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리프 이주 0P 사건

F.A.43 / 후일담

핀웨 家 | 210402 / 210526 포스타입

rhindon by 댜

“이게 난쟁이들이 하는 놀이라고?”

핀곤은 핀로드를 의심스럽게 노려보다가 곡주를 쭉 들이켰다. 핀로드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하지만 왜 하필 페아노르의 아들들이야?”

아란디스가—아니지, 이제는 켈레보른이 지어준 이름대로 갈라드리엘이었다—불만스레 물었지만, 핀곤이 있는 자리였기에 동족살해자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핀로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애들이 난쟁이들과 가장 친하잖아? 내가 듣기로는 원래는 일곱 난쟁이왕들로 하는 놀이라던걸. 그렇지만 우린 난쟁이왕을 일곱은커녕 하나도 만나본 적이 없고, 어쨌든 난쟁이들도 몇백 년째 왕들만 주제로 삼으려니 심심해진 모양이지, 우리 사촌들을 거론하는 걸 보면.”

“카란시르가 알면 기겁하겠네.”

앙그로드가 말하고는 아에그노르와 잔을 부딪쳤다.

“그래서 우리가 이걸 해야 하는 이유는 뭔데?”

아레델이 심드렁한 이의를 제기했다. 핀로드는 좌중에 모인 요정들, 곧 핀골핀과 피나르핀의 자식들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백부님 안 계시니까?”

놀랍게도 이 말은 꽤 많은 동의를 이끌어냈다. 핀로드는 새삼스레 아마리에와 낳은 자식이 없다는 데 안도했다.

이런 배은망덕한 것들. 본인도 그중 한 명이기는 했다.

이드릴의 성년식 연회 밤이었다. 성년이라고는 해 봤자 몸이 다 자란 것에 불과한 손녀를 해도 지기 전에 냉큼 데리고 가버린 핀골핀 덕분에 그들은 죄다 거나하게 취해 있었고, 그런데도 투르곤이 이 새끼들, 연회장 더 부수지 말고 나가! 외쳤을 때 우르르 왕성의 솔라리움으로 몰려갈 정신머리도 남아 있었다. 누가 아만 출신 놀도르가 아니랄까봐 대단한 의지력들이었다.

바냐르 양식대로 벽 한쪽과 천장을 통째로 유리로 만들고 카펫 깐 바닥에는 방석을 산더미처럼 얹은 방은 의외로 풍치가 넘쳤다. 석양의 마지막 빛살까지 사라진 후,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더더욱. 투르곤이야 목덜미를 잡는 시늉을 하며 불평하기는 했지만, 핀로드가 그 입에 깔때기 생각이 날 만큼 열성적으로 술을 들이붓기 시작하자 그나마 좀 조용해진 편이었다.

어쨌든 핀골핀은 이 자리에 없었다. 다 큰 요정들은 퍽 오랜만에 어른의 통제에서 벗어난 자유를 만끽했다.

“좋아,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아레델이 대뜸 한 손을 들어 손가락을 꼽았다.

“일곱 중에 한 명이랑 섹스하고, 한 명이랑 결혼하고, 한 명은 죽이는 거지.”

“이쯤 되면 정말로 친족살해네.”

언제나처럼 눈치는 개나 준 앙그로드가 첨언했다. 요정들은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핀곤을 바라보지 않았다. 다행히도 핀곤의 이성의 팔 할쯤 차지하는 존재는 핀골핀이었고, 그래서 핀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난 켈레고름을 죽일래.”

“뭐? 아니, 왜?”

아레델이 흥분했다. 아차. 문제의 원흉인 핀로드는 사촌을 살해 대상으로 보는 놀이의 안전성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걔네 중에 켈레고름이 제일 예쁘장하잖아? 그런데 걔랑 안 잔다고?”

핀로드는 고민을 그만두었다. 그럼 그렇지.

“어디서 후안이 짖나, 너 마에드로스 본 적은 있어?”

발끈한 핀곤이 술잔을 놓고 양손으로 허공에 굽은 선을 그리려 들자 양옆의 아레델과 투르곤이 황급히 핀곤의 팔을 끌어내렸다. 으악, 이런 정보는 사절이었다. 하지만 핀곤을 말리는 데는 동참한대도 아레델의 취향은 여전히 꿋꿋했다.

아름다운 켈레고름 몰라?”

“그럼 넌 켈레고름이랑 잘 거야?”

아레델은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켈레고름이랑 자고 쿠루핀과 결혼하고 암라스를 죽인다.”

“뭐야, 왜 쿠루핀이야?”

“암라스? 걔가 뭘 했다고?”

갈라드리엘과 앙그로드가 차례로 물었다. 아레델은 제 말이야말로 이 답 없는 놀이의 정답이라는 양 씩 미소를 지었다.

“잘생긴 놈, 공짜 아들, 제일 사냥하기 쉬울 애.”

갈라드리엘은 아레델의 논리에 감탄한 듯이 잔을 들어올렸다. 모인 사촌들은 반사적으로 함께 잔을 올리며 건배했다. 아레델은 술병을 들어 핀곤의 잔을 꼴꼴꼴 채우며 물었다.

“오빠는 켈레고름을 죽인댔지.”

“제일 정신사납지 않아?”

그거 동족 혐오야, 하고 중얼거린 투르곤은 등짝을 맞았다. 때린 핀로드는 능청스러운데 핀곤은 찔린 얼굴이라 복수는 핀곤이 당했다. 얼얼한 등을 더듬는 핀곤에게 또 한 번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럼 누구랑 자고 누구랑 결혼할 건데?”

“넬료.”

이제껏 신다린으로 대화하던 이들 사이에서 퀘냐 애칭은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놀이의 규칙을 기억해 낸 갈라드리엘이 곧바로 반박했다.

“한 명씩 고르는 거잖아?”

“잔 사람하고 어떻게 결혼을 안 해?”

핀곤이 억울하게 되물었다가, 이제야 생각 났다는 것처럼 핀로드를 노려보았다. 잔 사람하고 어떻게 결혼을 안 해? 반복한 핀곤은 핀로드가 요정 사회의 도덕적 기반을 뒤흔들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피는 못 속인다고 그 실망스럽단 표정만큼은 핀골핀을 똑 닮아 있어 핀로드는 백부에게 꾸지람을 듣는 심정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육체적 결합이 반드시 영혼의 결합으로 이어지는지, 이건 논쟁거리가 될 만하잖아.”

투르곤이 갑작스레 말했다. 핀로드를 제외한 모두가 탄식했다. 핀로드는 술잔을 탁 내려놓으려다, 푹신한 방석 위에서 잔이 균형을 잃자 재빠르게 잔을 다시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나머지를 한 모금에 비운 후 잔을 엎어 놓았다.

“엘다르의 법률과 관습이 말하는 대로라면…….”

우우, 어느 용맹한 영혼이 야유했다. 핀로드는 아레델을 의심스런 눈으로 흘겨보고서 말을 계속했다.

“……사실 영혼의 결합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잖아? 육체적 결합이 선행되고, 그와 함께 그, 그,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두 영혼이 혼인으로 하나가 된다고 배웠는데 말이야.”

핀로드의 말에는 어째선지 애틋한 애수가 섞여 있었다. 아레델은 투르곤의 귓바퀴를 잡아당기고서 물었다. 뭐야, 쟤 왜 저래? 투르곤은 한심한 친구와 한심한 누이 사이에서 결국은 누이를 선택했다. 아, 아마리에 있잖아, 귀 떨어지겠다 빨리 놔 이 멍청아. 사실 핀로드는 다시 한번 자신에게 자식이 없음을 되새기며 안도하는 중이었지만 그걸 남들이 알 리 없었다.

투르곤이 쩔쩔매는 사이 자리의 유이한 유부남 중 나머지 한 명, 그러니까 앙그로드는 어딘가 촉촉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약혼자와 반려를 바다 저편에 두고 온 이들에게 유감을 표하며 대화가 흐지부지 마무리되려던 참이었다.

“아, 그거 아니던데.”

에루 일루바타르를 부르지 않아도 결합은 이루어지더라고, 핀곤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에그노르가 풉 술을 뿜었다.

“뭐라고?”

“했냐?”

“아버진 이걸 아셔?”

마지막 질문을 한 것은 투르곤이었고, 핀곤의 멱살을 잡은 것 역시 투르곤이었다. 이 끝내주는 우애를 관람하던 핀로드는 투르곤이 핀곤의 목을 조르기 시작하고서야 서둘러 투르곤을 말렸다.

“투르곤! 그만해, 만도스로 떠나 버리면 대답 못 듣는다고!”

“내가 이런 걸 형이라고 키웠어!”

“누가 누굴 키워?”

“투르곤! 투루카노!”

배신감에 씩씩대던 투르곤은 앙그로드와 아에그노르의 협공에 비로소 방석 위로 무너졌다. 핀곤은 질색한 얼굴로 키는 더럽게 큰 동생의 발차기 범위 밖으로 후퇴했다.

“내가 결혼을 하든 결투를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 양심 없는 발언.”

아레델이 불쑥 끼어들었다.

“오빠, 엘렌웨 뒷조사 한 거 오빠 아니었어?”

“그게 형이었어?”

투르곤은 대로해 사촌들을 떨쳐냈다. 황급히 두 손을 내젓기 시작한 핀곤이 잽싸게 벽에 붙어 말했다.

“아니, 그럼 너보다 한참 연상인 여자랑 결혼한다고 그러는데 그게 안 수상해?”

“그걸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정신 상태가 놀랍다!”

“쿠루핀이랑 자고 마에드로스랑 결혼하고 마글로르를 죽인다!”

핀로드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목표한 대로 투르곤과 핀곤은 싸움을 멈추었다. 예상치는 못했지만 따지고 보면 예상했어야 마땅한 부작용은 방 안의 모든 눈이 핀로드를 향했다는 것이었다.

대체 왜 쿠루핀이랑? 앙그로드와 아에그노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핀로드를 바라보았다. 다 큰 녀석들이 아련한 표정으로 그러고 있으니 핀로드는 난감했다. 대체 왜 마에드로스랑? 핀곤은 질투와 혼란이 뒤섞인 채 미간을 찌푸렸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마리에가 그리운 핀로드로선 상당히 모욕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는 투르곤과 아레델, 갈라드리엘은 비교적 온건한 기색이었다.

“마글로르랑 싸웠어?”

갈라드리엘이 여차하면 마글로르를 대신 죽여 주겠다는 투로 물었다. 그러니까, ‘비교적’ 온건했다. 핀로드는 반쯤 넋을 놓은 채 대답했다.

“마글로르를 죽이고 내가 놀도르 최고의 가수가 된다.”

“또라이 새끼.”

사랑스런 여동생의 말에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핀로드는 제 인생을 이 지경으로 이끌어온 모든 선택을 후회하며 회탄에 젖었다. 왜 이런 놀이를 제안한 거지? 왜 술을 마신 거지? 왜 난쟁이들을 만난 거지? 왜 바다를 건너온 거지? 잠깐, 왜 난쟁이들을 만난 거지?

“이게 다 카란시르 때문이야.”

“네가 놀도르 최고의 가수가 아닌 게? 하긴, 그 성질머리가 동생이면 나라도 목청은 좋아지겠다.”

당장의 위험에서는 벗어난 핀곤이 키득거렸다. 핀로드는 술잔을 핀곤의 머리에 있는 힘껏 던졌다. 그러고 보니 드는 의문이 있었다.

“왜 카란시르랑 잔다는 녀석은 없어? 아니, 죽이고 싶지도 않아?”

“아, 나.”

앙그로드가 한 손을 번쩍 들었다. 핀로드는 드러내 놓고 안도하며 앙그로드를 지목했다.

“그래, 네가 말해 봐라. 잔다는 거야 죽인다는 거야?”

“미쳤다고 걔랑 자? 죽인다고.”

말이 심하지 않냐고 물으려던 핀곤은 카란시르의 장렬한 패드립을 기억해 내고는 딱 소리 나게 입을 다물었다. 아에그노르와 갈라드리엘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걔가 제일 죽일 놈이네. 자기네 부모님은 별거했으면서 어디서 남의 어머니를 들먹여? 핀로드를 제외한 에아르웬의 아이들이 적당한 합의점에 도달하려던 때였다.

“그럼 누구랑 자고 결혼하게?”

그걸 굳이 캐물어야 할까? 핀곤과 투르곤이 동시에 뜨악한 눈길을 던졌지만, 아레델은 오라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앙그로드에게 턱짓했다. 핀로드는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짚었다.

“뭐? 나한텐 엘달로테밖에 없어.”

아레델과 갈라드리엘이 동시에 코웃음을 치자 앙그로드의 낯빛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래도 결혼한 사람에게까지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마음에 걸렸는지 (여기서 핀로드는 상당한 억울함을 느껴야만 했다) 아레델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에그노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아에그노르는 당당했다.

“난 남자한텐 관심 없는데.”

이제껏 나온 가운데 가장 재미없는 대답이었다. 벌로 아에그노르는 서너 사람의 팔꿈치에 신 나게 옆구리를 찔리고 말았다.

“아, 아야! 관심 없다니까!”

“그럼 걔네 다 여자라면! 그럼 누구랑 잘 거야?”

“몰라! 마글로르?”

“안 돼, 마글로르는 너네 형이 죽였어.”

“왜 하필 마글로르야? 좀 무섭지 않아?”

아에그노르는 급기야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흑발차분한머리카락지적인여인이취향일수도있지!”

“얘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내버려 둬, 불쌍타.”

유일하게 동생의 말을 전부 알아들은 핀로드는 방석에 머리를 박았다. 취기가 알딸딸하게 올라오는 중이라 그런지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누가 남았지?”

따지자면 갈라드리엘도 남아있었지만, 아레델이 묻자마자 핀곤은 냉큼 투르곤을 가리켰다. 쟵니다, 고귀하신 누이님, 저 새끼가 아직까지 대답을 안 했습니다. 술에 사레가 들려 컥컥거리던 투르곤은 곧이어 새파랗게 질렸다.

“난 결혼했거든?”

“죽일 애만 골라 봐.”

—라는 선택지를 제시한 건 앙그로드였다. 그러나 남의 오빠라면 몰라도 제 오빠는 호락호락 놔 줄 생각이 없었던, 혹은 그새 또 곡주를 한 잔 더 비워 버렸던 아레델은 달랐다. 놀도르의 백색 숙녀……는 모르겠고, 고집스럽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요정의 시선이 투르곤을 향했다.

“아냐, 다 골라.”

“왜 나만?”

“핀로드도 골랐잖아!”

당연하지만 투르곤의 항변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몇 초 되지도 않아 기싸움에서 패배한 투르곤은 원한이 한가득 묻어나는 투로 꿍얼거렸다.

“마에드로스를 죽인다.”

왜? 핀곤이 외쳤다. 투르곤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일 치는 새끼보다 옆에서 웃는 새끼가 더 싫어.”

로스가르의 방화를 이야기한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날 아레델에게 팔아 넘겼겠다? 그럼 난 네 남편을 죽인다다—다분한 의도가 드러나는 대답에 핀곤은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아레델은 깔깔 웃으며 투르곤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 잘 사람, 결혼할 사람, 둘만 더 골라 보자.”

“아빠 재혼해요?”

잠깐, 뭐?

일곱 쌍의 시선이 일제히 문간을 향했다. 방금 전, 핀곤과 핀골핀의 ‘나는 네게 실망했다’ 표정이 닮았다고 생각했던 핀로드는 곧바로 의견을 수정했다. 하나도 안 닮았다. 하나도!

졸음에 겨운 기색으로 눈을 비비는 이드릴의 뒤에는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런 엉망진창인 아이들을 떠맡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세상의 불합리함에 소리없이 처절한 절규를 부르짖는 듯한 창백한 낯빛의 핀골핀이 서 있었다. 방 안에는 정적이 내렸다. 앙그로드와 아에그노르가 슬그머니 핀로드의 등 뒤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핀곤은 역시나 용맹했다.

“……어디부터 들으셨어요, 아버지?”


핀골핀이 그들의 대화를 과연 얼마큼이나 들었는지는 영영 미지의 영역에 남고 말았다. 아버지의 서늘한 눈빛에 기가 질린 투르곤이 그만 그들이 나눈 이야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고스란히 읊어버린 까닭이었다.

암기력 하나는 빌어먹게 좋아서는.

마찬가지로 기가 질려 입을 다물고 있는 주제에 핀곤은 투르곤을 흘겨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어떻게 저걸 전부 기억한 거야?

투르곤의 말이 이어지는 내내 핀골핀의 얼굴은 헬카락세처럼 차게 굳었다가 곧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다시 창백하게 핏기가 빠졌다가 마침내 제왕다운 근엄함을 되찾았다. 투르곤은 솜씨 좋게 이드릴의 난입 직전에 이야기를 끊었다. 그와 핀곤, 장남이라는 이유로 책임을 덮어쓴 핀로드는 원래 투르곤의 것이었으나 핀골핀이 차지한 책상 앞에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판결을 기다렸다.

침묵.

냉기가 쌩쌩 부는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핀로드가 결국 소심하게 한 손을 들어올렸다.

“백부님, 저. 제가 잘못했습니다.”

“무엇을?”

“쓸데없는 놀이를 제안했고…….”

마치 티리온에서 뒹굴다가 진흙투성이가 된 채 현관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때의 해명과 같은 어조였고, 그 때문에 핀곤과 투르곤은 어쩔 수 없이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짓고 말았다. 그것도 곧 핀골핀의 헛기침에 화들짝 놀라 사라졌지만.

“저희, 크흠, 사촌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이야기가 나온 뒤에도 놀이를 멈추지 않은 것을요.”

“그건 잘못이 맞지. 하나 내가 꾸짖을 잘못은 아니구나.”

그 말인즉슨 다 큰 애새끼들을 이런 일에서까지 떠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핀로드는 재빨리 고개를 주억거렸다. 핀골핀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핀다라토, 투루카노. 너희 둘은 이만 물러가거라. 너희 형제가 제대로 잠자리에 드는지 확인하고. 또다른 사건이 벌어진다면 너희에게 책임을 묻겠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제법 품이 잡힌 경례를 붙인 둘은 누가 붙잡을세라 순식간에 서재를 비웠다. 배신자들의 행태에 분노하지도 못하고 눈만 뻐끔거리던 핀곤은 문득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핀데카노. 결혼했다지?”

장신의 영주는 훌쩍 안장에서 뛰어내려 바라드 에이셀의 다진 흙바닥을 디뎠다.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그와 핀곤 사이의 거리는 성큼성큼 좁혀졌다.

“핀데카노. 아스탈도. 놀로핀위온.”

흡사 사냥꾼을 눈앞에 둔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부름이었다. 어절이 고드름처럼 새파랗게 얼어 부러졌다. 어느새 눈앞에 바짝 다가온 마에드로스가 핀곤의 어깨에 장갑 낀 손을 올렸다.

“전하.”

“아, 하하, 안녕, 루산돌.”

“루산돌? 누가 루산돌이더라? 아아, 놀도르 군왕 폐하의 아들을 염치도 없이 불온한 관계로 끌어들인 오만불손한 놈, 내 너만은 나이에 걸맞게 행동하리라 믿었거늘! 바로 그 사람이지?”

마에드로스의 성대모사는 소름 끼치도록 정확했고, 굳이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핀곤은 이미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을 톡톡히 느끼고 있었다. 마에드로스가 송곳니 하나가 빠진 치열을 드러내며 웃자 급기야 그는 오르크들을 연민하고 말았다.

“실수였어!”

“실수는 너보다 한참 어렸을 아이를 미래에 관한 아무런 고려 없이 아르다의 끝날까지 이어질 속박으로 묶어버린 것이 실수겠지!”

“음, 취해 있었어!”

네가 과연 제정신이었는지 의문이구나. 어쩌면 그리 무책임하고도 불경할 수 있는지!

“아버지는 제기랄 편지를 얼마나 길게 쓰신 거야?‘

“네가 비밀을 지킬 수 있는 기간보다는 길었던 것이 분명한데.”

“넬료, 우리 솔직해지자. 너라고 안 들켰을 것 같아?”

“안됐지만 그 가설을 실험할 기회는 없겠네. 난 잿가루에 내 사생활을 미주알고주알 일러 바치는 취미는 없거든.”

핀곤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마에드로스가 여전히 금방이라도 그를 탈탈 털어버릴 듯 그의 어깨를 쥐고 있었으므로 딱히 편한 자세는 아니었다.

“미안해, 응? 어쨌든 이렇게 오래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었었잖아. 이런 식으로라도 밝혀졌으니 다행 아니야?”

“핀데카노.”

“으응?‘

"효수된 머리와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설마 그러실까! 네가 오르크도 아닌데!"”

“가타부타는 네 아버지께 여쭈어야겠는걸. 난 내가 모르고스보다 극악무도한 배반자라는 데 걸지.”

역시 그 편지를 가로채 태워버렸어야 했다.

일행을 물리고—핀곤은 정말, 정말,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대체 누가 마에드로스 페아노리온에게 호위대 따위가 필요할 거라 생각한 거지?—핀골핀의 집무실로 가는 내내 마에드로스는 핀곤의 팔뚝을 곰덫처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마에드로스가 연약한 귀공녀였더라면 배우자의 아버지를 처음 만나러 가는 데 따른 긴장이었다고도 여길 수 있을 태도였다.

안타깝게도 마에드로스는 핀곤보다 한 뼘 가까이 키가 컸고, 험악한 표정은 차라리 귀공녀를 납치하려다 체포된 불량배의 것에 가까웠다.

곱게 넘어가기는 초장부터 글러먹은 상황이었다.

핀곤은 낙관적인 자세를 견지하려 애썼다. 그래도 뭐, 발라르의 허락 없이 아버지가 그들을 이혼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핀곤 자신의 탄생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을 돌이켜봤을 때 발라르가 또 한 번 이혼을 허락해 줄 리도 없었다! 세상에, 그들 비탄의 한 자락도 아만에 닿지 못하리란 심판이 이렇게 기껍기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집무실 문앞에서까지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독이기는 어려웠다.

“넬료. 루산돌. 넬랴핀웨 마이티모. 마에드로스.”

“왜.”

“오늘 무슨 일이 있든 난 네 반려야. 알지?”

그를 쏘아보는 시선이 싸늘했다.

“개탄스럽다.”

핀곤은 금방이라도 왈칵 눈물을 쏟을 듯이 아랫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래도 그 모습이 퍽 안쓰러워 보이기는 했는지, 아니면 그간의 친애를 바탕으로 한 일말의 동정심이라도 생겨났는지, 마에드로스는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을 눌러 참으며 덧붙였다.

“네가 헬카락세와 상고로드림에도 굴하지 않았다면, 내가 놀로핀웨 앞에서 굴할 수는 없지.”

그러더니 핀곤이 감격할 틈도 주지 않고 문을 열어 젖혀 버렸다.

핀골핀은 할 말을 편지에서 죄다 쏟아냈던 모양이었다. 그것까지는 핀곤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러니까, 편지를 운반해 주는 갈까마귀가 발목에 묶인 양피지의 무게 탓에 휘청휘청 병든 닭처럼 날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마에드로스는 품에서 말린 두루마리를 꺼냈고, 그건 핀곤이 결코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뭐? 얘가 언제부터 미리 말을 적어올 만큼 열심이었는데? 마에드로스는 그가 아는 한에서, 핀골핀과 핀웨를 포함해서라도 가장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동시에 정치를 본능으로 대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마에드로스가 아주 어렸을 때라면 모르되 적어도 핀곤이 소년이 된 이후로는 그는 단 한 번도 준비된 연설문에 의존한 적 없었다. 핀곤은 모락모락 피어나는 의심을 잊으려 애썼다. 에이, 설마.

“폐하.”

이어진 인사는 벨레리안드의 군례가 아니라 투나 언덕 위 티리온에서 널리 쓰이던 약식 절이었다. 딱히 정중하지는 않았지만, 두루마리를 쥔 마에드로스에겐 땅을 짚을 손이 없었으므로 무례하다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핀곤이 떨떠름하게 지켜보는 아래 마에드로스는 두루마리를 핀골핀의 책상에 올리고 다시 두 걸음 물러나 핀곤 곁에 섰다.

“답장이냐?”

핀골핀이 두루마리로 손을 뻗으며 물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건 무슨 뜻이지?”

“지참금 목록입니다.”

그럼 그렇지. 핀곤은 하마터면 그대로 휘청거려 돌바닥에 뒤통수를 박을 뻔했다. 효수된 머리는 무슨, 이 새끼 단단히 작정했는데?

핀골핀의 이마에 파아란 힘줄이 돋았다. 마에드로스는 뻔뻔하다 못해 철판을 깐 게 분명한 낯짝으로 핀골핀을 응시했다.

“전례와 현재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예에 어긋나지는 않을 겁니다. 적다고 여기신다면, 핀데카노가 제 가문의 일원이 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 드리지요. 제가 폐하의 가문 사람이 아니듯 말입니다. 어쨌든 페아노르 가에 드리운 저주가 아드님께 미치길 바라지는 않으시잖습니까?”

“넬랴핀웨.”

아, 난 이제 독수리와 매 사이에 낀 토끼의 심정을 알 것 같아. 핀곤은 감히 도망치지도 못한 채 설설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신 것이 틀림없었고, 마에드로스는…… 아무래도 실성한 것 같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핀골핀에게 그딴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말씀하시지요, 폐하.”

‘편지를 보낸 직후부터 난 찰나의 격분에 휩쓸려 수습하기 어려운 말을 써내린 것을 후회했었지. 고맙구나. 더는 후회하지 않는다.“

지레 움츠러들었다가 마에드로스를 흘깃한 핀곤은 곧바로 다시 허리를 펴고 아버지에게 눈을 고정했다. 마에드로스의 입에서 더 무슨 헛소리가 나오든 그는 정말이지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혼인한 이상 관여가 불가피하대도!

난 켈레고름을 죽일래.

순간 핀곤이 자신의 목울대를 더듬어봤을 정도로 실감나는 입내였다. 핀골핀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제기랄, 마에드로스를 볼 수는 없었지만 핀곤은 마에드로스가 상큼하게 웃고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앙그반드에서 돌아온 이래 마에드로스의 상큼한 미소란 꽤나 냉소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암라스를 죽인다.

“넬랴핀웨,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아실 텐데요, 사정을 다 들으셨다면. 마글로르를 죽이고 내가 놀도르 최고의 가수가 된다. 핀다라토는 꿈도 크지요. 아, 그리고 투루카노는 저를 죽이겠다고 했다던가요?”

“그걸 대체 누가 말해 준 거야?”

핀곤이 불쑥 끼어들자 마에드로스는 아예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다 수가 있지. 어떠십니까, 폐하? 폐하께서 맡으신 아이들이 친족살해를 획책한다는군요.맙소사, 그것도 동부변경에서 애쓰는 이들을!”

“놀이 중에 말이 헛나간 것으로 별 해괴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리고 살해만도 아니었죠. 저라면, 폐하.”

어느샌가 다시 책상 앞으로 훅 다가선 마에드로스가 한 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몸을 기울였다. 붉은 머리카락이 주렴처럼 흘러내렸다. 

“폐하와 자고 이리메 님과 결혼하고 아버지를 죽이겠습니다.”

“왜?”

핀곤이 비명을 질렀다. 핀골핀은 낯빛이 푸르스름하게 썩어 들어갔다.

“왜긴, 남의 가문 사람을 죽이기는 좀 그렇잖아. 아, 결혼 때문에? 핀디스 님보단 낫잖아? 나머지는 이미 하셨고.”

그거 말고, 맨 앞엣것! 핀곤은 차마 그 소리는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쿨럭쿨럭 헛기침을 했다. 마에드로스는 능청스럽게 핀골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으신 듯합니다. 그런데 저도 동감이란 말이지요. 난쟁이들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핀웨 가 놀로핀웨와 아라핀웨의 자제들에게 기대되는 바는 다르지 않습니까? 제 가문이 훼손당한 명예를 걸고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폐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마에드로스가 책상에 놓인 두루마리에 슬쩍 턱짓한 것이었다.

“드릴 때 받으십시오.”

“내가 거부한다면?”

“그렇다면 제 동생들을 제어하는 것이 오롯이 제 의지에 달린 일임을 아셔야 할 겁니다.”

잠깐만, 이 대화.

—자식과 조카들을 구하고 싶다면 순순히 큰아들을 내놓아라!

—크윽, 싫다!

정말로 납치 시도 불량배잖아! 황당한 깨달음에 다다른 핀곤은 금실이 빠져라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외쳤다.

“아니, 지참금이고 뭐고 허락은 필요 없거든요! 우리 이미 혼인했다고요!”

“핀데카노, 조용.”

“재고하기 전에 입 다물어.”

냉랭한 시선 한 쌍이 내리꽂혔다. 핀곤은 얌전히 닥치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는 아버지와 남편의 협상 끝에 지참금 몇 푼 값으로 팔려갈 모양이었으니까.

형의 호위대에 섞여 있던 켈레고름은 흉벽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멀리 아르드갈렌 평원이 드넓은 초록빛으로 펼쳐졌다.

“그래서 어때, 우린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아?”

“꿈 깨라.”

코웃음을 친 아레델은 그의 다리 옆으로 양팔을 괴었다.

“내가 얘기했잖아? 난 쿠루핀이랑 결혼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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