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t which is) a gentle heart
피나르핀 & 마에드로스 | 이넵 님 커미션 :D
청색산맥 기슭에서 일몰을 기다리던 중, 잉귀온은 지루한 시간을 흘려보낼 화젯거리라도 내놓듯 말했다. 머잖아 이 산맥이 가운데땅의 서쪽 경계가 될 거라더군요. 이쪽에는 해안만 좀 남기고요. 과연, 본인의 심성이야 어떻든 엘다르의 영원한 왕자란 화술을 공부할 필요는 없는 법이었다. 당장 피나르핀조차 저 말에 뭐라고 해야 부드러운 대답이 될지 머리를 쥐어짜게 되지 않는가.
“그야 권능들의 일이지요.”
침묵이 어색해지기 전 피나르핀은 가까스로 대꾸했다. 대륙을 설거짓감으로 여기는 권능들을 논하기에는 그날 그의 신경이 지나치게 예민했다. 친절하게도 잉귀온은 더 입을 열지 않는 것으로 그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어 주었다.
단명한 대화가 비워놓은 자리로 바람이 불어 들었다. 스산한 기운에 피나르핀은 애먼 팔뚝을 문질렀다.
낯익은 불길함이 스며들었다.
해가 지기까지는 아직 반 시간쯤 남아있었다. 키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며 둘러서 있었기에 주변은 이미 어둑했지만, 그들이 자리한 공터에는 아직 볕이 꽤 들었다. 그러나 해는 매일 저녁 졌으므로 피나르핀은 자신이 무엇을 예상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어둠. 저 북녘의 권능이 부려놓는 밤은 칠흑처럼 검었고, 오랜 세월 발리노르를 떠나본 적 없는 요정들은 아직 그런 밤을 헤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대장정을 겪은 이들마저도 이 땅에서 몇백 년간 그림자에 맞서 온 병사들에 비하면 눈가리개를 쓰고 허우적거리는 수준이었다.
그건 어쩌면 또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라고, 그는 적잖은 냉소를 담아 생각했다. 망명했던 놀도르, 그리고 그들의 우군이었던 벨레리안드의 회색요정과 숲요정들은 이곳의 전선은 물론 빛이 닿는 모든 땅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고 있었다. 그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아만의 후광과 권능들의 가호를 받은 군세가 산그늘에서 지체하며 밤을 기다리는 일에 대한.
올까?
밑도 끝도 없는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피나르핀은 소매 아래로 꾹 주먹을 쥐었다. 때마침 잉귀온이 그의 마음을 읽어낸 듯 말했다.
“늦는군요.”
“일몰을 약속했잖습니까?”
따지자면 행여나 늦을까 길을 서두르자 재촉한 것은 피나르핀이었으니, 잉귀온이 탓해야 할 것도 그였다. 처음부터 상대와 접촉하려 했던 것도, ‘난쟁이 길’의 길가에서 방랑자처럼 만나는 데 동의해 버린 것도 피나르핀이었다. 하지만 잉귀온은 어린 친족에게 화살을 돌리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피나르핀은 한숨을 쉬었다.
“잉귀온, 아직 시간은 남았습니다. 또 우리가 이미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불쾌히 생각했을 수도 있지요. 함정을 주의해…….”
“그자의 오만함이란! 그가 놀도르 군주의 자손이라고는 하나 또한 알쿠알론데의 살해자입니다. 실로 이 자리에서 목숨을 주의해야 할 것은 당신과 내가 아닙니까, 아라핀웨?”
“그 아이가 모링고토에게 붙잡혔던 것은 회담 제의에 응해서였으니까요. 인상 깊은 경험이었나 보지요.”
피나르핀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나무 사이로 무언가 움직였던가? 아니, 피로한 눈의 착각이었다. 그는 곤두선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좀 조용히 기다릴 수는 없는 건가?
“내 아들, 핀다라토가 이야기해 주었어요.”
귀환자들로부터가 아니라면 아만에서는 벨레리안드의 소식은 거의 들을 수 없었다. ‘비탄의 메아리마저’ 서녘에 닿지 못하리라는 심판은 문자 그대로 지켜졌다. 그는 핀로드가—이제는 펠라군드라고 불리길 원했다—돌아오기 전까지는 앙그로드와 아에그노르의 죽음조차 확실히 알지 못했었다.
적어도 이젠, 영혼 한구석이 뜯겨 나간 듯한 만성적인 통증에 적절한 이유를 붙일 수 있었다. 밤마다 아들이 흐느끼며 털어놓던 이야기만큼은 온 세상의 소리를 듣는 바르다 틴탈레도 금하지 못했었으니.
“몇십 년을 고문받았다던데.”
하지만 흘러나온 목소리는 무심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듯 평화를 가장하는 데 있어 피나르핀은 저 아라타르 못잖은 권위자였다.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잉귀온은 발마르의 사소한 치정 싸움을 전하는 듯 말을 받았다.
“그건 알쿠알론데 전이었답니까, 후였답니까?”
피나르핀은 낮게 웃었다. 즐거움이라곤 한 톨도 담기지 않은 소리였는데도 잉귀온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시시각각 내려앉는 어스름은 오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세상의 새벽, 두 나무로부터 비롯하는 빛은 지금처럼 희미하지 않았다. 물과 보석에 담고 파도를 따라 흘려보낼 수 있던 빛은 두 나무가 웅골리안트의 독에 당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발리노르 곳곳에 고여 있었고, 그리하여 어둠은 빛을 빨아 마시며 게걸스럽게 전진해 발리노르를 암흑으로 뒤덮었었다…….
이제 와 빛은 허공을 떠도는 먼지처럼 가볍고 손에 쥘 수 없는 것이 되었으나, 어둠만큼은 그때와 같은 진득한 악의를 띠고 있었다. 벨레리안드의 밤은 지독했다. 실로 피나르핀은 더는 저 권능들이 대륙 하나를 바다 아래로 가라앉히는 데 별다른 이의를 품지 못했는데, 지반은 물론 그 아래 심연의 불까지 모르고스의 손길이 뻗지 않은 곳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때 난데없이 날아든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갈랐다.
“아라핀웨.”
피나르핀은 놀라 허둥댔고 제 옷자락을 혼자 밟고 넘어질 뻔했다. 마에드로스는 그 꼴을 조소하는 기색을 내보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아주 모르는 척할 만큼 마음이 넓지도 않았다. 그는 성큼 걸어가 피나르핀의 팔꿈치를 잡고 당겨 몸을 똑바로 세워 놓았다. 주변에서 호위일 병사들이 황망하게 절그럭거리든 말든.
“조심하셔야지요.”
키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으나 고개를 숙여 얼굴을 맞대자면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피나르핀의 눈동자 위아래로 흰자가 확 드러나는 것을 보고서야 마에드로스는 한 발짝 물러났다. 얼떨결에 마에드로스와 팔뚝을 잡고 인사하는 모습이 된 피나르핀은 뒤늦게 손을 뺐다. 뿌리치다시피 하는 동작이었다.
마에드로스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구나.”
앵무새처럼 되풀이한 피나르핀은 딱 소리가 나도록 입을 다물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마주한 그는 뜻밖에도 예전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더 젊어 보이기까지 했다. 금사가 들어간 치렁치렁한 바냐르 양식 옷은 에아르웬과 혼인한 후로는 잘 입지 않던 것이었으니까.
마에드로스는 자신이 아주 어릴 적에나 막내 숙부가 인디스의 취향대로 바냐르 공자의 옷을 입어주었음을 기억해 냈다. 목을 가리는 높은 옷깃도, 손등을 반쯤 덮는 소매도, 발을 걸기 십상인 긴 겉옷도 그 시절에는 어렵잖게 볼 수 있었더랬다. 그 위로 소꿉놀이하듯 덧댄 판갑도 옛 모습을 다 숨겨주지는 못했다.
피나르핀의 뒤편에는 또 한 명의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그러나 마에드로스는 잉귀온의 존재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두 사령관을 둘러싼 병사들은 스무 명 남짓이었다. 주변에 다른 부대는 없음을 이미 확인했다. 그 정도라면 홀로 맞기에 어렵지 않은 수였다—어디까지나, 주변에서 명령을 기다리는 그 자신의 병사들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방식의 등장은 상대를 한번 흔들어 놓는 효과까지 주는 법이다.
효과가 너무 컸던지, 피나르핀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지만.
자신이 피나르핀에게 어떻게 보일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에게도 거울은 있었다. 그러니 피나르핀의 충격은 타당했다. 먼 옛날, 핀웨 왕의 장손으로서 투나 언덕 위 티리온을 거닐던 왕자는 지금의 자신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는 까닭이었다.
“하실 말씀이 있었을 텐데요.”
이거 원, 어린애 달래는 것도 아니고. 기어코 남들 앞에서 무안을 주게 만들었다. 마에드로스가 여지를 주자 피나르핀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그러더니 덧붙여 물었다.
“혼자 왔니?”
“떼로 옵니까?”
데리고 온 병사들에게 경계를 맡겨 물려놓은 것이었지만, 그런 상세한 사정을 밝힐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아닌 게 아니라 피나르핀은 하고 싶은 말이 상당한 듯했다. 몇 번 입을 달싹거리더니 곧 제대로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오랜 세월 세상의 적과 맞서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이제 서녘의 군대가 당도하였으니…….”
마에드로스는 참을성 없이 말을 끊었다.
“발라르 섬의 소년왕에게도 똑같이 이르셨습니까?”
“마이티모.”
어느새 낯설어진 이름에 마에드로스는 거부감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겉만 번드르르하다 조소할지언정 발리노르에서 온 군대는 전력만큼은 감히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낡은 갑주로 몸을 감싸고 닳아빠진 망토를 두른 그로서는 더더욱. 그러나 입안에 맴도는 씁쓸한 감각은 뱉어내지 않고서는 지우지 못할 듯했다. 제기랄, 페아노르가 이 꼴을 본다면 뭐라 하겠어.
“수고했다, 우리가 왔으니 안심해라, 이제 썩 빠져 있거나 원한다면 잔심부름이라도 해 봐라. 에레이니온 길갈라드는 뭐라 하더랍니까?”
“웃더구나.”
피나르핀은 단 한 마디로 대꾸했지만, 마에드로스는 이 권능들이 상륙 이후 한동안 거둔 승리들은 모두 뼈를 내어주고 얻은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길갈라드도, 싱골의 친족들도, 갈라드리엘과 켈레브림보르도 서녘의 군대를 나서서 돕지는 않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이제껏 해 왔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용한 싸움을 이어 나갈망정.
벨레리안드의 엘다르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서녘의 꼭두각시를 몹시, 몹시 재수 없어 한다는 것이었다.
“그 꼬마도 당신들을 섬기지 않으려 하는데, 왜 나는 다르리라 생각하셨습니까?”
순간 피나르핀의 얼굴에는 당혹함이 엿보였고, 그로써 마에드로스는 피나르핀 자신조차 이 회담이 소득을 얻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지는 않음을 알아챘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피나르핀의 시선이 연이어 그의 행색을 힐끔거리는 데서 답을 찾을 수 있을 테다. 그는 아몬 에레브의 주인 노릇, 혹은 벨레고스트의 식객 노릇이나 하기에 어울리는 차림이었지, 예전 같았다면 도무지 핀웨 놀도란의 자손으로 봐주기는 힘들었을 것이었다. 동정 어린 관찰이 묘하게 그의 신경을 긁었다.
아르드갈렌이 안파우글리스로 불타오를 때, 당신 아들들은 어디 더 나은 모습이었을까?
“도울 셈이냐, 아니냐? 똑바로 말하거라!”
잉귀온이 멋모르고 끼어들었다. 마에드로스는 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피나르핀을 직시하며 대답했다.
“내 원조를 바라십니까? 에아렌딜의 뱃머리에 단 실마릴을 돌려주십시오.”
잉귀온은 비웃으며 입을 열려 했지만, 그보다 마에드로스가 말을 잇는 것이 빨랐다.
“그러면 페아나로 가문은 ‘심판의 원’에서의 모든 원한을 잊겠습니다. 모링고토의 왕관에 남은 두 실마릴을 약조하십시오. 페아나로 가문은 명을 다해 권능들의 싸움을 돕겠습니다. 하나 지금 내 아버지의 유산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희망의 별, 길 에스텔이 모습을 드러낼 시간은 아니었다. 그 빛은 해가 떨어진 직후나 새벽, 혹은 빙길롯이 전투를 하기 위해 지상에 나타났을 때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피나르핀의 눈동자가 위를 향해 요동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보기 쉬웠다.
떳떳하지는 않을 테다. 에아렌딜에게 있는 실마릴은 본래 싱골이 베렌에게 요구했던 것으로, 싱골에게도 베렌에게도 실마릴의 거취를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었었다. 켈레고름과 쿠루핀이 루시엔에게 무례를 저질러 신다르의 분노를 사기는 했으나 그것으로 생판 남이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이후에 루시엔과 베렌의 행위는 위대한 것이었다는 인정이 벨레리안드 전역에 퍼지게 되었을 뿐.
하지만 그들이 진정 당당해지려거든 되찾은 장물은 주인에게 돌려주었어야 했다. 훔친 물건을 쥔 이상 그들도, 그들의 아들인 디오르도, 엘윙과 에아렌딜도—심지어는 실마릴을 하늘로 올린 권능들조차 페아노르의 맹세를 피할 수는 없었다.
희망의 별을 빼앗으려 드는 것은 자살 기도나 다름없겠지만.
“정 실마릴을 원한다면 네가 직접 앙가만도로 가 찾아가지 그러니?”
피나르핀은 영리하게도 에아렌딜의 실마릴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마에드로스는 웃었다. 어린 에레이니온이 그랬다는 것처럼.
“내가 그런 이야길 설마 처음 들어보겠습니까?”
“귀담아들은 적은 없는 모양이구나.”
피나르핀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또, 너를 모링고토 앞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사람에게서 들은 적도 없을 테고.”
자신감 하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마에드로스는 순간 피나르핀의 푸른 눈동자에서 강철의 광택을 엿보았다. 또한 그 위에 김처럼 서린 약간의 감정을…….
온순하고 유약할지언정 핀웨의 아들이다. 놀도르 왕들의 친족일 뿐 아니라 그 본인부터 한 사람의 군왕이었다. 피나르핀에게는 언제 얻은 것일지 모를 군주의 풍모가 깃들어 있었고, 그에 더불어 드러나는 엷은 피로는 마에드로스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앙그반드의 포위망을 논하던 핀골핀의 눈빛에서, 니르나에스를 준비하던 핀곤의 목소리에서, 깊은 밤 마주하는 자신의 숨결에서 익히 보아 왔으므로.
어둠이 내리던 그 날에 영영 굳어 있을 것으로만 여겼던 서녘에서도, 시간은 사정없이 흘러갔던 모양이었다.
“내가 불쌍하십니까?”
마에드로스는 일부러 비웃음을 만면에 드러내며 물었다. 거슬렸다. 거슬리고 불쾌했다. 주위를 잊고 성을 낼 만큼은 아니었으나 몇 마디 말로 상대의 예민한 구석을 뒤집어놓을 정도는 되었다.
“적어도 내 목숨은 내 적과 맞서는 데 걸어 놓았지요. 한데 갈라드리엘은 잘 지냅니까?”
에아르웬의 배를 빌려 태어난 아이 중 남은 것은 막내딸 하나뿐이었다. 피나르핀은 정곡을 찔린 듯 움찔했다. 그 딸이 놀도르의 반란에 가담한 죄로 여전히 심판 아래 있음은 피나르핀도, 마에드로스도 알고 있었다. 몇백여 년 만에 만나는 딸에게 서녘으로 돌아가 달라며 간청하던 피나르핀을 에온웨가 직접 가로막았다던가. 그것참 대단한 영광이었다.
하지만 피나르핀은 곧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격했다.
“에아렌딜의 아이들은 어찌 지내지?”
마에드로스가 대답하지 않자, 본능적으로 기세를 잡았음을 알았는지 피나르핀은 서슴없이 이어 물었다.
“디오르와 님로스의 아이들은 어찌 되었어? 네가 남의 친족을 그리 걱정하는 줄은 미처 몰랐구나. 어린 것들이 안쓰럽지도 않더냐?”
“그리 걱정되신다면.”
일단 뱉어낸 마에드로스는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정제하지 못한 말은 누가 들어도 그의 동요를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거칠었다. 평상시의 그라면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였으나, 옛 기억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숙부가 그도 모르는 새 그의 냉정을 좀먹은 모양이었다. 그는 남몰래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에아렌딜을 불러오시지요. 제 자식은 저가 직접 데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내줄 생각은 있고?”
“그 겁쟁이가 정말로 날 마주하려 한다면 훔친 물건에 대한 추궁부터 들어야 할 겁니다.”
몸값이란 소리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그는 피나르핀의 얼굴에 체념이, 잉귀온의 얼굴에는 언짢음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저 둘은 궁정에 익숙한 왕자들이었고 곧 표정을 갈무리했다. 교착에 이른 회담을 어떻게 끊어내야 할지 고민이 일었을 때였다.
마에드로스는 문득 서늘한 기척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육감에 이어 청각이 다급하게 다가오는 발소리를 잡아냈다. 다른 요정들마저 눈치를 챘을 무렵 어린 병사 하나가 공터로 뛰어들었다.
“적습입니다!”
시간은 끝내주게 맞춰주는군.
피나르핀이 당혹스럽게 주변을 살피거나 말거나, 마에드로스는 소식을 전한 병사에게 성큼 달려갔다. 한번 크게 외친 것으로 사명을 다한 병사는 긴장이 풀렸는지 앞으로 고꾸라질 듯 휘청거렸다. 등의 갑옷에는 검은 화살대가 박혀 있었다. 마에드로스는 바로 검을 뽑지는 않았으나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나머지는?”
무릎을 짚으며 헐떡거리던 병사는 그 한마디에 몸을 곧추세웠다.
“반은 시간을 끌겠다 했습니다. 전 먼저 왔고, 형제 몇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카나핀웨에게는 전했나?”
“달려갔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이 정도 일쯤 밥 먹듯 겪어왔던 터였다. 그와 병사가 두 차례 묻고 답한 뒤에야 정신을 차린 피나르핀이 서둘러 그에게 다가왔다. 병사가 피나르핀을 막아서려는 것을 제지한 마에드로스는 빠르게 말했다.
“본대와 얼마나…….”
긴 뿔나팔 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마에드로스는 반사적으로 이를 갈았다. 돌아본 곳에서는 잉귀온이 막 나팔 취구를 입에서 떼고 있었다. 마에드로스는 짜증스럽게 일갈했다.
“아예 봉화라도 올리시지!”
주변을 경계하던 페아노르 가문 병사들이 적을 막아섰으니, 아직 그들의 위치까지는 드러나지 않았을 거라 기대할 수도 있었다. 방금 나팔 소리만 아니었더라도. 잉귀온은 뭐 그리 당당한지 턱을 치켜들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욕설을 씹어 삼킨 마에드로스는 그나마 말이 통하는 피나르핀이나 다그치기로 했다.
“본대와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회담 전 미리 정찰할 때 이곳에 있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으니, 급하게 지원을 구할 거리는 아닐 거라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피나르핀의 대답은 제법 놀라웠다.
“우리가 전부야.”
“스무 명으로 이 땅을 활보하는 담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어처구니없게도 피나르핀은 입술을 휘며 웃었다.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리기는 했으나 꽤 그럴듯한 미소였다. 멈칫한 마에드로스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이 ‘넬랴핀웨’의 언동에 더 가까웠음을 깨달았지만, 그걸 오래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방금 병사가 달려왔던 방향에서 투구에 별을 단 병사 여럿이 더 뛰쳐나왔다. 한눈에도 급하게 쫓겨온 것이 뻔했다.
“버티고 있었습니다!”
병사 하나가 질문을 받기도 전에 먼저 대답했다. 남겨두고 온 절반의 병사들은 그들이 떠나올 때까지는 오르크들을 붙잡아 놓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나머지 역시 그자만큼 재빨라서, 별다른 명령 없이도 그들은 마에드로스와 엉겁결에 낀 피나르핀까지 둘러싸고 방어선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마에드로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잉귀온의 뿔나팔은 딴에는 퍽 좋은 물건이라, 한번 불자 사방의 나무가 흔들려 화답했었다. 오르크들이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모르고스는 병사들이 워낙 넘쳐났기에, 그가 보내는 군대는 옆구리를 내어주더라도 곧장 먹이를 향해 달려들 것이지 쓸모없는 요정 병사 몇에 붙들려 있지는 않을 터였다.
“곧 올 겁니다.”
마에드로스는 상황을 모를 피나르핀을 위해 한마디 했다가, 숙부의 희게 질린 얼굴을 보고 덧붙였다.
“전투가 처음은 아니시겠지요?”
돌아오는 답이 없는 것에 그는 쉽게 사정을 간파했다. 처음은 아니겠지. 하지만 뒤를 받쳐주는 군대 없이 이렇게 적을 맞는 일은 겪어보지 못했을 테다.
마치 옛날 모르고스의 사자를 만나던 그 꼴이었다.
모르고스 역을 맡는 데는 서녘의 군세가, 그 사자 역에는 잉귀온과 피나르핀이 적합하리라 생각했는데 사실 이 자리의 모두가 옛날의 그 물정 모르던 어린애 신세인 듯했다. 마에드로스는 잉귀온을 곁눈으로 살폈다. 바냐르 왕자는 속을 읽을 수 없는 무덤덤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근처의 호위들만 부산스럽게 움직이다 마에드로스의 병사들과 부딪혔다.
그조차 오래가지는 않았다. 에레드 루인까지 진출하는 동안 서녘 출신 요정들도 피를 묻혀 보았고, 적이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에서 아군과 자리를 다툴 수 없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숲 그림자에서 오르크의 칼날이 번뜩였다.
무식하게 우거진 나무 사이를 뚫고 온 오르크들은 상태가 그리 좋을 리 없었다. 그러나 수적인 면에서만큼은 이 자리의 요정들을 손쉽게 압도할 수 있었다.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쇳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마에드로스는 고갯짓 몇 번으로 천천히 물러나자는 뜻을 전했다. 난쟁이들의 북쪽 길이 그들 배후에 있었다. 길을 따라 도망하는 것이 정 무리라면, 그보다 더 나아가 아스카르 강을 믿어볼 수도 있었다. 울모는 페아노르 가문은 외면할지 모르나 서녘의 사령관들이 당하는 것까지 방관하지는 않을 테니.
그보다는 일단 살아남아야겠지만. 녹슨 칼날을 한 발 차이로 피한 마에드로스는 검을 빼들어 궤적 그대로 오르크의 목을 갈랐다. 이곳에서 포위당할 수는 없었다. 회담 장소를 정해줄 때 이미 이런 위험이 있을 것을 예상했었으나, 그야 정찰대와 길을 통한 퇴각로를 믿은 것이었지 잉귀온의 뿔나팔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이라 한들, 정예 한 줌과 발리노르의 어설픈 뜨내기들만으로 이 자리의 모두를 보호할 수는 없었다. 바냐르의 왕자야 아깝지도 않았다. 다만 피나르핀은……. 피나르핀은?
전투의 시작과 함께 떠밀린 숙부는 서녘 병사들 틈바구니에서 멍한 눈으로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에드로스의 검이 연신 피를 뿌리는 중에도 피나르핀의 손에 들린 검은 끝이 바닥을 향한 채 도통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치부하기에는 조금 전 보았던 예리한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멋대로 휘둘러진 도끼가 그의 귓가를 스치자 마에드로스는 쓸데없는 고민은 이쯤에서 치워버리기로 했다.
어느새 길어지다 못해 세상을 삼킨 그림자는 뭉치고 뒤엉켜 밤을 만들어냈다. 퇴로를 끊은 오르크들은 수를 세기도 어려웠고, 마에드로스의 장갑은 검은 피로 끈적했다. 처음에 무작정 달려든 오르크들이 적과 아군을 마구 뒤섞어놓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이미 화살받이가 되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의 세상은 오직 검 한 자루로 모여들었다. 피비린내가 코끝을 메웠다. 오래전, 피나르핀의 두 아들을 앗아간 전투에서 그는 힘링을 포위한 적에 맞서 영혼을 불살랐었다. 왕자들의 무용을 노래하는 이들이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면 그건 그런 식의 악전고투가 그에게는 조금도 특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겠지. 악문 잇새로 숨이 새었다. 그는 자신이 이 싸움 역시 이겨낼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영원한 어둠이 아니고서는 무엇도 그의 죽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그때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울음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마에드로스는 그제야 뿔나팔의 원조 요청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소론도르.
바냐르 요정 하나가 환희에 가까운 열기를 담아 외쳤다. 소론타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급강하한 독수리는 오르크 하나를 낚아채더니 곧바로 다시 솟구쳤다. 우아한 상승의 정점에서 오르크가 놓여나기까지는 눈 깜짝할 시간뿐 흐르지 않았다.
멱이 따이는 짐승처럼 괴성을 지르며 떨어져 내린 오르크는 정작 마지막 순간 볼품없는 철썩 소리로 끝을 알렸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요정 병사들이 다시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리노르 출신들이 활기를 띨 차례였다. 소론도르를 뒤따라 내려온 독수리들까지 더해지자 오르크들은 완전히 수세에 몰렸다. 마에드로스는 운 나쁜 오르크의 급소에 검을 찔러 넣었다가 거둔 다음 혼전의 중심에서 물러났다. 페아노르 가문의 병사들은 원체 기민해, 곧 그를 따라 공터 외곽으로 몸을 빼기 시작했다.
첫 공격으로 정신적 타격은 충분히 입혔다고 여겼는지, 소론도르는 이제 칼처럼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로 오르크 가죽을 직접 찢어놓는 중이었다. 체중만으로 한 놈을 찍어누르고 복부를 헤집던 소론도르가 문득 머리를 틀었다.
그 시선 끝에 마에드로스가 있었다.
작은 전장으로 변한 공터를 사이에 두고 마에드로스는 잠시 독수리의 왕과 대치했다. 오래전 한 손이 벼랑에 묶인 채 마주했던 금빛 눈동자가 오백 년의 세월을 넘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냥감을 보는 식은 아니었다. 단지, 거기에 없는 것은…….
반쯤 무의식적으로, 그는 피나르핀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보호받는 중에도 반쯤 얼이 빠져나간 숙부를.
그리고 그는 오른팔을 들어 퇴각 신호를 보냈다.
혼란이 가라앉았을 때 페아노르 가문 요정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애초에 함정을 파려는 것은 아니었으니 상대가 사라졌다고 서운해할 것은 없었다. 목적한 바는 대충 이루기도 했고. 사상자를 수습하는 병사들 사이에서 그저 손님인 양 가만히 서 있었다.
소론도르와 독수리들을 배웅한 다음 잉귀온은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어떻습니까?”
“저 아이가,”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려던 피나르핀은 그게 얼마나 해괴한 소리인지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마에드로스는 그의 조카이지 친자식은 아니었다. 옛 티리온에서부터 이미 피나르핀은 페아노르의 장자를 어찌 대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었다. 마에드로스가 어릴 때는 그 또한 미숙한 아이나 다름없었었고, 장성한 뒤에는 한 사람은 아버지를 따라 외해를 떠돌거나 조부의 왕좌 곁에 머물렀으며 한 사람은 항구로 떠나 아내를 맞았다. 혈육의 정이란 원래 이토록 희미하고 끈질긴 것이었던가?
그러나 처음 만나는 낯선 이라 할지라도 마에드로스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면 그는 안타까워할 것이었다. 영원한 어둠에 넋을 걸어놓고 부질없는 숙원에 매달려, 끝내는 제 아비가 세워 불을 붙인 제단으로 스스로 올라가는 아들이라니.
상고로드림에서 소론도르가 그 아이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갑작스레 그는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졌다. 짙게 몰려오는 어스름도, 조카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림자도, 사방에서 그를 짓눌러 오는 전쟁의 무게도. 격노하는 권능들의 발밑에 선 그는 이미 심장의 진력을 소모해 더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가슴 밑바닥에 눌어붙은 사소한 연민만이 그를 슬프게 할 뿐이었다.
“기껏 당신 옷까지 빌려 입었는데.”
피나르핀은 중얼거렸다. 잉귀온은 조금만 덜 품위 있었더라면 코웃음으로 들렸을 소리를 냈다.
완연한 밤이었다. 피나르핀은 눈가를 한번 쓱 문지르고는 말했다.
“돌아갑시다. 바람이 차군요.”
※ 제목은 «왕의 귀환»의 “부드러운 심성의 선물인 연민을 경멸하지 마시오, 에오윈! (Do not scorn pity that is the gift of a gentle heart, Éowyn!)”에서 따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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