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스트
안나타르 × 켈레브림보르 | 210521 포스타입
“글람호스.”
보드 위에 검은 말 열여섯 개를 내려놓으며 켈레브림보르가 말했다. 안나타르는 켈레브림보르의 손등에서 뼈마디가 도드라지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손가락과 손등이 만나는 곳에서 가는 뼈가 솟아오르고 가라앉는 모습이 악기를 타는 움직임처럼 부드러웠다.
사슴 가죽을 씌운 사각형 나무판에는 붉은 실로 여든한 개의 정사각형이 수 놓여 있었다. 아홉 행과 아홉 열. 변마다 가운데 세 칸에 하나씩, 그 안쪽 줄의 한가운데에도 하나씩 말을 세운 켈레브림보르는 고개를 들며 안나타르에게 씩 웃어 보였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흑요석을 오르크 모양으로 깎아 만든 말은 흉측하리만치 정교했다. 똑같이 생긴 것은 단 하나도 없었고 일그러진 표정은 언제 살아나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붙은 루비가 등불 빛을 받아 새빨갛게 반짝였다.
다음으로 켈레브림보르는 공단 주머니에서 유리 말 여덟 개를 꺼냈다.
“이게 오스트림. 혹은 단순히 ‘공격’과 ‘방어’라고도 하지.”
자그마한 요정 병사들이 각자 창이나 칼, 기치를 치켜들었다. 켈레브림보르는 이것들은 판의 중앙에 중심을 비운 십자로 배열했다. 한 가지에 두 개씩, 그래서 오르크와 마주선 요정 병사가 네 쌍 생겨나게끔. 안나타르는 손을 뻗어 병사 하나를 집어들고 살펴보았다.
“유리로 만든 것이로군?”
“꽤 까다로웠어.”
“아아. 직접 만들었구나?”
그가 집은 병사는 장창과 방패를 쥐고 있었다. 오르크와 마찬가지로 갑주며 망토에 창과 방패까지 전부 같은 재질이었지만, 눈만은 마름모꼴 사파이어였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가느다랗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손끝에 걸렸다. 그래, 켈레브림보르의 솜씨라면 믿을 만했다. 이런 섬세한 작업이 다른 이에게서 나왔을 리 없지.
판과 말의 만듦새가 다르다는 것을 안나타르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나무판은 단정하기는 했으나 오랜 손길에 닳은 후였고, 반면 흑요석과 유리에는 영속의 기원이 깃들어 있었다. 원래 이 말들과 함께 가는 판이 따로 있었는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유리는 팔라스의 눈부시도록 흰 바닷가를 노래했고 흑요석은 옛 벨레리안드의 깊은 암반을 속닥거렸다.
안나타르는 힘라드의 어느 높은 탑에서 심심풀이로 돌을 깎았을 젊은 공자를 상상했다. 그의 상상 속에서 켈레브림보르는 앳된 소년이었다가도 열정적인 사냥꾼이었으며 창과 방패를 든 놀도르의 영주였다.
그가 요정 병사를 다시 본래 자리에 돌려 두는 사이 켈레브림보르는 마지막 주머니를 열었다.
“놀도란.”
안나타르는 멈칫했다.
“정말?”
“얘기했잖아, 이건 내 첫째 백부가 만든 놀이라고. 그분은 해괴한 농담을 즐기셨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켈레브림보르 역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안나타르는 별수 없이 마주 미소 지었다. 그 비틀린 익살을 켈레브림보르가 물려받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었던 탓이었다.
켈레브림보르는 조심성 없는 움직임으로 주머니의 내용물을 털어 꺼냈다. 다른 말보다 손가락 반 마디쯤 키가 크고 유리 관을 쓴 요정왕이었다. 등불 아래서는 반투명한 그림자를 덧입은 얼굴은 손톱 만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퍽 준엄한 인상이었는데, 눈썹과 이마가 어쩐지 켈레브림보르를 연상시켰다. 그 외에는 둘 사이의 닮은 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아란이라고 했어. ‘왕’이지.”
왕은 나무판의 정중앙에 놓였다. 켈레브림보르는 빈 주머니 셋을 다시 자물쇠 달린 함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안나타르는 골똘히 나무판을 내려다보았다. 글람호스가 오스트림을 네 방향에서 압박하는 꼴이기는 했으나, 그 사이사이가 뚫려 있어 완전한 포위라고는 하기 어려웠다. 켈레브림보르는 잿빛 시선을 들며 말했다.
“왕의 자리가 무어겠어?”
“글쎄. 미나스 티리스?”
“그런 이름은 재미 없지. 두 번 더 기회를 줄까?”
“수수께끼 놀이라도 하려는 거야? 이기면 난 뭘 얻지?”
“편을 네가 정하는 건 어때? 미리 말해 두는데, 일반적으로 글람호스가 더 유리해.”
안나타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에드로스 페아노리온이라면, 힘링? 아니, 아니야…….”
“오스트림.”
“포르노스트군.”
포르메노스의 신다린 이름을 말하자 켈레브림보르는 풉 웃음을 터뜨렸다. 정답을 맞혔는데도 성취감이 들기는커녕 기분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핀웨 놀도란이 죽은 요새를 따 놀이 속 칸의 이름을 지었다고?
“널리 퍼지고 나서는 대부분 오스티리온이나 ‘성채’라고 했지만, 나와 내 친족들은 언제나 이걸 포르노스트로 불렀거든—아하하, 안나타르, 네 표정을 네가 직접 봐야 하는데!”
“악취미야!”
그 한 마디에 얼마나 깊은 진정성이 실려 있었는지 알았다면 켈레브림보르는 곧장 바다 건너로 도망쳐 버렸을 것이었다. 키득거리는 요정을 앞에 두고 안나타르는 탁자에 머리를 박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뭐 이런, 뭐 이런 게 다 있어? 페아노르의 피를 받으면 죄다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리는 모양이었다. 포르노스트?
그는 결국 탁자를 한 손으로 내리치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스물다섯 개 말들이 달그락 흔들렸다.
“규칙이나 설명해, 페아나린케, 웃지 말고!”
안타깝게도 그의 명령은 딱 절반만 수용되었다.
피식피식 웃어 가며 켈레브림보르가 설명한 규칙은 이랬다. 왕을 포함한 모든 말은 가로나 세로로만 움직일 수 있었는데, 칸의 수에는 제한이 없었지만 다른 말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상대 진영의 말을 자신의 말 두 개로 양쪽에서—그러니까 앞뒤나 좌우로—막아선다면 그 말은 사로잡혀 판 밖으로 밀려났다. 글람호스가 그런 식으로 왕을 사로잡는다면 글람호스의 승리였다. 왕이 판 가장자리를 둘러싼 서른두 칸 중 하나에라도 닿는다면 오스트림의 승리였다.
왕이 성채를 비웠을 때는 글람호스도, 오스트림도 성채와 상대 말 사이에 끼인다면 그대로 사로잡혔다. 왕만이 예외였다. 왕이 성채에 맞닿은 칸에 서 있다면 왕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글람호스의 말 셋이 삼면에서 왕을 둘러싸야 했고, 성채 안에 남아 있다면 사면에서 그래야 했다.
“왕이 거기 있으면…….”
“공격 측은 성채를 써서 방어하는 말을 사로잡지 못해.”
“그럼 사면에서 어떻게 포위할 수 있는데? 방어하는 말이 이미 그 자리에 서 있으면?”
“차례가 돌아오면 어차피 말을 옮겨야 하고……. 아, 왕을 이미 세 방향에서 포위했을 때는 남은 오스트림 하나를 성채에 밀어붙여 사로잡을 수 있거든. 그게 유일한 경우지만.”
안나타르는 검지로 왕의 유리 왕관을 툭 건드렸다.
“합리적이네. 왕은 성채를 지키는 게 낫지.”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면 방어 측이 이길 길은 없는걸.”
“원군이 올지도 모르잖아?”
“왜 성채의 이름이 미나스 티리스가 아니겠어? 원군은 오지 않아.”
“쯧. 성을 버려 가며 달아나는 왕이라면 오로드레스를 닮긴 했는데.”
“안나타르.”
목소리에 낮게 깔린 질책이 안나타르의 입을 막았다. 한숨을 쉴 듯 말 듯 숨을 가다듬은 안나타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때도 너와 네 아버지가 달려온 것 아니었었나? 덕분에 앙그로드의 아들 오로드레스가 목숨을 건졌고…….”
“이건 그냥 놀이야, 안나타르.”
그러니까 꼬치꼬치 따지지 좀 마! 덧붙이고서 켈레브림보르는 만웨의 도움이라도 구하는 것처럼 천장을 바라보았고, 안나타르는 그제야 슬쩍 웃었다.
“좋아, 나머진 하면서 배우면 되겠지. 내가 글람호스인 거지?”
그 말과 함께 그는 검은 오르크 하나를 밀어 움직였다. 켈레브림보르는 눈을 반짝였다.
사슴 가죽 위로 글람호스와 오스트림이 치열하게 전투하는 내내 등불은 금빛으로 어른거렸고 켈레브림보르 쿠루피니온의 처소에는 그림자가 깊이 스며들었다. 늦저녁이 밤으로 저물며 공기가 차게 식자 둘은 자리를 켈레브림보르의 침대로 옮겼다. 베개 사이에 등불을 받치고 침대 주변의 휘장을 내리니 좁은 막사에 마주 앉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말이 쏟아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리를 접은 켈레브림보르가 이내 눈꼬리를 휜 채 고개를 저었다.
“또 지겠네.”
안나타르는 과하게 즐거운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썼다.
창시자의 조카치고 켈레브림보르의 전략은 상당히 대충인 데다 설렁설렁 고르는 것임이 뻔했다. 그래도, 켈레브림보르 본인조차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전쟁에 찢긴 벨레리안드에서 보낸 시절이 아주 헛되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안나타르는 수십 수 앞을 한꺼번에 내다보고 이해할 수 있었으나, 그러기엔 이 시간이 아깝다는 심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긴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리는 켈레브림보르를 그렇게 쉬이 놓아주고 싶지도 않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길 생각도 않은 채 고민에 빠진 요정은 낮의 공방에서와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잠시 더 관찰한 후에야 안나타르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못해도 몇천 년은 되었을 말을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먼 발치에서 오래된 친구를 보는 듯한 은은한 미소가 어른거렸던 것이다.
옛일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할 상대가 켈레브림보르에게 그리 많았을 리 없었다. 페아노르의 장남이 만들어낸 놀이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함께해 줄 상대도. 안나타르는 판 바깥에 마구잡이로 늘어 두었던 말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켈레브림보르의 다음 수를 기다렸고, 흑요석 오르크는 가시 같은 칼날로 손바닥을 쿡쿡 찔러댔다.
“몇 수 물러 주랴?”
“처음 하는 것 맞아?”
어조는 부루퉁했지만 켈레브림보르가 앉은 자세에서는 옅은 만족감이 배어나왔다. 안나타르는 웃음 섞인 수긍을 하고는 아예 몸을 뒤척여 침상 발치에 길게 엎드렸다.
첫판은 아슬아슬하게나마 켈레브림보르가 이겼었다. 두 번째에서도 그들은 역할을 바꾸지는 않았었고, 안나타르는 간신히 판 가장자리에 다다를 뻔한 왕을 사로잡아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켈레브림보르는 큰 폭으로 패배해 가면서도 개운한 낯빛이었다. 그러니 안나타르는 자신이 즐거운 것이 이기고 있기 때문인지, 켈레브림보르 때문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다. 둘 다겠지, 하면서도 마음은 날아갈 듯했다.
마지막으로 이토록 자유로웠던 것이 언제였더라? 한참 망설이다 말을 움직이려는 켈레브림보르에게 그는 영 그답지 않은 제안을 건넸다.
“그럼 다시 할래?”
켈레브림보르의 손에는 요정왕이 들려 있었다. 자그마한 왕을 닮은 눈썹 하나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정말?”
“왕이 꼭 탈출해야 한다니, 그런 법이 어딨어? 오스트림 수를 늘리자. 글람호스를 전부 없애면 이기는 것으로 해. 유리 말 남은 것들 있지?”
“……그건 어떻게 알았어.”
질문 끝이 무겁게 가라앉았지만, 안나타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창, 칼, 기치. 오스트림은 여덟인데 어째서 무기는 세 종류지? 수도 맞지 않잖아, 내가 네 성격을 모른다고 생각해? 네 개쯤 남았을 테니 꺼내 봐. 판이 좁긴 해도 네모칸 대신에 교차점을 사용하면 될 것 같은데……. 아, 중심이 애매하군.”
갸웃 고개를 기울이다 말고 그는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그래, 성이 꼭 전장 한가운데 있으리란 법은 없잖아? 그러면서 안나타르는 켈레브림보르와 눈을 마주쳤다.
켈레브림보르는 마치 옛 시대의 악령을 맞닥뜨린 것만 같은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페아……. 티엘페린콰르?”
“기다려 봐.”
휘장을 걷은 켈레브림보르는 맨발로 돌바닥을 디뎠다. 안나타르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가 멈추었다. 뒤쫓아야 할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휘장에 시야가 막혀 켈레브림보르가 보이지 않는 것이 꺼림칙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켈레브림보르를 따라가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다시 발소리가 다가왔다. 켈레브림보르는 아까 말을 꺼냈던 주머니를 든 채 냅다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깃털을 채운 매트리스가 푹 꺼지며 나무판이 기울었다. 똑바로 서 있던 말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졌다. 요정의 등불이 한 바퀴 굴러가며 길쭉한 그림자를 헝클어뜨렸다. 안나타르는 표정을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켈레브림보르가 던진 주머니를 가까스로 붙잡았다.
“깨지겠다!”
“안 깨져. 내가 그렇게 솜씨 없는 장인인 것 같아?”
“등불 말이야, 등불!”
그러나 켈레브림보르는 픽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순간 안나타르는 두려워졌다. 붉은 가운은 켈레브림보르의 등 뒤로 망토처럼 펼쳐졌고 잠옷 셔츠는 명치까지 끈이 풀려 있었다. 등불이 요정영주의 얼굴 한쪽을 준엄한 빛깔로 물들였다. 산산이 흩어진 말들 중 유리 왕을 골라내 나무판 가운데 세우는 손길은 예언처럼 단호했다. 켈레브림보르는 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유리 말은 네 개, 흑요석은 열두 개 더 있어. 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설명해 봐. 핀웨 놀도란 이후로는 내 가문의 누구도 자신의 성채에서 죽은 적 없었지—하지만 이 새 시대에서라면, 안나타르, 뭔가 달라질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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