지고 맙니까? 아십니까? 나는 발라르의 바닷가에서 내 아버지의 죽음을 느꼈습니다.”
그때 직감했다. 아름다운 켈레고름은 그가 몇 살을 먹든 늘 젊게만 여겨졌으므로 그는 젊은 백부의 죽음을 느꼈고, 그가 쿠루핀의 행위는 부정하고 그 가문은 비판했으되 자신의 이름마저 버린 적은 없으므로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느꼈다. 쿠루핀웨 티엘페린콰르는 켈레브림보르가 되어 말한다. 그때 아버지가 죽는 것을 느꼈노라고. 그는 디오르의 검이 내리쳐졌던 찰나 쿠루핀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그때 자신이 무엇을 손에서 놓쳤는지는 기억하고 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검은 모래 위 잘그락 떨어지던 눈물을 잊지 않았다.
쿠루핀웨의 아들 쿠루핀웨는 망명 놀도르의 왕자이자 힘라드의 영주였으며 나르고스론드의 찬탈자였고 종국에는 동족살해자였다, 그가 죽었을 때 한 세대는 끝나고 만 것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래 전, 횃불 가득했던 티리온의 거리에서 쿠루핀웨의 삶은 그 이상의 모든 가능성을 잃었는가. 켈레브림보르는 안나타르의 잔에 술을 채운다. 육신을 입은 자들은 어버이를 갖고 아이를 낳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자신을 잃는다. 세대의 종말. 서녘의 권능 중 하나인 이 자는 영영 경험하지 못할.
술병을 내려놓다 말고 켈레브림보르는 병목 둘레를 한 번 움켜쥔다.
잿가루 흩날렸던 바람 속에서, 그때에 쿠루핀웨의 삶은 끝난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검은 적이 놀도르의 왕을 살해하였을 때 이미 연쇄는 시작되었는가, 선대의 불운이 빚처럼 상속되는 이 끈질긴 운명은. 그의 후계자는 쿠루핀웨이면서 쿠루핀웨가 아니었고, 그 점에서 그는 쿠루핀이었던 부친과, 페아나로였던 조부와 다르지 않았다.
“내 이름은 은의 손 곧 켈레브림보르임을 알면서, 왜 나를 나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습니까? 왜 내게서 내가 아닌 자의 자취를 찾습니까? 왜 당신은 페아노르의 아들 쿠루핀은 찾지 않는 것입니까? 내 물음을 이해하게 된다면, 내가 어째서 아이를 원치 않는지도 깨달으실 겁니다.”
안나타르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으나 그의 얼굴은 일말의 미동도 없이 굳은 채고, 켈레브림보르는 이 순간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희귀한 상황을 인식한다. 안나타르의 당혹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작업실에서라면 자랑스러움을 솟구치게 했을 일은 그러나 여름 밤의 정원에서 실패가 된다. 그리고 켈레브림보르는, 이해를 간구하며 또 포기를 모르는 켈레브림보르는 때문에 덧붙인다. 난 이것만은 놓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페아노르의 후계자이지 작은 페아노르가 아니란 것을요.
들려오는 대답은, 기적처럼, 그가 지극히도 바라 마지않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붙잡으세요, 페아나린케. 날 거짓말쟁이로 만드세요! 당신 핏줄에 흐르는 피와 당신의 영혼은 별개임을 증명하세요,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가 우리 앞에 펼쳐지도록. 달도 없는 밤하늘 아래에서 안나타르는 여명처럼 찬연한 목소리로 선언했고, 그 당당한 오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때에 켈레브림보르는 또 한 발짝 다가섰다. 미래를 향해, 피치 못할 종말을 향해.
어쨌든 아직 그의 앞에는 긴 시간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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