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슬픈 일이 있었다는 게 기쁜 일이 있었다는 걸 덮을 수는 없다.

기억 by 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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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일본 페그오에서 진행한 '설원의 메리 크리스마스 2023 ~ 7days/8years snow carol' 및 2부 7장까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당 스토리를 읽지 않은 분의 감상을 권하지 않습니다.

* 2023 크리스마스 이벤트의 뒷이야기를 상상했습니다. 리츠카와 마슈, 네모 산타가 이야기하는 이야기.

* 쓰면서 들은 곡: https://youtu.be/UsKtKdg8uqA?si=68SgG3BKXPRTsVkq


길게만 느껴진 크리스마스 선물 배달이 끝난 건 새해가 코앞에 다가올 무렵이었다. 이제 완전히 지쳤다며 울상 지으면서도 선내를 정리하는 마린과 그간의 항해-혹은 질주-기록을 품에 한가득 안고 향후 참고할 자료가 늘었다며 히죽 웃는 프로페서, 역시 향후 기동에 문제없도록 대대적으로 점검하겠다는 엔진과 저번에 만들어 주지 못한 칠면조에 비장의 피로회복 아이템을 더해 만찬을 차리겠다는 베이커리와 부족한 약품은 없는지 확인하겠다는 너스까지, 잠시 쉰 뒤에 모두가 함께 모여 식사를 하자는 약속을 나눈 뒤에야 리츠카와 마슈는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하선할 수 있었다.

“캡틴… 리더가 6시까지 꼬박꼬박 돌아와서 보고하는 거, 진짜 쉬운 일이 아니었어.”

방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털썩 주저앉는 리츠카를 보며 네모는 미미하게 미소 지었다. 마슈도 조용히 미소 지으며 리츠카의 곁에 조심스레 앉았다. 네모는 두 사람을 가만 지켜보다가, 큼, 헛기침하며 수염을 장착했다.

“마스터, 마슈. 도와줘서 고마워. 물론 우리끼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두 산타의 호의는 감사히 받을게.”

이 정도로 무얼, 하며 손을 내젓는 두 사람에게 네모는 선물 가방을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원래는 그날, 자정에 선물 배달이 끝나면 주려고 했는데… 크리스마스가 끝나자마자 주는 것도 멋이 없고, 너희가 끝나자마자 잠들었으니까.”

마치 잘못을 저지른 뒤 혼나는 강아지처럼, 리츠카와 마슈가 동시에 시선을 구석으로 옮겼다. 그날은 기절하듯 잠들 수밖에 없었다. 네 시 전까지 산타가 갈 길을 정리했어야만 했고, 그 뒤에는 곧바로 네모 산타와 함께 선물 배달에 나섰으니까. 들키지는… 않은 거겠죠? 마슈가 눈으로 묻는다. 않길… 바라야지. 리츠카가 눈으로 답한다. 그걸 바라보는 네모 산타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비밀에 부쳐두도록 한다.

“여하튼. 그런 너희를 위한 산타의 새해 선물이야.”

리츠카와 마슈의 손에 백색으로 포장한 상자가 놓였다. 손보다 살짝 더 큰 크기와 얕은 높이 탓에 내용물이 무엇인지 쉽사리 짐작할 수가 없다. 여기서 풀어보아도 되겠냐는 리츠카의 질문에 네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모의 허락이 떨어지자 리츠카와 마슈가 조심스레 리본과 포장을 풀기 시작했다.

“그냥 막 뜯어도 돼.”

“그래도 캡틴이 준 건데~.”

이 모습일 때는 리더인데 말이야… 그런 소리는 굳이 하지 않고, 네모는 서로를 마주 보며 설레는 얼굴을 하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그 ‘선물’을 보면 어떤 표정을 할까, 실망하지는 않을까, 아니면 깜짝 놀란다거나, 생각하는 건 싫지만 눈치가 빠른 아이니 어떤 일이 있었을지 짐작하게 될까. 네모가 크로스백의 끈을 꾹 쥐었다. 눈앞의 두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다른 네모 시리즈들은 캡틴-리더-의 긴장을 알아차렸는지 의견을 더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혹은 그들도 멀리서 함께 긴장하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고.

두 사람이 선물 상자를 연다. 네모의 손 끝에 미약한 힘이 실린다.

“와.” “와아.”

그저 단정한 흰 장갑처럼 보일 텐데도, 이 아이들은 감탄사를 뱉어냈다. 먼저 장갑을 들고 방긋 웃은 건 리츠카였다.

“나, 아까부터 손 시렸거든. 새로 받은 산타 옷, 예쁘긴 한데 장갑은 없었으니까.”

그리 말하고 리츠카는 장갑을 덥석 꼈다. 조금 크네? 흘리듯 한 말이지만, 네모로서는 놓칠 수 없는 말이었다.

“이건….”

그리고 느리게, 장갑의 표면을 쓸며 마슈가 입을 열었다.

“어쩐지, 닥터가 생각나는 장갑이네요.”

마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 것과, 네모의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린 것, 그리고 리츠카가 그 말을 받는 것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역시, 마슈도?”

“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긴 하지만요.”

―아아, 그래. 이 감상의 흐름은 너무나 당연했다. 네모가 지식으로 알고 있기로, 닥터 로마니는 마슈의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실험실과도 같은 방의 유일한 방문자, 실험체가 아닌 칼데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힘쓴 의료계의 톱, 그러면서도 언제나 마슈의 관심사와 흥미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 내내 착용하던 장갑이니 마슈가 모를 리는 없는 게 당연하다.

네모는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으나) 일순간 동요했던 마음을 수습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것과 비슷할 줄은 몰랐지만.”

거짓말을 하는 건 / 잠깐, 그렇다면 마스터에게 /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 닥터 로마니는 어떤 사람인가? / 가끔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 보면, 기록과 오가는 대화 속에서 그 이름을 자주 듣긴 했지만, 정작 마스터의 입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듣는 일은 거의 없었다. 피니스 칼데아에 있던 이들은 이미 아는 상대이기에 굳이 리츠카에게 묻지 않았고, 노움 칼데아에 소속된 이들은 현재로서는 들을 기회도 이유도 없었으니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래도 지식으로는 닥터 로마니의 행적을 알고 있다. 시간 신전에서의 최종전, 마슈마저 잃고 분기탱천한 마스터의 앞에 나타난 백의. 아마 그때도, 잠깐 이야기를 나눠 본 그 사람이면 웃고 있었을지도 모르다 생각하면서, 네모는 생각하고야 만다. 혹 이 선물이 마스터를 슬프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여기까지 0.5초. 고속사고 비슷한 것을 구사한 네모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혹시, 별로인 선물이었을까?”

“그럴 리가!” “아뇨, 전혀요.”

네모의 걱정 따위는 불필요하다는 것처럼 두 사람은 역시 비슷하게 답을 내놓는다. 그러면서도 마슈는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리츠카는 씩씩하게 미간을 좁히며 웃다가, 마슈를 보고는 후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눈을 감았다. 그 온기가 무엇이었는지, 혹은 무엇을 떠올리게 하였는지… 다시금 방패를 들 수 있게 된 소녀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그러나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고요히 잠겨있던 슬픔과 함께, 그간의 기쁨도 함께 떠올랐으므로 소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정말, 정말 기뻐요.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네모 산타 씨.”

“응, 나야말로 고마워. 마슈.”

“응. 다행이다, 마슈.”

리츠카의 낮은 목소리에서 깊은 이해가 묻어나왔다. 같은 일을 겪은 사람으로서 건넬 수 있는 최선의 위로. 오랫동안 눈을 감고 마슈의 떨림이 멎길 기다리던 리츠카는 숨을 들이쉬고는 눈을 떴다. 그러고는, 활짝 웃었다.

“나도, 정말 기뻐. 캡틴이 우릴 생각해 준 것도, 닥터가 생각나는 것도. 소중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건 기쁜 일이니까.”

―아, 그런가. 네게 그 사람의 일은 ‘슬픈 것’뿐만이 아니로구나.

네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후지마루 리츠카는 그 백의 밑에서 일 년 동안 활동한 마스터였다. 비록 남들은 모르는 악몽을 꾸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따끔따끔하고 괴로운 꿈일지라도, 눈을 뜬 뒤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지향하며 살아가려 발버둥 치는 단단한 사람.

슬픈 일이 있었다는 게 기쁜 일이 있었다는 걸 덮을 수는 없다. 어떤 아비의 사랑이 셀 수 없는 윤회 속에 존재했던 것처럼, 신들의 정원 속에서 남매가 가족과 함께 웃던 과거가 존재했던 것처럼, 이제는 사라진 친구를 위해 하늘에서 술을 뿌리던 작은 만능인이 존재하는 것처럼, 비록 이해할 수 없더라도 친구의 슬픔을 알고자 다가온 또 다른 인류종이 존재했던 것처럼. 슬픔을 기억한다는 건 기쁨 또한 기억한다는 일이기에, 울면서도 웃는 방패의 소녀와 함께 범인류사 최후의 마스터 또한 웃는다.

네모는 네모 시리즈와 방금 한 약속을 잊지 않았다.

마스터와 마슈 또한 방금의 약속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약속도, 슬픔의 기억도, 기쁨의 추억도,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어떤 슬픔의 기억’은 물을 수 없더라도.

“마스터, 마슈.”

네모는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어느새 산타 수염은 빼둔 채였다.

“모두랑 식사를 할 때, 들려주지 않을래? 닥터 로마니의 이야기. 우리, 피니스 칼데아의 일은 기록으로만 알고 있으니까.”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하자. 슬픔도 기쁨도, 괴로움과 즐거움도 모두 이야기하자. 언젠가 있던 부재를 받아들이기 위해, 언젠가 사라질 존재를 이어가기 위해. 그리고 또다시, 모두와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했다는, 즐거운 기억을 너에게 1초라도 더 남기기 위해.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리츠카와 마슈를 보며 네모는 생각한다. 이 시간은 분명히, 나에게도 여행의 축복이 되는 기억으로 남을 것만 같다고. 그리고 꽃의 마술사가 말했듯 백의와 자신이 잘 맞았다면, 그 역시도 언젠가 이러한 생각을 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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