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염열차원 수르야크셰트라

20240120 아르주나른 교류전 원고 웹공개

2024.01.20 에 열렸던 아르주나른 교류전 '목표! 히말라야 등반 가사 체험 동호회'에 지참했던 썰북입니다.

종이책이나 내지 형식을 보존했던 포타 게시와는 달리 펜슬 업로드를 위해 일부 문단을 수정했으니 참고해주세요!


! 주의!

본 회지는 2022년 여름 이전에 작성했던 썰을 기반하여 문체와 내용을 수정 및 추가한 것으로, 당시 알려지지 않았던 설정 및 서번트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위의 사유로 인해 몇몇 설정이 원작과는 다를 수 있으니 주의해 주시길 바라며

제가 헷갈려서 / 혹은 편의를 위해 적당히 고친 설정들도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또한 마스터의 경우, 특정 인물들을 상정하지 않고 진행했습니다.


 

 

 

 

 

 

 

그곳은 해가 보이지 않는 세계였다.

 

보더의 화면 너머, 온통 어두운 하늘 아래.

마치 자신이 태양인 것 마냥 반짝이는 조명들을 바라보며, 인류 최후의 마스터는 입을 벌림.

 

지금까지 거쳐왔던 그 어떤 이문대와도 다른 모습. 같은 지구를 베이스로 한 것을 증명하듯 주변 환경만큼은 그나마 전에 기억하던 지구와 비슷한 모습이었던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 섀도 보더가 발을 들인 곳은 마치 그림자가 하늘을 덮은 것처럼 새카만 하늘 아래로 SF 영화처럼 특이하게 생긴 건물들이 빛을 내고 있었음.

 도시의 길을 거니는 사람들은 이전에 보았던 수인이나 요정처럼 다른 종족의 특징을 지니지 않은 인간에 가까웠지만, 전체적으로 피부가 창백한 것이 달랐음. 자연적인 빛이 보이지 않는 환경 탓인지,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거리에는 어떤 동물이나 식물들도 보이지 않았는데, 마침 처음 보는 환경에 흥분한 듯한 다빈치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옴.

 

이것 봐, 분명히 지금 보이는 식물은 하나도 없는데, 저쪽 도시가 끝나는 경계 너머를 보면 수없이 많은 씨앗 같은 것들이 땅에 한가득 묻혀 있어! 일부러 뿌려 둔 걸까나?

 

그 말대로 도시의 바깥쪽 역시 어떤 생명체도 보이지 않았지만, 친절히 씨앗의 모습을 스캔해 띄워준 화면을 보며 마스터는 신기한 듯 와아, 하며 감탄사를 보냈음.

 

이후 그들은 며칠 정도 대기하며 이곳의 환경을 조사하고 저 멀리 보이는 도시의 동향을 살피기로 함.

그러나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검기만 한 하늘은 밝아오지 않았고, 그제야 칼데아는 이 근처에 씨앗들이 피어나지 않은 채 그저 땅속에 묻혀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음.

 

여긴 해가 뜨지 않는 곳이구나.

그 결론이 나오기까지, 이 세계의 환경과 도시를 관찰하며 해가 보이지 않을 뿐이고 (적어도 이 근방에는) 다른 위험한 마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멀리서 지켜본 도시의 모습 역시 소위 ‘평범한’ 도시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어 그들은 추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도시 내부로 직접 조사하러 들어가기로 함.

도시에 들어가기 전, 부족한 전력을 채우기 위한 서번트 소환을 위해 영맥을 탐색하는데, 그들의 생각보다 영맥이 도시에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일행은 그곳에서 서번트를 소환한 뒤 도시에 진입하기로 결정을 내림.

 그러나 영맥 근처로 가니 그 영맥이 존재하는 곳에만 씨앗이 없고 그대로 어떤 길처럼 비어있는 곳이 쭉 이어져 있었으며, 그에 일행들은 뭔가 지나갔던 곳인가? 그렇다기엔 사람들이 만들어 둔 도로는 저쪽인 것 같은데? 하고 의아해했는데, 우선은 소환을 해야 했으므로 마슈와 마스터가 함께 영맥 근처로 향했음.

 

근데 그 근처로 이동하자마자 뭔가 사이렌처럼 알람이 울리고 작은 드론과 비슷한 비행체가 오더니, 이내 스피커가 탑재된 것인지 모르는 이의 목소리로 당신들 지금 뭘 하는 거냐는 목소리가 들림.

 어? 하고 고개를 갸웃하니까 아직 어린 것 같으니 넘어는 가겠는데, 아무리 태양의 길에 호기심이 생겨도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는 말 진짜니까 돌아오라고, 더 이상 가면 체포하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돌아가게 됨.

그래서 통신으로 다빈치에게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하고 물어보는데 그 ‘태양의 길’이라고 하는 게 영맥과 겹치는 것이 마음에 걸리니 일단 먼저 도시 안에 들어가 정보를 모아오는 게 좋겠다는 말이 나옴.

 그쪽이 영맥이라 마력이 가장 강하긴 하지만 이 이문대의 특징인지 전체적으로 마력이 풍족하고 이 땅에는 신비가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되니 이쪽은 보더 내의 인원들끼리 조금 더 조사해 보고, 도시 내부에서 특별히 전투가 필요할 것으로도 보이지 않은 만큼 일단 저것을 따라 먼저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그렇게 일단 이 세계에 대한 자료를 더 모아본 다음에 소환하는 것이 괜찮겠다는 결론이 나 도시로 먼저 향하게 됨.

 

도시는 투명한 돔 같은 걸로 덮여 있었는데, 비행체의 안내에 따라 입구로 추정되는 곳을 통해 들어가 본 도시 안쪽은 생각보다 평범한 느낌이었음. 마치 인리가 소각되기 전의 평범한 도시들처럼, 안에 이런저런 상점가들도 있고 사람들이 사는 걸로 추정되는 거주지역도 있고 하는 느낌.

그렇게 도시 안으로 마스터와 마슈가 들어오고 나니 입구가 닫혔고, 이곳까지 안내해 준 비행체 너머의 사람이 말하길 너희는 저 길에 가까이 간 것이 처음인 것 같으니 한 번은 봐준다고 이야기함.

 

그렇게 도시 안에 발을 들이게 되고, 그대로 도시 구경을 하게 되는 두 사람.

도시 안쪽은 빛이 없는 걸 대신하듯 사방에 빛을 내는 장식물들이 있어 대낮처럼 밝았는데, 중앙에 있는 광장 같은 곳에는 보통 놓아두는 시계 대신 일부분만이 밝혀져 있는 거대한 구가 놓여있었음.

특이한 모습에 어떤 상징물인가 싶어 가까이 가 설명을 읽어보니 구의 제목은 ‘태양의 위치’였고, 그 아래에는 날짜 표시와 함께 디데이 표기가 존재했음. 둘의 옆에서 그걸 보고 가려던 사람에게 이 디데이는 뭐냐고 물어보니 오히려 이상한 표정으로 태양이 이곳을 비추기까지 걸리는 시간이잖니. 하며 특이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봄.

혹시 다른 도시에서 온 거니? 하는 물음과 함께.

 

그 말에 긍정하니, 그 어른은 천천히 설명해 주기 시작함.

 

이건 우리 도시에서 nnn년 전에 만든 건축물이란다. 태양께서는 워낙 긴 시간을 오지 않으시지만 그래도 일정한 걸음으로 움직이니 그걸 예측해 이곳에 언제쯤 도달할지에 대한 것을 계산하는 용도지. 지금까지는 오차가 없었지만, 말로만 듣던 아주 오랜 옛이야기에선 축복의 별 아래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한번씩 태양이 그 아이를 찾아 움직이기도 한다고 해. 그럴 때면 태양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인다고들 하지. 뭐, 어디까지나 옛날이야기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보고 싶기는 하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태양이라니,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지 않니?

다빈치짱, 이거 아무래도...

 

응, 태양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태양이 아니라 태양이라고 부르는 어떤 존재인 것 같지. 그 존재가 높은 확률로 우리가 찾아야 할, 이 이문대의 왕일 것 같고.

 

저 ‘축복의 별 아래에 태어난 아이’를 찾는다는 말도 조금 신경 쓰이네요.

 

저건 조금 더 조사가 필요하겠는걸.

 

그렇게 이야기하고 난 뒤,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어른이 이 건축물을 몇 년 전쯤에 조금 더 정교하고 크게 만들어서 전시 중인 박물관이 있다고 말함.

 

이 이문대의 정보를 한번에 수집하기 좋은 기회인 만큼 그곳으로 가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태양이 느리게 움직인다면 다른 생물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요? 하는 이야기가 나오게 됨.

 

이문대는 우리가 가진 상식과는 다른 것으로 돌아가니 정확한 원리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태양이 일정 기간마다 비추어지긴 하고, 말을 들어보니 한번 비추기 시작하면 꽤 오랜 시간 동안 머무는 것 같으니 식물 같은 것들은 그 시기에 맞춰 피어나거나 하지 않을까? 사막에서도 우기가 찾아왔을 때 잠깐 식물이 피어나기도 하잖니. 하는 답이 돌아옴.

 

아마 마력이 충만하게 남아있는 곳인 만큼 부족한 건 그런 마술적인 부분에서 보충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기회가 된다면 살펴보고 싶네~ 하고 덧붙이는 말에 마스터와 마슈는 그저 웃음.

 

그렇게 도착한 박물관은 굳게 닫혀있는 문 앞에, ‘방문객은 문을 열고 들어와 주십시오.’라고 적혀있었음.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안쪽은 지금까지 있던 자잘한 광원들이 사라져 전체적으로 어두운 모습이었는데, 발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밝아지기에 의아해하던 와중 옆에서 마슈가 저걸 보세요! 하며 천장을 가리킴.

 

그곳에는 커다란 조명이 하나 천장에 붙어있었음. 얼마나 강한 빛인지 그 아래쪽은 빛으로 인해 희게 보일 정도였는데, 곧 벽면에 새겨진 설명을 보니 이곳의 조명 장치는 도시의 일반적인 조명 형식과는 다르게 태양이 하늘에 떴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 위해 이런 형식으로 설치했다고 설명함.

 

그 뒤에는 이 세계의 전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태양은 무언가를 찾고 있으며, 그것을 찾기 위해 끝없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였음.

 

아주 먼 옛날, 태양과 이야기를 나눈 한 학자는 태양이 찾는 것이 어떠한 사람이며, 언젠가 되돌아올 그 사람을 찾기 위해 그는 세계를 걷고 있다고 답했다고 기록해 두었다는 텍스트와 함께 말로 전해지는 ‘축복의 별 아래에 태어난 아이는 그늘 속으로 숨겨야 한다’라는 이야기는 어쩌면 이 태양이 찾는 사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면 몇몇 시기에 태양이 평소 걸음을 옮기는 속도와는 달리 빠르게 움직였던 사실이 나와 있으며, 그것이 모두 특정 기간에 몰려있는 만큼 이 기간에 태어난 아이를 ‘축복의 별’ 아래에 태어났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건 이 이문대에서 새롭게 등장한 전설인 걸까? 하는 마스터의 물음에 아마 그렇겠지, 이곳의 태양이 특이하게 움직이게 된 동기와 관련이 있는 것 같으니까. 하는 통신이 들려옴.

 

그래도 축복의 별과 태양이라니, 이곳의 위치까지 생각해 본다면 그분들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럴 확률이 높겠지. 지리적인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키워드가 워낙 겹치고 있기도 하고?

 

그런 대화를 하며 박물관을 이어 감상하는데, 대충 태양이 움직이는 속도는 과거의 몇 경우를 빼면 대체로 일정하며 보통 몇 년에 한 번 정도의 주기로 태양을 볼 수 있었으나 근 몇 년간은 1~2년에 한 번 정도로 주기가 줄었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었음.

이건 아마 이문대와 관련된 이야기겠지. 다른 이문대들도 갑자기 구역이 좁아졌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었고...

 

그렇게 되려나~ 그럼 생각보다 빠르게 태양과 만날 수도 있겠는걸.

 

그렇게 계속 구경하다 보니 천장에 있던 가장 강한 조명의 근처까지 오게 됨. 그 아래에는 한 사람의 조각이 놓여있었는데,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거대한 창을 들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음.

옷차림이 마치 고대의 사람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인 데다, 지금까지 다른 곳에서 마주쳤던 카르나와는 달리 날개뼈 근처까지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에 조금 의아했지만, 외형적인 특징에서 칼데아의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카르나와 거의 일치하기에 그가 이 이문대의 왕일 것이라 결정 내리게 됨.

 

예상대로네요.

 

그러게... 그렇다면 찾아다니고 있다는 사람은 역시.

 

네, 아르주나씨라고 추측됩니다.

 

그러고 보면 힌두교도 사람이 죽으면 윤회한다고 했던가? 카르나는 그걸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마 그렇겠지? 이곳은 아직도 신비가 남아있는 땅이니만큼 실제로 가능했을지도 모르고. 다만 아직까지 돌아다닌다고 알려진 걸 보면 정말로 돌아오진 않은 모양이지만.

 

그런데 말이에요 다빈치짱.

 

응, 왜?

 

보통 현지의 영맥에서 서번트 분들을 소환하면 그곳과 인연이 있는 분이 튀어나오잖아요?

 

그렇지?

 

그럼, 이 경우에는 아예 세계 자체가 아르주나씨를 찾고 있다는 것과 다름없다는 말인데.

...아르주나씨가 소환되어도 괜찮을까요?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고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꼭 그가 와줄 거라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렇게 조금 찜찜한 마음을 안고 둘은 박물관에서 나옴.

 

그럼, 이제 소환이 문제겠네요... 아까 저희가 갔을 때의 반응을 보면 그 영맥 근처는 아무래도 항상 감시하고 있다고 보는 게 좋겠죠?

 

아마 그렇지 않을까, 게다가 ‘태양의 길’이라는 거면 그 카르나가 지나다니는 길이라는 말 아니야? 일부러 영맥을 따라 걷고 있는 거였을까?

 

라며 대화하고 있는 마스터와 마슈의 사이에 통신이 끼어듦.

뭐, 일단은 태양이라고 하니까. 그보다 카르나가 태양이라고 불리는 거라면 그 자체에서 빛이 나는 걸까? 그렇다면 세계 전체가 주기적으로 사막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태양이 ‘걸음을 옮긴다’라고 표현하는데 정작 박물관에서 전시해 두었던 빛은 평범한 태양처럼 하늘에 있었던 것도 그렇고 말이지.

 

동상이 아니라 사진 같은 게 있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마스터, 다빈치짱. 그 동상과 태양의 위치 자체가 그걸 보여주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식으로 두런두런 태양과 카르나에 대해서 대화하다, 화제는 다시 영맥과 소환에 대한 걸로 돌아옴.

일단 몸을 숨기고 영맥 근처로 가는 방법은 어떨지, 아까는 시야 확보를 위해 불빛을 밝힌 채 갔으니, 이번에는 그걸 없애면 그쪽에서도 눈치채지 못하지 않을까? 아니다, 열로 감지하는 걸지도 모른다. 등등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옴.

 

조금 리스크가 있긴 하지만 마술과 관련된 무언가가 느껴지지도 않고, 아까 도시에 들어갔을 때 살펴본 것들을 생각하면 이곳의 사람들이 마술을 쓰지 않는 것으로 보이니, 두 사람은 마술로 몸을 숨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오고, 이내 둘은 보더로 돌아가 은신을 위한 도구를 받아 영맥 쪽으로 향함.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감지 범위인지 알지 못하는 만큼, 둘은 좀 떨어진 범위에서부터 은신을 사용하기로 함. 은신의 기능만이 있는 거고, 따로 공격이 오지는 않을 것으로 추정되었기에(공격이 온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마슈가 막아낼 수도 있고) 그 외 기능은 제외해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도구라 가능한 결정이었음.

 

그렇게 좀 떨어진 곳에서부터 천천히 몸을 숨긴 채 걸어가는데, 영맥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더라도 아까처럼 경고하는 기색이 없자 마스터와 마슈는 안심하고 걸어감.

그리고 서번트를 소환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장 먼저 소환된 건 아르주나였음.

 

서번트, 아처. 아르주나라고 합니다. 어딘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땅이군요.

 

그렇게 말하던 아르주나는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기울이고, 이내 약간 인상을 구김. 혹시 카르나가 이곳에 있습니까?

마스터는 맞다고 대답함. 혹시 괜찮다면 다음 서번트까지 소환한 뒤에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어도 되는지 물어보자, 아르주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물러났음.

그 뒤에 소환된 건 아슈바타만이었음. 동향의 서번트이자 인연이 있는 자가 소환되니 아르주나는 놀란 표정이었고, 소환되어 온 아슈바타만 역시 소환 대사를 내뱉다 말고 뒤에 있는 아르주나를 보며 아? 아르주나잖아! 하며 마주 놀람.

아슈바타만은 조금 미묘한 표정으로 아르주나를 바라보다, 이내 아르주나가 한 손을 내밀자 떨떠름하게 내밀었음.

 

인리를 위해 소환되었다는 건 인식하고 있겠지요. 저희는 생전의 은원으로 묶여있긴 하지만, 이번 현계에서는 잠시 묻어두고 행동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조금 조심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아슈바타만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아르주나가 내민 손을 마주 잡음.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이런 상황에서 너랑 싸울 생각은 없어. 힘을 합치는 건 정말 오랜만이구만. 그래서, 네가 그 마스터냐? 제법 비실비실하잖아!

 

아주 짧은 순간 손은 맞잡았다 떨어졌고, 그는 외면하듯 마스터와 마슈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림. 그걸 바라보는 아르주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느새 단정한 표정이었음. 그리고 이어 마스터, 아까 끊겼던 상황 설명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라며 말함. 그에 마스터와 마슈, 다빈치의 통신까지 합세해 지금까지 얻었던 정보와 상황을 이야기 해줌.

 

이곳은 인도에 생겨난 이문대이며, 이 이문대의 왕은 알려진 정보와 칼데아의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것을 대조해 보았을 때 여러분과 같은 인도 출신의 영웅인 카르나로 추정된다는 점. 다만 중간에 어떠한 계기가 있어 그가 이문대왕이 된 것인지는 아직 알지 못하고, 그는 아르주나 당신을 찾아 세계를 떠돌고 있는 것 같다.

태양이 그와 함께 움직이기에 이 이문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잊혀진 채, 태양이라고 불리거나 신 같은 것으로 불리고 있다.

 

일련의 내용을 들은 두 사람은 놀란 기색으로 되물음. 그 녀석이? 신이라고? 그런 걸 위해 딱히 뭔갈 할 녀석은 아닌데?

저도 동의합니다. 그보다 절 찾아 떠돌고 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마스터는 그 물음에 어깨를 으쓱함. 아직 이쪽에서 얻은 정보가 워낙 적다 보니 억측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일단 그런 식으로 불리고 있으며, 이 땅에 남은 마력과 신비를 보았을 때 진짜 신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거라 추측된다.

그리고 이어 박물관에서 보았던 이야기를 알려줌. 누군가를 찾고 있다고 말한 카르나로 추정되는 태양의 발언. 그리고 축복의 별 아래에 아이가 태어나면 보이던 그의 특이한 행적 등.

 거기까지 뒷받침되자, 두 서번트는 말을 잃었음. 정확히는 하나는 말을 잃었고, 다른 하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함.

 

다빈치는 이 도시는 아직 태양이 오지 않은 곳이라 계속 어두워서 몰랐겠지만, 일단 늦은 시각이니 좀 휴식을 취한 다음 움직이는 것은 어떻겠냐고 이야기함. 그리고 그가 아르주나 당신을 찾아 움직이는 이상 서번트로 이곳에 현계한 당신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며, 우선 보더로 한번 돌아와 태세를 정비하고 싶단 말을 덧붙임.

 

그렇게 다 함께 보더로 돌아온 뒤, 마스터와 마슈가 휴식을 취하러 떠나고 다빈치와 네모가 상황을 살피던 중이었음.

 

소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르주나와 아슈바타만은 경계를 돕기 위해 상황실에 함께 있던 와중이었는데, 가만히 눈을 감고 필요한 질문들에 대답해주던 아르주나가 몸을 크게 움찔함.

 뭐야? 갑자기 무슨 일인데? 하고 그 옆의 아슈바타만이 묻자, 아르주나는 어느 새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조금 묘한 표정으로 카르나가 이쪽을 제대로 눈치챈 것 같다고 말함.

생전이든, 서번트로 마주했을 때든 이런 건 불가능했던 것 같습니다만.... 어딘가 확실하게 ‘인식’ 당했다는 느낌입니다.

그리고는, 이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감. 뭐라고 해야 할까. 유쾌하진 않은 표현입니다만, 표적이 된 듯한 느낌이군요.

 

그 말에 네모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냐고 묻자, 아르주나는 자신도 굳이 표현하자면 그런 식의 느낌이 느껴질 뿐이고, 정확한 원리는 잘 모르겠다고 답함. 직관에 가까운 거라 확실하게 설명하기가 힘들다고.

 다빈치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 이문대 전체에 선명하게 남겨진 마력 때문인 걸까? 아니면 우리가 있는 곳이 소위 말하던 ‘태양의 길’ 근처라 그런 걸까. 하며 종알종알 이야기했음. 아슈바타만은 그럼 카르나가 이쪽의 자세한 상황까지 눈치챘을 수도 있는지 아르주나에게 물어봄.

 

아르주나는 글쎄요. 아마 저 자체를 인식했다는 느낌이지, 보거나 듣고 있다는 느낌은 아닙니다. 살의가 느껴지기는 합니다만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 하며 덤덤한 말투로 살벌하게 문장을 끝맺었고, 그에 아슈바타만은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문지름.

 네모와 다빈치는 그 말을 듣더니 이내 이런저런 수치에 관해 이야기했고, 곧 다빈치가 마슈와 마스터를 데려오는 게 좋겠다며 각자의 방으로 통신을 넣음.

 

그리고 잠깐의 시간 뒤, 두 사람이 문을 열고 상황실로 돌아옴.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라는 말로 시작한 현 상황에 대한 브리핑은 아무래도 좋은 소식은 아니라, 마슈와 마스터는 조금 굳은 표정으로 선 채였음. 그러던 중, 어느 정도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마슈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물어봄.

 

저, 혹시... 위치를 이동해 보면 어떨까요? 이 태양의 길에서 조금 멀어진 곳으로 가면 인식이 조금 덜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 말에 무어라 답이 돌아오기도 전, 아슈바타만이 손을 내저음. 아니, 아마도 그 녀석이라면 이 녀석을 인식한 순간부터 우리가 얼마나 이동하던 딱히 상관없을걸.

그리고 그 말에 이어 아르주나도 고개를 저음.

 

정확히 정의하기는 힘듭니다만... 제가 표적이라고 표현했었지요. 저라면 한번 지정한 표적은 그것이 갑작스레 사라지더라도 그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은 노릴 수 있습니다. 그건 카르나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겠죠.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아슈바타만?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는 얼굴에 아슈바타만은 급격히 찜찜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임.

 

뭐... 그렇겠지.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내가 예상하기엔 둘이 만나자마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보거든.

 

마스터는 잠시 고민하더니 다빈치를 향해 질문함. 혹시 허수잠항으로 숨는 건 어떻게 안 될까? 몇 번 그런 식으로 몸을 숨기기도 했었으니까. 적어도 어느 정도 정보가 모이고 대항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시간을 벌고 싶어.

 

다빈치는 테이블을 톡톡 치더니, 이내 밝은 목소리로 음, 가능할지도! 아무리 그래도 허수 공간까지 찾으러 올 수는 없을 테니까. 하며 긍정함. 다만 어쨌든 허수잠항은 위험이 따르는 만큼, 최대한의 준비를 갖추고 진행하고 싶다며 아르주나를 보고 당신 쪽에서만 인식할 수 있는 거냐고 물어보자, 아르주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어느 정도 거리가 더 가까워진다면 제 쪽에서도 알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고 답함.

 

일단, 태양이 그 남자를 따라간다고 했었으니 그걸 지표 삼아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럼 태양의 위치부터 살펴봐야겠네~ 도시에서 봤던 장치와 비슷한 느낌으로 구현하되, 실시간으로 반영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 둘 테니 괜찮다면 네 사람은 도시에서 물자를 조달해줄래? 라며 권하자, 넷은 동의하고 도시로 향함.

 

아, 그 전에 그 차림들로 가면 저 도시에선 어색할 테니까. 라며 다빈치가 마슈에게 옷 꾸러미를 주었고, 그걸 보며 아슈바타만과 아르주나도 옷을 조정함. 옷은 마스터가 입고 있던 마술 예장과 비슷한 분위기의 제복이었음. 도시 자체가 SF같은 분위기다 보니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흰색을 기조로 한 깔끔한 디자인의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덕분에 마스터는 위화감 없이 녹아들 수 있었지만 마슈는 도시를 지나다니는 동안 조금 눈에 띄는 편이었기 때문.

 

영기를 조정하며 아르주나는 원래 자신이 입고 있던 옷과 비슷한 분위기지만 좀 더 간단한 느낌의 현대식 제복에 신기해했으며, 아슈바타만은 뭔가 어색한 듯 검은색의 제복을 만지작거렸음.

 

그렇게 옷차림을 바꾼 뒤, 네 사람은 도시로 들어섬.

 꽤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어두운 하늘. 그리고 변한 것 없이 은은한 빛으로 밝혀진 도시는 과거의 영웅들에게는 제법 생소한 모습이었음. 성배로 지식이 전해지는 만큼 어느 정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있었으나, 이것들이 놓여있는 대지 위가 자신들이 달리던 땅 위와 같은 땅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그럼, 이제 어떤 것부터 준비하는 게 좋을까요? 아르주나가 물었고, 통신 너머에서는 언제나처럼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옴. 우선 식량부터겠지. 물론 보더 내에도 어느 정도 지낼 수 있는 물자들이 있지만, 허수 공간에서 얼마나 있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는 이상, 최대한 물자들을 넉넉하게 확보해 두고자 해.

 

그러고 보니 이 이문대의 환경상, 수렵 활동을 통해 식량을 얻는 건 힘들 것 같은데, 이곳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음식을 얻는 걸까요? 마슈가 궁금한 듯 질문하자, 마스터도 고개를 기울임.

그러게, 어제 돌아다니면서 어떤 식물이나 동물도 못 봤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빈치짱 말로는 땅에 씨앗들은 있었다고 했었지?

 

네, 아마 태양이 오면 피는 형식이지 않을까 하고 추측했었습니다! 그럼 그렇게 피어난 식물들을 최대한 보존해서 사용하는 형식일까요?

 

그렇게 이야기하던 둘의 사이로, 어딘가 유쾌한 듯한 목소리가 날아들었음. 뭐, 일단 어떻게든 동물은 키워낸 모양인걸.

 

상점가로 추정되는 거리에는 제법 많은 수의 사람이 지나다니는 중이었는데, 그 중 몇몇 사람들은 원통형으로 생긴 통 안에 고기와 비슷한 것을 담은 채였음.

 

따로 동물을 기르는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혹은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걸까요? 이렇게까지 발전한 곳이라면 어느 쪽이라도 딱히 이상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상점가에 있는 사람들을 잠시 지켜보던 아르주나가, 무언가 이상한지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음.

 

그보다, 다들 어딘가 묘한 기색이지 않습니까? 초조한 것 같기도 하고, 대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곳의 자세한 문화는 모르니 뭐라 첨언하긴 어렵습니다만, 수많은 사람이 일제히 꽤 많은 수의 식자재를 구매해 가는 듯한 느낌이라.

 

아르주나씨도 그렇게 느끼셨나요? 물론 이 이문대의 사람들이 평범하게 한번에 섭취하는 양이 많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딘가 표정들도 그렇고 분위기가 이상해서요..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

 

한번 물어보자. 저기, 실례합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도 꽤나 많은 양의 물건을 든 채 지나가는 중이었는데, 마스터와 눈이 마주치자, 엇. 하더니 반갑게 인사를 건넴.

 

어제 봤던 친구들이잖아! 아직 소식을 못 들은 거니? 어제 새벽쯤 건물 안으로 대피하라는 권고가 떨어졌잖아. 태양이 특이한 움직임을 보였던 건 지금까지 고대의 기록으로만 나와 있었는데, 내 생전에 그걸 보게 될 줄이야!

 

태양이 특이한 움직임을 보였다구요?

 

그렇다더라고! 이쪽을 향해 꽤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던데? 지나쳐 가는 길인지 이 도시랑은 조금 떨어져 있는 위치를 지나가는 걸로 추정되기는 하는데, 그래도 태양 빛이 내리쬔다는 건 되도록 실내에 머물고 이동하는 길도 실내 통로 쪽을 이용하는 쪽이 권고되니까.

원래라면 태양이 바로 가까워지는 게 이틀쯤 되니 그 정도 쉬겠지만, 이번처럼 이상 현상이 나타나면 며칠 정도 머물기도 한다더라고.

내부 통로 쪽에서 판매하는 보존식은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다들 이렇게 나온 거지.

 

주민의 그 말에, 네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음.

 

큰일났다. 큰일났네요. 그러게, 큰일이네. 큰일이군요.

 

마슈가 감사 인사를 한 뒤, 네 사람은 다빈치를 부름.

다빈치짱! 지금 혹시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어?

 

지금? 뼈대는 거의 완성됐는데 적용까지는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그쪽 소식은 이미 들었고. 혹시 어느 정도 왔는지에 대해서는 알 방법이 없을까? 저번에 봤던 그 구조물이라던가.

 

구조물이 있습니까? 아까 다빈치씨가 말했던 그 기반이 되는 물건인가 보군요.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네, 어제 구 모양의 물체 위로 태양의 위치가 표기되는 구조물이 광장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저희가 봤을 때는 이곳까지 도달하기까지의 날짜가 몇백일 정도 남아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렇다면 그쪽으로 가보자고, 정확한 일시는 몰라도 어디까지 왔는지 정도는 볼 수 있겠네.

 

그렇게 네 사람은 이전에 봤던 구조물이 있는 곳으로 향함.

구조물은 위에 떠있는 빛이 거의 멈춰있는 듯하던 이전과는 다르게 눈에 띄는 속도로 빛이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었는데, 현재 그들이 위치한 도시라고 표기된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온 것이 보였음.

 

카르나가 생각보다 더 빠르게 오고 있음을 깨달은 일행은 조금 더 서두르기로 하고, 아까 주민이 말해줬던 안쪽의 상점가를 향해 이동함. 다른 사람들처럼 밖에 있는 식재료를 사는 건 얼마나 오래 허수 공간에 머무를지 모를 입장에선 부담스러웠으니.

그렇게 도시 안쪽으로 들어가니, 재료의 원형을 드러낸 채로 팔고 있는 바깥쪽과는 다르게, 물건 대부분이 밀폐된 통 안에 담긴 채로 놓여있는 게 보였음. 그 내부에 있는 것도 원형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게끔 갈려있거나 반죽 같은 덩어리가 된 느낌이었는데, 그걸 보고 난 뒤에야 일행들은 내부 통로에서 판매하는 보존식을 주민들이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깨달음.

 그럼에도, 바깥보다는 덜하나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 보존식을 사가고 있었는데, 많이 사두어도 부담이 없는 덕인지 개수로만 따지면 바깥에 있는 사람들보다 많은 양을 사가는 게 눈에 띔.

 

어딘가 신기한 눈으로 보존식이 담긴 통을 바라보던 마슈는 저희도 이걸 사 가면 되는 거냐며 통신 너머를 향해 물었고, 네모는 긍정함. 다빈치는 우리랑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평범하게 먹는 음식인 것 같으니 딱히 문제없겠다며, 기회가 된다면 연구해보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음.

지금은 급한 상황이라니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이런 음식을 먹는 것도 제법 고역이겠는걸.

 

말 그대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야 하니 어쩔 수 없지요. 일이 해결되면 그때 제대로 된 요리를 드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넷은 그렇게 다양한 보존식을 구매함. 보더에 꽤 많은 사람이 있는 만큼 구매하는 양도 어쩔 수 없이 많아져 모두가 한 아름씩 짐을 든 채로 돌아가게 됨.

 

혹시 무겁진 않으십니까? 두 분 다 이쪽으로 넘겨주셔도 괜찮습니다.

 

아니, 이미 아르주나가 들고 있는 양도 충분히 많은걸.

 

서번트니까요,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아, 이 정도는 버틸만하기도 하고.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보더에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쯤, 통신이 들려옴,

 

미안한데 마스터, 조금 더 속도를 낼 수 있겠어?

 

이어진 내용은 현재 장치의 구현은 성공적으로 완료했으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아 어쩌면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는 것이었음. 네 사람은 서둘러 보더로 들어와 구현이 완료되었다는 장치를 살피게 되었는데, 아까 도시에서 봤던 구조물과 비슷한 형태의 홀로그램이 허공에 반짝이며 떠 있었음.

 한 가지 다른 점은 도시가 아니라 보더의 위치가 나타나 있다는 점. 태양은 통신으로 들었던 것처럼 아까 보았던 것보다 더욱 빨라진 속도로 보더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있으니 여기서 더 빨라진다는 전제 하에, 이르면 이틀에서 사흘 뒤에는 보더에 도달하게 될 것 같다고 다빈치는 이야기함.

 

그런 이유로. 되도록 내일 중에는 잠항에 들어가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급하게 진행하는 것도 아니니 안정성은 괜찮을 것 같고... 문제는 그가 다시 다른 곳으로 향할 것이냐는 부분인데...

 

그분이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수도 있나요?

 

그럴 가능성도 버릴 순 없지. 허수 공간에 진입하면 아르주나의 흔적이야 지워질 테니 다시 가던 길을 갈 거라 생각하며 계획을 짜고 있긴 하지만... 변수라는 건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될 경우, 어떻게 할지를 미리 이야기 해두고 싶어.

일단... 계속 허수 공간에 머무를 수는 없겠지? 그가 떠날 때까지.

 

되도록 그런 방향으로 버티며 시간을 버는 게 이번 잠항의 목적이지만, 결국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거야.

가능하다면 대화를 먼저 나눠보고 싶긴 한데... 가능하려나...

 

그의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습니다만, 최악의 경우, 바로 전투가 벌어질 수 있다는 부분도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차라리 이 녀석을 멀리 보내서 시간을 벌어보는 건?

 

그건 반대야.

 

음, 그건 나도 반대할게. 아르주나씨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에게 어떤 능력적인 변수가 있을지도 모르고, 이 상황에서 갈라지는 건 무엇보다 비효율적이니까! 아직 충분한 정보를 모으지 못한 이상, 최대한 전력은 보존해 두는 쪽으로 가고 싶어.

 

일행이 모두 고민에 빠져있던 와중, 마슈가 손을 들어 올림.

 

저, 아르주나씨와 카르나씨가 만나는 부분이 문제라면, 저나 아슈바타만씨가 먼저 나가보는 건 어떨까요?

 

나?

 

네, 일단 상황을 보고 난 뒤의 이야기입니다만... 애초에 카르나씨의 상태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저희가 간다고 해도 대화가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그거야 그렇긴 하지.

 

아슈바타만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어디까지나 대화가 통한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지만.

 

이후 이야기의 내용이나 혹시라도 대화가 불가능할 경우에 대한 대처(최대한 후퇴하는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에 대한 회의까지 마친 뒤, 일행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감.

그렇게 정신없이 움직이는 하루가 지나고, 마침내 카르나가 근처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보더 내의 방송으로 들려올 때. 섀도 보더는 허수잠항에 들어가게 됨.

 

허수공간에 진입할 때 일어나는 잠깐의 혼란 이후, 이상이 없다는 네모의 안내와 함께 긴장되었던 공기는 어느 정도 풀어짐.

 이후 바깥의 상태를 살피자, 이쪽으로 오던 카르나의 반응이 잠시 멈춰 선 것으로 보인다고 하기에 사람들은 계획이 성공한 것 같다며 안심했는데, 다행이라며 돌아본 마스터의 눈에 비친 아슈바타만과 아르주나의 얼굴은 아직 긴장을 풀지 않은 듯한 모습이라 마스터는 의아해하며 혹시 불안한 거냐고 물음.

 

그러자 아르주나는 저희가 허수공간으로 이동하는 그 순간까지도 인식 당했다는 느낌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하며 이야기를 시작함. 그 옆의 아슈바타만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 녀석의 성정을 생각하면... 잠시 멈칫했을 뿐이고 아마 이곳으로 오긴 할 거라고 봐. 라며 말을 받았는데, 그에 조금 풀어지려던 보더 내의 공기가 다시 가라앉자, 뭐. 그래도 이젠 그 녀석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잖냐. 어느 정도 버티고 나면 다시 돌아갈 수도 있겠지. 라며 손을 내저었음.

 

그렇게 보더 내의 사람들은 우선 카르나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둘 때까지 허수공간에 머물기로 함.

 

다빈치가 도시의 구조물을 모티브로 만들어 낸 위치 감지 장치는 다행히 잘 작동해 사람들은 상황실에서 계속 모니터링을 하게 되었는데, 잠시 멈춘 듯 보이던 카르나는 아슈바타만의 예측대로 보더가 허수잠항을 진행하기 전까지 있던 곳으로 나타난 뒤, 그곳에서 계속 머무르고 있었음.

 

그렇게 위치를 지켜보며 보더 내에서 지내기를 며칠.

보더 내의 사람들은 카르나가 보더가 있던 위치에 도착한 뒤로 그 주변에 미리 설치해 둔 장치를 이용해 그의 모습 또한 관측 중이었는데, 덕분에 큰 화면으로 현재 상황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음.

 

화면 속의 카르나는 머리 위에 뜬 태양 아래서 가만히 선 채였는데, 며칠 동안이나 같은 자세로 미동 없이 서 있는 부분이 사람이라기보다는 동상과도 같은 인상을 주었음.

무엇보다 해가 없는 동안에는 그저 차가운 대지 아래 묻혀 있기만 하던 씨앗들이 해가 다가오니 싹을 틔우고 일제히 피어난 것도 있어 그 주변의 모습이 환상처럼 아름다웠기에, 그 사이의 생동감 없는 카르나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어떤 위화감을 주기에 충분했음.

 

카르나가 처음으로 도달했을 때, 일제히 피어나는 꽃과 식물들에 감탄을 내뱉던 사람들은 이내 며칠간 똑같은 모습이 비치는 화면에 흥미를 잃었음.

그 대신 화면에 비치는 현상과 그의 상태에 대한 데이터를 모으는 쪽에 더 집중했는데, 식물들이 빠르게 피어났던 것 만큼 빠르게 시들어 말라가기 시작하는 걸 보며 역시 씨앗들은 태양에 반응해서 피어나는 것이 맞는 걸로 보이며, 태양 또한 카르나가 현재 머무르고 있는 위치에 정지한 채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전함.

 이게 어떻게 기능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며 직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는데, 그가 오고 난 뒤 더 선명하게 반응을 보이는 마력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지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었음.

 

그렇게 여러 날. 보더 내의 물자들은 순조롭게 줄어들었고, 몇십일 정도의 여유분이 있기야 했지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이문대 절제를 위한 여정을 위해 준비했던 것. 카르나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고, 보더 내의 사람들은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모든 여유물자가 떨어질 때까지 허수공간에 머무르기만 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불안을 이야기하기 시작함.

그렇게 다시 모이게 된 상황실.

다들 상황은 인지하고 있지? 다빈치가 꺼낸 서두에 일행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임.

 

이렇게 버티기만 하다가는 우리의 소모만 야기시킬 뿐이야. 그가 저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 이상, 혹시 몰라 생각해 두었던 두 번째 계획으로 가자.

담담한 선장의 말투에 마스터와 마슈는 고개를 끄덕임. 아슈바타만은 조금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알겠다며 수긍했고, 아르주나쪽은 어쩐지 미안한 듯한 기색이었음.

그래도 기척이 아예 사라지면 그도 원래 이 이문대에서 지내던 일상 쪽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약간 기대했었습니다만...

 

이 이문대의 카르나씨는 어떤 사람일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아르주나씨가 알던 그분과는 아예 다를 가능성도 있으니 차라리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준비해 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조금 더 휴식을 가진 뒤, 그들은 허수공간에서 원래 있던 곳으로 우선 되돌아가기로 함.

 가장 먼저 보더의 외부 통신 기능으로 조심스레 접촉, 이후 대화가 가능하다면 마스터와 마슈, 아슈바타만이 함께 그와 대화를 시도한다. 만약 큰 이상이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면 아르주나가 추가로 투입.

그들은 마지막 휴식을 취한 뒤, 각자 나름의 각오를 다지며 다시 이문대로 돌아감.

 

다시 나온 이문대는 허수공간에서 지켜봤던 것과도, 처음 들어왔을 때와도 다른 모습이었는데, 무서울 정도로 내리쬐는 햇빛이 원래는 해를 맞이해 아름답게 피어났다 짧은 시간에 사라졌을 식물들을 마치 억지로 말려 박제 시켜둔 듯한 모양새였음.

 

오히려 조금 더 일찍 나왔으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을까, 되도록 긴 시간이 지났을 때를 노리고 나온 순간의 모습은 어딘가 아름다우면서도 기괴한 느낌에 가까웠음.

그리고 그 한가운데의 카르나는 보더가 떠오르던 순간부터 계속 이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음.

 

화면으로만 볼 때는 그저 가만히 서 있는 동상과도 같았다면, 실제로 마주한 그는 오히려 어딘가 낡아 부서질 것 같은, 굉장히 오래된 무언가를 본 듯한 인상을 줌. 아무리 오래전의 인물이더라도 생동감을 가진 서번트들과는 또 달랐음. 그렇다고 땅속에 뿌리를 깊게 박은 채 서 있는 고목이라기엔 어딘가 부유감이 느껴짐.

신들과 비슷한 느낌이 느껴지기도 하면서, 어쩐지 그것과는 다르다는 위화감.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주변의 모습과 함께 어우러지며 보는 이들에게 강한 불쾌감을 낳음.

그 모습은 특히나 아르주나에겐 강하게 다가와, 아르주나는 어딘가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입을 틀어막음.

그 정도까지는 아니나, 아르주나와 비슷하게 생전의 인연이 있던 아슈바타만도 그러한 카르나의 모습에 불쾌함이 느껴지긴 마찬가지였는지, 거칠게 인상을 구기고는 저게 뭐냐며 혀를 찼음.

생김새도, 푸른 눈도, 희디 흰 머리카락도 분명 기억하던 것과 동일한데.

 

심지어 그가 입고 있는 옷마저 익숙한 복식이었음. 그때, 우리 모두 전장에서 날뛰던 그 시기에 입곤 하던 것들. 몇 개는 잃어버린 건지, 사라진 건지, 혹은 제 손으로 버렸는지 화려한 모습은 아니었으나, 분명히 눈에 익은 모습이었음.

 유일한 차이라면 그가 들고 있는 거대한 창이었는데, 박물관에서 보았던 마슈와 마스터에게는 그래도 한번 본 모습이었으나 다른 둘에게는 처음 보는 무기였음.

 

기하학적인 무늬가 한데 새겨진 거대한 창. 창의 손잡이부터 말단까지 검붉은색으로 이루어진 그것은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졌는데,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 마냥 바닥에 끌며 다가오자, 창이 끌린 바닥에는 긴 붉은 선이 생겨남. 마치 핏물이 이어져 고인 듯한 인상에 그들은 더더욱 인상을 구김.

카르나는 허수공간에서 완전히 나온 보더의 근처에서 가만히 보더를 바라봄. 어떤 행동을 취할지 고민하는 건지, 혹은 다른 걸 생각하는 건지.

그리고 그가 움직임을 보이기 전, 칼데아측은 미리 계획했던 대로 외부로 들리는 통신장치를 가동시킴.

 

아아, 혹시 들리고 있으려나?

 

푸른 화면과 함께 들리는 목소리에 카르나는 고개를 끄덕임. 그리고 이내 들리고 있다. 라며 답했는데, 그 반응에 일단 통신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것 같다며 다빈치는 일행들을 향해 손으로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음. 그리고 말을 이었는데, 이쪽은 칼데아라고 하는 조직이며, 그가 카르나가 맞는지에 대한 질문. 그리고 어째서 당신은 이곳에 있게 되었냐는, 기본적인 정보에 대한 것들이었음.

 

카르나는 그 몇 가지의 질문을 듣고는, 이내 창을 들어 통신 화면을 향해 가볍게 겨눔.

 

내가 그 말에 대답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기록 속의 당신이라면 이야기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

 

다빈치는 조금 골치가 아프다는 듯 끙, 하는 소리를 내었다가, 곧 아슈바타만을 보며 손짓함.

 

예정대로 당신이 이야기해보는 쪽이 좋겠어.

 

아슈바타만은 조금 인상을 구기다가, 이내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하고는 다빈치가 있던 곳에 섬.

 

어이, 오랜만이다, 카르나.

 

조금 껄끄러운 듯, 그러나 약간의 반가움이 섞인 인삿말이 들리자, 카르나는 옅게 미소 지었음.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군.

그래서, 이젠 좀 물어봐도 되겠냐? 일단은 이쪽을 좀 돕는 중인 입장이라 말이다.

 

과거의 동료라면. 대신 나도 묻고자 하는 것이 있다. 이것에 대해 명확하게 답해준다면 이쪽 역시 답을 주도록 하지.

 

좋아, 뭐, 질문이 어떤 걸진 모르겠지만, 최대한 대답해 줄 수 있도록 노력은 해 보마. 그럼 이쪽에서 먼저 질문해 볼까. 어쩌다 그 꼴이 된 거냐? 우리가 있던 시대는 이미 진작에 끝난 걸로 보이는데.

 

내 질문과 이어지는 답이 되겠군. 기다리고 있었다. 너도 충분히 예상했다시피. 그곳에 있지?

좀 더 길게 설명해 줄 생각은... 아?

 

무어라 말하려던 아슈바타만을 가볍게 당기고, 아르주나는 화면의 앞에 섬.

 

그래, 이곳에 있다.

 

아르주나는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무미건조하게 말했음.

 

그러니 이제 그만 좀 봐라. ‘이건’ 그저 불쾌하기만 할 뿐이니까. 설마 이 아르주나가, 너와 이렇게 마주한 이상 피해 도망칠 거라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화면 너머의 카르나는 순순히 고개를 저었음. 이어 무언가를 한 건지 내내 굳어있던 아르주나의 어깨가 조금 풀렸고, 곧 자세를 가다듬음.

 

네가 바라던 질문에 대한 답은 내 존재로서 충분히 증명된 것 같으니, 다른 질문을 하겠다. 왜 기다렸다는 거지? 불완전하며 불공평한 것이었을지 모르나, 우리의 전투는 한차례 막을 내렸다. 네놈은 그때 웃으며 눈을 감았지 않았나.

 

카르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임.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아르주나, ■■■의 아들이여.

 

목소리가 기묘하게 일그러져서 들리는 듯한 현상에, 아르주나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림.

 

이게 뭐지? 옆을 보니 아슈바타만이든 마스터든, 모든 사람이 인상을 찡그리거나 의아한 표정으로 귀를 문지르고 있었음. 단 한 단어. 그것이 일그러진 채 들리고 있었음.

 

아, 네게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인가. 그런가... 그렇군.

 

카르나는 그 반응에 어딘가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임. 아르주나는 문맥상 어딜 봐도 아버지인 인드라의 이름이기에 그게 무슨 말이냐며 카르나를 향해 물었지만,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충격적인 답을 돌려줌.

 

그것들을 내가 존재도, 이름도 남기지 못하도록 없애버렸으니, 말과 글, 그 어떤 것으로도 전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 말이 보더의 스피커를 통해 울림과 동시에, 보더 내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음. 모든 이들이 충격에 휩싸인 채,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음.

 

카르나는 그 안쪽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음.

 

그중에서도, 그는 가장 첫 번째였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그는 가장 먼저 처리했어야 했지. 신살의 창은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것을 쥐고 있는 자에게 남겨질 테니.

 

아르주나는 반사적으로 빈손에 간디바를 형체화 시켰으나, 바로 옆의 아슈바타만이 급하게 그의 손을 겹쳐 쥐며 막음. 다른 손으로는 부릅뜬 눈을 가려주었음.

 

진정해라, 지금은 보더 내야. 아무래도 저 녀석은 우리가 알고 있는 녀석이랑은 ‘확실하게 다르다.’ 무슨 심정인지는 대충 알겠지만, 지금은 저 도발에 넘어가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걸 명심해. 애초에 이곳으로 나오기 전에 우리는 그림자라는 걸 기억하기로 했잖냐.

 

그 말에 아르주나는 심호흡하더니, 곧 간디바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다시 형체를 풀어냄. 아슈바타만은 아르주나가 간디바를 없앤 뒤에도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완전히 호흡이 진정되고 난 뒤에야 놓아줌.

 그리고 그 일련의 모습을, 카르나는 창을 쥔 채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음.

 

이제 이야기를 계속해도 되겠나, 아르주나여.

 

...그래.

 

내가 널 기다린 것은 당연하겠지. 우리의 전투는 한번 마무리되었으나, 웃으며 사라졌던 것은 네 쪽이다. 한없이 공정하며 고결한 영웅이여. 네게 재전을 청하고자 했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천상에도, 지상에도 너는 나타나지 않더군.

 

...

 

언제든 너와 겨룰 수 있도록 끊임없이 수행했다. 영적인 부분의 수행도 쌓았지. 그러나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네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무언가의 개입이 있었다는 결론만이 나왔다. 그들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고, 그렇다면 알아내면 될 것이라 나는 판단했다.

 

만일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 태어났다고 한다면, 너는 어쩔 셈이었나.

 

그런 건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이 모습 이대로 살아있지 않나. 내 역할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그것을 다하길 기다릴 뿐이지. 네가 어린아이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들, 아마 너는 너 그대로 자라나게 되었을 것이다.

 

아슈바타만은 옆에서 긴 한숨을 쉬었고, 아르주나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음.

 

네 목을 떨어트린 이후로 이 순간만을 기다렸지. 남들에게 긴 시간이라 한들, 별거 아니었다. 애초에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조차 없었으니. 그러나 얼마 전부터 세계가 좁아지는 이상 현상이 생기고, 수상한 녀석들과 나무가 등장하면서부터는 곧 기다렸던 시기가 다가온다는 느낌이 들더군.

그 예상대로 너는 이곳에 있고, 나 역시 아직 그대로 이곳에 있으니, 이제 재전을 요청하는 것이 옳겠지.

 

잠깐, 진지한 이야기 중에 미안한데, 하나만 확인해도 되겠어?

 

마스터는 조금 질린 안색을 한 채였으나, 가라앉다 못해 얼어붙은 공기를 순환시키듯 밝은 목소리로 화면 너머의 그를 향해 말을 걸었음.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신은 아르주나와 재전만을 기다렸다는 것 같은데, 그거 말고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없어?

 

카르나는 아무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반응에 마스터는 다빈치와 마슈를 한 차례씩 바라보며 눈짓을 주고받음.

 

그렇다면, 만약 이쪽에서 그 전투를 도와줄 경우, 저 나무를 없애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그것뿐이니까. 아, 물론 아르주나도 그 재전을 원했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마스터. 저 역시도 어느 곳에서든, 저자와의 전투는 환영이니까요. 게다가 지금처럼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은, 전력을 다하기만 하면 되는 전투라니 오히려 제 쪽에서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르주나는 여전히 화면 너머의 모습을 바라본 채였음. 호승심이 드는지 약간의 흥분이 머무르는 얼굴을 지켜보다, 마스터는 카르나를 향해 물음.

 

그렇게 말하는데, 어때? 대신 준비에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며칠 정도는 괜찮을까?

 

지금까지의 세월에 비하면 찰나와 다름없지. 이쪽에서도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아르주나를 포함하여 먼저 공격받지 않는 한, 다른 누구도 공격하지 않을 것도 약속하겠다.

 

음, 우리야 좋지만.

 

단, 그쪽과 주기적으로 대화를 진행해도 괜찮은지 궁금하군. 말솜씨는 그렇게 좋지 않다고 생각하나... 알아보고자 하는 것들이 있다.

 

그 부분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해 본 뒤에 말해줘도 괜찮을까?

 

아아, 괜찮다. 나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하지.

 

통신이 종료된 뒤,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음.

 

일단 어떻게든 넘겼네요...

 

대화가 가능해서 다행이었어.

그러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좋은 결과네.

 

아르주나는 그 사이에서 조금 석연치 않은 듯 화면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는데, 아슈바타만은 그런 아르주나의 어깨를 가볍게 쳤음. 뭘 그렇게 죽상이냐. 그래도 이성이 없다거나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아니었고. 전투 자체는 너도 괜찮다며? 아르주나는 그건 그렇습니다만, 하며 머물렀던 시선을 돌려 마스터와 일행들이 이 뒤는 어떻게 할지 이야기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는데, 정작 생각은 다른 곳으로 새고 있는 게 빤히 보였음.

 

일단 마저 작전을 짜는 걸 보자고. 우리야 어디까지나 인리를 구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한 입장일 뿐이니까. 그렇진 않겠지만, 이상한 거라도 들고 오면 곤란해지지 않겠냐.

 

격려하듯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하곤 먼저 다른 이들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아슈바타만의 뒷모습은 어딘가 묘한 감상을 품게 해서, 아르주나는 고개를 한번 털어낸 뒤 그 뒤를 따름. 칼데아측은 아르주나도 찬성한 이상 이쪽에 손해 될 건 없다고 결론 내렸는지, 곧 통신을 보내 카르나에게 제안에 찬성한다는 의사를 전했고, 카르나는 먼저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고 싶다고 이야기함.

 

 

그 뒤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됨.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 카르나는 자신의 창을 내려놓았고, 창은 이내 형체도 없이 녹아내림. 서번트의 무구와 다름없이 마력으로 다시 형체를 불러낼 수 있는 듯했음.

 이후 그를 보더에 태울지, 혹은 몇몇 이들이 밖으로 나갈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는데, 아무리 전투 의사가 없음을 밝혔더라도 보더는 최후의 보루이며, 혹시 모르는 일이니 우선 마스터를 비롯한 인원이 밖으로 나가는 쪽으로 결정됨.

 아르주나와 아슈바타만은 당연하게도 마스터를 따라 보더에서 내리게 되었는데, 보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던 카르나는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옴. 그리곤 이내 희미하게 웃더니, 아르주나를 향해 손을 내밈.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주나여.

 

아르주나는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가만히 그 손을 보고 있다가, 아슈바타만이 뒤에서 툭 치자 엉겁결에 그 손을 마주잡고 흔들었음.

 

...그래. 어떤 너라도 다시 만났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으니.

 

두 사람... 되게 복잡한 인사구나...

마스터는 묘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카르나에게 인사를 건넴. 카르나는 어느새 입가의 웃음을 사그라트리고 마스터에게도 마주 인사했음. 마슈도 비슷한 식이었는데, 아슈바타만은 조금 다르게 마치 친구 사이에 하듯 적당히 서로 적당히 손을 들어 인사하는 데서 끝냄.

 

그래서, 일단은 최대한 여러 장소를 돌아보며 두 사람이 전투하기 괜찮을 만한 장소가 있는지 살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 물자 보충을 하고 싶은 것도 있고.

 

넓은 공터라면 제법 있다. 다만 주변의 도시가 휘말리지 않을 거라곤 장담하지 못하겠군.

 

응? 그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거야?

 

아니, 단지 그와 내가 전투할 경우, 어쩔 수 없이 넓은 지역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심하면 이 세계 자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지. 또한, 나는 어디까지나 동등한 능력 아래 그와 겨루고자 한다.

 

음... 되도록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향이 없었으면 하는데, 그건 힘들까?

 

그건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는걸~

 

갑작스레 튀어나온 발랄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고개를 돌림.

어느새 튀어나온 화면 안에, 다빈치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음.

 

그쪽에 있는 카르나는 이 이문대의 신에 가까운 존재니까. 어째서인지 온전한 느낌은 아니지만. 아니지, 뭐라고 설명하는 게 좋을까? 신의 기운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아마 지금 아무런 방비도 없이 싸웠다간, 지금의 우리는 당신에게 한번에 녹아내리지 않을까? 그런 존재가 전력을 다한 전투를 바라는 거야. 당연히 모든 곳에 영향이 갈 수밖에 없어.

 

분석의 결과인가? 흥미롭군.

 

뭐, 그런 거지. 다빈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음. 자세한 사항은 제대로 검사해 봐야 알겠지만 이쪽에서 분석한 바로는 이대로 전투를 진행했다간 우리에게도 세계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만약 그의 저 신성을 벗겨낼 수 있거나, 일시적이라도 경감시킬 수 있다면 가능하겠지만, 그전엔 어려울 것 같다며 한참을 수치와 함께 이야기하다, 이내 카르나를 향해 물음.

 

카르나, 당신이 바라는 건 당신이 이곳의 신으로써 가진 모든 힘을 온전히 사용해 그와 겨루는 거야? 아니면 카르나라는 전사의 능력만 있다면 충분할까?

 

그는 아르주나를 잠시 바라보았다가, 이내 다시 화면으로 눈을 옮김.

애초에 나는 이곳의 신이 아니며, 그저 운명의 때가 오기를 기다리던 한 전사일 뿐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힘이 쌓였다고는 하나, 받아들인 적이 없으니 덜어낼 것조차 없지.

 

그 말에 다빈치는 짝, 박수를 쳤음. 어쩐지, 그래서 이런 묘한 결과가 나왔던 거구나.

 

무슨 일인데? 물어오는 마스터의 질문에 그는 카르나가 이 이문대의 주축이자 신이라는 위치에 있기는 하나, 그걸 자세히 살펴보면 묘한 틈이 느껴진다고 설명함. 본연의 능력이라기보단 일종의... 그래, 예장을 착용한 듯한 느낌이라고 설명하면 쉬울까?

그럼 그걸 벗을 수도 있는 건가요?

 

흥미로운 듯 마슈가 물었고, 다빈치는 흥미진진하게 화면 너머로 카르나를 바라보았음. 그건 자세히 조사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카르나. 괜찮다면 당신을 자세히 관찰해봐도 좋을까?

 

카르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게 전투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상관없다며 허락함.

 

그렇게 빠른 시일 내로 끝날 것만 같았던 이문대 공략은 새로운 정보를 얻을 기회로 인해 조금 더 길어지게 되었고, 그들은 조사가 진행되는 며칠간은 분석을 위해 보더 근처에서 함께 지내게 됨.

 

별다른 충돌이 없기도 하고, 조사에 참여하는 것은 칼데아의 연구원들과 다빈치, 그리고 그 대상인 카르나 뿐이었기에 마슈나 마스터, 그리고 소환된 두 서번트는 별달리 할 일이 없었음. 그들은 간만의 여유를 즐기며 훈련하기도 하고, 종종 도시로 들어가 물자 공급을 맡기도 함. 다만 카르나가 이곳에 오래 머무는 중인 탓인지, 도시에서 조사를 위해 보내는 것으로 추정되는 비행체와 사람들이 몇 번 보더의 근처로 탐색을 오곤 했음.

보더는 자체적으로 숨을 수 있는 기능이 있다 보니 그렇게 사람들이 정찰을 오면 모두가 보더 내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곤 했는데, 카르나가 보이지 않는데 해는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 어느 순간부터는 비행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꾸준하게 오가곤 했음. 보더가 발각되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던 칼데아 소속의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무렵. 마침내 대략적인 카르나의 조사 결과가 나옴.

 

그의 상태는 이전에 말했던 것과 비슷하게, 신으로써 가진 힘이 일종의 예장처럼 작용하는 상태였음.

다빈치는 조사하던 중 진행했던 문답을 언급하며 카르나 자신이 인간임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어 사람들의 인식으로 덮어씌워진 신이라는 개념이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는 식이라고, 지금까지 제법 다양한 것들을 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며 감탄함.

다만, 이렇게 분리된 상태인 덕에 카르나와 아르주나, 두 사람을 동등한 조건에 세울 방법을 찾아냈다고 이야기함. 만약 카르나 본인이 그 힘을 자기 것으로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거라고. 그러나 이 작업은 시간이 조금 걸릴 것으로 추정되고, 특성상 카르나와 아르주나, 둘만이 동행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마스터는 의아해함. 어떤 건지 설명해 줄 수 있어?

 

그 내용인즉, 카르나가 신이라고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기에 이 세계가 그를 신이라 받아들이고 있는 거라면, 사람들에게 아르주나도 비슷한 인식을 심어주면 된다는 이야기였음. 이곳의 기록에 따르면 카르나는 고대부터 계속 태양과 같은 것이라 받아들여졌고, 거기에 찾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언급도 있었으니, 이걸 이용하면 상당히 쉽게 가능할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며 다빈치는 신난 어조로 설명함.

 

그런 게 가능해? 아슈바타만은 의구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고, 아르주나는 괜찮을까요? 무언가 이상이 생기는 것은 아닐지. 라며 걱정을 표했음.

마스터는 약간 고민하는 것 같더니, 곧 당사자들이 괜찮다면 자신은 오케이라며 선택권을 넘김.

 

카르나야 자신의 요구사항이었던 만큼 당연히 동의했으며, 아르주나는 인리를 위해 소환되었던 만큼, 칼데아 측에서 이것이 좋은 방법이라 결론 내린 거라면 그에 따르겠다고 이야기함.

그렇게 두 사람에게는 통신장치와 함께 오더가 주어졌는데, 별 다른 건 없고 그저 카르나가 걷던 길을 아르주나가 그 옆에서 함께 걷기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였음. 이야기를 나누면 좋고, 사이가 좋아보인다면 더더욱 좋다는 식으로 설명하자 두 사람은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군요. 아르주나가 덧붙였음.

 

그럼 우리는 어떤 걸 하면 되는 거야? 그냥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건가?

 

다빈치는 고개를 저음. 아니, 우리는 사람들의 인식이 더욱 빨리 변화할 수 있도록 해야지. 이야기를 흘린다던가, 소문을 내는 식으로 말이야!

 

둘 다 비슷한 말 아닌가요? 마슈가 고개를 기울이자, 사소한 건 넘어가게나~ 하는 농담조의 답이 돌아옴.

 

이쪽에서는 카르나가 찾고 있던 사람이 아르주나이며, 카르나와 동등한 존재가 드디어 나타났다는 내용의 소문을 풀 예정이야. 세부적인 내용은 그때그때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 전체적인 이미지는 그런 느낌인데 괜찮을까?

 

다빈치는 확인하듯 두 사람에게 물음. 어차피 이곳에서만 잠시 돌다 사라질 소문이니 괜찮습니다. 하고 답하는 아르주나와 맞는 이야기이니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카르나의 모습에 다빈치는 그럼 동의한 거다? 라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음.

그렇게 각자 해야할 일이 결정된 뒤, 두 사람은 먼저 길을 떠나게 됨. 보더는 그들을 따라가며 상황을 보다가, 먼저 앞서가기도 하고 뒤처지기도 하며 사람들에게 인식을 심어주기로 함.

아르주나는 카르나와 함께 땅에 내려선 뒤, 오직 둘만 남게 된 뒤에야, 계속 가지고 있던 의문을 내뱉었음.

이곳에서는 네가 ■■■... 아니, 그분을 없앴다고 했나. 그게 어떻게 가능했던 거지?

 

카르나는 생각을 되짚는 듯, 잠시 말을 고르더니 이내 답함.

 

운명이 꼬여버렸기 때문이다. 아르주나, 너로 인해서.

 

그게 무슨 말인지 설명해라.

 

운명으로 지어진 나의 마지막은 네 손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비틀리고 나에게 마지막을 가져다주어야 할 이가 내 손에 사라졌으니, 나는 나의 죽음을 바랄 수 없게 되었고.

또한 원래 운명대로 지나가야 할 시간에서는 이미 죽은 자이니, 나의 시간 역시 더 이상 흐르지 않았지. 죽은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당연하지 않나. 그로 인해 살아있되 죽은 자가 되었다. 수많은 인간이, 그리고 그만큼의 신들이 끝을 가져다주고자 하였으나 그 모두가 나의 창 아래에서 끝을 맞이하고 떠나가더군.

 

내가... 네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고?

 

모든 규율과 법도가 무너진 전장이었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을 마지막까지 지키려던 건 너 하나뿐이었지. 저주로 무너졌던 나를, 절대자의 권고마저 어기고는 자비를 베풀어 기다려 주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이겠지.

 

...

 

그리고 나의 창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 창은 신마저 죽일 수 있는 것. 축복받았으나 인간이었던 너에게는 충분히 죽음을 선사할 수 있는 물건이니.

 

그렇게 된 거였나. 나는...

 

네 시신을 마주한 뒤에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당시에는 그저 섬뜩한 느낌뿐이었지만, 이내 수많은 전투가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더군.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것을.

 

다른 이들이 그런 널 내버려 두던가?

 

당연히 아니었다. 방금 언급했듯, 수많은 인간과 신들이 끝을 가져다주고자 했지.

 

그리고 너 혼자만이 남은 것이고.

그렇다.

 

끝을 기다리고 있었나?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김. 아르주나는 생각할 것이 많은 듯 입을 다물었고, 카르나는 오히려 말하지 않는 쪽이 더 익숙한 사람마냥 태연한 표정이었음.

 

꽤 긴 날 동안 머물렀던 탓에 버석하게 마른 풀들을 헤치며,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감. 해가 한번 보인 뒤부터는 이틀정도 떠 있었단 주민의 말을 떠올리며, 걸어도 걸어도 나오는 마른 풀들에 아르주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떠 있는 해를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볍게 흔들곤 다시 걸음을 옮기는 것에 집중함.

두 사람 모두 아무리 걸어도 체력에 한계가 올 만한 존재는 아니다 보니, 그들은 지지 않는 태양 아래서 시간 감각도 잊은 채로 그저 걸었음. 얼마나 그렇게 걸었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가득한 생각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가끔가다 한 번씩 작은 의문과 대답을 주고받던 때, 칼데아에서 지급한 통신장치가 울림.

 

마스터를 비롯한 일행은 그들이 맨 처음 들렀던 도시부터 시작해 그 뒤의 도시를 비롯, 몇 개의 마을에 소문을 퍼뜨렸다고 전함.

그리고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니, 혹시 무언가 변화가 느껴진다면 신호를 주길 바란다며 아르주나에게 당부함.

아르주나는 아직 특별한 변화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답함. 그리고 지금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카르나에 대해 추측한 내용들 역시 전했는데, 카르나는 옆에서 통신에 간간이 참여하며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을 때 정정해 주었음.

 

그 이후로도 한참을 카르나와 함께 걷는 동안, 아르주나는 한번씩 어딘가 묘한 감각을 느낌. 서번트가 걷기만 했을 뿐인데 병에 걸릴 리는 없으니, 다빈치가 말했던 그 계획과 관련된 상황인가보다 싶어 그는 간만에 마스터에게 통신을 걸었음.

지금 어딘가 기묘한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으며, 카르나에게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것으로 보아 이것이 여러분이 말했던 그 신성이냐며 물었는데, 그 질문이 들려오자 통신 너머로 잘 되고 있었구나! 하는 환호 소리가 들려옴.

소문은 순조롭게 퍼지고 있는데 아르주나 쪽에서는 반응이 없어 이 방법이 아닌 건지 걱정하던 찰나였다고. 그런데 다행히 반응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 방법으로 쭉 진행하겠다고 함.

그렇게 칼데아는 칼데아대로, 두 사람은 두 사람 대로, 각자 주어진 일을 하는 나날이 계속되었음. 시간이 지날수록 아르주나는 새로운 신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카르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옆에서 지켜볼 뿐이었음.

 

그렇게 또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카르나는 아르주나를 지켜보다 한번씩 말을 걸곤 했는데, 아르주나는 처음에는 그 질문들을 껄끄러워했으나 어느 정도 신성을 받아들인 뒤부터 하나씩 답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제법 긴 이야기도 털어놓기 시작함.

 

아르주나 본인은 느끼지 못했으나, 그걸 지켜보는 카르나의 눈은 형형히 빛났음.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카르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던 아르주나는 어딘가 위화감을 느낌. 분명히 자신은 이것과 비슷한 경험을 했으나, 자기가 겪었던 것은 미묘하게 다른 것이지 방금 입으로 꺼냈던 이야기가 아니었음. 또한 그에게 가지고 있던 적대감이 상당히 누그러진 채였고, 적당한 예의마저 갖춘 채였음.

 

누군가에게 예의를 갖추며 대하는 것은 아르주나에게 당연한 사실이었으나, 그것이 곧 숙적이라고까지 칭해지는 카르나라는 점. 또한 자신이 취하던 예의가 타인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손위 형제를 향한 것에 가깝다는 사실에, 그는 충격을 느끼며 그대로 멈춰 섬.

 

이게, 무슨...

 

잔잔하게 이야기하던 바로 몇 분 전과는 달리, 충격이 완연하게 드러난 얼굴로 멈춰 선 아르주나의 모습을 보며 카르나는 드디어 자각했나. 라고 말을 걸었음.

옅게 떨리는 눈동자를 감상하던 그는 정신을 차렸다면 네 마스터라는 자에게 통신을 넣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덧붙임. 그 사이에 몇 번이고 통신이 왔었으나 네가 듣지 못했다는 말도.

 

그 말을 듣고, 아르주나는 급하게 통신 장치를 꺼내 칼데아 측으로 통신을 넣음. 곧바로 연결되는 통신과 이어지는 다급한 목소리.

 

아르주나, 무슨 이상이라도 있었어?

 

그는 통신기를 쥔 채, 기억을 돌이켜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감.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 그리고 가지고 있는 기억과 입 밖으로 나왔던 기억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점. 그리고 무엇보다 카르나에게 가지고 있던 적의가 마비되었던 듯한 이상 현상 등.

 

아르주나가 말을 끝내자마자, 카르나는 통신기를 향해 말했음.

 

아까 아르주나가 이야기한 것들도 있었지만, 그의 행동 역시 어느 기점부터 위화감이 느껴졌다. 너희와 함께 만났던 그 보다는, 내가 알고 있던 모습의 아르주나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들더군.

카르나는 그 말과 함께 어떤 소문을 냈던 건지 물었고, 마스터는 카르나가 기다려 왔던 사람이 돌아왔으며, 이제 그와 함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했지만 가장 많이 퍼지게 된 사실은 카르나가 기다려 왔던 자가 그의 반려라는 이야기라고 전해줌.

 

다빈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 어느 시대든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기 마련이니까. 하고 덧붙였는데, 아마 그것이 주류가 되며 어딘가 문제가 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고 심각한 목소리로 말함.

 

그에 아르주나는 할 말을 잃고 잠시 머리를 짚었다가, 이내 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닫고는 통신기를 향해 이야기함. 그러나 제가 취했던 행동은 반려를 향한 것이었다기보단, 손위 형제들을 향한 것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카르나는 그 말에 긍정했고, 마스터를 비롯한 칼데아의 인원은 심각하게 회의를 시작함.

통신기를 통해 두 사람도 회의에 참여했는데, 이런저런 의견과 생각, 수많은 가설이 오고 간 뒤에 나온 결론은 '카르나가 기다려 왔던 사람'이 돌아왔으며 '그와 함께하고 있다'는 부분으로 인해 이 세계에 존재했던 아르주나의 영향을 지금의 아르주나가 받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음.

 

아르주나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닌, 이야기했던 기억들 중 카르나가 함께 겪은 부분은 카르나의 기억과 일치했기 때문임. 동일 인물이기에 아르주나가 겪은 기억과도 대부분이 동일했으나, 카르나의 기억과 대조했을 때 약간의 차이점이 다른 것을 보면, 아마도 그것이 이 이문대에 존재했던 아르주나의 흔적으로 추정된다고 함.

 

그에 아르주나는 이 계획이 계속되었을 경우 자기 자신이 남지 않을 수도 있는지 물었으나, 카르나는 고개를 저었음.

아무리 네가 신성을 받아들이고 이 세계의 흔적이 스며든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바탕이 되는 아르주나는 너 자신이기에 그럴 일은 없다며 못박음.

아르주나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각오를 다진 듯 계획을 지속하겠다고 이야기함. 칼데아 측은 이렇게 된 이상 아예 최대한 빨리 계획을 진행해 버리고 신성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편이 낫겠다며, 아르주나의 동의를 구함.

 

아르주나는 흔쾌히 동의하고는, 한 번 깨달았으니 이제 다시는 이런 형식으로 영향받진 않을 것이라 이야기했음. 다만 계속 체력을 소비하는 것은 좋지 않을 테니, 한번씩 휴식을 취하며 나아가겠다는 것도.

 

그 말에 다들 동의를 표했고,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진행됨.

카르나와 아르주나는 한 번씩 쉬어가며 길을 걸었고, 마스터 쪽은 최선을 다해 소문을 퍼뜨림.

아르주나가 처음 쉬었던 날에는 별일이 없었으나, 두 번째 쉬는 날부터는 잠들면 옛 시절의 기억을 보기 시작함.

그가 기억하던 것과 미묘하게 다른 기억들. 오히려 입 밖으로 꺼냈던 이야기와 동일한, 이 세계에 있던 아르주나의 흔적이었음.

 

아르주나는 그럴 때마다 꿈의 형식을 빌려 떠오르는 기억의 안에서, 자기가 직접 경험했던 것과의 차이를 하나씩 확인함. 그 기억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 세계의 아르주나가 경험했던 마지막 시점과 가까운 시기를 순서대로 보여주었는데, 마침내 전쟁이 일어난 시기에 들어선 순간 아르주나는 한 차례 일어남.

언제나처럼 해가 중천에 떠 있고, 새로운 풀과 꽃이 피어난 아름다운 광경이었음. 그 사이의 카르나는 아르주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마 지금까지 계속 아르주나가 휴식을 취할 때도 쭉 눈을 뜨고 있던 모양이었음.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무심한 어투로 던져지는 말에, 그는 조금 예민해진 정신을 다듬고는 괜찮다며 답함. 그에 카르나는 앉아 있던 아르주나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더니, 약하게 힘을 주어 다시 눕혀줌.

조금 더 쉬는 것이 좋겠다. 확실히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에 영향을 주는 비중이 높아지는 것 같으니. 게다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으나, 방금 잠에 들기 전보다 네 모습도 조금 변화했다.

 

아르주나는 그 말에 어디가 변화했냐며 물었는데, 눈과 머리카락이 그 전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일단 다시 잠에 들어볼 테니 지금과 또 달라진다면 이야기해달라고 말하고는 눈을 감음.

 

그리고 이어지는 기억들.

비참한 전장의 모습, 이제는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그 모든 것들이 꿈의 형식을 빌려 다시 눈앞에 나타남.

그렇게 아르주나가 기억 속을 헤매는 동안, 하늘에서는 서서히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음.

 

카르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이변을 감지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몇천년 동안 자신과 함께 움직이던 태양이 일식에 가려지듯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함.

그리고 마침내 태양이 완전히 가려지는 순간, 무언가가 터지듯 하늘에 반짝이는 빛이 산란함. 그리고 태양이 없을 때 어둠만이 가득하던 하늘은, 작은 별들이 빼곡히 박힌 밤하늘로 탈바꿈했음.

 

그 밤하늘의 한가운데에는 선명하게 빛나는 달이 떠 있었는데, 카르나 자신의 태양처럼 아르주나의 위를 밝히고 있었음.

 

수천년 만에 보는 밤하늘에 카르나는 잠시 감상에 잠겼다가, 곧 아르주나의 곁에서 들려오는 통신 알림음에 장치를 빼내어 본인이 받음.

 

이후 아르주나는 현재 잠들었으며, 아마 그가 잠드는 동안에 신성이 강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전함. 이러한 밤하늘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인데, 달의 위치가 자신의 태양처럼 아르주나의 위치와 동일하다는 사실까지 전달하고 나자, 통신 너머로 신기함 반, 안심 반의 반응이 들려와 카르나는 가만히 그 반응을 들음.

 

오늘 이렇게 밤이 찾아오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앞으로는 더더욱 빨라지지 않을까 추측된다며 다빈치는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고, 카르나는 동의함.

이어 그가 최근 이쪽의 모습을 다양한 기록용 기기들이 담아가는 것을 확인했다는 이야기도 하자, 다빈치는 이제 계획도 막바지에 다다랐다며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를 냄. 그 뒤엔 미리 이야기했던 전투를 벌이기 괜찮은 장소 중 하나에 미리 가서 최대한 주변으로 영향이 가지 않도록 대비하겠다 이야기했고, 카르나는 쉬어가면서 가겠다고 답하고는 통신을 마무리함.

 

그렇게 식물과 꽃이 한가득 피어난 평야 위. 그는 아주 오랜만의 밤하늘을 감상했음.

 

현실에서 그들이 기적과도 같은 밤하늘을 마주하는 동안, 아르주나는 기억 속의 전쟁터를 헤매고 있었음.

어느 순간부터 아르주나는 자신의 기억과 이 흔적으로 남은 기억의 차이가 점점 늘어난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예 처음 경험하는 것들도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고 난 뒤에는 깊은 한숨을 내쉼. 원래도 좋지 않은 기억이었고,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전쟁이었음. 그러나 그것을 다시 생생하게 꺼내어 보여주는 것을 자신의 의지로 막지도 못하니 아르주나의 신경줄은 갈수록 닳아감.

 

그러던 어느 순간, 아르주나는 자신이 한 번도 생전에 듣지 못했던 것을 이 세계의 아르주나가 알게 되었음을 보게 되었고, 마침내 이 이문대에 존재하던 운명이 전부 뒤틀렸는지 깨달음.

그는 자기가 알게 된 것을 최대한 숨겼으나, 차마 그 사실을 알고서는 활을 쏘지 못해, 결국 고결한 패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임.

 

기억 속의 아르주나가 미소를 지으며 죽음을 맞이했을 때, 아르주나는 기억 속에서 쫓겨나듯 깨어남.

 

눈에 밤하늘을 담을 정신이 아니었기에 심호흡하며 당혹을 가라앉히다, 이내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쯤 이쪽을 바라보고 앉은 카르나와 눈이 마주침.

아르주나는 기억 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카르나의 희열 섞인 눈을 그와 겹쳐보았다가, 이내 이 푸른 눈은 한없이 가라앉아 있을 뿐이라는 걸 깨달은 뒤에야 정신을 차렸음.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늘을 향하는 푸른 눈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밝게 빛나는 밤하늘과 마주한 뒤에야 이곳에 카르나가 있음에도 밤이 찾아왔다는 것을 깨닫곤 눈을 크게 뜸.

 

그는 이 이문대에 소환된 뒤로 처음 마주하는 밤하늘의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봄. 과거에 살아가던 땅과 같은 땅 위이기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기억하던 것과 똑같은 하늘에 그는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았음.

 

두 사람은 그렇게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길을 나섬. 그러나 지금까지 계속 가던 길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카르나가 향하기에, 아르주나는 어째서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지 물었음. 그리고 자신이 기억을 보는 사이에 주고받았던 통신의 내용을 전달받곤 고개를 끄덕임.

 

그러나 더 이상 휴식을 취하지는 않아도 될 거라 생각한다. 라며 아르주나가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자, 카르나는 무언가 알게 된 것이 있느냐고 물었음. 그러자 아르주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는데, 자기가 알게 된 것을 그대로 이야기해도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음. 만약 그 상황에 있던 것이 자신이었다면,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은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임.

 

그래서 그는 카르나에게 나중에 말해주겠다며 대답을 미뤘고, 카르나는 잠깐의 침묵 뒤 알겠다고 이야기함.

 

그렇게 두 사람은 계획 초반 때처럼 쉬지 않고 걷기 시작했는데, 카르나와 아르주나가 같이 있는 하늘은 그때와는 다르게 해가 뜨기도, 달이 뜨기도 했음. 다만 평범한 하늘과 다른 점이라면 그들의 태양과 달은 지평선을 넘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 그들의 머리 위에서 지워지듯 사라졌다 나타난다는 것이었음.

 

새로 피어나는 식물들을 헤치며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걸어나갔을까, 저 멀리서 익숙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함. 속도를 조금 더 올리니, 곧 보더에서 일행들이 마스터와 마슈, 그리고 아슈바타만이 마중 나와 두 사람을 반겨줌.

 

두 사람 다 무사히 도착했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어라?

 

저 멀리서부터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던 이들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어? 하더니, 완전히 식별이 가능한 거리까지 오자 놀란 표정으로 둘을 향해 뛰어옴.

 

아르주나? 아르주나지?

 

마스터는 당황한 듯 아르주나를 살폈는데, 마슈도 놀란 건 마찬가지인지 입을 가린 채로 그를 살피기 바빴음.

 

네, 아르주나입니다. 신성의 영향인지, 밤이 찾아오기 직전부터는 겉모습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동안 제 모습을 직접 볼 방법이 없다 보니 머리가 조금 자란 것 외에는 체감되는 것이 없습니다만... 카르나가 말해준 것에 따르면 눈도 조금 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응, 눈도 특이하게 바뀌었어! 밤하늘처럼 멋지네.

 

와아, 이것도 신성의 영향인 건가요? 아름다운 눈이네요!

 

긴 머리카락이라... 옛날 생각 나는구만.

 

날개뼈 아래까지 자라난 검은색 머리카락과 오팔처럼 다양한 색이 안에서 빛나는 검은 눈동자는 기존의 단정한 인상이던 아르주나와는 다르게, 좀 더 화려한 느낌을 줌.

 

그들은 한데 모여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보더로 돌아갔는데, 카르나와 아르주나의 경우에는 가벼운 대화와 함께 그저 걷기만 했던 것이 전부라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대체로 마스터와 마슈였음.

그들은 즐거운 목소리로 다양한 도시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경험했던 일들을 들려주었는데, 제법 특이하고 인상적인 사건들의 이야기에 아르주나는 흥미진진한 듯 경청했고, 카르나는 맞장구치며 소소한 부분을 물어보기도 함. 아슈바타만은 아르주나의 머리카락을 주시하다, 고개를 돌리더니 생각에 잠겼음.

 

그렇게 보더에 도착하자, 다빈치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함.

 

기다리고 있었어! 이쪽은 준비가 끝났는데, 먼저 아르주나의 상태를 살펴봐도 좋을까?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이제 당장 내일이라도 전투를 거행할 수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지금은 딱히 이상한 점도 없고요.

 

그렇다면 나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그렇게 아르주나는 다빈치를 따라 자리를 옮기고, 그 자리에 남은 카르나는 마스터가 우선 좀 쉬라며 불렀음.

마스터는 낮과 밤의 길이가 동일해진 만큼 아마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한다며, 이제 곧 네가 원하던 것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라고 말함.

카르나는 잠시 주먹을 쥐었다 펴고는 드디어인가. 하고 웃음.

 

마슈와 아슈바타만까지 포함한 네 사람은 그렇게 아르주나를 기다리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눔. 그러던 중, 아슈바타만이 네가 살아있다는 것이라면 이곳에서는 우리가 승리한 거냐고 물었는데, 카르나는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음. 애초에 그와 내가 운명을 벗어나 버린 시점부터는 신들의 개입으로 인해 전쟁의 이유가 사라져버렸다고. 왕국은 산산이 흩어졌고, 우리가 알던 모든 이들도 왕국과 마찬가지로 흩어져 각자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고 전함.

 

아슈바타만은 그 말을 듣고는 한숨을 내쉬었음. 나도 그 흩어진 사람들 중 하나였겠구만.

 

그랬지. 수행을 쌓기 위해 떠난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너와는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애초에 나부터가 전쟁 이후로 다른 이들이 없는 곳으로 떠났다가 꽤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아르주나의 흔적을 찾아갈 겸 돌아간 것이었으니.

 

그리곤 지금까지 찾지 못한 거고?

 

그렇다.

 

...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아니, 그냥 생각할 게 좀 많아져서... 아아! 이런 식으로 복잡해지는 건 딱 질색이라고. 잠시 자리 좀 비운다. 마스터, 괜찮지?

 

마스터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임. 응, 다녀와!

마슈는 그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아슈바타만이 보더 밖으로 나가고 난 뒤에야 괜찮으시겠죠? 하며 마스터에게 슬쩍 물음.

 

마스터는 말을 흐렸고, 그에 카르나는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며 마슈를 향해 질문함.

이미 알고 계시다시피, 이곳의 역사와 저희가 거쳐온 역사가 달라서요... 아슈바타만씨의 개인적인 이야기이니만큼 제가 이야기해드리긴 좀 그렇지만... 아무래도 저희 쪽 역사와의 차이 때문에 생각이 많아지신 게 아닐까 추정됩니다...!

 

카르나는 수긍함. 너희 쪽에서 겪었다는 사건대로라면 아마 판다바가 승리했겠지. 아슈바타만이라면 아마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을 거고.

 

이후 카르나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 자신도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며 마스터에게 이야기함. 아슈바타만이 나갔던 곳을 향해 가는 걸 보면 함께 이야기를 나눌 모양이었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나가 혼자 되돌아옴. 같이 올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며 마스터가 묻자, 아슈바타만이 한 가지만 묻고는 이내 혼자 정리할 게 있다고 가버렸기에 그는 돌아왔다고 이야기함.

 

질문이 뭐였는데? 아, 민감한 문제라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마스터는 급하게 덧붙였으나, 카르나는 그런 건 아니다. 라고 하더니, 이내 그의 아버지는 내가 겪었던 전쟁의 마지막까지 생존했었는지를 물었다고 알려줌. 마스터와 마슈는 찜찜한 표정으로 말을 고르다가, 이내 그랬구나. 하는 대답을 내놓곤 입을 다물었음.

 

그렇게 긴 침묵이 지나가던 때, 문이 열리며 아르주나가 돌아옴.

 

검사는 끝났다고 하더군요.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잠깐 기다려달라고 했습니다만, 표정을 보니 예상하던 결괏값이 나온 듯 해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럼 내일은 두 사람의 전투를 볼 수 있는 건가?

 

두 분의 전투라니. 기대되네요, 마스터!

 

주변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조치를 해두었다고 했나?

 

응, 자세한 건 다빈치나 다른 직원분들 쪽에 물어봐야겠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사람이 사는 곳이 꽤 멀어서 다행이라고들 하더라. 보더도 같이 대피할 예정이고. 만약을 대비해 나와 마슈, 그리고 아슈바타만이 지켜보게 될 것 같아.

 

그와 나에 대한 데이터도 가져갔으니, 대비는 믿을 수 있겠지. 마음 놓고 전력을 다하도록 하겠다.

 

응!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 둔 것들도 있으니까.

 

그렇게 그들은 다음 날을 대비해 휴식에 들어감. 아슈바타만은 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아르주나는 마스터를 찾아가 아슈바타만의 소재를 물음.

아슈바타만이라면 아까 아르주나가 검사받을 때, 잠시 생각할 게 있다고 하면서 나갔어. 그 뒤에 카르나가 따라갔을 땐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다고 하던데, 아직 정리가 안 된 걸까...

 

아르주나는 자신이 이야기할 것도 있으니 그를 찾아가보겠다며 나섰고, 마스터는 만류하려다 진지한 아르주나의 표정을 마주하곤 너무 늦게까지 있진 말라며 당부와 함께 카르나에게 들었던 그의 위치를 전해주고는 들어감.

 

그렇게 아르주나는 마스터가 알려주었던 대로 보더 밖을 향함.

아슈바타만은 보더에서 조금 떨어진, 카르나에 의해 해가 돌아와 생겨난 풀밭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채였음.

 

사박, 일부러 풀을 밟는 소리를 냈음에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는데, 아르주나가 아슈바타만. 하며 이름을 부른 뒤에야 고개를 돌림. 그리고는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이내 아르주나의 말에 가로막혔음.

 

아슈바타만, 잠시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나요?

 

평소와는 달리 깊게 가라앉은 눈에, 아슈바타만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침. 아르주나는 단정한 몸짓으로 옷을 정리하며 그 옆에 앉았는데, 앉고 나서도 한동안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음.

 

조금 무거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만, 당신 외에는 딱히 조언을 구할 곳이 없어서요.

...무슨 이야기인데?

 

이곳에 존재했던 '아르주나'에 대한 기억을 제가 알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겠죠.

 

뭐, 듣긴 했지.

 

이곳에 오기 직전, 그 마지막 기억까지 전부 보게 되었습니다만... 어째서 이 이문대가 생겨났는지 알 것 같아서요.

 

아슈바타만은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봄. 그가 자리를 떠나지도, 그 외의 다른 반응도 없는 것에 아르주나는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입을 열었음.

 

저는 생전에, 그러니까 카르나를 죽이기 전, 그가 제 형제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성배를 통해 지식을 받은 뒤에나 알게 되었지요. 어디까지나 성배에서 주어진 지식이기에, 그 인상이 희미해 그와는 숙적이라는 인식이 더 강한 상태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뒤, 아르주나는 한 번 숨을 골랐음.

 

그러나 이곳의 아르주나는... 그 사실을 생전에 이미 알고 있던 상태더군요. 전쟁이 시작하기 직전, 정말 우연한 기회로 인한 것이었습니다만, 그 우연으로 인해 모든 게 뒤틀리게 된 것 같았습니다,

네 녀석, 형제들은 제법 아꼈으니 말이지.

 

그랬죠. 여전히 아끼고 있기도 합니다만.

 

그래서?

 

원래의 저도 이 전쟁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알고 있겠지요. 이곳의 저는 그 회의감이 더욱 심했던 모양입니다. 기회가 주어졌으나 싸우지 않았고, 따라야 할 이의 인도마저 거부한 뒤, 끝내 허울뿐인 예우 아래, 무의미한 죽음에 이르렀지요.

 

...그렇게 된 거였구만.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더 이상 이 세계에 남아있고 싶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바라더군요. 아마 이 바람 때문에 이 세계의 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르주나는 한숨과 함께 말을 끝맺었고, 그 뒤로 한참의 적막이 이어짐. 아슈바타만은 아르주나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였고, 아르주나는 이어진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

 

조용히 말을 고르던 아르주나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음.

 

아까 다빈치와 검사를 진행할 때, 신성은 온전히 이어졌으나 어째서인지 이 세계와 미묘하게 동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원인을 찾으니, 제가 이 기억들을 보게 된 이유와 관련된 것 같다고 설명해 주더군요.

 

이곳에 존재했던 아르주나와 관련된 문제라는 건가?

 

네, 아마도... 제게 이어진 신성은 어디까지나 이곳의 카르나가 기다리던 사람인 '아르주나'를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아마 무의식적으로 제 자아를 지키기 위해 거부감을 느낀 모양입니다만... 그런 기억을 본 뒤기도 하니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괜찮지 않나? 네가 그 화살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고려하면 더더욱.

아뇨, 그 부분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번 전투는 어차피 전제부터 모든 게 동등한 환경 아래 자웅을 겨루는 것. 그런 전투를 앞둔 뒤이니 오히려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습니다만... 단지 그는 이 세계에 더 이상 남아있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까요. 아마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도 다시 돌아오게 될 텐데. 그 전장을 떠나고 싶었던 마음을 알고 있으니만큼 더더욱 꺼려지는군요.

 

...

 

아슈바타만은 한참 동안 침묵했음. 그리곤 깊게 한숨을 내쉼.

 

내 머릿속도 복잡한데 말이다.

 

...미안합니다, 아슈바타만.

 

아니, 사과는 됐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내가 답을 내릴 순 없지. 너도 알면서 온 거긴 하겠다만.

나도 그 전장에 있기는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용서받을 수 없는 길을 선택하기까지 했다. 들어주는 거야 괜찮지만, 결론은 내가 내려서는 안 되는 문제야.

어린 시절을 같이 자란 도리는 여기까지 했으니, 이제 마스터에게 가 봐. 웬만한 영령 못지않은 경험을 해 온 인간이잖냐. 완벽하진 않아도 제법 괜찮은 방법을 주겠지.

 

아슈바타만은 손을 내저었고, 아르주나는 그 옆에 잠시 머무르다 이내 작게 고맙다고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남.

 

아슈바타만과 꽤 긴 시간을 있었기에, 제법 늦은 시각이었음. 아르주나는 마스터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이 아닐지 방문 앞에서 잠시 고민했으나, 안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곧 안심하며 문을 두드렸음.

 

마스터, 잠시 괜찮으실까요?

 

아, 아르주나구나! 아슈바타만과 이야기는 잘 됐어?

 

아르주나는 그를 만나 이야기는 잘 했으나, 그는 조금 더 밖에 머물렀다 들어올 것 같다고 전한 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휴식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봄. 마스터는 카르나와 아르주나 두 사람을 기다리며 충분히 쉬었으니 괜찮다며 안쪽의 의자를 권했고, 차를 가져와 아르주나의 맞은편에 앉음.

그래서, 뭔가 중요한 이야기인 거지?

 

찻잔을 가볍게 감싸며 마스터가 물음. 아르주나는 그 말에 긍정하고는 너무 무거워질 만한 이야기는 조금 덜어내며 아슈바타만과 대화했던 것을 이야기했음. 그래서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문제일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르주나의 말이 끝맺어지자, 마스터는 머리가 아픈 듯,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함.

 

그리곤 이내 찻잔을 호쾌하게 비워버리더니, 아르주나를 향해 말함.

 

일단, 이번에 카르나와 겨루기로 한 건, 내 앞에 있는 아르주나야. 그리고 나는 아르주나가 신성을 가지게 되든,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되든, 같은 아르주나라고 생각하고 있어.

실제로 지금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 이문대에서 살아갔던 아르주나와 자기 자신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잖아?

 

네, 그 말대로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아르주나가 원하는 쪽을 선택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했다가는 다른 사람의 소망을 짓밟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이야기라면 나는 이미 수많은 소망과 세계를 없애며 여기까지 왔는걸. 나의 미래를 보고 싶다는 이유로 말이야.

동등한 위치에서 겨루고 싶은 거잖아? 어느 것에도 발목 잡히지 않고.

그렇게 해서 승리를 거둔다면 그 아르주나도 상관없다고 하지 않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지만. 보통 전투로 이름높은 영웅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호적수와 원 없이 겨루는 걸 좋아하더라고. 두 사람은 대결 자체에 얽힌 게 있으니, 이런 거라면 오히려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아르주나는 그 말을 듣고, 작게 소리내어 웃음. 그렇군요. 그랬었죠... 그도 어디까지나 저 자신일 텐데.

 

아르주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스터에게 고맙다며 인사함. 마음의 결정은 내렸으나, 어떤 영향이 있을지 모르니 내일 다른 사람들이 모두 대피한 뒤 그를 받아들이겠다고 이야기하자, 마스터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임.

 

그럼 내일 보자, 아르주나!

 

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마스터.

 

마스터가 머무는 방의 문이 닫히고, 아르주나는 가벼워진 걸음으로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향함.

 

 

 

그렇게 개전의 날이 밝았음.

 

멀리서 지켜보고 있겠다며 다빈치가 즐거운 어투로 인사한 뒤, 다섯 명은 보더에서 내림.

 

이후 보더가 움직이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안전한 곳까지 보더가 대피를 완료했다는 통신이 들려오자, 마스터와 마슈, 아슈바타만도 적당한 곳으로 몸을 피함.

 

그리고 마침내 카르나와 아르주나가 마주 보게 되었음.

 

아르주나는 시작하기 전, 잠시 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 뒤 눈을 감았는데, 그로부터 찰나의 시간이 지난 뒤. 그에게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함.

 그리고 그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카르나였는데, 그에게는 이 세계에서 아르주나와 함께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던 자신의 운명이 돌아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짐.

 

맨 처음 사라질 때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적었기에 그저 섬뜩한 느낌만이 느껴졌었는데, 지금 수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그에게 긴 시간 동안 잃어버렸던 것이 돌아오자, 카르나는 온전한 삶이 돌아오는 감각을 느끼며 환하게 웃음.

그리고 아르주나의 눈이 뜨이며 맑은 검은색의 눈과 희열을 담은 새파란 색의 눈이 마주쳤고, 둘은 동시에 무기를 들어 올리며 맞붙음.

전투의 시작이었음.

 

둘의 싸움은 거의 호각이었는데, 아무리 신성이 덧씌워졌다고는 하나 기본 영기 바탕이 서번트이기에 한계가 있는 아르주나와는 달리, 아예 본신으로 전투에 임하는 카르나와의 차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함. 그에 아르주나가 패배하는 것은 아닌가 마슈와 마스터는 걱정했는데, 아슈바타만은 긴장감이라곤 없는 모양새로 그저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의 전투를 바라볼 뿐이었음.

 그러자 마스터는 아슈바타만에게 긴장되거나 하진 않냐며 물어보았는데, 아슈바타만은 마스터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당연하다는 답을 돌려줌.

 

마스터, 저 녀석은 승리의 이름을 가진 전사다. 심지어 상대는 이미 한번 저 활로 생명을 취한 자.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고 이미 방랑해 본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아니다, 그건 저 녀석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게 맞겠지.

 

그는 고개를 젓더니 다시 입을 다문 채 전투에 집중함.

 

마스터는 그게 무슨 말인지 물어보려다, 대답해 줄 분위기가 아님을 깨닫고는 별 말 없이 전투가 벌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림.

그렇게 승기를 잡아가는 카르나의 공세가 매서워지고 있을 때,

한창 싸우고 있던 아르주나가 입가를 올려 미소지음.

 

아, 그 감각이구나.

저 목을 가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운명은, 흐름은 그때처럼 나를 승리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믿음. 비록 직접 이끌어 주던 이는 이미 자취를 감췄으나...

 

선명하게 느려진 감각 아래, 아르주나는 푸른 깃의 화살을 뽑아냄. 그때와 비슷한 감각이지만, 현실은 곧 진창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기분이던 그 순간과 정반대였음. 아, 드디어. 나는.

 

마침내 간디바에서 화살이 쏘아지고, 이내 카르나의 심장께에서 스륵, 피가 흘러내림.

 

카르나의 창에 의해 아르주나의 어깨도 잘려나갔으나, 심장을 뚫린 카르나만큼의 치명상은 아니었음.

 

창과 화살을 뽑아내는 몸짓들에, 안 그래도 한가득 피가 흘러내리던 이들의 몸이 들썩임. 어이 둘 다 괜찮냐!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둘은 느긋하게 걸어오는 아슈바타만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이내 그 앞에서 서둘러 뛰어오는 마스터를 맞이함.

 

헉, 어떡해. 이거 괜찮은 거야? 하며 호들갑을 떠는 마스터에게 아르주나는 다치지 않은 쪽의 손을 내저으며 마력만 있으면 괜찮을 거라며 전했고, 카르나는 환부를 가린 채 제법 괜찮은 마지막이군. 이라며 후련한 어조로 감상을 말함.

 

그래서, 이걸로 만족한 건가?

 

제법 후련한 기분이긴 하나 패배를 남겨둘 수는 없지. 이번은 내가 기다렸으니,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네 쪽에서 재전을 권하길 기대할 뿐이다.

 

...가벼운 대련 정도라면 나쁘지 않겠군. 언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 말과 함께 카르나는 재가 되어 사라짐. 하늘에 떠 있던 태양은 일식이라도 일어나듯 한번 새카맣게 물들었다 다시 원래의 빛을 되찾더니, 이내 빛가루가 되어 부서지기 시작했음.

 

아르주나는 눈이 오듯 아름답게 부서져 날리는 빛가루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돌아섬.

 

아슈바타만은 그런 아르주나를 보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입가를 보곤 유쾌하게 웃더니 그래서 즐거웠냐고 물음.

아르주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후, 하고 작게 웃으며 아마도 즐거웠던 것 같다고 이야기함.

이제 저 공상수라는 것만 없애면 된다고 하셨지요. 전력이 하나 사라졌다는 것은 유감입니다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공상수 벌채에 들어가고... 애초에 카르나가 사라지며 세계 자체가 흔들린 바람에, 공상수의 존재가 함께 불안정해져 다른 곳들처럼 힘들진 않은 것이 다행이었음.

 

그렇게 공상수 벌채를 끝낸 뒤, 아르주나와 아슈바타만은 퇴거함.

 

나중에 칼데아에서 다시 보게 되면 반겨달라고 인사한 것이 마지막이었음.

 

마스터는 마지막으로 아슈바타만에게 하려던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그는 별거 아니라며, 그 녀석과 내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 나중에 그 녀석을 다시 만나면 직접 물어보라고 전함. 마스터는 끙, 소리를 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임.

 

무너지는 세계를 뒤로하며 마슈와 마스터는 보더에 올라탐.

새로운 인연이 새겨졌다는 사실만이 남은, 언제나와 같은 귀향길이었음.

 

 

 


 

후기

 

 

안녕하세요... 녹입니다...

여러분이 이 후기를 보신다는 건 제가 무사히 마감에 성공했다는 뜻이겠지요...

 

이 문구가 너무 적어보고 싶었던지라 후기의 첫 문장으로 올려봅니다 O)-)

아르주나를 덕질하며 제법 많은 썰을 풀었는데, 이렇게 각잡고 책으로 뽑아보는 건 또 처음이네요! 초반의 장황한 표현을 보고 눈치채신 분들이 있으실 것 같은데, 원래는 아예 소설 버전으로 내보려고 했었습니다! 생각보다 길어져 결국 썰 형태로 다시 다듬었지만요ㅎ 아마 그렇게 했다면 페이지 수가 세자릿수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되지 않아 정말 다행입니다........ 아마 시기도 지금이 아니라 여름에나 끝났을 것 같아서....

 

시작은 '신준이가 모든 걸 삼켜낸 통합신성이라면 카르나는 당연히 모든 걸 없애버린 유일한 신살자겠지'라는 가벼운 생각이었습니다! 별생각 없이 보고싶다며 주절거렸던 그 한 트윗이 여기까지 와 버렸다는게 믿을 수 없고...

 

보통 썰을 풀 때 전체적으로 상황을 그려두지 않고 정말 손과 생각이 흐르는대로 적어두는 편인지라 이번에 책으로 수정하고 덧붙이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고치게 되었네요.. 재미있는 작업이었습니다

다음에는 시간을 좀 더 넉넉하게 잡고 해보고 싶더라구요! 이번엔 욕심껏 상황묘사를 늘리다 보니 분량도 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려서(...)

 

맞다 후반부 전투부터는 초중반에 비해 완전 간략화시켰는데, 일부러 그랬습니다! 원래 보고싶었던 부분 자체가 이문대의 카르나와 범인류사의 아르주나, 두 사람이 겪어온 길에 따라 나뉘는 세계와 운명이었던지라... 완성까지 하고 나니 과연 이걸 칼준 회지라고 가져가도 되는걸까? 싶긴 한데 일단 칼준이라고 생각하며 썼으니 칼준회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뒤의 이야기를 짜뒀는데 저 뒤로 넣기가 좀 그래서! 후기란을 빌려 적당히 풀어보자면, 일단 이 이문대의 두 사람은 나중에 칼데아에서 소환이 됩니다!

신살자 카르나는 창을 든 라이더로, 이문대의 자신을 받아들인 아르주나는 프리텐더로 상정하고 있는데, 아르주나의 기본은 마스터가 소환한 범인류사의 아르주나지만 그 이문대 내에서 덮어씌운 역할과 신성은 카르나가 기다렸던 자, 이문대의 아르주나의 것이라 그렇습니다

 

재림은 대강 처음에는 둘 다 마하바라타 시절의 모습이었다가, 카르나는 갑주가 추가되며 창도 이문대에서의 모습처럼 화려해지는 모습이고, 아르주나는 2재림에선 이문대의 아르주나의 인격이, 3재림부터는 둘이 섞였던 이문대에서의 인격이 나왔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오면 재밌겠네요... 최종재림 일러는 역시 카르나는 머리 위로 해가 뜬 모습이, 주나는 달이 뜬 모습이겠지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각잡고 그려보고도 싶네요O)-)

 

칼데아 내에서의 관계는 둘 다 생각보다 좋은 편입니다! 이문대의 주나가 르나를 형제 중 하나로 받아들였던 만큼, 칼데아에서의 만남을 긍정적으로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원래 칼준은 그거보면서 경악하고ㅋㅋ

 

칼데아 이야기까지 한다면 풀고싶었던게 이문대의 르나를 형님이라고 불러보는 이문대의 주나와 그거보면서 그그걸진짜로부르다니<하는 주나였습니다 언젠가 뭐... 또 꽂히면 풀지 않을까요?

 

아! 신준이랑 신살자 르나는 서로 극악의 상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통합신성과 신살자의 만남이라니 이거 진짜 가슴이 웅장해지는 전투가 일어날게 틀림없다.

한쪽은 대사악 돌아가고 한쪽은 대신특공같은거 돌아가지않을까 싶습니다

 

신살자 르나의 보구는 백야의 창-아르주나 아크타- 같은 걸로 짰었는데, 정작 본편에서 사용하진 않았네요O(-( 아르주나는 기본이 주나인 건 마찬가지라 파슈파타 그대로 쏠 예정이었습니다 칼데아 소환시에는 다른 보구 쓰겠지만요!

칼데아 뒷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지금 후기도 생각보다 길어져서 엇.하고있는 중이에요ㅋㅋㅋㅠㅠㅠㅠ

워낙 주절주절 이야기하는걸 좋아해서 이젠 그러려니 하려구요

 

그거 아시나요? 전 원래 24페이지의 가벼운 썰북이 목표였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89페이지 46600자 썰북이 나왔네요

이젠 인정하고 하고싶은대로 신나게 필버하며 살아볼까 싶습니다

 

 

아무튼! 즐겁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다른 이야기로 뵐게요!

 

 

 

 

202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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