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리프 이주 0P 사건

산맥의 그늘로부터

카란시르 × 할레스 | 210423 포스타입

rhindon by 댜

그러고 나서 카란시르는 인간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았고 할레스의 명예를 크게 높여 주었다. (중략) “당신 일족이 여길 떠나 좀 더 북쪽으로 올라와서 살겠다면, 그곳에서는 엘다르의 우정과 보호를, 그리고 당신들만의 자유로운 땅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할레스는 자존심이 강하여 남에게 이끌리거나 다스려질 뜻이 없었고, 할라딘 일족 대다수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카란시르에게 감사를 표하기는 했으나,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 마음은 이제 정해졌습니다, 영주여. 산맥의 그늘을 벗어나, 우리의 다른 친족들이 향했던 서쪽으로 떠나기로 말입니다.”

숲에는 어둠이 내렸다. 말 탄 기수는 브리시아크 여울의 다리를 건너 길을 달렸고, 브레실의 흑록색 그림자를 왼편에 둔 채 한참을 나아갔다. 그는 눈을 다 가리도록 두건을 눌러 쓰고 있었지만 말은 서녘의 피를 이어받은 준마였으며 서두름 없이 긴 다리를 내뻗었다. 굴레와 안장의 쇠테에서는 포도 덩쿨과 여덟 꼭지 별이 교묘한 솜씨로 얽혀 둔탁한 빛을 냈다. 발굽이 흙을 딛는 소리는 속삭임처럼 조용했다.

딤바르를 가로지른 동부대로는 브리시아크를 건너 서쪽으로 곧게 이어졌으나, 테이글린 강둑에 닿기 전 둘로 나뉘어 북으로는 톨 시리온, 남으로는 테이글린의 건널목까지 다다랐다. 엄밀히 말해 길이 꺾이는 곳에서 대로는 끝나는 셈이었다. 톨 시리온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말이 빠르게 달릴 만큼 다듬어진 도로였다. 하지만 건널목으로 가는 숲길은 통행이 거의 없었고, 브레실 숲의 북서쪽 모서리를 저며내듯 가르고 지나갔다.

갈림길에 이른 기수는 망설이지도 않고 말머리를 왼쪽으로 돌렸다.

밤의 브레실에서는 자작나무 가지들이 서늘한 바람에 수군거렸다. 별빛마저 나뭇잎 너머로 희미해지자 기수는 고삐에서 손을 떼 두건을 젖혔고, 은제 사슬에 매여 목에 걸린 보석은 옷자락 사이로 푸르다시피 흰 광채로 번쩍였다. 기수의 얼굴이 번갯불에 비친 듯 드러났다. 인간 아이처럼 얼룩덜룩 상기된 콧잔등 아래로 얼핏,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가가 움찔 경련했다. 두건은 검은 머리카락 위로 미끄러졌다.

높은요정의 빛은 그의 가문에 있어 은은한 미광으로 현현하지 않았고, 한순간 기수의 두 눈은 보석에 담긴 햇빛보다도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말 한 마리가 가까스로 지날 만큼 좁은 길이, 그 주변의 덤불과 나무기둥이 새하얗게 물드는 찰나였다.

다음 순간 망토 자락은 제자리를 찾았다.

보석은 그의 앞길을, 그리고 앞길만을 밝혔다. 기수는 눈을 깜박였다. 잿빛으로 돌아온 눈동자는 보석의 광선이 닿는 것보다 더 깊은 곳을 꿰뚫어보듯 초점이 멀었다.

“Ilyë tier undulávë lumbulë…….”

한 차례 세차게 고개를 흔든 기수는 말을 다독이듯 푹 허리를 굽혔다. 옳지, 조금만 더 빠르게. 그의 형처럼 모든 짐승들과 이야기하지는 못한다 해도, 놀도르의 영주들은 군마와 사냥개들의 언어쯤은 구사할 줄 알았다. 그러나 곧이어 기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이전과 같은 퀘냐였다.

모든 길은 그림자 깊이 잠겨 간다.

기수가 수많은 샛길 중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자정에서 두 시간이 더 지난 다음이었다. 근방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솜씨로 샛길에 들어선 기수는 그제야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할레스 일족의 사람들은 숲 속에서의 전투에 능했지만 요정에게는 우호적이었고, 오르크들은 감히 브레실 숲 안쪽을 침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앙그반드의 포위가 굳건한 이 시대에도 홀로 여행하는 것은 위험했다. 그러나 최소한 브레실 내부에서라면 기습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았다.

얼마 후 나타난 갈림길에서 그는 아몬 오벨 대신 그 반대 방향을 택했다. 숲의 어둠은 말발굽을 붙잡을 듯 늘어졌고 나뭇가지의 웅성거림은 점차 소리를 키워나갔다. 희끗한 자작나무 껍질 위로는 이따금 눈동자 무늬가 나타났다. 정말로 지켜보는 눈이 있었더라면 이제 기수의 행선지는 명확해졌을 것이었다. 기수는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의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투르 하레사, 회색요정들의 언어로는 하우드 엔 아르웬이 되는 무덤으로.


저물 녘 햇빛이 사그라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거센 빗줄기가 쏟아졌다. 반파된 야영지에서 비를 피할 만한 곳은 없었고, 할라딘의 인간들은 얼마 되지 않는 담요 아래서 몸을 떨거나 서로 부둥켜안고 움츠러들었다. 그나마 몸이 성한 몇몇은 아예 비에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편 채 걸어다녔지만, 그중 가장 당당한 이들조차 추위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다.

모두가 지쳐 있었다. 이레 동안 이어진 전투는 누구 하나 멀쩡히 남겨 놓지 않았다. 팔다리가 아니라면 가족을 잃었고, 그것조차 아니라면 목숨마저 잃어 빗물 젖은 시신으로 널브러졌다. 별의 기치를 단 군대가 밀려오지 않았을 경우의 결말은 차마 생각할 수 없었다. 범람하는 강물처럼 쇄도하던 기마대…….

이제 그 요정들은 강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붉고 노란 천막을 하나둘 세워내는 중이었다. 과정을 직접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더라면 땅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믿을 만큼 잽싸고 능숙한 솜씨였는데,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빗물은 천막의 천이 무두질한 가죽인 양 흘러내렸다. 천막 꼭대기마다 휘날리는 깃발에는 여덟 꼭지 별이 하늘의 별들보다도 밝게 빛을 냈다. 저게 높은요정의 별이라고 했던가. 아니면 저들만의?

할레스는 한동안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요정들을 지켜보았다.

요정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놀도르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해 할레스는 이 낯선 자들을 어찌 대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눈에는 불꽃이, 손에는 강철이 담긴 기이한 전사들. 맹렬하기로는 늑대 떼 같았고 두렵기로는 폭풍에 못지않았다. 그들이 발 딛는 곳마다 세상은 움푹 패이는 듯했고 입을 열 때마다 공기에서는 번개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거짓말인 양 정중했다. 그가 요정을 부러워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주눅들고 말 만큼 우아한 예절이었다.

이것이 내가 당신께 행할 첫 번째 명예입니다, 말하며 요정들의 지휘관은 제 망토를 벗어 할레스에게 둘러 주었었다. 지치고 반쯤은 넋이 나갔던 할레스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었고, 안감이 나무딸기처럼 빨간 망토는 그대로 할레스의 어깨에 걸쳐졌었다.

망토는 두께나 크기에 비해 가벼웠지만, 문제는 길이였다. 할레스는 키가 큰 편이었으나 그것도 할라딘 사이에서의 일이었지, 전나무처럼 쭉 뻗은 요정들의 의복은 그에게 맞을 리 없었다. 그리고 할레스는 아버지의 옷을 입은 어린아이처럼 망토 자락을 거머쥘 생각은 없었기에 망토는 땅에 질질 끌리고 말았는데, 비가 오기 시작하자 진흙은 망토를 더럽히기는커녕 적시지조차 못하고 미끄러졌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천막에서와 마찬가지였다. 직물보다는 가죽을 사랑하는 할레스조차 어떤 수를 부렸는지 궁금해지고 마는 노릇이었다.

할레스는 왼손 검지로 망토를 여민 브로치를 매만지다가 결국 한숨을 쉬었다.

도움을 청해야겠지. 할라딘의 부상자들을, 또 아녀자들을 위해서라도 비를 피해 쉴 곳을 얻어야 했다.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놀도르는 이제껏 할레스가 알아온 초록요정들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인 것이 분명했고, 이미 할레스와 할라딘은 이들에게 빚을 지고 말았다. 조금 더 기댄다고 해서 체면이 크게 깎이지는 않을 터였다.

더군다나 이들의 지휘관은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라 하지 않았던가? 할레스는 요정의 예의범절은 모른대도 지도자의 의무는 알았다. 요정이 도움을 거부하려 한다면 어떤 말로 그를 설득하고 협박할지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할레스가 요정들에게 다가갔을 때, 그를 맨 처음 발견한 병사는 곧장 허리를 세우며 경례를—심장 앞에 오른주먹을 가져다 대는 행위의 의미를 오인하기는 어려웠다—붙이고는 외쳤다.

“어서 오십시오, 할레스, 인간 사이 여왕이여!”

아, 젠장.

이건 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할레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병사에게 다가갔다.

“난 여왕이 아니오. 그러나 당신들…….”

신다린으로 족장을 어찌 부르더라?

“……영주와는 이야기하고 싶군. 그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있겠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를 여왕이라 칭한 사람치고 병사의 태도는 난감함을 숨기지 않는 것이었고, 할레스는 병사가 자신을 쉽게 신뢰하지는 못할 어린아이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불쾌했지만 지적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대신 할레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부상자들의 상태가 좋지 않소. 빗속에서라면 더 나빠질 테지. 당신들의 영주에게 아직 너그러운 마음이 남아있다면, 다친 이들과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도움을 청하고 싶소.”

“아이들이라고 하셨습니까?”

병사는 반짝 눈을 빛냈다. 할레스는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록요정들은 인간의 아이들을 몹시도 사랑하고는 했었다. 설마 놀도르도 마찬가지란 말인가?

“그렇다면 공께서도 흔쾌히 허락하실 겁니다! 제가 공께 아뢰고 오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병사는 할레스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달려나갔다.

한동안 할레스는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요정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따금 누군가 망토의 브로치를 보고 흠칫 놀라고는 했고, 그때마다 할레스는 머리 한구석이 꺼림칙해졌으나 요정 병사들을 함부로 불러세우지는 못했다. 줄기차게 내리는 비에도 굴하지 않고 병사들의 무장에서는 윤이 났으며 걸친 옷의 빛깔은 염료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이들의 영화는 감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더한 도움을 요청한다면 어떨까?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려는 의문을 할레스는 가차없이 억눌렀다. 상처 입은 긍지로 인한 응어리가 목구멍에 막혔다.

영주의 말을 전하러 돌아온 병사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었고, 할레스를 낮잡아 보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불편하리만치 공손했다. 병사의 빙빙 도는 화법을 해독한 끝에 할레스는 이들의 영주가 병사들에게 모든 할라딘과 천막을 나누어 쓰라고 지시한 것을 알았다. 뜻밖의 호의였다.

할레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병사가 더더욱 특이한 전언을 덧붙였다.

“그리고 공께서는 아르웬께 이렇게 말씀 드리라 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전장의 피로를 풀지 않으시렵니까? 일족을 돌본 다음 나를 찾아오십시오!’”

쉬이 예상했을 법한 초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병사는 영주와 한 천막을 쓰는 것이 할레스에게 명예라거나 따위의 소리까지는 하지 않았다.

할라딘 각자의 잘 곳이 정해진 후, 할레스는 병사들의 지시에 따라 가장 호화로워 뵈는 막사로 향했다. 입구의 천을 젖히고 들어가니 막사 안에서는 화로가 발갛게 타고 있었다. 바닥에는 털가죽이 빈틈없이 맞물렸고 한쪽의 침상 위로는 단검 몇 개가 어지럽게 흐트러진 채였다. 막사의 주인은 화로 옆 바닥에 앉아 단검 하나를 손질하는 중이었는데, 그 옆에는 마개를 따지 않은 술병이 놓여 있었다.

할레스는 큼큼 헛기침했다.

“영주시여. 요정들은 직접 청한 손님을 이리 대합니까?”

허리나 무릎을 숙여 인사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요정영주는 단검을 내려놓으며 눈을 들었다.

“할레스.”

놀란 기색 없는 담담한 어조에 할레스는 그가 자신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음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괘씸하면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든 바깥을 순찰하는 저 늑대 같은 병사들의 우두머리는 이 영주였으니까.

그러나, 뜻밖에도, 영주의 얼굴은 그의 기억 속 낮의 모습만큼 엄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우리 모두에게 고된 하루였지요. 이리 오십시오, 앉으세요. 죽음의 비탄에도 불구하고 승리는 여전히 축하받아 마땅하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는 동작이 조금 부자연스러워, 그제야 영주의 종아리를 감싼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영주의 낯빛은 화롯불이 비쳐 붉어 보였고 열띤 어조에는 할레스 자신조차 잃은 지 오래라 생각한 젊음이 깃들어 있었다. 영주가 인간이었다면 할레스는 그를 스무 해를 겨우 넘긴 젊은이로 생각했을 터였다.

영주는 인간이 아니었으며 할레스는 서른네 번의 겨울을 지낸 여인이었다. 할레스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띤 채 망토를 벗어 물기를 털었고, 영주가 뭐라 하기 전 근처의 의자에 접어 올려두었다. 어깨에서 떨어진 천은 여전히 가벼웠지만 손끝에 걸리는 느낌은 조금 달랐다. 끝에 무게추가 달린 천을 휘두른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던 할레스는 이내 위화감을 잊어 버렸다. 요정의 일이겠지. 그리고 그는 성큼성큼 영주의 앞으로 다가가 주저앉았다.

미간에 얕은 골이 패이기는 했어도, 영주는 별다른 지적은 뱉지 않고서 그의 곁에, 그와 똑같은 자세로 앉았다. 한 손에는 술병이, 다른 손에는 어디서 났는지 엄지와 검지 사이 잔 두 개가 얌전히 들린 채였다.

“한잔하시겠습니까?”

“술은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인간들이 술이라 부르는 것과 도르위니온의 포도주 사이에는 저 갈라놓는 바다만큼이나 깊은 차이가 있지요.”

“취하는 것이 싫다면?”

영주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회색 눈동자 저편에서 불길 같은 빛이 어른거렸다.

“내 이름은 카란시르입니다.”

“카란시르.”

할레스가 따라하자 카란시르는 씩 웃었다.

“할레스. 내가 장담하는데, 당신은 정말로 취해본 적은 없을 겁니다.”

“내 사람들이 술이라 부르는 것이 당신들의 포도주만 못하기에? 그러나 당신들의 포도주도 우리에게는 술이 아닐지 모르지요.”

카란시르는 잠시 말이 없었고 천막 안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빗방울이 천을 때리는 소음뿐이었다. 할레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 잔 주시죠.”

요정은 다 그런 것인지, 카란시르만 그런지는 몰라도 그는 손가락이 길고 곧았으며 술을 따르는 움직임은 매끄러웠다. 할레스의 어머니가 보았더라면 바느질하는 데 안성맞춤이리라 했을 만한 모양새였다. 다만 손톱 끝은 투박했고 마디마디의 굳은살은 검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할레스는 오른손으로 잔을 받으며 제 왼손을 뒤집어보았다가, 괜히 머쓱해져 그만두었다.

초록요정들은 자신들과 놀도르 사이에는 인간과 초록요정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하곤 했었다. 이제 놀도르를 직접 본 할레스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산맥을 넘어오기 전, 동쪽에서도 이미 함부로 스스로를 요정에 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었었고, 더군다나 카란시르는 놀도일 뿐 아니라 제 일족의 왕자였다. 어쨌든 그의 손은 똑같이 검을 아는 손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술은 금빛이었고 과일 향이 강했다. 쓴 물을 마시듯 술을 벌컥 들이켰던 할레스는 잔의 모서리 너머로 카란시르와 눈이 마주치고는 움찔했다. 카란시르는 잔을 기울이지도 않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몸을 녹이는 데는 좋겠군요.”

빈말은 아니었다. 목 넘김은 부드러웠지만, 요정의 포도주에는 기이한 온기가 있어 낯선 열이 혀끝에서부터 뻗어 내려갔다. 할레스는 가만히 입 안에 남은 잔향을 더듬다가 덧붙였다.

“진짜 술만은 못하지만.”

“언젠가 당신들의 술도 마셔봐야 하겠네. 뭐, 좋습니다, 강퍅하고 완고한 이들의 할레스 공이여! 당신은 페아노르 가문의 손님으로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하기에는 전장의 사정이 여의치 않으나, 내 빵과 고기를 당신과 나누는 것을 용납하시렵니까?”

“내 일족이 굶주리는데, 내가 요정들의 음식을 입에 댈 수 있겠습니까?”

카란시르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듯 요정의 잘생긴 얼굴에는 벌건 기운이 퍼져나갔다. 할레스의 얼마 안 되는 경험대로라면 요정들에게서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카란시르는 당연히 인간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어렴풋이, 할레스는 그가 자신 친족 사이에서는 그리 뛰어난 외모가 아닐지 모른다고 깨달았다. 고르지 못한 홍조는 볼썽사나웠고 어찌할 바 모르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은 결코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귀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진심일 뿐이었다.

문득 할레스는 이 사람이 감정을 쉽게도 드러낸다는 생각을 했다. 함부로 명예를 입에 올리고, 몸수색조차 하지 않은 여자를 막사에 들이고, 모욕으로도 여겨질 말을 여상히 내뱉는 오만하면서도 솔직한 사람. 그리고 어느새…… 막사에 처음 발 들였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그를 향한 할레스의 인식은 낯선 요정영주에서 어딘가 어설픈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언제나 카란시르의 이해자는 마글로르였지만, 그가 브레실을 방문하는 이유에 공감하는 것은 뜻밖에도 쌍둥이들이었다. 조금은 예상했어야 했던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인간들이 처음으로 서부에 나타난 것은 옷시리안드에서였고, 암로드와 암라스의 땅에는 여전히 그 자손들이 여럿 살고 있었으니까. 에스톨라드라고 했던가, 되짚어보자면 기이할 정도로 정확한 이름이었다. 야영지.

인간의 자손들은 가운데땅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나무 뿌리와 헐거운 흙 탓에 말을 타는 것이 위험해지자 카란시르는 주저 없이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브레실, 브레실은 은빛 자작나무라는 뜻이었고 카란시르는 가운데땅의 숲을 그리 사랑하지 않았으나 브레실만은 견딜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숲에 살던 이의 영혼이 깃들기라도 한 모양이지. 그 전에는 브레실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으니까.

그가 처음으로 브레실을 찾았던 것은 십 년 전이었다. 할단이 할레스 일족을 이끌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 – 그때 그는 마치 눈 뜬 잠에 빠진 사람처럼 사르겔리온을 떠나 동부대로 위로 말을 달렸었고, 그의 부하 중 누구도 그의 앞길을 막지는 못했었다.

카란시르는 보름 넘게 브레실 숲속을 헤매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낼 수는 없었다. 이틀째부터 그를 눈여겨 보기 시작했던 도리아스의 변경수비대원들이 그를 막아선 것은 그 보름의 마지막 날 저녁이었다.

‘여기서 원하는 것이 뭐요?’

라고, 그에게 검은 활을 겨누며 물은 궁수는 카란시르에게 낯선 얼굴이 아니었으나 카란시르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멍하니 말고삐를 떨어뜨리는 카란시르에게서 심상찮은 낌새를 느꼈는지, 궁수는 시위에 메겼던 화살을 거두며 휙 휘파람을 불었다. 카란시르는 주변의 나무와 수풀에서 요정의 기척이 물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그건 꽤 중요했어야 했던 사실이었을 것이다.

궁수가 거꾸로 그를 알아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란시르 페아노리온? 우린 옷시리안드에서 만난 적이 있지요. 여기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

‘카란시르라고 하셨습니까?’

우당퉁탕 소리와 함께 자작나무 사이로 가죽옷을 걸친 인간 사내가 하나 굴러나왔다. 궁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사내를 돌아보았지만, 사내는 거리낌 없이 벌떡 일어섰다. 카란시르가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할단?’

그러나 사내는 그를 안쓰러워하듯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르겔리온의 영주여. 전 할단의 아들 할미르입니다.’


카란시르는 부관을 불러 할라딘 일족에게도 군량을 나누어줄 것을 명령했다. 그가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가며 세밀하게 지시를 내리는 사이, 할레스는 팔짱을 낀 채 바닥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곧 흥미를 잃었다. 술병과 술잔을 챙겨 간이 침상 가까이 가 앉은 할레스는 침상 뼈대에 등을 기댔다. 잔에 남은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으려니 카란시르는 곧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난 빵과 고기를 약속했지요.”

털가죽이 깔린 바닥에 카란시르가 내려놓은 접시에는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도록 얇게 썬 말린 고기와 치즈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카란시르는 물이 담긴 대접과 흰 수건 두 장도 함께 가져왔는데, 할레스는 적신 수건으로 손을 닦다 말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요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더니, 소문이 틀리지 않았군요?”

“거짓말? 우리가 거짓을 말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누가 그런 식으로 제 영혼을 손상시키고 싶어하겠습니까?”

카란시르는 할레스의 텅 빈 표정을 보더니 부연했다.

“발화는 가장 기본적인 창조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창작을 망가뜨리는 것은 그 정도야 어땠든 스스로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이고요. 신다르와 난도르는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 놀도르는 말의 무게를 압니다. 나는 약속을 어기지 않아요.”

단언이었다.

할레스는 갑작스레 차오르는 호기심에 카란시르의 잿빛 눈을 들여다보았다. 전쟁의 그림자는 그들 모두를 잠식해 오고 있었으나, 카란시르의 말에 실린 위압감은 화롯불이 온화하게 타오르는 막사 안보다는 기치를 꽂은 언덕에 더 어울리는 것이었었다. 어째서? 당신에게 약속이 무엇이기에? 요정의 일이겠지, 되풀이해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를 걱정이 드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당신은 빵도 약속했습니다만.”

그러나 할레스가 떠올린 말이라고는 고작 그것이었다. 카란시르의 눈빛이 물을 부은 모닥불처럼 서서히 잦아들었다. 자존심 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카란시르는 피식 웃으며 잎사귀로 싼 듯한 꾸러미를 그에게 내밀었다. 할레스가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자 카란시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아예 제 손으로 꾸러미를 풀었고, 그 안에 든 것을 꺼내 건네주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연갈색을 띤 비스킷이었다. 조심스레 끄트머리를 깨물어 보니 입안에 아카시아 꿀 같은, 아니, 그보다도 진한 단맛이 화악 퍼졌다.

“이게…….”

“렘바스요.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세요! 한 입만으로도 장성한 사내의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이 바로 렘바스니까요.”

눈을 들자 카란시르는 악동처럼 씩 웃고 있었다.

“원래는 요정의 귀부인들, 그러니까 영주의 아내 혹은 딸들만이 렘바스를 만들거나 나누어 줄 수 있죠. 이건 히슬룸에 머무는 내 고모 이리메 님께서 나와 나의 형제들에게 허락하신 겁니다. 고모님이 우릴 그리 예뻐하시는 건 아니지만…… 누구도 페아노르의 아들들이 이에 합당한 값을 치르지 않는다고는 하지 못할 테니까요.”

갑자기 몹시도 배가 고팠다. 렘바스를 크게 베어문 할레스가 체면도 잊고 허겁지겁 입에 든 것을 삼키자 카란시르는 대단한 칭찬이라도 들었다는 양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고, 할레스는 그에게 눈을 흘기면서도 카란시르의 반응을 싫어할 수만은 없었다. 혀끝으로 앞니를 핥은 할레스는 다시 술잔을 잡으며 물었다.

“당신 또한 영주가 아닙니까?”

무례한 질문이었을지 몰랐지만, 카란시르는 그가 무엇을 묻는지 짐작한 듯했다.

“아, 하지만 내 아내는 축복받은 서녘에 남았습니다. 나와 함께 가운데땅으로 오는 대신요.”

유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카란시르는 그리 슬퍼하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끼던 단검을 잃어버렸다는 식으로 아내와의 이별을 이야기한다면 모를까.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취기가 뒤늦게 찾아오는 탓이었는지, 할레스는 그가 마치 제 일족의 젊은이인 것처럼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다시 결혼하면 되지 않습니까?”

카란시르는 풉 술을 뿜었다.

“그래서 내 할아버지 꼴이 되라고?”

“뭐라고요?”

“아니, 아닙니다.”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 카란시르가 급히 소매로 입가를 훔쳤다. 사레가 들린 듯 두어 번 쿨럭 기침하는 꼴이 퍽 볼 만했다. 할레스는 카란시르가 하는 양을 황당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등을 탁탁 쳐 주었다.

한동안 대화의 맥은 끊겼다. 할레스는 카란시르의 경고에도 넘겨받은 렘바스를 깔끔히 해치웠고, 말린 고기와 치즈도 한두 조각씩 집어 먹었다. 빗소리는 경쾌하지도 우울하지도 않았고 막사 안은 화로의 열기로 따스했다. 할레스는 머리카락이 젖은 것도 잊고 침상 위로 고개를 젖혀 버렸지만, 카란시르는 그를 제지하는 대신 그를 따라 몸을 기대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제 종아리를 주무르는 손길은 여느 인간처럼 조심스러웠다.

카란시르에게 정신이 팔려 모르고 있었으나, 막사 내부는 할레스가 이제껏 보아온 어떤 집 안보다도 호사스러웠다. 어린애가 여섯은 딸린 일가라도 이런 곳에서는 편안히 지낼 수 있겠네, 생각하며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할레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후회하십니까?”

“무엇을?”

“아내를…… 그 ‘축복받은 서녘’에 남겨둔 것을요.”

“난 약속을 어기지 않아요.”

그리고 카란시르는 한숨을 쉬었다.

“내 사촌 핀로드가 말하길 인간에게 함부로 렘바스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더군요. 렘바스를 먹은 인간은 요정들 사이에서 머물기를 바라게 된다면서요.”

할레스는 그 말에는 답할 수 없었다. 요정들 사이? 눈앞의 이 사람처럼, 청년의 외양을 하고 소년처럼 이야기하는 한없이 늙고 노련한 전사들 사이에서?

“하지만 난 그런 이유로 인색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이리 너그러우십니까?”

“아! 아닙니다, 내 형제들은 내가 지나치게 격정적이며 작은 무례에도 크나큰 분노로 대응한다 비난하지요. 부당한 비난은 아닐 겁니다. 난 언제나 나의 친족에게는 날카로웠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요정이 아니지. 할레스는 카란시르가 말하지 않는 바를 넘겨짚었다. 카란시르는 그러나 매끄럽게 말을 돌려 이어나가고 있었다.

“난 그래도 당신에게만큼은……. 당신의 명예를 높여 주고 싶습니다, 할레스.”

“내 명예가 그래야 할 정도로 천박한 것이므로? 부정하지 마세요! 당신 고결하신 요정들의 눈에 우리가 어찌 보였을지, 나도 조금씩 짐작하려는 참입니다. 당신들은 우리에 비하면 높고 푸르른 산맥이나 다름없죠. 우린 당신들의 그늘 아래에서 짧은 목숨을 다해 스러지는 하루살이들이고요.”

“스스로를 비하하지 마십시오. 하루살이라고요? 난 당신 일족에 깃든 용기를 내 눈으로 보았습니다!”

“카란시르, 난 화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씩씩대는 청년은 정말로 여느 인간의 사내아이를 떠올리게끔 해, 할레스는 순간 자신이 어디에 잊는지를 잊고 카란시르의 어깨를 세게 때렸다. 카란시르가 우스울 만큼 휘둥그렇게 눈을 떴다.

“할레스?”

“우린 오르크들에게 긴 시간 포위되어 있었고, 난 지쳤습니다. 이만 쉬고 싶군요.”

그러나 카란시르는 그리 성이 난 것 같지도 않으면서 버럭 외쳤다.

“그늘—그늘이라니! 영원한 어둠이 내 발치에 이빨을 부닥뜨리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압니까?”

“이리하여 당신 형제들이 당신의 분노를 문제 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대 얻어맞은 듯 입을 다문 카란시르를 옆에 두고 할레스는 남은 술을 들이켰다. 너무 마셨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대뜸 접시에 남아 있던 말린 고기를 입에 넣어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카란시르는 바람 빠진 공 같은 소리를 냈다.

“한 마디도 지질 않는군요.”

“어쩜 그리 하는 말마다 거들먹거릴까.”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할레스로서는, 지난 며칠의 일들이 난데없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기에. 카란시르가 왜 그토록, 막 족쇄에서 풀려난 늑대처럼 기뻐했는지 할레스는 알 수 없었지만, 앳된 얼굴이 환한 미소에 구겨지는 것은 뜻밖에도 할레스의 가슴을 후벼파듯 다가왔다.

누가 나에게 산맥의 그늘을 드리웠습니까? 누가 산봉우리 위로 영원한 어둠을 펼쳐 놓았습니까? 당장은 대답하지 않아도 좋을 질문들이었고 때문에 할레스는 그저 잊기로 했다.

요정의 일이었다. 카란시르의 일이었다. 화로에서는 장작불이 타오르고 밖에는 빗소리가 가득한 어느 밤, 손끝이 스칠 때마다 차오르는 웃음을 숨기지 않고 흘려내는 청년의 일이었다. 할레스는 급기야 카란시르의 뒤통수를 감싸잡고 이마를 맞댔다. 초승달 꼴로 휜 잿빛 눈이 불티처럼 반짝였다. 뒤늦게 찾아온 생존의 기쁨인지, 카란시르의 말마따나 승리에 마땅히 따라오는 축하인지, 어쩌면 둘 다인지 모를 환희였다. 슬픔이 섞여 있다 해서 지금 이 순간의 가치가 덜해지지는 않았다.

한참을 낄낄거린 다음에야 둘은 겨우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어째서인지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도 또다시 웃음이 나고는 했던 탓이었다. 카란시르가 입을 열었을 때 그들은 여전히 넋을 놓은 것처럼 비식비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침상을 쓰십시오.”

카란시르는 간신히 웃음을 억누르는 어조로 말했다. 이것을 두 번째 명예라 하지요. 내 친족의 렘바스와 나 자신의 침상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할레스는 몸을 일으키려는 카란시르를 붙잡았다. 하룻밤이라면, 함께 쓰지 못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아침이 오자 전날의 비구름은 씻어낸 듯 사라져 있었다. 할레스는 잠든 카란시르를 뒤로 하고 막사를 나가 할라딘을 일으켰다. 모든 일은 회합으로 결정하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으나, 당장 고향은 무너지고 언제 또 오르크들의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한 사람의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아무래도 할다드의 딸인 그의 어깨에 지워질 모양이었고.

할레스는 이 일을 피하려 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장로와 전사들과의 이야기를 끝마친 후에도 태양은 여전히 동쪽에서 환하게 빛났고, 젖은 감이 남은 세상은 은빛 햇살 아래 눈이 부시도록 찬란했다. 할라딘 중 강가에 남아 있을 이들과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파괴되지 않은 것들을 챙겨올 이들을 분류한 다음, 할레스는 홀로 남아 강가를 걷기로 마음 먹었다. 아침을 느끼고 싶었다. 그가 결코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아침이었기에 더더욱.

스스로도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아직 카란시르의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막사를 나오던 도중 안감의 붉은색이 눈에 띄었던 탓이었다.

카란시르가 그 가까이 다가왔을 때 할레스는 망토 여밈에서 브로치를 빼 여덟 꼭지 별과 그 중심의 투명한 보석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카란시르는 일부러인지 발소리를 크게 냈고, 할레스는 진흙을 밟으며 멈춰 서 그를 돌아보았다.

“난 내가 어제 죽을 줄 알았습니다.”

뜻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의 목소리에는 담담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

“한데 오늘 해가 뜨는 것을 보게 되었군요.”

“승리는 축하받아 마땅하지요.”

아, 밤중의 비밀스런 이야기는 어째서 새벽과 함께 없었던 일이 되고 마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붕 뜬 기분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던 말이 흘러나갔다.

“죽음의 비탄에도 불구하고?”

카란시르는 대답하지 않았고, 할레스는 별 뜻 없이 덧붙였다.

“어제 아버지와 동생의 꿈을 꾸었습니다. 내 동생의 아들인 할단은 이제 겨우 아홉 살이지요. 어떻게 잊고 있었나 모르겠지만.”

“전투의 격정은 사람을 바꾸어 놓지요.”

“하지만 전투가 끝난 이래 아직 할단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내 하나뿐인 조카인데 말입니다. 그 아이가 내 후계자가 될 테니, 앞으로는 신경을 써야 하겠으나 그리 내키지는 않는군요.”

어젯밤의 모든 일이 마치 꿈이었던 것 같습니다, 라고는 하지 않았다. 봄이 눈을 녹이듯 아침의 태양은 전날 그들 사이 쌓였던 모든 내밀한 공감을 무너뜨리는가 싶었다. 일방적인 감상이었을지는 몰라도, 할레스는 이제야 자신과 이 요정영주 사이에 놓인 운명의 차이를 이해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카란시르의 콧잔등에는 홍조가 어려 있었고, 할레스는 그로부터 위안을 얻었다.

“망토는 돌려 드리겠습니다.”

“아니, 가져가세요! 이는 내가 당신께 자유로이 내어 드린 선물이었고, 난 선물을 되돌려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말 역시 해야만 하겠군요.”

그리고 카란시르는 손을 뻗어 양손으로 할레스의 두 손목을 붙잡았다. 불쾌했어야 마땅한 행동에도 그리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는데, 카란시르가 순수한 열의로 미소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나온 제안은 할레스가 조금은 예상했던 바였다.

“당신 일족이 여길 떠나 좀 더 북쪽으로 올라와서 살겠다면, 그곳에서는 엘다르의 우정과 보호를, 그리고 당신들만의 자유로운 땅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명예입니까?”

카란시르는 묵묵히 그와 눈을 맞추었다. 할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실로 영광이군요, 영주여. 그러나 내 마음은 이제 정해졌습니다. 산맥의 그늘을 벗어나, 우리의 다른 친족들이 향했던 서쪽으로 떠나기로 말입니다.”

“쉽지 않은 선택일 겁니다.”

“당신은 언제나 쉬운 선택만을 해 왔습니까?”

이것이 이별일 것이다. 할레스의 반박에 카란시르는 그의 손목을 놓아 주었고, 할레스는 손에 들린 별의 브로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조금 망설인 끝에 할레스는 브로치를 카란시르의 가슴께에 대고 눌렀다. 그의 손 위로 카란시르의 손이 겹쳐졌다가, 카란시르가 브로치를 고정하려 손가락을 놀리며 간극은 벌어지고 말았다. 할레스는 손을 뗐으나 내리지는 않았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카란시르의 눈가와 코 언저리는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렇다면 나의 친애와 함께 가십시오, 할레스! 당신 무용은 찬탄할 만한 것이었고, 이제 그대 일족은 영원토록 당신의 이름으로 알려질 것입니다. 당신 앞길에 태양이 비추기를!”

그러나 그 순간 할레스의 마음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그는 이 오만하고도 어설픈 청년, 지금껏 만났던 엘다르 중 가장 인간다웠던 영주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 태양이 비추고 있었다. 카란시르의 이마와 붉은 콧잔등 위로, 그 검은 머리카락과 준수한 얼굴 위로, 그의 가슴에서 빛나는 여덟 꼭지 별 위로.

"태양이 없더라도 나는 내 길을 갈 겁니다. 그러나 안녕히! 당신 사람들의 인사말은 내겐 알 수 없는 것이니, 이렇게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어떤 어둠도 당신의 길을 가로막지는 못하기를, 그리고 길이 어둠으로 향해야만 한다면 – 당신이 이날의 태양을 잊지 않기를!"


카란시르가 딛는 길은 십 년 전 할미르로부터 배웠던 것이었다.

그는 습관처럼 발을 움직였고, 그의 주변으로 밤은 점점 깊어만 갔다. 자작나무마저 잠에 든 듯, 사위가 고요해졌을 무렵, 그는 마침내 걸음을 늦추며 목의 보석을 붙잡았다. 장서관에 들어서기 전 촛불에 덮개를 씌우는 것처럼 경건하기까지 한 행동이었다. 장갑 낀 손 아래로 보석의 빛이 가려지자 그제야 보석을 그물처럼 둘러싸고 뻗어나간 여덟 꼭지 별이 드러났다.

말을 나무 사이에 그대로 세워두고서 카란시르는 좁은 오솔길로 들어섰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은 아니었다. 할레스 일족의 아이들은 봄에는 꽃을, 가을에는 나무열매를 안고 이곳을 찾아오고는 했으니까. 그러나 아이들의 발걸음은 종족을 막론하고 가볍기 마련이었고, 어른과 달리 그들이 지나친 자리에는 도끼로 꺾인 나뭇가지 따위가 남지 않았다. 카란시르는 뺨을 긁혀 가며 꾸준히 나아갔다.

숲속 깊이, 어느 당당했던 전사의 친족이 둥근 봉분을 쌓아 올리고 '고귀한 여인의 언덕'이라 이름 붙인 무덤이 있는 곳까지.

기어이 자작나무가 드물어지고 밤의 장막이 걷히며 별빛 아래 빈터가 드러났다. 그제야 카란시르는 허탈한 숨을 뱉어내며 휘청휘청 봉분으로 걸어가 묘비를 짚었다. 떼가 덮인 무덤에는 우일로스 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새까맣게마저 보이는 잔디 사이로 꽃잎은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백색이었다. 멍한 머릿속에 단 하나의 생각만이 가만히 떠올랐다.

이런 꽃은, 아무래도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아.

“강퍅하고 완고한 이들의 할레스 공이여.”

카란시르는 잠시 봉분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그는 흙바닥에 주저앉아 봉분 위로 눕듯 기댔고, 그의 두 손은 눈물을 가리려는 듯 눈가를 덮었다. 낮은 속삭임이 손목 사이로 흘러나왔다.

산맥의 그늘로부터 자작나무 숲속까지, 모든 길은 그림자 깊이 잠겨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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