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리 뱀의 관
바라히르 & 핀로드 | 210515 포스타입
이제 베렌은 그 땅으로 깊숙이 들어갔는데, 손에는 펠라군드의 빛나는 반지를 끼고 있었고 자주 이렇게 외쳤다. '여기 오는 것은 방황하는 오르크나 첩자가 아니라 바라히르의 아들 베렌이고, 한때 바라히르는 펠라군드의 총애를 받았었노라!'
그렇게 그는 검은 바윗돌 위로 포말을 일으키며 노호하는 나로그 강의 동쪽 강변에 다다랐고, 녹색 옷을 입은 궁수들이 그를 둘러쌌다. 베렌의 처지가 추레했고 비렁뱅이 같았으나, 반지를 보자 그들은 그 앞에 허리를 숙였다.
그가 핀로드 펠라군드를 처음 만난 것은 여덟 살 때였다.
요정왕이 종종 도르소니온과 라드로스를 찾곤 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따금 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아르드갈렌 평원을 내달리는 전사들의 이야기를 해 주었었고, 그뿐 아니라 몇 달 전에는 앙그로드와 아에그노르에게서 라드로스의 통치권을 수여받는 자리에 할아버지가 그를 데려가기도 했었다. 바라히르는 그날 보았던 요정영주들 탓에 설레 그 후로 며칠 밤을 설쳤더랬다.
하지만 그가 핀로드를 처음 만난 것은 여덟 살 때였고, 그때 핀로드는 야음을 틈탄 방랑자 행색으로 사엘린드의 집을 나서는 중이었었다.
“누구세요?”
낯선 사람은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망토를 뒤집어쓴 인영은 어쨌든 오르크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안드레스 사엘린드에게서 도둑질을 할 간 큰 사람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 나잇대의 논리로 위험 계산을 끝마친 바라히르는 당당하게 그자 앞을 막아섰다. 두건 아래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의 아이가 돌아다니기에는 밤이 늦었는데.”
아, 그건. 이제껏 들어본 어떤 목소리도 그처럼 아름답지는 않았었다. 멈칫한 바라히르는 황망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저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또 있었을까 싶어서. 꿈결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음성이었다. 무엇으로도 그런 음색을 흐트러뜨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낯선 이는 손을 들어 사엘린드의 집을 가리켰다. 손가락은 희고 곧았으며 엄지에서는 선명한 초록빛이 반짝였다. 반지였으려나,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사람은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길을 잃었니? 나는 이 마을을 잘 모르지만, 저 안으로 들어가면…… 안드레스가 어린애를 귀찮아할 것 같지는 않구나.”
“제 고모님이세요.”
바라히르는 대뜸 말했다.
“사엘린드 님은 제 아버지의 누이시거든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세요?”
고모라, 그러면 네가 브레고르의 막내겠군, 하고 그 사람이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이름에 바라히르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버지를 어찌 아시냐 묻지는 않았다. 그때 이미 그는 눈앞의 존재가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아직 요정과 인간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할 나이는 아니었다 해도, 그에게는 그 나잇대 소년만의 직감이 남아있었다. 대신 그가 이전의 물음을 되풀이하려 했을 때, 그 사람이 좀 더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것으로 너와 나는 서로 한 가지씩을 질문한 셈이로구나. 네가 내 질문에 답해 준다면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알려 주마. 어떻겠니?”
“길을 잃지는 않았어요. 누나가 배앓이를 하는데 하루 종일 낫질 않아서, 어머니가 사엘린드를 만나 뵙고 약초를 좀 더 얻어오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이 밤중에 너처럼 어린 아이를 보냈다고?”
“어리지 않아요! 그리고, 뭐, 형은 아버질 따라 변경에 나가 있는걸요.”
집에서 뒤척이고 있는 길웬 위로는 바라히르에겐 누나 둘과 형 하나가 더 있었다. 그러나 누나들은 결혼해 마을을 떠난 지 오래였고, 형인 브레골라스는 한동안 집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바라히르는 새삼스레 툴툴거렸다.
“어머니는 누나 곁에 있어야 하니까 제가 온 거예요. 이제 제가 물은 것을 답해 주세요.”
그 사람은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히르는 발뒤꿈치로 흙바닥을 꾹꾹 눌렀다. 어쩐지 더는 재촉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자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아무리 참을성 있는 어른의 것이더라도.
기다린 보람은 있었다.
“너희 사람들은 날 노움이라고 불렀지.”
“……네?”
몇 년 후 돌이켜 생각했을 때 아무래도 그 말은 가명을 대려는 시도가 아니었나 싶게 될 것이었다. 족장의 손자로 자란 여덟 살짜리 아이가 할 수 있는 반응이라곤 정해져 있었지만.
바라히르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만큼 놀랐다.
“나르고스론드의 핀로드요? 정말로?”
그러자 핀로드는 낮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두건을 젖히며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이었다.
“그래, 나르고스론드의 핀로드. 정말로. 자, 밤이 늦었으니 너희 안드레스 사엘린드를 괴롭히지는 않는 게 좋겠구나. 누이가 아프다고 했지? 이왕 여기까지 온 것, 내가 도와 주마.”
그렇게 바라히르는 핀로드 펠라군드를 라드로스의 영주관으로 인도하게 되었다. 얕은 언덕을 오르는 내내 그는 핀로드를 힐끔거렸고, 달빛과 별빛이 금발 둘레로 흰 미광을 덧씌우는 데 온 넋을 빼앗겼다. 왕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르고스론드의 핀로드, 핀로드 펠라군드.
핀로드는 길웬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 나지막한 기도를 속삭였다. 핀로드는 우물에서 갓 떠온 맑은 물에 말린 아셀라스를 부숴 떨어뜨리며 들릴락 말락 서녘 권능들의 이름을 불렀다. 핀로드는 흰 수건으로 길웬의 목덜미를 적신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왕이 저러한 것인가, 그렇다면 충성을 이해할 수 있겠다, 여덟 살의 바라히르는 그렇게 자각했다. 왕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 것 같다고.
“바라히르 님!”
“물러서지 마라!”
손 안에서 물푸레나무 창대가 살아난 듯 훅 휘돌았다. 갑옷 틈에 창날을 찔러 넣고 빠르게 올려친 바라히르는 이를 악물었다. 물러서지 말라니, 쥔 것이 창만 아니었어도 훌륭한 명령이었을 테다. 붙어서 싸우기에 창은 그리 좋은 무기가 아니었고, 오르크들이 더 늘어난다면 그들은 이 이상 버텨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저 뒤편의 오르크 가운데 누군가 활을 꺼내들기만 한다면.
이미 그는 충실한 부하들의 삼 분의 일을 잃어 버렸다. 싸움이 지속될수록 사상자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리 없었다.
세레크 습지의 젖은 땅이 발밑에서 불길하게 철퍽거렸고, 등골을 타고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깨와 팔은 물론이고 온몸이 뻐근했다. 다행히 그는 아직까지 상처 입지는 않았으나 결국에는 시간 문제였다. 그는 다시 한번 소리 높여 외쳤다. 하살디르! 잠시 대답이 없자 순간 두려움이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여기 있습니다!”
제기랄,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지치고 만 게 틀림없었다.
“퇴로를 찾아라, 최대한 빨리!”
“하지만 바라히르 님!”
“제가 가겠습니다!”
저건 아마도 바라군드, 그의 조카의 목소리였다. 바라히르는 독사처럼 재빨리 창을 내뻗었다 거두어들였다. 오르크들은 사방에서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고, 하늘은 온통 연기로 뒤덮여 방위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연기, 연기 – 그는 이 재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형의 뼛가루가 북풍에 섞여 있을까? 그렇다고 숨을 들이쉬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은빛 창날이 오르크의 눈구멍을 콰득 꿰뚫었다가, 곧바로 날아올라 굽은 칼을 막아냈다. 충격으로 손목에 둔통이 일었다. 거리를 벌리는 한 괜찮을 것이다. 그는 그리 위안이 되지도 않는 말만을 되새김질하듯 떠올렸다. 거리를 벌리는 한 괜찮을 것이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노랫소리가 솟아올랐다.
“눈처럼 흰, 눈처럼 흰 무결한 숙녀여! 아 서녘 바다 너머 여왕이여! 뒤엉킨 나무 아래 세상을 떠도는 우리들의 빛이여!”
섬광이 번쩍였다. 바라히르는 질끈 두 눈을 감아 버렸다. 눈꺼풀 안쪽으로 번개처럼 강렬할 빛이 타올랐고 귓가에는 인간과 오르크의 음성이 섞여 고막을 찢어발길 듯 비명을 질렀다. 가까스로 제 자신의 비명을 억누른 바라히르가 눈을 떴을 때 사방은 대낮 같이, 아니, 대낮보다도 환히 밝았다.
그 노래, 그 노래는 모두가 칼로 찔린 양 몸부림치는 동안에도 한 번도 끊어진 적 없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해 없는 나날에 눈부신 손길이 심었던 별빛과 바람 부는 창공의 평원에 피어나는 은빛 꽃봉오리, 서녘 바다에 춤추던 뭇별을 노래하며 핀로드 펠라군드는 유리처럼 투명한 목소리를 드높였다. 베오르 일족 병사들의 창날에 푸른 예기가 깃들었다. 고통은 잠재워지고 용기는 힘을 얻었다. 요정왕으로부터 터져나온 빛은 순백의 벌꿀처럼 그들 곁에 머물러 일렁거렸다. 바라히르는 저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바람의 날이다, 늑대의 날이다, 세상이 가라앉기 전에!
그 이후로 전투는 치열했으나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핀로드는 힘의 노래를 불렀고 그가 불러내린 별빛은 창날에 깃들어 오르크들의 갑옷을 천조각처럼 갈랐다. 핀로드를 수행하던 요정들이 합세하자 빛은 점점 더 강렬해져, 오르크들은 정오의 햇빛 아래에서인 듯 발을 헛디뎠고 눈가를 비비다 창에 맞아 쓰러졌다. 바라히르는 목에 울컥 차오르는 응어리를 삼켰다. 조카가 퇴로를 찾았다며 소리를 질렀다.
그 전장에서 빠져나왔을 때 그의 부하들은 절반으로 수가 줄어 있었고 요정들은 열몇 명밖에 남지 않았었지만, 핀로드 펠라군드는 살아 있었고 바라히르 역시 무사했다.
추격자들이 한참 멀어졌을 즈음 그들은 걸음을 늦추었다. 걷지 못할 이들은 그들을 따라오지도 못했었으나 그렇대도 그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바라히르는 창대를 짚어가며 물 먹은 솜처럼 늘어진 발을 움직였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부하들이라고 그보다 나을 것은 없어서, 그들은 어쩌면 꼿꼿한 요정 몇이 이끄는 병자들의 행렬처럼 보였을지도 몰랐다.
마침내 일행이 어느 땅이 마른 공터에 멈춰 서자 바라히르는 가까스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으니 오히려 통증이 밀려오는 것 같았지만, 그런 감각에 신경을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치스러웠다. 그러나 되찾은 안정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핀로드가 그 앞에 다가와 섰던 것이었다.
“브레고르의 아들 바라히르.”
라고, 핀로드는 아직 음률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불렀다. 바라히르는 말을 할 기력도 없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자 핀로드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바라히르.”
“폐하.”
핀로드는 입으로만 싱긋 웃었고, 그제야 바라히르는 핀로드의 얼굴이 창백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라히르는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렸다.
“다치셨습니까?”
“괜찮……. 곧 아무렇지도 않을 걸세. 그보다 나는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어. 그대가 아니었더라면 나도, 내 충성스런 부하들도 앙그반드로 끌려가 모르고스를 대면하게 되었겠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가? 나는 이게 그대 의무가 요구하는 바를 넘어선 봉사였다고 생각하네만.”
그 말에 바라히르는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핀로드는 그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요정왕은 침착한 은회색 눈으로 그를 응시했고, 땋아올린 매듭에서 삐져나온 머리카락 한두 줌은 드문 햇살을 낚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흙먼지와 피를 뒤집어 쓰고서도 아름답다면 이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람일 테다. 한 순간 온화하던 눈매가 사랑스럽게 휘어지자 바라히르는 가슴 속에서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핀로드가 그를 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목소리 하나로 권능을 노래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문문한 흰 얼굴이 걱정으로 찡그려졌다. 핀로드는 조용히 물었다. 어디 불편한가? 차마 그에 대고 당신이요, 라고 하지는 못해, 바라히르는 그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핀로드는 납득하는 듯했다. 적어도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화제를 돌렸고, 질문 하나로 바라히르의 말문을 완전히 막아 버렸다.
“바라히르. 이제 나와 나르고스론드로 갈 테지?”
“…….”
“바라히르?”
“전, 전 제 형의, 그러니까. 전 라드로스로 돌아가야 합니다.”
핀로드는 칼에 찔린 듯 어깨를 말았다.
“브레골라스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압니다.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바라군드가 영주직을 이을 겁니다. 그럴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이젠 그 애가 라드로스의 영주 아닙니까?”
“내가 내린 직위지, 그건. 내 아우들을 통해.”
그 말을 뱉는 표정은 그러나 한 점의 오만도 없이 슬퍼 보일 뿐이라, 바라히르는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요정의 영주들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마음이 통해,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소문을 접한 적이 있었다. 핀로드 펠라군드는 도르소니온 영주들의 죽음을 느꼈을까. 그 자신은 아직 브레골라스의 죽음마저 확신할 수 없었다.
아직 핀로드의 손은 그의 무릎 위에 놓여 있었고, 바라히르는 흙과 굳은 피로 더러워진 손마디와 그 위로 반짝거리는 반지들을 내려다보다 다시 눈을 들었다.
“바라군드에게 물으셔야 할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폐하께서는 저희 가문에 영주의 직위를 내리셨으며, 그 자리를 이을 것은 제 조카니까요.”
그러자 핀로드 펠라군드는 다시 한번, 별빛을 끌어내리던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내린 직위지, 그건.”
“여기부터는 길이 없으니 조심하거라.”
조용히 경고하며 사엘린드는 앞장서서 지팡이로 풀숲을 헤쳤다. 바라히르는 약초가 든 바구니를 들고 낑낑거리며 그를 뒤따랐다. 그와 사엘린드 사이에서는 꼬맹이 에멜디르가 짤뚱한 다리로 열심히도 바위 사이를 기어가고 있었는데, 바라히르는 이미 한 번 아이에게 업어 줄까 제안했다가 퇴짜를 맞은 전적이 있었다.
그해 그는 열네 살이었다. 에다인의 전통대로라면 그는 진즉 다른 가문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이런저런 유용한 기술을 배웠어야 했겠지만, 그의 어머니는 막내 아들을 쉽게 떠나 보내려 하지 않았고, 덕분에 그는 조금 늦은 나이까지 라드로스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터였다. 마침 사엘린드는 그 스승의 손녀인 에멜디르를 맡아 가르치는 중이었었다.
(그 애가 과연 현자가 될지는 모르겠어요, 라고, 며칠 전 바라히르는 사엘린드가 그의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었다. 차라리 할레스 가문으로 보내 도끼 쓰는 법을 배우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만큼 용감하거든요. 아직 어리니 자라며 성품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어도 사엘린드는 마을에서 장로 축에 끼는 나이였다. 누이를 어린 여자아이와 단둘이 바깥으로 보내기는 불안하고, 그다고 한 사람 몫을 하는 전사를 위험하지도렇 않은 경호 일로 돌릴 수는 없었던 브레고르는 마침 만만한 호위를 찾아냈다. 이제 겨우 검을 제대로 쓰기 시작한 차남이었다.
바라히르로 말하자면 불만은 없었다. 사엘린드의 요정 이야기는 어머니가 해 주는 것보다 훨씬 실감이 났으니까.
“얼마나 남았어요?”
에멜디르가 투덜거렸다. 사엘린드는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더니 기가 찰 만큼 얄미운 웃음을 지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단다. 나는 젊었을 때 이 정도는 가뿐히 뛰어다니곤 했는데, 에멜디르는 아직 어린 모양이야.”
“사엘린드 니임!”
바라히르는 풉 소리 내어 웃었다.
사엘린드의 말대로 덤불 사이사이로는 길은커녕 짐승이 다닌 흔적도 없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나무는 띄엄띄엄 드물어졌고 저 앞으로는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엘린드가 지친 듯 서서히 걸음을 늦춰, 일행이 탁 트인 잔디밭에 도달했을 때 가장 먼저 호수를 본 것은 바라히르였다. 한 순간 입을 딱 벌렸던 바라히르는 다음 순간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라드로스에 이런 곳이 있었습니까?”
바람이 머리카락에 엉켰다. 바라히르는 양팔을 벌리고 빙글 돌았다. 물에서 냄새가 날 리 없건만, 호숫가의 공기는 시원하고 청량해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사엘린드와 에멜디르가 가로질러 다가오는 잔디밭에는 흰 야생화가 한가득 피어 있었다.
약초 바구니를 내려놓은 바라히르는 그에게 달려온 에멜디르를 번쩍 안아 올리며 사엘린드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았을 때 바라히르는 순간 망연해지고 말았다. 냉소적이면서도 굳건한 안드레스 사엘린드, 그가 저러한 모양으로 입매를 일그러뜨리는 것을 이전에 본 적이 있던가? 사엘린드 님,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불렀다. 사엘린드는 퍼뜩 정신이 든 듯 느릿느릿 그를 향해 걸어왔다. 바라히르는 안도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아엘루인 호수란다. 멜리안이 이곳 물을 축성했다고 하더구나.”
먼 옛날을 곱씹는 투로 말한 사엘린드는 그와 에멜디르에게 모아야 할 약초의 생김새를 일러 주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만이 띄워져 있었다.
그날 저녁 그들은 호숫가에 작은 모닥불을 피웠고, 에멜디르는 사엘린드에게서 요정 이야기를 졸랐다. 바라히르는 마음속으로 에멜디르를 응원하며 싱글거렸다. 그가 좀 더 어렸을 적만 해도 사엘린드는 엘다르를 언급하는 것을 싫어하는 듯했었는데, 요새는 몇 가지 일화라도 되살려 말해 주고는 했던 까닭이었다. 게다가 사엘린드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었고 그의 이야기에는 추호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았다.
에멜디르의 끈질긴 애원에 시달린 끝에 사엘린드는 결국, 시선을 검푸른 호수에 두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니?”
“전사들에 관한 이야기요! 용감한 이야기들, 두렵지만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들을 원해요. 검과 방패의 이야기요, 현자님!”
“그래? 바라히르는?”
바라히르는 어깨를 으쓱했다가, 사엘린드가 그 동작을 보지 못했으리란 것을 깨닫고 소리 내어 말했다.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전.”
“나르고스론드가 궁금하지는 않고?”
순간 그는 움찔하고 말았다.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호수처럼 깊었다. 모닥불의 불티가 어둠을 먹어 짙어진 표면에 일렁거리고 있었다. 바라히르는 저도 모르게 푹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막내였고, 두 아들 중 어린 쪽이었다. 위대한 업적과 검과 방패의 이야기는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러나 핀로드 펠라군드는 베오르 가문의 인간들을 몹시도 아꼈으며 영주의 손자에게 제 왕국의 한 자리를 내어주는 정도의 아량은 베풀 수 있었고, 보로미르는 과연 바라히르를 떠나보내야 할지 숙고하는 중이었다. 그들 중 요정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사엘린드였으니 보로미르가 그에게 이미 의견을 물었다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엘린드의 눈에 어린, 그가 얼핏 보고 만 감정은. 그건 불안이 아니었던가?
사엘린드가 바라는 답은 알 수 없었다. 그 자신이 바라는 답조차 알지 못하는데, 어쩌면 그의 세대에서 가장 지혜로울지도 모르는 현자의 마음을 무슨 수로 논하랴. 그래서 바라히르는 결국 솔직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나 역시 그곳을 직접 방문한 적은 없지만, 전해 들은 이야기는 있지. 어때, 나르고스론드로 가기 전 미리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지는 않으냐?”
“제가 가기로 결정된 건가요?”
어차피 보로미르가 명령한다면 바라히르는 따라야 했다. 그가 눈을 들자 사엘린드는 붉은빛이 어룽거리는 얼굴로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가도 나쁠 것은 없잖겠니. 요정왕국을 겪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테니.”
“요정왕국은 궁금하지 않아요.”
그러자 사엘린드는 한숨을 쉬었다.
문득 바라히르는 핀로드가 사엘린드에게 육 년 전의 방문을 이야기한 적 있었을지 의구심을 가졌다. 사엘린드는 잠시 침묵한 끝에야 다시 입을 열었고, 손을 뻗어 에멜디르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요정의 영주들은 인간에게는 까다로운 이들이야. 그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우리 슬픔은 덜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랬다면 바라히르는 결코 왕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었다.
“……사엘린드 님.”
“아글라레브의 이야기를 해 주마.”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끼고 굳어 있던 에멜디르가 그제야 신이 나 허리를 곧추세웠다. 바라히르는 사엘린드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탈리스카 사이 섞인 신다린 발음을 기억해 두었다. 아글라레브, 그건 영광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사엘린드는 다고르 아글라레브의 개선을 이야기했으며 하늘을 메울 듯 휘날린 기치와 빛나는 창검을, 위대한 왕들의 무훈과 요정영주들의 영예를 그려냈다. 에멜디르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사엘린드의 품을 파고들었다. 바라히르는 말을 잃은 채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나고 에멜디르는 잠들었을 때, 사엘린드가 약초 바구니를 챙기고 바라히르가 에멜디르를 둘러업었을 때, 낮은 부름이 그를 멈춰 세웠다. 바라히르. 그는 고개를 돌렸고, 사엘린드와 눈길이 엇갈렸다.
사엘린드는 그를 안쓰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잊지 말거라, 늙은 여인의 목소리가 충고했다. 우리는 베오르 가문 사람들이며, 불굴의 용기는 희망을 필요로 하지 않아.
그가 에멜디르와 혼인하기 전날 밤, 라드로스를 찾아온 앙그로드는 한 손에 포도주 술병을 들고 있었었다. 바라히르는 형만큼 요정영주들과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앙그로드에게 아내가 있었고, 지금은 나르고스론드에 머무는 아내가 있다는 것 정도는 용케 기억해 두었었다. 관습대로 바라히르에게 취할 만큼 보리술을 먹이려던 브레골라스는 앙그로드의 눈치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었고.
앙그로드는, 자네도 이제 서른 살이지, 하고 말했었다. 술병이 반 이상 빈 다음의 일이었다. 인간의 삶이 너무 빠르다는 것, 혹은 가족을 이루었으니 몸 좀 사리라는 것 따위의 이야기를 예상했던 바라히르는 그 다음으로 이어진 말에 몸을 굳히고 말았었다.
우리 형은 아직 자넬 아까워하던데. 여전히 나르고스론드로 갈 생각은 없나?
그때도 역시 그는 아엘루인 호숫가를 떠올렸었다.
하필 지금, 그 기억이 또 한 번 떠오른 까닭은 그가 나르고스론드로 가겠냐는 질문을 받아서일 테다. 스물다섯 해 만에 그에게로 돌아온 물음이었다. 급히 세운 야영지에서 긴장을 풀려 애쓰며 바라히르는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마침 근처에 시내가 있었고, 흐르는 물은 아직 맑았기에 그와 부하들도, 요정들도 몸을 씻을 수 있었었다. 며칠 내내 그에게 두 번째 피부처럼 엉겨붙어 있던 먼지를 닦아내고 나자 오히려 마음이 찜찜해졌다.
그는 나르고스론드로 가지 않았었다.
열넷에도, 서른에도. 처음에는…… 지금의 그가 기억할 수조차 없는 이유로 보로미르가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가 그의 일족과 가문을 향한 의무를 졌기에. 그의 형에게는 건강한 아들이 둘이나 있었고, 본디 차남의 자리란 것은 장남이나 딸보다 자유롭기 마련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도르소니온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핀로드 펠라군드는 대체 왜 그를 아까워하는가?
먼 발치에서 바라군드에게 말을 거는 핀로드를 지켜보다 말고 바라히르는 요정왕을 무시하기로 다짐했다. 왕은 몇 년 전 아르드갈렌의 평원 위에서 보았던 모습과 변함없이 아름다웠고, 그가 머무는 곳에는 높은요정의 빛이 옷을 적신 빗물처럼 떨어져 머무는 듯했다. 바라히르는 여전히 왕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노래 한 번에 온 마음을 빼앗길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거리를 벌리는 한 괜찮을 것이다. 전투 중에서든 지금에 와서든 그리 도움이 되는 주문은 아니었으나, 바라히르가 욀 말은 그것뿐이었다.
“바라히르 님.”
흠칫 고개를 들자 하살디르가 가까이 와 있었다. 바라히르는 입꼬리를 올리려 애썼다.
“그래. 왜 쉬지 않고.”
“이 다음에는 어찌 되는 겁니까?”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일단 이 일행의 지휘관 역할을 맡은 것은 바라히르였고, 임무가 끝나 라드로스로 돌아갈 때까지는 그가 이들을 이끌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하살디르가 뒤이어 덧붙인 말에 바라히르는 이를 악물고 말았다.
“나르고스론드로…… 가는 겁니까?”
그렇게 묻는 하살디르는 희망과 죄책감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눈길을 피했다. 하살디르에게도 가족이 있었고, 라드로스로 돌아가야 할 이유는 그에게나 바라히르에게나 똑같았다. 바라히르는 망연히 침묵한 끝에 대답했다.
“가고 싶나?”
“전 바라히르 님을 따를 겁니다. 하지만, 핀로드 펠라군드가 우리의 왕이란 것도 틀린 말은 아니잖습니까? 바라히르 님께선 그분을 따르려 하십니까?”
“우리 일족 가운데 나르고스론드까지 가 총애를 받은 건 베오르 님뿐이었지.”
하살디르의 물음을 회피하면서 바라히르는 곁눈질로 야영지를 살폈다. 그와 하살디르는 공터 한쪽 끝에 서 있었고, 그의 부하들이나 펠라군드의 요정들은 대부분 반대편, 나무들이 적당한 그늘을 드리우는 곳에 흩어진 채였다. 이곳에서라면 그의 말소리는 부하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핀로드는 여전히 바라군드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 이 거리에서는 요정의 청력이라도 귀 기울이지 않고서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었다, 아마도.
하지만 그는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하살디르는 잠시 더 그의 곁에 앉아 있었으나 이내 물러갔다. 바라히르는 눈을 감았다. 막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던 피로가 서서히 그를 잠식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적어도 적습을 경계할 몇 명이라도 골라놓고 잠에 들어야 할 텐데, 생각하면서도 그는 어느새 뜬 눈으로 꾸벅꾸벅 졸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앞으로 긴 장화 한 쌍이 다가왔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가, 그의 앞에 마치 쑥스러워하는 사내아이처럼 뒷짐을 지고 선 요정왕을 발견했다. 그는 곧바로 몸을 굳혔다. 언제 바라군드와 말씀을 끝내신 거지?
아니, 그보다 곤란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나르고스론드로 가자는 이야기가 한 번 더 나온다면, 그는 그가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눈부시도록 찬연한 요정의 왕 앞에서 그에게 마냥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핀로드가 입밖에 낸 것은 영 딴소리였다.
“아들이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저번에, 아르드갈렌에서 보았을 때 말야.”
“그렇습니다. 제 사촌 형과 함께 라드로스에 남았죠. 에멜디르가 전사이기는 하나 그 혼자 힘으론 역부족일 테니까요. 지금쯤 북부 변경을 순찰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
핀로드는 가만히 답했다. 그래, 아들이 있으면 좋지. 순간 바라히르는 그의 형 브레골라스에겐 장성한 아들이 둘이 있었으며, 그에겐 갓 소년 태를 벗은 아이 하나가 달렸을 뿐이라 말하고 싶어졌다. 핀로드가 말하려는 바가 명확해진 까닭이었다.
나르고스론드의 군주는 은빛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 조카는 동의했네. 난 자네를 라드로스의 영주로 삼겠어.”
……아아.
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는 말은, 곧 신하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는 말과 같아서. 바라히르는 언제나 막내이며 둘째 아들이었었고 명령에 따르는 것은 그에게는 본능이었다. 핀로드의 어깨 너머로 그는 바라군드와 눈을 마주쳤다. 정작 그 아이는 제 숙부를 그만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듯 아쉬운 낌새 한 점 내보이지 않고 있었건만. 오히려 격려하듯 주먹 쥔 손을 가슴 위에 얹고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에 바라히르는 기가 막혔다.
왕의 폭거에 항의할 수는 없었다. 바라군드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지금에 와서는. 그는 가까스로 대답할 말을 찾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전 라드로스로 돌아가야 합니다. 폐하께서 달리 명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만, 그게 아니라면…….”
그때 핀로드의 수려한 얼굴에 어렸던 참담함을 바라히르는 이후로 결코 잊지 못했다. 그러나 핀로드는 핏기가 하얗게 빠지도록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위험해.”
“제 아내와 아들이, 제 백성들이 거기 있습니다. 폐하께선 나르고스론드를 버리지 못하시겠지요.”
“그건 두고 봐야 알 걸세.”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핀로드는 담담히 말했고, 그 말끝이 핀로드의 입술을 떠나는 찰나 지금까지의 대화에도 불구하고 바라히르는 하마터면, 그럼 폐하의 뜻대로 따르겠노라 단언할 뻔했다. 그러나 그가 그러기 전, 핀로드가 양손을 들어올렸다.
왕이 그보다 먼저 뜻을 꺾은 것이었다.
“내린 것을 거두어들일 생각은 없어. 하지만 최소한 이 말이라도 들어 주게, 바라히르. 난 어쨌든 자네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고, 더군다나 자넬 무척 아낀다네. 그러니 이 시간부터 난 자네와 자네의 친족에게 우정을 약속하겠어. 자네의 핏줄이라면 누구에게든 나의 사랑과 원조를 내 주겠네.”
“폐하.”
갑작스레 핀로드의 말을 막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독하게 불길한 예감이 그를 휩쓸었다. 하지만 핀로드 펠라군드는 바라히르가 입을 연 적도 없다는 것처럼 말을 이었고, 기어이 끝마쳤다.
“이 말은 맹세이며, 내 삶이 끝나거나 발라르께서 이를 무효로 하시기 전까지는 번복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저, 브레고르의 아들 바라히르는 주군께서 자유를 주시거나 죽음이 평화를 주거나 세상이 종말을 맞을 때까지 당신께 충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어렸을 적 그의 할아버지가 앙그로드 앞에 무릎을 꿇고 라드로스의 영주가 되었을 때와는 하늘과 땅처럼 다른 책봉식이었다. 그러나 핀로드만큼은 세레크 습지의 어느 공터가 바라히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르고스론드의 궁정인 듯 찬란했고, 그래서, 그래서. 바라히르는 푹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할 수도 있을 왕이었다. 그 탓에 오히려 견디기 버거웠다.
흰 손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손바닥에 작고 단단한 물체가 눌렸다. 핀로드는 그의 손가락을 가만히 접어 주었다. 이것으로 증표를 삼자.
핀로드가 등을 돌려 떠나갔을 때에야 바라히르는 손을 펴 보았다. 녹색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금빛 꽃으로 장식한 왕관을 뱀 한 마리는 떠받치고, 다른 한 마리는 집어삼키고 있었다. 눈을 들자 그의 시야에 잡힌 것은 왕의 뒷모습뿐이었다.
엘다마르의 나무 아래를 거니는 요정왕이 홀로 간직하는 진실이 있다.
그는 평생 바냐르의 아마리에를 사랑했고, 그가 혼인하기를 원한 상대는 오직 아마리에뿐이었다. 그러나 한때 누군가는 그를 노움이라고, 핀다라토가 아닌 핀로드 펠라군드라고 불렀었다. 그 이름으로 그를 알렸으며 그를 널리 전했다. 이름된다는 것은 정의된다는 것이기에, 핀다라토 잉골도 아라핀위온이 핀로드 펠라군드와 같은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니 핀로드 펠라군드는 오랜 옛날, 세상의 동쪽에서 발란이며 베오르였던 인간을 만났었고, 그들은 그를 왕으로 받아들였다. 망설임 한 번 없이 그들 것이 아니었던 전쟁에 뛰어들었다. 어느 밤 그는 안드레스이며 사엘린드였던 현자의 집을 나서며 어린 사내아이와 마주했다.
그래, 나르고스론드의 핀로드. 정말로.
그의 왕국의 어떤 것도 그가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아남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때 이미 핀로드는 그 점은 내다보았었고, 켈레고름과 쿠루핀이 나르고스론드의 용기를, 명예를 꺾었을 때는 무엇보다 확실하게 직감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에게 욕심이 없었냐면, 아니다. 그는 실로 크나큰 욕심을 부렸다.
그는 유한한 생명의 인간들, 아르다를 위해서 만들어지지는 않았던 이들을 진심으로 총애했다. 그리고 그는 또한 그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했다. 길었던 다섯 세대의 평화 동안, 그리고 창날의 번쩍임과 함께 스러진 여섯 번째 세대에서.
그건 핀다라토 잉골도 아라핀위온이며 핀로드 펠라군드인 요정왕이 세상의 종말까지 가져갈 이야기다.
라드로스의 정착지는 불에 탄 폐허가 되어 있었다.
순간 부하들 가운데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바라히르는 심장이 산산이 조각 나는 것을 느꼈다. 그의 아내는, 아들은? 그가 지켜야 했던 사람들은? 그때 바라군드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숙부님, 보세요!”
“아버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검은 잔해 사이로 누군가 달려나왔다. 반사적으로 창을 치켜들 뻔했던 바라히르는 아들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베렌!”
그리고 라드로스의 주검 위에서 그의 아들은 그의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스물세 살 청년의 무게로 바라히르가 휘청거리자 바라군드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들을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아니, 바라군드가 아니라 그 동생이었다. 아니, 둘 다였다.
베렌과 조카들이 떨어져 나가자 바라히르는 오랜만에 시원히 웃으며 베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사람들은 다 떠난 것 같아요, 아버지. 시체는 거의 찾을 수 없었어요. 공격받은 흔적도 보이지 않고…….”
베렌은 잠시 말끝을 흐리며 충격과 슬픔이 뒤섞인 표정을 드러냈다.
“몇…… 분, 남아 계셨던 분들은 벨레군드와 제가 묻어 드렸어요.”
“숙모님은 잘 빠져나가신 것 같습니다. 형, 우리 애들도.”
여전히 동생과 팔뚝을 맞잡고 있던 바라군드가 그제야 깊은 숨을 내쉬었다. 둘에게는 각자 딸 하나씩이 있었고, 바라히르는 조카들이 얼마나 그 아이들을 아끼는지 잘 알았다. 무거운 짐을 덜어낸 듯한 기분이었다. 바라히르는 아들과 조카들을 보며 말했다.
“에멜디르라면 최선을 다해 줄 거다.”
괜찮으리란 장담은 할 수 없어도, 백성들을 이끄는 데 에멜디르보다 나을 사람은 없었다.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밖에 머물던 이들은 어찌 되었을지 알 길이 적었으나, 이제 그들은 작은 행운에나마 만족해야만 했다.
평정을 되찾은 벨레군드가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순간 바라히르는 바라군드를 바라볼 뻔했다. 형의 장남을, 본능처럼. 그러나 그는 이제, 그가 이제 라드로스의 군주였다. 그는 한없는 신뢰를 담은 벨레군드의 시선을 마주했고, 핀로드 펠라군드의 금발에 비치던 별빛과 선회하는 불꽃을 끌어내리던 목소리와 먼 옛날, 검푸른 호숫가에서 들었던 현자의 말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보다도 오래 전 보았던 왕의 모습을.
베오르 일족 병사들의 대다수는 피나르핀의 아들들과 함께 쓰러졌다. 바라히르가 이끌던 이들도 이제는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에멜디르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떠났을 정도로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허공에는 어둠과 재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림 없이 답했다.
“싸워야지.”
꿈에서 그는 오 년 전, 세레크 습지를 향해 출정하기 직전 그에게 입을 맞추었던 에멜디르를 보았다. 그의 무릎 아래서 나무 인형을 가지고 놀던 어린 베렌을 보았다. 누이 길웬은 열을 앓아 끙끙 앓다가도 어느새 고원의 바람 속에서 소리 내어 맑게 웃었다. 어머니가 그의 망토 자락을 여미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아기 바라군드를 안아든 형이 눈물 어린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핀로드 펠라군드가…….
눈을 뜨자 그는 타른 아엘루인, 별빛이 쏟아지는 호숫가에 누워 있었다. 야영지의 모닥불이 붉게 타올랐다. 저만치 불침번을 서는 사내 둘의 뒷모습이 검은 그림자로 드리웠다. 그는 손꿈치로 눈가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오른손을 뻗어 검을 두었던 곳을 찾으려 하자 불빛이 에메랄드에 얼룩처럼 번졌다. 바라히르는 멈칫했다. 지난 몇 년, 반지가 눈에 들어올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전사의 영혼을 가진 여인과 혼인해 용맹한 아들을 두었다. 시대는 어두웠으나 그는 변치 않았고, 비록 온 세상이 그림자에 뒤덮인들 그의 항거가 없었던 일이 되지는 못할 터였다. 그런데도 반지를 바라볼 때면 그는 의문을 품고 마는 것이었다.
그날 나르고스론드로 갔더라면, 과연 무언가 달라졌을지.
앞부분 노래: 반지의 제왕, ‘오 길소니엘, 엘베레스!’
바람의 날이다, 늑대의 날이다, 세상이 가라앉기 전에!: Elder Edda (반제에서 로한 사람들이 외치는 “창은 부러지고 방패는 부서지니, 칼의 날, 붉은 하루, 태양이 떠오르기 전!”의 원형이 된 “an axe age, a sword age, shields will be cloven”의 다음 부분 “a wind age, a wolf age, ere the world sinks”)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