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리프 이주 0P 사건

these great deeds

투린 × 벨레그 | 210504 포스타입

rhindon by 댜

하지만 그 말에 정신을 차린 후린의 아들은 사납게 쏘아붙였다. ‘난 벨레그 곁에 머물 겁니다. 신실치 못한 목소리여, 내게 그를 떠나라 하지는 마십시오. 만사가 허무하군요. 아 검은 손의 죽음이여, 그대 내게로 가까이 오라! 후회가 그대를 감화할 수 있다면, 나를 애도에서 해방시켜, 패배한 채 그의 차가운 가슴에 안기도록 하라!’

그러자 귄도르의 공포는 떠나갔고 분노와 연민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대 긍지를 기억하시오! 상고로드림 꼭대기에 속박된 후린조차 그렇게 생각 없이 말하지는 않았소.’

(중략)

그리고 귄도르는 그 황량한 지대에서 벨레그의 장례를 준비했다. 그는 벨레그가 슬프게도 쓰러졌던 곳에 그 시신을 그대로 눕혀 두었고, 오랜 시간을 들여 그 위로 나뭇잎을 덮었다. 하지만 마른 눈으로 서 있던 투린은 갑자기 뒤돌아 시신 위로 몸을 던졌고, 벌어진 차가운 입술에 입을 맞춘 후 벨레그의 눈을 감겼다.

“왕성의 사람들이 그러더군. 자네가 짓밟힌 민족의 검은 머리 소년과 우정을 맺었다고 말이야.”

“그래서?”

“사실인가?”

메네그로스에서의 일이었다. 벨레그는 변경수비대원들의 대장이었고 자유로운 전투를 즐기는 요정들의 지도자였으나 또 싱골의 신하이기도 했고, 영영 장막 외곽에만 머물 수는 없었다. 겨울을 맞아 오르크들의 침입이 뜸해지자 그는 변경의 일을 믿을 만한 부관들에게 맡기고 메네그로스로 돌아왔던 참이었다. 투린은 고집을 부려 변경에 남았었지만, 싱골은 벨레그가 가져온 소식만으로도 그럭저럭 만족하는 듯했다.

어느 모로 보나 그간 시달렸던 것에 비하면 무난한 방문이었다고 해도 좋았다. 골치아프게 지껄여 대는 학예관들도, 그를 붙잡고 늘어지는 모사꾼들도,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런 파랑도 일으키지 않은 채 딤바르로 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다시 왕성을 떠나기 몇 시간 전, 벨레그가 멜리안의 시녀들에게 망토와 겉옷을 맡겨두고 잠시 숨을 돌리던 사이 마블룽이 그를 찾은 것이었다.

벨레그는 다듬던 화살을 내려놓고 마블룽을 노려보았다.

“사실임을 알고 있으니 물을 테지. 괜한 소문으로 속뜻을 숨기지 말게, ‘무거운 손’ 마블룽의 명성도 흐려졌으며 자네가 싱골의 조신들처럼 전장을 잊은 것이 아니라면!”

“잊지 않았어.”

마블룽은 그래도 질책을 부당하다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벨레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니르나에스 아르노에디아드 이후 벨레그 쿠살리온은 악몽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할레스 일족이 브레실 숲에 도착한 이후 줄곧 그들을 지켜보아 왔으나, 그들과 나란히 싸웠던 다고르 브라골라크에서조차 인간이 얼마나 쉽게도 죽는지를 알아차리지는 못했었다. 그가 사실을 사무치도록 깨달은 것은 니르나에스에서였다. 그의 시력이 석양 속에 금빛 언덕으로 쌓인 시신들을 잡아냈던 그 전장에서.

투린은 어머니를 닮아 머리카락이 검었고, 종종, 밤과 함께 니르나에스의 기억을 떨쳐내야만 했던 벨레그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

마블룽은 이아스림 가운데 그와 함께 그 전장에 섰던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그에게 공감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마블룽 하나뿐이었다. 벨레그는 가만히 마블룽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인간의 아이에게 정을 주는 게 정말 현명하다고 생각하나?”

그렇게 운을 떼며 마블룽은 벨레그가 놓은 화살을 집어들었다. 하필이면 다일리르, 벨레그가 이제껏 잃어버리거나 부러뜨린 적이 없어 가장 오래 지녀 왔던 그 화살이었다. 벨레그는 한 손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마블룽은 화살촉 끝을 툭툭 건드리며 벨레그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외손잡이 베렌의 친족이지 베렌 본인이 아니네. 이미 그 아이 앞으로는 긴 그림자가 늘어져 있고…….”

“마블룽.”

벨레그는 그나마 조금 침착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순순히 말을 멈춘 마블룽이 그를 바라보았다.

메네그로스의 동굴 속에는 교묘하게 끌어들인 햇빛이 사방에서 어른거렸다. 너도밤나무 같은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던 벨레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리 주변으로 일부러 내던진 양 흐트러졌던 화살을 주워 모으며 생각을 골랐다. 적어도 그쯤이 이제껏 모든 전쟁에서 등을 맞대고 싸워온 친구에 대한 예의일 것이었다.

그가 침묵하는 사이 마블룽은 말없이 다일리르를 돌려 놓고서 정리를 도왔고, 그가 합세하자 전통은 곧 다 채워졌다. 온전한 화살과 아직 손보지 못한 화살이 뒤섞여 마침내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부모 없이 눈 뜬 최초의 요정 중 하나이니, 내가 그 아이와 보낸 세월은 내 생애에서 눈 한 번 깜박일 새에 불과해.”

“바로 그게 문제지.”

“아니, 끝까지 듣게. 그렇지만 그 아이는 – 운명이 그애에게 너그럽다고 쳐도 – 기껏해야 팔십, 구십 년을 살게 될 거야. 난 이미 그중 십 년 넘는 시간을 받아 버리고 말았어. 인간의 삶은 유한하니 그 아이의 시간은 내 것보다 훨씬 값비싸지. 내가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겠나?”

“갚을 것을 바라고 내어 준 것이겠나?”

“그렇지 않으니 더 어려운 일인 거야.”"

그러나 그 말은 벨레그 자신에게조차 핑계처럼 느껴졌고, 마블롱 역시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블룽은 더는 그에게 투린에 관한 일을 캐묻지도 않았다. 전통을 어깨에 메는 벨레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을 뿐이었다.

벨레그는 아직 깃이 헝클어진 화살 몇 대를 들고 도망치듯 멜리안의 정원으로 향했다.

수선된 망토와 겉옷을 돌려받아 왕성을 나설 때까지 그는 찜찜한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도리아스는 이제껏 한 번도 직접 침공된 적 없는 나라였다. 짓밟힌 일족이라고? 감히 그런 말을 하는 자들, 활 겨눠 본 상대라곤 무력한 짐승뿐일 자들과는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변경의 수비대원들은 누구도 투린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투린이 검을 잡는 것마저 낯설어하던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강인한 전사의 잠재력을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한 지금까지.

눈 덮인 숲길을 걷는 내내 그의 걸음걸이에는 조금의 염려와 조금의 짜증과 그 절반쯤 되는 두려움이 따라붙었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흔치 않은 발자국이 두엇 찍혔다.

딤바르에 세워 놓은 숙영지 중 하나에 다다라 벨레그는 휙 휘파람을 불었다. 그를 맞으러 달려나오는 검은 머리 소년은 사랑스러웠고 품에 안기는 체온에는 마음이 꽉 차올랐다, 그래서 벨레그는 왕성의 소문과 마블룽의 걱정과 한없는 눈물의 무덤을 모두 염두에서 지워냈다.


잠에서 깼을 때 그는 여전히 나무둥치에 묶여 있었다.

아만에서 나고 자란 놀도르는 물 없이도 몇 달을, 음식 없이도 몇 년을 버틸 수 있다며 회자되었지만, 벨레그가 본 두 나무의 빛은 멜리안의 눈에 비친 것뿐이었고 그의 육체는 양분을 필요로 했다. 벨레그는 자신이 며칠을 더 살아남을지 계산해 보려다 그만두었다. 무법자들에게 그를 살릴 생각이 있다면 살 것이었고, 없다면 죽을 것이었다. 그는 저릿저릿한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며 움직였다.

빌어먹을, 그는 투린에게 밧줄과 사슬에 관해 그가 아는 전부를 가르쳐 주었었고 이 ‘네이산’은 무법자들에게서 지식을 아끼지 않은 게 분명했다. 처음 붙잡혔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달아날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모닥불 주변에서 누군가 언성을 높였다.

“그럴 리 없어!”

벨레그는 순간 흠칫해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 그를 깨웠던 것일지, 꿈결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흐트러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법자들은 똑같은 말을 십수 번씩 하는데 이골이 난 족속이었다.

“네이산은 죽었을 거라니까!”

가슴이 철렁했다. 벨레그는 불가를 뚫어져라 응시했고 곧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짚어냈다. 그에게 올가미를 던졌던 것과 같은 사내였다. 안드로그—무법자들은 그를 안드로그라고 불렀었다.

“오르크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제아무리 두령이라도 빠져나올 재간이 있었겠어? 저 요정은 죽여 버리고 우린 도망치자고.”

“두령은 지금껏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왔어.”

그러나 그렇게 말한 무법자는 조금 주눅 든 기색이었고, 벨레그는 잠에 든 동안 그를 내버려두었던 절망이 다시 발목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시기를 단단히 잘못 잡은 듯했다.

근처에 오르크 부대가 있었다. 있었었다. 과거형인 것은 투린과 오를레그라는 무법자가 그것들을 쫓아간 지도 며칠이 지났기 때문이었고, 이제 무법자들은 그 둘의 생사는커녕 오르크들의 위치조차 알지 못했다. 적어도 그쯤이 하룻동안 벨레그가 무법자들의 두런거림으로부터 유추해 낸 바였다. 벨레그는 하도르 가의 후계자가 고작 오르크 몇 마리에게 목숨을 잃었으리라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졌다 한들 그런 의미 없는 죽음이 투린의 몫일 리 없었다.

하지만 벨레그는 제 자신의 목숨에 관해서는 그 어떤 장담도 하지 못했다. 첫째로는 그를 묶은 밧줄이 지나치게 튼튼해서였고 둘째로는 저 안드로그라는 사내, 투린이 없는 새 무법자들의 두령 역을 대신한다는 자가 그의 활인 벨스론딩에 탐욕스런 시선을 두어서였으며 셋째로는…….

상상키도 싫은 일이었으나 투린이, 만에 하나라도 정말로, 오르크 부대와 얽힌 끝에 죽은 것이라면. 북녘의 적이 귀환한 후로 벨레그는 많은 상실과 애도를 지켜보아 왔고 슬픔이 어떻게 요정을 망가뜨리는지를 배웠다. 육신과 영혼의 결합을 유리시키는 것은 단지 육신 한쪽의 상처만이 아니었다.

그는 야생의 아들, 숲이라면 모를까 또다른 어버이는 알지 못하는 벨레그 쿠살리온이었다. 고대의 별빛은 아직 그의 손짓마다 반짝였으며 야반나의 잠은 그의 숨결에 너울거렸다. 인간 아이 하나에게 내걸 만한 생애냐 묻는다면 단연코 부정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을 잠식하는 공허는 전혀 다른 대답을 시사하고 있었다. 벨레그는 이를 악물었다. 선잠이나마 자고 난 후였던 탓이었을까, 피로와 두려움 사이에서 후자가 결국에는 승기를 잡았다.

모닥불가의 무법자들은 몇 마디씩 더 쑥덕거린 끝에 흩어졌다. 막 저녁 식사를 끝낸 모양인지 개중 서넛은 이 빠진 그릇이며 냄비를 들고 근처의 시내로 향했고, 나머지는 동굴 안이나 나무 그늘 등에 제각기 자리를 잡았다. 잿빛 들판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기울고 있었다. 또 한 번의 저녁이었다. 계절은 초여름이라 하지가 멀지 않았지만, 한없는 눈물의 전장에서 엘다르의 꽃이 진 이래 날은 빠르게도 저물고는 했다.

그리고 안드로그는 휘청휘청 그 앞에 다가와 섰다.

“마음은 좀 바뀌셨나?”

벨레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브레실의 할라딘, 혹은 몇 년 전 히슬룸에서 만났던 하도르 가문의 전사들에 비하면 이 무법자들은 참으로 가우르와이스, 곧 늑대인간들이라 할 만했다. 안드로그의 머리카락은 밀짚 같은 푸석푸석한 금발이었으나 그 눈빛이나 표정은 피 맛을 본 들개가 따로 없었다. 안드로그가 뽑아든 단검 끝이 턱밑에 차게 닿아오자 벨레그는 비로소 눈길을 들었다. 무법자는 누리끼리한 이를 드러내며 비뚠 미소를 지었다.

“‘네이산은 내 친구요. 난 그를 사랑하여 찾고 있소.’ 왜, 그런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나 보오?”

따끔한 통증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벨레그는 맹수의 앞발 사이 사로잡힌 사냥감의 공황과 상처 입은 들짐승의 치욕스러움을 동시에 견디며 입안 살을 짓씹었다. 두려웠다. 투린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리하여 눈앞의 이 자가 무슨 짓을 하든 그 자신의 목숨 역시 빠져나갈 수 없는 구렁텅이 속으로 추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안드로그는 두렵지 않았다. 불운히도 안드로그는 그 사실을 눈치챈 듯했고, 이런 부류의 종자들은 제 앞에서 겁에 질리지 않는 것을 도전으로 여겼다.

씨발, 거친 욕설과 함께 안드로그가 침을 뱉었다. 칼끝이 살갗을 찢었다. 축축한 기운이 뺨과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에 벨레그는 그만 두 눈을 감았다. 그것도 잠시, 다음 순간 옆머리에 채찍을 맞은 듯 통증이 일자 그는 안드로그가 그를 칼등으로 후려쳤음을 알았다. 눈꺼풀 안쪽이 새하얗고 새까맣게 물들었다. 숨이 목구멍에서 턱 걸렸다. 안드로그는 그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빠득 이를 갈았다.

“어디까지 버티나 두고 보자고, 요정 나으리.”

뒤통수가 나무기둥에 거칠게 처박혔다. 벨레그는 신음을 삼켰다.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하듯 안드로그는 이상하리만치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입가를 꾹 눌렀고, 곧이어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갔다. 그제야 벨레그는 밧줄에 체중을 실으며 축 늘어졌다. 머리가 어질어질해 다리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옷깃이 피와 침에 젖는 느낌이 선명했다.

바람은 서늘했지만 요정이 이겨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다른 이유로 몸이 떨렸다.

다음날에도 그는 줄곧 침묵을 지켰다. 또 한 번 저녁이 찾아들자 무법자들은 전처럼 모여들어 한참을 은밀히 의논했다. 엿들으려면 못할 것이야 없었겠지만, 벨레그는 대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법자들의 음성은 깨진 유리 같이 거슬렸고 그가 그런 데 구태여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만 하루가 지났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배가 주릴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으나 갈증은 그새 익숙한 고통이 되었다. 저들에게 추궁할 것이 남았다고 해도 과연 목소리를 내어 대답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았다. 벨레그는 가만히 나무들의 그림자가 동굴 앞 공터로 길게, 우이넨의 머리카락처럼 끝도 없이 뻗어나가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법자들의 모닥불은 동굴 어귀에서 다시금 붉게 타올랐다.

그때 그들 중 하나가 성큼성큼 걸어 모닥불로 다가갔다.

“울라드!”

누군가 급히 소리쳤다. 울라드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양손을 넓게 벌리며 말했다.

“이 자가 지난 며칠 얼마나 우릴 괴롭혔는지 잊은 건가? 그가 스스로 네이산의 소유라 주장하니 낙인을 찍도록 해!”

이번만은 벨레그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의 힘을 벗어난 것일 터였다. 사실 고개를 들 힘이 남아있는지조차 의문스러웠지만.

벨레그가 지친 눈길만으로 그의 움직임을 좇는 사이 울라드는 모닥불 옆에 쌓인 장작더미에서 팔뚝만큼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들었다. 무릎에 대고 나뭇가지를 꺾은 울라드는 주머니칼로 꺾인 면을 대충 다듬고는 끝에 불을 붙였다. 무법자들은 그 곁으로 몰려들어 들개 떼처럼 낄낄거렸다. 기이하게 뒤틀린 축제의 행렬 같은 모습이었다. 회색 인영 사이로 위를 향한 화살표가 주홍빛으로 번뜩였다. 네이산, 키르스 룬으로 네이산의 머릿글자였다. 허탈한 웃음이 혀끝에 걸려 흩어졌다.

낙인을 든 것은 울라드였지만 앞장선 것은 아니나 다를까 안드로그였다.

조롱도 도발도 없었다. 안드로그는 대뜸 벨레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겨 옷깃을 찢었다. 벨레그는 얼굴에서 당혹을 지우지도 못한 채 안드로그를 마주했다가, 안드로그가 물러나고 그 자리에 울라드가 들어서자 그 비열한 웃음을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공포가 아니라 역겨움 때문이었다. 울라드는 불꽃을 그의 목젖 가까이 들이대며 물었다.

“할 말은 없나?”

문득 가슴속 깊이 모욕감이 스며들었다. 후린의 아들, 이런 자들이 너를 욕보이고도 살아남아야 한단 말인가? 이미 세상 바깥으로 떠나 버렸을지도 모를 인간 아이 탓에 심장이 얼어붙어 깨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질끈 두 눈을 감았고, 그래서 투린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것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투린의 목소리까지 알아듣지 못할 리는 없었다. 밧줄은 풀렸다. 그는 억센 팔이 그를 끌어안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투린과 가우르와이스를 뒤로 하고 도리아스로 돌아가는 내내 벨레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는 투린의 목숨을 걸고라면 그 자신조차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했다. 하물며 저 악랄한 무법자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싱골과 멜리안 앞에서 그는 무법자들의 비행을 숨겨 주었고, 동시에 멜리안의 렘바스를 받아들고서도 그의 발걸음은 아몬 루드가 아니라 북부 변경으로 향했다.

한동안 그는 그곳에서 충실한 회색요정들과 함께 적의 짐승들을 사냥하며 시간을 보냈다. 너도밤나무 잎사귀는 갈색으로, 자작나무는 화사한 노란색으로 물들어갔다. 북부 변경에서 비로소 앙글라켈은 이제껏 겪었던 것의 배를 넘는 전투를 거쳤고 검은 칼날은 오르크의 피를 머금어 탁해졌다. 수없이 많은 화살이 오르크의 갑옷이며 방패에 부딪혀 부러지고 꺾였어도 벨스론딩의 위력은 변치 않았다. 다일리르는 언제나 온전한 채로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시냇물이 얼어붙었다.

여름과 가을 내 쓰던 숙영지를 정리해야 할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벨레그는 변경수비대원 몇을 데리고 식량과 의약품을 챙긴 후 좀 더 낮은 지대로 향할 생각이었는데, 하필 그때 어느 부하가 그의 의견을 구하는 듯 그를 불렀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어 다가가 보니 부하는 나무 상자의 뚜껑을 손에 쥔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열린 상자 안에서는 엷은 광채가 새어나왔다.

그는 하도르의 용투구를 바라보았다. 미명 속에서도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글라우룽은 어떤 위대한 운명을 예지하는 듯했고,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머리를 어루만졌다.

후린의 아들은 영영토록 야생지대를 떠돌다 스러지도록 이 땅에 난 것이 아닐 테다.

어떤 오래된 노랫가락에 홀리기라도 한 양으로 그는 부드러운 천과 노끈을 찾았다. 화살과 창날을 맞아도 끄떡없을 투구를 유리 구슬을 다루듯 고이 감싸고서, 다시 여분의 옷가지에 말아 배낭 가장 깊은 곳에 집어넣은 후에야 벨레그는 그대로 멈춰 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문제는 그가 투린을 사랑한다는 데 있었다. 그는 흰 봉랍으로 묶인 렘바스도 별철을 제련한 검도 결코 부러지지 않는 화살도 원치 않았다. 투린 곁에 머물지 못할 바에야.

북부 변경을 떠나는 길에 그의 사냥개들은 끙끙 울며 그의 발치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는 왠지 모르게 먹먹한 기분으로 놈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도리아스의 숲속에서 처음 투린을 찾았을 때 그와 함께 달렸던 개들은 이제 한 마리도 살아 있지 않았다. 옳지, 그는 막연히 중얼거렸다.

“마블룽이 날 찾는다면, 난 늑대 사냥을 갔다고 전해 주렴. 그는 알아들을 테니.”

딱히 잘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었지만, 그는 베렌 에르카미온을 생각하는 것이기도 했다. 베렌과 루시엔을, 지혜에 반하는 사랑을, 유한한 삶의 값어치를. 어떤 위대한 일들을.

그는 결국 투린의 말대로 행하고 말았다. 아몬 루드에서 벨레그는 투린의 아들을 찾았고, 이후로 그 주변의 땅은 도르 쿠아르솔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탈라스 디르넨 동부, 브레실 숲의 남쪽으로 펼쳐진 활과 투구의 땅. 그곳에서 '센활' 벨레그는 검은 주목으로 만든 벨스론딩을 자유자재로 다루었고 후린의 아들은 그 가문의 용투구를 기어이 되살려냈다. 무법자들은 물론 브레실의 인간들까지 도르로민의 용이 돌아온 것이라며 수군거리고는 했다.

투린은 그런 말을 썩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만의 방식대로, 누군가 그리 이야기할 때마다 수줍은 소년처럼 벨레그를 돌아보며 작게 미소했던 것이었다.

벨레그로 말하자면 투린이 행복해한다면 땅의 이름이야 어찌 되든 좋았다. 그가 조금 더 염려하는 것은 투린이 상종하곤 하는 친구들이었는데, 그래도 투린은 아직까지는 그를 가장 절친한 벗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 사실이 바뀌지 않는 한, 투린이 택한 사람들까지 존중할 수는 없더라도 그는 투린의 선택 자체는 존중해 줄 수 있었다.

그리하여 활과 투구 아래로 많은 요정과 인간들이 몰려들고도 꽤 시간이 흘렀을 때, 그리고 모르고스의 잦은 침범도 한여름의 긴 햇볕에 잠시 주춤했을 때 그들은 오랜만의 평화를 누리며 에카드 이 세드륀 곧 ‘충성스런 자들의 야영지’에 머무르고 있었다.

“왜 날 살린 거요?”

벨레그는 한숨을 억눌렀다.

“이유가 필요하시오? 그렇다면 네이산이 그대에게 기회를 주길 바라는 까닭이라 하지.”

“당신은 네이산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나?”

“꺾일 만한 뜻이 아니라면.”

도르 쿠아르솔에 머무는 자유 민족의 수가 늘어난 이후로 무법자들은 제비뽑기로 파수 조를 정했다. 도리아스의 변경수비대가 사용하던 방식이었지만 투린은 그것까지 무법자들에게 설명하지는 않았었고, 그러니 벨레그 역시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방식의 단점이라면 누가 그와 함께 아몬 루드 정상에 처박히게 될지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쉰 번 파수를 선다면 그 중 한 번은 안드로그가 걸리는 게 당연했다. 벨레그는 일부러 심드렁한 태도를 가장하며 툭 튀어나온 바위에 걸터앉았다. 안드로그는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당신은 하도르 가문 사람이 아니지.”

“뻔한 소릴 하는군.”

안드로그는 새파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하도르 가문은커녕 인간도 아니잖소. 그런데 왜 그렇게 네이산에게 쩔쩔매는 거지? 내가 당신이었다면 날 그냥 죽게 뒀을 거요. 저 음침한 난쟁이가 당신을 증오한단 걸 모르시오?”

“밈? 난 그자의 호의를 얻을 생각은 없는걸. 그가 네이산을 배신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오.”

“네이산이 당신 주군일 리는 없어. 당신은 그와 지나치게 친밀한 척 군단 말이오. 그렇다면 연인이라도 되는 건가?”

이번에는 벨레그가 안드로그를 응시할 차례였다.

부상에서 회복된 지는 몇 달이 지난 후였으나, 안드로그의 눈밑에는 여전히 검은 얼룩 같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어쩌면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자국이었을지도 몰랐다. 벨레그는 이제껏, 안드로그가 독에 당해 생사의 고비를 헤매고 있던 그때를 제외하고는 안드로그에게 관심을 기울인 적은 없었다. 의도적인 무시였다. 실상 안드로그는 그의 불안에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대가 알지 못하는 일들에 관해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시오.”

“납득하기 힘드니 이런 소릴 하는 거란 생각은 못 하겠소?”

어깨를 으쓱한 안드로그는 멋대로 칼을 꺼내 칼끝으로 손톱 밑을 쑤시기 시작했다. 벨레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제 턱 밑을 쓸었다.

“그대에게 아들이 있다면 내 마음을 알 텐데.”

파수꾼들은 네 시간 단위로 교대했고, 다음 순번을 맡은 이들이 올라오기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더 이상 말하지 않으려거든 그래도 좋았다. 하지만 막상 몇 마디 말을 주고받자 벨레그는 더는 안드로그를 없는 셈 칠 수 없었다.

그가 투린의 품 안으로 쓰러졌었던 그날, 그는 투린과 안드로그의 언쟁을 들으며 서서히 정신을 차렸었다.

‘당신들은 잔인해.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단 말이오. 우린 지금까지 사로잡은 자를 고문한 적은 없소. 하지만 우리가 살아온 삶이 결국 우릴 이 오르크 같은 짓거리나 하게 만들었군. 우리가 그간 행한 일은 무법하고도 무익하였고, 우리 자신들만을 위한 일이었으며 마음 속에 증오심이나 심어 주었을 뿐이야.’

‘우리 자신이 아니면 그럼 누굴 위해 일한단 말이오? 모두가 우릴 미워하는데, 우리가 누굴 사랑한단 말이지?’

안드로그는 여인을 죽이고서 도르로민에서 추방당했다 했었고, 또 그에게는 어머니 없는 아들이 있었다. 거기까지 떠올리고 나자 벨레그는 문득 오싹한 기분이 들어 내뱉은 질문을 주워담고 싶어졌으나, 안드로그는 어느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이산을 아들처럼 여긴다고? 아니…… 네이산이 자넬 아버지로 여길까?”

“글쎄.”

벨레그는 입가를 문질렀다.

“친구로 족하니 됐어.”

안드로그의 시선에는 기묘하게 열띤 구석이 있었다. 벨레그는 자신이 대화의 주도권을 놓쳤음을 깨달았다. 그는 튕기듯 일어섰다.

언덕 꼭대기를 두어 번 가로지르고 나자 정해진 시간은 다 흘러갔고, 암벽의 층계를 따라 세 쌍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하나는 투린의 것이었는데, 벨레그는 느닷없이 밀려오는 안도감에 스스로도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검은 머리 하나가 불쑥 돌 위로 솟아올랐다. 곧이어 투린은 그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벨레그! 안드로그! 여기 있었군요. 이제 교대 시간이라길래 한 번 찾으러 와 봤지.”

“궁수가 모자라기라도 했소?”

핀잔한 안드로그는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재빨리 층계로 향했다. 하지만 투린의 일행은 아직 좁은 층계를 올라오고 있었고, 안드로그는 층계 맨 위에서 잠시 주춤거렸다. 그 사이 벨레그에게 바싹 다가온 투린은 어떤 즐거운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여전히 미소를 입에 달고 있었다. 얼떨결에 벨레그는 투린에게 양 팔뚝을 붙잡혔다.

안드로그가 여태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갑작스레 몹시도 거슬렸다.

투린은 무어라 말하며 그에게로 고개를 숙였고, 벨레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뺨에 붙는 입술의 감촉만큼은 분명히 느꼈다. 단순한 인사일 뿐이었다. 메네그로스의 궁정에서 화술과 예의를 배운 투린에게는 어쩌면 하도르 가문의 예의보다도 익숙할. 하지만 안드로그는 파란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으며 벨레그는 무언가 차가운 것이 그의 흉곽 속에 자리잡는 것을 느꼈다.

투린이 잔뜩 들떴던 것은 그리 큰일 때문은 아니었다. 마침 할레스 일족 사람들에게서 받았던 딸기술 한 병이 잘 익은 참이었었고, 그날 투린은 동굴 속 수많은 방 중에는 얼핏 메네그로스와 비슷한 무늬로 햇빛이 비쳐드는, 아마 화실이었을 듯한 곳을 찾아냈었다. 아마도 투린은 이런 것들이 벨레그 역시 즐겁게 해 줄 거라 기대한 듯했다. 벨레그는 사실 메네그로스가 딱히 그립지는 않았지만, 그날따라 유독 어린아이처럼 구는 투린이 달가워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달큼한 향기가 피어오르는 잔을 받아든 투린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옛일이 떠오르는군요. 내가 멜리안의 장막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당신은 나와 내 일행을 당신의 오두막으로 데려갔었죠. 당신이 보낸 변경수비대원이 메네그로스까지 달려갔다 돌아오는 동안, 그때에도 우리는 이렇게 함께 앉지 않았었습니까?”

“그걸 기억하는가?”

태연히 고개를 끄덕인 투린은 곧 놀란 얼굴이 되어 침묵했다. 벨레그는 눈을 깜박였다. 인간의 아이들이 요정과는 달라 어린 시절을 쉽게 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은 그 정도를 알 만큼 벨레그가 신경을 썼던 아이는 투린뿐이었다.

“투린.”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그 무렵 내게 슬프지 않았던 기억은 그것밖에 없어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내게 도르위니온의 포도주를 내어 주었고 나는 곧바로 잠들고 말았지요. 하지만 난 그 전에 당신이 내게 무어라 했는지까지 기억합니다. 내가 장성하면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 무렵에도 자네에게는 용사의 자질이 보였으니까.”

그러나 투린은 이제 우울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한 손에 턱을 괴었다. 벨레그는 갑작스레 위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도리아스에서 그가 어린 투린에게 숲과 전쟁의 기술을 처음 가르쳤던 이후, 투린이 이런 불길한 감상에 젖어 내리는 결정 중 지혜롭다고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은 적었던 탓이었다.

“자네 동족의 셈으로도 자네는 아직 젊어. 그리고 후린의 원수를 갚는다 해서 그간 일어났던 모든 해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투린은 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내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였을 때 도르로민의 군주였잖습니까? 벨레그 쿠살리온, 인간의 삶은 유한하며 그로써 이룰 수 있는 일들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영광의 순간을 누리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장막의 땅을 언급하지는 말라 하였으니, 그곳을 들먹이지는 않겠네. 하지만 투린, 자네는 도르 쿠아르솔을 다스리고 지켜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인가? 다시 묻지. 이 땅을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자네가 어렸을 적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네만, 갈수록 자네가 바라는 위업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겠어.”

“당신이 생각하는 위업은 무엇입니까? 그런 위대한 일들은?”

벨레그가 멈칫하자 투린은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니르나에스 아르노에디아드에서 엘다르 백성과 내 일족의 아버지들이 다가올 날을 부르짖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서지 못한 그 전장에서요. 당신이 싱골의 우려를 무릅쓰고 참전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리고 벨레그는…… 모르고스가 가운데땅에 돌아온 이래 근 오백 년간 끝나지 않는 싸움을 치러 온 벨레그 쿠살리온은 그 질문에 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거대한 전쟁을 앞두고 장막 속에서만 숨어 있기란 부끄러운 일이어서, 한 번도 검과 활을 잡은 적 없었더라면 모르되 끝도 없이 쌓여갈 뿐인 죽음을 보면서도 마냥 구원을 기다리는 것 역시 못할 노릇이었기에. 그러나 그건 충분한 설명은 아니었다. 마블룽이라면 모르되 숲의 아들인 그는 명예를 바라지도 않았었다. 어쩌면 단지, 그가 메네그로스의 고요에 염증이 나 있었다 하는 편이 가장 정확할지도 몰랐다.

전투의 결말을 똑똑히 본 이후에도 벨레그는 니르나에스 아르노에디아드를 안타까워했을지언정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의 긴 생에서 그토록 강렬했던 순간은 한 손에 꼽을 수 있었고, 거대한 운명이 몰려드는 그 찰나만큼은 그는 세월의 압박 없이 자유로웠었으므로.

그는 망설임 끝에 빙 두른 대답을 내놓았다.

“……내가 자넬 찾아온 것과 같은 이유였겠지.”

그러자 투린은 그 말에 이르기까지의 대화를 아예 잊은 듯 지독하게도 기쁜 표정을 지어 버려, 벨레그는 차마 그에 대고 다른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을 고백하자면 이랬다.

그는 투린의 모든 순간을 기억했다. 요정에게 십오, 십육 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으나, 너도밤나무 사이로 길을 잃었던 아홉 살 시절부터 투린에게는 눈을 뗄 수 없게끔 하는 존재감이 깃들어 있었던 까닭이었다. 투린의 영혼은 맹렬한 불꽃처럼 타올랐고, 짙은 공허 속으로 가라앉아 가기만 하는 세상에서 그런 빛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다. 운명이 그의 등 뒤에서 금빛 찬란한 휘광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앞으로는 긴 그림자가 뻗어나갔다.

고집불통에 오만하기 짝이 없던 소년은 막무가내의 발걸음으로 세상을 지르밟았다. 엘다르의 삶이 아르다의 끝에서 끝까지 늘어져 그들의 족적이 풀잎 하나 꺾지 않는다면, 투린은 꼭 제 몸을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듯이 사지가 닿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켰다.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도자기를 깨는 일은 다반사였다. 어린 투린이 활을 배우다 조급함에 그만 활대를 부러뜨렸을 때 벨레그 쿠살리온은 – 어쩌면 가운데땅의 그 누구보다도 먼저 – 벨레리안드의 정세와는 별개인, 오롯이 투린만의 것인 어둠을 직감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탓에 그는 투린을 사랑했다. 고집과 오만 뒤편의 외로움을, 혈족 하나 없이 홀로 낯선 사람들 사이 남겨진 아이의 심정을 알았기 때문이었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더라도 그는 투린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었다. 투린의 시간은 그렇게도 무거웠다. 투린이 헤집고 지나간 이후로 벨레그는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그러니 그래, 그날의 마블룽이 옳았을지도 몰랐다. 이건 값을 논할 일이 아니었다.

오르크 부대가 아몬 루드를 공격하기 전날 밤, 벨레그는 재의 땅이 되고 만 안파우글리스의 꿈을 꾸었다. 밤이 내린 회색 대지에서 그는 발을 헛디뎠고, 다일리르는 그의 몸 아래로 길게 쪼개졌다. 구부러진 화살촉이 그의 손바닥을 긁었다. 벨레그는 화끈거리는 통증에 잠에서 깨어났고 그날 저녁까지 꿈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후로도 한동안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난 당신을 압니다, 벨레그 쿠살리온. 메레스 아데르사드에서 당신은 도리아스를 대신해 자리를 빛냈지요. 느닷없는 화염이 아르드갈렌과 로슬란의 평원을 불태웠을 때, 브레실의 할라딘을 도와 적을 물리친 것도 당신이었고요. 카르카로스를 사냥하던 무리에는 당신도 끼어 있었잖습니까? 그리고 난 당신이 니르나에스 아르노에디아드의 전장에서 싸웠다는 것 역시 압니다.”

낯선 요정의 눈은 불 붙은 듯 빛나고 있었다.

“나는 구일린의 아들 귄도르입니다. 우린 따지자면 전우지요.”

“귄도르! 그렇다면 나 역시 당신을 안다 할 수 있겠군요. 우리 만남이 이런 장소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다니 애석합니다만, 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당신을 돕겠습니다. 하나 내 걸음은 다른 곳에 묶여 있어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이곳은 한때 도르소니온, 피나르핀의 아들들의 아름답고도 자유로운 영지였었으나, 다고르 브라골라크 이후 머리 위의 나뭇가지는 뒤틀렸고 숲의 바닥에는 그림자가 빗물처럼 고여 갔다. 벨레그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귄도르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 자신의 부상도 다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귄도르를 돌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과 렘바스를 나누어 주자 귄도르는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고, 오르크 선발대가 바로 얼마 전 부근을 지나갔다는 이야기까지 떠올려 벨레그에게 전해 주었다. 벨레그로서는 불행한 소식이었다. 선발대가 옛 도르소니온 땅을 질러 앙그반드로 향하고 있다면 남은 자들은 톨 시리온 쪽으로 돌아 가는 길을 택했을 공산이 컸으니까. 그렇다고 추격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두컴컴한 숲속에서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숲은 낯설었으나 벨레그는 아직 의지가 꺾이지는 않았다. 투린이 앙그반드의 강철 대문 뒤에 갇힌 것만 아니라면, 아니, 설령 투린이 이미 그 너머로 끌려가 모르고스의 눈앞에 매여 있다 하더라도 그는 투린을 뒤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 남쪽으로부터 수많은 오르크와 늑대들이 나타났고, 덤불 속에 몸을 숨겼던 두 요정은 저들 사이로 여러 포로들이 섞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중 검은 머리카락에 키가 큰 청년이 눈에 띄자 벨레그는 반사적으로 귄도르의 손을 붙잡으며 속삭였다.

“저기, 저 자가 내가 구하려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이는 인간이 아닙니까?”

벨레그는 조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후린의 아들 투린이며 하도르의 용투구를 이은 전사이고, 배신에 패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탈라스 디르넨 동부를 수호하던 영주였습니다. 한낱 인간이 아닐 뿐더러, 실상 나는 그가 나무꾼 소년에 불과하다 할지언정 그를 구하려 할 겁니다.”

귄도르는 지근거리를 지나가는 적의 병사들마저 잠시 잊은 듯 소스라쳤다. 벨레그는 가까스로 그의 어깨를 잡아 눌렀으나 귄도르는 어둠 속에서도 희번뜩 빛나는 눈을 크게 뜬 채 되물었다.

“후린의 아들이라고요? 상고로드림 꼭대기에 결박된 후린 살리온? 아! 그렇다면 난 다시 한번 물어야만 하겠습니다. 대체 왜 그를 구하려 하십니까? 불운한 인간의 아들에게 그럴 가치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짓밟힌 민족의 검은 머리 소년. 벨레그는 이제는 투린을 변호할 마음도, 자신의 우정을 설명할 마음도 없었지만, 타우르 누 푸인의 그늘 속에서 그는 나르고스론드의 귄도르와 눈을 마주쳤다. 어떤 희망이 높은요정의 잿빛 눈동자 너머로 깜박이고 있었다. 문득 아몬 루드 꼭대기에서 그의 사슬을 끊어 주었던 안드로그가, 그의 마음 안에 선이 자라나고 있다 단언했던 투린의 말이 생각을 사로잡았다.

그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투린은 위대한 일들을 할 테니까요.”

확고한 진실이나 완전한 진심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것만으로 충분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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