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베디 《에우리디케》

포스타입에 업로드했던 《결말》 퇴고본 | 약 수위 묘사

Mur by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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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다정은 어찌나 매정한지.

"제가 받아줄 수 있는 건…."

근사한 아침이었다. 날씨 때문은 아니었다. 오늘도 천문대를 휘모는 눈발 탓에 가늘게 뜬 시야에 들어오는 빛은 어김없이 흐렸으니까. 그런데도 새삼스러운 감상에 젖을 이유가 있다면, 제 옆에 온기를 두고 간 사람 덕분일 터.

베디비어는 일찌감치 먼저 일어나 거울 앞에서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하고 있었다. 트리스탄은 침대에 모로 누운 채 턱을 괴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엷은 빛이 부딪혀 깨어지며 서늘하게 빛나는 나신과 흐르는 머리칼은 그럴 리가 없음에도 눈이 부셨고, 그 백색들 사이 유독 발갛게 보이는 정사의 흔적은 퍽 보기에 좋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목에 차오른 숨을 옅게 뱉어냈다. 처음 맞닥뜨리는 모습도 아니지만, 사랑을 고백하고 긴 밤을 이어 함께 맞는 아침이란 새삼스레 가슴을 벅차게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법인데─

"…여기까지군요."

그가 고했다. 여느 때와 같이 건조한 온기가 한 겹 내려앉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울 너머로 설익은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잔혹한 조처는 이쪽을 위한 걸까, 그 자신을 위한 걸까. 트리스탄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습니까."

하지만─트리스탄은 스스로도 감탄스러울 만큼 여상한 자세로 일방적인 통보를 받아들였다. 이럴 거면 내가 심장을 꺼내놓았을 때 왜 그리도 달콤한 미소를 내어줬냐며 기꺼이 꺼낼 수 있을 법한 원망은 기색조차 비지 않았다. 그건 그가 아픔을 삼키는 데에 능할 만큼 성숙한 사람이어서도, 아픔 없는 한 철의 감정만을 즐기는 철없는 사람이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그에겐 착한 아이 시늉을 할 책임이 있었을 뿐이었다.

비난의 화살은 실상 자신에게 돌아와야 했으니까.

다디단 설탕 껍질 안에 씁쓸한 꽃잎이 있을 줄을 뻔히 알고도 그저 향기롭고 어여쁘다며 집어 먹은 건 누구도 아닌 저 자신이었다. 마지못해 내어준 그 미소에 눈이 팔려서, 가당찮은 욕심이 나서 정작 짙게 묻어나는 그의 곤란에는 눈을 감은 남자의 응당한 처결. 원망 따위를 한들 의미가 있겠는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말은 정해져 있는데. 그는 이미 베디비어가 제게 돌려줄 말을 알고 있었다.

성을 잃은 집사, 모든 것을 등지고 홀로 오랜 세월을 떠돌았던 방랑자, 천신만고 끝에 기적처럼 발견한 과자집이 부서질까 부스러기 하나 놓치지 않으려 노심초사하는 겁쟁이. 그러나, 사랑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마음이 낡아 닳아빠진 노인. 얼핏 멸망처럼 보일 만큼 아주 느리게 호흡하는 저 차분하고 평온하고 희게 바랜 세계는 어떠한 변화도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은 못 들은 척 승낙도 거절도 하지 않겠으며, 다만 누구보다 소중하고 더없이 아끼는 당신이 무엇을 하든 수용하리라─고.

사랑하면 사랑이 돌아온다. 그리 약속된 관계에서 평생 용기가 필요하지 않은 사랑, 당연히 보답받는 사랑만을 일삼던 남자로서는 생경한 숨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아니다. 시작은, 이미, 오래전부터이던가?

* * *

손가락이 단정하게 땋아 내린 머리칼을 천천히 헤쳤다. 일종의 신호였다. 베디비어의 옅은 금발이 하얀 목덜미와 어깨 위로 쏟아지자 트리스탄은 그 머리 타래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전날 스스로 시중을 자처해 정성스레 감기고 손질한 머릿결은 유난스레 고왔다.

"본인 솜씨가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예. 경의 머리칼은 본 바탕이 좋으니 조금만 기교를 부려도 퍽 고와질 것 같아서, 늘 벼르고 있었거든요."

생각대로 공들인 보람이 있습니다. 뭐, 미용사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재주이겠습니다만……. 속삭이던 트리스탄은 명료한 마침표 대신으로 머리카락을 한 줌 쥐고 입 맞췄다. 낭만적인 의미를 두지 않은 행위였다. 따라서 미련도 없었다. 그대로 손가락 사이를 흘러내리도록 두며 어둑한 조명 아래서도 기어이 빛을 끌어당기는 모습을 금속 같은 시선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이 관조는 트리스탄에게, 그리고 그 대상에게 역시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매 순간 마지막에는 이런 감상을 떠올리는 것도.

……역시, 좀 더 짙은 빛깔이 아니었던가?

기억보다 더 옅고 퇴색하여 은발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듯한 머리칼은, 베디비어를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트리스탄에게 사뭇 낯선 것이었기에.

"저는 당신이 아는 베디비어가 아닙니다."

트리스탄이 느끼는 바에 답을 주듯이, 옷을 벗어 개던 베디비어가 평온하게 말했다. 동요 한 점 없는 그 말은 재회한 후로 생긴 그의 입버릇이기도 했다. 깜빡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상기시키듯이. 혹은, 자기 스스로 선을 되새기듯이.

트리스탄도 알고는 있었다. 그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종내엔 깨달았을 터였다. 아가트람 같은 낯선 보구는 지나치게 노골적이라 논할 필요조차 없다. 사실은 이미 제하고도 넘쳤다. 이곳에 존재하는 베디비어를 이루는 모든 것이 자신이 알던 베디비어와는 한 박자씩 어긋난 위화감을 가졌으니까. 어깻죽지에 남은 화상, 서로 다르게 이야기하는 추억, 제 입으로 새로운 것을 익히기는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칼데아에 비치된 몇몇 현대 기기를 익숙하게 다루는 모습. 그리고 이렇게─감정 없이 감각만을 위해 몸을 섞는 행위에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태도까지.

그는 바로 대꾸하는 대신 베디비어를 침대 위로 부드럽게 넘어뜨렸다. 베디비어의 하얀 머리카락이 가볍게 나부끼고 속눈썹이 팔랑이며 오르내리는 사이, 트리스탄의 손끝이 그의 가슴팍에 있는 가늘고 긴 자국을 짚었다. 비슷한 것들이 온몸에 여럿이나 새겨진 이 흉터 역시 그의 기억에는 없는 것이었다. 아문 지 얼마 안 되어 인간으로서의 베디비어의 삶이 끝난 듯 흉터는 아직 희미하게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지간히 깊은 상처였을 터.

어쩌다 생긴 상처냐고 본인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캄란의 전투에서 눈먼 칼이라도 스쳤던 모양이지요, 베디비어는 답이 되지 못할 모호한 말만을 했다. 이미 보편적인 그의 결말을 알고 있었던 트리스탄은 이후로 더는 같은 질문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시감을 느꼈다면, 그건 제 과민일까?

없는 기억이라도 되살리려는 것처럼 그는 살결의 패인 부분만을 이어 붙이듯이 천천히 덧그렸다. 애무와 다를 바 없는 손길이었다. 어느 정도 의도한 바도 있었기에 베디비어의 하얀 미간에는 얕은 주름이 파였고, 이내 깊어졌다. 다리 사이에 단단히 갇힌 허리가 당장의 낯선 자극을 거부하듯 뒤척였다. 트리스탄은 그의 머리칼을 넘기고 찡그린 이마에 입을 맞추어 자그만 앙탈을 살살 달랬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귀공께선 제 사랑하는 벗인 양 장단을 맞춰주고 계시지요."

"그건……."

"괜찮습니다. 분명히, 경과 저는 서로의 어떤 부분을 필요로 하니까요……. 경께서는 그저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생각을 멈추고……."

"트리, 스탄. ……."

말마디 하나에 잘은 입맞춤이 베디비어의 목선에 내려앉았다. 거칠다는 표현으로 모자랄 만큼 딱딱한 손끝이 유독 낭창한 허리선을 천천히 쓸어내리다 엉덩이 위 움푹하게 패인 자리에 닿았다. 거스러미가 예민한 살갗을 긁어내리는 감각에 베디비어는 탄식을 흘리며 트리스탄의 등에 매달렸다.

"……그저 단맛만을 취하시면 된답니다."

이변이라면, 그의 위화감이 뜻밖에도 트리스탄의 취향에 들어맞았다는 점이었다.

베디비어에게 깊게 새겨진 무언가가 남긴 흔적─동요 없는 다정 안에 박인 초연, 온화한 낯에 이따금 스치는 마른 냉소, 단아한 말씨에 심드렁하게 돋친 가시,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면 어떻게 혼자 있는 '사람'의 흉내를 내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무기질적인 얼굴 따위. 겉과 속이 하나 다를 것 없던 베디비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들은 트리스탄의 눈길을 지독하게도 붙잡아두었다. 이전에는 자각하지도 못했던 취향이었다. 과거의 자신은 막 성애를 깨달을 즈음에 한 여자와 사랑의 묘약을 나눠 마시고 그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으니까. 취향을 고찰하거나 다른 사랑을 겪을 여유는커녕, 이유조차 없었다.

"……트리스탄 경."

상념에 빠진 사이 너무 애를 태웠던지, 부르는 이름에는 가벼운 질책이 담겨있었다. 트리스탄은 손아귀에 쥐었던 머리카락과 함께 달큼하고 달갑잖은 옛 기억을 흘려보내고 열에 들떠 반짝이는 녹안을 향해 흐드러지듯 웃어주었다. 제 등을 끌어안은 팔에 보채듯이 힘이 들어갔다. 그에 응해 트리스탄은 그의 턱을 제게로 끌어당겼다.

"아─." 귓가에 긴 탄식이 퍼지다 입술에 가로막혔다. 다소 급히 섞은 혀가 열을 주는 감각을 찾아 입안을 헤매고, 파헤쳤다. 트리스탄은 그대로 베디비어의 숨이 모자랄 만큼 제 격정을 몰아붙였다.

그래, 감각만을 위한 행위다. 사랑이 아니다. 단지 그가 자신의 취향에 들어맞아서 눈이 돌고 입맛이 당길 뿐. 그는 입술이 떨어지자 달뜬 소리를 뱉는 베디비어의 입술을 맛보듯이 핥다 이내 약탈처럼 그의 숨을 먹어 치우며 다시 한번 되뇌었다. 사랑은 아니어야 했다. 본능적으로 그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나 단내에 절은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베디비어지만, 이게 만약 그 혼자만의 사랑이라면, 그렇다면…….

입에 올리지는 않지만. 결코 넘을 수 없는 선, 아니, 벽이 있다.

혼자 힘으로 부수기엔 역부족이었다. 다름 아니라 그 너머의 사람을 잃지 않으려 세운 벽이기 때문에. 베디비어의 '트리스탄'이 베디비어에게 너무나 소중한 벗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아닌 그가 트리스탄에게 억지로 '트리스탄'을 위한 호의를 떠안기고 있었기, 때문에.

퍽 부당한 처사 아닌가. 나를 진짜 벗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트리스탄은 심술궂게 목덜미의 연한 살에 이를 박으며 생각했다. 목 안에서 울리는 신음과 파드득 떨리는 흰 어깨조차 만족을 주지 못했다. 갈증이 끓었다. 이따금 그는 저도 모를 이유로 베디비어가 자신을 잊게 만들고 싶었다. 차라리,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사람이고 싶었다.

그날의 정사는 유독 길었다.

당연한 무감정을 증거하는, 있을 리 없는 무엇을 찾으려 애쓴 탓인지. 시간이 흐른 후에도 머리는 여전히 복잡했다.

언제나처럼 흐린 빛이 유리창으로 스며들어 남자의 위로 흘러내렸다. 눈을 단정히 내리감아 기다란 속눈썹이 펼쳐진 얼굴은 엷은 음영에 반만 젖어 더욱 조각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트리스탄은 생각에 잠기면 으레 하는 습관으로 창가에 앉은 채 제 수금을 쥐었다. 딱히 정해진 곡조 없이, 연주보다는 조음에 가깝도록. 능란한 음악가의 악기는 그런데도 제법 그럴싸한 소리를 내며 조용히 울음 지었다.

호흡 같은 단련은 제 몸에 맡겨둔 채로 그는 머리로 지난밤을 떠올렸다. 망막에 새겨둔 잔상은 눈꺼풀을 닫아도 선명했다. 어두운 조명에도 여지없이 드러났던 가늘고 긴 자국. 아문 지 얼마 안 되어 인간으로서 베디비어의 삶이 끝난 듯, 아직 붉은빛을 띠었던.

왜 그런 행위를 했을까. 그날 트리스탄의 손끝은 자신조차 설명하지 못할 본능으로 그 가늘고 긴 자국을 짚었다. 흉터의 모양을 더듬어 확인하고, 손마디로 길이와 깊이를 쟀다. ─아.

기괴한 악음이 복도를 울렸다. 아름다운 손가락 위로 핏방울이 흘렀다.

반드러운 빛과 함께 드러난 시선은 그러나 제 피 흘리는 손가락 대신 조금 전까지 연주하던 수금─활로 옮겨갔다. 그는 한참 동안, 믿을 수 없다는 듯, 날카로운 성질을 고요하게 갈무리하고 있는 제 무기를 내려다보았다. 기시감을 느꼈다면, 그건 제 과민일까?

"……페일노트?"

기어코,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모든 것을 온전히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언젠가의 모래성 같았던 성도에서 있었던 일을 제게 스며든 흐린 빛 정도로는 알았다. 칼데아에 소환된 이후 반전된 자신을 체감한 적도 분명히 있었다. 캄란의 전투? 눈먼 칼? 모두 웃기는 소리였다. 설사 눈이 멀었다고 해도 그의 요현은 가로막힐지언정 표적을 착각하는 법은 없었다. 그러니까, 트리스탄은 이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동시에 원망도 떠올랐다. 당신은 나의 '베디비어'가 아니라고 했잖아. 그랬으면서.

차라리 다정하지나 말지.

더욱 환멸스러운 것은 다음으로 그렇다면, 베디비어의 흉터가 그 '트리스탄'에게서 비롯되지 않았다면 적어도 그 흉터만큼의 베디비어는 오직 나만의 것으로 생각해도 되는 걸까, 하는 역겨운 상념 따위를 기어코 떠올리고만 저 자신이었다. 기어코─그래.

'기어코'라든지, '결국' 같은 수식어로 꾸며야 할 감정이었기에 부정했다. 시선을 못 박아 바치면서도 사랑은 아니라고 믿었다. 빌었다. 겁에 질려 덜덜 떠는 꼴사나운 손으로 있을 리 없는 무감정의 증거를 찾으려 그리도 애를 썼다. 그러나, 결국, 기어코, 그렇게나 간절히 바랐건만 영민하고도 어리석은 남자는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처음부터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해를 등지고 도망친다고 떨쳐지는 그림자를 보았는가.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생각을 멈춘 자는 누구였을까. 숨이 조여왔다. 저 스스로 채운 목줄은 자유의 교만이고 구속이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경이가 있었다. 헤어날 수 없는 저주를 알면서도 영원토록 찬미할 그 순간처럼. 명부 저편으로 떨어지는 실낱같은 삶의 빛처럼.

트리스탄은 사랑에 빠졌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절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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