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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 petite lapine

암굴왕 드림 | 쩌리 님 커미션 :3

rhindon by 댜

무도회라는 건 J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꽤 지루한 행사였다.

그야 날이 날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화창한 오후가 저물며 찾아든 저녁은 유난히 부드러웠고, 봄바람은 따스했으며, 긴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반면 무도회장 안은 음악으로 가득할지언정 그 밑바닥에는 사람들의 소음이 깔려 있었던 데다 공기도 그리 맑다고는 못할 수준이었다.

그에 더해 툭하면 쟁반을 높이 받쳐 든 시종들이며 샴페인 잔을 넘치도록 채운 사람들이 앞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돌아다니니. 밤이 깊어갈수록 J가 점점 창가로 흘러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리고 이유 두 번째. 누가 이런 따뜻한 밤에 가면무도회를 열려고 계획한 거람?

이 계절에 기온이 오락가락하는 것이야 별수 없으니 마냥 주최만 탓해서는 안 될 노릇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다 가리는 가면을 몇 시간째 쓰고 있던 J는 그만 제대로 심사가 꼬여 버리고 말았다. 약간 그로테스크할 만큼 정밀한 가면은 ‘진짜’ 토끼털을 촘촘히 박아 제작되었다고 하던데, J의 취향과는 한참 떨어져 있기도 했을뿐더러 통풍이 거의 되지 않아 숨이 막혔다.

그렇다고 벗자니 시선이 신경 쓰이고.

그래, 그게 J가 얼굴 위쪽만을 덮는 루프 가면을 고르지 못한 사정이었다. 어디 나가기만 하면 힐끗힐끗 쳐다보는 눈초리에는 이제 싫증이 났다. 때마침 백작의 저택으로 날아든 가면무도회의 초대장은 괜찮은 탈출구가 되어줄 수 있을 듯했었는데……. 하지만 파리의 가면 제작 기술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뭐야.

곁눈질로 바라본 유리창에는 환하게 밝혀진 홀과 무도회를 즐기는 사람들에 더해, 새까만 토끼 얼굴 하나가 비치고 있었다. 으, J는 살짝 몸을 떨었다.

“다시 봐도 무섭넹.”

높이 솟은 귀에는 테두리에 보석을 박아 넣고, 토끼의 볼록한 주둥이까지 솜을 넣어 구현해 낸 가면은 화려하기야 정말 화려했다. 하지만 역시 좀 과하지 않나? 다들 이 토끼 머리의 어디가 그렇게 귀엽다고 한 거지?

심통 난 채 이제까지 거쳐 온 대화 상대들을 떠올리던 J는 이내 다시 홀 안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봐줄 만한 광경이라면 역시 그 방향에 있기는 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샹들리에, 어디서 피어올랐는지 모르게 사방을 옅은 안개처럼 감싸는 연기. 합주단의 왈츠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무도회라고는 하나 실제로 춤을 추는 사람들은 젊은 층 일부로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J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더랬다.

과감한 빛깔과 윤곽의 의상들이 발보다는 바퀴가 달린 듯 부드럽게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던 J는 다시 한번 짧게 한숨을 쉬었다. 가면 아래로 뭘 먹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디저트라도 좀 찾아 나설까 싶었다.

그때 J의 생각을 읽은 듯 폭 좁은 유리잔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다. J는 가면 아래로 토끼 눈—정말로 그랬다—이 되어 잔을 쥔 사람을 홱 돌아보았다.

“여보!”

“크하하하! 숙녀분을 기다리게 했군.”

그 웃음소리가 J의 기분을 순식간에 저 높은 천장까지, 아니, 하늘 꼭대기까지 끌어올렸다. J는 암굴왕이 자신의 표정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활짝 웃었다. 그러면서 직감했다. 자신도 암굴왕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역시 무도회장의 어느 조명보다도 밝게 미소 짓고 있으리라고.

“어디까지 다녀온 거양? 얼마나 답답했는뎅…….”

“워낙 북적여서 말이다. 자, 마셔라.”

암굴왕은 잔을 넘겨주었다. 장갑 낀 손이 스치며 찌릿한 감각이 J의 팔을 타고 올랐다. J는 헤헹 콧소리를 내고는 가면을 살짝 들어 올려 샴페인으로 입술을 적셨다.

그래도 샴페인 맛은 썩 괜찮았고, 상쾌한 탄산에 더위도 조금 가시는 듯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암굴왕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답답하다고?”

“응, 가면이 좀. 남푠은 어떻게 그렇게 멀쩡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암굴왕은 어깨만 으쓱이더니, J의 가면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토끼 주둥이를 정통으로 딱.

“하지만 아주 앙증맞아. 하하하! 본 얼굴에 비할 바는 아니나, 색다른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군.”

헤엥, 그렇다면야 뭐. 너그럽게 참아줄 수 있었다. 하긴 남편의 가면 취향이 이런 것 같기도 하고…….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이 특유의 보랏빛 예복을 갖춰 입은 주제에, 암굴왕은 가면만은 얼굴도 아니고 머리 전부를 덮는 것을 택했다. J의 것보다 딱히 낫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 가면을 처음 보았을 때 J에게 들었던 감상은 ‘박제된 늑대 머리를 통째로 들고 온 것 같다’였으니까. 들고 온 샴페인이 J에게 건넨 것 한 잔뿐이었던 데서 알 수 있듯, 은회색 멋진 털을 가진 한 마리 늑대로 변장한 암굴왕은 무도회가 끝나거나 스스로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할 처지였다.

그래도 무도회장의 몇몇 기괴한, 가면보다는 무대 장치에 가까운 물건들보다는 나았지만. 게다가 아무리 우스운 가면을 썼더라도 암굴왕에게서는 숨기지 못할 기품이 흘러나왔다. 저 당당한 어깨와 잘록한 허리, 자신감 넘치는 몸짓을 보고 있자면 늑대가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로 분장했대도 매력적일 게 분명했는걸.

J의 관찰을 직감적으로 느낀 듯, 늑대 머리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무슨 생각에 그리 빠지셨나?”

샴페인을 한 모금 꼴깍 삼킨 J는 가면을 도로 내리며 말했다.

“으응, 당신 얼굴을 못 봐서 아깝다는 생각?”

“그래?”

J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암굴왕은 한쪽 팔을 J에게 내밀었다. 어리둥절하게 그와 팔짱을 낀 J는 그가 이끄는 대로 몇 발짝 옆으로 떼었다가, 자신이 이제까지 발코니로 이어지는 유리문 옆에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암굴왕은 J가 반쯤 비운 샴페인 잔을 도로 가져가더니 신사답게 문을 밀어 열었다.

때맞춰 불어온 산들바람이 J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불어 들었다. 더한 권유는 필요 없었다. 구두도, 치맛자락도 개의치 않고 깡충깡충 발코니를 가로지르는 J의 뒤로 암굴왕이 조용히 커튼을 치고는, 유리문은 반 뼘 틈만 남겨둔 채 닫았다.

발코니 난간에 이른 J는 반 바퀴 휙 돌아 난간에 기대며 암굴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기대에 부응했다.

한 손으로 늑대 귀를 잡더니 다소 과격하다시피 한 움직임으로 가면을 벗어 던지자, 말려 올라간 입꼬리와 반듯한 콧날, 웃음기 어린 진홍색 눈동자가 차례로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만 해도 단정하던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진 데다 이마에 몇 가닥 달라붙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그게 J의 심장을 덜컹 흔들어 놓았다. 우왕, 이 묘하게 색정적인 분위기…….

“너무 좋당.”

속마음이 그대로 흘러나가 버렸다. J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암굴왕은 늑대 가면을 떨어뜨리고는 남은 샴페인을 한입에 털어 넣더니—그가 입을 댄 자리가 조금 전 자신의 입술이 닿았던 곳과 완벽하게 겹칠 거라는 데 J는 지금 입은 드레스라도 걸 수 있었다—성큼성큼 다가와 빈 잔을 난간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면을 벗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양손을 J의 머리 뒤로 가져갔다.

늘어진 끈을 당기자 매듭이 톡 풀렸다. 문틈으로 왈츠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암굴왕은 J의 뺨을 감싸는 듯한 동작으로 가면 좌우를 잡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면을 벗겨 냈다.

암굴왕의 눈동자에서 J는 자신의 반영을 보았다. 동그랗게 뜨인 눈과 발갛게 달아오른 두 볼, 살짝 벌어진 입술과 그 전부에 깃들어 있는 애정을.

나, 이렇게 빤히 읽히는 사람이었던가?

Mon petit lapin.

다가온 숨결에서는 샴페인 향이 묻어났고, J는 기꺼이 암굴왕을 끌어안으며 입맞춤에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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